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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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우석은 1889년 전라남도 광주 출생으로, 경성공업전습소를 중퇴하고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만주에서 임성학교를 설립하고 동흥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귀국 후에는 전남구락부, 신간회 등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입문,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여순사건 조사, 민주당 활동 등을 거쳐 196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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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서우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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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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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89년 12월 6일 |
출생지 | 서울 중구 약현성당 |
사망일 | 1966년 12월 4일 |
사망지 | 서울 중구 사직동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 |
배우자 | 김의경 (김해 김씨) |
자녀 | 3남 6녀 |
2. 생애
호는 몽초/夢撨중국어로 1889년 11월 1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공업전습소 응용화학과(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설립으로 병합[1])를 중퇴하고 일본의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경기도 포천군에 위치한 사립 청성 제7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만주로 건너가 중국 길림성 연길부 화룡현에 임성학교를 설립했다. 간도 학성촌에 단군교 계열 동흥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귀국 후 1920년 8월 전남구락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1923년 5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 창립 총회의 집행위원, 1927년 12월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으로 활동, 1928년에는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으로 개최를 주도하였다.
이후 호남은행 본점 촉탁으로 근무하다 전남 해남군의 주식회사 해남흥산의 지배인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과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광주지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곡성군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1949년 여순사건 조사를 위한 반란수습대책위원 선정, 퇴임 후에도 1950년 부역자 심사위원, 1955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신익희와 장면 주도의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1956년 민주당 감찰위원, 1957년 민주당 고문을 역임하다[2] 1966년 서울 중구 사직동에서 사망하였다. 묘소는 포천시 설운리에 위치한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활동
호는 몽초(夢撨)로 1889년 11월 1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공업전습소 응용화학과(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설립으로 병합[1])를 중퇴하고 일본의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경기도 포천군에 위치한 사립 청성 제7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만주로 건너가 중국 길림성 연길부 화룡현에 임성학교를 설립했다. 간도 학성촌에 단군교 계열 동흥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귀국 후 1920년 8월 전남구락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1923년 5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 창립 총회의 집행위원, 1927년 12월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으로 활동, 1928년에는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으로 개최를 주도하였다.
이후 호남은행 본점 촉탁으로 근무하다 전남 해남군의 주식회사 해남흥산의 지배인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2. 2. 만주 독립운동 지원 및 교육 활동
경성공업전습소 응용화학과(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설립으로 병합[1])를 중퇴하고 일본의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경기도 포천군에 위치한 사립 청성 제7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만주로 건너가 중국 길림성 연길부 화룡현에 임성학교를 설립했다. 간도 학성촌에 단군교 계열 동흥학교의 교장을 지냈다.[2]2. 3. 국내 활동
몽초/夢撨중국어 서우석은 1889년 11월 1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공업전습소 응용화학과(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설립으로 병합[1])를 중퇴하고 일본의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경기도 포천군에 위치한 사립 청성 제7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만주로 건너가 중국 길림성 연길부 화룡현에 임성학교를 설립했다. 간도 학성촌에 단군교 계열 동흥학교의 교장을 지냈다.[2]1920년 8월 전남구락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다. 1923년 5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 창립 총회의 집행위원, 1927년 12월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으로 활동, 1928년에는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으로 개최를 주도하였다. 이후 호남은행 본점 촉탁으로 근무하다 전남 해남군의 주식회사 해남흥산의 지배인으로 재직하게 되었다.[2]
2. 4. 해방 이후 정치 활동
해방 후 서우석은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과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광주지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2]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였다.[2]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곡성군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2] 1949년 여순사건 조사를 위한 반란수습대책위원으로 선정되었다.[2] 퇴임 후에도 1950년 부역자 심사위원, 1955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신익희와 장면 주도의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1956년 민주당 감찰위원, 1957년 민주당 고문을 역임하였다.[2]
2. 5. 제헌 국회의원 활동
경성공업전습소 응용화학과(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설립으로 병합[1])를 중퇴하고 일본의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만주로 건너가 중국 길림성 연길부 화룡현에 임성학교를 설립했다. 간도 학성촌에 단군교 계열 동흥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1923년 5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 창립 총회의 집행위원, 1927년 12월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으로 활동, 1928년에는 광주상민대회 집행위원으로 개최를 주도하였다. 호남은행 본점 촉탁으로 근무하다 전남 해남군의 주식회사 해남흥산의 지배인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과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광주지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곡성군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1949년 여순사건 조사를 위한 반란수습대책위원 선정, 퇴임 후에도 1950년 부역자 심사위원, 1955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신익희와 장면 주도의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1956년 민주당 감찰위원, 1957년 민주당 고문을 역임했다.[2]2. 6. 제헌 국회 이후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였다.[2]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 위원과 한국민주당 광주지부 총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광주지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2]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곡성군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1949년 여순사건 조사를 위한 반란수습대책위원으로 선정되었다.[2] 퇴임 후에도 1950년 부역자 심사위원, 1955년 국민장위원회 위원과 신익희와 장면 주도의 민주당 창당 준비위원, 1956년 민주당 감찰위원, 1957년 민주당 고문을 역임하다[2] 1966년 서울특별시 중구 사직동에서 사망하였다. 묘소는 포천시 설운리에 있다.[2]3. 사망
4. 역대 선거 결과
서우석은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곡성군에 출마하여 61.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전남 광산군 을에 출마하였으나 9.8%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2]
웹사이트
http://encykorea.aks[...]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투자소식] "글로벌 팬덤 서비스 확장한다" 비마이프렌즈, 투자사에 미국VC 합류 – 바이라인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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