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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이 케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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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노이 케이코는 1913년 이와테현에서 태어나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활약한 배우이다. 1930년 가극단에 입단하여 조연으로 활동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1943년 영화 "무호마츠의 일생"에 출연하여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 1942년 극단 구라쿠자에 참여했으며, 1945년에는 사쿠라타이 이동극단에 합류하여 히로시마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중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했다. 사후 고향에서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데즈카 오사무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2019년에는 다카라즈카 가극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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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이 케이코
기본 정보
다카라즈카 시절의 소노이
다카라즈카 시절
본명하카마다 도미
다른 이름가사누이 기요노
출생일1913년 8월 6일
출생지이와테현 마쓰오촌(현재의 하치만타이시)
사망일1945년 8월 21일
사망지효고현 고베시
국적일본
신장155cm
활동 기간1930년–1945년
직업배우
활동 분야영화, 연극, 다카라즈카 가극
소속다카라즈카 가극단
주요 작품대영 영화 《무호마쓰의 일생》
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Sono'i Kei'ko
일본어 표기
일본어 이름園井 恵子
일본어 발음そのい けいこ
일본어 본명袴田 トミ
일본어 다른 이름笠縫清乃 (かさぬい きよの)

2. 생애

소노이 케이코는 1913년 8월 6일 이와테현 이와테군 마쓰오촌(현 하치만타이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하카마다 토미였다. 이와테 여자 사범 부속 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하기 위해 모리오카시의 삼촌 집에 머물렀고, 이후 오타루 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소학교 3학년 때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알게 되어 입단을 희망했으며,[68]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 다카라즈카 음악가극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3월, 예과에 편입되었다.

1930년 다카라즈카 가극단 19기생으로 입단하여 꽃조에 편입되었고,[4] 처음에는 가사누이 기요노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말 소노이 케이코로 예명을 바꾸었다.[16][29] 1931년 달조에 배속되었으며,[5] "잭과 콩나무" 초연에서 대역으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후 희극적인 역할을 중심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명품 조연으로 자리매김했다.

1938년부터 다카라즈카 영화에도 출연하여 "군국여학생", "산과 소녀", "설앵초", "남십자성" 등에 출연했다. 1942년에는 후루카와 로파 극단 무대에 객원으로 출연하기도 했다.[34]

1943년 영화 무호마츠의 일생에 요시오카 부인 역으로 출연하여 스타덤에 올랐다.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은 소노이의 연기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마루야마 사다오 등이 결성한 구라쿠자에 참여했으며, 1944년에는 무대판 "무호마쓰의 일생"에서 요시오카 부인 역을 연기했다.[21] 구라쿠자 해산 후, 이동 극단 사쿠라타이를 결성하여 산인 지방을 순회 공연했다.[11][46]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피폭되었다. 히지야마로 대피했다가[80] 하다이정의 지인 집을 거쳐 고베의 나카이 부부 집에서 요양했지만,[80] 방사선 장애 증상으로 8월 21일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0]

2. 1. 어린 시절

소노이 케이코는 1913년 8월 6일 이와테현 이와테군 마쓰오촌(현 하치만타이시)에서 하카마다 세이기치와 가메 부부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하카마다 토미였다. 조부는 마쓰오촌의 초대 촌장을 역임했고, 부모는 과자 제조 및 판매업을 했다.

이와테 여자 사범 부속 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하기 위해 모리오카시의 삼촌 하카마다 다스케의 집에 머물렀다. 삼촌 가족이 오타루시로 이주하면서 오타루 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 "토미"라는 이름은 가부키 연극 "기라레요사"의 대사 "이야사, 오토미"[67]로 놀림을 받아,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는 "히데코"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마사요"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죽기 나흘 전에 쓴 마지막 편지에도 이 이름으로 서명했다.

2. 2. 다카라즈카 음악가극학교

소노이 케이코는 소학교 3학년 때 소녀 잡지를 통해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알게 되어 입단을 희망했다.[68] 오타루의 고등학교 재학 중 처음으로 가극을 관람하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기관지 "가극"(歌劇)을 읽으며 입단 의지를 굳혔다. 1928년 7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자퇴, 부모와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사카로 가서 다카라즈카 음악가극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3월, 정규 입학 시험과 입학식이 끝난 후였지만 특별 시험을 거쳐 예과에 편입되었다.

학생 시절에는 성씨에서 따온 "'''하카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사쿠라 히사코와 매우 친했다. 후지노 다카네는 예과생 시절 소노이를 카미요 니시미, 사쿠라 히사코와 함께 "착실하다"는 평가를 받은 눈에 띄는 존재로 회고했다.

일부에서는 소노이가 쓰키지 소극장의 신게키를 관람한 후 신극 배우를 꿈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다카라즈카 학교 진학을 결정했으며, 예과생 시절 받은 월급 10JPY(혹은 15JPY) 대부분을 가족에게 송금했다.[23]

2. 3. 다카라즈카 가극단 시절

1930년 소노이 케이코는 다카라즈카 가극단 19기생으로 입단하여, 꽃조에 편입되었다.[4] 처음에는 '''가사누이 기요노'''라는 예명으로 4월 '봄의 춤' 공연에서 데뷔했다. 같은 해 말, 예명을 "소노이 케이코"로 바꾸었다.[16][29]

1931년 3월, 다카라즈카 음악가극학교를 졸업하고 달조에 배속되었다.[5] 같은 해 8월, 시라이 데스조가 연출한 "잭과 콩나무" 초연에서 다카치호 미네코가 갑자기 쓰러져, 소노이가 대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30분 만에 대사를 외워 연기하여 호평을 받았다. 10월에는 "라일락 타임"에서 문지기 할머니 역을 훌륭하게 연기하여, 고바야시 이치조는 "올해 가장 큰 수확"이라고 칭찬했다. 이후 희극적인 역할을 중심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명품 조연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시하라 구니코는 소노이가 "아를의 여인"(1934)에서 주인공의 어머니 로즈 역을 맡아 호연했다고 회상했다.[15] 이 작품은 당시 크게 흥행하여, 이후 전국 다카라즈카 극장 개장 시 첫 공연작으로 선정되었다.

1938년부터 다카라즈카 영화에도 출연하여, "군국여학생", "산과 소녀", "설앵초", "남십자성" 등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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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 후루카와 로파 극단 무대에 도호의 다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객원으로 출연했다. 공연 장소는 도쿄 히비야의 유라쿠자였다.[34] 당시 다카라즈카 현역 단원의 첫 외부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다.[8] 기쿠타 가즈오가 소노이의 연기를 마음에 들어 하여 발탁한 것이었다.[41]

소노이는 신극 전향을 희망하고 있었고, 요시오카 주자부로는 "당분간 로파 무대에서 계속 연기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소노이는 "피노치오"를 마지막으로 다카라즈카를 탈퇴했다. 우쓰미 시게노리는 소노이의 주연 발탁에 놀랐다고 회상했지만, 가스가노 야치요가 소노이의 퇴단 의사를 알고 배역을 양보했다고 전해진다.[9]

2. 4. 다카라즈카 시절의 생활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에는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 많았지만, 하카마다 가문은 넉넉하지 못하여 소노이는 다카라즈카 시절 초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고바야시 이치조의 수필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음악가극학교에 들어가기 전 소노이는 "저는 부모 형제를 부양해야 하는데, 가극에 들어가면 얼마를 받을 수 있나요?"라고 학교 사감에게 물었다고 한다.[76] 예과 시절에는 다른 학생들이 부모에게 학비를 받던 것과 달리 극단에서 매월 지급하는 15JPY으로 생활하였다. 본과생이 된 1930년에는 아버지가 연대보증인이었던 신탄회사가 도산하면서 가족이 파산하였고, 일가가 다카라즈카로 이주하여 소노이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소노이는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다카라즈카 대극장에서 일자리를 얻은 여동생과 함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였다. 1935년, 소노이의 사정을 알게 된 고바야시 이치조는 효도와 노력을 칭찬하는 편지와 함께 100JPY을 건네며 소노이를 격려하였다.

2. 5. "무호마츠의 일생" 출연

1943년 소노이 케이코는 반도 쓰마사부로의 상대역인 요시오카 부인 역으로 영화 무호마츠의 일생에 출연하게 되었다. 요시오카 부인 역에는 당초 미즈타니 야에코, 이리에 다카코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두 명의 소속사에서 이를 거절하였으며, 다음 후보였던 사요 후쿠코도 임신으로 인해 출연이 불가하다고 알렸다. 제작진은 "너무 많이 움직이지 않는 역이고, 어쨌든 한 번은 만나고 싶다"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만남이 성사되었으나, 사요는 이미 부른 배를 보여주며 "나보다 딱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소노이를 소개하였다. 이때 소노이는 아스피린 중독으로 인해 습진이 생겨 마스크를 한 상태로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과 만났다. 감독은 소노이를 따로 별실로 데려가 마스크를 벗어달라고 재촉하였지만, 소노이는 "지금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면 거절하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거부하였고, 그렇게 얼굴을 완전히 알지 못한 채 사요의 말만 믿고 캐스팅이 결정되었다.[77]

촬영에 들어가면서 소노이는 첫 대면에서의 미덥지 못한 모습을 지운 채 진지하게 역할 연구에 노력하였다.[77] 마쓰고로 역의 반도도 촬영하지 않을 때도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의 아역 배우였던 사와무라 아키오가 결혼한다면 소노이 같은 여자가 좋다고 말한 일화도 있다. 이나가키는 다음 신작 출연에도 소노이를 타진하고 있었으며, 훗날 당시를 돌아보면서 "연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연기에 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완전히 맡은 역할이 되어버린다고 말할 수 있는 기본을 확고히 갖춘 사람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완성된 "무호마츠의 일생"은 검열로 인해 10분 가량이 편집되었지만, 이나가키가 "이렇게 칭찬 받아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으며, 소노이 또한 영화 배우로서 일약 스타덤에 올라 전국구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당시 영화의 흥행 수익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데뷔작 "스가타 산시로"를 제친 뒤 "이나의 간타로"에 이은 2위의 성적을 냈다. 이나가키는 시사회 후 소노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뭔가 당신에게 적당한 역할이 있을 경우, 또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지긋지긋하더라도 적어도 내 작품에는 나와 주세요."라고 썼다.[78] 소노이 자신은 후에 ""무호마츠" 때는 처음이라 상대 분도 많이 답답하게 생각하셨을텐데 부끄러워 죽겠다"라고 반성하면서도,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과 미야카와 가즈오 촬영으로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2. 6. 영화 출연 무산

無法松の一生|무호마츠노잇쇼일본어 이후 다이에이는 소노이에게 전속 계약을 제안했으나, 소노이는 "당분간 구라쿠자의 사람들과 무대를 수행하고 싶다"라며 거절하였다. 마쓰다 사다쓰구 감독의 "거지 대장"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 여자 주인공 배역 선정에 난항을 겪자, 이나가키 히로시가 "소노이 씨가 좋지 않느냐"라고 추천했고, 가다오카 지에조 등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소노이를 찾았지만 이미 사쿠라타이 순회공연 중이라 배역은 나카무라 요시코에게 돌아갔다.

야마모토 가지로도 "무호마츠의 일생"에서 소노이의 연기에 감탄하여 그녀에게 맞춘 각본을 준비하고 주연으로 섭외하려 했다. 하지만 소노이는 사쿠라타이 소속이라 주소를 아는 사람이 적었고, 두 달 동안 찾지 못했다. 야마모토는 하라 세쓰코에게 배역을 넘기려 했으나, 소노이가 도호 촬영소에 영화 출연 자리를 문의하러 왔다. 직원은 "특별히 없다"라고 했지만, 야마모토가 확인하러 왔을 때는 이미 소노이가 떠난 뒤였다. 소노이는 그날 밤 사쿠라타이 순회공연을 떠났고, 야마모토는 하라 세쓰코를 섭외했다. 하지만 이 영화 "쾌남자"는 촬영 중 종전을 맞아 폐기되었다.[79]

종전 후 야마모토는 "단 5분 차이로, 애석하게 천하의 명배우 두 명을[51] 죽여버렸다"라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한다.

2. 7. 구라쿠자와 사쿠라타이 활동

마루야마 사다오 등이 1942년에 결성한 구라쿠자에 참여하여 "현관 목욕" 등에 출연했다. 1944년에는 무대판 "무호마쓰의 일생"에서 요시오카 부인 역을 연기했다.[21] 구라쿠자 해산 후, 마루야마 사다오의 제안으로 이동 극단 사쿠라타이를 결성했다.[11] 1945년 1월부터 3월까지 "사자"와 "태평양 방파제"로 간토 지방과 히로시마를 순회 공연했다. 간토에서는 공장 위문 공연을, 히로시마에서는 병원을 찾아가 부상병을 위한 위문 공연도 했다.[81]

도쿄 대공습 이후, 일본이동연극연맹의 지시로 사쿠라타이는 히로시마로 피난을 결정했다. 소노이는 히로시마 행을 거절하려 했지만, 미요시 주로 등의 설득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1945년 6월 22일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사자", "산중달력", "일본의 꽃"으로 산인 지방을 순회 공연했다.[46] 마루야마 사다오의 늑막염으로 인해 예정보다 빨리 히로시마로 돌아왔고, 이것이 사쿠라타이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46]

2. 8.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사망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소노이 케이코는 피폭되었다. 폭발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지만, 곧 의식을 되찾고 타카야마 쇼조와 함께 히지야마로 대피했다.[80] 다른 단원인 마루야마 사다오는 혼자 히지야마로 향했지만, 도중에 쓰러져 트럭에 실려 임시 수용소로 옮겨졌다.[80] 나카 미도리도 사무실에서 탈출했지만, 교바시가와에서 구조되어 도쿄의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80] 다른 단원 5명은 백골 상태로 발견되었다.[80] 원폭 중심지는 사무실에서 서쪽으로 약 750미터 지점이었다.[80]

히지야마에서 하룻밤을 보낸 소노이와 타카야마는 하다이정의 지인 집을 거쳐 고베의 나카이 부부 집에서 요양했다.[80] 소노이는 "살았어요"라며 기뻐했지만,[80] 곧 방사선 장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80] 8월 15일 종전 소식을 듣고 "이제 마음껏 연극을 할 수 있어요"라며 기뻐했지만,[80] 8월 21일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0]

마루야마 사다오, 나카 미도리 등 피폭된 사쿠라타이 단원 9명 전원이 한 달 이내에 사망했다.[80] 소노이의 시신은 화장되어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의 온류지에 안치되었다.[80] 1952년 도쿄도 메구로구의 고햐쿠라칸지에 사쿠라타이 원폭수난비가 세워졌고, 1959년 히로시마시 평화대로에도 같은 비석이 세워졌다.[80]

3.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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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이는 고베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이 점령한 티니언섬 기지에서 B-29 폭격기 이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을 때, 나카이의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모두 먹으려고 쟁반을 들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소노이는 복도에서 마당으로 떨어져 정신을 잃었지만 곧 의식을 되찾았다. 건물 더미에 깔린 벽에서 기어나오자 다카야마 쇼조(다카야마 도쿠우에몬의 아들)가 쓰러진 것이 보였다. 타카야마는 발 끝에 경상을 입었으며 소노이는 외상이 없었다. 두 사람은 1km 정도 떨어진 히지야마로 대피하였다. 마루야마 사다오도 혼자 히지야마로 갔지만 도중에 넘어져 트럭에 실리면서 부상자 임시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나카 미도리도 자력으로 사무소에서 탈출하였지만 몸 상태가 악화되어 교바시강에 빠졌고 선박 부대에 구조되어 도쿄로 보내져 동경제국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다른 단원 다섯 명은 이 당시에 실종되었으며 훗날 무너져 전소한 사무소 자리에서 백골 상태로 발견되었다. 폭심지는 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750미터 위치였다.

히지야마에서 하룻밤을 보낸 소노이와 타카야마는 다음날 가이타정의 지인 집으로 가서 8일 낮까지 지낸 후 철도가 복구된 것을 알고 고베로 돌아가 나카이 부부와 재회하였다. 이때 소노이의 모습은 얼굴과 옷이 꾀죄죄하고 발에는 한쪽에는 지카타비, 다른 한쪽에는 남성용 단화를 신은 "거지같은 모습"으로, 시즈는 처음에 소노이인 줄 몰라볼 정도였다고 한다. 훗날에 시즈가 이나가키 히로시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소노이는 "어머니, 살아났어요, 살아났어요."라고 말하며 시즈를 껴안았고 주위에서도 안도하고 서로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다음날부터 유난히 쇠약해진 타카야마의 간병을 시작한 소노이는 자신에게도 방사선 장애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8월 15일에 종전 소식이 알려지자 소노이의 안부를 걱정해 나카이가를 찾아간 우쓰미 아키코(예명이 가코 마치코인 다카라즈카 후배로, 극본가이자 연출가인 우쓰미 시게노리와 결혼)에게 "이제 마음껏 연극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고 한다. 17일에는 어머니 가메에게 근황 보고와 향후의 재기를 맹세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글이 되었다.

그러나 소노이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18일 밤 무렵에 머리카락이 조금씩 빠졌고, 19일에 고열이 발생하였다. 이후에 피하출혈, 하혈과 같은 방사선 장해 증상이 차례차례로 가시화되면서 급격하게 몸이 쇠약해졌다. 19일에 핫타 모토가 소노이의 거처를 알아내 찾아왔다. 소노이는 간씨(마루야마 사다오)의 안부를 알고자 했지만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죽었음을 깨달은 듯했다.

20일이 되어 소노이는 바닥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날 다카야마 쇼조가 사망하였다. 다음날인 21일 우쓰미 아키코가 얼음으로 식힌 거즈를 소노이의 얼굴에 댔을 때 "아, 기분 좋네"라고 중얼거린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이 날 저녁에 우쓰미 시게노리가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보낸 퇴직금을 소노이의 머리맡에 두었다. 소노이는 눈앞의 그것을 보았지만 곧 의식을 잃었고 나카이 부부와 우쓰미 부부, 쇼조의 모습을 보러 온 타카야마 부부, 사쿠라타이 연출가 핫타 모토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16일에는 이쓰쿠시마섬에서 마루야마 사다오가, 24일에는 도쿄에서 나카 미도리가 사망하여, 피폭을 당한 사쿠라타이 아홉 명 전원이 한 달 이내에 목숨을 잃었다.

소노이의 시신은 다음날 화장되었고, 9월 1일에 합동영결식이 열린 뒤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의 온류지에 매장되었다. 1952년에는 도쿄도 메구로구의 고햐쿠라칸지에 사쿠라타이 원폭수난비가 세워졌고, 1959년에는 히로시마시 평화대로에도 같은 비석이 세워졌다. 특히 고햐쿠라칸지에는 단원들의 유골도 조금씩 모셔져 있다.

『다카라즈카 그래프』 1937년 12월호 게재 「다카라즈카 이로하 가루타」. "와키 역 소노이 케이코의 명연기"라고 표기되어 있다.


1930년, 음악학교 본과생이 되어, 극단 제19기생으로 꽃组에 편입되었다. 당시 예명은 "'''카사누이 키요노'''"였다. 같은 해 4월부터 상연된 레뷔 『봄의 노래』로 데뷔 무대를 밟았고, 같은 해 12월부터 예명을 "'''소노이 케이코'''"로 개명했다.

1931년 3월 말에 다카라즈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달组에 배속되었다. 8월, 시라이 테츠조 작 『잭과 콩나무』 첫날 공연에서 어머니 역의 다카치호 미네코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소노이가 급히 대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30분 만에 대사를 외워 연기해내 호평을 받았다. 10월에는 『라이락 타임』에서 문지기 할머니 역을 훌륭하게 연기하여, 다카라즈카 가극 창시자 고바야시 이치조로부터 "올해 최대의 수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후 역할이 좋아지면서, 희극적인 역할을 중심으로 안주인 역, 노파 역 등 못하는 역이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연기를 가진 명배우로서 입지를 굳혀갔다. 친분이 있던 사쿠라 히사코, 샤 케이코, 아시하라 쿠니코는 모두 소노이의 명연으로 꼽히는 주인공의 어머니 "로즈" 역을 연기한 『알들의 여인』(1934년)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대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전국에 다카라즈카 극장이 개장할 때마다 첫 공연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1938년부터 새롭게 설립된 宝塚映画에도 출연했다. 시국 악화로 폐쇄될 때까지 『군국여학생』, 『산과 소녀』, 『설割초』, 『남십자성』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1942년 1월에는, 도호의 다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후루카와 로파 일좌의 무대에 객연했다. 장소는 도쿄 "유라쿠자"였고 이곳은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사(도호의 전신)의 운영 극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다카라즈카 현역 학생 최초의 외부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다.[41] 발탁한 사람은 로파 일좌의 극작도 맡았던 기쿠타 가즈오였고, 소노이가 다카라즈카에서 1940년에 출연했던 『적십자기는 나아간다』(키쿠타 작)에서의 연기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41] 이 무렵, 소노이는 이미 신극으로의 전향을 희망하고 있었고, 요시오카 주우사부로(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사장)로부터 "당신은 츠키지와 같은 연극을 하고 싶다는 것이지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당분간 로파의 무대에서 계속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같은 해 주연을 맡은 『피노키오』(4~5월: 다카라즈카 대극장, 8~9월: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를 마지막으로 소노이는 다카라즈카를 퇴단했다. 같은 작품에서 각본을 맡았던 우쓰미 시게노리는 소노이가 주연으로 발탁된 것에 "놀랐다"고 회상하지만, 이것은 원래 가스가노 야치요에게 주어졌던 역할이었고, 소노이의 퇴단 의사를 알고 있던 가스가노가 극단에 부탁하여 역할을 양보했다고도 전해진다.[43] 우쓰미 시게노리의 아내, 우쓰미 아키코(전 다카라즈카 가극단·카코 마치코)에 따르면 극단은 소노이의 퇴단에 반대했지만, 퇴직금을 포기하고 강행 퇴단했다고 한다.

'''고락좌'''는 소노이가 다카라즈카를 퇴단하기 약 2개월 전인 1942년 7월 8일에, 다카야마 도쿠에몬, 마루야마 사다오, 후지와라 케이타, 도쿠가와 유메고에에 의해 결성되었다. 같은 해 12월 3일부터 초연 공연을 실시했고, 소노이는 여기서 상연된 3편의 연극 중 『현관 목욕탕』(오자키 가즈오 원작)에 출연했다. 이후 고락좌 공연에 계속 참가했다. 1944년에는 마루노우치 봉래좌에서 본 공연과 간사이 지방 순회 공연으로 무대판 『무법자 마츠의 일생』이 상연되었고, 소노이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요시오카 부인 역을 연기했다.

이 순회 공연은 12월에 종료되었지만, 이 무렵 도쿄에 대한 공습이 심해지고 있었기에, 고락좌 간부는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연말 또는 연초에 해산을 결정했다. 그 후, 간부 중 한 명이었던 마루야마 사다오가 지방 위문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극단 설립을 제안했다. 소노이를 포함한 12명이 이에 동의하여 단원 13명, 스태프 4명 총 17명으로 "고락좌 이동대"가 결성되어 일본 이동연극 연맹에 가입했다. 이동대는 『사자』 공연을 위해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의 쓰나 온천에서 연습 합숙을 했는데, 이 기간에 새로운 극단 이름에 대한 제안이 있었고, 잠정적으로 "'''벚꽃 부대'''"가 되었다. 이 이름이 정식 명칭이 된 것은 같은 해 6월에 히로시마에 가서부터이다.

이후 1월 말부터 3월에 걸쳐, 『사자』와 『태평양의 방파제』로 관동 지방, 다음으로 히로시마를 순회 공연했다. 관동 지방에서는 공장 위문이 주였지만, 히로시마에서는 병원에서 부상병 위문도 실시했다. 3월 4일에 도쿄로 돌아왔지만,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 부근의 주요 극장이 전소되었고, 벚꽃 부대원들도 집을 잃었다. 일본 이동연극 연맹은 더 이상 도시를 순회하는 공연 형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소속 각 극단을 전국 각지로 소개시켜 각각 상주하여 공연을 실시하도록 결정했다. 벚꽃 부대의 소개 장소는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로 결정되었다. 대장인 나가타 야스시와 마루야마 사다오가 중국 서쪽 지역에 정통했던 것, 그리고 이전에 히로시마시에서 공연을 실시했을 때 많은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얻은 것이 도시 선정의 요인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군사 도시로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두드러진 공습이 없어 오히려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곳이었고, 이 결정은 벚꽃 부대 내부의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4월에 소노이가 나카이 시즈에 보낸 편지에도 히로시마행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주장하지 못했다는 속사정이 적혀 있다.

벚꽃 부대는 6월 22일에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이에 앞서 대장인 나가타 야스시와 타타라 준이 징병 때문에 극단을 떠났기 때문에, 소속자는 스태프를 포함하여 14명이었다. 이후 벚꽃 부대는 『사자』『산중력일』『일본의 꽃』 세 편으로 히로시마에서 산인 지방을 순회 공연했다.[46] 그 와중에 마루야마가 늑막염에 걸렸기 때문에,[46] 뒤를 吉本興業 계열의 이동 극단 "산호좌"에 맡기고 예정보다 일찍 히로시마로 돌아왔다. 이것이 벚꽃 부대의 마지막 공연 활동이 되었고, 소노이는 고락좌 초연 공연부터 모든 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히로시마로 돌아온 후, 이케다 세이지가 공습을 당한 누마즈에 남긴 가족의 안부 확인을 위해 이탈했다. 다른 3명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느껴 귀경했다. 또한 극단 사무국장 마키무라 코키치도 배우 보충을 위해 일시 귀경하여, 소노이를 포함한 9명이 히로시마시 호리카와초 99번지 사무소에 남았다. 소노이는 8월 2일경부터 효고현 고베시의 나카이 요시오, 시즈 부부의 집에서 요양했다. 극단 소집 전날이었던 5일까지 거기서 지낸 후, 히로시마로 돌아왔다.

3. 1. 연기에 대한 평가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는 희극적인 역할이 많아 "니마이메한(二枚目半)으로는 다카라즈카 제일"[85], "산마이메(三枚目)의 대가"[85]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다카라젠느는 산마이메로 불리는 것을 꺼려 소노이 또한 "제 산마이메는 니마이메(二枚目)에 가깝다"라고 득의양양하게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연출가 히사마쓰 잇세는 그의 연기를 이야기하며 "다카라즈카의 무대에 얼굴을 꾸민 젊은이 수백 명, 예능에 숙달한 자, 가리지 않고 연기할 자는 많지만, 깊은 맛으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연출 속에 저력이 깃든, 그러나 품위를 잃지 않는 연기는 아주 적다. 그 적은 사람들 중 한 명에 꼽히는 것이 소노이 케이코다"라고 평하였다. 기쿠타 가즈오는 문예 아사히의 다카라즈카 50주년 특집에서 소노이 이후로 그의 연기력을 능가하는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다.[85] 당시부터 그의 연기가 "다카라즈카적"인 연극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85] 스즈키 히코지로는 후에 신게키로 전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풍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길로 가야만 그녀의 천분이 완전히 꽃필 것으로 기대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은 그는 다카라즈카 시절 "라일락 타임"에 출연하게 되면서 숙소 뒤에서 밤마다 연습에 열중한 나머지 강물에 빠지게 되어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하였지만, 연습하는 소리로 착각하여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구라쿠자에서도 "신게키의 리얼한 기초적 훈련이 부족함"을 자각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연습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소노이를 "연기에 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나카이 부부의 편지에는 "그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 결점이 나타나는 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만큼 자신의 연기에 큰 자신을 가지면서, 자신의 연기에 겁이 많은 사람은 없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라고 적혀있다.

3. 2. 신체상의 특징

소노이 케이코의 키는 155cm였다.[85] 당시 남자 역으로는 다소 작고, 여자 역으로는 다소 큰 편이었다. 소노이 자신도 "결국은 삼류 배우이거나 노역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자평했다.[46]

또한 "치카메"라고 부를 정도로 매우 심한 근시였다. 본인은 그 정도를 10도라고 말했고,[83] 최고도 근시에 해당한다. 아는 사람조차 바로 옆에 올 때까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83] 안경을 벗었을 때 자주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삼류 배우로서 그녀 특유의 엉뚱한 매력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도 있었다.[86]

3. 3. 인간 관계

다카라즈카 가극단 시절, 소노이 케이코는 동기생인 야시로 케이코, 사쿠라 히사코와 특히 친했다. 후배인 가코 마치코는 남편 우쓰미 시게노리에 따르면 "소노이 씨를 가장 존경했던 사람"으로, 소노이의 임종을 지켜보았다.[86] 소노이는 마지막 가극 무대에서 자신이 쓰던 가발을 가스가노 야치요에게 맡겨줄 것을 부탁했고, 가스가노는 1946년 "인어공주" 공연에서 이 가발을 사용했다.

소노이가 역할 모델로 삼은 배우는 사요 후쿠코였으며, "당신의 연기는 사요를 닮았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85] 학생 시절부터 후시미 나오에의 열렬한 팬이었고, 후시미의 흉내를 자주 냈다고 한다.

소노이는 "롯코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마지막까지 의지했던 나카이 시즈는 오타루 고등여학교 선배였다.[87] 나카이 요시오는 오타루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고베 제강에 근무했고, 후에 신코 전기 사장을 역임했다. 소노이가 도쿄 체류 중 신세를 졌던 가와사키 나쓰는 오타루 고등여학교의 전 교사로, 시즈의 소개로 만나 소노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쿠라타이 사무장 마키무라 고키치는 소노이에게서 다카라즈카 가극단 시절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가와사키 이야기는 매일 들었으며, 일거수일투족 가와사키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회상했다. 도쿄 체류 당시 기노시타 겐지로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양녀로 삼을 정도로 소노이를 아꼈다고 한다.

소노이의 연애 관계는 불분명하지만, 홋카이도 목장 주인과 혼담이 오간 적은 있었다. 야시로 케이코에 따르면, 음악가극학교 시절 성악 담당이었던 스도 고로(이후 일본공산당 참의원 의원)를 동경했으나, 스도가 사상 문제로 검거된 후에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3. 4. 신앙

소노이 케이코는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창시한 우파 종교단체 생장의 집 신자였다. 사쿠라 히사코에게 생장의 집 서적인 생명의 실상을 읽으라고 권하며 인생론과 인간론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는데, 때로는 두 시간 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쿠라는 연예계 은퇴 후 출가하여 오가사와라 니치오(小笠原日凰)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일련종 몬제키 사찰인 즈이류지(제13세 몬제키)가 되었지만, "종교적 인연의 계기는 하카마(법의)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소노이는 종교적 신앙과는 별개로, 아버지 세이기치가 가르쳐준 "극락은 지옥의 밑바닥을 뚫은 곳에 있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세이기치가 병사한 뒤 하루에 한 번씩 꼭 되뇌었다고 한다.

4. 데즈카 오사무에게 미친 영향

데즈카 오사무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서 자랐는데, 그가 살던 집 근처에는 다카라젠느(다카라즈카 가극단 단원)들이 여럿 살던 '가게키나가야'라는 집들이 있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소노이 케이코가 이 집들과 같은 변두리에 살았다고 기억한다. 데즈카는 자신의 만화 "리본의 기사"가 "완전한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향수"라고 회상했으며, 소노이가 주연한 다카라즈카의 연극 "피노치오"의 열렬한 팬이었던 것이 "우주소년 아톰"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74][75]

5. 사후

소노이 케이코 사후 40년이 되던 1985년 10월, 고향인 이와테현의 IBC 이와테 방송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여름의 레퀴엠~여배우 소노이 케이코와 '사쿠라타이'의 기록"을 방송하여 민간방송 연맹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88]

1989년, 이와테현 마쓰오무라(현 하치만타이시)에서 소노이 자료전과 영화 "무호마쓰의 일생", "사쿠라타이 흩어지다" 상영회를 개최하고, "소노이 케이코 자료집 - 원폭이 앗아간 미완의 대여배우"를 편찬했다.[89] 1991년 8월 5일, NHK에서 "원폭을 몰랐던 여배우 소노이 케이코의 전쟁"을 방송했다.[90]

1994년 5월 18일, 마쓰오무라에 소노이 관련 자료를 소장하는 문화 시설 '만남문화전승관'이 건립되었다.[91] 1995년, 소노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와테현 이와테마치(전 가와구치무라)에서 '이와테 소노이 케이코 현창회'가 발족되었다.[91]

1996년, '소노이 케이코 메모리얼 콘서트'와 소노이 현창비 건립을 위한 자선 콘서트가 개최되었다.[92] 같은 해 8월 25일,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시절 소노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상이 건립되어 제막되었다.[91]

2010년 4월 20일, '소노이 케이코 65주기 기념 행사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93] 8월 20일 추도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와테초에서는 7월 21일부터 8월 22일까지 소노이 케이코 자료전 등이 개최되었다.[94]

2013년 7월 22일,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서 영화 "사쿠라타이 흩어지다"와 소노이의 무대 영상 "팔리아치"가 상영되었다.[95]

2019년,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다카라즈카 가극 전당'에 헌액되었다.[96] 소노이는 전당에 헌액된 다카라젠느 중 최연소 사망자이자,[97] 유일하게 전재로 사망한 인물이다.[98]

5. 1. 이와테현 축제

이와테현 이와테마치 가와구치에서는 매년 9월에 가와구치 도요시로 이나리 신사 가와구치 마쓰리가 열린다. 이때 3대의 남부 풍류 수레가 운행되는데, 매년 다양한 역사 속 인물이나 가부키를 주제로 한 인형을 장식한다.[99] 그중 사카이다, 후타츠모리, 구사케타 지구가 제작하는 '이구미'에서는 1999년부터 "원폭으로 흩어진 미완의 여배우 소노이 케이코"라는 제목으로 소노이를 닮은 인형을 장식하고 있다.[99] 이 인형에는 매년 다른 기모노를 입히거나, 북을 치게 하거나, 배경에 거대한 잉어를 장식하는 등 다양한 기획을 시도한다.[99]

2019년에 이와테정 가와구치에서 전시된 수레 소노이 케이코의 새를 쫓는 여자

6. 출연 작품

7. 관련 작품


  • 에즈 하기에 『사쿠라타이 전멸 - 어느 극단의 원폭 순난기』 (미라이사, 1980년 1월) - 논픽션
  • 센와 히로유키 『흘러가는 구름을 벗삼아 소노이 케이코의 생애』 (파부후루, 2020년 7월) - 평전, 전기, 논픽션
  • 센와 히로유키, 『소노이 케이코 원폭에 산화한 타카라즈카 젠누의 꿈』 (고쿠쇼 간코카이, 2023년 4월) - 평전, 전기, 논픽션
  • 신도 가네토 감독, 사쿠라이타이 흩어지다 (1988년 제작) - 에즈 하기에의 작품을 각색, 미키 다카코가 소노이 역 연기.
  •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 《해변의 영화관 - 키네마의 다마테마코》 (2020년 개봉) - 도기와 다카코가 소노이 역 연기.
  • 이노우에 히사시 작, 가미야정 사쿠라 호텔 (1997년 초연) - 신국립극장 개장 기념 공연. 초연에서 소노이 역은 미타 가즈요가 연기, 이후 여러 번 재연되었으며 여성 역이지만 다카라즈카 OG 모리나 미하루도 소노이 역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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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뉴스 被爆死の元ジェンヌ、「歌劇の殿堂」入り 園井恵子さん https://www.asahi.co[...] 2019-05-28
[83] 뉴스 被爆死の元ジェンヌ、「歌劇の殿堂」入り 園井恵子さん https://www.asahi.co[...] 2019-05-28
[84] 뉴스 宝塚歌劇殿堂入りした園井恵子さんの展示品公開始まる 105人目の顕彰者 https://www.daily.co[...] 2019-05-31
[85] 간행물 園井恵子の引き抜き 1964-04
[86] 웹인용 園井恵子 「生誕百年祭」 http://e-iwate.net/m[...] e-いわてまち.ねっと(岩手県岩手郡岩手町)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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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웹인용 IBC受賞番組一覧 http://www.ibc.co.jp[...] IBC岩手放送 2015-02-11
[89] 웹인용 園井惠子像 http://e-iwate.net/m[...] e-いわてまち.ねっと(岩手県岩手郡岩手町) 2015-02-02
[90] 웹인용 現代ジャーナル 原爆とは知らず 女優・園井恵子の戦争 http://archives.nhk.[...] NHKアーカイブス 2015-02-11
[91] 웹인용 園井惠子像 http://e-iwate.net/m[...] e-いわてまち.ねっと(岩手県岩手郡岩手町) 2015-02-02
[92] 웹인용 流けい子 芸歴 http://www.geocities[...] 株式会社オフィス・ケイ 2015-02-11
[93] 깨진 링크 http://blog.e-iwate.[...] 2015-02
[94] 웹인용 園井恵子没後 65年記念イベント企画書 http://e-iwate.net/m[...] e-いわてまち.ねっと(岩手県岩手郡岩手町) 2015-02-02
[95] 뉴스 原爆で亡くなった元タカラジェンヌ 未公開の映像上映 2013-07-24
[96] 웹인용 「宝塚歌劇の殿堂」顕彰者の選出について https://kageki.hanky[...] 宝塚歌劇団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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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웹인용 岩手県岩手町川口 川口まつり http://sutekinaomatu[...]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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