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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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해관 전투는 1644년 5월 27일, 명나라와 청나라, 이자성이 이끄는 순나라 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명나라의 쇠퇴와 이자성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명나라 장군 오삼계는 청나라 군과 연합하여 이자성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투 이후 청나라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순치제를 황제로 옹립하여 중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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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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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명칭 | 산해관 전투 |
위치 |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산해관 |
좌표 | 39°58′44″N 119°46′32″E |
날짜 | 1644년 5월 27일 |
교전 세력 | 청나라 명나라 (산해관 수비군) |
상대 세력 | 순나라 |
전투 결과 | 청나라의 승리 |
![]() | |
교전 세력 상세 | |
청나라 | 지휘관: 도르곤 병력: 60,000명 |
명나라 (산해관 수비군) | 지휘관: 오삼계 병력: 약 100,000명 (현지 민병대 포함) |
순나라 | 지휘관: 이자성 병력: 60,000명 ~ 100,000명 (추정) |
전투 맥락 | |
관련 전쟁 | 명청 교체 |
추가 정보 | |
사상자 | 알 수 없음 |
2. 배경
명나라 말기, 내정은 혼란스러웠고 북쪽에서는 외세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명나라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황제가 된 후 청나라는 명나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1642년 초에는 명나라 북부 국경의 주요 요새 대부분이 청나라에 함락되었다.[4] 이로 인해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과 청나라 사이에는 오삼계가 이끄는 군대만이 남게 되었다.[5]
1643년 9월, 홍타이지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와 도르곤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조정 대신들은 당시 5살이었던 순치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도르곤과 지르가랑에게 섭정을 맡겼다.[8] 그러나 지르가랑의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청나라의 정치는 도르곤이 주도하게 되었다.[9]
한편 명나라 내부에서도 1644년 2월, 이자성이 시안에서 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는 등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45]
2. 1. 명나라의 쇠퇴와 멸망
명나라의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북쪽에서는 외세의 침입이 점점 거세지면서 명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명나라 황제들은 산해관의 전략적인 위치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자주 이 곳에서 군사 훈련을 벌였는데, 가끔씩은 거의 40,000여 명에 달하는 대군들이 모이기도 하였다. 홍타이지가 새롭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청나라는 점점 명나라에 적대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1642년 초에 명나라 북부 국경의 주요 군사 요새들이 대부분 청나라에 떨어지게 되었다.[4] 이로 인하여 명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과 청나라 사이에는 오삼계가 이끄는 군대만이 유일한 대규모 방패막으로 남게 되었다.[5] 1642년 여름, 청나라 군대는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북부 지방들을 점거하기 시작하였고, 1643년 5월에 철수하기 전까지 약 7달 동안 약탈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돌아갈 때 수많은 포로들과 노획한 전리품들을 챙겨갔고, 이 과정에서 그 어떠한 주요 군사적 제지도 받지 않았다.[6]1643년 9월, 홍타이지는 후계를 지명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7] 이후 홍타이지의 두 아들이었던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와 도르곤 사이에서 일어날 분쟁을 막기 위해서, 조정 대신들은 당시 5살이었던 순치제에게 황위를 맡겼다. 이후 도르곤과 지르가랑에게 부관직을 맡겨 내치를 안정시키게 하였다.[8] 하지만 지르가랑이 정치적 식견이 부족했던 탓에, 청나라의 정치는 도르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9]
도르곤과 그의 부하들이 북쪽에서 명나라를 무너뜨릴 계획을 짜고 있는 동안, 명나라 내부에서도 점차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644년 2월, 반란군의 지도자 이자성이 시안에서 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였으며,[45] 이후 3월에는 산시성의 타이위안을 점령하였다.[47] 반란군의 진격에 불안을 느낀 명나라의 숭정제는 4월 5일에 칙령을 내려 제국 전역에 있는 군사령관들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10] 숭정제는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힘썼는데, 이때 오삼계를 포함한 4명의 장군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하였다. 당시 이 4명의 장군들 중 유일하게 베이징에 있던 당통 장군은 수도의 방비를 강화하고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핵심 요새인 거용관을 지키러 떠났다. 하지만 4월 22일, 명나라 조정은 당통 장군이 전날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이미 항복했으며, 반란군은 베이징에서 65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13] 이자성과 그의 반란군들은 4월 23일에 베이징의 교외 지역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대규모 약탈을 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항복한 장군들을 숭정제에게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숭정제가 이를 거부하자 24일에 베이징을 공격해 함락시키며 도성 내부로 진입하였으며, 숭정제는 자금성 뒤쪽 언덕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황제가 도움을 청한 직후, 오삼계 장군은 닝위안현에 있는 그의 기지를 떠나 수도로 진군하였다. 4월 26일, 그의 군대는 산해관을 지나쳤으나, 그 곳에서 이미 베이징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산해관으로 돌아와 그 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자성이 두 번의 군대를 보내 오삼계의 군대를 깨뜨리려 하였으나, 잘 훈련된 오삼계의 명나라 군대는 이들을 모두 쉽게 물리쳤다. 이자성은 그의 위치를 굳히기 위하여 오삼계를 없애기로 마음먹었고, 5월 18일에 직접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오삼계는 폭도들을 쫓아내고 명나라를 재건하기 위하여 도르곤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삼계가 닝위안현을 떠난 이후 만리장성 북부의 모든 영토는 청나라 관할 하에 떨어졌다. 도르곤의 부관들은 이번 기회에 아예 베이징을 점령하고 천자의 자리를 가지라고 조언하였다. 도르곤이 오삼계의 도움 요청을 받았을 적에, 그는 이미 명나라를 치기 위한 원정에 막 나선 참이었으며, 명나라의 재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청나라의 편에 서라고 역제안하였으며, 오삼계는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승낙하였다.
2. 2. 이자성의 난과 순나라 건국
1644년 2월, 반란군의 지도자 이자성이 시안에서 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45] 이후 3월에는 산시성의 타이위안을 점령하였다.[47]반란군의 진격에 불안을 느낀 명나라의 숭정제는 4월 5일에 칙령을 내려 제국 전역에 있는 군사령관들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10] 숭정제는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힘썼는데, 이때 오삼계를 포함한 4명의 장군들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하였다.[11] 당시 이 4명의 장군들 중 유일하게 베이징에 있던 당통 장군은 수도의 방비를 강화하고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핵심 요새인 거용관을 지키러 떠났다.[12] 그러나 4월 22일, 명나라 조정은 당통 장군이 전날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이미 항복했으며,[13] 반란군은 베이징에서 6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자성과 그의 반란군들은 4월 23일에 베이징의 교외 지역에 도달하였다.[50] 그들은 대규모 약탈을 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항복한 장군들을 숭정제에게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지만[14] 숭정제가 이를 거부하자[15] 24일에 베이징을 공격해 함락시키며 도성 내부로 진입하였으며,[52][53] 숭정제는 자금성 뒤쪽 언덕(경산공원)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2. 3. 오삼계의 선택과 청나라와의 동맹
이자성이 시안에서 순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한 후, 그의 군대는 산시성의 타이위안을 점령하는 등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이에 명나라 숭정제는 1644년 4월 5일, 제국 내 모든 군사 지휘관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10] 숭정제는 군부 엘리트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삼계를 포함한 네 명의 장군에게 백작 칭호를 하사했다.[11]황제의 지원 요청에 따라, 오삼계는 닝위안현의 기지를 떠나 수도로 향했다. 그러나 4월 26일, 산해관을 지나던 중 베이징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해관으로 돌아갔다.[16] 이자성은 오삼계를 제거하기 위해 두 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오삼계의 군대는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17] 이자성은 5월 18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군했다.[17]
한편, 오삼계는 도르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도르곤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 중이었으며, 오삼계의 요청을 받고 청나라의 편에 설 것을 제안했다. 오삼계는 이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19] 오삼계가 닝위안을 떠난 후, 만리장성 북부의 모든 영토는 청나라의 관할 하에 있었다.[18]
다음은 주요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표이다.
날짜 | 사건 |
---|---|
4월 5일 | 숭정제, 제국 내 모든 군사 지휘관에게 긴급 지원 요청.[10] |
4월 6일 | 오삼계, 닝위안에서 산해관으로 군대 이동 명령 받음.[11] |
4월 11일 | 숭정제, 오삼계 등에게 백작 칭호 하사.[11] |
4월 26일 | 오삼계, 베이징 함락 소식을 듣고 산해관으로 귀환.[16] |
5월 5일, 10일 | 오삼계, 이자성이 보낸 군대를 격파.[17] |
5월 18일 | 이자성,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군.[17] |
5월 20일 | 오삼계, 도르곤에게 도움 요청.[56] |
5월 25일 | 도르곤, 오삼계에게 청나라 협력 제안, 오삼계 수락.[21] |
1644년 5월 27일 저녁, 도르곤이 이끄는 청나라 주력 군대가 산해관에 도착했고, 오삼계는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오삼계는 병사들에게 흰 옷감을 등에 붙여 이자성의 반란군과 구별하도록 했다.[21] 오삼계 군대는 선봉에 서서 이자성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반란군은 혼란스러운 배치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을 유지했다.[22] 프레데릭 와크먼에 따르면, 오삼계 군대는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으며, 오후 늦게 오삼계 군대가 패배 직전에 이르렀을 때 격렬한 모래 폭풍이 전장을 덮쳤다고 한다.[22]
3. 전투
이때 도르곤이 개입하여 청나라 기병대가 오삼계 군대의 우익을 지원하며 이자성 반군의 좌익을 공격했다.[22] 삭발한 머리를 한 청나라 기병대가 폭풍 속에서 돌진해 오는 것을 본 이자성의 군대는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쳤다.[22] 좌익이 무너지면서 이자성 군대는 궤멸되었고, 영평으로 후퇴하던 중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23]
이자성은 산해관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군대의 존재를 몰랐거나, 그들의 군세를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자성이 청나라 군대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렇게 무리하게 전투를 진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이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청나라 기록에는 이자성 반군의 수가 약 20만 명에 달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24] 현대 사학자들은 6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3. 1. 전투 준비
산해관之戰중국어은 1644년 5월 27일에 벌어졌지만, 이 전투는 특별한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앞서고 뒤따랐다. 다음은 주요 사건들의 연표이다.
날짜 | 사건 |
---|---|
2월 8일 | 이자성이 시안에서 대순 왕조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왕 王)으로 칭함.[45] |
3월 5일 | 도르곤이 이자성에게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의 군대를 통합하기 위한 계획을 공동으로 마련"할 것을 제안하는 우호적인 편지를 보냄.[18] |
3월 17일 | 이자성이 직접 이끄는 순군은 타이위안(산시성)을 점령.[47] |
4월 5일 | 숭정제는 제국의 모든 군사 지휘관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요청.[10] |
4월 6일 | 오삼계는 닝위안에서 산해관으로 군대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음.[11] 오삼계가 떠난 후 만리장성 밖의 모든 영토는 청나라의 지배하에 놓임.[18] |
4월 11일 | 숭정제는 오삼계, 탕퉁(唐通) 및 두 명의 다른 장군을 백작(보 伯)으로 임명.[11] 오삼계는 "서쪽을 평정한 백작" (핑시보 平西伯)이 됨.[48] |
4월 21일 | 이자성의 북방군은 거용관에 도착했고, 탕퉁은 싸우지 않고 항복.[11] |
4월 22일 | 이자성은 창핑을 점령하고, 명나라 황릉 일부를 불태움.[49] 숭정 조정은 탕퉁이 전날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음.[13] |
4월 23일 | 이자성의 군대는 베이징 서쪽 교외에 도착하여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50] |
4월 24일 | 환관이 성문 중 하나를 이자성의 군대에 열었다.[52] |
4월 25일 | 숭정제는 자금성 뒤 언덕에서 자살. |
4월 26일 | 산해관에서 수도까지 중간 지점인 펑룬(豐潤)에 도착한 오삼계는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해관으로 돌아감.[16] |
5월 3일 | 이자성은 탕퉁을 산해관에서 오삼계를 공격하도록 보냄.[17] |
5월 5일 | 오삼계는 탕퉁의 군대를 격파.[17] |
5월 10일 | 탕퉁의 패배한 군대는 바이광언(白廣恩)이 이끄는 증원군과 함께 산해관으로 돌아갔지만, 연합군은 다시 오삼계에게 패배.[17] |
5월 13일 | 이자성이 전 명나라 관리들과 베이징 주민들을 잔혹하게 대하고 있다는 소식이 청나라 수도 무순에 전해짐. 판원청(范文程)은 이 소식을 이용하여 청나라가 중국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18] |
5월 14일 | 도르곤은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무순에서 만리장성을 향해 남쪽으로 행군.[54] |
5월 18일 | 이자성은 산해관을 직접 점령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베이징을 떠남.[55] |
5월 20일 | 오삼계의 부관 두 명이 랴오강에 있는 도르곤의 진영에 도착하여 만주족에게 오삼계를 도와 이자성의 군대를 격파하고 명나라 왕조를 부활시켜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 같은 날 늦게 만주족은 숭정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음.[54]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순 반군을 멸망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대가로 청나라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냄.[54] |
5월 25일 | 도르곤은 오삼계가 청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동의했다는 확인 서한을 받음. 그는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향해 강행군.[21] 같은 날, 이자성의 군대는 이미 산해관 외곽, 산해관 수비대에서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사강 근처에 야영, 오삼계는 그곳에서 그와 대적하기 위해 병력을 보냄.[20] |
5월 26일 | 24시간 만에 150km 이상을 이동한 도르곤의 군대는 몇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기 위해 관문에서 8km 떨어진 곳에 정착. 그들은 자정에 깨어나 행군을 계속.[21] |
5월 25일, 이자성은 자신의 군대를 산해관 서쪽에 있는 강을 건너게 했다. 이자성은 인근 언덕에 포로로 잡은 2명의 명나라 황자들과 함께 진지를 차렸다. 오삼계는 신뢰하는 부관 2명에게 산해관의 남쪽과 북쪽 벽의 방비를 맡겼고, 민병대에게 산해관의 동쪽 벽을 지키게 하였다. 한편 자신은 강을 마주보고 있는 이자성의 군대에 맞설 준비를 하였다.[20]
같은 날, 도르곤은 오삼계가 이자성의 반군들을 소탕하는데 청나라의 도움을 받고 싶어하며, 이 대가로 청나라에 충성을 바칠 것이라는 편지를 받았다. 도르곤은 즉시 산해관으로 진군하였고, 하룻 밤만에 약 150km에 달하는 거리를 강행군하였다. 5월 26일 아침, 도르곤의 군대는 산해관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숙소를 지었고, 병사들은 갑옷도 벗지 않은 채로 잠에 들었다. 이들은 깨어난 직후 다시 행군하였으며, 도르곤은 군대의 중앙에 서서 이 모든 것을 통솔하였다.[21]
3. 2. 전투 경과
5월 27일 저녁, 도르곤이 이끄는 청나라 주력 군대가 산해관에 도착했고, 오삼계는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오삼계는 병사들에게 흰 옷감을 등에 붙여 이자성의 반란군과 구별하도록 했다.[21] 오삼계 군대는 선봉에 서서 이자성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반란군은 혼란스러운 배치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을 유지했다.[22] 오삼계 군대는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프레데릭 와크먼에 따르면, 오후 늦게 오삼계 군대가 패배 직전에 이르렀을 때 격렬한 모래 폭풍이 전장을 덮쳤다고 한다.[22]이때 도르곤이 개입하여 청나라 기병대가 오삼계 군대의 우익을 지원하며 이자성 반군의 좌익을 공격했다.[22] 삭발한 머리를 한 청나라 기병대가 폭풍 속에서 돌진해 오는 것을 본 이자성의 군대는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망쳤다.[22] 좌익이 무너지면서 이자성 군대는 궤멸되었고, 영평으로 후퇴하던 중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23]
이자성은 산해관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군대의 존재를 몰랐거나, 그들의 군세를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자성이 청나라 군대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렇게 무리하게 전투를 진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3. 3. 병력 규모 논란
이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수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전투를 기록한 청나라의 기록에는 특히 이자성 반군의 수에 대한 과장이 심한데, 이는 대군을 상대로 맞서 싸운 청나라 기병들의 용맹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들에는 이자성의 반군 수가 약 20만 명에 달했다고 기술되어 있다.[24] 현대 사학자들은 이 자료들을 거의 믿지 않고, 약 60,000여 명에서 100,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프레데릭 와크먼은 그러한 자료가 순(順)나라에 대한 청나라의 군사적 위용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자성의 군대 수를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24] 와크먼은 이자성의 군대에 대해 6만 명으로 추산하는 반면, 프레데릭 모트는 이자성이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지휘했다고 주장한다.[25]
오삼계의 병력에 대한 추산은 4만 명에서 8만 명에 이르며, 민병대까지 합하면 총 10만 명에 달한다. 와크먼은 오삼계의 "정규군"은 4만 명이었지만, "자신의 병력 5만 명"을 지휘했고, 지역 민병대에서 5만 명을 모았다고 주장한다.[24] 반면 모트는 오삼계가 1644년 4월 닝위안(寧遠)을 떠나 산해관으로 향했을 때 8만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산해관 전투 당일 2만 명에서 3만 명의 민병대가 자원하여 합류했다고 말한다.[26] 앤젤라 시(Angela Hsi)는 동시대 자료를 인용하여 오삼계가 4만 명의 병력("당대 최고의 군사력 중 하나")을 이끌었고, "뛰어난 전투력으로 명성이 높았던" 요동 거주민 7만 명의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27]
4. 전투 이후
산해관 전투 이후, 이자성이 세운 순 왕조는 몰락하고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은 군사적 승리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동반하며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자성은 1644년 5월 27일 베이징으로 퇴각하면서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했고, 6월 3일 자금성에서 황제로 즉위했지만, 42일 만에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30][31] 베이징 시민들은 도망치지 못한 반란군 2,000여 명을 학살했다.[32]
반면, 오삼계는 청나라와 협력하여 5월 28일 핑시왕(平西王)으로 승격되었고,[37] 그의 군대는 변발을 하고 청나라 주력 부대에 합류했다.[37]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이자성을 추격하도록 명령했지만, 이자성은 산시성으로 도망쳤고, 오삼계는 추격을 중단했다.[38][39]
1644년 10월, 도르곤은 군대를 보내 이자성을 시안에서 몰아냈고,[41] 이자성은 1645년 9월 자살하거나 살해되었다.[42][43]
순치제는 1644년 11월 8일 중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패권이 넘어갔음을 알렸다.[36] 그러나 청나라의 중국 통일은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1645년 "변발령"은 저항을 격화시켰고,[44]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1662년 오삼계에게 살해되었다. 삼번의 난(1673~1681)과 정성공 세력 진압(1683) 이후에야 청나라는 비로소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게 되었다.
4. 1. 이자성의 몰락과 순나라의 멸망
5월 27일, 이자성은 대부분의 병력과 신하들이 이미 수도로 도망친 상황에서 베이징으로 향했다.[28] 다음 날 이자성은 베이징에 도착하여 병사들이 궁궐, 관청, 주택을 약탈하도록 방치했다.[30] 6월 3일, 자금성 무영궁에서 '대순'의 황제로 즉위했으나,[31] 42일 후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서쪽으로 도망쳤다.[30] 베이징 시민들은 미처 도망치지 못한 반란군 약 2,000명을 학살했다.[32]6월 5일, 베이징 시민들은 오삼계를 맞이할 준비를 했으나, 명나라 황족과 오삼계가 함께 귀환하기를 바랐던 기대와는 달리, 도르곤과 오삼계가 함께 수도에 들어왔다.[33] 도르곤은 동화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전 황실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지배를 공고히 했다.[34] 10월 19일, 도르곤은 순치제를 베이징으로 맞이했으며,[35] 순치제는 1644년 11월 8일에 공식적으로 중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중국 대륙의 패권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갔음을 알렸다.[36]
5월 28일, 오삼계는 핑시백(平西伯)에서 핑시왕(平西王)으로 승격되었고,[37] 그의 군대는 머리를 깎고 청나라 주력 부대에 합류했다.[37] 베이징에 입성한 직후,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이자성을 추격하도록 명령했다.[38] 오삼계는 이자성의 후위 부대와 여러 차례 교전했지만, 이자성은 산시성으로 들어갔고, 오삼계는 추격을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39] 이자성은 1644년 2월 순 왕조를 선포했던 시안에 다시 근거지를 구축했다.[40]
1644년 10월, 도르곤은 여러 군대를 보내 이자성을 산시성에서 몰아냈다.[41] 아이지, 도도, 스팅주(石廷柱)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는 산시성에서 순나라 군대를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고, 1645년 2월 이자성은 시안을 떠나 여러 성을 거쳐 후퇴하다가 1645년 9월 자살했거나 자위 농민 집단에 의해 살해되었다.[43]
4. 2. 청나라의 중원 장악과 중국 통일
順治帝중국어가 1644년 11월 8일에 공식적으로 중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중국 대륙의 패권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게 되었다.[36]1644년 6월 5일, 베이징 시민들은 이자성을 무찌른 오삼계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황족들과 오삼계가 함께 귀환하기를 바랐던 그들의 희망과는 달리, 수도에는 도르곤과 오삼계가 함께 들어왔고, 이들을 맞으러 나갔던 관료들과 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33] 도르곤은 동화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들어갔고,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전 황실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지배를 공고히 하려 노력하였다.[34] 도르곤은 10월 19일에 베이징으로 들어온 순치제를 환영했다.[35]
산해관 전투 이후, 이자성은 패배하고 베이징에서 후퇴했다. 1644년 5월 27일에 이자성과 그의 신하들은 베이징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고, 대부분의 병사들과 신하들은 이미 수도로 도망친 상태였다. 그 다음날에 이자성은 베이징에 도착하여 그의 병사들이 궁전들과 관청들, 그리고 주택들을 약탈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으며, 6월 3일 자금성의 무영궁에서 '대순'의 황제 자리에 즉위하였다.[31] 42일 동안 베이징에 머무른 이자성은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서쪽으로 도망쳤다.[30] 베이징의 시민들은 미처 이자성과 함께 도망가지 못한 약 2000여 명에 달하는 반란군들을 학살하였다.[32]
1644년 5월 28일, 오삼계의 명나라 작위인 핑시 백(平西伯)은 핑시 왕(平西王)으로 승격되었다.[37] 그의 군대는 머리를 깎고 청나라 주력 부대에 합류했다.[37] 베이징에 입성한 직후, 도르곤은 오삼계와 그의 군대를 보내 이자성을 추격하게 했다.[38] 우상계는 이자성의 후위 부대와 여러 차례 교전했지만, 이자성은 여전히 산해관을 넘어 산시성으로 들어갔다. 우상계는 추격을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39] 이자성은 1644년 2월 순 왕조를 선포했던 시안 (산시성)에 다시 근거지를 구축했다.[40]
1644년 여름과 가을에 허베이성과 산둥성에서 청나라 통치에 대한 반란을 진압한 후, 그해 10월 도르곤은 여러 군대를 보내 이자성을 산시성의 거점에서 몰아냈다.[41] 아이지, 도도, 스팅주(石廷柱)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는 산시성과 산시성에서 순나라 군대에 대한 연속적인 교전에서 승리하여 1645년 2월 이자성이 시안 본부를 떠나도록 강요했다.[42] 이자성은 여러 성을 거쳐 후퇴하다가 1645년 9월 자살했거나 자위 농민 집단에 의해 살해되었다.[43]
청나라의 중국 정복은 수십 년 더 지속되었다. 1645년 7월 21일의 "변발령"은 모든 중국 남성에게 만주족의 복장을 채택하고 이마를 깎고 남은 머리카락을 변발로 묶도록 강요하여 청나라 통치에 대한 저항을 격화시켰다.[44]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는 1662년 우상계에게 살해되었다. 우상계는 중국 남서부에 큰 영토를 부여받아 1673년 베이징으로 소환될 때까지 청나라를 위해 지역 영주로 통치했다. 그와 다른 세 명의 총독은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우상계는 1678년에 사망했지만, 삼번의 난은 1681년까지 지속되었다. 1683년 강희제 (재위 1662–1722)는 마지막 명나라 부흥 운동의 지도자인 정성공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기간의 공고화 이후 청나라는 1912년까지 중국을 지배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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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1644: Showdown At Shanhaiguan
http://www.china-def[...]
200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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