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터 요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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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섬터 요새 전투는 1861년 4월 12일부터 14일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에 위치한 섬터 요새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국 남북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다른 남부 주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남북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링컨은 섬터 요새의 연방군에게 식량을 지원하려 했지만, 남부 연합은 이를 도발로 간주하고 요새를 공격했다. 남부 연합군의 포격으로 시작된 전투에서 섬터 요새는 34시간 만에 항복했고, 이 사건은 북부의 결집을 이끌어내며 본격적인 남북 전쟁의 발발을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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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터 요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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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섬터 요새 전투 |
일부 | 남북 전쟁 |
![]() | |
날짜 | 1861년 4월 12일~13일 |
장소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
결과 | 아메리카 연합국 승리 연합국, 섬터 요새 점령 남북 전쟁 시작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교전국 2 | 아메리카 연합국 |
지휘관 및 병력 | |
사령관 1 | 로버트 앤더슨 |
사령관 2 | P. G. T. 보리가드 |
부대 1 | E 포대 제1 미국 포병 연대 H 포대 제1 미국 포병 연대 |
부대 2 | 아메리카 연합국 임시군 |
병력 1 | 85명 |
병력 2 | 500–6,000명 (추정) |
사상자 | |
사상자 1 | 0명 |
사상자 2 | 0명 |
캠페인 정보 | |
관련 전투 | 섬터 요새 |
2. 배경
남북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 남부 연합에 가담한 남부 주들은 관할 지역 내 연방 요새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찰스턴 항구의 섬터 요새를 지키던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미합중국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섬터 요새는 남부 연합의 통제 하에 들어가지 않은 채 긴장 관계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2. 1. 링컨 대통령 당선과 남부의 연방 탈퇴
1860년 11월 6일,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제 확장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제16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는 칙령을 채택했다.[17] 이후 1861년 2월까지 6개의 다른 남부 주들도 유사한 칙령을 채택하며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2월 7일, 탈퇴를 선언한 7개 주는 몽고메리에서 모여 아메리카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결성을 위한 임시 헌법을 채택하고, 몽고메리를 임시 수도로 정했다. 같은 달 워싱턴 D.C.에서 1861년 평화 회의가 열렸으나, 연방 분열 위기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나머지 8개의 노예주는 남부 연합의 합류 요청을 거부했다.
연방을 탈퇴한 주들은 자신들의 경계 내에 있는 연방 정부 소유의 건물, 무기고, 요새 등을 압류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은 이러한 조치에 항의했지만, 남은 노예주들의 추가 탈퇴를 우려하고 연방 정부가 주들의 탈퇴를 막을 헌법적 권한이 없다고 판단하여 별다른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남북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남부 지역의 요새 대부분은 남부 연합군(남군)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찰스턴 항구에 위치한 섬터 요새의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을 비롯한 일부 군인들은 미합중국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이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 날, 앤더슨 소령으로부터 섬터 요새의 보급품 부족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했다. 링컨은 즉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7명의 장관 중 5명이 요새 포기에 찬성했지만, 링컨은 연방에 충성을 다하는 군인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식량 지원이 결정되었으나, 일각에서는 탄약만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
2. 2. 찰스턴 항구의 요새들

찰스턴 항구에는 섬터 요새와 모울트리 요새를 포함하여 여러 요새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 요새들은 남북 전쟁 발발 직전까지 미국 연방이 통제하고 있었다. 설리번스 아일랜드에 위치한 모울트리 요새는 가장 오래된 요새로, 1776년부터 요새가 있었던 곳이며 미국 육군 주둔지의 본부였다. 그러나 이 요새는 항구 방어를 위한 포대 역할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었기 때문에, 육상에서의 공격에는 취약했다. 당시 찰스턴 지역 신문들은 모래 언덕이 요새 벽까지 쌓여 있어 쉽게 벽을 넘을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주둔군이 이 모래 언덕을 제거하려 하자 신문들은 반대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860년 가을, 남부의 분리 움직임으로 긴장이 고조되자 미국 육군은 로버트 앤더슨 소장 (제1 미국 포병 연대)을 찰스턴 주둔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켄터키 출신인 앤더슨은 당시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윈필드 스콧의 제자였으며, 퇴역을 앞둔 전임 지휘관 존 L. 가드너 대령보다 위기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앤더슨은 과거 모울트리 요새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설리번 요새(모울트리 요새의 옛 이름)를 지킨 인물이기도 했다. 그해 가을 내내 사우스캐롤라이나 당국은 연방 탈퇴와 항구 내 연방 재산 몰수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긴장이 높아지면서 요새 주변은 점차 포위 상태와 비슷해졌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당국은 병력 이동을 감시하기 위해 초계선을 배치했으며, 미국 병기창에서 항구 요새로 소총 40정을 옮기려 하자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모울트리 요새와 달리, 섬터 요새는 찰스턴 항구 입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로 설계되었다. 비록 1860년 가을까지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요새의 기본적인 구조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섬터 요새에는 등대지기 역할을 하던 병사 한 명과 소수의 민간 건설 노동자들만 머물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선언한 지 6일 후인 1860년 12월 26일 밤, 앤더슨 소령은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한 모울트리 요새를 비밀리에 포기했다. 그는 요새의 대포를 사용할 수 없도록 스파이크(포문에 쇠못을 박아 사용 불능으로 만드는 것) 처리하고 포가를 불태우도록 지시한 뒤, 작은 배들을 이용해 휘하 병력과 함께 섬터 요새로 이동했다.
2. 3.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스타 오브 더 웨스트'' 호
사우스캐롤라이나 당국은 앤더슨 소령의 섬터 요새 이동을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했다. 프랜시스 윌킨슨 피켄스 주지사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이 섬터 요새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자신에게 했으며, 그 약속을 믿었기에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뷰캐넌 대통령은 외교관 출신답게 피켄스에게 신중하게 표현된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여 "즉시" 점령하지 않겠다고만 약속했을 뿐이었다. 앤더슨 소령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단순히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기지 병력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는 육군 참모차장 돈 카를로스 뷰엘 소장이 12월 11일에 작성하고 육군 장관 존 B. 플로이드가 승인한 전쟁부의 지시를 따랐다. 이 지시는 "항구의 요새를 점령해야 하며, 공격을 받으면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방어해야 합니다. 병력 규모가 작아 세 요새 중 하나 이상을 점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중 하나에 대한 공격 또는 점령 시도는 적대 행위로 간주될 것이며, 그런 다음 저항력을 증가시키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요새로 부대를 투입할 수 있습니다. 적대 행위를 감행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마다 유사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5]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뷰캐넌 대통령은 앤더슨의 섬터 요새 이동 소식에 놀라움과 실망감을 느꼈는데, 이는 앤더슨이 사전에 이동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찰스턴 항구를 포기하라는 피켄스 주지사의 요구를 거부했다. 요새 주둔군의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뷰캐넌은 물자, 소형 화기, 그리고 병력 200명으로 구성된 구호 원정대를 보내기로 승인했다. 처음에는 해군 슬루프 USS ''브루클린''을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남부 연합군이 찰스턴 항로를 막기 위해 배를 침몰시켰고, ''브루클린'' 호의 흘수가 깊어 이 장애물을 통과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대신, 남부 연합을 덜 자극할 것으로 보이는 비무장 민간 상선인 ''스타 오브 더 웨스트''호를 보내는 것이 더 신중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1861년 1월 9일, ''스타 오브 더 웨스트'' 호가 항구 입구에 접근하자 모리스 섬에 배치된 시타델 생도들이 포격을 가했다.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유일하게 훈련된 포병이었던 윌리엄 스튜어트 심킨스도 이 포격에 참여했다. 포트 몰트리의 포대도 가세하여 포격하자 ''스타 오브 더 웨스트'' 호는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앤더슨 소령은 섬터 요새에서 남부 연합군의 포격 소리를 듣고 대포를 준비했지만,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구호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전면전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 발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1861년 1월 31일, 피켄스 주지사는 뷰캐넌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섬터 요새의 점령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존엄성이나 안전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요새의 항복을 요구했다.
3. 전쟁 준비
1860년 말,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미국 연방 탈퇴를 선언하면서 찰스턴 항구의 긴장이 높아졌다. 미국 육군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방어가 어려운 모울트리 요새를 버리고 병력을 섬터 요새로 옮겨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섬터 요새는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고 병력도 충분하지 않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1861년 3월, 남부 연합 정부는 P. G. T. 보레가드 준장을 찰스턴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보레가드는 섬터 요새 주변에 포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증강하며 요새를 압박했고, 앤더슨 소령에게 여러 차례 항복을 요구했다.
같은 달 취임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섬터 요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요새에 식량만 보급하는 구호 작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이 계획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알렸다. 그러나 남부 연합 정부는 이를 연방의 군사적 개입 시도로 간주하고, 구호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섬터 요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4월 12일 새벽, 남부 연합군은 최후통첩 후 섬터 요새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고, 이는 미국 남북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3. 1. 섬터 요새 상황
찰스턴 항구에는 섬터 요새와 모울트리 요새를 포함한 여러 요새가 있었으나, 미국 육군은 처음부터 모든 요새를 점령하지는 않았다. 설리번스 아일랜드에 위치한 모울트리 요새는 가장 오래된 요새로, 1776년부터 존재했으며 미 육군 주둔지의 본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요새는 항구 방어를 주 목적으로 설계되어 육상 공격에는 매우 취약했다. 당시 찰스턴의 신문들은 모래 언덕이 요새 벽까지 쌓여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미국 육군 로버트 앤더슨 소령(제1 미국 포병 연대)은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1860년 가을, 찰스턴 주둔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켄터키 출신인 그는 윈필드 스콧 육군 참모총장의 제자였으며, 전임자보다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다. 앤더슨은 이전에 모울트리 요새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이 요새(당시 설리번 요새)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해 가을, 사우스캐롤라이나 당국은 연방 탈퇴와 항구 내 연방 자산 몰수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요새 주변은 사실상 포위 상태와 비슷해졌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당국은 연방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무기 이동 시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모울트리 요새와 달리, 섬터 요새는 찰스턴 항구 입구를 장악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로 설계되었다. 비록 1860년 가을까지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매우 컸다. 당시 요새에는 등대지기 역할을 하는 병사 한 명과 소수의 민간 건설 인부만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탈퇴한 지 6일 후인 1860년 12월 26일 밤, 앤더슨 소령은 방어가 불가능한 모울트리 요새를 비밀리에 포기했다. 그는 요새의 대포를 못 쓰게 만들고 포가를 불태운 뒤, 작은 배를 이용해 병력을 섬터 요새로 이동시켰다.
1860년에서 186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섬터 요새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이 부족했고 난방용 연료도 거의 없었다. 수비대는 제한된 여건 속에서 방어 시설을 최대한 보강하려 애썼다. 섬터 요새는 본래 650명의 장교와 병사가 135문의 대포를 운용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수십 년간 이어진 공사 지연과 예산 삭감으로 1861년 초까지 약 90%만 완성된 상태였다. 앤더슨 소령의 수비대는 총 85명에 불과했으며, 이는 주로 제1 미 육군 포병대 E중대(애브너 더블데이 대위 지휘)와 H중대(트루먼 세이모어 대위 지휘)의 두 소규모 포병 중대로 구성되었다. 이 외에 군의관 새뮤얼 W. 크로포드, 중위 테오도어 탈보트, 제퍼슨 C. 데이비스, 소위 노먼 J. 홀 등 6명의 장교와 공병대 소속의 존 G. 포스터 대위, 조지 W. 스나이더 중위가 있었다. 공병 장교들은 찰스턴 요새 건설을 담당했지만 앤더슨에게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나머지 인원은 68명의 부사관과 사병, 8명의 군악대원, 43명의 비전투 인력이었다.
1861년 4월까지 연방군은 60문의 대포를 배치했지만, 이를 모두 운용할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요새는 3층 구조의 폐쇄된 포대(카세이트)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층 포대는 비어 있었다. 대부분의 대포는 1층 포대와 상층의 개방된 포좌(파라펫 또는 바벳), 그리고 중앙 광장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요새의 주된 설계 목적이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적함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포 대부분이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이는 육지로부터의 포격이나 보병 상륙 공격에 대한 방어 능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6]
3. 2. P. G. T. 보레가드 준장

1861년 3월, 준장 P. G. T. 보레가드가 찰스턴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군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3월 1일,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보레가드를 새로운 남부 연합군의 첫 번째 장교로 임명하고, 특히 섬터 요새 포위 공격을 지휘하도록 했다. 보레가드는 웨스트포인트 시절, 섬터 요새 사령관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의 포병 교관 아래에서 배웠으며, 졸업 후에는 앤더슨의 조수를 지낼 정도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보레가드는 연방군에게 반복적으로 항복하거나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식량이 부족해지고 있던 요새 수비대에 찰스턴 시로부터 어떠한 보급품도 제공되지 않도록 조치했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 민병대가 남부 연합군이 보유한 대포를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강화했다. 양측은 3월 한 달 동안 병력을 훈련하고 각자의 요새를 최대한 보강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훈련된 군사 기술자였던 보레가드는 섬터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준비했다. 그가 배치한 주요 화력은 다음과 같다.
위치 | 배치된 무기 |
---|---|
모울트리 요새 | 8인치 콜럼비아드 3문, 8인치 곡사포 2문, 32파운드 활강포 5문, 24파운드포 4문 |
모울트리 요새 외곽 | 10인치 박격포 5문, 32파운드포 2문, 24파운드포 2문, 9인치 달그렌포 1문 |
부유 포대 (모울트리 요새 옆) | 42파운드포 2문, 32파운드포 2문 (철판 보호 뗏목 위) |
존슨 요새 (제임스 섬) | 24파운드포 1문, 10인치 박격포 4문 |
커밍스 포인트 (모리스 섬) | 10인치 박격포 7문, 42파운드포 2문, 영국제 12파운드 블레이클리 소총 1문, 8인치 콜럼비아드 3문 (철갑 포대) |
이러한 포들을 운용하고 필요시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지방 민병대, 소년, 노인 등을 포함하여 약 6,0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3. 3. 전쟁 결정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직후 그는 섬터 요새의 로버트 앤더슨 소령으로부터 요새에 6주 분량의 식량만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17] 이는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의 포트 피켄스에서도 유사한 위기가 발생하여 남부 연합군이 위협하는 상황과 맞물려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링컨과 그의 새로운 내각은 섬터 요새를 증원할지, 그리고 어떻게 증원할지를 두고 깊이 고심했다. 또한, 어떤 조치가 적대 행위로 비춰져 어느 쪽이 침략자로 인식될지에 대한 정치적 부담도 고려해야 했다. 이는 남부 연합 측의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과 그의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남부 연합 내부에서는 섬터 요새 문제를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단독으로 처리해야 할지, 아니면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연합 정부가 맡아야 할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다. 피켄스 주지사 등은 주권을 강조하며 찰스턴 항구의 모든 재산이 독립적인 주로 분리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요새를 얼마나 공격적으로 확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링컨과 마찬가지로 남부 연합이 먼저 공격하는 침략자로 비춰지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양측 모두 먼저 무력을 사용할 경우,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은 경계주들의 지지를 잃을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링컨 취임 전, 버지니아를 포함한 5개 주는 연방 탈퇴에 반대했으며, 링컨은 버지니아의 연방 잔류를 확보할 수 있다면 섬터 요새를 비울 수도 있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남부 연합은 워싱턴 D.C.에 사절단을 보내 연방 재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미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링컨은 남부 연합을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이들과의 공식적인 협상을 거부했다. 국무장관 윌리엄 H. 시워드는 개인적으로 섬터 요새 포기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그의 비공식적인 중재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4월 4일, 섬터 요새의 보급 상황이 임계점에 달하자 링컨 대통령은 식량 공급을 위한 구호 원정을 명령했다. 이 원정은 전직 해군 대위였던 거스터버스 V. 폭스가 지휘를 맡았다. 폭스의 계획은 야간에 작은 배들을 이용해 식량만 조용히 전달하는 것이었다. 만약 남부 연합군이 이를 저지하려 하면, 동행한 해군 함정들이 대응하여 식량과 병력까지 상륙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앤더슨 소령에게는 원정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전달되었지만, 정확한 도착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4월 6일,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피켄스에게 "섬터 요새에 식량만 공급하려 하며, 만약 이 시도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추가적인 군사 행동은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는 남부 연합 정부를 직접 상대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링컨의 통보를 받은 피켄스 주지사는 즉시 지역 남부 연합 사령관인 보레가드 장군과 상의했다. 이 소식은 몽고메리의 데이비스 대통령에게도 전달되었다. 데이비스는 보레가드에게 섬터 요새의 항복을 다시 한번 요구하고, 만약 앤더슨이 거부하면 구호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무력으로 요새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4월 9일, 남부 연합 내각은 이 명령을 승인했다. 국무장관 로버트 툼스만이 이 결정에 강력히 반대하며, "이는 북부의 지지자들을 잃게 만들고,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으며,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월 11일, 보레가드는 제임스 체스넛 대령, 제임스 A. 치솜 대령, 스티븐 D. 리 대위를 섬터 요새로 보내 최후 통첩을 전달했다. 앤더슨 소령은 항복 요구를 거부하면서도, "나는 첫 발포를 기다릴 것이며,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부수지 않는다면 며칠 안에 식량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항복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 모호한 답변을 보고받은 보레가드는 4월 12일 새벽 1시에 다시 사절단을 보냈다. 그들은 앤더슨에게 "요새를 비울 정확한 시간을 명시하고, 그 시간까지 연합군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포격을 보류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앤더슨은 장교들과 상의한 후, "만약 4월 15일 정오까지 워싱턴으로부터 새로운 지침이나 보급품을 받지 못한다면 요새를 비우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체스넛 대령은 이 답변이 여전히 조건부이며 시간을 끄는 것이라 판단하고, 새벽 3시 20분에 앤더슨에게 최종 통보를 전달했다: "장군, 보레가드 준장의 권한으로,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뒤 섬터 요새에 대한 포격을 개시할 것임을 알립니다." 앤더슨은 사절단을 배웅하며 비통한 심정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4. 전투 경과
남부 연합군 사령관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은 섬터 요새의 미국 육군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요새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이를 거부했다.
1861년 4월 12일 새벽, 남부 연합군은 요새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으며, 이는 남북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이 포격으로 북군의 보급선은 요새에 접근하지 못하고 차단되었다. 4월 13일까지 이어진 포격 속에 북군은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다.
결국 4월 14일 오후, 탄약이 고갈되자 앤더슨 소령은 요새를 포기하고 남부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 전투는 약 3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4. 1. 전투 시작
남군 사령관 P.G.T. 보레가드 장군은 섬터 요새의 북군에게 철수를 요구했지만, 요새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이를 거부했다.1861년 4월 12일 오전 4시 30분, 북군의 지원선이 요새로 접근하자 남군은 포트 존슨에서 첫 포격을 시작했다.[7][8] 조지 S. 제임스 대위의 지시에 따라 헨리 S. 팔리 중위가 10인치 박격포탄 한 발을 발사한 것이 신호였다. (제임스는 버지니아 분리주의자 로저 프라이어에게 첫 발사를 제안했지만, 프라이어는 "나는 전쟁의 첫 총을 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 포격으로 북군의 식량 지원선은 요새에 접근하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이는 본격적인 남북 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포탄은 포트 섬터 상공에서 폭발했고, 이를 신호로 포트 몰트리, 포트 존슨, 부유 포대, 커밍스 포인트에 배치된 43문의 대포와 박격포가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보레가르 장군은 탄약을 아끼기 위해 2분 간격으로 항구 주변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또 다른 버지니아 분리주의자 에드먼드 러핀은 전쟁 시작을 보기 위해 찰스턴에 와 있었고, 신호탄 발사 후 커밍스 포인트의 철제 포대에서 포탄 한 발을 섬터 요새로 발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항구를 둘러싼 포격 소리는 찰스턴 주민들을 깨웠고, 메리 체스넛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이른 새벽 어둠 속에서 포탄이 날아가 요새 안에서 터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앤더슨 소령은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전 7시에 반격을 명령했다. 아브너 더블데이 대위가 커밍스 포인트의 남군 포대를 향해 첫 포탄을 발사했지만 빗나갔다. 앤더슨 소령은 병력 부족으로 요새의 60문 대포를 모두 운용할 수 없었으며, 병사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가장 노출이 심한 상층부 포대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요새는 해상 공격에는 강했지만, 육지에서 높은 각도로 발사되는 남군의 포탄에는 취약했다. 북군은 요새 가장 낮은 층의 21문 대포만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포열의 제한된 각도 때문에 포트 몰트리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심각한 탄약 부족이었다. 전투 시작 시 천으로 만든 화약 자루는 700개에 불과했고, 병사들은 앤더슨 소령의 옷장에서 가져온 양말로 급하게 화약 자루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결국 앤더슨은 사용할 수 있는 대포를 6문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구스타부스 폭스가 이끄는 북군의 구원 원정대 선박들이 4월 12일부터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남군의 포격 때문에 요새에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함대의 주력 군함 중 하나인 USS ''포와탄''은 플로리다의 포트 피켄스 구원 임무로 인해 도착하지 못했다. 폭스는 어둠과 군함의 지원을 기다렸지만, 다음 날 거센 파도로 인해 작은 배로 병력과 보급품을 옮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4월 12일 오후, 남군은 석조 요새 내부의 나무 건물들을 겨냥해 열탄(뜨겁게 달군 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요새 내부에 화재가 발생했다. 오후 7시경 내린 소나기가 잠시 불길을 잡았고, 북군 포수들은 밤 동안 포격을 멈췄다. 남군은 야간에 포격 횟수를 시간당 4발로 줄였다.
4월 13일 아침, 남군은 다시 전면적인 포격을 시작하며 열탄 공격에 집중했다. 정오 무렵에는 요새의 나무 건물 대부분과 정문이 불길에 휩싸였다. 불은 화약 300개의 통이 보관된 주요 탄약고 근처까지 번져갔다. 북군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통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했지만, 앤더슨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탄약고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을 때 3분의 2가 남아 있었다. 그는 남은 통들을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했지만, 조류 때문에 통들이 다시 뭉쳐 떠다녔고, 그중 일부는 날아오는 포탄에 의해 불이 붙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부대에게 발사 노력을 배가하라고 명령했지만, 남군도 똑같이 행동하여 열탄을 거의 독점적으로 발사했다. 많은 남군 병사들은 북군 병사들의 용기와 결단력에 감탄했다. 요새가 발사를 잠시 멈춰야 할 때, 남군은 종종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고, 요새를 돕지 못한 인근 북군 함선에 욕설을 퍼부었다.
4. 2. 포격전
1861년 4월 12일 오전 4시 30분, 남부 연합군 사령관 P.G.T. 보레가드의 명령에 따라 존슨 요새에서 헨리 S. 팔리 중위가 10인치 박격포탄 한 발을 섬터 요새를 향해 발사하며 포격이 시작되었다.[7][8] 이는 남북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포성이었다. 조지 S. 제임스 대위는 첫 발사의 영예를 버지니아 분리주의자 로저 프라이어에게 제안했지만, 프라이어는 "전쟁의 첫 총을 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이 신호탄을 시작으로 몰트리 요새, 존슨 요새, 부유 포대, 커밍스 포인트에 배치된 43문의 대포와 박격포가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보레가드는 탄약 절약을 위해 2분 간격으로 항구 주변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포격하도록 지시했다. 또 다른 분리주의자 에드먼드 러핀은 커밍스 포인트의 철제 포대에서 포탄을 발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7] 항구를 둘러싼 포격 소리는 찰스턴 주민들을 깨웠고, 그들은 포탄이 요새로 날아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연방군 요새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전 7시에 아브너 더블데이 대위가 커밍스 포인트의 포대를 향해 첫 대응 포격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앤더슨은 병력 부족과 안전 문제로 요새의 모든 대포(60문)를 가동할 수 없었다. 특히 병사들이 포탄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상층부 바베트 포대의 사용을 피했다. 섬터 요새는 해상 공격 방어용으로 설계되어 육지로부터의 고각 포격에 취약했고, 연방군은 가장 낮은 층의 21문 대포만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고각 발사가 어려워 몰트리 요새를 효과적으로 타격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탄약이 매우 부족했고, 특히 화약 자루가 부족하여 앤더슨의 양말까지 사용해 급조해야 했다. 결국 앤더슨은 6문의 대포만 사용하여 대응 포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구스타부스 폭스가 이끄는 연방군 구원 함대가 4월 12일부터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주력함인 USS ''포와탄''은 플로리다의 포트 피켄스 구원 임무로 인해 오지 못했다. 폭스는 보급품을 실은 작은 배들을 요새로 보내려 했으나, 남부 연합군의 포격으로 인해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다음 날인 4월 13일에는 거센 파도로 인해 병력과 보급품을 작은 배로 옮기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남부 연합군은 요새 내부의 목조 건물들을 겨냥해 열탄(뜨겁게 달군 포탄)을 발사하여 화재를 일으켰다. 4월 12일 저녁에 내린 소나기로 잠시 불이 꺼졌으나, 4월 13일 아침 포격이 재개되면서 남부 연합군은 다시 열탄 공격에 집중했다. 정오 무렵에는 요새의 목조 건물 대부분과 정문이 불길에 휩싸였고, 불은 주요 탄약고까지 위협했다. 연방군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화약통을 옮겼으나, 위험이 커지자 앤더슨은 탄약고 문을 닫고 남은 화약통 일부를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연방군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며, 남부 연합군 병사들조차 그들의 용기에 감탄하여 환호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4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탄약이 거의 고갈되자 앤더슨 소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부 연합군에 항복 의사를 전달하며 요새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 포격전은 34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남북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4. 3. 항복
4월 13일 오후 1시경, 요새 중앙의 깃대가 남군의 포격으로 쓰러졌다. 이를 본 남부 연합 측의 전 미국 상원 의원 루이스 위그폴(Louis Wigfall) 대령은 북군이 항복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작은 배를 타고 요새로 접근했다. 그는 로버트 앤더슨 소령에게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이 싸움을 멈추고 싶어한다며 요새를 비울 조건을 물었다. 당시 앤더슨 소령은 탄약이 거의 떨어지고 요새 내부에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으며,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있는 상태였다. 앤더슨은 3,000발이 넘는 포탄을 맞고도 사상자 없이 명예롭게 요새를 지켰다고 판단하여 오후 2시에 휴전에 동의했다.위그폴은 자신의 흰 손수건을 깃대에 걸고 모리스 섬으로 돌아가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잠시 후, 보레가르 장군이 보낸 공식 대표단([스티븐 D. 리], 윌리엄 포처 마일스, 전 찰스턴 시장 로저 프라이어)이 위그폴의 방문 사실을 모른 채 요새에 도착했다. 이들은 위그폴에게 항복 협상 권한이 없었음을 밝혔고, 이에 앤더슨 소령은 분노하며 사격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보레가르 장군 자신도 위그폴이 걸어둔 손수건을 보고 두 번째 대표단을 보냈고, 위그폴이 제시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제시하여 혼란 끝에 항복 합의가 복원되었다.

북군은 4월 14일 오후 2시 30분에 공식적으로 남군에게 요새를 항복했다. 전투 자체로 인한 사망자는 양측 모두 없었다. 항복 조건 중 하나는 미국 국기에 대해 100발의 예포를 발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포 발사 도중, 쌓여있던 탄약 더미가 불꽃에 옮겨붙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북군 소속의 다니엘 호프(Daniel Hough) 이병이 즉사하고 에드워드 갤러웨이(Edward Galloway) 이병이 치명상을 입어 며칠 후 사망했다. 이들은 남북 전쟁 최초의 전사자로 기록되었다. 다른 4명의 포병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예포 발사는 50발에서 중단되었다. 호프는 요새 내 연병장에 묻혔고, 갤러웨이와 다른 부상자들은 찰스턴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앤더슨 소령과 남은 북군 병력은 남군의 증기선 ''이서벨''호에 태워졌다가 다음 날 아침 항구 밖에 대기하고 있던 북군 구호선 ''발틱''호로 옮겨졌다. 앤더슨 소령은 4월 18일, 증기선 발틱 호에서 국방부 장관 사이먼 카메론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섬터 요새를 34시간 동안 방어했고, 사병 구역이 완전히 불타고, 주 출입구가 화재로 파괴되었으며, 협곡 벽이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탄약고가 화염에 휩싸였으며, 열의 영향으로 문이 닫혔고, 화약 4통과 탄약통 3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돼지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4월 11일에 적대 행위가 시작되기 전에 그가 제시한 것과 동일한 조건인 보레가르 장군이 제시한 철수 조건을 받아들여, 4월 14일 일요일 오후, 깃발을 휘날리며 북을 치면서 요새에서 나와 회사와 개인 재산을 가져갔으며, 50발의 예포로 제 깃발에 경례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9]


앤더슨 소령은 항복하면서 사용했던 섬터 요새 깃발을 북부로 가져갔다. 이 깃발은 전투의 상징물이 되어 북부 연방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화가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는 이 깃발에서 영감을 받아 ''하늘의 우리 깃발''이라는 그림을 그렸으며, 이 그림은 석판화로 제작되어 연방군 병사 가족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에 사용되었다.[10]
'''항복 후 섬터 요새 모습'''
5. 전투의 의의 및 영향
섬터 요새 전투는 미국 남북 전쟁의 포문을 연 사건으로, 군사적 충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요새 자체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으나[12], 미국 연방에 대한 미국 남부 연합의 공격은 북부 여론을 결집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연방 유지를 위해 자원병을 모집했으나, 이는 일부 국경 주의 반발을 사 추가적인 연방 탈퇴를 야기하기도 했다.[13] 전투 이후 요새는 남군의 손에 넘어갔지만, 전쟁 기간 내내 북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으며, 전쟁 종결 후에는 로버트 앤더슨 소장이 1861년 내렸던 성조기를 다시 게양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14] 이 전투는 남북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1. 섬터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
섬터 요새는 찰스턴 항구의 수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이 요새의 존재 목적은 수로를 통해 침입하는 적 함선을 정면에서 막아 격퇴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용되던 대포는 육상과 선상 모두에서 비슷한 성능을 발휘했지만, 배와 육지 사이의 포격전에서는 일반적으로 배 쪽이 다소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그러나 섬터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은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그다지 높다고 평가받지는 못했다. 실제로 링컨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소집한 각료 회의에서도, 참석한 7명의 장관 중 5명이 섬터 요새에 대한 지원을 반대했을 정도였다. 이는 당시 요새의 전략적 가치가 낮게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5. 2. 남북 전쟁의 시작

섬터 요새 포격은 미국 남북 전쟁의 첫 번째 군사 행동이었다. 미국 남부 연합에 가담한 남부 주들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요새가 남군의 통제하에 들어갔지만, 섬터 요새의 사령관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미국 연방에 충성을 지켰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취임 다음 날, 앤더슨 소령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가 도착했다. 각료 회의에서는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링컨은 연방에 충성하는 부하들을 위해 식량 지원을 결정했다.
요새가 남부 연합에 항복하자, 북부 여론은 요새 탈환과 연방 보존을 위해 결집했다. 링컨 대통령은 반란 진압을 위해 90일간 7만 5천 명의 자원병 모집을 요청했다. 오하이오와 같은 일부 북부 주들은 할당량을 빠르게 채웠고, 오하이오의 경우 16일 만에 7만 5천 명 모집 목표를 자체적으로 달성할 정도였다.[12]
그러나 국경 주 주지사들의 반응은 달랐다. 클레이본 잭슨 미주리 주지사는 "미주리 주는 그런 불경한 십자군 전쟁에 단 한 명의 병력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베리아 마고핀 켄터키 주지사 역시 "켄터키는 자매 남부 주들을 정복하려는 사악한 목적을 위해 병력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13] 결국 링컨의 자원병 모집 요청은 4개의 추가 노예 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 연합에 가담하는 결과를 낳았다.
5. 3. 기타
남군 사령관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은 북군이 성조기를 향해 마지막 예포를 발사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50문의 대포 중 한 문이 발사 중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철수할 때 로버트 앤더슨 소령은 요새의 상징인 성조기를 뉴욕으로 가져갔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앤더슨의 제자였던 보우리가드 장군은 은사인 앤더슨 소령이 성조기를 가져가는 것을 묵인했다. 이 성조기는 이후 북부에서 전쟁 지지를 위한 선전용으로 활용되었다.
섬터 요새는 전투 이후 남군의 손에 넘어갔지만, 미국 남북 전쟁 기간 동안 북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다. 특히 찰스턴 항은 전쟁 기간 내내 남부 연합의 중요한 항구였으며, 북군은 이곳을 봉쇄하고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다. 1863년부터 시작된 북군의 지속적인 포격으로 요새는 크게 파괴되었으나, 남군은 1865년 2월까지 요새를 지켰다. 남부 연합군은 윌리엄 T. 셔먼 소장이 이끄는 북군이 캐롤라이나 전역에서 찰스턴을 우회하여 내륙으로 진격하자 결국 섬터 요새와 찰스턴에서 철수했다.
1865년 4월 14일, 요새를 항복한 지 정확히 4년이 되는 날, 로버트 앤더슨 소장(당시 건강 악화로 은퇴)은 폐허가 된 요새로 돌아와 1861년에 내렸던 바로 그 성조기를 다시 게양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섬터 요새에서 사용되었던 대포 2문은 전쟁 후 윌리엄 T. 셔먼 장군에 의해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에 기증되었다. 셔먼은 전쟁 전에 이 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인연이 있었다.[14]
이 전투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요새끼리 포격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특이한 전투이기도 했다.
6. 현재
섬터 요새는 1948년에 국립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섬터 요새 국립 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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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Dyer, Volume III, p. 831
[2]
웹사이트
Fort Sumter Battle Summary
http://www.nps.gov/h[...]
National Park Service
2011-03-10
[3]
웹사이트
Fort Sumpter F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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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04-15
[4]
웹사이트
Fort Sumpter F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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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04-15
[5]
웹사이트
Fort Sumter National Mon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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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Park Service
2011-03-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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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 Sumter National Monument
http://www.cr.nps.go[...]
National Park Service
2011-03-10
[7]
웹사이트
Daily globe. [volume] (St. Paul, Minn.) 1878-1884, October 20, 1882, Image 4
https://chroniclinga[...]
1882-10-20
[8]
웹사이트
The Princeton union. [volume] (Princeton, Minn.) 1876-1976, September 09, 1897, Image 8
https://chroniclinga[...]
1897-09-09
[9]
뉴스
Major Anderson's dispatch to the War Department
https://www.newspape[...]
1861-04-19
[10]
웹사이트
Our Banner in the Sky
http://m.facebook.co[...]
Olana State Historic Site
2013-01-12
[11]
지도
See Ft Sumter Map "Battles and Leaders of the Civil War Vol 1 p.54
[12]
웹사이트
Fight for the Colors, the Ohio Battle Flags Collection, Civil War Room
Ohio Historical Society
2011-10-17
[13]
웹사이트
Lincoln Declares War
http://opinionator.b[...]
Opinionator
2011-04-14
[14]
웹사이트
Louisiana State University Army ROTC Unit History
http://www.lsu.edu/h[...]
Louisiana State University
2015-01-24
[15]
웹사이트
Civil War Centennial Issue
http://arago.si.edu/[...]
Smithsonian National Postal Museum
2013-10-01
[16]
간행물
Civil War Centennial Issue
National Postal Museum online
2014-03-16
[17]
서적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2
휴머니스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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