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 (1998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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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회당 (1998년 대한민국)은 1998년 창당되어 2012년 진보신당과 합당하기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청년진보당으로 시작하여 사회당, 희망사회당, 한국사회당 등의 이름으로 변경하며, 계급 투쟁, 사회주의 표방, 사회 연대 추구 등 당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2002년과 2007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고, 여러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으나, 국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2009년에는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기본소득을 강령에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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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 (1998년 대한민국)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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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사회당 |
원어 이름 | 사회당 |
한자 표기 | 會 |
로마자 표기 | Sahoedang |
창당일 | 1998년 11월 29일 |
해산일 | 2012년 3월 4일 |
해산 이유 | 진보신당과 통합 |
합병 대상 | 진보신당 |
본부 위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115-62 나경빌딩 11층 |
상징색 | 빨강, 검정, 초록 |
기타 | 설립일은 전신인 청년진보당의 결성일이다. |
주요 인물 | |
대표 | 안효상 |
이념 및 정치 성향 | |
이념 | 사회민주주의 |
정치적 위치 | 중도좌파 - 좌익 |
의회 의석 | |
조직 | |
당원 수 | 19,050 명 |
관련 정보 | |
관련 정보 | https://archive.today/20120914105342/http://www.sp.or.kr/xe/2610568 |
2. 역사
사회당의 역사는 대한민국 진보 정치의 다양한 흐름과 그 변화를 보여준다. 사회당은 1998년 11월 “노동자·민중의 정당”을 표방하며 결성된 “청년진보당”을 전신으로 한다.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보 진영 일각에서 계급 투쟁을 간과한다며 국민승리21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들이 청년진보당을 창당했다. 이후 2001년 8월 사회당으로 개칭한 후, 2008년 10월 현재의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여 2012년까지 존속하였다.
사회당은 사회적 공화주의 정치 이념과 “기본소득제도”(베이직 인컴)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또한 북한에 대해서는 “조선로동당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거는 등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3]
창당 이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에 꾸준히 후보를 냈으나 모두 낙선했다.
2011년 9월 14일, 진보신당과 사회당은 양당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진보·혁신 세력 결집을 목표로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4] 2012년 2월 7일, 사회당은 진보신당에 흡수되는 방식의 합당에 잠정 합의했고,[5] 2월 19일 당대회에서 진보신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담당 기구 설치 안건을 가결했다.[6] 3월 4일, 진보신당과 통합 당대회를 개최하여 통합 정당 “진보신당”을 발족했다.
사회당의 주요 연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주요 내용 |
---|---|
1998 | 청년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 (8월), 청년진보당 창당 (11월) |
1999 |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재보궐선거 후보 추천 (낙선) |
2000 | 제16대 총선 후보 추천 (낙선, 득표율 0.7%) |
2001 | 당명을 "사회당"으로 개칭,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후보 추천 (낙선) |
2002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후보 추천 (전원 낙선), 김영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 (낙선) |
2004 | 제17대 총선 후보 추천 (비례대표 득표율 0.22%) |
2006 | 당명을 "희망사회당"으로 개칭,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후보 추천 (전원 낙선), 당명을 "한국사회당"으로 개칭, 금민 대표 선출 |
2007 |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 추천 (낙선), 금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 (낙선) |
2008 | 제18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 추천 (득표율 0.20%), 당명을 "사회당"으로 개칭, 최광은 대표 선출 |
2009 | 강령과 당헌 개정 |
2010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후보 추천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 0.4%), 안효상 대표 선출 |
2011 | 진보신당과 사회당 통합 논의 |
2012 | 진보신당과 통합, 통합 정당 "진보신당" 발족 |
2. 1. 창당 배경 (1997-1998)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진보 진영은 권영길을 '국민후보'로 추대하고 ‘국민승리21’을 결성했다. 이는 훗날 민주노동당의 전신이 되었다. 그러나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국민승리21이 계급 투쟁을 간과하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띤다고 비판했다.[12][13]이러한 비판에 동의하는 세력은 대선 이후 전국 14개 청년단체 간담회를 개최하며 '청년진보당'을 창당했다. 청년진보당 창당 세력은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했던 백기완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백선본' 계열이 주축이었다.[12][13] 청년진보당은 국민승리21과 이후 민주노동당에 비해 좀 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성향을 보였다.
2. 2. 청년진보당 (1998-2001)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후, 민주노총 위원장 권영길을 '국민후보'로 추대한 ‘국민승리21’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이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백기완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백선본 계열을 주축으로 하여 전국 14개 청년단체 간담회 개최를 시작으로 '청년진보당'을 창당했다.[12][13]청년진보당은 처음 참여한 1999년 서울 구로구 을 보궐선거에서 4.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14]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청년좌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 전 지역구와 인천 부평구에 후보를 공천하여 12만 5천여 표, 평균 3%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지역구 득표율 0.7%로 원내 진입에 실패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정당 등록 취소 결정을 받았다.[14]
2000년 10월 2일 청년진보당은 재창당되었다.
2. 3. 사회당 (2001-2006)
2000년 10월 2일 청년진보당이 재창당되었다. 2001년 8월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반자본주의, 반조선로동당'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1980년대 진보 운동의 주축이었던 민족 해방(NL) 세력과 뚜렷하게 구별됨을 밝혔다.[15] 이는 민주노동당 내 민족 해방 계열을 의식한 것이었다.사회당은 정치적 선명성을 강하게 내세웠다.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슬로건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을 사용하여 그간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했다. 2002년 10월 김영규가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했으나, 22,000여 표(0.2%)를 얻는 데 그쳤다. 2004년에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참가했으나, 지역구 득표율 0.04%, 비례대표 득표율 0.22%를 기록하여 원내 입성에 실패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정당 등록 취소 결정을 받았다.[14]
2. 4. 희망사회당, 한국사회당 (2006-2008)
2006년 4월, '희망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사람연대'라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연대는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을 향한 연대'라는 정식 명칭을 가진 단체로, 각 지역에서 풀뿌리 민중 조직을 만들어 장애인 교육, 어린이 센터 운영 등 당의 이념을 실천하는 사업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사람연대 사업을 통해 희망사회당은 '이념 정당'보다는 '사회 연대 정당'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16]같은 해 10월, 희망사회당은 당 미래전략기획단을 구성하고 '탈배제 강령'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금민을 새 대표로 선출하고 당명도 '한국사회당'으로 변경했다.[16]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사회당은 금민을 후보로 내세우고 '새로운 진보, 담대한 제안'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과거 '사회주의', '좌파'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급진적인 이미지를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 '복지·교육·고용이 선순환을 이루는 대안경제' 등 비교적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당내에서는 우경화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6] 결국 금민 후보는 0.1%의 득표율(18,000여 표)을 얻는 데 그쳤다.[16]
2. 5. 사회당 (2008-2012)
18대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2%를 넘기지 못해 2008년 4월 15일 자로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으나,[11] 7월경 선거관리위원회에 '사회당'으로 재등록했다.2008년 11월 29~30일, 사회당 창당 10주년 기념행사와 12차 당 대회를 개최하여 '최광은' 전 대표를 다시 사회당 대표로 선출했다.[17] 최광은 대표는 사회당 10년의 과제로 '계급과 지역을 기반으로 저항과 대안의 결합으로 사회적 공화국 건설'을 꼽았다.[17]
2009년 11월 29일 사회당 13차 당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정당 사상 최초로 기본소득을 강령의 핵심적인 지위로 올려놓았으며,[18] 강령을 포함한 당헌 개정과 기본소득의 구체적 내용을 담은 부속강령이 제정되었다.
2012년 사회당 16차 당 대회를 개최하여 진보신당과 합당을 위한 수임기구 설치를 결의 및 설치하였다.[11] 2월 7일에는 사회당이 진보신당에 흡수되는 방식의 합당에 잠정 합의하였으나,[5] 당내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5] 그러나 2월 19일에 당대회를 개최하여 진보신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담당 기구를 설치하는 안건을 찬성 다수로 가결하였다.[6] 합당 추진을 위해 설치된 담당 기구에서의 실무 협의를 거쳐, 3월 4일에 진보신당과 통합 당대회를 개최하고, 통합 정당으로서 “진보신당”이 발족하였다.
3. 성격
사회당의 성격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1998년 11월 "노동자·민중의 정당"을 표방하며 결성된 청년진보당이 그 전신이다. 2001년 8월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후, 2008년 10월 현재의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회적 공화주의 정치 이념과 기본소득제도(베이직 인컴)를 강령에 내걸고 있었다.[3] 또한 북한에 대해서는 2001년 8월 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거는 등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3]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며 결성된 국민승리21은 대한민국 진보 세력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였으나, 계급 투쟁에 집중한 반대파 진보 진영은 국민승리21 강령에 민족주의가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그 예로 그들은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였던 권영길의 슬로건인 "일어나라 코리아!"를 지적했다. 선거 후, 이러한 반대파 진보 진영은 청년진보당을 결성했다.
청년진보당은 국회 구로구 지역구 선거에 출마하여 4.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6년 4월에는 정당명을 "희망사회당"으로, 2006년 10월에는 등록이 취소될 경우 4년간 동일한 정당명을 사용할 수 없다는 한국 법률 때문에 "한국사회당"으로 변경했다.
2008년 총선에서 해당 정당은 3%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결과적으로 등록을 취소했다. 11월, 정당은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재등록했다.
당 창립 이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에서 후보를 추천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2011년 9월 14일, 혁신정당인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해소된 후, 진보신당 내부에서 통합 추진을 계속 진행하려는 그룹과 이에 반대하는 그룹 간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은주 진보신당 권한대행과 안효상 사회당 대표의 회담이 이루어져, 양당이 광범위한 진보·혁신 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4]
2012년 2월 7일, 사회당이 진보신당에 흡수되는 방식의 합당에 잠정 합의하였으나, 당내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5] 그러나 사회당은 2월 19일에 당대회를 개최하여 진보신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담당 기구를 설치하는 안건을 찬성 다수로 가결하였다.[6] 합당 추진을 위해 설치된 담당 기구에서의 실무 협의를 거쳐, 3월 4일에 진보신당과 통합 당대회를 개최하고, 통합 정당으로서 “진보신당”이 발족하였다.
3. 1. 계급 투쟁 강조 (초기)
이 당의 성격은 창당 이래 약 10년 동안 조금씩 바뀌어 왔다. 청년진보당은 2008년 기준으로 국회에 의석이 있는 유일한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과 비교할 때 더 계급 투쟁적인 성향을 띠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때 ‘국민 후보’를 마련하자는 움직임이 일며 권영길이 등장했는데, 당시 진보 진영에는 이를 두고 ‘몰계급적’이라며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당시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몰락을 전후하여 사회 운동에 투신하여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사회 운동의 주류를 많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훗날 청년진보당을 이루게 되는 그룹은 권영길 국민후보론에 대해 계급 정치가 아닌 대중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후 이들이 만든 청년진보당 역시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에 비해 좀 더 계급적이고 좌파적인 성향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뒷날 사회당이 된 청년진보당은 2002년 발표한 〈통일좌파〉라는 글에서 청년진보당이 대한민국의 좌파를 통합해 사회당으로 창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청년진보당의 진짜 뜻은 오직 미(未)사회당일 뿐이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3. 2. 사회주의 표방 (사회당 시절)
청년진보당에서 사회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 이 당은 '반조선로동당'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15] 이는 민주노동당 안의 비중 있는 정파인 민족 해방 세력을 의식한 것이었다.사회당은 정치적 선명성을 강하게 내세웠다. 서울특별시장에 입후보한 원용수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저는 사회주의자입니다.”라고 선언하였고, 김영규를 내세운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슬로건으로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을 사용해 그간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했다.
2001년 8월,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조선로동당에 반대한다"는 슬로건 아래 정당명을 "사회당"으로 변경했고, 민주노동당 내 "NL"(민족 해방)파로 알려진 특정 민족주의자들을 겨냥했다.
3. 3. 사회 연대 추구 (희망사회당 이후)
'희망사회당'은 '사람연대' 사업을 통해 사회 연대 정당으로의 변화를 모색했다. '사람연대'는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을 향한 연대'의 줄임말로, 지역별 풀뿌리 민중 조직을 만들어 장애인 교육, 어린이 센터 운영 등 당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연대 운동 단체였다.2006년, 희망사회당은 당 미래전략기획단을 구성하고 '탈배제 강령'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금민을 새 대표로 선출하고 당명도 '한국사회당'으로 변경했다.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사회당'은 '새로운 진보, 담대한 제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과거 '사회주의', '좌파'와 같은 급진적인 표현 대신,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 '복지·교육·고용이 선순환을 이루는 대안경제' 등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정책을 제시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당이 우경화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6]
2008년에는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한 그룹이 주도한 진보신당과의 통합이나 총선 연대가 논의되었으나, 2008년 총선 이후 공식적인 논의는 중단되었다. 다만, 일부 당원들이 사회당을 탈당하여 진보신당에 합류하기도 했다.
3. 4. 기본소득 도입 (2009년 이후)
2009년 11월 29일에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기본소득을 강령에 포함시켰다.[18] 이 당대회에서는 강령을 포함한 당헌 개정이 진행되었으며, 기본소득의 구체적 내용을 담은 부속강령이 제정되었다.4. 주요 선거 결과
사회당은 여러 차례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재보궐선거에 참여했지만, 원내 진출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선거 종류 | 선거일 | 후보 및 결과 | 비고 |
---|---|---|---|
구로구 을 재보궐선거 | 1999년 3월 | 후보자 추천 (낙선) | |
제16대 총선 | 2000년 4월 13일 | 서울특별시 전 지역구와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에 후보자 추천 (낙선, 득표율 0.7%) | |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 2001년 10월 |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과 동대문구 을에 후보자 추천 (낙선) |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02년 6월 13일 |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3명, 광역의회 선거 22명 (지역구 6명 + 비례대표 16명) 추천. 전원 낙선, 광역의회 비례대표 261,960표 (득표율 1.59%) | |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 2002년 8월 | 금천구에 후보자 추천 (낙선) | |
제17대 총선 | 2004년 4월 15일 | 지역구 5명, 비례대표 1명 출마. 비례대표 47,311표 (득표율 0.22%) |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06년 5월 31일 | 광역의회 선거 8명 (지역구 4명 + 비례대표 4명), 기초의회 4명 (지역구 4명) 추천. 전원 낙선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 0.2%) | 희망사회당으로 당명 변경 후 참여 |
국회의원 보궐선거 | 2007년 4월 | 대구광역시 서구 을에 후보자 추천 (낙선) | 한국사회당으로 당명 변경 후 참여 |
제18대 총선 | 2008년 4월 9일 | 비례대표 후보 2명 추천, 35,496표 (득표율 0.20%) |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10년 6월 | 광역의회 비례대표 선거 16명, 기초의회 7명 후보자 추천. 광역의회 비례 81,257표 (득표율 0.4%) |
4. 1. 대통령 선거
2002년 대선에서 김영규는 TV 토론회에서 자신을 '사회주의 대통령 후보'로 소개해 약간의 이슈가 되었다. 김영규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해,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했다.(22,063표, 0.1% 득표)[14]2007년 대선에는 금민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큰 호응을 끌지는 못하였다.(18,223표, 0.07%)[15] 2007년 대선에서는 ‘새로운 진보, 담대한 제안’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했으며, ‘재벌 해체’ 대신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 ‘복지·교육·고용이 선순환을 이루는 대안경제’ 등 비교적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들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당이 우경화했다는 비판도 나왔다.[16]
4. 2. 국회의원 선거
선거 | 대표 | 지역구 | 비례대표 | 의석 수 | 순위 | 상태 | |||||||
---|---|---|---|---|---|---|---|---|---|---|---|---|---|
득표수 | % | 의석 수 | +/- | 득표수 | % | 의석 수 | +/- | 총 의석 수 | +/– | ||||
2000년 | 0.7% | 0석 | 신규 | 0석 | 신규 | 0석 | 신규 | ||||||
2004년 | 금민 | 8,004 | 0.04 | 0석 | 47,311 | 0.22 | 0석 | 0석 | 9위 | ||||
2008년 | 안효상 | colspan="4" bgcolor="lightgrey" | | 35,496 | 0.21 | 0석 | 동일 | 0석 | 동일 | 11위 |
2000년 총선에서는 '청년좌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 전 지역구와 인천 부평구에 후보자를 공천하여 12만 5천여 표, 평균 3%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지역구 득표율 0.7%로 원내 입성에 실패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정당 등록 취소 결정을 받았다.[14]
2004년 총선에서도 지역구 득표율 0.04%, 비례대표 득표율 0.22%로 원내 입성에 실패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정당 등록 취소 결정을 받았다.[14]
2008년 총선에서는 '초록좌파' 슬로건으로 비례대표 후보 2명이 출마해 35,496표(약 0.2%)를 획득했으나, 정당 득표율 2% 미만으로 2008년 4월 15일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5. 평가
사회당은 대한민국 정치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다양한 진보적 의제를 제시하며 정치적 다양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기본소득 도입 주장은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되었다.[3] 그러나 잦은 당명 변경과 노선 변화는 당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원내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사회당은 대한민국 정치 지형에 다양성을 부여하고, 이후 기본소득 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사회당, 진보신당과의 합당을 위한 수임기관 설치
http://www.sp.or.kr/[...]
Socialist Party
2012-03-08
[2]
뉴스
社会党+進歩新党統合、「看板ではなく人生を変える」
http://www.labornetj[...]
2012-03-05
[3]
웹사이트
世間では無名の政党でも江南バラック街では第一野党
http://www.jrcl.net/[...]
かけはし(日本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機関紙)
2012-06-02
[4]
웹사이트
[브리핑] 진보신당 김은주 대표 권한대행-사회당 안효상 대표 회담 결과([ブリーフィング]進歩新党キム・ウンジュ代表権限代行-社会党アン・ヒョサン代表会談結果)
http://www.newjinbo.[...]
진보신당ホームページ
2011-09-22
[5]
뉴스
社会党と進歩新党、吸収党統合の形式での統合に合意
http://www.labornetj[...]
2012-02-15
[6]
뉴스
進歩新党-社会党が3月4日に合党大会
http://www.labornetj[...]
2012-02-20
[7]
뉴스인용
금민 한국사회당 대표 전격 사퇴 - “대선 결과 책임지겠다..진보정치 혁신안 제안할 것”
http://www.newscham.[...]
참세상
2008-01-02
[8]
뉴스인용
한국사회당 새대표로 최광은 후보 선출 -최광은 "예정된 패배 향해 달려가지만, 총선 이후 씨앗 건져야"
http://www.newscham.[...]
참세상
2008-03-26
[9]
뉴스인용
최광은 새 사회당 대표 선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적 공화국 건설”
http://www.prometheu[...]
프로메테우스
2009-02-05
[10]
웹인용
[결과공고]당 대표 선거결과
http://sp.or.kr/sp20[...]
사회당
2010-11-16
[11]
웹사이트
한국 사회당의 브리핑
http://www.sp.or.kr/[...]
[12]
뉴스인용
1998년 11월 29일의 청년진보당, 그 후 8년 - 김철수 전 사추위 대표, 창당 8주년 행사에서 한국사회당 입당
http://www.prometheu[...]
프로메테우스
2008-01-02
[13]
뉴스인용
“진보, 낡은 사고방식에 묶여 사회개혁에 무능했다” - 금민 한국사회당 대표, 사회적공화주의 대안으로 제시
http://www.cnbnews.c[...]
CNBNEWS
2008-01-02
[14]
웹인용
홈 > 선거 바로알기 > 대한민국선거사 > 정당사 연표
http://museum.nec.go[...]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20-09-14
[15]
뉴스인용
사회당-민주노동당 `반조선노동당'논쟁
http://www.hani.co.k[...]
한겨레
2009-02-05
[16]
뉴스인용
내가 우경화? ‘왼쪽’이란 게 있기는 한가
http://www.newscham.[...]
참세상
2008-03-26
[17]
뉴스인용
사회당 10년 -“사회대안 수립이 사회당의 과제”
http://www.prometheu[...]
프로메테우스
2009-02-05
[18]
웹인용
[브리핑] 사회당, 13차 당대회에서 ‘기본소득 강령’ 채택
http://www.sp.or.kr/[...]
사회당
200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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