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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모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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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나다 모리노부는 오사카 전투에서 아버지 사나다 노부시게와 형 사나다 유키마사가 사망한 후 다테 가문의 보호를 받아 살아남았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감시를 피해 신분을 숨기고 가타쿠라 모리노부라는 이름으로 센다이 번의 무사가 되었으며, 이후 사나다 가문의 이름을 잇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모리노부는 1612년 사나다 노부시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670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센다이 사나다 가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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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모리노부
기본 정보
씨명사나다 모리노부 / 가타쿠라 모리노부
사나다 모리노부
사나다 모리노부 (개인 소장)
시대에도 시대 전기
출생게이초 17년 (1612년)
사망간분 10년 10월 30일 (1670년12월 12일)
개명다이하치 (유명)、(가타쿠라 모리노부) → 사나다 모리노부 → 가타쿠라 모리노부
이명시로베에, 구메노스케 (통칭), 오키마코토 (통칭)
묘소공덕산 당신사(미야기현시라이시시)
주군다테 다다무네→쓰나무네→쓰나무라
무쓰국센다이 번사
씨족사나다 씨→가타쿠라 씨 (센다이 사나다가)
부모아버지: 사나다 노부시게
어머니: 지쿠린인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
형제자매아기쿠/스헤 (이시아이 시게사다/미치사다의 부인), 오이치, 아우메 (가타쿠라 시게나가 후실), 아쿠리 (가모 사토요시 부인), 유키마사, 나호 (미타히메, 이와키 노부타카 부인), 아쇼부 (가타쿠라 사다히로 부인), 오카네 (이시카와 사다키요 부인), 모리노부, 미요시 유키노부
자녀다쓰노부
특기 사항출신에 의문이 있음.

2. 생애

사나다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의 둘째 아들 사나다 모리노부는 오사카 전투 이후 다테 가문에 의탁하여 살아남았다. 1612년 기이 국 구도산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다이하치'''였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아버지와 형이 전사한 후, 가타쿠라 시게나가에게 의탁했다.

1640년, 다테 가문에 등용되었으나, 에도 막부는 그를 노부시게의 아들로 의심했다. 다테 가문은 모리노부가 사나다 노부타다의 차남 마사노부의 아들이라고 거짓 보고하여 위기를 모면했고, 이후 '''가타쿠라 모리노부'''로 개명하고 센다이번의 무사가 되었다.

아들 다쓰노부 대에 사나다 성씨 사용이 허용되었고, 후손들은 센다이 사나다 가문으로 이어졌다. 간분 10년 (1670년) 10월 30일에 사망했다.[10]

2. 1. 출생과 어린 시절

사나다 노부시게의 둘째 아들 사나다 모리노부는 1612년(게이초 17년) 기이 국 구도산에서 태어났다.[10] 어머니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 죽림원이다.[10][2] 어릴 적 이름은 '''다이하치'''였으며, 통칭은 시로베에, 후에 구메노스케였다.

고야산 렌게조인 기록에는 다이하치가 "1615년(게이초 20년) 5월 5일, 교토에서 인지를 치고 죽었다"라고 돌팔매질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아버지와 형 다이스케(유키마사)가 전사한 후에도 생존하였다. 낙성 때 동복 누나 아우메(차녀)가 가타쿠라 시게나가에게 붙잡혀 그의 측실이 되었고,[3] 다이하치는 이를 의지하여 다른 동복 누나 아쇼부(육녀), 오카네(칠녀) 등과 함께 가타쿠라 가문 아래에 숨겨졌다.[10]

2. 2. 오사카 전투 이후

아버지 노부시게와 형 유키마사는 오사카 전투에서 죽었지만, 모리노부(어린 시절 이름은 다이하치)는 다테 가문의 중신 가타쿠라 시게나가의 보호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10] 시게나가의 가신이 된 모리노부는 사나다 모리노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나다씨는 할아버지 마사유키 때부터 도쿠가와 가문에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모리노부의 존재가 막부에 알려지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그래서 다테 가문은 1624년에 '다이하치는 8세 때 교토에서 돌팔매에 맞아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모리노부의 존재를 감추었다.[10]

1640년 막부가 다테 가문에 모리노부의 신원을 조사하라고 명령했을 때, 다테 가문은 모리노부가 '사나다 노부타다의 차남 마사노부의 아들'이라고 속였다. 실제로는 노부타다의 차남 마사노부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때 모리노부는 '''가타쿠라 모리노부'''로 이름을 바꾸고 300 석의 녹봉을 받아 센다이번의 무사가 되었다.

모리노부의 아들 다쓰노부 대에 이르러 '이미 막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라고 사면을 받아 공식적으로 사나다라는 성을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모리노부는 노부시게의 피를 이어받은 네 아들 중 유일하게 사나다씨의 이름을 후세에 계승할 수 있었는데, 장남은 미혼이었고 삼남과 사남은 다른 가문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리노부의 후예는 센다이 사나다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10]

2. 3. 센다이 번사 시절

아버지 노부시게와 형 유키마사는 오사카 전투에서 죽었지만, 다이하치는 다테 가문의 중신 가타쿠라 시게나가의 보호로 구출되어 그의 가신이 되고, 사나다 모리노부로 개명한다.[10] 사나다씨는 모리노부의 할아버지인 마사유키 때부터 도쿠가와 가문에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모리노부의 존재가 막부에 알려지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그래서 다테 가문은 1624년에 '다이하치는 8세 때 교토에서 돌팔매에 맞아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모리노부의 존재를 감추었다.

1640년에 막부가 다테 가문에 모리노부의 신원을 조사하라고 명했을 때에도, 다테 가문은 모리노부가 '사나다 노부타다의 차남 마사노부의 아들'이라고 속였다(실제로는 노부타다의 차남 마사노부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4] 그 때, '''가타쿠라 모리노부'''로 이름을 바꾸고, 300 석의 녹봉을 받아 센다이번의 무사가 되었다.

모리노부의 아들 다쓰노부 대에 이르러 '이미 막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라고 사면을 받아 공적으로 사나다라는 성을 쓰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모리노부는 노부시게의 피를 이어받은 네 아들 중 유일하게 사나다씨의 이름을 후세에 계승시킬 수 있었다(장남은 미혼, 삼남과 사남은 다른 가문의 양자가 됨). 모리노부의 후예는 센다이 사나다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10]

간에이 17년 (1640년), 28세 때 다테 가문(센다이 번)에 등용되어, 사나다 시로베에 모리노부라고 칭했다. 그러나 역적의 아들을 고용한 것이 아니냐며 막부가 문제 삼아, 센다이 번에 질의서가 도착했다. 다테 가문은 노부시게의 둘째 아들 다이하치는 돌팔매질로 죽었다는 앞서 언급한 기록을 제시하며 변명했고, 모리노부는 "막신인 사나다 노부스미의 둘째 아들인 사나다 마사노부의 아들"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막부도 엄밀하게 조사하면 부인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다테 가문과의 좋은 관계를 고려하여, 결국 이대로 징계 없이 넘어갔다.

모리노부는 아우메를 통해 가타쿠라 가문을 의지하여, 간에이 연간에 센다이 번사가 되었고, '''가타쿠라 구메노스케 모리노부'''로 개명했다. 간분 10년 (1670년) 10월 30일에 사망했다.[10] 아들 도시노부가 계승했다. 모리노부로부터 8대 후, 막말기 자손 사나다 유키요시에 이르러 사나다 성을 회복하여,[10] 센다이 사나다 가문으로서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2. 4. 출신 논란

사나다 모리노부의 출신에 대해서는 사나다 노부시게의 둘째 아들이 오사카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에 따르면 모리노부는 1612년에 사나다 노부시게의 둘째 아들로서 기이 국 구도산에서 태어났다.[10] 어머니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죽림원[2])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다이하치'''였다. 통칭은 시로베에, 후에 구메노스케였다.

고야산렌게조인(사나다 씨의 고야산에 있는 보제사)의 기록에는 다이하치가 "게이초 20년 5월 5일, 교토에서 인지를 치고 죽었다"라고 돌팔매질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존하여, 같은 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아버지 노부시게와 형 다이스케(유키마사)가 전사하였다. 그 후, 낙성 때 동복 누나인 아우메(차녀)[3]가타쿠라 시게나가에게 붙잡혀 그대로 측실이 되었다. 다이하치는 이를 의지하는 형태로, 다른 동복 누나인 아쇼부 (육녀)·오카네 (칠녀) 등과 함께 가타쿠라 가문 아래에 숨겨졌다.[10]

그 후, 1640년 28세 때 다테 가문(센다이 번)에 등용되어 사나다 시로베에 모리노부라고 칭했다. 그러나 막부는 역적의 아들을 고용한 것이 아니냐며 문제 삼아, 센다이 번에 질의서를 보냈다. 다테 가문은 노부시게의 둘째 아들 다이하치가 돌팔매질로 죽었다는 앞서 언급한 기록을 제시하며 변명했고, 모리노부는 "막신인 사나다 노부스미의 둘째 아들인 사나다 마사노부의 아들"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막부도 엄밀하게 조사하면 부인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다테 가문과의 좋은 관계를 고려하여 결국 이대로 징계 없이 넘어갔다.

한편, 통설에서는 "거짓 보고"로 취급되고 있지만, 에도 중기에 센다이 번사의 가계를 정리한[5] 『다테 세신 가보』에 따르면, 모리노부는 노부시게의 숙부인 사나다 노부스미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마사노부라고 한다.[6][7]

또한, 가타쿠라 시게나가의 자손인 남작가타쿠라 노부미쓰가 1942년에 제출한 족보와도 일치한다.[8] 신슈 사나다가 측의 사료에도 다이하치가 요절했다는 기록이 있으며,[9] 통설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4]

3. 등장 작품


  • 真田丸|사나다마루일본어 (2016년, NHK대하드라마), 배우: 아이다 쇼마

참조

[1] 서적
[2] 문서 信繁の正室。
[3] 문서 落城時の乱取り(『老翁聞書』によれば自主的な投降)の後に嫁ぐことになった経緯は、[[阿梅#片倉重長の妻になる経緯]]を参照。
[4] 서적 真田四代と信繁 株式会社平凡社 2015-11-13
[5] 웹사이트 仙台市の指定登録文化財(仙台市HP) >仙台市の指定・登録文化財 >伊達世臣家譜及続編 https://www.sendai-c[...]
[6] 간행물 伊達世臣家譜. 第2輯 巻之九(召出之部) 仙台叢書刊行会 1937
[7] 서적 宮城県姓氏家系大辞典 角川書店 1994
[8] 논문 真田幸村の後裔を探る(上) https://ndlsearch.nd[...] 仙台郷土研究会 1942
[9] 간행물 左衛門佐君伝記稿 https://ndlsearch.nd[...] 信濃史料刊行会 1978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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