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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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익원은 1940년 경기도 오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법조인이다. 광주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창원지방검찰청 검사장,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를 지휘하여 고문 사실을 밝혀내는 데 기여했다. 1999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회고록 《따뜻한 날의 오후》를 통해 검찰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서익원은 1940년 경기도 오산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검사로 임용되었다.[2][3] '선비 검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1987년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시절 박종철 치사 사건 수사를 지휘하며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 사실을 밝혀냈다.[4] 이 수사로 인해 지방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 정구영 검찰총장 취임 후 대검찰청 간부로 복귀했다.[4] 그의 친구였던 정성진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서익원이 박종철 사건 당시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도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1993년 9월, 고시 동기인 김도언이 검찰총장에 취임하자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에서 퇴임했다.[6] 1993년 9월 신고한 공직자 재산은 536279KRW이었다.[5] 1997년 발병한 암이 재발하여 투병하던 중 1999년 회고록 《따뜻한 날의 오후》를 남기고 같은 해 4월 20일 사망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검찰이 투명하지 못한 수사와 정권의 사면권 남용 등으로 서민들만 법을 겁낼 뿐 높은 사람들은 법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검찰과 정권을 비판했고,[7] "평생 법으로 밥을 먹고 살았지만 법 없이도 살 수 있기를 바랐다"고 술회하며 검찰의 폭탄주 문화를 비판하기도 했다.[7]
2. 생애
2. 1. 초기 생애 및 학업
1940년 경기도 오산시에서 태어나[2]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비교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3] 1963년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으며,[2] 1964년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했다. 법무관 복무를 마친 뒤 1967년 12월 28일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검사로 발령받아 1968년 1월 1일 임용되었다.[2]
2. 2. 검사 임용 및 주요 경력
1963년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1964년 공군 법무관을 거쳤다.[2] 이후 1967년 12월 28일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검사로 발령받아 1968년 1월 1일부터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비교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3]
'선비 검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서익원은 1987년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재직하며 박종철 치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고문에 의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수사 결과로 인해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던 정구영은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차장검사였던 서익원과 주임검사였던 신창언은 지방 검찰청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이후 정구영이 1990년 12월 6일 제23대 검찰총장에 취임한 뒤, 1992년 7월 24일 인사에서 서익원은 대검찰청 형사부장, 신창언은 공판송무부장으로 임명되어 함께 대검찰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4]
서익원의 친구이자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정성진은 "박종철 사건 때 어려운 결단을 내려 역사에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한 번도 내색을 한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고등고시 동기인 김도언이 검찰총장에 취임하자, 서익원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1993년 9월 16일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을 떠났다.[6] 1993년 9월 신고한 공직자 재산은 536279KRW이었다.[5]
이후 암 투병 중 회고록 《따뜻한 날의 오후》를 남기고 1999년 4월 20일 사망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검찰이 투명하지 못한 수사와 정권의 사면권 남용 등으로 서민들만 법을 겁낼 뿐 높은 사람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평생 법으로 밥을 먹고 살았지만 법 없이도 살 수 있기를 바랐다"고 술회했다. 또한 검찰의 폭탄주 문화에 대해서도 "남의 괴로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7]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시기 ! 직책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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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검사 | 검사 임용 | |
사법연수원 교수 | | |
대검찰청 형사1과 과장 | | |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 | |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 차장검사 | | |
제20대 마산지청 지청장 | | |
대구고등검찰청 차장검사 | | |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박종철 치사 사건 수사 지휘 | |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 | | |
제6대 창원지방검찰청 검사장 | | |
대검찰청 형사부장 | 정구영 총장 취임 후 복귀 | |
제13대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 검찰 퇴임 | |
2. 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 지휘
'선비 검사'라는 별명을 가졌던 서익원은 1987년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재직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고문에 의한 조작된 사실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던 정구영은 이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서익원과 당시 주임검사였던 신창언은 모두 지방 검찰청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990년 12월 6일 정구영이 제23대 검찰총장에 취임한 이후, 1992년 7월 24일 인사에서 서익원은 대검찰청 형사부장으로, 신창언은 공판송무부장으로 임명되어 두 사람 모두 대검찰청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4]서익원의 친구이자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역임한 정성진은 "박종철 사건 때 어려운 결단을 내려 역사에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한번도 내색을 한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2. 4. 검찰총장 재임 및 퇴임
고등고시 동기생인 김도언이 검찰총장에 취임하자, 서익원은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1993년 9월 16일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에서 물러났다.[6]1997년 발병했던 암이 1999년에 재발하여 투병 생활을 하던 중 회고록 《따뜻한 날의 오후》를 남겼으며, 같은 해 4월 20일 사망했다.
서익원은 회고록에서 검찰 조직과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검찰이 투명하지 못한 수사와 정권의 사면권 남용 등으로 서민들만 법을 겁낼 뿐 높은 사람들은 법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검사 시절 겪었던 일들에 대해 "검사라는 직업 때문에 부탁과 기대가 많았지만 대부분 못 본 체하고 넘겼다"고 술회하며, "평생 법으로 밥을 먹고 살았지만 법 없이도 살 수 있기를 바랐다"는 소회를 밝혔다. 검찰 내부 문화에 대해서도 비판했는데, 특히 폭탄주 문화에 대해 "남의 괴로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7]
2. 5. 사망 및 회고록
1997년 발병했던 암이 1999년에 재발하여 투병 생활을 하던 중 회고록 《따뜻한 날의 오후》를 남겼으며, 1999년 4월 20일 사망했다.서익원은 1999년에 출판한 회고록 《따뜻한 날의 오후》에서 검찰과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검찰이 투명하지 못한 수사와 정권의 사면권 남용 등으로 서민들만 법을 겁낼 뿐 높은 사람들은 법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7] 또한 "검사라는 직업 때문에 부탁과 기대가 많았지만 대부분 못본체하고 넘겼다"고 술회하며, "평생 법으로 밥을 먹고 살았지만 법 없이도 살 수 있기를 바랐다"는 소회를 밝혔다.[7] 검찰 내부의 폭탄주 문화에 대해서도 "남의 괴로움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7]
3. 주요 경력
- 1968년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검사
- 1980년 사법연수원 교수
- 1981년 대검찰청 형사1과 과장
- 1982년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 1983년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 차장검사
- 1983년 8월 17일 ~ 1983년 8월 31일 제20대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 지청장
- 1983년 9월 1일 ~ 대검찰청 형사부장
- 1987년 대구고등검찰청 차장검사
- 1987년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1988년 8월 19일 ~ 1990년 3월 26일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
- 1990년 3월 27일 ~ 1992년 7월 28일 제6대 창원지방검찰청 검사장
- 1993년 3월 17일 ~ 1993년 9월 20일 제13대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4. 저서
- 1999년 회고록 《따뜻한 날의 오후》
참조
[1]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9-04-21
[2]
웹사이트
국회의원 김경진 웹사이트
https://blog.naver.c[...]
[3]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67-12-28
[4]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2-07-31
[5]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3-09-07
[6]
뉴스
(제목 없음)
동아일보
1993-09-17
[7]
뉴스
(제목 없음)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99-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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