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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조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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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리아 시대 복식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패션 스타일을 의미하며, 사회 계급과 역할에 따라 여성과 남성 복식 모두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여성 패션은 코르셋, 페티코트, 크리놀린 등을 활용하여 실루엣 변화를 추구했으며, 시대별로 가늘고 긴 몸통, 종 모양 스커트, 버슬 스타일, A라인 스커트 등 다양한 스타일이 유행했다. 남성 패션은 프록 코트, 쓰리피스 수트, 넥타이, 모자 등을 착용했으며, 시대에 따라 넥타이 매듭, 수트 디자인, 얼굴 털 스타일 등에서 변화가 있었다. 기술 발전과 오트 쿠튀르의 등장으로 패션 디자인에 혁신이 있었으며, 상복 착용과 같은 엄격한 규범도 존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복식은 현대에도 스팀펑크, 네오 빅토리아, 로리타 패션 등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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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조 복식
개요
시대빅토리아 시대
시기1837년 ~ 1901년
국가영국
여성복
실루엣초반: 작은 허리, 경사진 어깨, 풍성한 스커트
크리놀린 시대: 크리놀린으로 확장된 스커트
후기: 뒤쪽으로 집중된 풍성함, 버슬 스타일
주요 의상코르셋
크리놀린 또는 버슬
보닛
케이프 또는 숄
실내복과 실외복 구분
소재실크

모직
레이스
벨벳
색상초기: 파스텔 색상
중기: 밝은 색상, 합성 염료 사용
후기: 차분한 색상, 검은색 (상복의 영향)
장신구브로치
목걸이
귀걸이
팔찌
시계
부채
남성복
주요 의상프록 코트
라운지 코트
테일 코트
조끼
바지
셔츠
넥타이 또는 크라바트
모자 (실크 햇, 보터 햇 등)
소재모직

린넨
색상초기: 밝은 색상
후기: 어두운 색상 (검은색, 남색, 회색)
액세서리지팡이
장갑
시계
회중시계
변화와 영향
사회적 영향산업 혁명으로 인한 대량 생산
찰스 프레데릭 워스와 같은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의 등장
사진과 패션 저널의 발전으로 패션 정보 확산
기술적 영향합성 염료 개발로 다양한 색상 사용 가능
재봉틀 보급으로 의류 생산 효율성 증가
정치적 영향크림 전쟁과 같은 사건이 의복 실용성에 영향
상복 문화 확산
기타
관련 용어크리놀린
버슬
코르셋
오트 쿠튀르

2. 여성 패션

빅토리아 시대 동안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주로 가정 내 활동에 국한되는 경향이 강해졌다.[2] 이는 산업 혁명 이후 농업 노동 수요 감소와 맞물려 성 역할 분담이 더욱 뚜렷해진 결과였다. 여성들은 가사 노동에 집중하거나 결혼 후에는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러한 생활 방식의 변화는 여성 복식에도 영향을 미쳐 실용성보다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겨졌다.[3]

여성복은 착용자의 사회 계급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였다. 노동할 필요가 없었던 상류층 여성들은 몸에 꽉 끼는 코르셋보디스나 셔미즈 위에 입고, 여러 겹의 페티코트와 화려한 장식이 더해진 스커트를 착용했다. 중산층 여성들도 비슷한 스타일을 따랐지만 장식은 비교적 소박했다. 여러 겹의 옷은 매우 무거웠고, 단단한 코르셋은 활동성을 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직물의 종류와 옷의 복잡한 구성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 패션은 네크라인, 코르셋(본), 소매, 실루엣 등 다양한 요소에서 시대에 따라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초기에는 말총 페티코트로 스커트를 부풀렸으나, 이후 케이지 크리놀린이 등장하여 더욱 풍성한 실루엣을 만들었다. 후기에는 스커트의 풍성함이 뒤쪽으로 이동하며 버슬(투르뉘르)가 유행하는 등, 속옷의 발달과 함께 실루엣은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복식의 구체적인 변화 양상은 하위 문서를 통해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깃털 장식으로 덮인 모자를 쓴 오페라 가수 에미 데스틴(Emmy Destinn) (1909년 전후).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이처럼 화려한 모자가 유행했다.


모자 역시 중요한 패션 아이템으로, 시대별 드레스 실루엣 변화에 맞춰 다양한 스타일이 유행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작고 단정한 보닛 형태가 선호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챙이 넓고 깃털, 조화, 심지어 박제된 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모자가 등장했다.[29] 특히 모자 장식에 사용된 새 깃털은 플로리다 등지에서 무분별한 남획을 초래하여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30]

한편, 빅토리아 시대 화장품 사용은 일반적으로 최소화되었으며, 과도한 화장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졌다. 당시 사용된 많은 화장품에는 납, 수은, 비소 등 인체에 유해한 독성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2. 1. 여성복의 변화

빅토리아 시대 동안 여성들은 주로 가정 내에서 활동했으며, 이는 이전 시대와 달리 성 역할이 더욱 명확해진 결과였다.[2] 산업 혁명 이후 농업 노동 수요가 줄면서 여성들은 가사 노동에 집중하거나 결혼 후에는 일을 그만두는 경향이 커졌다. 이러한 생활 방식의 변화는 여성복에도 반영되어, 실용성보다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발전했다.[3]

여성복은 착용자의 사회 계급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노동할 필요가 없었던 상류층 여성들은 몸에 꽉 끼는 코르셋보디스나 셔미즈 위에 입고, 여러 겹의 페티코트자수, 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스커트를 착용했다. 중산층 여성들도 비슷한 스타일을 따랐지만 장식은 비교적 덜 화려했다. 여러 겹의 옷은 매우 무거웠고, 단단한 코르셋은 활동을 제약했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직물의 종류와 옷의 겹겹이 쌓인 모습은 부유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850년대 저녁 드레스 사진(베르타 네크라인)


빅토리아 시대 여성복의 주요 특징과 변화는 다음과 같다.

  • '''네크라인''': '베르타'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입었던 낮은 어깨 네크라인으로, 여성의 어깨를 드러냈다. 때로는 3~6인치 깊이의 레이스 장식이 더해지거나, 보디스에 여러 개의 수평 밴드 주름이 있는 네크라인도 있었다. 목선 노출은 주로 상류층과 중산층 여성에게 허용되었으며, 데콜테 스타일로 인해 은 드레스의 필수적인 특징이 되었다. 낮에는 목을 가리고 저녁에는 노출하는 두 가지 형태의 보디스를 제작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 '''본(코르셋)''': 코르셋은 여성의 허리를 가늘게 강조하고 몸매를 교정하기 위해 사용된 속옷이다. 허리를 조여 날씬하게 보이도록 했으며, 보디스가 수평으로 주름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코르셋 착용으로 매우 작고 꽉 맞는 허리가 강조되었으나, 꽉 조이는 끈 때문에 건강 문제를 유발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흔하지는 않았다.

엥가장

  • '''소매''': 소매는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 꽉 끼는 형태였으나, 크리놀린이 유행하면서 스커트의 부피가 커지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큰 벨 모양으로 변했다. '엥가장'은 레이스, 리넨 등으로 만들어진 탈부착 가능한 소매로, 팔꿈치 길이의 소매 아래에 덧대어 착용했다. 쉽게 세탁하고 다시 꿰맬 수 있어 실용적이었다.
  • '''실루엣''': 실루엣은 속옷의 발전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초기에는 말총으로 짠 페티코트를 여러 겹 입어 스커트를 넓게 만들었다. 이후 스커트를 종 모양으로 부풀리는 크리놀린이 등장했고, 나중에는 금속으로 만든 케이지 크리놀린이 개발되어 여성들을 무거운 페티코트에서 해방시켰다. 후기에는 스커트의 풍성함이 뒤쪽으로 이동하면서 투르뉘르(버슬)가 크리놀린을 대체하여 엉덩이 부분을 강조하는 스타일이 유행했다.


시대별 여성복 스타일의 주요 변화는 다음과 같다.

  • 1840~50년대: 스커트 폭이 점차 넓어졌고, 1850년대 중반 케이지 크리놀린의 등장은 스커트를 극적으로 부풀려 돔 형태의 실루엣을 완성했다.
  • 1860년대: 크리놀린의 형태가 변화하여 앞부분은 평평해지고 뒷부분이 길어져 트레인을 형성하는 등 풍성함이 뒤쪽으로 이동했다.
  • 1870년대: 크리놀린이 사라지고 버슬이 등장하여 스커트 뒷부분을 강조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날씬한 실루엣이 선호되었으며,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는 편안한 티 가운이 등장했다. 당시 유행한 타이트한 드레스는 활동에 제약을 주기도 했다.[28]
  • 1880년대: 승마복, 사냥복 등 활동적인 상황에 맞는 복장이 등장했다. 버슬이 다시 유행하여 이전보다 과장된 형태로 나타났다가 점차 사라졌다.
  • 1890년대: 크리놀린과 버슬이 완전히 사라지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가늘게 강조하는 실루엣이 유행했다. 스커트는 허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퍼지는 종 모양을 띠었다. 테일러드 스타일의 재킷이 인기를 얻었다.


빅토리아 시대 화장품은 일반적으로 최소한으로 사용되었으며, 화장은 방종과 연관되었다. 많은 화장품에는 납, 수은, 암모니아, 비소와 같은 독성 또는 부식성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2. 1. 1. 1830년대 드레스 스타일

이 드레스는 낮은 허리선을 특징으로 하며, 보디스는 엉덩이 위로 착용하여 실루엣을 더욱 강조한다
1837년 드레스. 낮은 허리선과 꼭 맞는 보디스가 특징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가 시작된 1837년 무렵,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는 길고 날씬한 몸통과 넓은 엉덩이를 강조하는 형태였다. 이러한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 코르셋을 강하게 조여 허리를 가늘게 만들었다. 이 코르셋은 복부를 지나 엉덩이까지 내려와 허리선을 낮게 보이도록 했다.[4]

코르셋 아래에는 속이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해 비교적 네크라인이 낮은 셔미즈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코르셋 위에는 허리선이 낮은 몸에 꼭 맞는 보디스를 착용했다. 하의로는 긴 스커트를 입었는데, 스커트의 풍성함을 더하고 가는 허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말총으로 만든 페티코트를 여러 겹 겹쳐 입었다.[4] 또한, 좁은 허리와 시각적인 대비를 이루기 위해 네크라인은 낮고 직선적인 형태를 주로 사용했다.

2. 1. 2. 1840년대 드레스 스타일

1840년대 이브닝 드레스. 낮은 직선 네크라인, 앞쪽으로 모이는 보디스, 팔꿈치에서 퍼지는 소매, 오르간 플리츠로 볼륨을 더한 스커트가 특징이다.


1840년대 중반 데이 드레스. V자형 네크라인(셔미즈로 가림), 말총 페티코트로 넓어진 스커트, 추가 플라운스, 깔때기 소매가 특징이다.


1840년대 여성 드레스는 헐렁한 소매, 낮은 네크라인, 길쭉한 V자형 보디스, 그리고 이전보다 풍성해진 스커트를 특징으로 한다.

1840년대 초반에는 보디스의 옆선이 자연스러운 허리선에서 끝나고 앞쪽에서 V자 형태로 모였다. 단단하게 고래뼈 등으로 보강한 코르셋과 보디스의 솔기 선을 따라 당시 유행하던 낮고 좁은 허리선이 강조되었다.

보디스의 소매는 어깨 부분의 장식인 만슈롱(mancheron) 때문에 위쪽은 꼭 맞았지만, 팔꿈치와 손목 사이 부분은 넓어지는 형태였다.[5] 처음에는 소매 윗부분이 어깨선보다 아래에 달려 팔의 움직임을 제한했다.[5]

이러한 점 때문에 1840년대 중반에는 소매가 팔꿈치 부분부터 깔때기 모양으로 넓게 퍼지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 경우, 팔의 아래 부분을 가리기 위해 소매 안쪽에 덧대는 언더슬리브(undersleeve)를 착용해야 했다.[6]

1847년에는 말총으로 만든 크리놀린이 도입되면서 스커트의 길이와 폭이 더욱 커졌고, 이는 부를 상징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스커트에 플라운스(flounce)를 여러 겹 달거나 페티코트를 추가로 입어 스커트의 풍성함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스커트를 보디스에 연결할 때는 좁은 허리선에 맞추기 위해 매우 촘촘한 오르간 플리츠(organ pleats)를 사용했다.[5] 이 주름은 비교적 장식이 적었던 스커트에 장식적인 효과를 더했다. 전반적으로 1840년대 스타일은 1830년대의 화려함에 비해 다소 보수적이며 "고딕"적인 분위기로 여겨졌다.[7]

2. 1. 3. 1850년대 드레스 스타일

1850년대 드레스. 깊어진 V넥 아래 셔미제트를 착용하고, 넓어진 소매와 플라운스로 장식된 풍성한 스커트가 특징이다.


1856년 케이지 크리놀린. 금속 스트립으로 만들어져 스커트를 돔 형태로 지지했다.


1850년대에도 이전 시기와 비슷한 실루엣이 유지되었지만, 의복의 세부적인 요소에는 변화가 있었다. 낮에 입는 드레스의 목선은 더 깊은 V자형으로 파여, 가슴 부분을 가리기 위해 셔미제트를 안에 입어야 했다. 반면, 저녁용 이브닝 드레스는 어깨를 완전히 드러내는 베르타 스타일이 특징이었다. 몸에 꼭 맞는 상의 부분인 보디스는 점차 엉덩이 위까지 내려오기 시작했고, 소매는 더욱 넓고 풍성해졌다. 1840년대1850년대 초반에는 여성용 긴 정장 드레스의 소매가 넓고 부풀어 있었으며, 장식은 비교적 적고 옅은 색상이 주를 이루었으며 때로는 진짜 꽃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드레스 안에는 페티코트, 코르셋, 속옷 등을 착용했다.

스커트의 폭과 부피는 계속해서 커졌는데, 특히 1853년경에는 주름 장식인 플라운스(frills)를 여러 겹 덧대어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스커트를 부풀리기 위해 여러 겹 입었던 페티코트의 수는 줄어드는 대신, 스커트 자체의 부풀림은 더욱 강조되었다.

결정적인 변화는 1856년 최초의 인공 케이지 크리놀린이 발명되면서 나타났다. 케이지 크리놀린은 얇은 금속 스트립을 연결하여 만든 원형 구조물로, 스커트 자락을 넓게 펼쳐 돔(dome) 형태로 지지해주었다. 이는 철을 강철로 만들고 이를 가는 와이어로 뽑아낼 수 있게 된 당시의 기술 발전 덕분에 가능했다.[1] 크리놀린의 목적은 허리를 가늘어 보이게 하고 엉덩이를 부풀려 인공적인 모래시계 실루엣을 만드는 것이었다. 크리놀린 때문에 스커트의 크기가 거대해지자 당시 언론이나 만화가들은 이를 종종 조롱거리로 삼기도 했지만, 이 혁신적인 속옷은 여성들을 여러 겹의 무거운 페티코트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며, 통기성이 좋아 이전보다 훨씬 위생적인 선택이었다.[7]

한편, 합성 염료의 발명은 의복 색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밝고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되면서 여성들은 다양한 색상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1850년대의 기술 혁신은 여성들에게 복식 선택에 있어 더 많은 자유와 가능성을 제공했다.[1] 낮 동안 입는 드레스는 몸통 부분이 뻣뻣하게 고정되는 형태였고, 야간 의상은 목선이 깊게 파였으며 어깨에는 을 걸치는 경우가 많았다.

2. 1. 4. 1860년대 드레스 스타일

1860년대 케이지 크리놀린. 뒤쪽에 강조점이 있어 트레인을 만들었다.


1860년대 드레스. 보디스는 자연스러운 허리선에서 끝나고, 넓은 소매 형태인 파고다 소매가 유행하며, 스커트 뒷부분이 길어져 트레인을 이루었다.


트레인이 있는 1860년대 드레스


1860년대 초중반 동안, 크리놀린은 윗부분의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아랫부분의 폭은 그대로 유지하는 형태로 변화했다.[8] 크리놀린의 형태는 앞부분이 더 평평해지고 뒷부분은 더 풍성해지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스커트 뒷부분이 길어져 트레인을 형성하면서, 전체적인 부피감이 뒤쪽으로 이동했다.

상의인 보디스는 자연스러운 허리선에서 마무리되었고, 넓은 소매 형태인 파고다 소매가 유행했다. 낮에는 목까지 올라오는 높은 깃과 칼라가 있는 드레스를 입었지만, 저녁 시간에는 넥라인이 낮게 파인 드레스를 착용했다. 낮에 입는 드레스의 막힌 목 부분에는 레이스나 코바늘로 만든 칼라를 달기도 했다. 야간용 드레스는 옷깃이 깊고 소매가 짧았기 때문에, 긴 장갑이나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오는 레이스나 코바늘로 만든 장갑을 함께 착용했다.

그러나 1868년경에는 크리놀린이 버슬로 대체되면서 여성의 실루엣이 이전보다 가늘어졌다. 버슬을 지지하는 플런스(지지대 역할의 주름 장식)가 실루엣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9] 스커트의 전체적인 폭은 줄어들었지만, 뒷부분의 풍성함과 길이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스커트 뒷부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트레인 부분을 부드러운 주름과 드레이프로 모아 장식했다.[10]

2. 1. 5. 1870년대 드레스 스타일

버슬과 폴로네이즈가 특징인 1870년대 드레스


몸에 꼭 맞고 길게 층을 이룬 드레이프 트레인이 특징인 1877년 드레스


1870년대 튜르뉘르(버슬)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넓은 스커트의 유행은 점차 사라지고, 여성들은 더 날씬한 실루엣을 선호하게 되었다. 보디스는 자연스러운 허리선에 맞춰졌고, 옷깃은 다양했으며 소매는 어깨선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오버스커트를 보디스 위에 입고 뒤쪽에서 큰 리본으로 고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버스커트는 분리된 바스크 형태로 짧아졌고, 이는 보디스가 엉덩이 위까지 길어지는 효과를 낳았다. 1873년에는 길어진 보디스와 함께 폴로네이즈 스타일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오버스커트와 보디스가 하나로 합쳐진 형태였다. 또한 뒷모습을 부풀리는 튜르뉘르(버슬)가 도입되어 폴로네이즈와 함께 과장된 뒷모습을 연출했다.

1874년경 스커트는 앞쪽이 좁아지고 장식이 더해졌으며, 소매는 손목 부분에서 더 타이트해졌다. 1875년에서 1876년 사이에는 보디스가 더 길어지고 레이스로 허리를 더욱 단단히 조였으며, 앞쪽 중심이 뾰족한 형태로 모아졌다. 뷔스티에는 더 길어져 아래로 내려왔고, 스커트의 풍성함은 더욱 줄어들었다. 남는 천은 뒤쪽에서 주름을 잡아 좁지만 길고 여러 겹으로 된 드레이프 트레인을 만들었다. 트레인이 길어졌기 때문에 드레스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안에는 페티코트를 입어야 했다.

1877년경에는 더욱 날씬한 실루엣이 선호되면서 드레스는 몸에 꼭 맞게 제작되었다.[8] 이는 코르셋처럼 기능하면서도 엉덩이와 허벅지 윗부분까지 내려오는 퀴라스 보디스의 발명으로 가능해졌다. 이 드레스 스타일은 이전보다 자연스러운 형태를 보여주었지만, 스커트 폭이 매우 좁아 착용자가 걷는 데 불편함이 따랐다.

이 시기에는 공식적인 자리 외에 집에서 입는,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는 티타임용 드레스가 등장하여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한편, 풍성한 크리놀린은 버슬로 대체되었는데, 이 새로운 속옷은 스커트 뒤쪽을 부풀리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해변용 드레스를 입을 때도 착용되었다. 날씬한 실루엣을 추구하면서 코르셋으로 허리와 상체를 매우 타이트하게 조이는 형태가 유행했다. 당시 잡지 《펀치》에는 몸에 꽉 끼는 드레스 때문에 앉거나 계단을 오르기 힘들어하는 여성을 풍자하는 만화가 자주 실렸다.[28] 또한, 작은 모자를 이마 쪽으로 기울여 쓰는 것이 유행했으며, 여성들은 머리를 풍성하게 부풀리기 위해 롤빵 머리를 하고 스컬페트나 프리제트라 불리는 가발을 덧붙이기도 했다.[28]

2. 1. 6. 1880년대 드레스 스타일

뒷면의 수평 돌출.
1885년 버슬


1880년대 초는 스타일 면에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1]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장식된 실루엣에 대비되는 질감과 사치스러운 액세서리가 유행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단 기술의 발달로 엄격한 테일러드 스타일이 새롭게 등장했다.[7]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는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 개혁의 영향으로 보는데, 이는 예술 드레스 운동과 합리적 드레스 운동 등을 포함하며 자연스러운 실루엣, 가벼운 속옷을 추구하고 코르셋을 이용한 타이트레이싱을 거부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다른 이들은 자전거 타기나 테니스 같은 여성들의 활동적인 여가 생활이 늘어나면서 활동하기 편한 의복에 대한 요구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1] 또 다른 시각에서는 테일러드된 남성복 스타일의 유행이 단순히 패션 트렌드일 뿐, 진보적인 사상이나 실용적인 필요성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보기도 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스타일의 등장과 남성복 스타일의 수용은 빅토리아 시대 말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신장되던 시대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1883년에는 버슬이 다시 유행했는데, 이전보다 더욱 과장되어 뒤쪽으로 수평적인 돌출이 두드러지는 형태였다. 뒷부분의 부피가 커지면서 드레이핑 장식은 스커트의 옆면이나 앞판으로 이동했고, 뒷면의 드레이핑은 풍성한 퍼프 형태로 위로 모아졌다. 상의인 보디스는 길이가 짧아져 엉덩이 바로 위에서 끝났다. 스타일은 여전히 테일러드 경향을 유지했지만, 이전보다 더 구조적인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1886년경부터는 다시 실루엣이 날씬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보디스의 소매는 폭이 좁고 타이트해졌으며, 네크라인은 다시 높아졌다. 또한, 더욱 정교해진 테일러드 스타일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1890년대에 이르러 완성도를 높여갔다.

1880년대에는 상황에 따른 다양한 복장이 등장했다.

1880년대 상황별 복식
상황복장 구성
승마상의와 스커트 세트 (버슬 없음), 막힌 옷깃 셔츠 또는 chemisette|슈미제트영어, 베일 달린 톱 해트
사냥발목까지 오는 헐렁한 스커트, 부츠 또는 가죽/천 가랑이 달린 깊은 신발
외출긴 상의, 스커트 (버슬 착용), 작은 모자 또는 보닛
여행더스터 코트 (duster영어)와 같은 긴 코트


2. 1. 7. 1890년대 드레스 스타일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리놀린과 버슬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여성들은 가는 허리를 선호하게 되었다. 스커트는 착용자의 잘록한 허리에서부터 아래로 자연스럽게 퍼지는 형태로 변화했으며, 엉덩이 부분을 더 타이트하게 감싸는 종 모양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여성 의상은 막힌 옷깃과 긴 몸통 라인을 유지하기 위한 뻣뻣한 구조가 특징이었다. 보디스의 소매는 초기에 어깨 부분에서 솟아오른 형태였으나 1894년경에는 그 크기가 매우 커져 형태 유지를 위해 안쪽에 쿠션을 덧대기도 했다. 하지만 1890년대 말이 되면서 소매는 다시 좁아졌다.

한편, 여성들은 재킷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자세를 교정하고 자신감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으며, 초기 여성 해방 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 2. 네크라인



베르타(Bertha)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입었던 낮은 어깨 네크라인이다. 이 방식은 여성의 어깨를 드러내는 디자인이었으며, 때로는 약 7.62cm에서 약 15.24cm 깊이의 레이스 장식을 덧대거나 보디스에 여러 겹의 수평 주름을 잡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출은 상류층중산층 여성에게 주로 한정되었고, 노동자 계급 여성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상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데콜테(Décolleté) 스타일의 유행으로 은 드레스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당시에는 낮 시간에는 목선을 가리고 저녁 시간에는 데콜테를 드러내는 두 가지 형태의 보디스를 만드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2. 3. 본 (Bone)

코르셋빅토리아 시대 여성 복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로 여성의 허리를 가늘게 보이도록 강조하고, 당시 유행하던 실루엣에 맞게 몸매를 보정하기 위한 속옷으로 사용되었다.[3] 셔미즈 위에 착용하고 그 위에 보디스를 입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코르셋은 허리 둘레를 꽉 조여 허리선을 잡아주고 날씬하게 만들었으며, 보디스가 수평으로 주름지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를 통해 매우 작고 꽉 조인 허리 라인을 연출할 수 있었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낮고 날씬한 허리를 만들기 위해 코르셋이 복부를 지나 엉덩이까지 내려오기도 했다.[4]

그러나 코르셋은 구조적으로 뻣뻣하여 착용자의 움직임을 제한했다.[3] 또한, 허리를 극단적으로 조이는 '꽉 조이는 끈' 방식 때문에 건강 문제를 유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극단적인 조임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보편적인 관행은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1870년대에는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코르셋을 입지 않는 티타임용 드레스가 등장하기도 했으나, 가는 허리를 선호하는 경향은 18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2. 4. 소매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는 소매가 매우 꽉 끼는 형태였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코르셋으로 허리를 가늘게 강조하는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어깨 솔기가 팔 쪽으로 더 내려와 소매가 팔에 더욱 밀착되었지만, 이런 디자인은 여성의 팔 움직임을 크게 제한했다.[5]

1840년대에는 만슈롱(어깨 장식의 일종) 때문에 소매 윗부분은 꽉 끼면서 팔꿈치와 손목 사이는 넓어지는 형태가 나타났다.[5] 소매가 어깨 아래쪽에 달려 있어 여전히 팔을 움직이기 불편했다.[5] 1840년대 중반에는 소매가 팔꿈치 부분에서 깔때기 모양으로 넓게 퍼지게 되었고, 팔 아래 부분을 가리기 위해 언더슬리브(소매 아래에 덧입는 소매)를 착용해야 했다.[6]

크리놀린이 유행하면서 스커트가 풍성해지자, 소매 역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 큰 모양(벨 슬리브)으로 바뀌었다. 이는 드레스 전체에 볼륨감을 더해주었다. 이 시기에는 엥가장(Engageantes)이라는 속소매를 팔꿈치 길이의 소매 아래에 덧대어 착용했다. 엥가장은 주로 레이스, 리넨, 론(얇은 면직물), 브로더리 앙글레즈(자수 기법의 일종)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쉽게 떼어내 세탁하고 다시 꿰맬 수 있어 실용적이었다. 마치 가짜 소매처럼 보여 낮에 입는 드레스의 벨 모양 소매 아래로 흔히 드러났다. 1850년대에는 소매가 전반적으로 더욱 넓어지고 풍성해졌다.

1860년대에는 넓은 파고다 소매가 유행했다. 낮에 입는 드레스는 주로 파고다 소매 형태였고, 저녁용 드레스는 소매가 짧아 긴 장갑이나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오는 레이스나 코바늘로 만든 장식을 착용했다.

1870년대에는 소매가 어깨선 아래에서 시작되었고, 손목 부분으로 갈수록 다시 좁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1880년대에는 테일러링의 영향으로 소매가 다시 얇고 타이트해졌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매는 다시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초기에는 소매 윗부분, 즉 어깨 부분이 높이 솟아오르는 형태였고, 1894년경에는 이 부분이 매우 크게 부풀어 올라 레그 오브 머튼 소매와 유사한 형태가 되었다. 이 거대한 소매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안쪽에 쿠션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1890년대 말이 되면서 소매는 다시 점차 좁아졌다.

2. 5. 실루엣

빅토리아 시대 여성복의 실루엣은 속옷의 발전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1830년대~1840년대 초)에는 말총을 넣어 짠 리넨과 같은 뻣뻣한 직물이나 여러 겹의 페티코트로 넓은 스커트를 지탱했다. 크리놀린이라는 용어는 원래 말총으로 만든 뻣뻣한 페티코트를 의미했으며, 스커트에 벌집 같은 모양을 부여했다. 때로는 6겹 이상의 페티코트를 입기도 했는데, 그 무게가 약 6.35kg에 달할 수도 있었다.[4] 이 시기 이상적인 몸매는 넓은 엉덩이를 강조하는 길고 날씬한 몸통이었으며, 허리를 가늘어 보이게 하기 위해 코르셋을 복부 아래까지 내려오도록 꽉 조여 입었다.[4]

1850년대 중반, 특히 1856년에는 케이지 크리놀린이 발명되면서 실루엣에 혁신이 일어났다. 이것은 가벼운 금속(주로 강철)으로 만든 원형 구조물로, 무거운 페티코트 없이도 스커트를 넓게 펼쳐지게 했다.[1] 이 발명은 여성들을 여러 겹의 페티코트 무게에서 해방시켰고, 통기성이 좋아져 훨씬 위생적인 선택이었다.[7] 케이지 크리놀린은 허리를 가늘어 보이게 하고 엉덩이를 부풀려 인공적인 모래시계 모양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초기에는 돔 모양이었으나, 점차 형태가 변화했다.

1860년대에는 크리놀린의 형태가 변화하여 앞부분은 평평해지고 뒷부분이 더욱 풍성해졌으며, 종종 스커트 뒤쪽이 길어져 트레인을 형성했다.[8] 그러나 크리놀린과 케이지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 여성들에게는 거추장스럽고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68년경부터 크리놀린은 투르뉘르(Tournure) 또는 버슬(Bustle)로 대체되기 시작했다.[9] 버슬은 스커트 뒷부분만을 부풀리는 속옷으로, 전체적인 실루엣은 이전보다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뒷모습을 강조했다. 폴로네이즈 스타일과 함께 도입되어 스커트 뒤쪽에 풍성함과 드레이프를 집중시켰다.[10] 18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스커트 폭이 더욱 좁아지고 몸에 꼭 맞는 퀴라시 보디스가 등장하여 자연스러운 몸매를 드러내는 경향이 강해졌으나, 지나치게 좁은 스커트는 걷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8]

1880년대에는 버슬이 다시 유행하며 더욱 과장된 수평적 돌출 형태를 보이기도 했으나[1], 동시에 재단술의 발달로 보다 엄격하고 활동적인 스타일도 등장했다.[7] 이는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 개혁 운동의 영향, 혹은 자전거 타기나 테니스와 같은 여성들의 활동 증가로 인한 실용적인 요구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1] 이러한 변화는 빅토리아 시대 말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선택의 폭 확대와 맥을 같이 한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리놀린과 버슬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스커트는 허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퍼지는 종 모양(bell shape)이 되었으며, 엉덩이 부분은 비교적 몸에 맞게 재단되었다. 여성들은 코르셋으로 여전히 가는 허리를 강조했지만, 이전 시대의 인공적인 구조물 없이 보다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추구하게 되었다.

3. 여성용 모자

빅토리아 시대 여성에게 모자는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사회적 예의와 품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의복 요소였다. 당시에는 여성이 맨머리로 외출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모자는 외출 시 필수적인 액세서리였다.[7]

여성 모자의 스타일은 시대의 흐름과 복식 실루엣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으며, 각 시대의 유행을 반영하는 동시에 전체적인 옷차림과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되었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비교적 작고 단정한 보닛 스타일부터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하고 큰 챙을 가진 모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유행했으며, 이는 시대별 복식의 특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했다.

3. 1. 모자의 변화

빅토리아 시대 동안 모자는 남녀 모두에게 품위 있는 외모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 맨머리로 외출하는 것은 부적절하게 여겨졌다.[7] 여성의 모자 스타일은 시대의 유행과 복식의 실루엣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했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크리놀린이나 후프 스커트로 인해 하체가 풍성해 보이는 실루엣이 유행했다. 이에 맞춰 모자는 비교적 크기가 작고 디자인이 절제된 보닛 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며, 리젠시 시대 후기부터 유행한 poke bonnet|포크 보닛eng처럼 얼굴을 가리는 스타일도 있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복식의 실루엣은 변화했고, 이는 모자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버슬이 사라지고 상체가 강조되는 역삼각형 실루엣이 유행함에 따라[11][29], 모자는 매우 크고 넓은 챙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모자는 실크 꽃, 리본, 이국적인 새의 깃털 등으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었는데, 특히 깃털 장식 유행은 환경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12][30]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 여성 모자의 변화는 단순히 장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당대의 이상적인 여성상과 복식의 전체적인 실루엣을 강조하고 보완하려는 디자인적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3. 1. 1. 초기 빅토리아 시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는 넓은 엉덩이를 강조하는 길고 날씬한 몸통이었다. 낮고 날씬한 허리를 만들기 위해 코르셋은 꽉 조여지고 복부를 지나 엉덩이까지 내려왔다.[4] 코르셋 아래에는 보통 셔미즈를 입었으며, 그 위에는 허리선이 낮은 몸에 꼭 맞는 보디스를 착용했다. 보디스와 함께 말총 페티코트[4]를 여러 겹 겹쳐 입어 풍성함을 더하고 작은 허리를 강조하는 긴 스커트가 있었다. 좁은 허리와 대비를 이루기 위해 낮고 직선적인 네크라인이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루엣은 속옷의 발전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에는 말총을 사용하여 짠 리넨과 같은 직물로 넓은 스커트를 지지했다. 이후 크리놀린이 등장하여 스커트에 벌집 모양을 부여했으며, 초기에는 스커트 아래에 최소 6겹의 페티코트를 착용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케이지 크리놀린이 개발되어 여성들은 무거운 페티코트에서 해방되었고, 케이지 아래에서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후프 스커트와 함께 크리놀린으로 받쳐진 풍성한 스커트는 초기 빅토리아 시대 실루엣의 중심이 되었다.

네크라인의 경우, 베르타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입었던 낮은 어깨 네크라인이다. 이 디자인은 여성의 어깨를 드러냈고, 때로는 약 7.62cm~약 15.24cm 깊이의 레이스 플런지로 장식되거나, 보디스에 여러 개의 수평 밴드 주름이 있는 네크라인 형태도 있었다. 그러나 목선 노출은 주로 상류층과 중산층 여성에게만 해당되었으며, 노동자 계급 여성은 이러한 노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데콜테 스타일 때문에 은 드레스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소매는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 꽉 끼는 형태였다. 이는 여성의 작은 허리를 강조하는 디자인과 일치했으며, 어깨 소매 솔기는 팔에 더 잘 맞도록 아래로 처지게 디자인되었다. 이것은 여성의 움직임을 제한하기도 했다. 크리놀린이 유행하면서 소매는 점차 드레스에 더 많은 볼륨을 주는 큰 벨 모양(벨 슬리브)으로 변했다. 엥가장은 주로 레이스, 리넨, 얇은 면직물인 론, 브로더리 앙글레즈 등으로 만들어진 분리 가능한 소매 장식으로, 소매 아래에 착용되었다. 쉽게 제거하고 세탁하여 다시 꿰맬 수 있어 사실상 가짜 소매 역할을 했으며, 당시 팔꿈치 길이 소매에 고정되어 데이 드레스의 벨 모양 소매 아래에 나타났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 작 ''엠마 힐''(1853), 포크 보닛의 후기 형태를 착용한 여성


모자는 남녀 모두에게 품위 있는 외모를 위해 중요했으며, 맨머리로 다니는 것은 부적절했다. 여성의 경우, 모자 스타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고, 옷차림에 맞춰 디자인되었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크리놀린과 후프 스커트로 받쳐진 풍성한 스커트가 실루엣의 중심이었다. 이 스타일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강조하기 위해 모자는 크기와 디자인이 작았으며, 밀짚과 천 보닛이 인기 있는 선택이었다. 리젠시 시대 후기에 착용되었던 포크 보닛은 높고 작은 크라운과 1830년대까지 커진 챙을 가지고 있어서 포크 보닛을 착용한 여성의 얼굴은 정면에서만 볼 수 있었다. 이 모자의 둥근 챙은 당시 유행하던 종 모양의 후프 스커트의 둥근 형태를 반영했다.

3. 1. 2. 후기 빅토리아 시대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는 복식의 실루엣이 다시 한번 변화했다. 기본적인 형태는 역삼각형으로, 머리에는 넓은 챙의 모자를 쓰고, 상체는 퍼프 소매 등으로 풍성하게 부풀렸으며, 버슬은 착용하지 않고 스커트는 발목 부근에서 좁아지는 형태였다.[11] (호블 스커트는 빅토리아 시대가 끝난 직후 잠시 유행했다.)

이러한 실루엣 변화에 맞춰, 모자는 매우 크고 넓은 챙을 가지게 되었다. 이 거대한 모자는 실크 꽃, 리본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특히 이국적인 새의 깃털이 주요 장식 요소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박제된 새 전체를 모자에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깃털 장식 유행은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했다. 장식에 사용된 깃털의 상당수는 미국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에 서식하는 새들에게서 얻어졌는데, 과도한 사냥으로 인해 이 새들은 거의 멸종될 뻔했다. 1899년 아델린 냅과 같은 초기 환경 운동가들은 이러한 무분별한 깃털 사냥을 막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00년까지 연간 5백만 마리 이상의 새가 모자 장식을 위해 도살되었으며, 플로리다 해안 새의 거의 95%가 깃털 사냥꾼들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12]

3. 2. 신발

초기 빅토리아 시대 여성용 신발은 검은색 또는 흰색 새틴으로 만들어졌으며, 좁고 굽이 없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는 신발이 약간 더 넓어졌으며 낮은 굽이 있었고 가죽이나 으로 만들어졌다. 발목까지 오는 끈이나 단추가 달린 부츠도 인기가 있었다. 1870년대부터 20세기까지는 굽이 더 높아지고 발가락 부분은 더 뾰족해졌다. 저녁에는 앞코가 낮게 파인 펌프스를 착용했다.[7]

4. 남성 패션

1870년대 빅토리아 시대 남성들의 그림


빅토리아 시대 남성 패션은 여성복에 비해 변화의 폭이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산업화와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남성복은 점차 현대적인 수트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초기에는 프록 코트조끼, 탑 햇 등이 격식 있는 복장의 기본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새크 코트, 쓰리피스 수트, 턱시도, 블레이저 등 활동성과 상황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복장이 등장했다.[13] 이러한 변화는 남성의 사회 활동 영역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머리 모양은 대체로 짧게 유지되었으며, 콧수염, 구레나룻, 턱수염 등 다양한 형태의 얼굴 수염이 유행했다가 시대 후반에는 면도한 얼굴이 다시 선호되었다.[14] 다만, 당시 잡지나 광고에 나타난 모습과 실제 남성들의 옷차림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신뢰할 만한 기록 부족으로 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15]

4. 1. 남성복의 변화

빅토리아 시대 동안 남성복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꾸준히 변화했다.

1840년대 남성들은 주로 몸에 맞는 프록 코트조끼를 입었으며, 격식에 따라 낮에는 모닝 코트, 저녁에는 연미복을 착용했다. 1850년대에는 셔츠 칼라가 높아지고 넥타이 매는 방식이 다양해졌으며, 탑 햇과 볼러 햇으로 사회 계층을 드러내기도 했다.

1860년대에는 넥타이가 넓어졌고, 프록 코트 대신 새크 코트가 일상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870년대에는 쓰리피스 수트가 유행했으며, 넥타이는 아스코트 타이 형태로 발전했다. 코트 길이는 전반적으로 짧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1880년대에는 턱시도가 등장하여 연미복과 함께 격식 있는 자리에서 입었으며, 야외 활동을 위한 노퍽 재킷 같은 실용적인 옷도 나타났다. 1890년대에는 블레이저가 도입되어 스포츠나 여가 활동 시 착용되었다.[13]

머리 모양은 빅토리아 시대 대부분 짧게 유지되었으며, 콧수염, 구레나룻, 턱수염 등 다양한 형태의 얼굴 수염이 유행했다. 완전히 면도한 얼굴은 18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14]

다만, 당시 남성들이 실제로 어떤 옷을 입었는지는 잡지나 광고에 나타난 모습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신뢰할 만한 기록 부족으로 어렵다.[15]

4. 1. 1. 1840년대

1840년대 남성들은 몸에 꼭 맞는, 종아리까지 오는 길이의 프록 코트조끼를 주로 입었다. 조끼는 단추가 한 줄로 된 싱글 브레스티드(single-breasted) 또는 두 줄로 된 더블 브레스티드(double-breasted) 형태였으며, 숄 칼라(shawl collar)나 노치드 칼라(notched collar)가 달렸다. 허리선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밑단이 두 갈래로 갈라진(double-pointed) 디자인도 있었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는 복장이 달랐다. 낮 시간에는 앞자락이 사선으로 잘린 형태의 모닝 코트와 밝은 색 바지를 입었고, 저녁 시간에는 어두운 색상의 연미복과 바지를 착용했다.

셔츠는 린넨이나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칼라(깃)는 낮았다. 때로는 칼라를 눕혀 입기도 했으며, 폭이 넓은 크라바트나 넥타이를 맸다. 바지는 단추나 지퍼로 여미는 플라이 프론트(fly front) 방식이었고, 브리치(breeches, 반바지 형태)는 격식 있는 행사나 승마를 할 때 입었다. 햇볕이 강한 날에는 챙이 넓은 탑 햇을 썼다.

4. 1. 2. 1850년대

1850년대에는 남성들이 위로 세우거나 접을 수 있는 칼라가 달린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포-인-핸드 넥타이는 나비 넥타이 모양으로 묶거나, 뾰족한 끝이 "날개"처럼 보이도록 매듭지어 착용했다. 모자의 경우, 상류층은 계속해서 탑 햇을 착용했고 볼러 햇은 주로 노동자 계급이 착용하여 계층 간의 차이를 드러냈다.

4. 1. 3. 1860년대

1860년대에는 남성들이 이전보다 더 폭이 넓은 넥타이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 넥타이는 나비 넥타이 형태로 묶거나, 느슨하게 매듭을 지은 뒤 넥타이 핀으로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프록 코트는 길이가 무릎까지 짧아져 주로 업무용으로 입었으며, 허벅지 중간 길이의 새크 코트가 덜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프록 코트를 점차 대체하며 인기를 얻었다. 톱 해트는 잠시 동안 매우 높은 '스토브 파이프(stovepipe)' 형태가 유행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모양의 모자들이 사용되었다.

4. 1. 4. 1870년대



1870년대에는 쓰리피스 수트가 무늬가 있는 셔츠와 함께 인기를 얻었다. 넥타이는 포 인 핸드 방식에서 나중에는 아스코트 타이로 변화했다. 가는 리본 타이는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열대 기후에서 대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프록 코트와 새크 코트는 이전 시대보다 길이가 더 짧아졌다. 또한, 보트를 탈 때는 납작한 밀짚 모자인 카노티에(보터햇)를 착용했다.

4. 1. 5. 1880년대

1880년대에는 격식을 갖춘 야간 의상으로 어두운 색의 연미복과 바지, 어두운 색 조끼, 흰색 나비 넥타이, 그리고 날개 모양의 깃이 달린 셔츠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시기 중반부터는 디너 재킷 또는 턱시도가 등장하여, 조금 덜 격식적인 자리에서 연미복 대신 입기도 했다. 사냥과 같은 거친 야외 활동 시에는 노퍽 재킷과 트위드나 양모로 만든 반바지를 입었다. 겨울철에는 무릎 길이의 탑 코트(종종 대조적인 색상의 벨벳이나 모피 칼라가 달린)나 종아리 길이의 오버코트를 착용했다. 남성용 신발은 굽이 높아지고 앞코가 좁아지는 형태가 특징이었다.

4. 1. 6. 1890년대

1890년대부터 블레이저가 도입되어 운동용, 항해용 및 기타 평상복으로 착용되었다[31].

4. 2. 얼굴 털

빅토리아 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남성들이 비교적 짧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했다. 이는 콧수염, 구레나룻, 턱수염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얼굴 털과 함께 유행했다. 1880년대 말부터 1890년대 초까지는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이 유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32]

5. 상복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검은색은 전통적으로 죽음을 애도하는 색으로 여겨졌으며[16], 상복 착용에 대한 관습과 예절은 매우 엄격했다. 특히 여성에게는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복잡하고 긴 기간의 상복 규정이 요구되었다.[16][19][36]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애도 기간과 검은색 옷을 입는 기간, 심지어 옷의 종류와 소재까지 세세하게 규정되었으며[16], 여러 단계에 걸쳐 점차 상복의 엄격함을 줄여나가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16] 남성은 여성보다 상복 규정이 덜 엄격하고 기간도 짧았다.[19][36]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 사후 오랫동안 상복을 입은 것으로 유명하며[17], 이는 당시 사회에서 고인에 대한 깊은 헌신의 표현으로 여겨졌다.[19]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은 기존 옷을 검게 염색하여 상류층의 관습을 따르려 했고, 이로 인해 염색업이 성행하기도 했다.[20][37]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상복 문화는 당시 사회의 가치관과 계층 구조를 반영하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5. 1. 상복의 규범

검은 빅토리아 시대 상복
빅토리아 시대 상복, 1894–95.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복장과 애도 기간이 엄격하게 규정되었다.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검은색을 죽음을 애도하는 색으로 여긴다. 빅토리아 시대 동안에는 남성, 특히 여성에게 요구되는 상복 관련 관습과 예절이 매우 엄격했다.[16] 이러한 규범은 고인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복잡하게 나뉘었다. 관계가 가까울수록 애도 기간과 검은색 옷을 입는 기간이 길어졌으며, 복장 규정도 더 엄격했다.[16]

상복 착용은 여러 단계로 나뉘었다. 가장 엄격한 단계는 제1단계 상복으로, 완전히 검은색 옷을 입어야 했으며, 사용하는 직물까지 지정되었다. 이 기간은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4개월에서 길게는 18개월까지 지속되었다. 제1단계 상복 기간이 끝나면 애도자는 제2단계 상복으로 넘어가 검은색의 비중이 줄어든 옷을 입었다. 이후 일반 상복을 거쳐 반상복 단계로 점차 일상복에 가까워졌다. 고인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멀 경우, 이러한 상복 단계 중 일부가 단축되거나 생략되기도 했다.[16] 반상복 단계에서는 검은색 대신 회색, 라벤더색, 연보라색(엷은 보라색) 등 허용된 색상을 입을 수 있었다. 특히 라벤더색이나 연보라색은 영국 성공회 및 가톨릭교회 전통에서 성직자들이 장례식 때 착용하는 영대 색상으로,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기 때문에 애도와 관련된 색으로 용인되었다.[16]

1887년에 출간된 Manners and Rules of Good Society, or, Solecisms to be Avoided|사교 예절과 규칙, 또는 피해야 할 과오eng에는 이러한 규범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18][35] 다음 표는 고인과의 관계에 따른 상복 규정의 일부를 보여준다.

고인과의 관계제1단계 상복제2단계 상복일반 상복반상복
남편을 위한 아내1년 1개월; 봄바진 천에 크레이프를 덮음; 미망인 모자, 론 커프스, 칼라6개월: 크레이프 감소6개월: 크레이프 없음, 실크 또는 울이 봄바진을 대체; 마지막 3개월 동안 제트 장신구와 리본 추가 가능6개월: 허용되는 색상은 회색, 라벤더, 엷은 보라색, 흑백
부모를 위한 딸6개월: 검은색에 검은색 또는 흰색 크레이프(어린 소녀의 경우); 린넨 커프스와 칼라 없음; 처음 2개월 동안 장신구 없음4개월: 크레이프 감소2개월: 위와 동일
남편의 부모를 위한 아내18개월: 크레이프가 달린 검은색 봄바진3개월: 검은색3개월: 위와 동일
며느리 또는 사위의 부모를 위한 부모– 고인의 친족이 있을 때는 검은 완장 착용1개월: 검은색
첫 번째 아내의 부모를 위한 두 번째 아내3개월: 검은색



이러한 복잡한 예절 규범은 형제자매, 계부모, 삼촌과 숙모(혈연 및 인척 관계 구분), 조카, 사촌, 자녀, 유아, 그리고 기타 관계자(친밀도에 따라 1~3주간 일반 상복 착용)에게까지 구체적인 상복 기간과 복장을 규정하며 확장되었다.[19][36]

남성은 여성보다 상복 규정이 덜 엄격했고 기간도 짧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남성은 주로 검은색 모자 띠와 검은색 정장을 착용했으며, 요구되는 상복 기간도 여성의 절반 정도였다. 예를 들어, 아내를 잃은 남편(홀아비)은 단 3개월간 상복을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남편을 잃은 아내(미망인)에게는 최대 4년까지 상복 착용이 기대되기도 했다.[19][36] 오랜 기간 상복을 입는 여성은 고인에 대한 깊은 헌신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 사회적으로 존경받았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 공 사후 오랫동안 상복을 입은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17][19][36]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여성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옷을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상류층 및 중산층의 상복 규범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이로 인해 염색업자들은 빅토리아 시대 동안 상복용 옷을 검게 염색하는 일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20][37]

5. 1. 1. 아내 (남편의 사망)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남편을 잃은 아내에게 매우 엄격하고 구체적인 상복 규정이 요구되었다. 이는 고인에 대한 애도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관습이었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총 2년 7개월 이상에 걸쳐 단계적으로 상복을 입어야 했다.[18]

상복 착용은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뉘었으며, 남편을 잃은 아내의 경우 ''사교 예절과 규칙, 또는 피해야 할 과오''(1887)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18]

  • 제1단계 상복: 가장 깊은 애도를 표현하는 기간으로, 1년 1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때 아내는 크레이프로 덮인 봄바진 소재의 검은 옷을 입어야 했다. 또한 미망인 모자를 쓰고, 아주 얇은 삼베나 면포()로 만든 소맷부리와 옷깃을 착용했다.[18]
  • 제2단계 상복: 다음 6개월 동안은 옷에 사용된 크레이프의 양을 점차 줄여나갔다.[18]
  • 일반 상복: 이후 6개월 동안은 크레이프를 완전히 제거했다. 옷의 소재도 봄바진 대신 비단이나 양모로 바꿀 수 있었다. 이 기간의 마지막 3개월에는 제트 장신구나 리본을 착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8]
  • 반상복: 마지막 6개월은 애도에서 점차 벗어나는 과도기였다. 검은색 대신 회색, 라벤더색, 연보라색(엷은 보라색), 흑백 등 허용된 색상의 옷을 입을 수 있었다.[18] 라벤더색이나 연보라색은 영국 성공회 전통에서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져 장례 관련 예식에 사용되기도 했다.[16]


이러한 규정은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했던 역할과 제약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특히 남편을 잃은 여성(과부)에게 요구되는 상복 기간은 최대 4년에 달할 수 있었으며[19], 이는 아내를 잃은 남편(홀아비)이 단 3개월만 상복을 입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긴 시간이었다.[19]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 사후 오랫동안 상복을 입은 대표적인 인물로[17], 이는 당시 사회에서 고인에 대한 깊은 헌신으로 공공연히 존경받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은 기존의 옷을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이러한 상류층의 관습을 따르려 노력했다. 이 때문에 염색업자들은 빅토리아 시대 상복을 위해 옷을 검게 염색하는 일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20]

5. 1. 2. 딸 (부모의 사망)

상복을 입고 죽은 아버지 앨버트 공의 흉상 앞에 모인 빅토리아 여왕의 다섯 딸들(왼쪽부터 앨리스, 헬레나, 베아트리스, 빅토리아, 루이즈) (1862)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부모가 사망했을 경우, 딸이 따라야 하는 상복 규정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이는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상복의 종류와 착용 기간이 달라지는 복잡한 사회적 관습의 일부였다. 1887년에 출간된 Manners and Rules of Good Society, or, Solecisms to be Avoided|사교 예절과 규칙, 또는 피해야 할 과오eng에 따르면, 딸의 상복 규정은 다음과 같다.[35]

구분기간복장 및 특징
제1단계 상복6개월검은색 옷을 입는다. 어린 소녀의 경우 검은색 또는 흰색 크레이프가 달린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린넨으로 만든 소맷부리나 옷깃은 착용하지 않았다. 특히, 처음 2개월 동안은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제2단계 상복4개월제1단계보다 크레이프 부분을 줄인 옷을 입는다.
일반 상복해당 없음
반상복2개월회색, 라벤더색, 등나무색, 또는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복장 등 허용된 색상의 옷을 입는다.



이처럼 엄격한 규정은 당시 사회가 개인의 슬픔 표현 방식까지 세세하게 통제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성에게 요구되는 상복 규율이 남성에 비해 더 복잡하고 길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6. 기술 발전

빅토리아 시대의 기술 발전은 경제 구조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 특히 여성 패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는 크리놀린의 발전, 합성 염료의 발명, 재봉틀의 보급, 그리고 파리를 중심으로 한 오트 쿠튀르의 등장이 대표적인 기술적 변화였다.[22][23][24]

이러한 기술 혁신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초기에는 주로 최신 유행을 따를 여유가 있는 상류층에게 혜택이 돌아갔다.[21] 그러나 재봉틀의 보급과 오트 쿠튀르의 발전은 점차 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스타일을 접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일부 변화는 여성의 활동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24]

6. 1. 크리놀린과 합성 염료

기술 발전은 빅토리아 시대의 경제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패션 스타일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대는 성별, 인종, 계급에 따른 구분이 뚜렷했으며,[21] 많은 기술 발전의 혜택은 최신 유행을 구매하고 따를 여유가 있었던 상류층에게 주로 돌아갔다.

1830년대에는 말총으로 만든 크리놀린이 도입되었다. 이는 상류층 여성만이 착용할 수 있었기에 당시에는 부와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졌다.[21] 1850년대에 이르러 패션 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이 시기를 빅토리아 시대 패션 산업의 혁명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인공적인 케이지 크리놀린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철사나 고래뼈 등으로 만든 이 새로운 형태의 크리놀린은 여성들에게 풍성한 스커트와 잘록한 허리가 강조되는 인공적인 모래시계 실루엣을 만들어 주었다. 더 이상 넓은 치마 모양을 만들기 위해 여러 겹의 페티코트를 껴입을 필요가 없어졌으며, 이는 위생적인 측면에서도 개선된 방식이었다.[22]

같은 시기에는 합성 염료가 발명되어 의류에 이전에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새롭고 밝은 색상을 더할 수 있게 되었다.[22] 이러한 크리놀린과 염료 기술의 발전은 여성들에게 패션에 있어 더 많은 자유와 선택권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22]

6. 2. 오트 쿠튀르

1855년, 개인 맞춤 제작 방식인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가 도입되어 이후 몇 년간 패션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23] 영국의 디자이너 찰스 프레데릭 워스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상류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오트 쿠튀르를 이끈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오트 쿠튀르의 유행은 재봉틀이 발명된 시기와 맞물려 확산되었다.[24] 이 시기에는 정교한 손바느질 기술 역시 함께 발전하여 기존의 옷 제작 방식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보였다. 프랑스의 외제니 황후가 워스가 디자인한 옷을 입으면서 그는 프랑스 내에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1855년,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나폴레옹 3세와 외제니 황후를 영국 국빈으로 맞이했는데, 당시 패션 아이콘으로 여겨지던 외제니의 스타일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워스를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로 임명했고, 이를 계기로 워스는 유럽 상류 사회에서 최고의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찰스 프레데릭 워스는 '오트 쿠튀르의 아버지'로 불리며, 옷에 디자이너의 이름을 표기하는 '라벨'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25] 1860년대 이후 크리놀린이 실용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개인의 체형과 요구에 맞춘 오트 쿠튀르는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워스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맞춤 제작 의상은 착용자의 자세를 개선하고 활동성을 높여 여성 해방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24]

7. 홈 데코

홈 데코는 소박하게 시작하여 점차 화려하게 천을 드리우고 장식하는 스타일로 발전했는데, 이는 오늘날 빅토리아풍으로 알려진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윌리엄 모리스가 추구한 복고풍의 세련됨과 함께 유사 자포니슴의 영향도 있었다.

8. 현대적 스테레오타입

현대에 빅토리아 시대를 떠올릴 때 흔히 갖게 되는 고정관념들이 있지만, 이는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멀거나 과장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남성 의복은 매우 격식 있고 딱딱하며, 여성 의복은 지나치게 정교하고 과장되었다는 생각, 옷으로 온몸을 가렸으며 발목 노출조차 스캔들이었다는 인식, 코르셋이 여성의 몸과 삶을 억압했다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집 안은 어둡고 무거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묘사도 흔하며, 심지어 피아노 다리조차 보기 민망하여 작은 덮개를 씌웠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있다.[27]

하지만 이러한 통념들은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르다. 남성복에도 화려한 조끼커머번드, 동양풍 브로케이드로 만든 스모킹 재킷 등으로 멋을 내는 경우가 있었으며,[15] 코르셋은 허리를 강조하여 여성의 성적 매력을 부각하는 역할도 했다. 이브닝 가운처럼 어깨나 가슴 윗부분을 드러내는 옷도 있었고,[26] 가구나 실내 장식 역시 반드시 과도했던 것은 아니며 실용적인 이유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선택인 경우도 많았다. 엄격해 보이는 예절 이면에는 매춘이나 간통과 같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도 존재했다.

일부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를 향수 어린 시선으로 회상하기도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러한 시각이 실제 역사를 왜곡하고 당시의 억압적인 측면이나 결벽성만을 강조한 스테레오타입에 기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 수영하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자전거를 탈 때조차 특별한 복장을 갖춰야 했던 시대적 제약도 존재했다.

8. 1. 빅토리아 시대의 정숙함



현대에는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여러 통념과 과장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남성 의류는 매우 격식 있고 딱딱하며, 여성 의류는 정교하고 과장되었다는 인식이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몸 전체를 가리는 옷을 입었으며, 심지어 발목이 살짝 보이는 것조차 큰 스캔들로 여겨졌다고 생각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코르셋이 여성의 몸과 삶을 억압하는 도구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집 내부는 음울하고 어두우며, 거대하고 지나치게 장식된 가구와 넘쳐나는 장식품으로 어수선하게 묘사되곤 한다. 심지어 피아노 다리조차 보기 민망하다고 여겨 작은 속바지 모양의 천으로 가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과 달리 실제 빅토리아 시대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남성 정장 의류가 이전 시대보다 덜 화려했을 수는 있지만, 화려한 색상의 조끼커머번드가 멋을 더했으며, 스모킹 재킷이나 실내용 가운(dressing gown)은 풍성한 동양풍 브로케이드 직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변화는 섬유 제조 기술의 발달, 대량 생산 공정의 도입, 그리고 남성 패션 시장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15] 코르셋은 허리를 가늘게 조여 엉덩이와 가슴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성적 매력을 부각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이브닝 가운은 어깨와 가슴 윗부분을 드러내는 디자인이 많았다. 1880년대에 유행한 저지 드레스는 몸을 완전히 가리는 형태였지만, 신축성 있는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여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냈다.[26]

가구 역시 반드시 화려하거나 과도하게 장식된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값비싼 커튼이나 장식품을 구매할 여유가 있고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집을 호화롭게 꾸미는 경향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사회 계층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부를 과시하려는 '신흥 부유층'(nouveau riche|누보 리쉬fra)이 늘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집안 장식에 사용된 물품들이 오늘날보다 어둡고 무거운 색상이었던 것은 실용적인 이유 때문일 수 있다. 당시 런던과 같은 대도시는 공장의 석탄 연기로 인해 그을음이 심각했다. 따라서 여유 있는 가정에서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두꺼운 커튼을 사용했고, 때가 쉽게 타지 않는 어두운 색상을 선호했다. 모든 세탁을 손으로 하던 시절이었기에 커튼을 자주 세탁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피아노 다리가 스캔들로 여겨져 가렸다는 이야기에는 실제 증거가 부족하다. 피아노나 테이블을 이나 천으로 덮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가구의 값싼 재질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컸다. 예를 들어, 마호가니와 같은 고급 목재 가구를 살 형편이 안 되는 중산층 가정이 소나무로 만든 테이블을 천으로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피아노 다리 이야기는 1839년 프레데릭 매리엇 선장이 쓴 책 ''A Diary in America''에서 당시 미국인들의 지나친 내숭을 풍자한 내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27]

빅토리아 시대의 예절은 겉보기에는 매우 엄격했을 수 있다. 특히 존경받는 중상류층 사이에서는 성(性)이나 출산과 같은 주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범 이면에는 숨겨진 모습들이 존재했다. 매춘이 성행했으며, 상류층 남녀 사이에서는 간통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등,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제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8. 2. 피아노 다리 가리개

빅토리아 시대에는 피아노 다리조차 너무 야하다고 여겨 작은 덮개로 가렸다는 잘못된 통념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제 증거는 없다.

실제로 당시 피아노나 테이블을 또는 천으로 덮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는 다리의 모양 때문이 아니라, 가구가 비싸 보이지 않는다는 점, 즉 값싼 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에는 값비싼 마호가니 가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마호가니 가구를 살 여유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소나무 테이블을 천으로 덮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피아노 다리에 대한 이야기는 1839년 프레데릭 매리엇 선장이 쓴 책, 『미국 일기』(''A Diary in America'')에서 당시 미국인들의 지나친 깐깐함을 풍자하면서 언급된 내용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27]

9. 갤러리



알렉산더 멜빌이 그린 빅토리아 여왕 초상화, 1845

10. 관련 주제

빅토리아 시대의 복식은 단순히 의복의 형태를 넘어 당시의 사회상, 성 역할, 사회 계급 구조 등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였다. 이 시대의 패션과 관련된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 여성 의류: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실루엣, 코르셋, 크리놀린, 버슬과 같은 특징적인 속옷과 구조물, 그리고 네크라인이나 소매 디자인의 유행 변화 등이 주요 관심사였다. 옷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었으며, 계급에 따라 장식과 소재에서 차이를 보였다.
  • 남성 의류: 프록 코트, 모닝 코트, 테일 코트 등 상황에 맞는 다양한 코트 종류와 조끼, 넥타이 스타일의 변화가 있었다. 산업 혁명 이후 등장한 수트 형태의 발전 과정도 중요한 부분이다.
  • 모자: 남녀 모두에게 중요한 액세서리였으며, 특히 여성의 모자는 드레스 스타일에 맞춰 변화했다. 남성의 탑 햇이나 볼러 햇 등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다.
  • 화장품: 사용은 최소화되었으나, 당시 화장품에는 유해 성분이 포함된 경우가 많았다.
  • 현대적 해석: 스팀펑크, 네오 빅토리아 시대, 로리타 패션 등 빅토리아 시대 복식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의 다양한 패션 및 하위문화 스타일도 관련 주제로 다루어진다.

10. 1. 시대별 패션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는 넓은 엉덩이를 강조하는 길고 날씬한 몸통이었다. 낮고 날씬한 허리를 만들기 위해 코르셋은 꽉 조여지고 복부를 지나 엉덩이까지 내려왔다.[4] 코르셋 아래에는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비교적 낮게 재단된 셔미즈가 일반적으로 착용되었다. 코르셋 위에는 허리선이 낮은 몸에 꼭 맞는 보디스가 있었다. 보디스와 함께 말총 페티코트[4]를 여러 겹 겹쳐 입어 풍성함을 더하고 작은 허리를 강조하는 긴 스커트가 있었다. 좁은 허리와 대비를 이루기 위해 낮고 직선적인 네크라인이 사용되었다.

1840년대에는 여성들의 드레스 스타일이 헐렁한 소매, 낮은 네크라인, 길쭉한 V자형 보디스, 더 풍성한 스커트가 특징이었다.

1840년대 초반에는 보디스의 측면이 자연스러운 허리선에서 끝나고 앞쪽에서 만났다. 단단하게 뼈대가 있는 코르셋과 보디스의 솔기 라인에 따라 유행하는 낮고 좁은 허리가 강조되었다.

보디스의 소매는 만슈롱(어깨 장식) 때문에 위쪽이 꽉 조여졌지만, 팔꿈치와 손목 사이에서는 넓어졌다.[5] 처음에는 어깨 아래에 배치되었지만, 이로 인해 팔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5]

그 결과, 1840년대 중반에는 소매가 팔꿈치에서 깔때기 모양으로 퍼졌다. 언더슬리브를 착용하여 팔 아래 부분을 가려야 했다.[6]

1847년에 말총 크리놀린이 도입되면서 스커트가 길어지고 너비가 넓어졌으며, 부의 상징이 되었다.

추가 플라운스와 페티코트 층은 또한 이 넓은 스커트의 풍성함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좁은 허리에 맞춰 스커트는 각 주름에 고정된 매우 촘촘한 오르간 플리츠를 사용하여 보디스에 부착되었다.[5] 이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스커트에 장식적인 역할을 했다. 1840년대 스타일은 1830년대의 화려함에 비해 보수적이고 "고딕" 스타일로 인식되었다.[7]

알베르 드 브로이 공작 부인이 섬세한 레이스와 리본 장식이 있는 파란색 실크 이브닝 가운을 입고 있다. 그녀의 머리는 일치하는 파란색 리본 매듭으로 장식된 얇은 프릴로 덮여 있다. 그녀는 목걸이, 술이 달린 귀걸이, 각 손목에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브로이 공작 부인'', 1851-53


1850년대에도 비슷한 실루엣이 유지되었지만, 의복의 특정 요소는 변화했다. 낮 드레스의 목선은 더욱 깊은 V자형으로 파였고, 가슴 부위를 셔미제트로 가려야 했다. 반면 이브닝 드레스는 어깨 부위를 완전히 드러내는 베르타를 특징으로 했다. 보디스는 엉덩이 위로 확장되기 시작했고, 소매는 더 넓어지고 풍성해졌다. 특히 1853년에는 치마의 볼륨과 너비가 계속 증가하여 플라운스(frills)가 덧대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6년에는 치마가 더욱 확장되어 돔(dome) 모양을 만들었는데, 이는 최초의 인공 케이지 크리놀린의 발명 때문이었다. 크리놀린의 목적은 허리를 가늘어 보이게 하고 엉덩이를 강조하여 인공적인 모래시계 실루엣을 만드는 것이었다. 케이지 크리놀린은 얇은 금속 스트립을 연결하여 치마의 넓이를 지지할 수 있는 원형 구조를 형성하여 제작되었다. 이는 철을 강철로 만들 수 있게 하고, 이를 가는 와이어로 뽑을 수 있게 해주는 기술 덕분이었다.[1] 크리놀린의 크기가 커지면서 당시 언론인과 만화가들에게 자주 조롱을 받았지만, 이 혁신은 여성들을 페티코트의 무거운 무게에서 해방시켰고 훨씬 더 위생적인 옵션이었다.[7]

한편, 합성 염료의 발명으로 의복에 새로운 색상이 추가되었고 여성들은 화려하고 밝은 색상을 실험했다. 1860년대의 기술 혁신은 여성들에게 자유와 선택을 제공했다.[1]

1860년대 초중반 동안, 크리놀린은 상단 부분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하단 부분의 폭은 유지했다.[8] 이와 대조적으로, 크리놀린의 형태는 앞부분이 더 평평해지고 뒷부분은 더 풍성해졌으며, 스커트가 이제 트레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뒤쪽으로 이동했다. 반면에 보디스는 자연스러운 허리선에서 끝나고, 넓은 소매 형태인 파고다 소매를 가졌으며, 낮에는 높은 깃과 칼라가 있는 드레스, 저녁에는 낮은 넥라인을 포함했다. 그러나 1868년에는 크리놀린이 버슬로 대체되면서 여성 실루엣이 가늘어졌고, 지지 플런스가 실루엣을 결정하는 역할을 대신했다.[9] 스커트의 너비는 더욱 줄어들었지만, 뒷부분의 풍성함과 길이는 유지되었다. 뒷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트레인은 부드러운 주름과 드레이프를 형성하도록 모았다.[10]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은 점점 더 날씬한 실루엣을 선호하게 되었고, 넓은 스커트의 유행은 서서히 사라졌다. 보디스는 허리선에 맞춰졌고, 옷깃은 다양했으며, 소매는 어깨선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오버스커트는 보디스 위에 착용되었고, 뒤쪽에서 큰 리본으로 고정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버스커트는 분리된 바스크로 짧아지면서 엉덩이 위로 보디스가 길어졌다. 1873년 보디스가 길어지면서 폴로네이즈가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 스타일에 도입되었다. 폴로네이즈는 오버스커트와 보디스가 함께 구성된 의상이다. 튜르뉘르도 도입되었고, 폴로네이즈와 함께 과장된 뒷모습의 환상을 만들어냈다.

1874년경에는 스커트가 앞쪽으로 갈수록 좁아지기 시작했고 장식으로 꾸며졌으며, 소매는 손목 부분에서 더 좁아졌다. 1875년부터 1876년까지 보디스는 길고 더욱 꽉 조이는 레이스 허리를 특징으로 했으며, 앞쪽에서 날카로운 점으로 모였다. 버슬은 길어져 더욱 아래로 내려갔고, 스커트의 풍성함은 더욱 줄어들었다. 여분의 천은 뒤쪽에서 주름을 잡아 좁지만 길고 층을 이룬, 드리워진 트레인을 만들었다. 트레인이 더 길어졌기 때문에 드레스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페티코트를 안에 입어야 했다.

그러나 1877년이 다가오면서 점점 더 날씬한 실루엣이 선호되면서 드레스는 몸에 맞게 제작되었다.[8] 이는 코르셋처럼 기능하지만 엉덩이와 허벅지 위쪽까지 내려오는 퀴라시 보디스의 발명으로 가능해졌다. 드레스 스타일이 더욱 자연스러운 형태를 취했지만, 스커트의 좁은 폭 때문에 착용자는 걷는 데 제약이 있었다.

1840년대의 빅토리아 시대 댄디
1840년대의 빅토리아 시대 댄디


1880년대 초는 스타일 면에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1]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장식된 실루엣에 대비되는 질감과 사치스러운 액세서리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단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안적이고 엄격한 스타일이 등장했다.[7] 일부에서는 이러한 실루엣의 변화를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 개혁에 기인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미적 의상 운동과 합리적 드레스 운동을 포함하는 몇 가지 운동으로, 빅토리아 시대 중후반에 자연스러운 실루엣, 가벼운 속옷을 옹호하고 타이트레이싱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성스러운 활동으로 자전거 타기와 테니스가 인기를 얻으면서 여성 의류에서 더 큰 움직임의 편의성이 요구되었다고 지적했다.[1] 또 다른 사람들은 테일러드된 반 남성적인 수트의 인기가 단순히 유행하는 스타일일 뿐이며, 진보적인 견해나 실용적인 옷에 대한 필요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다양성과 당시 남성복으로 여겨졌던 스타일의 채택은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여성의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시기와 일치했다.

1883년에는 버슬이 다시 등장했으며, 뒷면에 더욱 과장된 수평 돌출부가 특징이었다. 추가된 풍성함으로 인해 드레이핑은 치마의 측면이나 앞판으로 이동했다. 뒷면의 드레이핑은 모두 퍼프 형태로 위로 올려졌다. 반면에 보디스는 짧아져 엉덩이 위에서 끝났다. 그러나 스타일은 테일러드된 상태로 유지되었지만 더 구조적이었다.

그러나 1886년이 되면서 실루엣은 다시 더 날씬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보디스의 소매는 더 얇고 타이트해졌으며, 네크라인은 다시 높아졌다. 더욱이 1890년대에 개선될 때까지 더욱 테일러드된 룩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는 크리놀린과 버슬은 완전히 사라졌고, 스커트는 착용자의 잘록한 허리에서 자연스럽게 퍼지는 형태로 변했다. 종 모양으로 발전하여 엉덩이 부분을 더 타이트하게 감싸도록 제작되었다. 목선은 높았고, 보디스의 소매는 처음에는 어깨에서 솟아 있었지만 1894년 동안 크기가 커졌다. 커다란 소매는 제자리에 고정하기 위해 쿠션이 필요했지만, 1890년대 말 무렵에는 좁아졌다. 이에 여성들은 재킷 스타일을 채택하여 자세와 자신감을 향상시켰고, 이는 초기 여성 해방의 기준을 반영했다.

오페라 가수 아델리나 패티가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에 의해 1863년에 그려짐
오페라 가수 아델리나 패티가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에 의해 1863년에 그려짐


모자는 남녀 모두에게 품위있는 외모를 위해 중요했다. 맨머리로 다니는 것은 부적절했다. 예를 들어, 탑햇은 상류층과 중산층 남성에게 표준적인 정장 의복이었다.[7] 여성의 경우, 모자 스타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고, 옷차림에 맞춰 디자인되었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크리놀린과 후프 스커트로 받쳐진 풍성한 스커트가 실루엣의 중심이었다. 이 스타일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강조하기 위해 모자는 크기와 디자인이 작았으며, 밀짚과 천 보닛이 인기 있는 선택이었다. 리젠시 시대 후기에 착용되었던 포크 보닛은 높고 작은 왕관과 1830년대까지 커진 챙을 가지고 있어서 포크 보닛을 착용한 여성의 얼굴은 정면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종 모양의 후프 스커트의 둥근 형태를 반영하여 둥근 챙을 가지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가 끝나가면서 실루엣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그 형태는 기본적으로 역삼각형으로, 위에 넓은 챙의 모자, 퍼프 소매가 달린 풍성한 상체, 버슬이 없고, 발목에서 좁아지는 스커트였다[11] (호블 스커트는 빅토리아 시대가 끝난 직후 유행했다). 거대한 넓은 챙 모자는 실크 꽃, 리본, 무엇보다도 이국적인 깃털로 정교하게 덮여 있었으며, 때로는 통째로 박제된 이국적인 새를 포함하기도 했다. 이러한 깃털 중 많은 수가 플로리다 에버글레이드의 새에서 왔으며, 과도한 사냥으로 거의 멸종될 뻔했다. 1899년에 아델린 냅과 같은 초기 환경 운동가들은 깃털 사냥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00년까지 연간 5백만 마리 이상의 새가 도살되었고, 플로리다 해안 새의 거의 95%가 깃털 사냥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12]

1840년대에는 남성들이 몸에 꼭 맞는 종아리 길이의 프록 코트조끼를 입었다. 조끼는 싱글 또는 더블 브레스티드였으며, 숄 칼라 또는 노치 칼라가 있었고, 허리 부분을 낮춰서 더블 포인트로 마감하기도 했다. 좀 더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낮에는 가벼운 바지와 함께 컷어웨이 모닝 코트를 입었고, 저녁에는 어두운 테일 코트와 바지를 입었다. 셔츠는 린넨이나 면으로 만들어졌으며, 칼라가 낮고, 때로는 내려 입었으며, 넓은 크라바트 또는 넥타이를 착용했다. 바지는 플라이 프론트였으며, 브리치는 격식을 갖춘 행사나 승마 시에 사용했다. 남성들은 햇볕이 강한 날씨에는 넓은 챙이 달린 탑 햇을 썼다.

1850년대에는 남성들이 위로 세워지거나 뒤집어지는 칼라가 달린 셔츠를 입기 시작했고, 포-인-핸드 넥타이를 나비 매듭으로 묶거나 뾰족한 끝이 "날개"처럼 튀어나오도록 매듭으로 묶었다. 상류층은 계속해서 탑 햇을 착용했고, 볼러 햇은 노동계급이 착용했다.

1860년대에는 남성들이 나비 매듭으로 묶거나 헐렁하게 매듭을 지어 스틱 핀으로 고정하는 더 넓은 넥타이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프록 코트는 무릎 길이로 짧아져서 비즈니스 용도로 입었고, 허벅지 중간 길이의 새크 코트는 덜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프록 코트를 서서히 대체했다. 탑 햇은 잠시 매우 키가 큰 "스토브 파이프" 모양이 되었지만, 다른 다양한 모자 모양도 유행했다.

1870년대에는 3피스 수트가 인기를 얻었으며, 셔츠에 패턴이 있는 직물이 사용되었다. 넥타이는 포-인-핸드였고, 나중에는 아스코트 타이가 등장했다. 좁은 리본 넥타이는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같은 열대 기후에서 대체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프록 코트와 새크 코트 모두 짧아졌다. 보트를 탈 때는 납작한 밀짚 보터를 착용했다.

1880년대에는 격식을 갖춘 이브닝 드레스는 어두운 테일 코트와 바지, 어두운 조끼, 흰색 나비 넥타이, 날개 모양의 칼라 셔츠로 유지되었다. 1880년대 중반에는 디너 재킷 또는 턱시도가 좀 더 편안한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 사용되었다. 노퍽 재킷과 트위드 또는 울 브리치는 사냥과 같은 거친 야외 활동에 사용되었다. 무릎 길이의 탑 코트, 종종 대비되는 벨벳 또는 모피 칼라, 종아리 길이의 오버코트는 겨울에 착용했다. 남성용 신발은 굽이 더 높고 발가락이 좁았다.

1890년대부터는 블레이저가 도입되어 스포츠, 요트, 기타 캐주얼 활동에 착용했다.[13]

빅토리아 시대 대부분 동안 대부분의 남성들은 머리를 비교적 짧게 유지했다. 이것은 종종 콧수염, 사이드번,

10. 2. 여성 의류

빅토리아 시대 동안 여성들은 주로 가정 내에서 활동했다.[2] 이전 시대에는 여성들이 가족 사업이나 노동에서 남편이나 형제를 돕는 경우가 많았지만, 19세기에는 성 역할이 더욱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산업 혁명 이후 농업 노동력 수요가 줄어들면서, 여성들은 가사를 돌보거나 결혼 후에는 일을 그만두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들의 옷에도 반영되어, 점차 활동적이지 않은 생활 방식에 맞춰 실용성보다는 외형을 중시하게 되었다.

옷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으며,[3] 이는 사회 계급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노동할 필요가 없었던 상류층 여성들은 보디스나 셔미즈 위에 꽉 조이는 코르셋을 착용하고, 여러 겹의 페티코트 위에 자수나 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스커트를 입었다. 중산층 여성들도 비슷한 스타일을 따랐지만, 장식은 상대적으로 덜 화려했다. 여러 겹의 옷은 무게가 상당했으며, 뻣뻣한 코르셋은 움직임을 크게 제한했다. 옷 자체는 불편했지만, 사용된 직물의 종류나 옷을 겹쳐 입는 방식은 부를 과시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 '''네크라인''': 베르타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즐겨 입었던 어깨를 드러내는 낮은 네크라인 스타일이다. 때로는 3~6인치 깊이의 레이스 장식(플런지)이 달리거나, 보디스 부분에 수평적인 주름 장식이 여러 겹 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출은 상류층과 중산층 여성에게 한정되었고, 노동자 계급 여성들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상 신체를 많이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데콜테 스타일 때문에 은 드레스와 함께 필수적으로 착용되었다. 코르셋에서 어깨 끈이 사라지면서, 낮에는 목까지 올라오는 형태, 저녁에는 어깨를 드러내는 형태의 두 가지 보디스를 만드는 것이 유행했다.
  • '''본 (코르셋)''': 코르셋은 여성의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도록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속옷의 일종으로 허리를 단단히 조여 몸매를 교정하고 유행하는 실루엣을 만들었다. 또한 보디스가 수평으로 주름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코르셋 착용은 매우 가늘고 조여진 허리선을 만들어냈다. 코르셋은 지나치게 조이는 방식 때문에 건강 문제를 유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착용 방식이 오늘날 생각하는 것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았다(타이트레이싱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

  • '''소매''':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는 소매가 매우 타이트했다. 이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전체적인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어깨 솔기가 팔 쪽으로 내려와 더욱 꼭 맞는 형태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여성의 팔 움직임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크리놀린이 유행하면서 소매는 풍성한 벨(종) 모양으로 변해 드레스 전체의 볼륨감을 더했다. 엥가장이라 불리는 속소매는 주로 레이스, 리넨, 론(얇은 면직물), 브로더리 앵글레이즈 등으로 만들어져 팔꿈치 길이의 소매 아래에 덧대어 착용되었다. 쉽게 떼어내 세탁하고 다시 부착할 수 있어 실용적이었으며, 주로 낮에 입는 드레스의 벨 모양 소매 아래에서 보였다.
  • '''실루엣''': 여성복의 실루엣은 속옷의 발달과 함께 변화했다. 초기에는 말총으로 짠 리넨 같은 뻣뻣한 직물로 넓은 스커트 형태를 유지했다. 크리놀린은 스커트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초기에는 최소 6겹의 페티코트를 겹쳐 입어 그 무게가 14파운드(약 6.4kg)에 달하기도 했다. 이후 케이지 크리놀린이 발명되면서 여성들은 무거운 페티코트에서 해방되었고, 케이지 아래에서 다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실루엣은 점차 스커트 뒤쪽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폴로네이즈 스타일은 스커트 뒷부분에 풍성한 주름을 모아 연출하는 방식으로 도입되었다. 크리놀린과 케이지는 노동자 계급 여성들에게는 작업 중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어 점차 사라졌고, 그 자리를 투르뉘르(버슬)가 대신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화장품은 일반적으로 최소한으로 사용되었으며, 과도한 화장은 경박한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많은 화장품에는 납, 수은, 암모니아, 비소와 같은 유해하거나 부식성 있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초,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이상적인 체형은 길고 날씬한 몸통과 넓은 엉덩이를 강조하는 형태였다. 허리를 가늘고 낮게 만들기 위해 코르셋을 복부 아래 엉덩이 부분까지 내려오도록 길게 만들어 꽉 조였다.[4] 코르셋 안에는 보통 셔미즈를 입어 속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으며, 셔미즈의 목 부분은 비교적 낮게 재단되었다. 코르셋 위에는 허리선이 낮은 몸에 꼭 맞는 보디스를 입었다. 보디스와 함께 착용한 긴 스커트는 말총으로 만든 페티코트[4]를 여러 겹 겹쳐 입어 풍성함을 더하고, 잘록한 허리를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좁은 허리와 대비를 이루기 위해 목선은 낮고 직선적인 형태가 선호되었다.

1840년대 여성 드레스는 헐렁한 소매, 낮은 목선, 길쭉한 V자형 보디스, 그리고 더욱 풍성해진 스커트가 특징이었다.

1840년대 초반, 보디스는 옆선이 자연스러운 허리선에서 끝나고 앞 중심에서 뾰족하게 모이는 형태였다. 단단한 뼈대를 넣은 코르셋과 보디스의 솔기 처리는 당시 유행하던 낮고 가는 허리를 더욱 강조했다.

보디스의 소매는 만슈롱(어깨 장식) 때문에 위쪽은 꼭 맞았지만, 팔꿈치와 손목 사이는 넓어지는 형태였다.[5] 처음에는 소매의 어깨선이 실제 어깨보다 아래에 위치했는데, 이는 팔의 움직임을 제한했다.[5]

그 결과, 1840년대 중반에는 소매가 팔꿈치 부분에서 깔때기 모양으로 넓게 퍼지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 때문에 팔 아랫부분을 가리기 위해 언더슬리브(속소매)를 착용해야 했다.[6]

1847년 말총 크리놀린이 도입되면서 스커트는 더욱 길고 넓어졌으며, 이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추가적인 플라운스와 페티코트는 넓은 스커트의 풍성함을 더욱 강조했다. 스커트는 좁은 허리에 맞추기 위해 오르간 플리츠라고 불리는 매우 촘촘한 주름을 잡아 보디스에 부착되었다.[5] 이는 비교적 단순했던 스커트에 장식적인 효과를 더했다. 1840년대 스타일은 1830년대의 화려함에 비해 보수적이고 "고딕"적인 스타일로 평가받았다.[7]

1850년대에도 기본적인 실루엣은 유지되었으나 세부적인 요소들이 변화했다. 낮에 입는 드레스의 목선은 더 깊은 V자 형태로 파였고, 노출을 가리기 위해 셔미제트(가슴 가리개)를 착용해야 했다. 반면 저녁용 드레스는 어깨를 완전히 드러내는 베르타 스타일이 특징이었다. 보디스는 엉덩이 윗부분까지 내려오기 시작했고, 소매는 더욱 넓고 풍성해졌다. 특히 1853년 이후 스커트의 볼륨과 폭은 계속해서 증가했으며, 플라운스(주름 장식)를 덧대어 더욱 강조했다.

1856년에는 최초의 인공 케이지 크리놀린이 발명되면서 스커트는 더욱 극적으로 확장되어 돔(dome) 형태를 이루었다. 크리놀린의 목적은 허리를 가늘어 보이게 하고 엉덩이를 부풀려 인공적인 모래시계 실루엣을 만드는 것이었다. 케이지 크리놀린은 얇은 금속 띠를 연결하여 원형 구조를 만들어 스커트의 넓은 폭을 지지했다. 이는 철을 강철로 만들고 가느다란 와이어로 뽑아낼 수 있게 된 기술 발전 덕분이었다.[1] 크리놀린의 거대한 크기는 당시 언론과 만화가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이 혁신적인 발명품은 여성들을 여러 겹의 무거운 페티코트로부터 해방시켰고 위생적으로도 더 나은 선택이었다.[7]

한편, 합성 염료의 발명으로 의복에 새로운 색상이 도입되었고, 여성들은 화려하고 밝은 색상의 옷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의 기술 혁신은 여성들에게 패션에 있어 더 많은 자유와 선택권을 제공했다.[1]

1860년대 초중반, 크리놀린은 윗부분의 부피는 줄어들었지만 아랫부분의 폭은 그대로 유지하는 형태로 변화했다.[8] 또한 크리놀린의 형태는 앞부분이 평평해지고 뒷부분이 더욱 풍성해지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스커트 뒷부분이 길어져 트레인을 형성하게 되면서 무게 중심이 뒤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보디스는 자연스러운 허리선에서 끝났고, 넓은 파고다 소매가 유행했다. 낮에는 목까지 올라오는 하이넥과 칼라가 있는 드레스를, 저녁에는 목선이 낮은 드레스를 입었다. 그러나 1868년경 크리놀린은 버슬로 대체되면서 여성의 실루엣은 다시 가늘어졌고, 스커트 자체의 주름과 장식이 실루엣을 결정하게 되었다.[9] 스커트 폭은 줄어들었지만 뒷부분의 풍성함과 길이는 유지되었다. 뒷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옷감을 모아 부드러운 주름과 드레이프를 만들었다.[10]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은 점차 날씬한 실루엣을 선호하게 되었고, 넓은 스커트의 유행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보디스는 허리선에 맞춰졌고, 다양한 형태의 옷깃이 등장했으며, 소매는 어깨선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오버스커트는 보통 보디스 위에 착용되었고, 뒤쪽에서 큰 리본으로 묶어 고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버스커트는 분리된 바스크 형태로 짧아졌고, 보디스는 엉덩이 아래까지 길어졌다. 1873년 보디스가 길어지면서 폴로네이즈 스타일이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에 도입되었다. 폴로네이즈는 오버스커트와 보디스가 하나로 합쳐진 형태의 의상이었다. 튜르뉘르(버슬) 또한 도입되어, 폴로네이즈와 함께 뒷모습을 과장되게 부풀리는 효과를 냈다.

1874년경, 스커트는 앞부분이 좁아지면서 장식이 더해졌고, 소매는 손목 부분에서 더욱 타이트해졌다. 1875년부터 1876년까지 보디스는 더욱 길어졌고, 레이스로 꽉 조여 허리를 강조했으며, 앞 중심이 뾰족하게 모이는 형태가 되었다. 뷔스티에는 더욱 길어져 아래로 내려왔고, 스커트의 풍성함은 더욱 줄어들었다. 남은 옷감은 뒤쪽에서 주름을 잡아 좁지만 길고 여러 겹으로 드레이핑된 트레인을 만들었다. 트레인이 길어졌기 때문에 옷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페티코트를 안에 입어야 했다.

그러나 1877년이 되면서 더욱 날씬한 실루엣이 선호됨에 따라 드레스는 몸에 꼭 맞게 제작되었다.[8] 이는 코르셋과 유사한 기능을 하면서 엉덩이와 허벅지 윗부분까지 내려오는 퀴라시 보디스의 발명으로 가능해졌다. 드레스 스타일이 신체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따르게 되었지만, 스커트 폭이 매우 좁아져 착용자가 걷는 데 불편함을 겪기도 했다.

1880년대 초는 스타일 면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진 시기였다.[1]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장식된 실루엣에 대비되는 질감과 사치스러운 액세서리가 유행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테일러링(재단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보다 엄격하고 절제된 스타일이 등장했다.[7] 이러한 실루엣 변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일부는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 개혁의 영향으로 보았다. 이 운동은 미적 의상 운동과 합리적 드레스 운동 등을 포함하며, 빅토리아 시대 중후반에 자연스러운 실루엣, 가벼운 속옷을 지지하고 타이트레이싱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대중적으로 큰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다른 이들은 자전거 타기나 테니스 같은 여성들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옷의 실용성과 활동성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1] 또 다른 시각에서는 테일러드된 남성복 스타일의 수트 유행이 단순히 패션 트렌드일 뿐, 진보적인 사상이나 실용성에 대한 요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당시 남성복으로 여겨지던 스타일이 채택된 것은 빅토리아 시대 말기 여성의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던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1883년에는 버슬이 다시 등장했는데, 이전보다 뒤쪽으로 더욱 과장되게 수평으로 돌출되는 형태가 특징이었다. 늘어난 부피 때문에 드레이핑 장식은 스커트의 옆면이나 앞면으로 이동했다. 뒷면의 드레이핑은 모두 위쪽으로 부풀려진 형태로 처리되었다. 보디스는 짧아져 엉덩이 위에서 끝났지만, 여전히 테일러드 스타일을 유지하며 더욱 구조적인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1886년이 되면서 실루엣은 다시 한번 더 날씬한 형태로 변화했다. 보디스의 소매는 가늘고 타이트해졌으며, 목선은 다시 높아졌다. 더욱 테일러드된 스타일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는 1890년대까지 이어지며 개선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리놀린과 버슬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스커트는 착용자의 가는 허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는 형태로 변했으며, 엉덩이 부분은 비교적 몸에 맞고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종(bell) 모양으로 발전했다. 목선은 높았고, 보디스의 소매는 초기에는 어깨 부분에서 솟아 있었으나 1894년을 기점으로 크기가 매우 커졌다. 이 거대한 소매는 형태 유지를 위해 패드가 필요했지만, 1890년대 말에는 다시 좁아졌다. 이 시기 여성들은 재킷 스타일을 채택하여 자세를 교정하고 자신감을 표현했으며, 이는 초기 여성 해방의 기준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0. 3. 현대적 해석

빅토리아 시대의 복식은 현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스팀펑크, 네오 빅토리아 시대, 로리타 패션 등이 있다.

특히 스팀펑크는 현대의 기존 가치관이나 관습에 반항하는 생활 양식과 연결되기도 한다. 스팀펑크 의상은 빅토리아 시대 스타일을 바탕으로 전위적인 변형을 가한 것이 많으며, 옷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거나 형태를 왜곡시키고, 고딕 패션이나 인더스트리얼 록 스타일과 결합하는 특징을 보인다. 또한 로리타 패션 역시 빅토리아 시대 복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현대 패션 스타일 중 하나로 꼽힌다.

참조

[1] 서적 The Culture of Fashion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Gender roles in the 19th century https://www.bl.uk/ro[...] 2016-10-21
[3] 서적 Victorian and Edwardian Fashion - A Photographic Survey Dover Publications Inc.
[4] 서적 From Queen to Empress - Victorian Dress 1837-1877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5] 서적 From Queen to Empress - Victorian Dress 1837-1877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6] 서적 From Queen to Empress - Victorian Dress 1837-1877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7] 서적 Victorian Fashion. Fashion and Eroticism: Ideals of Feminine Beauty from the Victorian Era to the Jazz Age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From Queen to Empress - Victorian Dress 1837-1877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9] 서적 From Queen to Empress - Victorian Dress 1837-1877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0] 서적 Making Victorian Costumes for Women Crowood
[11] 서적 Costume and Fashion: A Concise History Thames & Hudson Ltd.
[12] 웹사이트 Everglades National Park https://www.pbs.org/[...] PBS 2011-11-07
[13] 웹사이트 Men's informal sporting dress, late 1880s and '90s http://www.victorian[...]
[14] 웹사이트 Victorian Men's Fashions, 1850–1900: Hair http://www.victorian[...]
[15] 논문 Refashioning Men: Fashion, Masculinity, and the Cultivation of the Male Consumer in Britain, 1860–1914
[16] 웹사이트 The Colors of the Church Year http://fullhomelydiv[...] Consortium of Country Churches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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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The Victorian House Harper Perennial
[19] 서적 The Victorian House Harper Perennial
[20] 서적 The Victorian House Harper Perennial
[21] 간행물 The Victorian Era https://archive.org/[...]
[22] 서적 Victorian Fashion Bloomsbury Shire Publications
[23] 서적 Fashioning Society Fairchild Books
[24] 서적 Haute Coutur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5] 서적 Paris Haute Couture Skira Flammarion
[26] 서적 Victorian & Edwardian Fashion: A Photographic Survey Dover Publications
[27] 서적 A Diary in America: With Remarks on Its Institutions https://books.google[...] Longman, Orme, Brown, Green, and Longmans 1839
[28] 서적 Costume and Fashion: A Concise History Thames & Hudson Ltd.
[29] 서적 Costume and Fashion: A Concise History Thames & Hudson Ltd.
[30] 웹사이트 Everglades National Park http://www.pbs.org/n[...] PBS 2011-11-07
[31] 웹사이트 Men's informal sporting dress, late 1880s and '90s http://www.victorian[...] 2015-07-08
[32] 웹사이트 Victorian Men's Fashions, 1850–1900: Hair http://www.victorian[...] 2015-07-08
[33] 논문 Refashioning Men: Fashion, Masculinity, and the Cultivation of the Male Consumer in Britain, 1860–1914 2011-08-28
[34] 웹사이트 The Colors of the Church Year http://fullhomelydiv[...] Consortium of Country Churches 2011-11-06
[35] 서적 The Victorian House Harper Perennial
[36] 서적 The Victorian House Harper Perennial
[37] 서적 The Victorian House Harper Perennial
[38] 서적 Victorian & Edwardian Fashion: A Photographic Survey Dover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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