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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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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 철종은 1085년 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황제이다. 선인태후의 수렴청정 아래 구법파와 신법파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친정 이후에는 신법 부활을 추진했다. 철종은 서하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영토를 확장했지만,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치세는 신법과 구법의 갈등이 심화된 시기로, 사마광, 소식 등 명망 있는 인물들이 배출되었으나, 송나라의 국력 약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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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철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걸이 그림 두루마리|걸이 그림 두루마리]]에 있는 궁궐 초상화,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걸이 그림 두루마리에 있는 궁궐 초상화,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조후(趙煦)
다른 이름조용(趙傭)
묘호철종(哲宗)
시호헌원계도세덕양공흠문예무제성소효황제(憲元繼道世德揚功欽文睿武齊聖昭孝皇帝) (1113년에 추존)
생년월일1077년 1월 4일
사망일1100년 2월 23일
매장지옹태릉 (永泰陵, 현재 궁이시, 허난성)
서명image_file: 宋哲宗御押.svg
통치
재위 기간1085년 4월 1일 ~ 1100년 2월 23일
연호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소성(紹聖): 1094년 ~ 1098년
원부(元符): 1098년 ~ 1100년
가계
아버지신종
어머니흠성황후
배우자소자성헌황후 (1088년 결혼, 1096년 폐위)
소회황후 (1100년)
자녀공주 숙화
공주 숙신
왕조
왕가
왕조송나라 (북송)

2. 생애

1085년 아버지 신종이 붕어하자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철종의 재위 기간 15년은 선인태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진 전기와 철종이 친정을 한 후기로 나뉘며, 이 시기 내내 신법·구법의 다툼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재위 전반기인 원우(元祐) 연간(1086년~1093년)은 선인태후의 영향 아래 구법파가 득세한 시기였다. 신법을 반대했던 선인태후는 구법파의 거두 사마광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하고 구법으로 되돌리는 정책, 즉 원우개혁을 추진했다.[5] 그러나 이는 이미 자리를 잡아가던 신법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현실과 동떨어진 구법으로 회귀하려 했기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마광 사후에는 구법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정국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1093년 선인태후가 사망하자 철종은 친정을 시작하고 연호를 소성(紹聖)으로 바꾸었다. 이는 아버지 신종의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철종은 신법을 부활시키고 신법파 관료인 장돈과 증포 등을 중용하여 개혁을 다시 추진했다.[6] 이 과정에서 구법파 관료들은 대거 숙청되었고, 신법파와 구법파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장돈은 정무 능력은 뛰어났으나, 반대파인 구법파를 강압적으로 배제하고 일부 문제점이 지적되었던 신법을 재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루고 국고가 충실해지는 성과도 있었다.

1100년 철종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25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였고, 동생인 휘종이 뒤를 이었다.

철종 시대는 송나라 역사상 당쟁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사마광이나 소식과 같이 후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철종 시대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구법파가 집권한 원우 연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근대 이후 왕안석의 개혁이 재조명되면서 신법을 추진한 소성 연간을 개혁의 시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2. 1. 즉위 초: 선인태후의 수렴청정과 원우개혁

1085년 신종이 붕어하고 어린 철종이 즉위하자,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본래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했던 선인태후는 보수적인 구법파의 대표 인물인 사마광을 재상으로 등용했다.[5] 이로써 신종 대에 추진되었던 개혁 정책은 중단되고 구법으로 회귀하는, 이른바 원우개혁이 시작되었다. '원우'는 당시 연호이다.

사마광은 재상이 되자 모역법을 폐지하고 차역법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이는 이미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정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무리하게 5일 안에 개혁을 실행하도록 명령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에 많은 지방관들이 반발하며 기한을 지키기 어려워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봉부윤이었던 채경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한 내에 법령 개폐를 완료하여 사마광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채경은 신종 대에는 신법을 지지하다가 구법파가 득세하자 입장을 바꾼 인물로,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유안세(劉安世), 왕암수(王巌叟) 등 강직한 구법파 관료들에게조차 심한 비판을 받아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원우개혁은 이미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신법의 장점이나 당시의 실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과거의 제도로 돌아가려 했으며, 복귀하려던 구법 또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1086년 사마광마저 사망하자 구법파 내부에서도 후계 자리를 둘러싼 분열과 상호 비방이 끊이지 않아 정국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신법파와 구법파 간의 당쟁은 격화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송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093년 선인태후가 병사하면서 8년간의 수렴청정은 막을 내리고 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선인태후의 수렴청정 시기인 원우 연간은 전통적인 유학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좋은 풍습을 되찾은 '군자의 시대'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왕안석의 개혁이 재평가되면서, 원우개혁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보수 반동적인 정치였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사마광이나 소식과 같이 후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활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2. 친정과 소성유신

1093년 선인태후가 병사하면서 8년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철종은 연호를 소성(紹聖)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아버지 신종의 개혁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6] 철종은 즉시 신법을 부활시키고, 신법파의 핵심 인물인 장돈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증포 등 다른 신법파 관료들도 대거 등용되었다. 장돈과 증포는 신법을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삼을 정도로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친정 시작과 함께 철종과 장돈은 구법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많은 구법파 관료들이 중앙 정계에서 추방되었고, 일부는 영남과 같은 먼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특히 구법파 핵심 인사 37명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본인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책과 인사를 둘러싼 논쟁은 극심해졌고, 관료 사회는 신법파와 구법파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양극화되었다.

장돈은 정무 능력은 뛰어났으나, 구법파를 철저히 배제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강권적인 정치를 펼쳤다. 또한 이미 신종 시대에 문제점이 드러났던 신법을 재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돈의 정책 하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국고가 충실해지는 성과도 있었다.

1100년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2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붕어하면서, 약 7년간 이어진 소성 시대의 신법 추진과 장돈의 집권은 막을 내렸다. 철종의 뒤를 이어 동생인 휘종이 황제로 즉위했다.

2. 3. 대외 관계

철종은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기존 협상을 중단하고 무력 충돌을 재개하였다. 이러한 강경책은 결과적으로 서하가 송나라에 대해 이전보다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서하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된 기간 동안, 송나라는 국경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방비를 강화하며 서하로부터 점진적으로 영토를 빼앗아 나갔다. 이러한 성공적인 전략을 통해 송나라의 영토는 역사상 가장 넓은 범위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2. 4. 죽음

1099년 5월 18일, 철종은 지속적인 기침변비 증세를 보이며 병을 앓기 시작했다.[1] 여러 약을 복용했음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측근들에게 의사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1] 의사 경유(耿柔)가 철종을 진료하고 처방을 내렸으나, 건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1]

7월에는 변비가 심한 설사로 바뀌었고, 철종은 약을 받기 위해 침상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들어졌다.[1] 의사 경유는 비장을 따뜻하게 하는 약을 권했고, 철종의 어머니도 이를 지지했다.[1]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철종의 건강이 잠시 호전되어, 8월 8일에는 아들 조모(趙茂)의 탄생 축하 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1] 그러나 곧 병이 재발하여 이틀 동안 조회를 열지 못했다.[1] 8월 14일, 철종은 측근들에게 의사 경유가 구토를 유발하는 약을 처방했다고 말하며, 약간의 호전은 있었지만 식욕을 잃고 배가 계속 아프다고 토로했다.[1] 이후 아들을 기리는 연회에 참석하여 좋은 기분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 자리에는 동생인 조지(趙佶, 훗날 휘종)도 함께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조모가 병에 걸렸고, 이로 인해 상심한 철종은 어의들이 조모를 치료하고 있다고 측근들에게 말했다.[1] 9월 26일, 조모는 잠시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철종은 큰 슬픔에 빠져 사흘 동안 조회를 취소했다.[1] 자신의 생일 축하 행사 이후에는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하루 종일 구토를 했고, 결국 축하 행사는 중단되었다.[1] 또한 후두염까지 앓게 되어 말을 하는 것조차 매우 힘겨워했다.[1] 12월 21일에는 죽음이 임박하여 맥박이 매우 약해졌다.[1]

결국 철종은 1100년 2월 23일, 수도 개봉에서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동생인 휘종이 황위를 계승했다. 휘종의 어머니인 향 황후는 이후 궁정에서 보수적인 움직임을 이끌었다.

3. 철종 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당쟁

1085년 신종이 붕어하고 어린 철종이 즉위하자, 할머니인 선인성렬황후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선인태후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구법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사마광을 재상으로 등용했다.[5] 사마광은 재상이 되자 왕안석이 추진했던 신법을 중단시키고, 모역법을 폐지하며 차역법을 부활시키는 등 구법으로의 회귀를 시도했다. 이를 원우개혁(원우는 당시 연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마광이 추진한 정책, 특히 5일 안에 차역법을 부활시키라는 명령은 이미 변한 현실과 맞지 않아 실현하기 어려웠고, 많은 지방관의 반발을 사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채경은 개봉부에서 기일 안에 법령 개폐를 완료하여 사마광을 기쁘게 했으나, 과거 신종 시대에는 신법을 지지했다가 구법파가 득세하자 입장을 바꾼 그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구법파 내에서도 비판을 받아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사마광 역시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구법파 내부에서는 후계자들 간의 상호 비방과 견제가 끊이지 않았다. 신법파와 구법파 사이의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송나라의 국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093년 선인태후가 사망하면서 8년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철종은 아버지 신종의 정책을 계승하고자 연호를 소성(紹聖, '현명함을 계승한다'는 의미)으로 바꾸고 신법을 다시 부활시켰다.[6] 그는 신법파 관료인 장돈과 증포 등을 중용했으며, 특히 장돈을 재상으로 삼아 정치를 이끌게 했다.

장돈은 강력한 신법 추진론자로, 구법파 관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신법을 다시 시행했다. 그는 구법파 인사 37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직에서 배제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등 강압적인 정치를 펼쳤다. 이로 인해 조정 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루어 국고가 충실해지는 성과도 있었다.

철종 시대는 이처럼 선인태후의 수렴청정기(구법파 시대)와 철종의 친정기(신법파 시대)로 나뉘며, 송나라 역사상 당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잦은 정책 변경과 극심한 파벌 싸움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컸으나, 사마광, 소식과 같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철종 시대에 대한 평가는 시대나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구법파의 원우 연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근대 이후 왕안석의 개혁이 재평가되면서 철종 친정 이후 신법을 추진한 소성 연간을 개혁의 시대로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1100년 철종은 후사를 이을 아들 없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했고, 동생인 휘종이 황위를 계승했다.

4. 철종 시대의 평가

철종의 재위 기간은 크게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가 수렴청정을 한 전기와 철종이 직접 통치한 후기로 나눌 수 있으며, 이 시기 내내 신법·구법의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재위 전반기는 선인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구법파가 정권을 잡은 시기로, 소위 '원우개혁'(원우는 당시 연호)이라 불린다. 이때는 아버지 신종 때부터 20여 년간 시행된 신법을 모두 폐지하고 이전 정책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정책 전환은 이미 정착 단계에 있던 신법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고, 복귀한 구법 역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 구법파를 이끌던 사마광이 사망한 후에는 후계자들이 서로를 비방하고 공격하며 다투어 정권 내부는 계속 불안정했다.

1093년 선인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 철종은 아버지 신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구법파를 몰아내고 다시 신법을 채택했으며, 신종 때 부재상을 지낸 장돈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장돈은 정무에 능한 신법파 관료였으나, 이미 모순이 드러난 신종 시대의 신법을 그대로 다시 시행하면서 사회적 혼란을 다시 초래했다. 게다가 반대파인 구법파 관료들에 대한 강경한 숙청을 단행하여 조정 내 불안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장돈의 강권 정치는 1100년 철종이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약 8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신종의 황후였던 향태후가 잠시 신법과 구법을 절충하는 정치를 펼치다가, 휘종 시대 채경의 장기 집권으로 이어졌다.

철종 시대는 송나라 역사상 당파 싸움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정치적 성과는 신종 시대에 미치지 못했고, 문화적으로도 이후 휘종 시대만큼 발전하지는 못했다. 다만, 장돈이 정책을 추진한 후반기에는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고 나라 살림도 넉넉해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사마광이나 소식처럼 후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다수 활동했다.

철종 시대에 대한 평가는 시대나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과거 유학 사상이 중요시되던 때에는 원우 연간(구법파 집권기)을 조종(祖宗)의 이상적인 정치를 회복한 시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반대로 철종 친정 이후 장돈이 등용된 시기('소성(紹聖)의 소술'로 불리는 신법파 집권기)는 소인들이 득세하여 사회를 어지럽힌 시대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근대 이후 왕안석의 개혁이 재조명되면서, 신법파 집권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구법파는 수구 세력으로 간주되어 원우 연간은 반동적인 시대였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한편, 소성 연간은 신법을 다시 추진한 개혁의 시대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철종 시대는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크게 달라질 수 있으므로,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5. 가족 관계

정후(正后)인 소자성헌황후 맹씨( 昭慈皇后 孟氏zho )와 계후(繼后)인 소회황후 유씨( 昭懷皇后 劉氏zho )를 두었다.[7][9] 맹씨는 원우황후로 책봉되었으나 예정의 옥으로 폐위되었다가 정강의 변 때 복위되었다.[8]

맹씨와의 사이에서는 딸 순미제희( 洵美帝姬zho; 1094년 ~ 1096년)를 두었으나 2세에 요절하였다.[2] 유씨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헌민황태자 조모( 獻愍皇太子 趙茂zho; 1099년)와 딸 숙신제희( 淑慎帝姬zho; 1096년 ~ 1164년), 순미제희( 純美帝姬zho; 1097년 ~ 1099년)를 두었다. 이 중 황태자 조모는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순미제희는 2세에 요절하였고, 숙신제희만이 성년까지 생존하여 반정부(潘正夫zho)에게 시집가서 아들 셋을 낳았다.[2][3]

그 외에도 첩여 장씨(张氏), 첩여 호씨(胡氏), 미인 한씨(韓氏), 미인 모용씨(慕容氏), 미인 위씨(魏氏), 미인 고씨(高氏), 재인 유씨(劉氏) 등 여러 후궁을 두었다.[4]

또한, 생모가 확실하지 않은 딸로 숙화제희( 淑和帝姬zho; ? ~ 1117년)가 있으며, 그녀는 석단례(石端禮zho)에게 시집갔다.

5. 1. 조부모와 부모


  • '''조부''' : 영종 선효황제( 英宗 宣孝皇帝|영종 선효황제중국어 ) 조서( 趙曙|조서중국어 )
  • '''조모''' : 선인성렬황후 고씨( 高氏|고씨중국어 )
  • '''부친''' : 신종 성효황제( 神宗 聖孝皇帝|신종 성효황제중국어 ) 조욱( 趙頊|조욱중국어 )
  • '''모친''' : 흠성황후( 欽成皇后|흠성황후중국어 ) 주씨( 朱氏|주씨중국어 )

5. 2. 황후

구분시호성씨재위 기간생몰년도비고
정후(원후)소자성헌황후맹씨(孟氏)[7]1092년 ~ 1096년1073년 ~ 1131년원우황후. 예정의 옥으로 폐위되었다가 정강의 변 때 복위.[8] 아버지는 안무군절도사(安武軍節度使) 맹재(孟在), 어머니는 경국태부인(慶國太夫人) 왕씨(王氏).
계후소회황후유청청(劉淸菁)[9]1099년 ~ 1100년1079년 ~ 1113년아버지는 유안성(劉安成), 어머니는 강국태부인(康國太夫人) 왕씨(王氏).


  • 소자성헌황후 맹씨 昭慈皇后 孟氏중국어
  • 장녀: 순미제희(洵美帝姬중국어) 복경공주[2] (1094년 ~ 1096년) - 2세에 요절.
  • 소회황후 유씨 昭懷皇后 劉氏중국어 (이름: 청청 清菁중국어)
  • 장남: 헌민황태자 조모(獻愍皇太子 趙茂) 獻愍皇太子 趙茂중국어 (1099년) -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요절. 시호와 작위 추증됨.
  • 삼녀: 숙신제희(淑慎帝姬중국어) 진국장공주 (1096년 ~ 1164년) - 1112년 반정부(潘正夫중국어, ? ~ 1153년)에게 하가하여 아들 셋을 낳음.
  • 사녀: 순미제희(純美帝姬중국어) 의녕공주[2][3] (1097년 ~ 1099년) - 2세에 요절.
  • 기타 후궁[4]
  • 첩여(婕妤): 장씨(張氏), 호씨(胡氏)
  • 미인(美人): 한씨(韓氏), 모용씨(慕容氏), 위씨(魏氏), 고씨(高氏)
  • 재인(才人): 유씨(劉氏)
  • 생모 불명
  • 차녀: 숙화제희(淑和帝姬중국어) 진국장공주 (? ~ 1117년) - 1110년 석단례(石端禮중국어)에게 하가.

5. 3. 후궁

봉호사후 봉호성씨별칭생몰년도비고
현비(모용씨)귀비慕容氏|모용씨zho1073년 ~ 1152년[10]
수용(위씨)완의魏氏|위씨zho안정군군(安定郡君|안정군군zho)? ~ 1143년[11]
첩여(장씨)張氏|장씨zho문안군군(文安郡君|문안군군zho)
미인(호씨)첩여胡氏|호씨zho? ~ 1110년
미인(한씨)韓氏|한씨zho인수군군(仁壽郡君|인수군군zho)
재인(고씨)미인高氏|고씨zho신안군군(信安郡君|신안군군zho)? ~ 1112년
재인(유씨)劉氏|유씨zho진안군군(晋安郡君|진안군군zho)[4]



'''황후 및 자녀'''


  • 소자황후 맹씨( 昭慈皇后 孟氏|소자황후 맹씨zho, 1073년 ~ 1131년): 원우황후. 예정의 옥으로 폐위되었다가 정강의 변 때 복위됨.
  • * 장녀: 순미제희 복경공주(洵美帝姬 福慶公主|순미제희 복경공주zho, 1094년 ~ 1096년)[2]: 2세에 요절.
  • 소회황후 유씨( 昭懷皇后 劉氏|소회황후 유씨zho, 1078년 ~ 1113년): 이름은 청정(清菁|청정zho).
  • * 장남: 헌민황태자 조모( 獻愍皇太子 趙茂|헌민황태자 조모zho, 1099년): 생후 2개월 만에 요절. 시호와 작위를 추증받음.
  • * 삼녀: 숙신제희 진국장공주(淑慎帝姬 鎭國長公主|숙신제희 진국장공주zho, 1096년 ~ 1164년): 반정부(潘正夫|반정부zho, ? ~ 1153년)에게 하가하여 3남을 낳음.
  • * 사녀: 순미제희 의녕공주(純美帝姬 懿寧公主|순미제희 의녕공주zho, 1097년 ~ 1099년)[2][3]: 2세에 요절.


'''생모 불명'''

  • 차녀: 숙화제희 진국장공주(淑和帝姬 鎭國長公主|숙화제희 진국장공주zho, ? ~ 1117년): 석단례(石端禮|석단례zho)에게 하가.

5. 4.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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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장남월왕(越王)헌민태자(獻愍太子)조무(趙茂)1099년소회황후 유씨월충헌왕(越冲獻王)태어난 지 2개월 만에 요절하였으며, 사후 시호와 작위가 추증됨.[2][3]


5. 5. 황녀

순서봉호
(공주)
봉호
(제희)
시호생몰년도생모부마비고
1등국공주
(鄧國公主zho)
순미제희
(洵美帝姬zho)
1094년 ~ 1096년소자성헌황후 맹씨복경공주(福慶公主)라고도 함.[2] 2세에 요절.[12]
2진국장공주
(陳國長公主zho)
숙화제희
(淑和帝姬zho)
정의
(靖懿zho)
? ~ 1117년불명좌위장군(左衛將軍)
石端禮|석단례zho
(1110년 혼인)
[13]
3진국대장공주
(秦國大長公主zho)
숙신제희
(淑愼帝姬zho)
강의
(康懿zho)
1096년 ~ 1164년소회황후 유씨화국공(和國公)
潘正夫|반정부zho
(1112년 혼인)
슬하 3남.[14][15]
4양국공주
(揚國公主zho)
순미제희
(純美帝姬zho)
1097년 ~ 1099년소회황후 유씨의녕공주(宜寧公主)라고도 함.[2][3] 2세에 요절.[16]


6. 재상

순서이름재임기간칭호자(字)봉호시호
1왕규
(王珪)
1085년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우옥
(禹玉)
기국공
(岐國公)
문공
(文恭)
2채확
(蔡確)
1085년 ~ 1086년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지정
(持正)
-충회
(忠懷)
3한진
(韓縝)
1085년 ~ 1086년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옥여
(玉汝)
-장민
(莊敏)
4사마광
(司馬光)
1086년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군실
(君實)
온국공
(溫國公)
문정
(文正)
5여공저
(呂公著)
1086년 ~ 1089년상서좌승(尚書左丞)
문하시랑(門下侍郎)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
회숙
(晦叔)
신국공
(申國公)
정헌
(正獻)
6문언박
(文彦博)
1086년 ~ 1090년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관부
(寬夫)
노국공
(潞國公)
충렬
(忠烈)
7여대방
(呂大防)
1088년 ~ 1094년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미중
(微仲)
선국공
(宣國公)
정민
(正愍)
8범순인
(范純仁)
1088년 ~ 1089년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요부
(堯夫)
-충선
(忠宣)
9유지
(劉摯)
1091년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신로
(莘老)
-충숙
(忠肅)
10소송
(蘇頌)
1092년 ~ 1093년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자용
(子容)
위국공
(魏國公)
정간
(正簡)
11범순인
(范純仁)
1093년 ~ 1094년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요부
(堯夫)
-충선
(忠宣)
12장돈
(章惇)
1094년 ~ 1100년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자후
(子厚)
신국공
(申國公)
충민
(忠敏)


  • 한진은 한강의 동생이다.
  • 여대방은 여대림의 형이다.
  • 범순인은 범중엄의 아들이다.

7. 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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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서력
(西曆)
1086년1087년1088년1089년1090년1091년1092년1093년1094년1095년
간지
(干支)
병인(丙寅)정묘(丁卯)무진(戊辰)기사(己巳)경오(庚午)신미(辛未)임신(壬申)계유(癸酉)갑술(甲戌)을해(乙亥)
연호
(年號)
원우(元祐)
원년
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
소성(紹聖)
원년
2년
철종11년12년13년14년15년
서력
(西曆)
1096년1097년1098년1099년1100년
간지
(干支)
병자(丙子)정축(丁丑)무인(戊寅)기묘(己卯)경진(庚辰)
연호
(年號)
3년4년5년
원부(元符)
원년
2년3년


참조

[1] 서적 Emperor Huizong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4-01-06
[2] 서적 皇宋十朝綱要
[3] 서적 楊国公主墓誌銘
[4] 서적 宋会要輯稿
[5] 서적 중국역사박물관 범우사 2004
[6] 서적 중국을 말한다 11 신원문화사 2008
[7] 문서 원우황후(元佑皇后)/묘정선사(妙靜仙師)/화양교주(華陽教主)/융우황태후(隆祐皇太后)/소자헌렬황후(昭慈獻烈皇后)
[8] 문서 정강의 변 이후로 섭정황태후로서 모셔짐
[9] 문서 현비(賢妃)/원부황후(元符皇后)/황태후(皇太后)/숭은궁태후(崇恩宮太后)
[10] 문서 정강의 변 이후에 원우황후와 같이 남하함
[11] 문서 정강의 변 이후에 원우황후와 같이 남하함
[12] 문서 복경공주(福慶公主)
[13] 문서 덕강공주(德康公主)/영국공주(瀛國公主)
[14] 문서 의강공주(懿康公主)/가국공주(嘉國公主)/오국장공주(吳國長公主)
[15] 문서 정강의 변 때 남하하여 남송 고종 때 공주로 복호
[16] 문서 의령공주(懿寧公主)/위국공주(魏國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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