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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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종철은 1980년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맞서 싸운 운동권 활동가였다. 1987년 1월,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은폐 시도와 진실 규명 과정을 거쳤으며, 영화 1987 등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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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학력 | |
학교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명예학사 |
직업 및 활동 | |
직업 | 대학생 |
관련 활동 | 민주화 운동 |
가족 | |
아버지 | 박정기 |
어머니 | 정차순 |
형제 | 형 박종부 누나 박은숙 |
친척 | 조부 박영복 조모 정금순 고모 박정옥 |
기념 및 업적 | |
기념비 | 서울대학교 (1997년) 惠光高等学校 (2004년) 관악구 대학5길 (2018년) |
영향 | 6월 민주 항쟁 |
2. 생애와 민주화 운동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나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해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 15일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30]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던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6월 항쟁의 주요 도화선이 되었으며, 영화 ''1987''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80년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재직 당시 그는 전두환의 독재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여파에 맞서 싸운 대학생 운동권 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 학생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1986년 4월 청계피복노조 법화 요구 시위 당시 체포되어 7월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3] 이러한 활동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구금된 박종철은 동료 운동권 활동가의 행방을 자백하기를 거부했다. 심문 과정에서 당국은 그에게 워터보딩 고문 기법을 사용했으며,[2] 결국 1987년 1월 14일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해서였다.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다가 14일 숨졌다.[30]
박종철의 사망을 둘러싼 정보는 처음에 은폐되었다. 그의 고문치사는 1987년 6월 항쟁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의 죽음과 그 직후의 사건들은 영화 ''1987''의 소재가 되었다.
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종철은 전두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중, 1987년 1월 13일 치안본부에 의해 불법으로 연행되었다.[4]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경찰의 심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며 답변을 거부했다. 이에 경찰은 박종철에게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4] 1월 14일 오전, 물고문 도중 박종철은 욕조 가장자리에 가슴을 압박당해 질식사했다.[3]
3. 1. 사건 은폐 시도와 진실 규명
경찰은 박종철의 사망을 은폐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우선, 병원에 긴급 출동을 요청할 당시 허위 보고를 했다. 물을 과다 섭취하여 쓰러졌다는 박종철이 속옷 차림으로 흠뻑 젖은 채 누워 있었고, 바닥도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오현근 의사는 경찰의 설명이 거짓임을 직감했다.[3] 현장에서 심폐소생술과 강심제를 사용했지만 박종철은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오현근 의사는 사망진단서를 작성할 때 변사 처리되어 부검될 것을 예상하여 사인 불명으로 기재했다.[3]
경찰은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화장하려 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의 황적준에게 부검 없이 소견서를 위조하라고 지시하며 1000억원을 건네기도 했다.[6] 그러나 황적준은 명령을 거역하고 부검을 진행하기로 결심한다.
14일 오후 7시경, 경찰은 서울지검에 당일 사건 처리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한다.[7] 유족과의 면담 없이 화장하려는 것을 알게 된 최환 공안부장은 고문치사임을 직감하고 2시간 동안 설득하여 시신 보존 명령을 내린다.[8] 당시 경찰과 검찰이 긴밀하게 협력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조치였다. 15일 오전, 최환 공안부장은 부검을 지시했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에게 협박까지 받았다.[3] 최환은 강민창에게 직무유기로 체포하겠다고 압박하여 부검에 동의하게 만들었고, 민간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양대학교병원으로 결정했다.[3]
15일 밤 8시경, 안상수(安商守) 검사의 지휘하에 박종철의 숙부가 입회한 가운데 부검이 실시되었다.[3] 15일 오후, 특종 보도를 받은 치안본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지병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허위 해명을 했다. 이때 강민창 본부장의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언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9]
안상수 등을 중심으로 "박종철 사망 의혹 수사반"이 구성되었지만, 경찰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어 큰 성과는 없었다.[3] 사건 당일, 오현근 의사는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에게 사건을 알렸다.[10] 15일, 중앙일보는 "수사 중인 대학생 사망 사건"으로 단독 보도했다.[10] 16일, 동아일보는 시신의 상태(멍·출혈, 물에 부푼 위 등)를 통해 조사관의 고문 의혹을 제기했다.[11] 오현근 의사는 기자의 취재에 "습성 잡음" 등 '물'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사용하며 물고문에 의한 고문치사임을 암시했다.
19일, 경찰은 "일부 경찰관의 과도한 직무 의욕으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이라며 조한경과 강진규 두 명만 체포하여 사건을 잠재우려 했다.[12] 박초원 치안감은 두 사람에게 함구하도록 하고 조기 석방과 가족 생활비 지원을 약속했다.[3] 정호용(鄭鎬容) 내무부 장관은 "사람이 사람을 때릴 수 없다"며 고문의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아 사람들의 의혹을 더욱 키웠다.
2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두 사람과 동료의 면회에 참석한 안유 보안계장은 대화 내용에서 새로운 3명의 용의자 존재를 면담 기록에 남겼다.[13] 이 정보는 이부영에게 전달되었고, 이부영은 한재동 형무관에게 필기구를 빌려 편지를 작성했다. 한재동은 정병영 전 형무관 등의 협력을 얻어 이부영의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했다.[14]
이 정보를 입수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민주화 운동 추도 미사에서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민주당도 독자적인 조사에 착수했고, 경찰의 재수사 결과 5월 21일에 3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경찰 상층부는 은폐 지시를 부인했지만, 5월 29일 박철원 치안감, 유정반 경정, 박원택 경정이 범인도피죄로 체포되었다.[15] 1993년 2월, 박철원 치안감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유정반 경정과 박원택 경정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었다.
7월 4일, 고문치사 사건의 1심 선고 공판이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조한경과 강진규는 징역 15년, 황정웅은 징역 7년, 이경보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 형량이 감형되었고, 1988년 2월 확정되어 후에 가석방되었다.[3]
1988년 1월 12일, 동아일보에 황적준 부검의의 일기가 공개되었고, 15일에 강민창 본부장이 은폐 조작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1심 유죄, 2심 무죄 판결 후, 1993년 7월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었다.[16]
3. 2. 관련 인물
이름 | 직책 | 비고 |
---|---|---|
조한경(趙漢京) | 경위, 수사반장 | 최초 체포자[5] |
황정우(黃正宇) | 경위 | |
강진규(姜珍圭) | 경사 | 최초 체포자[5] |
방금곤(方金坤) | 경장 | 검찰은 처음에 주범으로 보았다.[5] |
이정호(李正浩) | 경장 |
조한경이 지휘를 맡고, 피해자(박종철)의 옷을 벗기고 손발을 수건으로 묶은 뒤, 오른팔은 방금곤이, 왼팔은 황정우가 고정하고, 양 다리는 이정호가 잡고, 강진규가 머리를 욕조 물에 여러 차례 담갔다.[3]
3. 3. 사건의 영향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는 박종철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의 유족과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추모비와 흉상이 세워져 ‘민주화의 길’의 한 지점으로 지정되었다.[31]박종철의 뜻을 기리기 위해 박종철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이 사업회는 2007년 (사)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로 발전했으며,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2017년 영화 《1987》로 제작되어 12월 27일에 개봉했다.
2018년 1월 13일, 신림동 대학5길에 박종철거리가 조성되었다. 이 사업은 관악구 주민들이 박종철의 3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구청에 제안하여 기획되었다.[31]
2018년 3월 10일, 문무일 검찰총장은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를 만나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한 것은 처음이었다.[32] 7월 28일 박정기 씨가 별세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아버님은 아들을 대신해 민주주의자로 사셨습니다”라고 말했다.[33]
박종철의 고문치사는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초기에 정보는 은폐되었다.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월 15일, 중앙일보는 “수사 중인 대학생 사망 사건”을 단독 보도했다.[10] 1월 16일, 동아일보는 시신의 상태를 통해 고문 의혹을 제기했다.[11]
야당과 김대중은 경찰 발표에 불신을 표하며 국정조사권 발동 결의안을 제출했다.
2월 7일, 전국에서 추도 집회가 열렸고, 부산에서 노무현, 문재인 등 798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17]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항의 시위가 이어졌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과 맞물려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4·13 호헌 조치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5월 18일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다시 활성화되었다.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7월 5일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민주화 운동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4. 6월 항쟁
박종철의 고문치사는 1987년 6월 항쟁의 촉매제가 되었다.[2] 그의 죽음과 그 직후의 사건들은 영화 ''1987''의 소재가 되었다. 야당과 재야의 김대중은 경찰 발표에 신뢰성이 없다며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권 발동 결의안을 제출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2월 7일, 전국에서 추도 집회가 열렸다. 부산에서 데모를 주도했던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과 문재인을 포함한 798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17]
그 후에도 서울을 중심으로 항의 데모가 이어졌고, 그동안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과 맞물려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4·13 호헌 조치로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5월 18일에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다시 활성화되었다.
6월 9일, 다음 날 열릴 예정이었던 「고문치사 은폐 규탄 및 헌법 개정 국민대회」의 결기 집회에 참가한 연세대생 이한열이 데모 도중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7월 5일에 사망했다. 이한열의 피탄 사건은 박종철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데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6월 29일, 노태우민정당 대표 최고위원에 의한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었다.
5. 추모 및 기념 사업
박종철은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세운 그의 추모비와 흉상은 학내 ‘민주화의 길’ 가운데 한 지점으로 지정되어 있다.[18]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박종철 열사의 꿈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박종철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이 사업회는 2007년 박종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과 대학문화연구회 회원들의 모금으로 [http://cafe.daum.net/parkjc870114 (사)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로 되었으며,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하고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는 등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1987》이 2017년 12월 27일에 개봉하였다.
2018년 1월 13일, 모교인 서울대학교 근처에 있는 신림동 대학5길에 박종철거리가 조성되었다. '박종철 거리' 지정사업은 관악구 주민들로 구성된 '마을관광사업추진단'이 2017년 박 열사의 3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구청에 사업을 제안하면서 기획됐다.[31]
2018년 3월 10일, 문무일 검찰총장은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인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를 만나 사과를 전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와 관련해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32] 이후 7월 28일 박정기 씨는 별세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고인에 대해 “청천벽력같은 아들의 비보를 듣는 순간부터 아버님은 아들을 대신해, 때로는 아들 이상으로 민주주의자로 사셨습니다”라면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33]
연도 | 내용 |
---|---|
1997년 | 서울대학교 캠퍼스에 흉상과 추모비 설치[18] |
2001년 2월 26일 |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 수여 |
2003년 | (사)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 박종철인권상 제정 (초대 수상자: 이인영) |
2004년 | 혜광고등학교에 추모비 설치 |
2007년 | 구 치안본부 대공보안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일부, 박종철기념전시실로 공개[20] |
2016년 8월 | Complaints Choir|불평의 합창단영어인 「박종철합창단」 결성[21],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참가 (2018년 5월 창립 공연[22]) |
2018년 1월 | 서울 관악구 신림동 대학 5길, 「박종철길」로 명명, 기념판 설치. 기념공원과 기념관 건립 발표[23] |
6. 박종철이 등장한 작품
- 2002년 MBC 기획 특집 드라마 《순수청년 박종철》 - 최동성[34][35]
- 2017년 영화 《1987》 - 여진구
- 정호승의 시집 『새벽편지』(1987년)에 수록된 시 『부치지 않은 편지』
- 김광석의 앨범 『서른 즈음에』(1996년)에 수록된 곡 『닿지 않은 편지』 - 정호승의 시에 백창우가 멜로디를 붙였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장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었고,[25] 2018년 5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뮤지컬 배우 민우혁이 독창하였다.[26]
- 김영남의 추모곡 『타인의 아픔』(2017년) - 작사 이산하, 작곡 이성지[27]
- 드라마 『제5공화국』(2005년, MBC, 37회~39회) - 박종철 역: 최동준[28]
- 영화 『1987, 어떤 투쟁의 진실』(2017년 12월 개봉, 장준환 감독) - 박종철 역: 여진구
7. 가족
관계 | 이름 |
---|---|
할아버지 | 박영복 |
할머니 | 정금순 (? ~ 1947년) |
아버지 | 박정기 (1928년 10월 29일 ~ 2018년 7월 28일) |
어머니 | 정차순 (1933년 1월 1일 ~ 2024년 4월 17일) |
형 | 박종부 |
누나 | 박은숙 |
고모 | 박정옥 |
참조
[1]
뉴스
朴鐘哲군 拷問致死 사건日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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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a Ilbo
1987-05-22
[2]
뉴스
SEOUL STUDENT'S TORTURE DEATH CHANGES POLITICAL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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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1-31
[3]
웹사이트
진보정당 '깃발'로 부활하는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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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2002-01-14
[4]
웹사이트
烈士情報 朴鐘哲
https://www.kdemo.or[...]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
웹사이트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나는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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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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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검사·기자·의사는 용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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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oF
2017-12-26
[7]
웹사이트
“우린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세상을 바꾼 1987 주역들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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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8-01-15
[8]
웹사이트
‘박종철 고문사’ 밝힌 검사와 의사, 30년 만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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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7-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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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교과서 표현, 지우라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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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사망’ 터트린 날, 경찰은 돈으로 유족 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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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종철 고문 첫 폭로 의사 “23살 학생이 무슨짓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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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8-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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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끝내 ‘박종철 고문치사’를 반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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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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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길을찾아서 교도소 넘은 진실…전병용→김정남→함세웅으로 / 박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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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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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 내부고발자, 23년 만에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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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0-10-01 # 추정 날짜. 10월호이므로 10월 1일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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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길을찾아서 교도관들이 점령한 법정…의자·모자 던지며 분노 / 박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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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2-02-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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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이날’ 3월5일 DJ ‘국정원 개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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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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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종철 추도시위 주도’ 변호사 문재인·노무현 경찰진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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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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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哲記念展示室 参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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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故박종철씨 부친등 66명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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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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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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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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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日報
2018-01-1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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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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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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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혁,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서 ‘부치지 않는 편지’
http://www.newsen.co[...]
newsen
2018-05-18
[27]
뉴스
“지금 우리가 종철이에게 하고픈 이야기 ‘노래’로 표현했죠”
http://www.hani.co.k[...]
ハンギョレ
201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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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방송]MBC '박종철' 주연 서울대생 최동성씨
http://news.donga.co[...]
東亜日報
200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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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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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archives.kd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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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신림동 대학5길에 오늘 '박종철거리' 조성된다
http://news1.kr/arti[...]
201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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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포토] 박종철 열사 아버지 손 잡고 허리 숙인 문무일
http://www.hani.co.k[...]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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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박종철 열사 아버지 박정기씨 별세…문재인 대통령 애도
http://www.seoul.co.[...]
2018-07-28
[34]
뉴스
“박종철 보고싶다” 쇄도
https://news.naver.c[...]
미디어오늘
200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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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텍스트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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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을 보훈장관 “독립유공자 후손 예우 ‘3대→4~5대’로 확대”
“광장 이끈 한국 청년 빛났다”...세계 교회 지도자의 감탄
권오을 “민주유공자법 서둘러 제정…이한열·박종철 명예 찾아줘야”
두번의 계엄과 남영동 대공분실 [크리틱]
민주당 윤호중, 김문수 참여한 인천 5·3 민주항쟁 폄훼 논란···“인천사태, 탄압 빌미 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지옥 설계한 김수근을 만나다
6월10일, 민주주의 날아올라라
‘국가폭력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민주화 상징’으로 거듭나다
벽 하나 두고, 지옥과 일상이 공존···‘악의 평범성’ 보여준 남영동 대공분실
‘박종철 물고문’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새긴 여성들 목소리···국가폭력 저항한 여성 서사 낭독극으로 재탄생
이번 주말, 518번 버스 타고 금남로서 민주주의 축제 즐겨볼까
이재명 “김경수 복당은 민주 강화 콘크리트…일부 언론이 갈라치기”
이주노동자가 아닌 보통 노동자의 초상 [.txt]
카카오엔터, '미국 웹툰+웹소설' 시장 전략 새로 짰다 – 바이라인네트워크
‘시세권’ 거주자의 궤변 수집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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