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촉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허정은 촉한의 정치가로, 허소와 함께 인물 비평으로 이름을 알렸다. 후한 말 동탁이 정권을 잡았을 때 주비와 함께 인사를 담당했으며, 이후 유비, 유장 등을 섬기며 파군 태수, 촉군 태수 등을 역임했다.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으나, 222년에 사망했다. 진수는 허정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행동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양희는 유비, 제갈량 다음으로 허정을 높게 평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여남 허씨 - 허훈 (후한)
허훈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사도, 사공, 태위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허상 역시 사공을 지냈다.
| 허정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허정 |
| 원어 이름 | 許靖 |
| 자 | 문휴 (文休) |
| 직책 | |
| 관직 | 사도 |
| 임기 시작 | 221년 5월 |
| 임기 종료 | 222년 9월 또는 10월 |
| 군주 | 유비 |
| 재상 | 제갈량 |
| 기타 관직 | 태부 (太傅) 좌장군 장사 (左將軍長史) 촉군 태수 (蜀郡太守) 광한 태수 (廣漢太守) 파군 태수 (巴郡太守) |
| 임기 | 태부: 219년 ~ 221년 5월 좌장군 장사: 215년경 ~ 219년 촉군 태수: ? ~ 214년 광한 태수: ? ~ ? 파군 태수: ? ~ ? |
| 섬긴 군주 | 유비 헌제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 | 불명 |
| 출생지 | 위나라, 여남군평여현 |
| 사망 | 222년 |
| 사망 장소 | 성도, 사천성 |
| 가족 관계 | |
| 친척 | 허창 (사촌) 허소 (사촌) 허유 (손자, 허흠의 아들) |
| 자녀 | 허흠 |
2. 생애
허정은 사촌 동생 허소와 함께 인물평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허소가 군의 공조가 되면서 허정은 출사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말 닦는 일을 해야 했다. 이후 태수 유익에게 효렴으로 추천되어 상서랑이 되었다.
영제 사후 동탁이 정권을 잡자, 주비와 함께 인사를 담당하며 순상, 한융, 진기, 한복, 공주, 장막, 유대 등을 등용했다. 허정 자신도 파군태수가 되었으나 임지로 가지 않고 어사중승을 보좌했다. 주비와 허정이 등용한 인물들이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자 주비는 처형되었고, 허정은 사촌형 허탕이 예주자사 공주와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주에게 피신했다. 이후 공주, 양주자사 진의, 오군도위 허공, 회계태수 왕랑을 차례로 의지했다.
강동에 손책이 진출하자 교주로 피난갔으며, 사섭의 예우를 받았다. 원휘는 순욱에게 허정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고, 조조의 초빙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유장의 초빙으로 파군과 광한군 태수를 지냈고, 211년 촉군태수 왕상 사후 촉군태수가 되었다.
214년, 유비가 성도를 포위하자 성을 넘어 항복하려다 발각되었으나, 유장은 허정을 처벌하지 않았다. 유비는 허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법정의 진언으로 좌장군장사에 임명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진군장군을 거쳐 태부에 봉해졌다.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양위받자, 221년 허정은 유비에게 황제 즉위를 권했고, 유비가 황제가 되자 사도가 되었다.
222년 사망했다. 아들 허흠은 요절했고, 손자 허유는 경요 연간에 상서가 되었다. 허정은 위나라의 화흠, 왕랑, 진군과 평생 친분을 유지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유비 사후 왕랑은 허정에게 유선의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허정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형의 외손자 진지를 양육했는데, 진지는 유선의 총애를 받았다.
2. 1. 후한 말기 활동
허소와 함께 인물비평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허소가 군의 공조(功曹)가 된 뒤 허정은 출사하지 못했다. 이후 태수 유익(劉翊)으로부터 효렴에 천거되어 상서랑(尙書郎)으로 임명되었다.[11] 영제 사후, 하진과 십상시가 주살되고 동탁이 정권을 잡자, 동탁은 주비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삼아 허정과 함께 인사를 맡겼다. 주비와 허정은 순상, 한융, 진기, 한복, 공주, 장막, 유대 등을 중앙 요직이나 지방 장관으로 임명했으며, 허정 자신은 파군태수가 되었으나, 임지로 떠나지 않고 조정에 남아 어사중승(御史中丞)을 보좌하였다.[11]주비와 허정이 임용한 관리들이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면서 주비는 동탁에게 목숨을 잃었다. 진국상을 맡고 있던 허정의 사촌형 허탕(許湯)도 예주자사 공주와 협력하고 있었으므로 허정도 처형당할까 두려워 공주에게로 달아났다. 공주 사후에는 양주자사 진의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진의 사후에는 구면인 오군도위 허공과 회계태수 왕랑을 의지하였다.[11]
이후 강동에 손책이 진출하자 난리를 피해 교주로 달아났으며, 교주를 통치하고 있던 사섭의 예우를 받았다. 당시 사섭에게 의지했던 원휘는 순욱에게 허정의 인물됨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조조가 교주에 사절로 보낸 장상(張翔)은 허정을 초빙하려 하였으나, 허정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뒤 유장에게 초빙되었고, 파군과 광한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211년, 촉군태수 왕상(王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촉군태수가 되었다.[11]
2. 2. 여러 군주를 섬기다
허소와 함께 인물비평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허소가 군의 공조(功曹)가 된 뒤 허정이 출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태수 유익(劉翊)에게 효렴으로 추천되어 상서랑(尙書郎)으로 임명되었다.[11] 영제 사후, 동탁이 정권을 잡자 주비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삼아 허정과 함께 인사를 맡겼다. 주비와 허정은 순상, 한융, 진기, 한복, 공주, 장막, 유대 등을 중앙 요직이나 지방 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허정 자신은 파군태수가 되었으나 임지로 떠나지 않고 조정에 남아 어사중승(御史中丞)을 보좌하였다.[11]주비와 허정이 임용한 관리들이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여, 주비는 동탁에게 목숨을 잃었다.[11] 진국상을 맡고 있던 허정의 사촌형 허탕(許湯)도 예주자사 공주와 협력하고 있었으므로 허정도 처형당할까 두려워 공주에게로 달아났다. 공주가 죽은 후에는 양주자사 진의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진의가 죽자 구면인 오군도위 허공과 회계태수 왕랑을 의지하였다.[11]
이후 강동에 손책이 진출하자 난리를 피해 교주로 달아났으며, 교주를 통치하고 있던 사섭의 예우를 받았다.[11] 당시 사섭에게 몸을 의지했던 원휘는 순욱에게 허정의 인물됨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조조가 교주에 사절로 보낸 장상(張翔)은 허정을 초빙하려고 하였으나, 허정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뒤 유장에게 초빙되었고, 파군과 광한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211년, 촉군태수 왕상(王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촉군태수가 되었다.[11]
214년,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여 성도(成都)가 포위당하자, 성벽을 넘어와 항복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붙잡혔다. 유장은 허정을 원망하거나 죽이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유비는 촉을 평정한 뒤에도 허정을 관직에 임명하지 않았다.[11] 이에 법정이 유비에게 허정을 발탁하도록 진언하였고, 유비는 허정을 좌장군장사(左將軍長史)에 임명하였다.[11],[12]
유비가 한중왕에 오를 당시 허정은 진군장군(鎭軍將軍)을 맡고 있었으며, 한중왕에 오른 뒤에는 태부로 봉해졌다.[11]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양위받아 황제가 되었고, 촉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는 그릇된 소문이 전해졌다. 이에 221년 허정은 다른 문무백관들과 함께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다.[11]
222년, 죽었다. 아들 허흠(許欽)은 허정이 세상을 떠나기 전 요절하였으며,[13] 손자 허유(許游)는 경요 연간(年間)에 상서(尙書)가 되었다.[11]
허정은 위나라에서 중직을 역임한 화흠, 왕랑, 진군과 평생 동안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였으며, 계속 편지를 교환하였다. 유비가 숨을 거둔 직후 왕랑은 허정에게 제갈량과 유선의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었으나, 허정이 죽어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11]
2. 3. 유비와의 만남과 촉한 건국
211년, 촉군태수 왕상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촉군태수가 되었다.[11]214년,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여 성도가 포위되자, 허정은 성벽을 넘어 항복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붙잡혔다. 유장은 허정을 원망하거나 죽이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유비는 촉을 평정한 뒤에도 허정을 관직에 임명하지 않았다. 이에 법정은 "허명이라 해도 허정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있으며, 허정을 예우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비)이 군자를 경시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유비에게 진언했고,[12] 유비는 허정을 좌장군장사(左將軍長史)에 임명하였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를 당시 허정은 진군장군(鎭軍將軍)을 맡고 있었으며, 한중왕이 된 후에는 태부로 봉해졌다.[11]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양위받아 황제가 되었고, 촉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는 그릇된 소문이 전해졌다. 221년 허정은 다른 문무백관들과 함께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다.[11]
2. 4. 촉한에서의 활동과 죽음
214년,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여 성도가 포위되자, 허정은 성벽을 넘어 항복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붙잡혔다. 유장은 허정을 원망하거나 죽이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유비는 촉을 평정한 뒤에도 허정을 관직에 임명하지 않았다.[12] 이에 법정이 유비에게 "허정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있으며, 허정을 예우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공(유비)이 군자를 경시한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허정을 발탁하도록 진언하였고, 유비는 허정을 좌장군장사에 임명하였다.유비가 한중왕에 오를 당시 허정은 진군장군(鎭軍將군)을 맡고 있었으며,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에는 태부로 봉해졌다.[11]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양위받아 황제가 되었고, 촉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는 그릇된 소문이 전해졌다. 이에 221년 허정은 다른 문무백관들과 함께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다.
222년에 죽었다. 아들 허흠(許欽)은 허정이 세상을 떠나기 전 요절하였으며,[13] 손자 허유(許游)는 경요 연간(年間)에 상서가 되었다.
허정은 위나라에서 중직을 역임한 화흠, 왕랑, 진군과 평생 동안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였으며, 계속 편지를 교환하였다. 유비가 숨을 거둔 직후 왕랑은 허정에게 제갈량과 유선의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었으나, 허정이 죽어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
형의 외손자인 진지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허정에게 의탁하자 받아들여 양육하였고, 후에 진지는 유선에게 깊이 신임과 총애를 받아 중용되었다.
3. 평가
허정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의문을 제기하는 평가가 함께 나타난다.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유비, 제갈량 다음 순서로 허정을 높이 평가했으며, 장제는 허정을 국정을 담당할 인재로 칭찬했다. 그러나 진수는 허정의 명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가 모두 타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3. 1. 긍정적 평가
진수는 허정의 명성과 돈독함을 긍정하면서도, 그 행위의 전부가 타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허사도(허정)를 소열황제(유비), 제갈승상(제갈량) 다음인 3번째로 기재했으며, 관운장(관우)·장익덕(장비)보다 위에 위치해 허정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장제는 《만기론》에서 "허정은 국정을 담당할 인재이다"라고 칭찬하며, 허소를 부당하게 대우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3. 2. 부정적 평가
진수는 허정의 명성과 돈독함을 긍정하면서도, 그 행위의 전부가 타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1]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허사도(허정)를 소열황제(유비), 제갈승상(제갈량) 다음인 3번째로 기재했으며, 이는 관운장(관우)·장익덕(장비)보다 위에 위치한 것으로 허정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2] 장제는 『만기론』에서 "허정은 국정을 담당할 인재이다"라고 칭찬하며, 허소가 허정을 부당하게 대우한 것을 비판했다.[3]3. 3. 종합 평가
진수는 허정의 명성과 돈독함을 긍정하면서도, 그 행위의 전부가 타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허사도(허정)를 유비, 제갈량 다음인 3번째로 기재했으며, 관우, 장비보다 위에 위치시켜 허정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장제는 《만기론》에서 "허정은 국정을 담당할 인재이다"라고 칭찬하며, 허소가 허정을 부당하게 대우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4. 친족 관계
아들 許欽|허흠중국어은 허정보다 먼저 요절했다[13]。손자 허유는 경요 연간에 상서가 되었다.
5. 기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허정이 성을 탈주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유장에게 전해지는 장면에 이름만 등장하며, 유비가 제위에 오르도록 진언하는 여러 신하 중 한 명으로도 나온다.
5. 1.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허정이 성을 탈주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유장에게 전해지는 장면에 이름만 등장한다. 또한 유비가 제위에 오르도록 진언하는 여러 신하 중 한 명으로도 등장한다.5. 2. 허정을 소재로 한 작품
- 궁성곡창광의 소설 문예춘추 - 삼국지 외전 「허정」
참조
[1]
서적
Sanguozhi
222-09-24 # Julian calendar에 따른 날짜이므로 정확한 날짜는 아님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Houhanshu
[6]
서적
Zizhi Tongjian
[7]
문서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後漢書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