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쿠마 가쓰유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쿠마 가쓰유키는 1568년 오다 씨의 가신 사쿠마 모리쓰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카토 성 공격에 참여하며 무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으며, 숙부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가 되었다가 사사 나리마사의 사위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후, 형과 함께 고호조 씨를 섬겼으나 멸망 후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다. 이후 가모 우지사토를 섬기며 활약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해 공을 세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는 다이묘가 되었고,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활약하여 영지를 늘렸다. 그는 난젠지, 아쓰타 신궁, 우에노 토쇼구에 거대한 등롱을 기증하여 '일본 3대 등롱'으로 불리게 했다. 1634년 슨푸 성에서 67세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삿사씨 - 구마모토성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1607년 완공한 대규모 평산성으로, 독특한 곡선형 돌담인 무샤가에시가 특징이며, 세이난 전쟁과 지진 피해 복구 작업을 거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 삿사씨 - 삿사 나리마사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호쿠리쿠에서 공을 세웠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다 항복 후 히고 국주로 임명되었지만 히고 국인 일기를 진압하지 못해 할복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 사쿠마씨 - 사쿠마 노부모리
    사쿠마 노부모리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나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에서의 부진으로 징계를 받아 고야산으로 추방되었고, 기이국에서 사망했다.
  • 사쿠마씨 - 사쿠마 쇼잔
    에도 막부 말기의 무사이자 사상가인 사쿠마 쇼잔은 서양 학문 수용을 통한 국력 강화, 화혼양재 사상의 기틀 마련, 그리고 요시다 쇼인, 가쓰 가이슈, 사카모토 료마 등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준 인물들을 양성했으나 존황양이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쿠마 가쓰유키
기본 정보
씨명사쿠마 씨→시바타 씨→사사 씨→사쿠마 씨
이름사쿠마 가쓰유키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에이로쿠 11년( 1568년 )
사망간에이 11년 11월 12일( 1634년 12월 31일 )
개명시바타 가쓰유키→사사 가쓰유키→사쿠마 가쓰유키
다른 이름겐로쿠, 겐로쿠로( 통칭 )
계명승지 원전관암 성찬 대거사→옥봉 원전 태산 정안 대거사
묘소시즈오카현시즈오카시아오이구 겐야정의 현광원
관위종5위 하, 대선량
막부에도 막부 슨푸성가반
섬긴 주인오다 노부나가시바타 가쓰이에→사사 나리마사→호조 우지마사→가모 우지사토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리→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이에미쓰
히타치호조 번 번주→시나노나가누마 번 번주
씨족사쿠마 씨→시바타 씨→사사 씨→사쿠마 씨
부모아버지: 사쿠마 모리쓰구, 어머니: 시바타 가쓰이에의 누나『간세이 중수 제가보』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 누나"
양아버지: 시바타 가쓰이에, 사사 나리마사
형제모리마사, 야스마사, 가쓰마사, 가쓰유키
아내정실: 사사 나리마사의 딸
계실: 쇼노 시키부의 딸
이설: 시바타 가쓰이에의 딸『간에이 제가 계도전』에서는 "외구(시바타) 가쓰이에"라고 기록함.
자녀가쓰토시, 가쓰토모, 가쓰타네, 딸( 아키즈키 다네하루 실), 세이쇼인( 다치바나 다네쓰구 실), 딸( 야마구치 시게쓰네 실), 딸( 오카다 요시마사 실), 딸( 시바타 가쓰시게 실), 딸( 오시마 미쓰모리 실 후 이케다 셋쓰노카미 실), 딸( 노세 요리시게 실), 딸( 나카가와 스케시게 실), 딸(와타나베 구로효에 실)
번주 정보
히타치 호조 번 임기1607년 ~ 1615년
히타치 호조 번 선대 번주막부 직할령(홋타 마사히데)
나가누마 번 임기1615년 ~ 1634년
나가누마 번 선대 번주사쿠마 가쓰토모
나가누마 번 대수1

2. 생애

사쿠마 가쓰유키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사쿠마 모리쓰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다이묘로 성장한 인물이다. 시바타 가쓰이에와 사사 나리마사의 양자로 들어가 스에모리 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후 여러 주군을 섬기며 공적을 쌓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나가누마 번의 번주가 되었다. 만년에는 일본 3대 등롱으로 불리는 거대한 등롱을 기증하는 등 불교 신앙에도 힘썼으며, 1634년 슨푸 성 가반역 재임 중 사망했다.

2. 1. 출생과 초기 이력

에이로쿠 11년(1568년) 오다 씨의 가신 사쿠마 모리쓰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3]

덴쇼 10년(1582년) 시나노 국 다카토 성 공격에 처음 출진하여 공적을 세웠다. 처음에는 숙부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가 되었으나, 후에 사사 나리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사위 양자가 되었다. 덴쇼 12년(1584년) 스에모리 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지만, 덴쇼 13년(1585년) 나리마사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자, 아내와 이혼하고 형 안세이(후의 시나노 이이야마 번주)와 함께 간토의 고호조 씨를 섬겼다. 그러나 5년 후, 도요토미 씨에 의해 호조 씨가 멸망했기 때문에 잠시 잠복해 있었지만, 후에 먼 친척 오쿠야마 모리아키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소환되었다. 히데요시는 가모 우지사토에게 부속을 명했다.[4]

이후 형과 함께 사쿠마 성으로 복귀하여 오슈 시오키에 의해 아이즈를 영토로 삼게 된 우지사토를 섬기며, 테노코의 성(현 야마가타현 니시오키타마군 이이데정 테노코)을 맡았다. 『사쿠마 군기』에 따르면, 갓사이·오사키 잇키 진압에서 크게 공적을 세웠으며, 그 와중에 다테 마사무네가 우지사토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암살하려 했을 때 이를 눈치챈 가쓰유키는 우지사토를 피신시켰다고 한다.

우지사토 사후에는 히데요시에게 불려 후시미 성에서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나노 국 나가누마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발령되지 않은 듯하다.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오봉행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여쭈어 나가누마 대신 오미 국 야마지(현 시가현 히가시오미시 야마지정) 3,000석을 받았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했다. 게이초 12년(1607년) 에도 성 내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히타치 국 호조(현 쓰쿠바시 호조) 3,000석을 가증받아 총 1만 석을 영유하여 다이묘가 되었다.

2. 2. 도요토미 가문 신하 시절

덴쇼 10년( 1582년) 시나노 국 다카토 성 공격에 처음 출진하여 공적을 세웠다. 처음에는 숙부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가 되었으나, 후에 사사 나리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사위 양자가 되었다. 『간에이 제도가계도전』에는 사사 나리마사의 양자로 시바타 가쓰이에의 사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 덴쇼 12년( 1584년) 스에모리 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지만, 덴쇼 13년( 1585년) 나리마사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자, 아내와 이혼하고 형 안세이(후의 시나노 이이야마 번주)와 함께 간토의 고호조 씨를 섬겼다.

그러나 5년 후, 도요토미 씨에 의해 호조 씨가 멸망했기 때문에 잠시 잠복해 있었다. 이후 먼 친척 오쿠야마 모리아키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소환되었고, 히데요시는 가모 우지사토에게 가쓰유키를 부속시켰다.[4] 이후 형과 함께 사쿠마 성으로 복귀하여, 오슈 시오키에 의해 아이즈를 영토로 삼게 된 우지사토를 섬기며, 테노코 성(현 야마가타현 니시오키타마군 이이데정 테노코)을 맡았다. 『사쿠마 군기』에 따르면, 갓사이·오사키 잇키 진압에서 크게 공적을 세웠으며, 그 와중에 다테 마사무네가 우지사토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암살하려 했을 때, 이를 눈치챈 가쓰유키는 우지사토를 피신시켰다고 한다.

우지사토 사후에는 히데요시에게 불려 후시미 성에서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나노 국 나가누마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발령되지 않은 듯하다. 게이초 3년(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오봉행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여쭈어 나가누마 대신 오미 국 야마지(현 시가현 히가시오미시 야마지정) 3,000석을 받았다.

2. 3. 도쿠가와 가문 신하 시절

덴쇼 10년( 1582년), 시나노 국 다카토 성 공격에 처음 출진하여 공적을 세웠다. 처음에는 숙부 시바타 가쓰이에의 양자가 되었으나, 후에 사사 나리마사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사위 양자가 되었다. 덴쇼 12년( 1584년) 스에모리 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지만, 덴쇼 13년( 1585년) 나리마사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자, 아내와 이혼하고 형 안세이(후의 시나노 이이야마 번주)와 함께 간토의 고호조 씨를 섬겼다.[3]

5년 후, 도요토미 씨에 의해 호조 씨가 멸망하자 잠시 잠복해 있었지만, 먼 친척 오쿠야마 모리아키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소환되었다. 히데요시는 가모 우지사토에게 가쓰유키를 부속시켰다.[4] 이후 형과 함께 사쿠마 성으로 복귀하여, 오슈 시오키에 의해 아이즈를 영토로 삼게 된 우지사토를 섬기며, 테노코 성(현 야마가타현 니시오키타마군 이이데정 테노코)을 맡았다.

우지사토 사후, 히데요시에게 불려 후시미 성에서 그를 섬겼고, 시나노 국 나가누마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발령되지 않은 듯하다. 게이초 3년(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오봉행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청하여 나가누마 대신 오미 국 야마지(현 시가현 히가시오미시 야마지정) 3,000석을 받았다.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했다. 게이초 12년( 1607년) 에도 성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히타치 국 호조(현 이바라키현 쓰쿠바시 호조) 3,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석을 영유하여 다이묘가 되었다.

게이초 20년(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 장수 다케다 에이오 등을 쳐서 공을 세웠고, 그 전공[5]으로 시나노 국 미나미군 (현 나가노현 나가노시 동북부, 가미미노치군 이이즈나정·시나노마치 일부) 및 오미 국 다카시마군 (현 시가현 다카시마시)에 영지를 추가로 받아 나가누마 성을 다시 하사받고 시나노 나가누마 번 1만 8,000석의 번주가 되었다.

2. 4. 만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오봉행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청하여 나가누마 대신 오미 국 야마지(현 시가현 히가시오미시 야마지정) 3,000석을 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했다. 1607년 에도 성 내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히타치 국 호조(현 이바라키현 쓰쿠바시 호조) 3,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석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측 장수 다케다 에이오 등을 쳐서 공을 세웠다고 하며, 그 전공[5]으로 시나노 국 미나미군 (현 나가노현 나가노시의 동북부, 가미미노치군 이이즈나정·시나노마치 일부) 내와 오미 국 다카시마군 (현 시가현 다카시마시) 내에 영지를 추가로 받아, 다시 나가누마 성을 하사받아 시나노 나가누마 번 1만 8,000석의 번주가 되었다.

1628년 도도 다카토라의 기증으로 교토 난젠지의 삼문이 재건되었다. 낙성을 기념하여 가쓰유키는 황금과 함께 큰 등롱을 기증했다. 사쿠마 겐바의 한 등롱이라고 불리는 이 등롱은 높이가 6m가 넘고, 명문은 난젠지 금지인 소연의 이신 스덴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30년 5월, 아이치현 나고야시아쓰타 신궁 전설에 따르면, 가쓰유키는 해난을 당했으나 오와리 아쓰타 신궁의 가호로 목숨을 건졌다. 이에 감사한 가쓰유키는 동사에 큰 등롱을 하나 기증했는데, 높이는 8m 정도 된다.

우에노 토쇼구에 있는 통칭 "오바케 등롱"은 가쓰유키가 1631년에 봉납한 것으로, 높이는 6.06m이다.

교토 난젠지, 나고야 아쓰타 신궁, 에도 우에노 토쇼구의 큰 등롱은 "일본 3대 등롱"이라고 불리며, 모두 가쓰유키가 기증했다.

1634년 슨푸 성가반역을 명받아 재임 중 같은 해 67세로 사망했다. 슨푸 겐코인에 장례를 치렀다[6]。 처음 법명은 겐간 세이찬 쇼신인이었다. 후에 자손이 에도 니혼에노키 코가쿠인으로 묘소를 옮길 때 타이잔 쇼안 교쿠호인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현재 겐코인에는 가쓰유키의 묘탑으로 추정되는 오륜탑이 있으며, 2004년에는 위패가 새로 제작되었다. 오미 다카시마 령의 보리사 하타케지 (시가현 다카시마시)의 과거장에는 휘가 가쓰마사로 되어 있다. 코가쿠인에는 묘가 현존하지 않는다[7]

3. 인물

후루타 시게나리에게 다노유를 배웠다.[4]

4. 관련 작품


  • 요시하라 미노루: 소설 「두 자루의 사문자(左文字)」 (호쿠코쿠 문학 77호, 2018년 가을호)
  • 요시하라 미노루: 소설 「불꽃의 성(城)」 (호쿠코쿠 문학 89호, 2021년 가을호)
  • 요시하라 미노루: 소설 「피안화(彼岸花)」 (호쿠코쿠 문학 100호, 2024년 여름호)

참조

[1]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2] 서적 寛永諸家系図伝
[3] 논문 織豊大名佐々成政をめぐる諸論点 戎光祥出版 2023
[4] 서적 藩翰譜
[5] 서적 藩翰譜
[6]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7] 간행물 飯綱の地をひらいた“殿様”‐佐久間兄弟と長沼藩・飯山藩 いいづな歴史ふれあい館 20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