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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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망지는 전한 시대의 관료로, 학문을 닦아 명성을 얻었으며, 곽광 집권기에 등용되지 못했으나 선제의 총애를 받아 승상사직, 어사대부 등을 역임했다. 그는 원제 시기에 개혁을 시도했으나 환관들의 반대로 파면되었고, 아들의 상소문을 둘러싼 갈등 끝에 자결했다. 원제는 그를 용서하고 묘에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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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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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소망지는 집안 대대로 농사를 지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장안에서 명성을 얻었다. 곽광 집권 시기 병길의 추천을 받았으나, 면담 과정에서 곽광에게 항의하여 등용되지 못했다. 이후 석책[1]에서 급제하여 낭(郞)이 되었으나, 동생의 죄로 파면되었다. 위상에게 발탁되어 효렴으로 천거, 선제에게 중용되어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선제는 소망지를 평원태수로 임명했으나, 소망지는 조정에서 활약하기를 원하여 소부로 복귀했다. 이후 좌풍익에 임명되었을 때도 좌천이라 여겨 사양했으나, 선제의 설득으로 부임하여 뛰어난 실적을 거두고 대홍려,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조정에서 정책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으나, 상평창 설치 반대, 병길 비판 등 선제의 뜻과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병길에 대한 불손한 태도로 파연수에게 탄핵받아 태자태부로 좌천되기도 했다.
선제는 임종 시 소망지를 사고와 함께 태자 (원제) 보좌역으로 임명했다. 소망지는 전장군 겸 광록훈, 영상서사가 되었다. 원제 즉위 후, 소망지는 유갱생, 김창과 제도 개혁을 추진했으나, 중서령 홍공, 중서복야 석현 등 환관 세력과 대립했다. 소망지가 추천한 인물이 환관 편에 서고, 환관들이 소망지의 죄상을 폭로하여 파면되었다.
몇 달 후 원제는 소망지를 관내후에 봉하고 급사중에 임명하며 복권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망지의 아들 소급이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홍공 등은 이를 역이용하여 소망지가 황제를 비난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결국 소망지는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제자 주운의 권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후 원제는 소망지를 용서하고 소급에게 작위를 잇게 했으며,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2. 1. 초기 생애와 등용
집안 대대로 농사를 지었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시경》·《논어》 등을 익히니 장안에서도 그 명성을 떨쳤다.대장군 곽광이 집권하던 시절, 왕중옹(王仲翁)을 비롯한 유생 몇 명과 함께 장사 병길의 천거를 받았다. 소망지는 곽광을 보기 전에 몸수색을 받았고, 또 곁에 다른 사람이 동행하게끔 하자 이를 분하게 여겨 항의하였다. 때문에 곽광은 왕중옹 등을 모두 자신의 속관으로 임용하고, 소망지만 제외하였다. 나중에 소망지는 석책(射策)[1]에서 갑과로 급제하여 낭(郞)이 되고 문지기 일을 하게 됐는데, 그 사이 왕중옹은 승진하여 광록대부급사중이 되어 있었다. 왕중옹은 소망지의 처지를 비웃었으나, 소망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년 후 동생이 지은 죄 때문에 파면되고 군(郡)의 관원으로 지냈다. 그러나 어사대부 위상에게 발탁되어 그의 밑에서 일하였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대행치예승(大行治禮丞)이 되었다. 소망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선제는 곧 소망지를 알자(謁者)에 임명하였고, 곧 소망지는 간대부(諫大夫)·승상사직으로 승진하여 한 해만에 이천석에 이르렀다.
2. 2. 선제 시기의 활동
대장군 곽광이 집권하던 시절, 왕중옹(王仲翁)을 비롯한 유생 몇 명과 함께 장사 병길의 천거를 받았다. 소망지는 곽광을 보기 전에 몸수색을 받았고, 또 곁에 다른 사람이 동행하게끔 하자 이를 분하게 여겨 항의하였다. 때문에 곽광은 왕중옹 등을 모두 자신의 속관으로 임용하고, 소망지만 제외하였다.[1] 나중에 소망지는 석책(射策)에서 갑과로 급제하여 낭(郞)이 되고 문지기 일을 하게 됐는데, 그 사이 왕중옹은 승진하여 광록대부급사중이 되어 있었다. 왕중옹은 소망지의 처지를 비웃었으나, 소망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몇 년 후 동생이 지은 죄 때문에 파면되고 군(郡)의 관원으로 지냈다. 그러나 어사대부 위상에게 발탁되어 그의 밑에서 일하였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대행치예승(大行治禮丞)이 되었다. 소망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선제는 곧 소망지를 알자(謁者)에 임명하였고, 곧 소망지는 간대부(諫大夫)·승상사직으로 승진하여 한 해만에 이천석에 이르렀다.
곧 선제는 소망지를 평원태수에 임명하였으나, 조정에서 활약하고 싶었던 소망지의 탄원으로 다시 불러들여 소부로 삼았다. 다시 좌풍익에 임명하였는데, 이를 좌천이라고 여긴 소망지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나 선제의 설득으로 받아들였다. 소망지는 임기 동안 뛰어난 실적을 쌓았고, 곧 대홍려·어사대부로 차례차례 승진하였다.
소망지는 조정에 있는 동안 정책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여 받아들여졌으나, 승상 병길이 병에 걸렸을 때 태도가 불손하였기 때문에 승상사직 파연수의 탄핵을 받아 태자태부로 좌천되었고, 태자에게 《논어》 등을 가르쳤다. 이때 상평창 설치를 건의한 경수창을 비방하였으나, 선제는 경수창의 손을 들어주었다.[2]
2. 3. 원제 시기의 갈등과 죽음
대장군 곽광이 집권하던 시절, 왕중옹(王仲翁)을 비롯한 유생 몇 명과 함께 장사 병길의 천거를 받았다. 소망지는 곽광을 보기 전에 몸수색을 받았고, 또 곁에 다른 사람이 동행하게끔 하자 이를 분하게 여겨 항의하였다. 때문에 곽광은 왕중옹 등을 모두 자신의 속관으로 임용하고, 소망지만 제외하였다. 나중에 소망지는 석책(射策)[1]에서 갑과로 급제하여 낭(郞)이 되고 문지기 일을 하게 됐는데, 그 사이 왕중옹은 승진하여 광록대부 급사중이 되어 있었다. 왕중옹은 소망지의 처지를 비웃었으나, 소망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몇 년 후 동생이 지은 죄 때문에 파면되고 군(郡)의 관원으로 지냈다. 그러나 어사대부 위상에게 발탁되어 그의 밑에서 일하였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대행치예승(大行治禮丞)이 되었다. 소망지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선제는 곧 소망지를 알자(謁者)에 임명하였고, 곧 소망지는 간대부(諫大夫)·승상사직으로 승진하여 한 해만에 이천석에 이르렀다.
곧 선제는 소망지를 평원 태수에 임명하였으나, 조정에서 활약하고 싶었던 소망지의 탄원으로 다시 불러들여 소부로 삼았다. 다시 좌풍익에 임명하였는데, 이를 좌천이라고 여긴 소망지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나 선제의 설득으로 받아들였다. 소망지는 임기 동안 뛰어난 실적을 쌓았고, 곧 대홍려·어사대부로 차례차례 승진하였다.
소망지는 조정에 있는 동안 정책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여 받아들여졌으나, 승상 병길이 병에 걸렸을 때 태도가 불손하였기 때문에 승상사직 파연수의 탄핵을 받아 태자태부로 좌천되었고, 태자에게 《논어》 등을 가르쳤다. 이때 상평창 설치를 건의한 경수창을 비방하였으나, 선제는 경수창의 손을 들어주었다.[2]
선제는 임종 시에 태자를 보좌할 대신으로 외척 사고와 함께 태자태부 소망지·태자소부 주감을 점찍었고, 이들에게 태자를 맡겼다. 곧 소망지는 전장군 겸 광록훈·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었다.
선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였다(원제). 원제는 소망지를 총애하였고, 소망지는 유갱생·김창(金敞)과 함께 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그러나 중서령(中書令) 홍공·중서복야(中書僕射) 석현 등의 중서 환관들은 이에 반대하였고, 곧 사고를 끌어들여 소망지 등과 대립하였다. 게다가 예전에 소망지가 천거한 정붕(鄭朋)이 환관 측에 붙었고, 환관은 소망지의 죄상을 폭로하여 그가 파면되게끔 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 원제는 조서를 내려 소망지를 관내후에 봉하고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였다. 또 승상에 임명하고자 하였는데, 소망지의 아들 소급이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이에 홍공 등은 소급의 상주문을 역이용하여, 소망지가 아들로 하여금 무죄를 탄원하게 하여 잘못을 황제에게 돌리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제는 소망지를 잡아들일 것을 명하였고, 관원이 소망지의 집에 당도하니 소망지는 제자 주운의 권유로 스스로 독을 마시고 죽었다. 원제는 소망지를 용서하여 소급에게 관내후를 잇게 하였고, 정기적으로 사자를 보내 소망지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2. 4. 사후
선제가 임종할 때 황태자(훗날의 원제)를 보좌할 대신으로 외척 사고와 함께 태자태부였던 소망지, 태자소부 주감을 선택했다. 소망지는 전장군·영상서사가 되었다.선제가 붕어한 후, 소망지 등은 황제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았다. 소망지는 유갱생, 금창과 함께 고대에 따른 정치를 행하고 제도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중서령홍공, 중서복야석현 등 중서 환관들은 이에 반발했고, 사고를 끌어들여 소망지와 대립했다. 소망지는 중서에 환관을 쓰지 말 것을 건의하여 대립이 심화되었고, 소망지가 추천한 정붕이 환관 측에 붙으면서 환관에게 죄가 드러나 해임되었다.
몇 달 후, 원제는 소망지를 승상으로 삼으려 했고, 관내후에 봉하고 급사중에 임명했다. 소망지의 아들이 아버지의 무죄를 호소했지만, 소망지의 복귀를 두려워한 홍공 등은 아들의 상소를 역이용하여, 아들에게 무죄라고 호소하게 하여 비난을 황제에게 돌리려 한다고 모함하여 체포하려 했다. 역관이 저택에 찾아오자 소망지는 자결했는데, 초원 3년(기원전 46년)의 일이었다.
3. 평가
대장군곽광 시대에 그의 부하였던 병길이 소망지를 추천했지만, 곽광은 면담 때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신체검사를 하고, 양옆에 역관이 따르는 처우를 하였다. 소망지는 이에 항의하며 주공단의 태도와 차이점을 직언하여 곽광의 미움을 사 임용되지 못했다.
이후 문제에 대한 해답이 우수하여 낭이 되었지만, 수년 후 동생이 법을 어겨 면직되고 군의 역관이 되었다. 그 후 어사대부였던 위상이 그를 어사부의 역관으로 발탁하고 효렴으로 추천하여 대행 치례 승이 되었다.
소망지는 조정에서 여러 정책에 대한 논의에서 의견을 말했고, 종종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평창 설치를 반대하거나, 선제가 중시하는 병길을 비판하는 등, 선제의 뜻에 맞지 않는 일도 있었다. 또한 병약한 승상 병길에 대한 태도가 불손했던 것을 이유로 탄핵되어 태자태부로 좌천, 승상으로 가는 길이 멀어졌다.
선제가 붕어하자 소망지 등은 스승이라는 이유로 황제에게 존중받았다. 소망지 등은 더 나아가 유갱생, 금창과 함께 고대에 따른 정치를 행하고 제도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선제는 유학보다 법치를 으뜸으로 여겼기에, 법률 지식이 있던 중서령홍공·중서복야석현 등 중서 환관은 이에 반발했고, 사고를 끌어들여 소망지와 대립했다. 소망지는 중서에 환관을 쓰지 말 것을 건의하여 양자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소망지가 추천한 정붕이 환관 측에 붙으면서 환관에게 죄과가 드러나 해임되었다.
몇 달 후, 원제는 소망지를 승상으로 삼으려 했고, 관내후에 봉하고 급사중에 임명했다. 소망지의 아들이 아버지의 무죄를 호소했지만, 소망지의 복귀를 두려워한 홍공 등은 아들의 상소를 역이용하여, 아들이 무죄라고 호소하게 하여 비난을 황제에게 돌리려 한다고 죄를 씌워 체포하려 했다. 역관이 저택에 찾아오자, 소망지는 자결했다.
당의 안사고는 『한서』 소망지전 서두의 주에서, "한의 공신으로 대대로 후가 된 소하의 후손 계보는 분명하고, 고명한 학자인 소망지라면 자신의 선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서』에 소하와 소망지의 혈연관계가 전혀 기록되지 않았으니, 후세의 계도는 신용할 수 없다"라고 단정했다.
4. 가계 논란
소망지의 가문은 대대로 농업을 가업으로 삼았지만, 그는 학문을 좋아하여 시경, 논어, 의례(예복편) 등을 배우고, 장안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1] 당의 안사고는 『한서』의 소망지전 서두의 주에서, "한의 공신으로 대대로 후가 된 소하의 후손의 계보는 분명하고, 또한 고명한 학자인 소망지라면 자신의 선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서』에서 소하와 소망지의 혈연관계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았으니, 후세의 계도는 신용할 수 없다"라고 단정하고 있다.[1]
5. 출전
참조
[1]
문서
관리 임용 시험의 하나. 경서 또는 정책에 관한 문제를 적은 [[죽간]]을 내용이 보이지 않게 늘어놓고, 각 응시자가 하나씩 뽑아 답을 작성하였다.
[2]
문서
자전에는 어사대부 시절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선제기·식화지에 따르면 [[오봉 (전한)|오봉]] 4년(기원전 54년)의 일로, 이미 태자태부로 좌천된 시점이다. 한편 시점이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식화지에서도 '어사대부 소망지'로 지칭되어, 같은 오류가 답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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