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페리브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트-페리브센은 제2왕조의 파라오로, 그의 왕명은 전통적인 호루스 대신 세트 신을 연관시켜 이집트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세트를 자신의 세레크에 새긴 유일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당시 종교적, 정치적 변화의 증거로 해석된다. 페리브센의 통치 기간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세력 다툼과 종교적 갈등으로 특징지어지며, 일부 학자들은 그가 세트를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도입하려 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증거들은 이를 반박한다. 페리브센은 아비도스에 무덤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업적으로는 행정 개혁, 경제 발전, 그리고 종교 정책 변화가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8세기 파라오 - 라네브
라네브는 이집트 제2왕조의 파라오로, 그의 세레크 이름은 태양 상형 문자를 사용하여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호루스와 세트의 균형을 유지하려던 종교적 특징을 보이나, 통치 기간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 기원전 28세기 파라오 - 니네체르
니네체르는 이집트 제2왕조의 파라오로, 그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은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되었으며, 팔레르모 석비에는 그의 통치 기간의 주요 사건과 나일강 홍수 수위가 기록되어 있고, 그의 통치 시기에는 태양 숭배 발전과 행정 시스템 변화가 있었으며, 통치 말기에는 정치적 혼란과 왕국 분열 가능성이 제기되고, 그의 무덤은 북 사카라에 위치한다. - 이집트 제2왕조의 파라오 - 카세켐위
카세켐위는 이집트 제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서 상·하 이집트의 재통일을 이루고 호루스와 세트 두 신의 상징을 세레크에 새겨 넣어 통합을 시도했으며, 활발한 건설 사업을 추진했고, 그의 무덤은 가장 오래된 석조 구조물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왕비 니마아트하프를 통해 제3왕조의 창시자와 연결되어 이집트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 이집트 제2왕조의 파라오 - 라네브
라네브는 이집트 제2왕조의 파라오로, 그의 세레크 이름은 태양 상형 문자를 사용하여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호루스와 세트의 균형을 유지하려던 종교적 특징을 보이나, 통치 기간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세트-페리브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역할 | 파라오 |
왕조 | 이집트 제2왕조; 기원전 2740년경 |
선대 왕 | 불확실; 와제네스, 세네지, 세케미브 또는 니네체르 |
후대 왕 | 불확실; 세네지, 세케미브 또는 카세켐위 |
이름 | 니수트-비티-네브티-페리브센 nsw.t-bjtj-nbtj-Pr.-jb-sn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 두 여인의 주인, 페리브센 |
네브티 이름 (두 여신 이름) | 페리브센 |
호루스 이름 | 세트-페리브센 Stš-pr-jb-sn 세트의 의지로 나오는 자 |
무덤 | 아비도스의 'P' 무덤 |
통치 기간 | |
재위 기간 | 알려지지 않음 |
가계 |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음 |
자녀 | 셰프세트-이페트 ? |
부모 | 알려지지 않음 |
2. 이름
페리브센의 왕명은 이집트학자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이름에 사용되었던 호루스 대신 세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왕의 호루스 이름은 세레크 안에 기록되었으며, 세레크는 호루스 신을 나타내는 매 아래에 왕궁 정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집트 상형 문자 참조). 그러나 페리브센은 세트를 나타내는 세트 동물을 자신의 세레크에 새겼다. 페리브센은 세트 동물이 단독으로 세레크를 장식한 유일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14][15]
페리브센이 이러한 이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이론은 페리브센 시대에 이집트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거나, 그가 세트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시작하려 했던 이단이었다는 주장이 있었다.[11] 그러나 새로운 증거와 평가에 따르면 이집트 왕국은 통일되었지만, 제2왕조 동안 광대하고 심오한 개혁이 있었다. 이 시대 무덤에서 나온 봉인 인장은 고위 관료들이 보유한 칭호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의 권력 감소를 시사한다. 추가적인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 아래에서 여러 신이 숭배되었음을 보여주며, 일신교 이론을 반박한다. 다른 동시대 비문들은 이집트어 문법이 그의 시대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완전한 문장이 포함된 가장 초기의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통치는 문화적, 종교적 발전의 시기였다.[16][17]
그의 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세력 다툼이 일어나 내란 상태가 되었다. 양 세력은 신화 속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자칭하며 종교적으로도 항쟁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이름은 호루스 이름을 포함한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 그의 묘비(그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에는 더 일반적인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다.
2. 1. 세레크 이름
페리브센의 왕명은 이집트학자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이름에 사용되었던 호루스 대신 세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왕의 호루스 이름은 세레크 안에 기록되었다. 세레크는 호루스 신을 나타내는 매 아래에 왕궁 정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집트 상형 문자 참조). 대신 페리브센은 세트를 나타내는 세트 동물을 자신의 세레크에 새겼다. 페리브센은 세트 동물이 단독으로 세레크를 장식한 유일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세트와 자신을 연관시킨 유일한 왕은 아니다. 예시로는 제13왕조의 파라오 세트 메리브레,[13] 제19왕조의 통치자 세티 1세와 세티 2세, 그리고 제20왕조의 왕 세트나크테 등이 있다.[14][15]페리브센이 이러한 이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이론은 페리브센 시대에 이집트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거나, 그가 세트를 유일한 숭배 신으로 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시작하려 했던 이단이었다는 생각을 선호했다.[11] 그러나 새로운 증거와 평가에 따르면 이집트 왕국은 통일되었지만, 제2왕조 동안 광대하고 심오한 개혁을 목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이 시대의 무덤에서 나온 봉인 인상은 고위 관료들이 보유한 칭호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의 권력 감소를 시사한다. 추가적인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 아래에서 여러 신이 숭배되었음을 보여주며, 일신교 이론을 반박한다. 다른 동시대 비문들은 이집트어 문법이 그의 시대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완전한 문장이 포함된 가장 초기의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통치는 사실 문화적, 종교적 발전의 시기였다.[16][17]
페리브센의 후원자 선택과 제2왕조 중반의 어두운 시기 동안의 그의 통치는 이집트학자들과 역사가들로 하여금 그의 이름과 그가 살았던 어려운 시기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도록 이끌었다.
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세력 다툼이 일어나 내란 상태가 되었다. 양 세력은 신화 속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자칭하며 종교적으로도 항쟁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이름은 호루스 이름을 포함한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 그의 묘비(그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에는 더 일반적인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으며, 이는 이 왕이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2. 2. 이름의 의미
페리브센의 왕명은 이집트학자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이름에 사용되었던 호루스 대신 신 세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왕의 호루스 이름은 세레크 안에 기록되었으며, 세레크는 호루스 신을 나타내는 매 아래에 왕궁 정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집트 상형 문자 참조).[13] 그러나 페리브센은 세트를 나타내는 세트 동물을 자신의 세레크에 새겼다. 페리브센은 세트 동물이 단독으로 세레크를 장식한 유일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14][15]페리브센이 이러한 이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이론은 페리브센 시대에 이집트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거나, 그가 세트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시작하려 했던 이단이었다는 주장이 있었다.[11] 그러나 새로운 증거와 평가에 따르면 이집트 왕국은 통일되었지만, 제2왕조 동안 광대하고 심오한 개혁이 있었다. 이 시대 무덤에서 나온 봉인 인장은 고위 관료들이 보유한 칭호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의 권력 감소를 시사한다. 추가적인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 아래에서 여러 신이 숭배되었음을 보여주며, 일신교 이론을 반박한다. 다른 동시대 비문들은 이집트어 문법이 그의 시대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완전한 문장이 포함된 가장 초기의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통치는 문화적, 종교적 발전의 시기였다.[16][17]
그의 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세력 다툼이 일어나 내란 상태가 되었다. 양 세력은 신화 속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자칭하며 종교적으로도 항쟁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이름은 호루스 이름을 포함한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 그의 묘비(그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에는 더 일반적인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다.
3. 역사적 기록
세트-페리브센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세력 다툼이 있던 내란 시기에 통치했다. 그는 신화 속에서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 중 세트를 자신의 상징으로 선택하고, 즉위명 "세켐이부"에서 호루스 이름을 제거했다. 대영 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묘비에는 호루스 대신 세트가 새겨져 있어,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3. 1. 동시대 자료

세트-페리브센의 세레크는 점토와 진흙으로 만든 흙 항아리 봉인, 설화석고, 사암, 반암(Porphyry) 및 검은 편암 용기의 비문에서 발견되었다. 이 봉인과 용기는 세트-페리브센의 묘지와 엘레판티네의 발굴 현장에서 출토되었다. 세트-페리브센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 하나는 베이트 할라프의 마스타바 무덤 '''''K1''''' 내부에서 발견되었다.[4][5][6]
화강암으로 만든 두 개의 커다란 묘비가 그의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묘비의 모양은 특이하며 미완성이고 거친 모습이다. 이집트학자들은 이것이 의도적으로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7][8] 출처를 알 수 없는 원통형 봉인에는 카르투슈 안에 세트-페리브센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별칭 "메르지-네체루"(신들이 사랑하는 자)가 주어진다. 이러한 배열로 인해 이집트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 봉인이 세트-페리브센의 통치 후 훨씬 후에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동일한 재료의 봉인에는 카르투슈 없이 세트-페리브센의 이름과 함께 왕의 칭호 "니수트-비티"(상 및 하 이집트의 왕)가 새겨져 있다.[9][10]
3. 2. 후대 기록
신왕국 시대 람세스 시대의 왕 목록인 아비도스 왕 목록, 사카라 왕 목록, 토리노 왕실 연대기에는 페리브센의 이름이 없다. 이 목록들은 페리브센 사후 거의 1,500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11] 그러나 페리브센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들의 제4왕조 시대 무덤 여러 개가 발굴되었다. 이 무덤들은 페리브센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는 아케나톤처럼 기억 삭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정당한 파라오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역사가들과 이집트학자들은 페리브센의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잊혀졌거나, 왜곡되고 잘못된 형태로 보존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12]4. 통치 시기의 논쟁
페리브센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가 분열되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기록이 일부 존재한다. 그의 선임자들이 왜 왕국을 분할하기로 결정했는지, 그리고 페리브센이 이집트의 일부 또는 전체를 통치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페리브센의 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는 내란 상태에서 세력 다툼을 벌였다. 양측은 신화 속에서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자처하며 종교적으로도 항쟁했다. 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호루스 이름을 포함한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이 커지자 호루스 이름을 뺐다. 그의 묘비에는 일반적인 호루스 대신 세트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페리브센이 이집트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묘비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1. 종교적 갈등
페리브센 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는 내란 상태에서 세력 다툼을 벌였다. 양측은 신화 속에서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자처하며 종교적으로도 항쟁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호루스 이름을 포함한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이 커지자 호루스 이름을 뺐다. 그의 묘비에는 일반적인 호루스 대신 세트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페리브센이 이집트 전체를 지배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묘비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1. 1. 이단자 이론과 반박
페리브센의 왕명은 이집트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 대상인데, 이는 전통적인 파라오의 이름이 호루스 신과 연결되는 것과 달리 세트 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11]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호루스 이름은 세레크 안에 기록되었는데, 세레크는 호루스 신을 상징하는 매 아래에 왕궁 정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페리브센은 자신의 세레크에 세트를 나타내는 세트 동물을 새겨 넣었다.[11] 페리브센은 세트 동물만으로 세레크를 장식한 유일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지만, 세트와 자신을 연관시킨 유일한 왕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제13왕조의 파라오 세트 메리브레,[13] 제19왕조의 통치자 세티 1세와 세티 2세, 그리고 제20왕조의 왕 세트나크테 등이 있다.[14][15]페리브센이 이러한 이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이론은 페리브센 시대에 이집트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거나, 그가 세트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시작하려 했던 이단이었다는 주장이었다.[11] 그러나 새로운 증거와 평가에 따르면 이집트 왕국은 통일되었지만, 제2왕조 동안 광범위하고 심오한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대의 무덤에서 나온 봉인 인장은 고위 관료들이 보유한 칭호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의 권력 감소를 시사한다. 추가적인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 아래에서 여러 신이 숭배되었음을 보여주며, 일신교 이론을 반박한다. 다른 동시대 비문들은 이집트어 문법이 그의 시대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완전한 문장이 포함된 가장 초기의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통치는 사실 문화적, 종교적 발전의 시기였다.[16][17]
페리브센의 후원자 선택과 제2왕조 중반의 혼란기 동안의 그의 통치는 이집트학자들과 역사가들로 하여금 그의 이름과 그가 살았던 어려운 시기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도록 이끌었다.
이단자 이론20세기 중반까지 널리 받아들여졌던 이론은, 이집트학자 퍼시 뉴베리, 야로슬라프 체르니,[19] 월터 브라이언 에머리[20] 및 베른하르트 그르제슬로프(Bernhard Grdseloff)[11]가 지지했는데, 페리브센은 세트를 유일신으로 하는 새로운 일신교적 국교를 이집트에 도입하려 한 이단이었다는 것이다. 페리브센의 행동은 훨씬 후대의 이집트 제18왕조 파라오 아케나톤의 행동과 유사했는데, 아케나톤은 이집트인들이 오직 아텐만을 섬기도록 요구했다. 뉴베리는 호루스와 세트의 사제들이 제2왕조 후반기에 "장미 전쟁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싸웠다고 주장했다.[21]
"이단자 페리브센" 이론은 세 가지 관찰에 근거를 두었다.
- "페리브센"이라는 이름이 후대 왕 목록에서 제외되었거나 (혹은 람세스 시대의 이름 "세네지"로 대체되었을 수도 있음)
- 고대에 왕의 무덤이 파괴되고 약탈됨
- 세트 동물을 한때 전시했던 페리브센의 묘비가 세트 이미지를 지우려는 의도로 심하게 긁힘
이집트학자들은 이것이 세트교 사제 계급의 종교적 반대자들의 행동이라고 추정했다.[19][21]
라우어와 퍼스는 "이단자 페리브센" 이론에 근거하여 조세르의 피라미드 아래에서 발견된, 제1왕조와 제2왕조 왕들의 이름이 새겨진 엄청난 양의 석조 용기들이 카세켐위와 조세르의 봉인이 새겨진 자루에 담겨 있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들은 페리브센이 호루스 추종자였던 자신의 전임자들의 무덤을 약탈하고 그들의 장례용품을 흩뿌렸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용기들은 이집트를 재통일한 후 카세켐위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 보물창고에 수집되었고, 마침내 조세르에 의해 경건한 헌신의 행위로 계단 피라미드 아래에 놓였다.[22]
이단자 이론에 대한 반박오늘날, 이 이론은 Lauer와 Firth의 결론과 함께 널리 의문을 받고 있다. 페리브센의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전적으로 상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그의 이름은 당시 생존해 있는 하 이집트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페리브센이 이집트 전체를 통치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국교를 변경할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단자 페리브센" 이론에 반박하는 또 다른 증거는 사카라에 있는 사제 셰리의 가짜 문이다. 셰리는 초기 이집트 제4왕조 때 관직을 수행했다. 가짜 문에 새겨진 비문은 페리브센의 이름을 제2왕조의 또 다른 왕인 세네지의 이름과 한 문장에서 연결하고 있다. 부록에 따르면, 셰리는 ''"세네지 왕의 묘지에 있는 페리브센 왕의 모든 와브-사제들과 그의 장례 사원 및 모든 다른 장소의 감독관"''이었다. 이는 페리브센의 장례 의례가 적어도 제4왕조까지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며, 페리브센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가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Herman te Velde와 같은 이집트학자들은 셰리가 페리브센의 장례 의례에 참여한 유일한 제4왕조 사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셰리의 형제 또는 사촌일 가능성이 있는 잉케프 역시 "페리브센의 카-사제 감독관"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16]
아비도스에 있는 페리브센의 무덤에서 발견된 인장들은 아슈, 민, 바스테트 등 여러 신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이 페리브센의 통치 기간 동안 숭배받았음을 시사한다. 이 발견은 페리브센이 단일 신을 숭배하거나 일신교를 장려했다는 주장에 반박한다.[23][24][25] 뉴베리, 체르니, 그르드셀로프 등이 제시한 이단자 이론은 그들의 생애 동안 이용할 수 있었던 매우 제한적인 고고학적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발견된 점토 인장의 대부분은 그 당시에도 해독되지 않았고 번역되지 않았다.[40]

이름의 종교적 의미생트 파르 가르노(Sainte Fare Garnot)와 테 벨데(Te Velde)는 "페리브센"이라는 이름이 신과 연관되기 전에도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여긴다. "페리브센"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그들의 뜻에 의해 나타나는 자" 또는 "그의 마음과 의지가 그들을 위해 나타난다"를 의미한다. 이집트 음절 ''sn''은 "그들, 그들의, 저들"을 의미하며, 명확한 복수형 표기를 나타낸다. 테 벨데와 가르노는 페리브센이 세레크 수호신으로 문장학적인 세트 동물을 사용했지만, 그의 이름을 호루스와도 연결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페리브센이 생전에 호루스와 세트를 동등하게 숭배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16][26]
종교적인 모호성을 가진 과시적인 복수 의미는 초기 이집트 왕조의 파라오 이름에서 흔했다. 페리브센은 그의 전임자들처럼 호루스와 세트 모두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동등하게 인식되었을 수 있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이름은 실제로 신성한 전통의 단절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으며, 그는 세트의 힘을 호루스에게 더했다. 더 나아가, 초기 왕조 여왕들의 칭호는 "호루스와 세트를 볼 수 있는 자" 및 "호루스와 세트를 지니는 자"와 같이 복수 수호신을 사용했다.[16][26] 마찬가지로, 제2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카세켐위 왕의 특이한 세레크는 세레크 꼭대기에 호루스와 세트 신을 함께 보여준다. 호루스는 상 이집트의 흰색 왕관을 쓰고, 세트는 하 이집트의 붉은 왕관을 쓰고 있다. 두 신은 키스하는 모습으로 서로 마주 보고 묘사된다. 이 특별한 이름은 호루스와 세트의 대표자로서 이집트 전체에 대한 권력을 가진 왕의 이중 화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카세켐위의 이름은 페리브센의 세레크 이름의 진보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16][26]
세트 동물 파괴에 대한 반박이집트학자 루드비히 다비드 모렌츠와 볼프강 헬크[27]는 세트 동물의 의도적인 파괴는 이집트 신왕국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페리브센의 무덤 석상에서 세트 키메라의 삭제는 "이단자" 이론에 따라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것으로 여겨졌지만, 새로운 발견은 이 명예 훼손이 수세기 후에 발생했음을 시사했다.[28] 역사가 디트리히 빌둥은 아비도스의 묘지가 고대 시대에 약탈당한 유일한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카라와 기자의 무덤 역시 약탈당했다. 따라서 그는 특정 파라오에 대한 의도적인 행동은 배제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29]
세켐입과의 동일인물설

이집트 학자 월터 브라이언 에머리, 캐서린 A. 바드, 플린더스 페트리는 페리브센이 제2왕조의 또 다른 통치자인 세켐입-페렌마아트로도 알려졌다고 믿고 있으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매의 신 호루스와 연결했다. 증거로 페리브센의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세켐입의 점토 봉인이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세켐입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34][35][36][37]
이 이론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헤르만 알렉산더 슐뢰글(Hermann Alexander Schlögl), 볼프강 헬크, 페터 카플로니[38]와 요힘 칼[39]은 점토 봉인이 페리브센의 무덤 입구에서만 발견되었으며, 그중 어느 것도 페리브센과 세켐입의 이름을 함께 새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파라오가 전임자를 매장하고 무덤을 봉인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세켐입의 봉인이 있다는 것은 왕조 상속의 계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유사한 추론은 카아 왕의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호테프세켐위 왕의 상아 조각과 하세켐위의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조세르의 점토 봉인에서도 도출할 수 있다. 슐뢰글, 헬크, 카플로니, 칼은 세켐입의 봉인이 발견된 것은 세켐입이 페리브센의 바로 뒤를 이어 그를 매장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고 확신한다.[40][41]
페리브센과 세켐입의 친족 관계 가능성학자 토비 윌킨슨과 헬크는 페리브센과 세켐입이 친족 관계였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이론은 석조 용기 명문과 봉인 인상에서 타이포그래피와 문법에서 강한 유사성을 보여준다는 것에 근거한다. 페리브센의 용기에는 "ini-세트제트"("세트로에 백성의 조공")라는 표기가 있으며, 세켐입의 명문에는 "ini-khasut" ("사막 유목민의 조공")이라는 표기가 있다. 페리브센과 세켐입이 친족 관계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그들의 세레크 이름이다. 그들은 모두 이름에 "Per"와 "ib" 음절을 사용했다.[42][43]
세네지와의 동일인물설셰리의 허위 문 명문은 페리브센이 왕 목록에서 세트 이름의 언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리 형태로 사용된 왕 세네지 ("세네지"는 "무서운"을 의미함)와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44] 반면에 디트리히 빌둥과 볼프강 헬크는 페리브센을 람세스 왕조의 카르투슈 이름인 ''와제네스''와 동일시한다. 그들은 ''Per-ib-sen''이라는 이름이 ''Wadj-sen''의 부주의한 신관 문자로 잘못 읽혔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45]
내란과 종교적 항쟁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세력 다툼이 일어나 내란 상태가 되었다. 양 세력은 신화 속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자칭하며 종교적으로도 항쟁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이름은 호루스 이름을 포함한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 그의 묘비(그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에는 더 일반적인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으며, 이는 이 왕이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4. 2. 정치적 분열
세트-페리브센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정치적, 경제적 원인으로 인해 분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초기 이론에서는 이집트가 여러 차례의 내전을 겪었다고 주장했지만,[11] 최근 이론들은 평화로운 분열 가능성을 제시한다.[30][31]마이클 라이스, 프란체스코 티라드리티, 볼프강 헬크와 같은 이집트학자들은 사카라와 아비도스에 있는 고위 관료들의 마스타바 무덤들이 잘 보존된 것을 근거로, 왕조 전체에 걸쳐 국가적 장례 의식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주장한다. 이는 내전과 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론과 상반된다.[30][31][32]
페리브센이 새로운 왕좌 수호신으로 티니스 기원의 신인 세트를 선택한 것은, 그가 티니스 출신의 추장이거나 티니스 왕가의 왕자였음을 시사한다.[32][33] 그는 상 이집트만을 통치했고, 다른 통치자들은 하 이집트를 통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40] 그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은 하 이집트의 베이트 칼라프에서 단 하나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아비도스, 나카다, 엘레판티네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페리브센이 상 이집트에서만 통치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며, 그의 영토는 나카다에서 엘레판티네 섬까지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1][52]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는 세력 다툼을 벌였고, 종교적으로도 호루스와 세트를 자칭하며 대립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세켐이부"라는 호루스 이름을 사용했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77] 그의 묘비에는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어, 그가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4. 2. 1. 분열 원인에 대한 가설
이집트 학자들은 세트-페리브센의 통치 시기에 이집트가 분열된 원인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시한다.초기 이론은 이집트가 경제적 또는 정치적 문제로 인해 여러 차례의 내전을 겪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전이 페리브센의 책임이라면, 후대 왕 목록에서 그가 제외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11][19][21]
그러나 최근 이론들은 이집트 왕국이 평화롭게 분열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마이클 라이스,[30] 프란체스코 티라드리티,[31] 볼프강 헬크와 같은 이집트학자들은 사카라와 아비도스에 있는 고위 관료들의 잘 보존된 마스타바 무덤에 주목한다. 이 무덤들은 네브레의 통치부터 하세켐위까지 이어지며, 왕조 전체에 걸쳐 장례 의식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내전과 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론과 상반된다. 따라서 라이스, 티라드리티, 헬크는 네브레가 개인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왕국을 분열시켰고, 이 분열이 제2왕조 왕들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생각한다.[30][31][32]
분열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페리브센 통치 초기 또는 그 직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페리브센이 세트 신을 새로운 왕좌 수호신으로 선택한 것은 그가 티니스 출신의 추장이거나 왕자였음을 시사한다. 세트는 티니스 기원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변경은 단순한 정치적, 종교적 선전이었을 수 있다.[32][33] 페리브센은 상 이집트만을 통치하고, 다른 통치자들은 멤피스 왕좌를 차지하여 하 이집트를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40]
볼프강 헬크, 니콜라스 그리말, 헤르만 알렉산더 슐뢰글,[46] 프란체스코 티라드리티는 제2왕조의 세 번째 통치자인 넨네르 왕이 지나치게 복잡한 국가 행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믿는다. 넨네르는 국가 행정을 개선하기 위해 이집트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두 명의 후계자에게 맡겼을 가능성이 있다. 고고학적 증거는 페리브센이 상 이집트에서만 통치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은 대부분 아비도스, 나카다, 엘레판티네에서 발견되었으며, 하 이집트에서는 단 하나만 발견되었다. 역사가들은 페리브센의 영토가 나카다에서 엘레판티네 섬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31][52]
드미트리 B. 프로우사코프는 팔레르모 석의 기록을 통해 넨네르의 지배력이 약화되었음을 주장한다. 팔레르모 석의 기록은 12번째 해부터 "상·하 이집트의 왕이 나타나다"가 "하 이집트의 왕이 나타나다"로 수정되었다.[47] 이는 제1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카아의 상황과 유사하다. 카아가 죽자 여러 주장자들이 나타나 왕위를 놓고 다투었고, 이는 호텝세케무이의 즉위로 종식되었다.[48][49]
바바라 벨은 기근이나 오랜 가뭄과 같은 경제적 재앙이 이집트를 분열시켰다고 주장한다. 넨네르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토를 나누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재통합을 의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벨은 나일강의 연간 홍수 기록이 지속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였다고 주장한다.[50] 그러나 슈테판 자이들마이어는 벨의 계산이 부정확하며, 나일강의 홍수는 멤피스 주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국가 전체에 걸친 가뭄은 발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51]
헬크, 티라드리티, 슐뢰글, 에머리, 그리말과 같은 이집트 역사가들은 페리브센이 공동 통치자였다고 확신한다. 하 이집트의 통치자들에 대한 조사는 진행 중이다. 람세스 시대의 왕 목록은 왕 세네지 이후 왕의 이름 순서가 다르다. 사카라 왕실 표와 토리노 왕실 정전은 멤피스 통치자만 언급하고, 아비도스 왕 목록은 티니트 통치자만 언급한다. 이집트 학자들은 이러한 불일치가 제2왕조 시대에 이집트가 분열된 결과라고 본다.[40][31][52][62]

조세르의 묘지에서 발견된 석조 용기 비문에는 누브네페르, 웨네그-네브티, 호루스 바, 호루스 "버드"와 자라는 왕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통치 기간이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네페르카 왕은 카아 왕과 동일하거나 그의 단명한 후계자일 수 있다. 웨네그-네브티 왕은 람세스 시대의 카르투슈 이름 와제네스와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누브네페르", "버드", "자"와 같은 왕들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슐뢰글, 헬크, 페터 카플로니는 이들이 페리브센과 동시대 인물이며 하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가정한다.[40][31][52][62][54]
헤르만 테벨데,[16] I. E. S. 에드워즈,[55] 토비 윌킨슨[12]과 같은 학자들은 "제5왕조 연대기"의 비문이 왕국의 분할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석판에는 제1왕조부터 제7왕조까지의 왕들이 호루스 이름, 황금 이름, 카르투슈 이름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왕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끝맺는다. 또한 왕의 즉위일로부터 사망일까지의 연대기를 보여준다. 연대기의 가장 유명한 파편은 "팔레르모 석비"와 "카이로 석비"라고 불린다. 카이로 석비 IV행에는 닌예르 왕의 마지막 9년이 보존되어 있다.[12] 닌예르의 사망 날짜 다음에는 새로운 왕이 등장하는데, 그 왕의 세레크에는 호루스-매가 아닌 네 발 달린 동물이 장식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네 발 달린 문장학적 세레크 동물은 세트 신의 키마이라였으므로, 지목된 통치자는 페리브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테벨데, 바르타, 에드워즈와 같은 이집트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페리브센이 세트 이름을 가진 유일한 왕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닌예르 시대의 연도 기록은 세트에 대한 언급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호루스 이름을 왕의 유일한 이름으로 사용하는 전통이 이미 발전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세트와 연합한 왕의 등장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테벨데, 바르타, 에드워즈는 페리브센 외에도 "와제네스", "누브네페르" 또는 "세네드" 통치자들 중 한 명이 세트 왕이었을 수 있으며, 그들 중 한 명이 닌예르의 진정한 직계 후계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페리브센 통치 시대의 고고학적 유물이 비교적 많이 발견된 것은 연대기에 제시된 통치 기간이 10년에서 12년으로 추정되는 것과 모순된다.[12]
연대기 석비는 이집트 왕국의 분할에 대한 어떠한 징후도 제공하지 않는다. 바르타, 테벨데, 윌킨슨 및 에드워즈는 국가 분할 이론이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행정적 재편 또는 사제 분파의 분열이 더 가능성이 높다.[12]
세트-페리브센의 즉위 당시 이름은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77] 그의 묘비에는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으며, 이는 이 왕이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4. 2. 2. 상, 하 이집트 통치자
세트-페리브센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경제적 또는 정치적 원인으로 인해 여러 차례의 내전을 겪었다는 초기 이론이 있었다.[11] 그러나 최근의 이론들은 이집트 왕국이 분열되었다면 평화롭게 분열되었을 것이라고 본다.[30][31] 마이클 라이스, 프란체스코 티라드리티, 볼프강 헬크와 같은 이집트학자들은 사카라와 아비도스에 있는 고위 관료들의 잘 보존된 마스타바 무덤들이 왕조 전체 동안 국가적 장례 의식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는 페리브센의 치세 동안 내전과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는 이론과 상반된다.[30][31][32]정치적 분열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페리브센이 새로운 왕좌 수호신으로 세트 신을 선택한 것은 그가 티니스 출신의 추장이거나 티니스 왕가의 왕자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세트가 티니스 기원의 신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32][33] 페리브센은 티니스 왕위를 얻어 상 이집트만을 통치했고, 다른 통치자들은 멤피스 왕좌를 차지하여 하 이집트를 통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40]
고고학적 증거는 페리브센이 상 이집트에서만 통치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은 하 이집트의 베이트 칼라프에서 단 하나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아비도스, 나카다, 엘레판티네에서 발견되었다. 역사가들은 페리브센의 영토가 나카다에서 엘레판티네 섬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31][52]
일부 학자들은 넨네르 왕이 지나치게 복잡한 국가 행정으로 인해 이집트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통치하도록 결정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기근이나 오랜 가뭄과 같은 경제적 재앙이 이집트를 분열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나일강의 연간 홍수가 통상적인 수준이었다는 증거로 인해 반박되기도 한다.[50][51]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의 통치자
헬크, 티라드리티, 슐뢰글, 에머리, 그리말과 같은 이집트 역사가들은 페리브센이 공동 통치자였다고 확신한다. 하 이집트의 통치자들에 대한 조사는 진행 중이다. 람세스 시대의 왕 목록은 왕 세네지 이후 왕의 이름 순서가 다르다. 사카라 왕실 표와 토리노 왕실 정전은 멤피스 전통을, 아비도스 왕 목록은 티니트 전통을 반영하여 서로 다른 왕들을 언급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제2왕조 시대에 이집트가 분열된 결과로 해석된다.[40][31][52][62]
조세르의 묘지에서 발견된 석조 용기 비문에는 누브네페르, 웨네그-네브티, 호루스 바, 호루스 "버드"와 자라는 왕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누브네페르", "버드", "자"와 같은 왕들은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슐뢰글, 헬크, 페터 카플로니는 이들이 페리브센과 동시대 인물이며 하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가정한다.[40][31][52][62][54]
그러나 "제5왕조 연대기"의 비문은 이집트 왕국의 분할에 대한 어떠한 징후도 제공하지 않는다. 바르타, 테벨데, 윌킨슨 및 에드워즈는 국가 분할 이론이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행정적 재편 또는 사제 분파의 분열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12]
페리브센의 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는 세력 다툼을 벌였고, 종교적으로도 호루스와 세트를 자칭하며 대립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세켐이부"라는 호루스 이름을 사용했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77] 그의 묘비에는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어, 그가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4. 3. 페리브센과 세켐입의 관계
페리브센의 왕명은 이집트학자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이름에 사용되었던 호루스 대신 신 세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왕의 호루스 이름은 세레크 안에 기록되었는데, 세레크는 호루스 신을 나타내는 매 아래에 왕궁 정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이집트 상형 문자 참조). 대신 페리브센은 세트를 나타내는 세트 동물을 자신의 세레크에 새겼다. 페리브센은 세트 동물이 단독으로 세레크를 장식한 유일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세트와 자신을 연관시킨 유일한 왕은 아니다. 예시로는 제13왕조의 파라오 세트 메리브레,[13] 제19왕조의 통치자 세티 1세와 세티 2세, 그리고 제20왕조의 왕 세트나크테 등이 있다.[14][15]페리브센이 이러한 이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이론은 페리브센 시대에 이집트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거나, 그가 세트를 유일한 숭배 신으로 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시작하려 했던 이단이었다는 생각을 선호했다.[11] 그러나 새로운 증거와 평가에 따르면 이집트 왕국은 통일되었지만, 제2왕조 동안 광대하고 심오한 개혁을 목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이 시대의 무덤에서 나온 봉인 인상은 고위 관료들이 보유한 칭호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의 권력 감소를 시사한다. 추가적인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 아래에서 여러 신이 숭배되었음을 보여주며, 일신교 이론을 반박한다. 다른 동시대 비문들은 이집트어 문법이 그의 시대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완전한 문장이 포함된 가장 초기의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통치는 사실 문화적, 종교적 발전의 시기였다.[16][17]
그의 치세 동안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세력 다툼이 일어나 내란 상태가 되었다. 양 세력은 신화 속 대립하는 신인 호루스와 세트를 자칭하며 종교적으로도 항쟁했다. 세트-페리브센은 즉위 당시 이름은 호루스 이름을 포함한 "세켐이부"였지만, 세트파의 세력 확장에 맞춰 호루스 이름을 뺐다. 그의 묘비(그 중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에는 더 일반적인 호루스가 아닌 세트가 그려져 있으며, 이는 이 왕이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5. 업적
페리브센은 "재무부의 백색 궁전"과 옴보스 근처의 "누브트의 보호"(Nbtwegy는 나카다의 고대 이집트 이름)라는 새로운 왕실 거처를 설립하고, "왕의 봉인자"를 "상 이집트 왕의 봉인자"로 바꾸는 등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56][57] 또한 ''페르-누브트''("옴보스의 집")와 ''페르-메드제드''("회의의 집")와 같은 왕실 건물을 설립하고, ''아프누트''("머리 장식 제작자 도시"), ''네브지''("보호자의 도시"), ''아베트-데세레트''("붉은 화강암 항아리의 도시") 및 ''후지-세트제트''("아시아인의 도시") 등 여러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건설했다.[59][60] 나일강 삼각주에는 세트 신을 위한 숭배 중심지를 설립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가 이집트 전체에서 왕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한다.[61]
페리브센 시대의 행정 시스템은 재무부(왕실), 연금 사무소, 재산, 포도원, 개인 포도원(시민 재산) 순의 명확한 계층 구조를 가졌다.[57]
아비도스의 페리브센 무덤에서 발견된 점토 봉인에는 "황금의 자/옴보스의 그는/두 왕국을 통일하여/그의 아들,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의 왕 페리브센에게 넘겨주었다"라는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63] "황금의 자"는 "옴보스의 그는"으로도 읽히며, 세트 신에 대한 종교적 경칭으로 여겨진다.[64][65][66]
5. 1. 행정 개혁
페리브센은 재위 기간 동안 "재무부의 백색 궁전"이라 불리는 행정 중심지와 옴보스 근처에 위치한 "누브트의 보호"(Nbtwegy는 나카다의 고대 이집트 이름)라 불리는 새로운 왕실 거처를 설립했다.[56] 서기, 봉인자, 감독관과 같은 행정 직함은 분할된 관료 국가 행정에 맞춰 조정되었다. 예를 들어, "왕의 봉인자"와 같은 직함은 "상 이집트 왕의 봉인자"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관료 개혁은 페리브센이 관료들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으며, 이는 니네체르 아래에서 비대하고 다루기 힘든 국가 행정에 대한 추가 증거가 된다.[57]페리브센과 세케미브 아래의 행정 시스템은 명확하고 잘 정의된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최고 계급부터 최하위 계급까지는 다음과 같았다.
순위 | 기관 | 설명 |
---|---|---|
최상위 | 재무부 | 왕실이며 최고 계급 |
연금 사무소 | ||
재산 | ||
포도원 | ||
최하위 | 개인 포도원 | 시민의 재산 |
카세켐위 왕은 이집트의 국가 행정을 재통합하여 고대 이집트 전체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두 재무부를 "왕의 집"의 통제하에 두어 새로운 단일 행정 중심으로 가져왔다.[57][58][59]
페리브센은 또한 ''페르-누브트''("옴보스의 집")와 ''페르-메드제드''("회의의 집")와 같은 왕실 건물을 설립하고 여러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건설했다. ''아프누트''("머리 장식 제작자 도시"), ''네브지''("보호자의 도시"), ''아베트-데세레트''("붉은 화강암 항아리의 도시") 및 ''후지-세트제트''("아시아인의 도시")는 페리브센의 세레크와 함께 수많은 점토 봉인에 언급되어 있으며, 종종 "왕의 방문..."이라는 문구가 앞에 붙는다.[59][60] 석재 용기에 새겨진 비문은 또한 "이니-세트제트"("세트로에 사람들의 조공")를 언급하는데, 이는 페리브센이 나일강 삼각주에 세트 신을 위한 숭배 중심지를 설립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이는 페리브센이 이집트 전체를 통치했거나, 적어도 이집트 전체에서 왕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할 수 있다.[61]
페리브센 재위 기간의 한 관료인 네페르-세테크("세트는 아름답다"), "왕의 왑-사제"는 이집트 학자들에게 그의 석비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왕실 신으로서 세트의 출현과 인기를 강조할 수 있다.[62]
아비도스의 페리브센 무덤에서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문장이 기록된 점토 봉인이 발견되었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63]
>''"황금의 자/옴보스의 그는/두 왕국을 통일하여/그의 아들,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의 왕 페리브센에게 넘겨주었다"''.
"황금의 자"라는 칭호는 "옴보스의 그는"으로도 읽히며, 이집트 학자들은 세트 신에 대한 종교적 경칭으로 간주한다.[64][65][66]
5. 2. 경제 발전
페리브센은 재위 기간 동안 "재무부의 백색 궁전"이라 불리는 행정 중심지와 옴보스 근처에 "누브트의 보호"라고 불리는 새로운 왕실 거처를 설립했다. ("누브트"는 나카다의 고대 이집트 이름이다).[56] 서기, 봉인자, 감독관과 같은 행정 직함은 분할된 관료 국가 행정에 맞춰 조정되었다. 예를 들어, "왕의 봉인자"와 같은 직함은 "상 이집트 왕의 봉인자"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관료 개혁은 닌테르 아래에서 비대해진 국가 행정에 대한 페리브센의 권력 제한 시도였을 수 있다.[57]페리브센과 세케미브 아래의 행정 시스템은 명확하고 잘 정의된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최고 계급부터 최하위 계급까지는 다음과 같았다.
순위 | 기관 |
---|---|
최상위 | 재무부 (왕실) |
연금 사무소 | |
재산 | |
포도원 | |
최하위 | 개인 포도원 (시민의 재산) |
제2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카세켐위 왕은 이집트의 국가 행정을 재통합하여 고대 이집트 전체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두 재무부를 "왕의 집"의 통제하에 두어 새로운 단일 행정 중심으로 가져왔다.[57][58][59]
페리브센은 ''페르-누브트''("옴보스의 집")와 ''페르-메드제드''("회의의 집")와 같은 왕실 건물을 설립하고 여러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건설했다. 수많은 점토 봉인에는 ''아프누트''("머리 장식 제작자 도시"), ''네브지''("보호자의 도시"), ''아베트-데세레트''("붉은 화강암 항아리의 도시"), ''후지-세트제트''("아시아인의 도시")와 같은 도시 이름이 페리브센의 세레크와 함께 언급되어 있으며, 종종 "왕의 방문..."이라는 문구가 앞에 붙는다.[59][60] 석재 용기에 새겨진 비문은 "이니-세트제트"("세트로에 사람들의 조공")를 언급하는데, 이는 페리브센이 나일 삼각주에 세트 신을 위한 숭배 중심지를 설립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이는 페리브센이 이집트 전체를 통치했거나, 적어도 이집트 전체에서 왕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할 수 있다.[61]
페리브센 재위 기간의 한 관료인 네페르-세테크("세트는 아름답다"), "왕의 왑-사제"는 그의 석비로 이집트 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왕실 신으로서 세트의 출현과 인기를 강조할 수 있다.[62]
아비도스의 페리브센 무덤에서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문장이 기록된 점토 봉인이 발견되었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63]
>''"황금의 자/옴보스의 그는/두 왕국을 통일하여/그의 아들, 하 이집트와 상 이집트의 왕 페리브센에게 넘겨주었다"''.
"황금의 자"라는 칭호는 "옴보스의 그는"으로도 읽히며, 이집트 학자들은 세트 신에 대한 종교적 경칭으로 간주한다.[64][65][66]
5. 3. 종교 정책
페리브센의 왕명은 이집트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 대상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이름에 사용되었던 호루스 대신 신 세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왕의 호루스 이름은 세레크 안에 기록되었는데, 세레크는 호루스 신을 상징하는 매 아래에 왕궁 정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이집트 상형 문자 참조). 그러나 페리브센은 자신의 세레크에 세트를 상징하는 세트 동물을 새겨 넣었다. 페리브센은 세트 동물만이 세레크를 장식한 유일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지만, 세트와 자신을 연결시킨 유일한 왕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제13왕조의 파라오 세트 메리브레,[13] 제19왕조의 통치자 세티 1세와 세티 2세, 그리고 제20왕조의 왕 세트나크테 등이 있다.[14][15]페리브센이 이러한 이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초기 이론은 페리브센 시대에 이집트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거나, 그가 세트를 유일신으로 하는 새로운 일신교를 시작하려 했던 이단이었다는 주장이었다.[11] 그러나 새로운 증거와 평가에 따르면 이집트 왕국은 통일되었지만, 제2왕조 동안 광범위하고 심오한 개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대의 무덤에서 나온 봉인 인장은 고위 관료들이 보유한 칭호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의 권력이 감소했음을 시사한다. 추가적인 봉인 인장은 페리브센 아래에서 여러 신이 숭배되었음을 보여주며, 일신교 이론을 반박한다. 다른 동시대 비문들은 이집트어 문법이 그의 시대에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완전한 문장이 포함된 가장 초기의 봉인 인상은 페리브센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통치는 사실 문화적, 종교적 발전의 시기였다.[16][17]
오늘날, 이 이론은 Lauer와 Firth의 결론과 함께 널리 의문을 받고 있다. 페리브센의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전적으로 상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그의 이름은 당시 하 이집트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페리브센이 이집트 전체를 통치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국교를 변경할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단자 페리브센" 이론에 반박하는 또 다른 증거는 사카라에 있는 사제 셰리의 가짜 문이다. 셰리는 초기 이집트 제4왕조 때 관직을 수행했다. 가짜 문에 새겨진 비문은 페리브센의 이름을 제2왕조의 또 다른 왕인 세네지의 이름과 한 문장에서 연결하고 있다. 부록에 따르면, 셰리는 ''"세네지 왕의 묘지에 있는 페리브센 왕의 모든 와브-사제들과 그의 장례 사원 및 모든 다른 장소의 감독관"''이었다. 이는 페리브센의 장례 의례가 적어도 제4왕조까지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며, 페리브센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가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셰리가 페리브센의 장례 의례에 참여한 유일한 제4왕조 사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셰리의 형제 또는 사촌일 가능성이 있는 잉케프 역시 "페리브센의 카-사제 감독관"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16]
아비도스에 있는 페리브센의 무덤에서 발견된 인장들은 아슈, 민, 바스테트 등 여러 신을 보여주며, 이는 그들이 페리브센의 통치 기간 동안 숭배받았음을 시사한다. 이 발견은 페리브센이 단일 신을 숭배하거나 일신교를 장려했다는 주장에 반박한다.[23][24][25] 뉴베리, 체르니, 그르드셀로프 등이 제시한 이단자 이론은 그들의 생애 동안 이용할 수 있었던 매우 제한적인 고고학적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발견된 점토 인장의 대부분은 그 당시에도 해독되지 않았고 번역되지 않았다.[40]
생트 파르 가르노(1956)와 테 벨데(1956)는 "페리브센"이라는 이름이 신과 연관되기 전에도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여긴다. "페리브센"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그들의 뜻에 의해 나타나는 자" 또는 "그의 마음과 의지가 그들을 위해 나타난다"를 의미한다. 이집트 음절 ''sn''은 "그들, 그들의, 저들"을 의미하며, 명확한 복수형 표기를 나타낸다. 테 벨데와 가르노는 페리브센이 세레크 수호신으로 문장학적인 세트 동물을 사용했지만, 그의 이름을 호루스와도 연결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페리브센이 생전에 호루스와 세트를 동등하게 숭배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16][26]
종교적인 모호성을 가진 과시적인 복수 의미는 초기 이집트 왕조의 파라오 이름에서 흔했다. 페리브센은 그의 전임자들처럼 호루스와 세트 모두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동등하게 인식되었을 수 있다. 따라서 페리브센의 이름은 실제로 신성한 전통의 단절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으며, 그는 세트의 힘을 호루스에게 더했다. 더 나아가, 초기 왕조 여왕들의 칭호는 "호루스와 세트를 볼 수 있는 자" 및 "호루스와 세트를 지니는 자"와 같이 복수 수호신을 사용했다.[16][26] 마찬가지로, 제2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카세켐위 왕의 특이한 세레크는 세레크 꼭대기에 호루스와 세트 신을 함께 보여준다. 호루스는 상 이집트의 흰색 왕관을 쓰고, 세트는 하 이집트의 붉은 왕관을 쓰고 있다. 두 신은 키스하는 모습으로 서로 마주 보고 묘사된다. 이 특별한 이름은 호루스와 세트의 대표자로서 이집트 전체에 대한 권력을 가진 왕의 이중 화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카세켐위의 이름은 페리브센의 세레크 이름의 진보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16][26]
이집트학자 루드비히 다비드 모렌츠와 볼프강 헬크[27]는 세트 동물의 의도적인 파괴는 이집트 신왕국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페리브센의 무덤 석상에서 세트 키메라의 삭제는 "이단자" 이론에 따라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것으로 여겨졌지만, 새로운 발견은 이 명예 훼손이 수세기 후에 발생했음을 시사했다.[28] 역사가 디트리히 빌둥은 아비도스의 묘지가 고대 시대에 약탈당한 유일한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카라와 기자의 무덤 역시 약탈당했다. 따라서 그는 특정 파라오에 대한 의도적인 행동은 배제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29]
페리브센 치세 동안, 그가 세트 신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들이 백성들에 의해 숭배되었다. 다수의 점토 인장과 항아리 비문에서 아쉬, 호루스, 네크베트, 민, 바스테트, 케르티 신들을 언급하고 있다. 신들의 묘사 뒤에는 그들의 주요 숭배 중심지가 있던 장소나 마을의 이름이 이어진다. 카이로 석에는 아쉬의 조각상과 세트의 부적을 페리브센의 업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점토 인장을 보완한다. 흥미롭게도, 몇몇 인장에서는 왕의 세레크 위에 있는 세트의 키메라 위에 태양 원반이 나타난다. 이는 고대 신 라의 상징이다. 이 시기에는 태양신 라가 이집트 신전의 일부였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지만, 원반의 등장은 진화하는 태양 숭배와 일신론적 변화의 최초 증거일 수 있다. 태양 원반은 국가의 수호신과 관련되어 나타났으며 (예를 들어, 페리브센의 전임자 라네브 치하에서는 태양이 호루스와 연결되었다), 페리브센 치하에서는 세트와 연결되었다. 카세켐위 왕 치세 동안, 태양은 마침내 자체 이름(''라'')을 얻었고, 카세켐위와 그의 추종자 조세르 사이의 왕위 교체 시기에, 여러 사제와 관리들도 자신의 이름을 라와 연결했다.[67][68]
6. 무덤
페리브센은 아비도스 근처 움엘카아브에 있는 왕실 묘지 '''무덤 P'''에 묻혔다. 최초의 발굴은 1898년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아멜리노의 감독하에 시작되었다.[69] 이후 1901년과 1902년에 영국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의 감독하에 발굴이 이어졌고,[4][71][73] 1928년에는 스위스 이집트학자 에두아르 나빌에 의해 추가 조사가 이루어졌다.[70]
6. 1. 구조
페리브센은 아비도스 근처 움엘카아브에 있는 왕실 묘지 '''무덤 P'''에 묻혔다. 1898년 프랑스 고고학자이자 이집트학자인 에밀 아멜리노의 감독하에 무덤에 대한 최초의 발굴이 시작되었다.[69] 이후, 1901년과 1902년에 영국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의 감독하에 발굴이 이어졌다.[4][71][73] 1928년에는 스위스 이집트학자 에두아르 나빌에 의해 추가 조사가 이루어졌다.[70]
무덤의 구조는 간단하며, 같은 지역의 다른 왕실 무덤의 크기에 비해 놀랍도록 작다. 설계 모델은 이집트 제1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인 제르 왕의 무덤으로, 중왕국 시대의 '오시리스의 무덤'으로 여겨졌다. 페리브센의 무덤 건축은 주거 궁전과 유사하다. 무덤의 크기는 16m x 13m이며, 서로 겹쳐진 세 개의 독립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에는 7.3m x 2.9m 크기의 주 묘실이 있으며, 진흙 벽돌, 갈대, 나무로 만들어졌다. 묘실은 북쪽, 동쪽, 서쪽 면에 9개의 작은 저장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남쪽 면에는 긴 앞방이 있다. 통로가 내부 구조와 외부 벽 사이를 통과한다.[4][71][73]
2001년과 2004년에 독일 고고학 연구소 카이로(DAIK)의 감독하에 진행된 발굴에서 무덤이 매우 서둘러 건설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설 작업은 단일 단계로 이루어졌으며, 벽은 거칠게 칠해졌고, 수세기에 걸쳐 여러 번 붕괴되었다. 중왕국 시대 동안, 페리브센의 무덤은 오시리스의 무덤으로 여겨졌던 제르의 무덤과 함께 최소 두 번 복원되었다.[71][72]
6. 2. 발굴
세트-페리브센의 세레크는 점토와 진흙으로 만든 흙 항아리 봉인, 설화석고, 사암, 반암, 검은 편암 용기의 비문에서 발견되었다. 이 봉인과 용기는 세트-페리브센의 묘지와 엘레판티네 발굴 현장에서 출토되었다. 세트-페리브센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 하나가 베이트 할라프의 마스타바 무덤 '''''K1''''' 내부에서 발견되었다.[4][5][6]
화강암으로 만든 두 개의 커다란 묘비가 그의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묘비의 모양은 특이하며 미완성이고 거친 모습이다. 이집트학자들은 이것이 의도적으로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7][8] 출처를 알 수 없는 원통형 봉인에는 카르투슈 안에 세트-페리브센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별칭 "메르지-네체루"(신들이 사랑하는 자)가 주어진다. 이러한 배열로 인해 이집트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 봉인이 세트-페리브센의 통치 후 훨씬 후에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동일한 재료의 봉인에는 카르투슈 없이 세트-페리브센의 이름과 함께 왕의 칭호 "니수트-비티"(상 및 하 이집트의 왕)가 새겨져 있다.[9][10]
페리브센은 아비도스 근처 움엘카아브에 있는 왕실 묘지 '''무덤 P'''에 묻혔다. 무덤에 대한 최초의 발굴은 1898년 프랑스 고고학자이자 이집트학자인 에밀 아멜리노의 감독하에 시작되었다.[69] 1901년과 1902년에는 영국 고고학자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페트리 경의 감독하에 발굴이 이어졌다.[4][71][73] 1928년에는 스위스 이집트학자 에두아르 나빌에 의해 무덤에 대한 추가 조사가 이루어졌다.[70]
무덤의 구조는 간단하며, 같은 지역의 다른 왕실 무덤의 크기에 비해 놀랍도록 작다. 설계 모델은 이집트 제1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인 제르 왕의 무덤으로, 중왕국 시대의 '오시리스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페리브센의 무덤 건축은 주거 궁전과 유사하다. 무덤의 크기는 16m x 13m이며, 서로 겹쳐진 세 개의 독립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에는 7.3m x 2.9m 크기의 주 묘실이 있으며, 진흙 벽돌, 갈대, 나무로 만들어졌다. 묘실은 북쪽, 동쪽, 서쪽 면에 9개의 작은 저장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남쪽 면에는 긴 앞방이 있다. 통로가 내부 구조와 외부 벽 사이를 통과한다.[4][71][73]
2001년과 2004년에 독일 고고학 연구소 카이로(DAIK)의 감독하에 진행된 발굴에서 무덤이 매우 서둘러 건설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설 작업은 단일 단계로 이루어졌으며, 벽은 거칠게 칠해졌고, 수세기에 걸쳐 여러 번 붕괴되었다. 중왕국 시대 동안, 페리브센의 무덤은 오시리스의 무덤으로 여겨졌던 제르의 무덤과 함께 최소 두 번 복원되었다.[71][72]
무덤은 고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약탈되었지만, 수많은 석재 용기와 흙 항아리가 남아 있었다. 일부 석재 용기에는 구리 코팅된 가장자리가 있었으며, 세케메트 무덤에서 발견된 더 잘 알려진 유물과 유사하다. 네브레와 라네브와 같은 선임 통치자들의 용기도 발견되었다. 파이앙스와 홍옥수로 만든 구슬과 팔찌, 구리 도구도 발굴되었다. 특별한 발견으로는 호르 아하 왕의 이름이 새겨진 은 바늘과 세켐입 왕의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 조각이 있다. 제1왕조와 제2왕조의 매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구의 두 개의 석비는 현재 두 개의 다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6. 3. 장례 울타리
페리브센의 무덤 근처에서 진흙 벽돌로 만들어진 왕의 장례용 울타리가 발견되었다. 페리브센의 세레크 이름이 새겨진 점토 도장이 동쪽 입구 근처와 파괴된 제단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발견은 이 건물이 페리브센의 매장지 일부였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 장례용 울타리는 일반적으로 "미들 포트"로 알려져 있다. 1904년 캐나다 고고학자 찰스 트릭 커렐리와 영국 이집트학자 에드워드 러셀 에어턴의 감독하에 처음 발견되었다. 울타리 벽은 카세켐위의 장례용 울타리 "슈넷 엘 제비브(건포도 창고)"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페리브센의 울타리는 108m x 55m 크기였으며, 몇 개의 작은 의례용 건물만 수용했다. 울타리에는 동쪽, 남쪽, 북쪽에 각각 하나씩 세 개의 입구가 있었다. 12.3m x 9.75m 크기의 작은 신전이 장례용 울타리의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한때 세 개의 작은 예배당으로 구성되었다. 부속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1]이집트 제1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중 한 명인 카아 시대에 왕이 죽었을 때 왕의 가족과 측근을 함께 매장하는 전통은 사라졌다.[1]
참조
[1]
서적
Lexikon der Pharaonen
Albatros, Düsseldorf
2002
[2]
간행물
The Early Dynastic Funerary Enclosures of Abydos
2008
[3]
웹사이트
British Museum Website
https://www.britishm[...]
2015-10-18
[4]
서적
The royal tombs of the earliest dynasties/ 1901: Part II.
https://ia600401.us.[...]
Offices of The Egypt Exploration Fund u. a., London
1901
[5]
서적
Early Egypt: The rise of civilisation in the Nile Valley
British Museum Press, London
1993
[6]
논문
Genesis of Branding: Methodological Framework for Studying Ancient Egyptian Cylinder Seals (3000 BC-2150 BC)
https://www.unwe.bg/[...]
2023
[7]
서적
The Royal Tombs of the Earliest Dynasties, Part II
London
1901
[8]
서적
Early Egypt: the rise of civilisation in the Nile Valley
British Museum Press, London
1993
[9]
서적
Kemet: Alle Sorgenti Del Tempo
Electa, Milano
1998
[10]
서적
Die Rollsiegel des Alten Reichs II: Katalog der Rollsiegel
Fondation égyptologique Reine Elisabeth, Brüssel
1981
[11]
간행물
Notes d'épigraphie archaïque
1944
[12]
서적
Royal annals of ancient Egypt - The Palermo stone and its associated fragments.
Routledge, London
2012
[13]
웹사이트
Digital Egypt for Universities, 13th dynasty rulers
http://www.digitaleg[...]
2008-05-03
[14]
서적
Lexikon der Pharaonen
Albatros Verlag, Düsseldorf
2002
[15]
문서
Ägypten - Geschichte und Kultur der Frühzeit
[16]
서적
Seth, God of Confusion. A study of his role in Egyptian mythology and religion (= Probleme der Ägyptologie. Bd. 6). Reprint with come corrections.
Brill, Leiden
1977
[17]
서적
Lexikon der Pharaonen
Albatros, Düsseldorf
2002
[18]
문서
Das Alte Ägypten
[19]
서적
Ancient Egyptian religion
https://archive.org/[...]
Hutchinson’s University Library, London u. a
2016-03-04
[20]
서적
Ägypten
Fourier, Wiesbaden
1964
[21]
간행물
The Seth rebellion of the 2nd Dynasty
1922
[22]
서적
Jean-Phillipe Lauer: Saqqarah, Une vie, Entretiens avec Phillipe Flandrin
Petite Bibliotheque Payot
1988
[23]
서적
Les mastabas de l'Ancien Empire
Paris
1885
[24]
서적
A History of Ancient Egypt
Wiley-Blackwell, Weinheim
1994
[25]
간행물
Zur Nennung von Sened und Peribsen in Saqqara B3
Ägyptologisches Seminar der Universität Göttingen, Göttingen
1991
[26]
간행물
Sur quelques noms royaux des seconde et troisième dynasties ègyptiennes
1956
[27]
서적
Untersuchungen zur Thinitenzeit
Harrassowitz, Wiesbaden
1987
[28]
간행물
Synkretismus oder ideologiegetränktes Wort- und Schriftspiel? Die Verbindung des Gottes Seth mit der Sonnenhieroglyphe bei Per-ib-sen
2007
[29]
서적
Die Rolle ägyptischer Könige im Bewusstsein ihrer Nachwelt. Volume 1: Posthume Quellen über die Könige der ersten vier Dynastien
B. Hessling, Berlin
1969
[30]
서적
Who's Who in Ancient Egypt
Routledge, London/New York
2001
[31]
서적
Kemet: Alle Sorgenti Del Tempo
Electa, Milano
1998
[32]
간행물
Zeitschrift für Ägyptische Sprache und Altertum
Akademie-Verlag, Berlin
1979
[33]
웹사이트
Francesco Raffaele: Names, titles, identities and the 'Sethian Period' theory
http://xoomer.virgil[...]
2017-01-03
[34]
서적
The Emergence of the Egyptian State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35]
서적
Ägypten - Geschichte und Kultur der Frühzeit
Fourier, Munich
1964
[36]
간행물
Mitteilungen des Deutschen Archäologischen Instituts Abteilung Kairo (MDAIK)
1999
[37]
서적
The royal tombs of the first dynasty
[38]
서적
Die Inschriften der ägyptischen Frühzeit
Harrassowitz, Wiesbaden
1963
[39]
서적
Inscriptional Evidence for the Relative Chronology of Dyns. 0–2
Brill, Leiden u. a.
2006
[40]
서적
Das Alte Ägypten. Geschichte und Kultur von der Frühzeit bis zu Kleopatra.
Verlag C. H. Beck, München
2006
[41]
서적
Untersuchungen zur Thintenzeit. (Ägyptologische Abhandlungen, Volume 45)
Otto Harrassowitz, Wiesbaden
1987
[42]
서적
Altägyptische Festdaten.
Verlag der Akademie der Wissenschaften und der Literatur, Mainz/Wiesbaden
1950
[43]
서적
Early Dynastic Egypt.
[44]
서적
Ramesside Inscriptions
[45]
서적
Die Rolle ägyptischer Könige im Bewusstsein ihrer Nachwelt. Band 1: Posthume Quellen über die Könige der ersten vier Dynastien
B. Hessling, Berlin
1969
[46]
서적
Das Alte Ägypten. Geschichte und Kultur von der Frühzeit bis zu Kleopatra
Beck, München
2006
[47]
서적
Early dynastic Egypt: A socio-environmental/anthropological hypothesis of "Unification".
Uchitel Publishing House, Volgograd
2004
[48]
서적
Great tombs of the First Dynasty
Gouvernment Press, London
1958
[49]
간행물
"Er ist ein Liebling der Frauen" – Ein "neuer" König und eine neue Theorie zu den Kronprinzen sowie zu den Staatsgöttinnen (Kronengöttinnen) der 1./2. Dynastie
2006
[50]
간행물
Oldest Records of the Nile Floods
1970
[51]
서적
Historische und moderne Nilstände: Historische und moderne Nilstände: Untersuchungen zu den Pegelablesungen des Nils von der Frühzeit bis in die Gegenwart
Achet, Berlin
2001
[52]
서적
A History of Ancient Egypt
Wiley-Blackwell, Weinheim
1994
[53]
문서
La Pyramide a Degrees IV. Inscriptions Gravees sur les Vases
Cairo
1959
[54]
간행물
A building named "Menti-Ankh"
de Gruyter, Berlin
1965
[55]
서적
Early history of the middle east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70
[56]
서적
Die Siegelabrollungen und Rollsiegel der Stadt Elephantine im 3. Jahrtausend vor Christus. Spurensicherung eines archäologischen Artefaktes
Archaeopress, Oxford
2005
[57]
서적
Schreibgeräte und Schreiber in der 0. Bis 3. Dynastie
Grin, München
2007
[58]
서적
Die Inschriften der ägyptischen Frühzeit
Harrassowitz, Wiesbaden
1963
[59]
서적
Neue Funde aus alten Grabungen – Gefäßverschlüsse aus Grab P in Umm el-Qa'ab im Ägyptischen Museum Kairo.
Seminar für Ägyptologie und Koptologie, Göttingen
2006
[60]
서적
Die Siegelabrollungen und Rollsiegel der Stadt Elephantine im 3. Jahrtausend vor Christus
2005
[61]
서적
Early Dynastic Egypt
Routledge, London/New York
1999
[62]
서적
Early Dynastic Egypt
Routledge, London/New York
1999
[63]
서적
"Ra is my Lord" : searching for the rise of the Sun God at the dawn of Egyptian history
Harrassowitz, Wiesbaden
2007
[64]
서적
Die Verknüpfung von Weltbild und Staatsbild: Die Verknüpfung von Weltbild und Staatsbild Aspekte von Politik und Religion in Ägypten
Mohr Siebeck, Ulmen
2006
[65]
서적
Die Inschriften der ägyptischen Frühzeit: Eine Bestandsaufnahme
Harrassowitz Verlag, Wiesbaden
1963
[66]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67]
서적
»Ra is my Lord«: Searching for the Rise of the Sun God at the Dawn of Egyptian History
Harrassowitz, Wiesbaden
2007
[68]
간행물
Stadt und Tempel von Elephantine – 25. / 26. / 27. Grabungbericht.
1999
[69]
서적
Mission Amélineau. Tome 4: Les nouvelles fouilles d'Abydos 1897–1898. Compte rendu in extenso des fouilles, description des monuments et objets découverts
Leroux, Paris
1905
[70]
서적
The cemeteries of Abydos. Part 1: 1909–1910. The mixed cemetery and Umm El-Ga'ab
Egypt Exploration Fund u. a., London
1914
[71]
간행물
The Early Dynastic Funerary Enclosures of Abydos
Archéo-Nil
2008
[72]
간행물
Umm el-Qaab – Nachuntersuchungen im frühzeitlichen Königsfriedhof (16. / 17. / 18. Vorbericht)
Mitteilungen des Deutschen Archäologischen Instituts, Abteilung Kairo. (MDAIK)
2006
[73]
서적
The development of royal funerary cult at Abydos
Otto Harrassowitz, Wiesbaden
2009
[74]
서적
The Royal Tombs of the Earliest Dynasties
London
1901
[75]
서적
Early Dynastic Egypt
Routledge, London
2001
[76]
웹사이트
Ash/Seth Peribsen
http://xoomer.virgil[...]
[77]
문서
ピーター(199:3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