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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우저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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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꺼우저이 전투는 1883년 5월 19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확장의 일환으로 통킹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프랑스군과 유영복이 이끄는 흑기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프랑스는 통킹 지역에서 상인들의 안전을 명분으로 앙리 리비에르가 이끄는 부대를 파견했고, 유영복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흑기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꺼우저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앙리 리비에르를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했지만, 이 패배는 프랑스 정부가 통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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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우저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꺼우저이 전투 (종이 다리 전투)
부분통킹 원정
손떠이에서 대포를 밀고 있는 리비에르
앙리 리비에르 사령관은 종이 다리에서 프랑스군 대포를 구출하려 했다.
날짜1883년 5월 19일
장소하노이 근교 꺼우저이군 (현재 하노이 시가지 일부)
원인알 수 없음
영토알 수 없음
결과흑기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3공화국
교전국 2흑기군
지휘관
프랑스 제3공화국앙리 리비에르
베르테 드 빌레르
흑기군류융푸
황계염
병력 규모
프랑스해병 550명 (해병 보병, 선원, 포병)
흑기군약 1,500명
사상자 및 피해
프랑스35명 사망, 52명 부상, 대부분의 장교 사망
포 3문 노획
흑기군약 30명 사망, 비슷한 수의 부상자
기타
참고알 수 없음

2. 배경

프랑스1860년대부터 베트남 남부 지역을 병합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발판 삼아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2] 특히 베트남 북부(통킹)를 관통하는 홍강을 통해 중국 윈난성과 직접 교역하는 경로를 확보하려 했으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영복 휘하의 흑기군이 큰 장애물이었다.[2]

1881년 말, 프랑스는 상인 관련 문제 조사를 명목으로 앙리 리비에르 사령관을 소규모 부대와 함께 하노이로 파견했다.[3][34] 그러나 리비에르는 1882년 4월 25일,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하노이 성채를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베트남 및 청나라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4][35][5][36] 군사력이 약했던 베트남 조정은 과거 1873년 프랑스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유영복의 흑기군과[6][37], 오랫동안 조공 관계를 맺어온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7][38] 이러한 프랑스의 침략적 확장 시도와 베트남 및 주변 세력의 저항이 맞물리면서 꺼우저이 전투로 이어지는 배경이 형성되었다.

2. 1.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확장

프랑스 해병대 보병, 통킹, 1883


프랑스1860년대부터 베트남 북부(통킹)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미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의 여러 지방을 병합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이를 발판 삼아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 식민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2][18] 프랑스 탐험가들은 베트남 북부를 관통하는 홍강을 따라 중국 윈난성까지 이어지는 경로를 탐사했다. 이는 중국 연안의 조약 항구를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수익성 높은 육상 무역로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2][18]

하지만 이 계획에는 큰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강력한 지도자 유영복(劉永福)이 이끄는 잘 조직된 무장 집단인 흑기군이었다. 흑기군은 선떠이와 윈난성 국경의 라오까이 사이 홍강 수로를 장악하고 무역상들에게 과도한 통행세를 징수하고 있었다.[2][18]

프랑스의 본격적인 북부 베트남 개입은 1881년 말,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가 소규모 프랑스 부대를 이끌고 하노이에 파견되면서 시작되었다. 파견 목적은 프랑스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베트남 측의 불만을 조사하는 것이었으나,[3][19] 리비에르는 1882년 4월 25일,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독단적으로 하노이 성채를 공격하여 점령했다.[4][20][35] 리비에르가 이후 성채를 베트남 측에 반환하기는 했지만, 그의 무력 사용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청나라 모두에게 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5][21][36]

군사력이 미약했던 베트남 조정은 리비에르의 프랑스군에 맞설 능력이 없었다. 결국 베트남은 과거에도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한 경험이 있는 유영복과 그의 흑기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흑기군은 1873년에도 프란시스 가르니에 중위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하고 가르니에를 전사시킨 전력이 있었다. 당시 가르니에도 리비에르처럼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베트남 북부에서 군사 행동을 감행하다가 흑기군에게 패배했으며, 프랑스 정부는 이 원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6][22][37]

베트남은 오랫동안 조공 관계를 맺어온 청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베트남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했기에,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다. 청나라는 흑기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통킹 지역에서의 프랑스 작전을 은밀히 방해하는 한편, 프랑스에게 통킹을 프랑스령으로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1882년 여름, 청나라의 윈난군과 광서군 병력이 국경을 넘어 통킹으로 진입하여 랑선, 박닌, 흥호아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7][23][38]

청나라와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우려한 주중 프랑스 공사 프레데리크 부레는 1882년 11월과 12월,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에서 부레는 통킹 지역을 프랑스와 청나라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안을 제시하고 합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협상 과정에서 당사자인 베트남은 완전히 배제되었다.[8][24][39]

2. 2. 통킹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관심 증대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통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부터였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의 여러 지방을 병합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이는 훗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제국 건설의 발판이 되었다. 프랑스 탐험가들은 홍강을 따라 베트남 북부를 거쳐 중국 윈난성까지 이어지는 경로를 탐사하며, 중국 연안의 조약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과 교역할 수 있는 수익성 높은 육상 무역로 개설을 기대했다.[2][18]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은 강력한 지도자 유영복(zh)이 이끄는 잘 조직된 무장 집단인 흑기군이었다. 흑기군은 선떠이와 윈난성 국경의 라오까이 사이 홍강 구간에서 무역 활동에 과도한 통행세를 징수하고 있었다.

베트남 북부에 대한 프랑스의 본격적인 개입은 1881년 말,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가 소규모 프랑스 부대를 이끌고 하노이에 파견되면서 시작되었다. 파견 목적은 프랑스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베트남 측의 불만을 조사하는 것이었다.[3][19][34] 그러나 리비에르는 1882년 4월 25일, 상관의 지시를 어기고 하노이 성채를 공격하여 점령했다.[4][20][35] 리비에르가 이후 성채를 베트남 측에 반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력 사용은 베트남과 청나라 양측 모두에게 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5][21][36]

베트남 조정은 자체 군사력만으로는 리비에르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영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영복이 이끄는 숙련된 흑기군은 이미 1873년에도 프랑스군에게 패배를 안긴 경험이 있었다. 당시 해군 중위 프란시스 가르니에 역시 지시를 어기고 베트남 북부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려 했으나, 베트남 조정의 요청을 받은 유영복은 하노이 성벽 아래에서 가르니에의 소규모 프랑스 부대를 격파하고 그를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잠시 베트남 북부에 대한 공세를 멈추었으며, 프랑스 정부는 가르니에의 원정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6][22][37]

베트남은 또한 오랜 조공 관계에 있던 청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베트남의 요청을 받아들여 흑기군을 무장시키고 지원하는 한편, 통킹 지역에서의 프랑스 작전에 은밀히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청나라는 프랑스 측에 통킹 지역을 프랑스 통제 하에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1882년 여름, 청나라의 운남군과 광서군 병력이 국경을 넘어 통킹으로 진입하여 랑선, 박닌, 흥화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7][23][3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청나라와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1882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협상을 시도했다. 부레는 통킹 지역을 프랑스와 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하자고 제안했으나, 이 협상 과정에서 당사자인 베트남은 완전히 배제되었다.[8][24][39]

2. 3. 흑기군과 유영복

류융푸(유영복) (1837–1917)


앙리 리비에르 (1827–83)


프랑스는 1860년대부터 베트남 북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미 베트남 남부의 여러 지방을 합병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만들었고, 이를 발판 삼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 제국 건설을 꾀하고 있었다. 프랑스 탐험가들은 중국 연안의 조약 항구를 거치지 않고 윈난성으로 직접 이어지는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베트남 북부를 관통하는 홍강 수로를 탐사했다.[2]

그러나 이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강력한 지도자 유영복(劉永福)이 이끄는 흑기군(黑旗軍)이었다. 흑기군은 잘 조직된 무장 집단으로, 선떠이와 윈난성 국경의 라오까이 사이를 흐르는 홍강에서의 무역 활동에 과도한 통행세를 부과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881년 말, 프랑스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베트남 측의 불만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해군 장교 앙리 리비에르가 소규모 프랑스군을 이끌고 하노이에 파견되면서 프랑스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었다.[3] 리비에르는 1882년 4월 25일, 상관의 지시를 어기고 하노이 성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4] 이후 성채를 베트남 측에 반환하기는 했지만, 그의 무력 사용은 베트남과 청나라 양국에 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5]

군사력이 미약했던 베트남 조정은 리비에르에 맞서기 위해 유영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영복이 이끄는 흑기군은 이미 1873년, 프란시스 가르니에가 지휘하던 프랑스군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경험이 있었다. 당시 가르니에도 리비에르처럼 독단적으로 베트남 북부에 군사 개입을 시도했으나, 베트남 조정의 요청을 받은 유영복의 흑기군에게 하노이 성벽 아래에서 격파당하고 전사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공략은 잠시 주춤했으며, 프랑스 정부는 가르니에의 원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6]

베트남은 오랜 조공국이었던 청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베트남 북부(통킹)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흑기군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무장시키는 한편, 프랑스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1882년 여름, 청나라의 운남군과 광서군 병력이 국경을 넘어 통킹으로 진입하여 랑선, 박닌, 흥화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7]

상황이 악화되자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협상에 나섰다. 1882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진행된 협상 결과, 통킹 지역을 프랑스와 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협상 과정에서 당사자인 베트남은 완전히 배제되었다.[8]

3. 프랑스의 통킹 개입과 초기 충돌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통킹)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부터였다. 이미 베트남 남부 지역을 병합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건설한 프랑스는, 홍강을 따라 중국 윈난성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육상 교역로를 확보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제국 건설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2] 하지만 이 지역은 강력한 지도자 유영복(zh)이 이끄는 흑기군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흑기군은 홍강을 이용하는 무역상들에게 과도한 통행세를 징수하며 프랑스의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2]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킹 개입은 1881년 말,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가 프랑스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베트남 측의 불만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소규모 함대와 병력을 이끌고 하노이에 파견되면서 시작되었다.[3][34] 그러나 리비에르는 1882년 4월 25일,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독단적으로 하노이 성채를 무력 점령하는 사건을 일으켰다.[4][35] 비록 성채는 다시 베트남 측에 반환되었지만, 이 사건은 베트남 대남 조정과 청나라 모두 프랑스의 침략 의도를 경계하게 만들었다.[5][36]

군사력이 약했던 대남 조정은 프랑스군에 맞서기 위해 과거 1873년 프란시스 가르니에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한 경험이 있는 흑기군유영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6][37] 동시에 오랜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흑기군을 지원하는 한편, 1882년 여름에는 윈난군과 광서군 병력을 통킹으로 보내 랑선, 박닌, 흥화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7][38] 이에 놀란 주중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협상하여 1882년 말 통킹을 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합의를 맺었으나, 이 과정에서 베트남은 철저히 배제되었다.[8][39]

리비에르는 부레와 이홍장 간의 합의에 강한 불만을 품고 독자적인 행동을 이어갔다. 프랑스 본국에서 증원된 해병대를 기반으로, 1883년 3월 27일에는 하노이와 해안 간의 통신선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남딘 성채를 점령했다.[9] 리비에르가 남딘에 있는 동안 흑기군과 베트남군이 하노이를 공격했지만, 3월 28일 자꾹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격퇴당했다.[10] 리비에르는 이러한 군사적 성공이 프랑스 정부로 하여금 통킹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압박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1882년 베트남에 파견되어 프랑스 침략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 능력을 평가하던 청나라 관리 당경숭(唐景崧)은 1883년 4월, 유영복을 설득하여 흑기군이 프랑스에 맞서 본격적으로 싸우도록 이끌어냈다. 유영복의 이러한 결정은 이후 청불 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1][40]

1883년 5월 10일, 유영복은 하노이 시내 곳곳에 격문을 붙여 리비에르에게 공개적으로 결투를 신청하며 도발했다. 격문은 프랑스군을 '도적'이라 칭하며, 만약 용기가 있다면 푸호아이(Phu Hoai) 들판으로 나와 흑기군과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고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리비에르는 프랑스의 체면과 위신을 위해 이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1883년 5월 19일 새벽, 리비에르는 해병대 보병 2개 중대와 프랑스 군함 ''빅토리우스''(''Victorieuse'') 및 프랑스 군함 빌라르(''Villars'')에서 차출된 상륙 중대, 그리고 3문의 포를 동원한 약 45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하노이 서쪽 푸호아이에 주둔한 흑기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12] 하지만 프랑스군의 이동 계획은 유영복의 첩보망에 사전에 파악되었고, 흑기군은 하노이 서쪽 외곽, 인근 제지 공장의 이름을 딴 꺼우저이(紙橋, 종이 다리)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기다리며 치밀한 매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흑기군은 꺼우저이 서쪽의 쭝통(Trung Thông), 하옌케(Hạ Yên Khê), 티엔통(Thượng Yên Khê) 마을에 두꺼운 대나무 숲과 통나무 방어물을 이용해 은밀하게 병력을 배치했다.

3. 1. 앙리 리비에르의 통킹 파견과 하노이 점령



프랑스의 북부 베트남(통킹)에 대한 관심은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의 여러 지방을 병합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이를 발판 삼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제국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프랑스 탐험가들은 홍강 수계를 따라 베트남 북부를 거쳐 중국 윈난성에 이르는 육상 교역로 개설을 시도했는데, 이는 중국 연안의 조약항을 거치지 않는 새로운 무역 루트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2][18] 하지만 이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강력한 지도자 유영복(zh)이 이끄는 흑기군이었다. 흑기군은 선떠이와 윈난성 국경의 라오까이 사이 홍강 유역에서 활동하며 무역상들에게 과도한 통행세를 징수하고 있었다.[2][18]

1881년 말, 프랑스 상인들의 활동에 대한 베트남 측의 불만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가 소규모 프랑스 함대와 병력을 이끌고 하노이에 파견되면서 프랑스의 북베트남 개입이 본격화되었다.[3][19][34] 1882년 4월 25일, 리비에르는 파견 목적을 넘어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독단적으로 하노이 성채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점령했다.[4][20][35] 리비에르는 이후 성채를 베트남 측에 다시 넘겨주었으나, 그의 무력 도발은 베트남 대남 조정과 청나라 양측에 큰 충격과 경계심을 안겨주었다.[5][21][36]

당시 대남 조정의 군대는 제대로 조직되지 못해 리비에르의 프랑스군에 맞서기 역부족이었다. 이에 대남 조정은 유영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영복이 이끄는 흑기군은 잘 훈련된 정예 부대로, 이미 1873년 프랑스 해군 장교 프랑시스 가르니에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가르니에를 전사시킨 경험이 있었다. 당시 가르니에 역시 리비에르처럼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독단적으로 북베트남에서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가 흑기군에게 패배했던 것이다. 유영복은 대남 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한번 프랑스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6][22][37]

동시에 대남 조정은 오랫동안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있었기에, 흑기군을 무장시키고 지원하는 한편, 통킹 지역에서의 프랑스 작전에 은밀히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에게 통킹을 프랑스 세력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1882년 여름, 청나라의 윈난군과 광서군 병력이 국경을 넘어 통킹으로 진입하여 랑선, 박닌, 흥호아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며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7][23][38]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에 놀란 주중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청나라와의 전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82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 결과, 통킹 지역을 프랑스와 청나라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협상 과정에서 당사자인 베트남은 철저히 배제되었다.[8][24][39]

3. 2. 베트남 조정의 대응과 흑기군의 개입



1882년 4월 25일, 앙리 리비에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하노이 성채를 점령하자[4], 베트남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비록 리비에르가 성채를 다시 베트남 측에 넘겨주었지만, 그의 무력 사용은 베트남과 청나라 모두에게 프랑스의 침략 의지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5]

당시 베트남 조정의 군대는 프랑스군에 맞서 싸울 만한 능력이 부족했다. 결국 조정은 과거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한 경험이 있는 흑기군의 지도자 유영복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흑기군은 이미 1873년에 프란시스 가르니에 중위가 지휘하던 프랑스군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전력이 있었다. 당시 가르니에도 리비에르처럼 독단적으로 베트남 북부에서 군사 작전을 감행했으나, 베트남 조정의 요청을 받은 유영복은 하노이 성벽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가르니에를 전사시켰다. 이 사건은 베트남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던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프랑스 정부는 가르니에의 원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6]

베트남 조정은 흑기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종주국 관계를 유지해 온 청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베트남 북부(통킹)가 프랑스의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청나라는 과거 자신들이 토벌 대상으로 삼았던 흑기군에게 무기와 지원을 제공하며 프랑스에 맞서 싸우도록 부추기는 한편, 프랑스 측에는 통킹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1882년 여름, 청나라의 운남군과 광서군 병력이 국경을 넘어 통킹으로 진입하여 랑선, 박닌, 흥화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협상을 벌여 통킹을 프랑스와 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방안에 합의했지만(1882년 11월~12월), 정작 당사자인 베트남은 이 협상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8]

3. 3. 청나라의 개입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청나라조공국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프랑스의 통킹 침략이 가시화되자, 베트남 조정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6][22] 청나라는 베트남의 요청을 받아들여 흑기군을 무장시키고 지원하는 한편, 통킹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프랑스의 군사 작전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는 프랑스에게 통킹 지역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였다.[7][23]

1882년 여름, 청나라는 군사적 행동에 나서 윈난군과 광서군 병력을 국경 너머 통킹으로 파견했다. 이들 청나라 군대는 통킹 북부의 주요 거점 도시들을 점령했다.[7][23][38]

청나라 군대가 점령한 주요 도시 (1882년 여름)
도시
랑선
박닌
흥화



청나라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프랑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였던 프레데릭 부레는 청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는 1882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청나라의 실력자였던 이홍장과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 결과, 양측은 통킹 지역을 프랑스와 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데 잠정적으로 합의했다.[8][24][39]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베트남은 이 협상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으며, 어떠한 의견도 반영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8][24][39]

4. 꺼우저이 전투 (종이 다리 전투)

꺼우저이(紙橋, 지교). 프랑스어로는 라고 불렸다.


꺼우저이 전투(Cầu Giấy)는 1883년 5월 19일, 통킹 원정 중이던 프랑스군과 유영복이 이끄는 흑기군 사이에 벌어진 주요 교전이다. 하노이 서쪽의 꺼우저이(紙橋, 종이 다리) 근처에서 발생하여 '종이 다리 전투'(Bataille de Pont de Papier|바타유 드 퐁 드 파피에fra)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가 전사하고 프랑스군이 패배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나, 역설적으로 프랑스 내 여론을 자극하여 통킹에 대한 군사 개입 강화와 청불 전쟁 발발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1][27]

1883년 초, 프랑스 해군 대령 앙리 리비에르는 독단적인 군사 행동으로 남딘을 점령하는 등 베트남 북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9][25] 이에 청나라의 지원 약속을 받은 흑기군 지도자 유영복은 프랑스군에 맞서기로 결정하고, 5월 10일 공개적으로 리비에르에게 결전을 요구하며 도발했다.[11] 프랑스의 위신을 지키고자 리비에르는 5월 19일 약 450명의 병력을 이끌고 흑기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12]

그러나 프랑스군의 이동은 사전에 파악되었고, 흑기군은 꺼우저이 인근의 유리한 지형에 매복하여 프랑스군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이 다리를 건너자 흑기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어진 교전에서 프랑스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부지휘관 베르테 드 빌리에르가 치명상을 입고 리비에르가 직접 지휘에 나섰으나, 후퇴 과정에서 리비에르마저 전사했다. 남은 프랑스군은 해군 중위 피세르의 지휘 아래 간신히 하노이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지휘관 리비에르를 포함하여 상당한 사상자를 내며 명백한 패배를 겪었다.[13][28] 흑기군 역시 피해를 입었다.[14][29] 리비에르의 전사 소식은 프랑스 본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오히려 통킹 문제에 대한 강경론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 의회는 즉각적인 군대 증파와 예산 지원을 결정했으며[15][31], 이는 쥘 페리 정부의 베트남 식민화 정책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꺼우저이 전투는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4. 1. 전투의 발발



앙리 리비에르는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가 베트남과 맺은 협약에 강한 불만을 품고, 1883년 초 무력으로 통킹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본국에서 해병대대가 증파되어 하노이 밖으로 군사 작전을 펼칠 병력을 확보한 상태였다.[25] 그는 1883년 3월 27일, 하노이에서 해안까지의 보급로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 52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남딘의 성채를 점령했다(남딘 점령).[9][25] 리비에르가 남딘을 비운 사이, 흑기군과 베트남군이 하노이를 공격했으나, 3월 28일 자꾹 전투에서 베르테 드 빌리에르(Berthe de Villers)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격퇴당했다.[10][26] 리비에르는 이 소식에 "이것으로 통킹 문제를 진전시킬 수 있다!"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한편, 1882년 베트남에 파견되어 프랑스 침략에 대한 베트남 조정의 저항 능력을 평가하던 청나라 관리 당경숭1883년 4월, 흑기군의 지도자 유영복과 베트남의 황계염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유영복에게 프랑스에 맞서 싸울 것을 설득했다. 유영복이 흑기군을 이끌고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싸우기로 한 결정은 이후 청불 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1][27]

꺼우저이 전투는 유영복의 도발로 시작되었다. 1883년 5월 10일, 유영복은 하노이 곳곳에 프랑스군을 조롱하며 전투를 요구하는 방을 내걸었다. 그는 리비에르에게 "'''푸호아이 들판으로 나와 흑기군과 정정당당하게 싸워 강약을 겨루자'''"고 선언하며,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항복하고 점령한 성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 도발적인 내용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자신의 군대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리비에르는 프랑스의 체면상 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5월 19일 새벽, 그는 약 450명의 프랑스군과 선원들을 이끌고 하노이 서쪽 푸호아이에 진을 친 흑기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 이 부대는 해병대 보병 2개 중대, 프랑스 군함 ''빅토리우스''(Victorieuse)와 ''빌라르''(Villars)에서 차출된 상륙 중대, 그리고 3문의 야포로 구성되었다.[12]

그러나 프랑스군의 공격 계획은 유영복의 첩자들에게 이미 탐지된 상태였다. 흑기군은 하노이 서쪽 몇 마일 떨어진 꺼우저이(紙橋, Pont de Papier, 종이 다리) 마을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기다리며 매복했다. 꺼우저이는 근처 제지 공장에서 이름을 따온 작은 강에 놓인 다리였다. 유영복은 꺼우저이 서쪽의 쭝통(Trung Thong), 하옌케(Ha Yen Ke), 티엔통(Thien Thong) 마을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 마을들은 빽빽한 대나무 숲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어 흑기군이 몸을 숨기고 프랑스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면서 병력을 기동하기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4. 2. 전투의 경과

꺼우저이 전투는 흑기군의 수장 류영복의 도발로 시작되었다. 그는 1883년 5월 10일 하노이 곳곳에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에게 야전에서 결판을 내자고 요구하는 포고문을 게시했다.[11] 류영복은 이 도전에서 프랑스군을 '도적'으로 칭하며 베트남 침략 행위를 강하게 비난했다.

> 용감한 전사 류는 3개 성의 장군이자 군사 지휘관으로서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프랑스 도적에게 이 포고문을 발표한다. 모든 사람이 당신이 도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나라는 당신을 경멸한다. 당신은 어떤 나라에 오든지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허위 소문으로 주민들을 선동하고자 한다. 당신은 무역을 하러 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 나라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당신은 야생 동물처럼 행동한다. 당신은 호랑이와 늑대만큼 사납다. 베트남에 온 이후로 당신은 도시를 점령하고 지사들을 죽였다. 당신의 범죄는 머리카락만큼 많다. 당신은 관습을 빼앗고 수입을 장악했다. 이 죄는 죽어 마땅하다. 주민들은 비참하게 되었고, 나라는 거의 파멸되었다. 신과 인간 모두 당신을 혐오한다. 하늘과 땅 모두 당신을 거부한다. 나는 이제 전쟁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의 3개 군대는 구름처럼 모여 있다. 나의 소총과 대포는 숲의 나무만큼 많다. 우리는 당신의 악마의 소굴을 공격하여 모든 불충한 백성을 진압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국가의 복지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하노이를 전쟁터로 만들어 상인과 백성을 망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이 포고문을 발표한다. 당신 프랑스 도적들아, 당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군중을 푸호아이로 보내 내 호랑이 전사들과 야전에서 싸우게 하라, 그러면 누가 가장 강한지 보겠다. 당신이 오기를 두려워한다면, 당신의 지도자들의 머리를 잘라 내게 바쳐라. 그런 다음 당신이 점령한 도시들을 돌려주어라. 나는 자비로운 지휘관이고, 당신 불쌍한 개미들을 살려두겠다. 그러나 당신이 지체하면, 나의 군대는 당신의 도시를 점령하고 당신 모두를 죽일 것이며, 당신이 서 있던 자리에는 풀 한 포기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행복과 재앙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삶은 죽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이다. 내 말을 잘 새겨 들어라.[9]

리비에르는 프랑스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이 도전에 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5월 19일 새벽, 약 450명의 프랑스군 병사와 선원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하노이 서쪽 푸호아이(Phu Hoai)에 주둔한 흑기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 이 부대는 해병대 보병 2개 중대, 군함 빅토리우스(''Victorieuse'')와 빌라르(''Villars'')에서 차출된 상륙 중대, 그리고 3문의 대포로 구성되었다.[12][25]

프랑스군의 이동 계획은 류영복의 첩자들에게 사전에 파악되었다. 흑기군은 하노이 서쪽 몇 마일 떨어진 꺼우저이(紙橋, Pont de Papier, 종이 다리) 마을 근처에서 프랑스 부대를 매복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꺼우저이는 근처 제지 공장에서 이름을 따온 작은 강에 놓인 다리였다. 흑기군은 다리 서쪽의 쭝통(Trung Thong), 하옌케(Ha Yen Ke), 티엔통(Thien Thong) 마을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 마을들은 빽빽한 대나무 숲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흑기군에게 훌륭한 은폐를 제공했고, 류영복은 프랑스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프랑스 부대는 새벽에 하노이를 출발하여 오전 7시 30분경 꺼우저이에 도착했다. 당시 리비에르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부대는 7주 전 자꾸엇 전투(Gia Cuc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경험 많은 대대장(chef de bataillon) 베르테 드 빌레르(Berthe de Villers)가 실질적으로 지휘했다.[26] 프랑스군 선봉대가 다리를 건너자 매복해 있던 흑기군 척후병들의 기습 사격을 받았다.

베르테 드 빌레르는 즉시 병력을 배치하여 흑기군을 향해 전진했고, 하옌케와 티엔통 마을에서 흑기군을 몰아내며 초반에는 우세를 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류영복은 예비 병력을 투입하고 프랑스군 전열이 완전히 전개되기를 기다렸다가 프랑스군 우익에 기습적인 역공을 가했다. 흑기군 병력은 소총을 들고 빠르게 이동하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근거리에서 정확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이 격렬한 교전 중에 베르테 드 빌레르는 치명상을 입었고, 리비에르가 직접 부대 지휘를 맡게 되었다.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리비에르는 부하들에게 꺼우저이 다리 너머로 후퇴하여 재정비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군의 후퇴는 처음에는 3문의 대포 엄호 아래 질서 있게 진행되었으나, 대포 중 하나가 반동으로 전복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리비에르와 그의 장교들이 포병을 돕기 위해 달려갔을 때, 흑기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사격으로 프랑스 장교 한 명이 사망하고 리비에르를 포함한 여러 장교가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프랑스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지고 전열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본 흑기군은 즉시 돌격하여 프랑스군 후위를 격파했고,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 리비에르가 전사했다.

완전한 궤멸 위기에서 프랑스군을 구한 것은 해군 중위(lieutenant de vaisseau) 피세르(Pissère)의 침착한 지휘였다. 그는 사기가 꺾인 프랑스 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하고, 다리 동쪽 제방 뒤에 보병을 배치하여 다리를 건너 추격하려는 흑기군의 공세를 여러 차례 막아냈다. 치열했던 전투는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피세르는 패배한 프랑스 부대를 이끌고 간신히 하노이로 퇴각했다.

4. 3. 전투의 결과

꺼우저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장교 5명과 병사 30명이 사망했으며, 장교 6명과 병사 46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총지휘관 앙리 리비에르를 비롯하여 대대장 베르테 드 빌레르(Berthe de Villers), 자퀸(Jacquin) 대위, 에랄 드 브리시(Héral de Brisis) 중위, 해군 소위 후보생 물룬(Moulun) 등이 포함되었다.[13][28]

이에 맞선 흑기군의 사상자는 약 1,500명의 병력 중 약 50명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 중에는 대대 지휘관인 양저은(楊著恩)과 오봉전(吳鳳典)도 포함되어 있었다.[14][29]

꺼우저이 전투 사상자 비교
구분사망부상
프랑스군장교 5명, 병사 30명장교 6명, 병사 46명
흑기군약 50명 (지휘관 2명 포함)56명



이 전투는 프랑스군에게 명백한 패배였으나, 역설적으로 프랑스 내에서는 통킹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리비에르의 패배와 사망 소식은 전투 일주일 뒤인 5월 26일 파리에 전해졌다. 프랑스 해군 장관 페이롱 제독은 "프랑스는 영광스러운 아들들에게 복수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프랑스 의회는 즉시 통킹 원정을 위한 강력한 군대 파병을 결의하고, 이를 위한 자금으로 의 예산을 승인했다.[15][31] 이는 쥘 페리 행정부가 통킹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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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뒤, 일부 비평가들은 꺼우저이 전투 당시 리비에르의 전술 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리비에르가 너무 성급하게 전투에 임했으며, 특히 포병을 너무 전방에 배치하여 흑기군에게 노출시킨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1930년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사를 연구한 알프레드 토마지(Alfred Thomazi) 대령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며 리비에르를 옹호했다.

만약 리비에르가 더 신중했더라면, 베르트 드 빌리에가 부상당했을 때 다리를 건너자마자 부대를 철수시켰을 것이고, 우리의 손실은 줄어들었을 것이며, 교전은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노이를 구출하고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기 위해 진격했다. 첫 접촉에서 후퇴하는 것은 체면을 구기고 흑기병의 대담함을 북돋아, 작은 성공만으로도 막을 수 있는 공격에 도시를 노출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소규모 전투 결과들을 고려해볼 때, 그러한 성공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기적에 익숙해지지 않았는가? 통킹에서는, 이전의 코친차이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는 대담함의 변함없는 보상처럼 보였다.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파리 출신 앙리 리비에르, 행동가이기도 했던 작가는 프란시스 가르니에처럼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믿으며 영웅으로 죽었다.[13][32]

5. 청불 전쟁과 그 이후

(내용 없음)

6. 한국의 관점과 역사적 교훈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Bastard, 171–89; Baude de Maurceley, 190–210; Duboc, 123–39; Huard, 6–16; de Marolles, 193–222; Nicolas, 257–62; Thomazi, Conquête, 152–7; Histoire militaire, 55–8
[2] 서적 Thomazi, La conquête de l’Indochine
[3] 서적 Thomazi, Conquête
[4] 서적 Bastard, 152–4; Marolles, 75–92; Nicolas, 249–52
[5] 서적 Eastman
[6] 서적 Thomazi, Conquête
[7] 서적 Lung Chang, 90–91; Marolles, 133–44
[8] 서적 Eastman
[9] 서적 Marolles
[10] 서적 Huard
[11] 서적 Thomazi, Histoire militaire
[12] 문서 Rivière’s column included the 31st Company, 2nd Marine Infantry Regiment (Captain Caboureau), the 24th Company, 3rd Marine Infantry Regiment (Captain Jacquin), the landing companies of Victorieuse and Villars (lieutenants de vaisseau Pelletier de Ravinières and Sentis), 20 Cochinchinese riflemen (2nd Lieutenant Daim), two 65-millimetre cannon and a Hotchkiss canon-revolver (lieutenant de vaisseau Pissère and enseigne de vaisseau Le Bris), a small field hospital and a demolition party (capitaine de génie Guénot). Rivière left a small garrison at Hanoi, consisting of the 29th Company, 2nd Marine Infantry Regiment (Captain Retrouvey), the landing company of Hamelin (enseigne de vaisseau de Driésen), 19 marine artillery gunners and troops unfit to march.
[13] 서적 Thomazi, Conquête
[14] 서적 Lung Chang, 127; Thomazi, Conquête
[15] 서적 Thomazi, Conquête
[16] 서적 Bastard, 171–89; Baude de Maurceley, 190–210; Duboc, 123–39; Huard, 6–16; de Marolles, 193–222; Nicolas, 257–62; Thomazi, Conquête, 152–7; Histoire militaire, 55–8
[17] 웹사이트 阮朝 2020-07-09
[18] 서적 Thomazi, La conquête de l’Indochine
[19] 서적 Thomazi, Conquête
[20] 서적 Bastard, 152–4; Marolles, 75–92; Nicolas, 249–52
[21] 서적 Eastman
[22] 서적 Thomazi, Conquête
[23] 서적 Lung Chang, 90–91; Marolles, 133–44
[24] 서적 Eastman
[25] 서적 Marolles
[26] 서적 Huard
[27] 서적 Thomazi, Histoire militaire
[28] 서적 Thomazi, Conquête
[29] 서적 Lung Chang, 127; Thomazi, Conquête
[30] EB1911 Ferry, Jules François Camille
[31] 서적 Thomazi, Conquête
[32] 서적 Thomazi, Conquête
[33] 문서 베트어 독음이 橋(꺼우), 紙(저이)이다. 베트남어에서는 강, 산, 다리와 같은 시설물이 앞으로 가기 때문에 紙橋는 橋紙라고 쓰고, 꺼우저이라고 읽는다.
[34] 서적 Thomazi, Conquête
[35] 서적 Bastard, 152–4; Marolles, 75–92; Nicolas, 249–52
[36] 문서 Eastman
[37] 서적 Conquête
[38] 문서 Lung Chang, Marolles
[39] 문서 Eastman
[40] 서적 Histoire milit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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