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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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종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강동으로 피난했다. 손책, 손권 시대를 거치며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특히 손권이 황제를 칭한 후 시중으로 임명되어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뛰어난 문장가로서 오나라를 찬양하는 부를 짓고 외교 문서 작성에도 기여했다. 243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호충이 그의 작위를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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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호종 |
한자 표기 | 胡綜 |
로마자 표기 | Ho Jong |
자(字) | 위칙(偉則) |
출생 | 183년 |
출생지 | 허난성구스현 |
사망 | 243년 (향년 60세) |
소속 | 오 |
작위 | 도향후(都鄉侯) |
가족 | 아들: 호충 |
관직 및 직위 | |
주요 관직 | 시중(侍中) 건무중랑장(建武中郎將) 우령군(右領軍) 좌집법(左執法) 편장군(偏將軍) |
기타 직위 | 해번우부독(解煩右部督) |
생애 및 경력 | |
초기 경력 | 손책이 회계군 태수가 되었을 때 14세였다. |
주요 활동 | 손권을 섬기며 여러 관직을 역임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많은 글을 남김 |
저서 | |
주요 저서 | (구체적인 저서 목록은 문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음) |
2. 생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강동으로 피난했다. 손책이 회계태수를 겸임할 때 14세에 문하순행이 되었다.[3] 손책 사후 손권이 강동 지역을 다스리는 군벌로 뒤를 이었을때, 손권은 호종을 재정을 담당하는 참모 장교로 임명했다.[4]
208년 호종은 황조를 상대로 한 손권의 원정에 동행하여 강하군(江夏郡, 현재의 후베이성 우한 일대)을 정복하고, 악현(鄂縣, 현재의 후베이성 어저우)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5]
210년 초 무렵 손권이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된 후, 경구시(京, 현재의 장쑤성 전장시)를 자신의 영토의 수도로 지정하고 호종을 악현에서 경구로 불러들여 시이, 서상과 함께 기밀 정보를 처리하게 했다.[7]
221년 조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왕(吳王)" 칭호를 받은 손권은 호종, 시이 및 서상을 향후로 봉했다.[8] 222년 11월, 손권은 "오왕"의 칭호로 계속 통치했다. 같은해 이릉 전투 직전 손권은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호종에게 각 군현에서 징병할 것을 명령했고, 호종은 약 6,000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해번병(解煩兵|해번병중국어)을 창설하여 호종과 서상은 각각 우부와 좌부의 지휘관을 맡았다.[9]
223년 동오의 무관인 진종(晉宗)이 조위에 투항하여 기춘에 설치된 위나라 전초 기지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자, 손권은 호종에게 하제 등과 함께 기춘을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호종은 이 공로로 건무중랑장(建武中郎將)으로 승진했다.[11]
229년 5월 23일, 손권은 황룡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후, 호종에게 황제 즉위를 기념하는 ''부''를 짓도록 명령했다.[12] 오의 동맹국인 촉한이 손권이 황제를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의 지시에 따라 호종은 오-촉 동맹을 위한 서약서를 작성했다.[13]
229년 10월, 손권이 오나라의 수도를 건업 (현재의 난징, 장쑤성)으로 이전한 후, 그는 호종과 서상을 시중 (侍中|시중중국어)으로 임명하고 각각 우군과 좌군 ()으로 임명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작위를 정후(亭侯)에서 향후(鄉侯)로 높였다.[14]
위나라에서 투항한 자들이 위나라 장군 오질에 대해 위나라 조정이 불신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호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질과 위나라 조정 간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세 가지 조항으로 구성된 편지를 작성하여 오질의 이름으로 위조하고, 위나라 영토에 배포하여 위나라 조정이 오질이 오나라로 투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려 했다.[15]
230년, 위나라 관료 은번(隱蕃|은번중국어)이 오나라로 귀순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제출한 후, 손권은 그를 면담했고, 호종은 손권에게 "은번의 귀순 서신은 동방삭의 문체와 비슷하고, 말솜씨는 미형과 비슷하지만, 그들만큼 재능이 있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18] 손권이 호종에게 은번에게 어떤 직책이 적합한지 묻자, 호종은 "그는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 수도에서 낮은 직책을 주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9] 230년 말, 은번은 실제로는 위나라 황제 조예가 오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되어 오나라 내분을 일으키도록 심어놓은 첩자임이 밝혀졌다. 그의 음모가 드러난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1]
호종은 법령을 정해 중요한 관리들은 상사를 만나도 관직을 떠나지 못하게 했는데,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자 극형을 실시하면 근절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호종의 말을 채용한 후, 관원들은 상사에 가지 않았다.
공손연에 대한 사자 파견과 관련하여 손권과 장소가 대립했을 때 양자 사이를 중재했다.
胡綜|호종중국어은 243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후충(胡沖)은 그의 작위를 상속받아 도향후(都鄉侯)가 되었다.[30]
2. 1. 초기 생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강동으로 피난했다. 손책이 회계태수를 겸임할 때 14세에 문하순행이 되었다.[3] 여남군중국어 고시현중국어(현재의 허난성 고시현) 출신이다.[1] 후한 말, 중국 중원에서 혼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함께 장강을 건너 강남 지역으로 피신했다.[2] 196년, 손책이 스스로 회계군의 태수가 된 후, 13세의 호종을 집안 시종으로 임명하고 오군(현재의 쑤저우, 장쑤성 일대)에 머물면서 그의 동생 손권의 독서 상대가 되도록 했다.[3]2. 2. 손권 시대의 활약
손책이 죽고 손권(孫權)이 강동 지역을 다스리는 군벌로 뒤를 이었다. 손권은 한나라 중앙 정부로부터 토로장군(討虜將軍)의 명목상 임명을 받은 후 호종을 재정을 담당하는 참모 장교로 임명했다.[4]208년 호종은 경쟁 군벌 유표 휘하의 장군 황조를 상대로 한 손권의 원정에 동행했다. 황조를 격파하고 강하군(江夏郡, 현재의 후베이성 우한 일대)을 정복한 후, 손권은 호종을 악현(鄂縣, 현재의 후베이성 어저우)의 현령으로 임명했다.[5]
210년 초 무렵 손권이 한나라 중앙 정부로부터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된 후, 그는 경구시(京, 현재의 장쑤성 전장시)를 자신의 영토의 수도로 지정하고 호종을 악현에서 경구로 불러들여 근무하게 했다. 시이, 서상과 함께 호종은 손권의 비서실을 담당하면서 기밀 정보를 접했다.[7]
221년 9월 23일, 손권은 마지막 한나라 황제의 왕위를 찬탈하고 조위를 건국하여 동한 왕조를 대체한 조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대가로 조비는 손권에게 제후왕의 칭호인 "오왕(吳王)"을 수여했다. 즉위 후 손권은 호종, 시이 및 서상을 향후로 봉했다.[8]
222년 11월, 손권은 조비와의 관계를 끊고 그의 동오 국가의 독립적인 통치자를 자처하며 자신의 연호로 "황무(黃武)"를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황제를 선포하지 않고 "오왕"의 칭호로 계속 통치했다.
221~222년 이릉 전투 직전 손권은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호종에게 각 군현에서 징병할 것을 명령했다. 호종은 약 6,000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두 개의 부서로 구성된 해번병(解煩兵|해번병중국어)을 창설했다. 호종과 서상은 각각 우부와 좌부의 지휘관을 맡았다.[9]
동오의 무관인 진종(晉宗)은 조위에 투항하여 기춘에 설치된 위나라 전초 기지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진종은 종종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양쯔강을 따라 오나라 국경을 습격했다.[10] 223년 손권은 호종에게 오나라 장군 하제 등과 함께 경무장 부대를 이끌고 기춘을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의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진종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호종은 이 공로로 건무중랑장(建武中郎將)으로 승진했다.[11]
229년 5월 23일, 하구 (현재의 우한, 후베이성)에서 황룡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후, 손권은 이를 자신이 황제를 칭해야 할 징조로 여겨 그렇게 했고 연호를 "황무"에서 "황룡"으로 변경했다. 그는 또한 황룡의 이미지가 장식된 커다란 깃발을 만들고 그것을 전투에서 군대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자신의 군기로 사용했다. 그 후 그는 호종에게 황제 즉위를 기념하는 ''부''를 짓도록 명령했다.[12]
오의 동맹국인 촉한이 손권이 황제를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축하하고 위나라에 대항하는 오-촉 동맹을 재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손권의 지시에 따라 호종은 오-촉 동맹을 위한 우아하게 작성된 서약서를 작성했다.[13]
229년 10월, 손권이 오나라의 수도를 무창 (현재의 어저우, 후베이성)에서 건업 (현재의 난징, 장쑤성)으로 이전한 후, 그는 호종과 서상을 시중 (侍中|시중중국어)으로 임명하고 각각 우군과 좌군 ()으로 임명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작위를 정후(亭侯)에서 향후(鄉侯)로 높였다.[14]
위나라에서 투항한 자들이 위나라 장군 오질에 대해 위나라 조정이 불신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호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질과 위나라 조정 간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세 가지 조항으로 구성된 편지를 작성하여 오질의 이름으로 위조하고, 위나라 영토에 배포하여 위나라 조정이 오질이 오나라로 투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려 했다.[15] 그러나 이 편지가 위나라에 널리 유포될 무렵, 위나라 조정은 이미 오질을 위나라 황궁의 시중으로 전임시킨 상태였다.[16]
230년, 위나라 관료 은번(隱蕃|은번중국어)이 오나라로 귀순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제출한 후, 손권은 그를 면담했는데, 은번이 시사를 잘 분석하고 질문에 유창하게 답변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17] 호종도 손권이 은번을 면담할 때 함께 있었고, 손권은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호종은 "은번의 귀순 서신은 동방삭의 문체와 비슷하고, 말솜씨는 미형과 비슷하지만, 그들만큼 재능이 있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18]
손권이 호종에게 은번에게 어떤 직책이 적합한지 묻자, 호종은 "그는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 수도에서 낮은 직책을 주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9] 손권은 은번이 형법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그를 사법관으로 임명했다. 은번이 오나라에서 근무하는 동안, 장군 주거와 법무부 장관 하포(郝普|학보중국어)는 손권에게 그가 더 큰 책임을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하포는 은번과 매우 잘 지냈고, 은번의 재능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고 자주 불평했다.[20]
230년 말, 은번은 실제로는 위나라 황제 조예가 오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되어 오나라 내분을 일으키도록 심어놓은 첩자임이 밝혀졌다. 은번은 사실 손권에 반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의 음모가 드러난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1] 손권은 은번의 배신에 대해 하포를 탓하며 자결을 강요했고,[22] 은번을 칭찬했던 주거 또한 사건에 연루되어 오랫동안 투옥되었다.[23]
2. 3. 사망
胡綜|호종중국어은 243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후충(胡沖)은 그의 작위를 상속받아 도향후(都鄉侯)가 되었다.[30]3. 평가
호종은 문장 작성에 뛰어나 오를 찬양하는 사부(辭賦)를 지었으며, 오의 행정 문서와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오에서는 장관직에 있는 자가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경우 휴직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실제로는 금령이 지켜지지 않았다. 금령에 대해 조정 신하들에게 자문했을 때, 호종은 금령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하며, 한 사람을 처벌하면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상언했다. 손권이 호종의 의견에 따른 결과, 오에서는 이 금령을 어기는 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4. 가족 관계
胡沖|호충중국어은 문학적 재능과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동오에서 관료로 일했으며, 손호 치세인 270년대 후반에 중서령(中書令)의 지위에 올랐다.[31] 오나라가 멸망한 후, 그는 진나라 정부에서 황실 비서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오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32]
- 아버지: 호충
참조
[1]
서적
胡綜字偉則,汝南固始人也。
Sanguozhi vol. 62
[2]
서적
少孤,母將避難江東。
Sanguozhi vol. 62
[3]
서적
孫策領會稽太守,綜年十四,為門下循行,留吳與孫權共讀書。
Sanguozhi vol. 62
[4]
서적
策薨,權為討虜將軍,以綜為金曹從事, ...
Sanguozhi vol. 62
[5]
서적
... 從討黃祖,拜鄂長。
Sanguozhi vol. 62
[6]
서적
徐詳者字子明,吳郡烏程人也,先綜死。
Sanguozhi vol. 62
[7]
서적
權為車騎將軍,都京,召綜還,為書部,與是儀、徐詳俱典軍國密事。
Sanguozhi vol. 62
[8]
서적
魏拜權為吳王,封綜、儀、詳皆為亭侯。
Sanguozhi vol. 62
[9]
서적
劉備下白帝,權以見兵少,使綜料諸縣,得六千人,立解煩兩部,詳領左部、綜領右部督。
Sanguozhi vol. 62
[10]
서적
吳將晉宗叛歸魏,魏以宗為蘄春太守,去江數百里,數為寇害。
Sanguozhi vol. 62
[11]
서적
權使綜與賀齊輕行掩襲,生虜得宗,加建武中郎將。
Sanguozhi vol. 62
[12]
서적
黃武八年夏,黃龍見夏口,於是權稱尊號,因瑞改元。又作黃龍大牙,常在中軍,諸軍進退,視其所向,命綜作賦曰: ...
Sanguozhi vol. 62
[13]
서적
蜀聞權踐阼,遣使重申前好。綜為盟文,文義甚美,語在權傳。
Sanguozhi vol. 62
[14]
서적
權下都建業,詳、綜並為侍中,進封鄉侯,兼左右領軍。
Sanguozhi vol. 62
[15]
서적
時魏降人或云魏都督河北振威將軍吳質,頗見猜疑,綜乃偽為質作降文三條: ...
Sanguozhi vol. 62
[16]
서적
此文旣流行,而質已入為侍中矣。
Sanguozhi vol. 62
[17]
서적
二年,青州人隱蕃歸吳,上書曰:「臣聞紂為無道, ... 乞蒙引見。」權即召入。蕃謝荅問,及陳時務,甚有辭觀。
Sanguozhi vol. 62
[18]
서적
綜時侍坐,權問何如,綜對曰:「蕃上書,大語有似東方朔,巧捷詭辯有似禰衡,而才皆不及。」
Sanguozhi vol. 62
[19]
서적
權又問可堪何官,綜對曰:「未可以治民,且試以都輦小職。」
Sanguozhi vol. 62
[20]
서적
權以蕃盛論刑獄,用為廷尉監。左將軍朱據、廷尉郝普稱蕃有王佐之才,普尤與之親善,常怨歎其屈。
Sanguozhi vol. 62
[21]
서적
吳錄曰:蕃有口才,魏明帝使詐叛如吳,令求作廷尉職,重案大臣以離間之。 ... 遂閉口而死。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2
[22]
서적
吳歷曰:權問普:「卿前盛稱蕃,又為之怨望朝廷,使蕃反叛,皆卿之由。」
Wu L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2
[23]
서적
後蕃謀叛,事覺伏誅,普見責自殺。據禁止,歷時乃解。
Sanguozhi vol. 62
[24]
서적
拜綜偏將軍,兼左執法,領辭訟。
Sanguozhi vol. 62
[25]
서적
凡自權統事,諸文誥策命,鄰國書符,略皆綜之所造也。
Sanguozhi vol. 62
[26]
서적
初以內外多事,特立科,長吏遭喪,皆不得去,而數有犯者。
Sanguozhi vol. 62
[27]
서적
權患之,使朝臣下議。綜議以為宜定科文,示以大辟,行之一人,其後必絕。遂用綜言,由是奔喪乃斷。
Sanguozhi vol. 62
[28]
서적
遼東之事,輔吳將軍張昭以諫權言辭切至,權亦大怒,其和協彼此,使之無隙,綜有力焉。
Sanguozhi vol. 62
[29]
서적
性嗜酒,酒後歡呼極意,或推引杯觴,搏擊左右。權愛其才,弗之責也。
Sanguozhi vol. 62
[30]
서적
赤烏六年卒,子冲嗣。
Sanguozhi vol. 62
[31]
서적
冲平和有文幹,天紀中為中書令。
Sanguozhi vol. 62
[32]
서적
吳錄曰:冲後仕晉尚書郎、吳郡太守。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2
[33]
서적
三国志 呉志 朱桓伝
三国志 (歴史書)
[34]
서적
三国志 呉志 胡綜伝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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