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포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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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포만 해전은 1885년 2월 14일 밤, 청불전쟁 중 프랑스 해군이 중국 남양함대 함대를 공격하여 승리한 해전이다. 프랑스는 어뢰정을 사용하여 중국 순양함 어원(裕遠)을 격침시키고, 복합 슬루프 청칭(澄慶)을 무력화시켰다. 이 전투로 프랑스는 대만 봉쇄를 지속할 수 있었고, 어뢰정의 전술적 가치를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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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만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청불전쟁 |
![]() | |
날짜 | 1885년 2월 14일 |
장소 | 저장성 샹산현 석포만 (石浦灣)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
교전국 2 | 청나라 |
군대 1 | 프랑스 극동 전대 |
군대 2 | 남양수사 |
지휘관 | |
지휘관 1 | 아메데 쿠르베 |
지휘관 2 | 오안강 |
병력 규모 | |
병력 1 | 철갑함 2척, 순양함 3척, 포함 1척 |
병력 2 | 순양함 3척, 프리깃 1척, 슬루프 1척 |
사상자 | |
사상자 1 | 사망 1명 |
사상자 2 | 프리깃 1척 침몰, 슬루프 1척 침몰 (아군 오사) |
캠페인 정보 |
2. 배경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프랑스는 대만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에 청나라는 봉쇄를 풀기 위해 남양함대 소속 순양함 '남침'(南琛), '남서'(南瑞), '개제'(開濟), 프리깃함 '어원'(馭遠), 복합 슬루프 '징경'(澄慶)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했다.[7][8][1] 이 함대는 오안강(吳安康) 제독이 지휘했다.
쿠르베 제독은 청나라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 채, 2월 7일 민강 어귀를 정찰하고 청나라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9]
2월 14일 밤, 프랑스 해군은 통킹 원정에서 활약했던 팔마 고르동 함장과 에밀 듀복 함장이 지휘하는 2척의 어뢰정을 이용해 청나라 함대를 공격했다.[10] 이들은 투언안 전투와 꺼우저이 전투 등에서 용맹함을 보인 장교들이었다.
석포만 해전에는 몇 가지 논란이 되는 기록들이 있다.
당초 북양함대 소속 순양함 '초용'(超勇)과 '양위'(揚威)도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갑신정변(1884년 12월) 이후 청나라와 일본 제국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이홍장이 이 두 배를 조선 해역으로 이동시켰다.[7][1]
프리깃 ''어원''의 ‘외국인 고문’ 역할을 한 미국 해군 장교 앨링턴에 따르면, 청나라 함장은 프랑스와의 전투에 대해 확신이 없었고, 최대한 교전을 피하려 했다.[7][1] 청나라 함대는 육지에서 시야가 닿는 범위 내에서 함포 훈련을 위해 자주 정지하며 느리고 망설이면서 남쪽으로 항해했다. 청나라 선단은 대만 해협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무 완수를 포기하고, 대신 프랑스 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대만으로 출격 중이라는 정보를 흘렸다.[8][1] 결국 청나라 함대는 닝보항 근처의 산먼만으로 향했다.[8][1]
1885년 1월 말, 홍콩 신문에서 청나라 함대의 출격이 보도되었다.[8][1] 홍콩에서 청나라 소식을 감시하던 트리오팡트의 함장 옥스 대위는 기룽의 아메데 쿠르베 제독에게 이 소식을 즉시 알렸다.[8][1] 쿠르베 제독은 청나라 함대를 추격하기 위해 철갑함 바야르와 트리오팡트, 순양함 니엘리, 에클레르 및 뒤구에-트루앙, 포함 아스픽와 수송선 ''손''을 이끌고 기륭에서 북쪽으로 출항했다.[1]
3. 추격
2월 9일, 일부 함선의 석탄 공급이 부족해지자 쿠르베는 순양함 '뒤구에-트루앙'을 기륭으로 돌려보냈다.[3]
2월 10일, 프랑스 함대는 주산도에 도착했고, 2월 11일에는 장강 어귀에 진입하여 오송(呉淞)의 청나라 포대에 경보가 울렸다. 프랑스군은 해안과의 통신을 통해 청나라 순양함이 삼문만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쿠르베는 즉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2월 13일 주산도 남쪽 석포만에서 '에클레르'가 청나라 함대를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프랑스 함대는 즉시 전투 태세에 돌입하여 청나라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청나라 함대는 처음에는 우 제독의 기함 '개제'를 선두로 'V'자 대형을 취했으나, 곧 대형이 흩어졌다. 3척의 순양함은 남쪽으로 도주했고, '어원'과 '징경'은 석포만으로 피신했다. 앨링턴에 따르면, 우 제독은 이 두 배의 선장들에게 원한을 품고 의도적으로 희생시켰다고 한다. 쿠르베의 함대는 더 빠른 청나라 순양함을 따라잡지 못하고, 2월 13일 저녁 '어원'과 '징경'을 처리하기 위해 석포만으로 이동했다.
4. 전투
프랑스군은 청나라의 명절인 설날을 노려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석포만은 프랑스군을 피해 온 정크선과 삼판으로 가득 차 있었고, 프랑스 어뢰정들은 위장을 위해 검은색으로 칠해져 은밀하게 접근했다. 청나라 수병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아 프랑스군은 발각되었지만, 집중 사격 속에서도 어뢰 공격을 감행하여 '어원'의 선체에 어뢰를 폭발시켜 격침시켰다.[11]
미국 해군 장교 L. C. 앨링튼은 '어원'에 탑승하고 있다가 공격을 받아 배를 버리고 탈출하는 청나라 수병들의 혼란을 기록했다.[12] 그는 또한 청나라 해안 포대의 오인 사격으로 '징경'이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다. 앨링튼은 '징경'이 프랑스군 어뢰에 맞았다고 추정했지만, 프랑스 측 기록에는 '징경'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혼란 속에서 청나라 해안 포대는 대포를 발사했지만, 부정확한 사격으로 '징경'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군은 공격 중 1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11]
2월 15일 아침, 프랑스군은 석포만을 정찰하여 청나라 함선 두 척이 침몰한 것을 확인했다. 고르동과 듀복은 프랑스 함대로 귀환하여 훈장을 받았다. 청나라 당국은 '징경'의 침몰을 은폐하기 위해 자침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앨링튼과 듀복은 '징경'에서 폭발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5. 논란
5. 1. 징경 격침의 주체
청나라 측은 '징경'(징경)이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침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측 기록에는 '징경'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담겨있다.[10] 청불 전쟁 당시 남양수사에서 복무했던 미국인 해군 장교 L. C. 앨링튼은 '징경'에서 밝은 섬광과 폭발음이 있었다고 기록했다.[12] 석포만 해전에서 프랑스 어뢰정을 지휘한 에밀 듀복과 팔마 고드동 함장은 '징경'이 아닌 '어원'만 공격했다고 주장했다.[10]
앨링튼의 기록과 프랑스 측 주장을 종합해 볼 때, '징경'은 프랑스군 어뢰가 아닌 청나라 해안 포대의 오인 사격으로 침몰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앨링튼은 청나라군의 관점에서 전투를 기록했는데, '징경'이 아군 포격으로 피격되었다고 언급했다.[12]
6. 참전 함선
이 전투에는 청나라 남양함대와 프랑스 해군 함선들이 참전했다.
청나라 | 프랑스 |
---|---|
6. 1. 프랑스군



6. 2. 청나라군
이 전투는 청나라 남양함대가 대만에 대한 프랑스의 봉쇄를 해소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1885년 1월 18일, 청나라 순양함 남침(南琛), 남서(南瑞)와 개제(開濟)가 프리깃 어원(馭遠)과 복합 슬루프 징경(澄慶)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 대만으로 항해했다. 청나라 선단은 오안강(吳安康) 제독의 지휘 아래 있었다. 남양함대는 원래 독일의 ‘초빙 제독’ 시벨린의 지휘 아래 북양함대 소속 2척의 비교적 신예 순양함 초용과 양위를 동반할 예정이었지만, 이홍장이 이 두 배를 조선 해역으로 돌렸다. (1884년 12월, 원세개가 갑신정변을 진압한 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 제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7]프리깃 어원의 ‘외국인 고문’ 역할을 맡은 미국 해군 장교 앨링튼에 따르면, 출격은 매우 낙담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청나라군의 함장은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처할 능력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으며, 가능하다면 전투를 피하기로 했다. 청나라 선단은 천천히 머뭇거리며 남쪽으로 항해했고, 육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종종 멈춰 서서 함포 사격 연습을 했다. 선단이 대만 해협에 도착하기도 전에 오 제독은 이미 임무 완수를 체념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청나라 전함이 대만으로 출격 중임을 알려 프랑스군이 대만 봉쇄를 강화하고, 방어를 위해 프랑스 군함을 집중시키기를 바랐다. 청나라 선단은 뱃머리를 돌려 닝보항 근처의 산먼만으로 향했다.[8]
7. 관련 인물
석포만 해전에는 청나라 남양함대와 프랑스 함대가 참여했다.
- '''청나라군'''
오안강(吳安康) 제독이 청나라 남양함대를 지휘했다.[7] 미국 해군 장교 L. C. 앨링튼은 청나라 어원함의 외국인 고문으로 참여했다.[7] 앨링튼에 따르면, 청나라 함대는 프랑스와의 전투 능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전투를 회피하려는 분위기였다. 청나라 선단은 느리게 남쪽으로 항해하며 함포 사격 연습을 했고, 대만 해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임무 완수를 포기했다. 우 제독은 프랑스군이 대만 봉쇄를 강화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청나라 전함이 출격 중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8]
- '''프랑스군'''
1884년 2월 14일 밤, 팔마 고르동과 에밀 듀복 함장이 지휘하는 어뢰정으로 청나라 함대를 공격했다. 두 사람은 통킹 원정 초기 전투에서 이미 두각을 드러냈던 장교들이었다. 고르동은 1883년 8월 20일 투언안 전투에서 베트남 방어선에 투입되었던 최초의 장교들 중 한 명이었으며, 듀복은 1883년 5월 19일 꺼우저이 전투와 1883년 8월 15일 푸호아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웠다.[10]
두 프랑스 장교는 청나라 명절인 설날에 맞춰 공격을 시작했다. 듀복과 고르동은 위장을 위해 검은색으로 칠한 작은 어뢰정을 타고 목표물에 들키지 않고 접근하려 했다. 청나라 초병들이 경계 태세에 들어가면서 프랑스 어뢰정은 목표물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발각되었지만, 이들은 어뢰를 폭발시켜 청나라 프리깃함을 무력화시켰다. 공격 도중 프랑스 해병 한 명이 소총에 맞아 사망했다.[11]
2월 15일 아침, 프랑스군은 석포만을 정찰했고, 청나라 선박 두 척이 침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르동과 듀복은 프랑스 전대로 귀환하자, 어뢰 공격 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으로 훈장을 받았다.
7. 1. 프랑스군
1884년 2월 14일 밤, 프랑스군은 팔마 고르동과 에밀 듀복 함장이 지휘하는 어뢰정으로 청나라 함대를 공격했다. 두 사람은 통킹 원정 초기 전투에서 이미 두각을 드러냈던 장교들이었다. 고르동은 1883년 8월 20일 투언안 전투에서 베트남 방어선에 투입되었던 최초의 장교들 중 한 명이었으며, 듀복은 1883년 5월 19일 꺼우저이 전투와 1883년 8월 15일 푸호아이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웠다.[10]
두 프랑스 장교는 청나라 명절인 설날에 맞춰 공격을 시작했다. 석포만에는 프랑스군으로부터 피난해온 정크선과 삼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듀복과 고르동은 위장을 위해 검은색으로 칠한 작은 어뢰정을 타고 목표물에 들키지 않고 접근하려 했다. 두 척의 프랑스 어뢰정은 어둠을 틈타 목표물에서 100미터 이내까지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 초병들이 경계 태세에 들어가면서 프랑스 어뢰정은 목표물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발각되었다. 청나라군의 집중 소총 사격을 받으면서, 듀복과 고르동은 극도로 위험한 접근을 감행, 어뢰를 폭발시켜 청나라 프리깃함을 무력화시켰다. 그 후 두 어뢰정은 모두 석포만을 빠져나와 다음날 아침 사온느에 의해 구조되었다. 공격 도중 프랑스 해병 한 명이 소총에 맞아 사망했다.[11]
2월 15일 아침, 프랑스군은 석포만을 정찰했고, 청나라 선박 두 척이 침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르동과 듀복은 프랑스 전대로 귀환하자, 어뢰 공격 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으로 훈장을 받았다.
7. 2. 청나라군
오안강(吳安康) 제독은 청나라 남양함대를 지휘했다.[7] 미국 해군 장교 L. C. 앨링튼은 청나라 '어원'함의 외국인 고문으로 참여했다.[7]
앨링튼에 따르면, 청나라 함대는 프랑스와의 전투 능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전투를 회피하려는 분위기였다. 청나라 선단은 느리게 남쪽으로 항해하며 함포 사격 연습을 했고, 대만 해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임무 완수를 포기했다. 우 제독은 프랑스군이 대만 봉쇄를 강화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청나라 전함이 출격 중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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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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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Lon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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