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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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모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 중 연천 서북방 266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략적 요충지인 불모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미군과 중공군의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1952년 미군 주도로 시작되어 1953년에는 대한민국 국군, 미군, 콜롬비아군이 참전하여 중공군과 소모전을 벌인 끝에 승리했다. 이 전투는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으며, 특히 콜롬비아군은 큰 희생을 치렀다. 불모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양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한미동맹 강화와 한국 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투가 벌어진 연천 지역의 발전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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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고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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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한국 전쟁 |
전투명 | 불모고지 전투 (배틀 오브 올드 볼디) |
위치 | 경기도 연천군 |
기간 | 1952년 6월 26일 – 1953년 3월 26일 |
결과 | 1952년: 한국 승리, 1953년: 중국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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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연합군 | 대한민국 유엔군 콜롬비아 미국 |
적군 | 중국 (중국인민지원군)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제임스 밴 플리트 매슈 리지웨이 알베르토 루이즈 노보아 송요찬 이성가 신상철 |
적군 지휘관 | 펑더화이 우란푸 |
병력 규모 | |
연합군 병력 | 38,000명 |
적군 병력 | 20,000명 |
사상자 규모 | |
연합군 사상자 | 미국: 1,952명 사상 (307명 사망) 콜롬비아: 97명 사망, 33명 부상 |
적군 사상자 | 3,000명 이상 사망 및 부상 |
2. 배경
1952년 5월, 제45사단의 우익을 지휘하던 데이비드 L. 러프너 소장은 적 관측병들이 아군 위치를 훤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3] 제45사단과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338연대와 339연대(제113사단, 제38군), 350연대와 349연대(제117사단, 제39군), 그리고 344연대(제115사단, 제39군) 병력이었다. 제113사단, 제115사단, 제117사단의 나머지 보병 부대는 예비대로 있었으며, 중국 제116사단도 제39군 소속 예비대로 대기했다. 중공군은 전선에 직접 지원 또는 일반 지원 역할을 하는 10개 이상의 대대급 포병 부대를 배치했다. 러프너 소장은 주 전선에서 수천 야드 앞에 있는 12개의 전초 기지를 점령하고 유지하는 2단계 작전인 '작전 반격'을 계획했다.[4]
1952년 6월 6일 낮, 미군은 불모고지(Old Baldy)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 반격'을 개시했다. 미군은 공습을 시작으로 밤에는 각 전초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다. 불모고지에서는 중공군 2개 소대와 55분간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미 제180보병연대 A 중대 2개 소대는 중공군과 교전 후, 포병 지원을 요청하여 중공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냈다. 일등병 제임스 오르테가는 전방 관측병으로서 포병 사격을 지휘, 500발의 포탄으로 불모고지를 폭격했다. 이후 A 중대는 특무상사 존 O. 화이트의 지휘 하에 중공군 후방을 공격하여 자정 직후 불모고지를 점령했다.
불모고지(Old Baldy)는 연천 서북방 역곡천 남안에 위치한 266고지로, 주변에 폭찹 고지, 티본 고지를 포함, 대체로 200m 내외 고지군 중앙에 있다. 동쪽으로는 철원 평야, 남쪽으로는 연천과 한탄강 지역, 서쪽과 남쪽으로는 임진강 지역을 조망할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언덕 중 하나는 "올드 볼디"라고 불렸는데, 포병과 박격포 사격으로 정상의 나무가 파괴된 후 그 별명을 얻었다. 동서로 뻗은 주요 능선의 가장 높은 지점인 올드 볼디는 세 방향의 지형을 장악했기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
3. 전투 경과
이후, 한국 군수 지원단의 도움으로 미군은 벙커, 철조망, 지뢰 등을 설치하며 방어 시설을 강화하고 통신망을 구축했다. 주 저항선에서는 보병, 전차, 포병 지원 무기가 방어 사격을 준비했다.
6월 26일, 중공군이 불모고지 서쪽에 진지를 구축하자, 대령 샌들린은 이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은 공습, 포격, 박격포 사격 후, 제179보병연대 C 중대와 제180보병연대 F 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 2개 중대의 저항에 직면했으나, 한 시간 후 중공군은 물러났다가 백병전을 벌였다. 제179보병연대 A 중대가 투입되어 전투가 계속되었고, 결국 중공군은 철수했다.
6월 27일 밤, 중공군의 활동이 증가하며 포격이 쏟아졌다. 22:00에 중공군은 L 중대를 공격했고, L 중대는 소화기, 자동 화기, 수류탄으로 중공군의 진격을 막았다. 자정 무렵 중공군은 철수했으며, 6월 28일 새벽까지 이어진 두 차례의 추가 공격도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중단했다.
6월 28일 늦은 저녁, 중공군의 포격과 함께 또 다른 공격이 시작되었다. 4개 소대가 정찰 후, 두 개의 증강 대대 규모의 주 공격 부대가 공격했다. 중공군은 방어선을 뚫고 백병전을 벌였으나, 유엔군 조명기와 방어 사격, 미군의 사격으로 6월 29일 01:00까지 중공군은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6월 말, 미 제45사단은 전장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7월 3일 밤, 중공군은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으나, 방어 화력에 의해 저지당하고 공격을 포기했다.
1953년 3월, 콜롬비아군은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불모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A 중대는 데일에, B 중대는 동서로 올드 밸디에, C 중대는 그 사이에 배치되었다. 루이스 노보아 중령은 예비 병력을 요청하여 미국 중대가 배속되었다.
3월 20일, 포병 사격이 감지되었다. 중국군 교신 도청과 탈영병 증언으로 공격이 임박했음이 확인되었으나, 턴 연대 지휘관은 콜롬비아군에 의구심을 가졌다.
3월 21일, 중국군은 180고지 정상에 콜롬비아군 4명과 미국인 1명의 시신을 노출시켜 유인 작전을 펼쳤다. 콜롬비아 지휘관은 구조 임무를 명령했고, C 중대 자원병 순찰대가 적진에 진입했다. 알레한드로 마르티네스 로아 일병은 지뢰를 해체하고 시신 1구를 수습했으며, 페드로 리마스 메디나 상병 등과 함께 나머지 시신도 구조했다. 이들은 은성 훈장을 받았다.
3월 22일, 밸디에 2,000발 이상의 포탄이 쏟아졌다.
3월 23일, 턴 대령은 B 중대와 C 중대를 교대하라고 명령했다. 루이스 중령은 중국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반대했지만, 턴은 명령을 유지했다. 15시경, 이동 중 포격으로 C 중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B 중대는 사기가 저하되었다.
중국군 제141사단 제423연대 제1대대가 올드 밸디 공격에 투입되었다. 20시 30분, 데일의 A 중대 알바로 페르도모 소위가 공격받았으나, 저항 끝에 진지를 포기했다.
돼지 고지 언덕도 포격받았으나, 제3대대는 진지를 지켰다. 턴 대령은 주 공격 목표가 돼지 고지 언덕이라 판단, 지원 보냈지만, 전투가 줄어들어 제3대대가 두 시간 후 진지를 탈환했다.
중국군은 재차 공격하여 방어선을 뚫고 콜롬비아군 참호를 향했다. C 중대가 B 중대와 교대하는 순간으로, B 중대는 여전히 언덕 정상 진지를 지휘했지만, 병력 절반은 C 중대였다.
루이스 중령은 공격이 임박했고, 주 공격은 올드 밸디라고 판단했다. 턴 대령의 교대 명령은 두 콜롬비아 중대를 열악한 상황에 놓았다. 루이스 대령은 반격을 위해 미국 예비 중대를 요청했지만, 이미 돼지 고지 언덕 방어에 투입되어 가용 병력이 없었다. 콜롬비아군은 수적 열세로 어려움을 겪었다.
오전 1시경, 양측은 서로 언덕을 점령했다고 믿고 중포격을 가했다. 아군과 적군 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전 8시, 미군 소대가 도착했지만, 정찰 후 철수했다.
사단 지휘부는 언덕을 무인지대로 선포하고 폭격을 시작했다. 콜롬비아 대대는 고립된 채 부상병과 사망자를 냈다.
3. 1. 1952년 전투 (미군 주도)
1952년 6월 6일 낮, 미군은 불모고지(Old Baldy)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 반격'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불모고지 주변의 적 주요 거점에 대한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밤이 되자, 미군 부대들은 각 전초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다. 대부분의 전초기지에서는 큰 저항이 없었으나, 불모고지에서는 중공군 2개 소대와 55분간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미 제180보병연대 A 중대 2개 소대는 중공군과 소화기 및 자동 화기 교전을 벌인 후, 포병 지원을 요청하여 중공군을 일시적으로 몰아냈다.
일등병 제임스 오르테가는 전방 관측병으로서 참호에 뛰어들어 포병 집중 사격을 지휘, 500발의 포탄으로 불모고지를 폭격했다. 포격이 멈춘 후, A 중대 병사들은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특무상사 존 O. 화이트는 BAR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분대를 이끌고 중공군 후방으로 이동하여 공격, 결국 자정 직후 불모고지를 점령했다.
이후, 한국 군수 지원단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미군 병사들은 밤새 벙커를 건설하고 철조망, 지뢰 등을 설치하며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또한, 통신망을 구축하고 탄약을 보급받았으며, 주 저항선에서는 보병, 전차, 포병 지원 무기가 방어 사격을 제공할 준비를 갖추었다.
6월 26일, 불모고지 서쪽에서 중공군이 미군을 위협하는 진지를 구축하자, 대령 샌들린은 이를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은 공습, 포격, 박격포 사격을 가한 후, 제179보병연대 C 중대와 제180보병연대 F 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 2개 중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으나, 한 시간 후 중공군은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와 백병전을 벌였다. 제179보병연대 A 중대가 추가 투입되어 두 시간 동안 전투가 계속되었고, 결국 중공군은 진지에서 철수했다.
6월 27일 밤, 중공군의 활동이 증가하며 박격포와 포병 사격이 쏟아졌다. 22:00에 중공군은 L 중대를 공격했고, 증강된 대대 규모의 병력이 방어 사격에 부딪혔다. L 중대는 소화기, 자동 화기, 수류탄으로 중공군의 진격을 막았고, 자정 무렵 중공군은 철수했다. 6월 28일 새벽까지 이어진 두 차례의 추가 공격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전투를 중단했다.
6월 28일 늦은 저녁, 중공군의 포격과 함께 또 다른 공격이 시작되었다. 4개 소대가 정찰을 한 후, 두 개의 증강 대대 규모의 주 공격 부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에도 중공군은 방어선을 뚫고 백병전을 벌였으나, 유엔군 조명기와 주 저항선의 방어 사격, 그리고 불모고지 위 미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인해 6월 29일 01:00까지 중공군은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6월 말, 미 제45사단은 전투 경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7월 3일 밤, 중공군은 불모고지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방어 화력에 의해 저지당하고 공격을 포기했다.
3. 2. 1953년 전투 (콜롬비아군 참전)
1953년 3월, 콜롬비아군은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되어 불모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A 중대는 데일에, B 중대는 동서로 올드 밸디에, C 중대는 그 사이에 배치되었다. 콜롬비아 대대의 네 번째 중대는 인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최전선에 투입되었고, 루이스 노보아 중령은 연대 지휘관 턴에게 예비 병력을 요청하여 미국 중대가 배속되었다.
3월 20일, 제31연대 전체에서 포병 사격이 감지되었다. 콜롬비아 대대는 밸디 중앙, 제2대대는 왼쪽, 제3대대는 돼지 고지 언덕에 있었다. 중국군 교신 도청과 탈영병 증언으로 공격이 임박했음이 확인되었으나, 턴 연대 지휘관은 콜롬비아군에 의구심을 가졌다.
3월 21일, 중국군은 180고지 정상에 콜롬비아군 4명과 미국인 1명의 시신을 노출시켜 유인 작전을 펼쳤다. 콜롬비아 지휘관은 구조 임무를 명령했고, C 중대 자원병 순찰대가 적진에 진입했다. 알레한드로 마르티네스 로아 일병은 지뢰를 해체하고 시신 1구를 수습했으며, 페드로 리마스 메디나 상병 등과 함께 나머지 시신도 구조했다. 이들은 은성 훈장을 받았다.
3월 22일, 밸디에 2,000발 이상의 포탄이 쏟아지며 콜롬비아군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3월 23일, 턴 대령은 B 중대(11일간 사격선에 배치)와 C 중대를 교대하라고 명령했다. 루이스 중령은 중국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병력 이동이 실수라고 반대했지만, 턴은 명령을 유지했다. 15시경, 이동 중 포격으로 C 중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B 중대는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중국군 제141사단 제423연대 제1대대가 올드 밸디 공격에 투입되었고, 허영춘이 지휘했다. 이들은 공격받는 콜롬비아 B 중대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20시 30분, 데일의 A 중대 알바로 페르도모 소위가 공격받았으나, 저항 끝에 진지를 포기해야 했다.
돼지 고지 언덕도 포격받았으나, 제3대대는 진지를 지켰다. 턴 대령은 주 공격 목표가 돼지 고지 언덕이라 판단, 두 개 중대를 지원 보냈지만, 전투가 줄어들어 제3대대가 두 시간 후 진지를 탈환했다.
중국군은 재차 공격하여 방어선을 뚫고 콜롬비아군 참호를 향했다. C 중대가 B 중대와 교대하는 순간으로, B 중대는 여전히 언덕 정상 진지를 지휘했지만, 병력 절반은 C 중대였다.
루이스 중령은 공격이 임박했고, 주 공격은 올드 밸디라고 판단했다. 턴 대령의 교대 명령은 두 콜롬비아 중대를 열악한 상황에 놓았다. 루이스 대령은 반격을 위해 미국 예비 중대를 요청했지만, 이미 돼지 고지 언덕 방어에 투입되어 가용 병력이 없었다. 콜롬비아군은 역경 속에서도 공격을 거의 꺾었으나, 수적 열세로 어려움을 겪었다.
오전 1시경, 양측은 서로 언덕을 점령했다고 믿고 중포격을 가했다. 아군과 적군 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전 8시, 미군 소대가 도착했지만, 정찰 후 철수했다.
사단 지휘부는 언덕을 무인지대로 선포하고 폭격을 시작했다. 콜롬비아 대대는 고립된 채 부상병과 사망자를 냈다.
3. 2. 1. 콜롬비아 대대의 참전과 희생
콜롬비아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였다.[12] 1951년 8월, 프리깃함 ARC ''알미란테 파디야''호와 1,080명의 보병 대대가 유엔군에 합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콜롬비아 지상군은 과거 전투에서의 모범적인 활약으로 미국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그리고 미국 공로 훈장, 은성 훈장 및 동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연천 전투(바르불라)에서 큰 피해를 입은 콜롬비아 대대는 불모고지에 투입되었다.[12] 당시 콜롬비아 대대는 웨인 C.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7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남아메리카 부대는 윌리엄 턴 대령이 지휘하는 제31연대에서 네 번째 대대였으며, 턴 대령은 콜롬비아 지휘관 알베르토 루이스 노보아 중령에게 올드 밸디에서 연대 제1대대를 교대하라고 명령했다.
콜롬비아 부대는 연천 전투(바르불라)에 참여했는데, 이 전투에서 이들의 병력은 공산군의 전초 기지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서 적의 주요 방어선을 공격했다. 연천 북서쪽의 마게오리에서 예비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새벽에 콜롬비아 대대 C 중대는 중국 공산군이 강력하게 구축한 전초 기지인 180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지만,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C 중대는 180고지를 점령한 후 적의 방어 시설을 파괴했다. 그러나 연대의 정보는 실패했다. 공격은 단지 한 개 중대가 아닌 최소한 한 개 대대가 수행했어야 했다. 콜롬비아 지상군은 큰 피해를 입어 11명이 전사, 43명이 전상, 10명이 실종되었다. 중국군의 교신을 도청한 결과 격렬한 교전과 백병전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C 중대는 너무 많은 사상자를 냈고, 진지를 지킬 수 없어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틀 후 대대는 올드 밸디에 대한 명령을 받았다.
3월 23일 전투에서 콜롬비아군은 전사 95명, 부상 97명, 실종 30명 등 대대 병력의 20% 이상이 사상당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12]
4. 전투 결과 및 영향
1952년 불모고지 전투에서 미군은 307명이 전사하였고, 중공군은 1,100명이 사망하는 등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12] 1953년 전투에서는 콜롬비아군이 한국 전쟁 단일 전투에서 220여 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는 등 가장 큰 희생을 치렀으며, 중공군은 750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12]
불모고지 전투는 결국 양측 모두 많은 병력을 잃었고, 전투선은 1952년 5월 첫 전투 전과 동일하게 끝나, 한국 전쟁의 전반적인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5. 평가 및 의의
콜롬비아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였다.[12] 유엔군에 합류하기 위해 프리깃함과 1,080명의 보병 대대가 파견되었다. 콜롬비아 지상군은 미국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그리고 미국 공로 훈장, 은성 훈장, 동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올드 밸디 전투 당시 콜롬비아 대대는 웨인 C.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1953년 3월 20일, 포병 사격이 감지되었고, 다음날(3월 21일) 중공군은 콜롬비아군 시신 5구를 노출시켜 유인하려 했다. 콜롬비아군은 구조 임무를 완료, 은성 훈장 4개를 받았다.
3월 22일, 2,000발 이상의 포탄이 쏟아졌다. 3월 23일, 중공군은 올드 밸디를 공격했고, 콜롬비아군은 큰 피해를 보았다. 콜롬비아군은 반격할 예비군이 없었고, 결국 올드 밸디는 함락되었다. 콜롬비아군의 사상자는 전사 95명, 부상 97명, 실종 30명이었다. 제7사단은 밸디에서 적군 병사 750명이 전사했다고 추정했다.
올드 밸디에서 콜롬비아군의 영웅적인 저항이 없었다면, 중공군은 제7사단의 주 저항선을 돌파하여 서울로 바로 병력과 장갑차를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5. 1. 군사적 측면
1952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2달 동안, 미군은 중공군 약 1,300여 명을 사살하고 451명의 전사 또는 부상자를 냈다. 이후 1953년 3월까지 대한민국 국군, 미군, 콜롬비아군으로 구성된 3국군은 중공군과 소모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3국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12]이 전투에서 콜롬비아군은 한국 전쟁 단일 전투에서 가장 큰 희생(220여 명 전사, 부상, 실종)을 치렀지만, 중공군 6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12]
1952년 6월 26일, 불모고지 쟁탈전은 매우 치열해졌다. 미군은 공습, 포격, 박격포 사격을 가했고, 제179보병연대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6월 28일, 중공군은 세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많은 사상자(250~325명)를 내고 전투를 중단했다. 제179보병연대는 6명의 전사자와 6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6월 29일, 중공군은 재차 공격,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700명에 가까운 손실을 보고 철수했다. 제179보병연대는 8명 전사, 35명 부상으로 총 43명의 사상자를 냈다.
6월 말, 제45사단은 중공군에게 약 3,500명의 사상자를 입히고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중공군은 7월 3일 밤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7월 17일, 중공군은 미국 제2사단이 제45사단을 교체하는 틈을 타 공격했다. 제23보병연대는 첫 공격은 격퇴했지만, 두 번째 공격에 밀려 능선을 점령당했다. 7월 20일까지 제2사단은 올드 발디 동쪽 능선의 일부만 되찾았다.
7월 마지막 주, 폭우로 작전 수행이 어려워졌다. 7월 21일까지 유엔군은 39명 사망, 234명 부상, 84명 실종되었고, 중공군은 약 1,093명 사망 및 부상을 입었다.
콜롬비아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였다. 콜롬비아군은 미국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그리고 미국 공로 훈장, 은성 훈장, 동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올드 밸디 전투 당시 콜롬비아 대대는 제7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3월 20일, 포병 사격이 감지되었고, 다음날(3월 21일) 중국군은 콜롬비아군 시신 5구를 노출시켜 유인하려 했다. 콜롬비아군은 구조 임무를 완료, 은성 훈장 4개를 받았다.
3월 22일, 2,000발 이상의 포탄이 쏟아졌다. 3월 23일, 중공군은 올드 밸디를 공격했고, 콜롬비아군은 큰 피해를 보았다. 콜롬비아군은 반격할 예비군이 없었고, 결국 올드 밸디는 함락되었다.
콜롬비아군의 사상자는 전사 95명, 부상 97명, 실종 30명이었다. 제7사단은 밸디에서 적군 병사 750명이 전사했다고 추정했다.
5. 2. 정치적 측면
불모고지 전투는 냉전 시대 이념 대립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였다. 특히 한국 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군은 이 전투에서 220여 명이 전사, 부상, 실종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12] 이는 강대국 간의 대리전에 휘말린 제3세계 국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전투는 이념 대립의 무의미함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국제사회는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 희생되는 국가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5. 3.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
불모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일부로, 한국 현대사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전투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한미동맹 강화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5. 3. 1.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불모고지 전투와 같은 격전은 한국 사회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12]5. 3. 2. 한미동맹 강화
미군의 참전과 희생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952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2달 동안 진행된 불모고지 전투에서 미군은 중공군 약 1,300여 명을 사살하고, 451명이 전사 또는 부상을 당했다.[12] 이 전투는 한국 전쟁의 중요한 부분으로, 한미 양국 군대가 함께 싸우며 혈맹 관계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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