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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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응창은 명나라의 문신으로, 가정 44년(1565년) 진사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임진왜란 당시 병부우시랑으로 2차 원군 총사령관인 이여송과 함께 참전하여 군수품 보급을 담당했다. 벽제관 전투 이후 일본군과의 강화를 모색하며 조선 조정을 견제하다가 소환되었으며, 평양성 전투의 공적으로 도찰원우도어사에 올랐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그의 저서인 '경략복국요편'은 임진왜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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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응창 | |
---|---|
기본 정보 | |
한국어 이름 | 송응창 |
한자 표기 | 宋應昌 |
로마자 표기 | Song Eungchang |
자 | 유승(幼繩) |
시호 | 장무(莊武) |
관력 | |
주요 활동 | 임진왜란 당시 활약 기효신서 편찬 |
직책 |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 총독계료군무(總督薊遼軍務) 병부상서(兵部尚書) 우도독(右都督) 태자소보(太子少保) |
생애 | |
출생 | 명나라 호북성 광제현 (현 후베이성 우쉐시) |
사망 | 명나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송경(宋景) |
2. 생애
송응창은 156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공직에 입문하였으며,[1] 강주지주(絳州知州)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 산동순무(山東巡撫), 주건영위순사(籌建營衛巡司) 등을 역임하면서 행정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의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으로서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에 임명되어[3]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선에 파병되었다. 그는 48,000명 병력의 2차 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보급 등의 군무를 총괄했다.
송응창은 1592년 9월부터 12월까지 군대를 모으고 보급품과 장비를 확보하였으며,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1593년 초 평양성 전투, 개성 탈환, 한양 수복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4]
그러나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송응창은 일본군과의 강화를 모색하며 조선 조정을 견제하다가 1593년 11월 소환되었다. 그는 평화 회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상관인 병부상서 석성과의 갈등, 명나라 군대의 내부 문제 등으로 인해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5]
이후 평양성 전투의 공로로 도찰원우도어사(都察院右都御史)로 승진했지만, 고향 항저우의 서호(西湖) 근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중앙 정치에는 복귀하지 않았다. 1606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저서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은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2. 1. 관직 진출
가정(嘉靖) 44년(1565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강주지주(絳州知州)에 임명되었다.융경제 4년(1570년) 12월 9일,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서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으로 승진되었다.[6] 융경제 5년(1571년) 5월 29일,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에서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으로 승진되었다.[7] 융경제 6년(1572년) 2월 21일,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에서 예과좌급사중(禮科左給事中)으로 승진되었다.[8]
만력(萬曆) 3년(1575년) 2월 20일, 예과좌급사중(禮科左給事中)으로 복직되었다.[9] 만력(萬曆) 8년(1580년) 2월 17일, 산동(山東) 제남부지부(濟南府知府)에서 산서부사(山西副使)로 승진되었다.[10] 만력(萬曆) 11년(1583년) 2월 2일, 산서부사(山西副使)에서 하남부사(河南副使)로 승진되었다.[11]
만력(萬曆) 12년(1584년) 7월 15일, 하남좌참정(河南左參政)에서 산동안찰사(山東按察使)로 승진되었다.[12] 만력(萬曆) 14년(1586년) 정월 26일, 산동안찰사(山東按察使)에서 강서포정사(江西布政司) 우포정사(右布政使)로 승진되었다.[13]
만력(萬曆) 17년(1589년) 정월 23일, 강서포정사(江西布政司) 우포정사(右布政使)에서 복건포정사(福建布政司) 좌포정사(左布政使)로 승진되었다.[14] 같은 해 6월 초10일, 복건포정사(福建布政司) 좌포정사(左布政使)에서 도찰원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 산동순무(山東巡撫)로 승진되었다.[15]
만력(萬曆) 20년(1592년) 4월 21일, 산동순무(山東巡撫)에서 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승진되었다.[16] 같은 해 6월 24일, 대리시경(大理寺卿)에서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으로 승진되었다.[17] 같은 해 8월 13일,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에서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으로 승진되었다.[18] 같은 해 8월 18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으로서 보정(保定)•계주(薊州)•요동(遼東) 등지 군무를 관리하는 보계요동등처경략(保薊遼東等處經略)으로 파견되어 비왜(備倭) 업무를 맡았다.[19]
2. 2. 지방관 생활
가정(嘉靖) 44년(1565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강주지주(絳州知州)에 임명되었다.[1]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연도별 주요 관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관직 |
---|---|
1570년 |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서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으로 승진[6] |
1571년 |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에서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으로 승진[7] |
1572년 | 형과우급사중(刑科右給事中)에서 예과좌급사중(禮科左給事中)으로 승진[8] |
1575년 | 예과좌급사중(禮科左給事中)으로 복직[9] |
1580년 | 산동(山東) 제남부지부(濟南府知府)에서 산서부사(山西副使)로 승진[10] |
1583년 | 산서부사(山西副使)에서 하남부사(河南副使)로 승진[11] |
1584년 | 하남좌참정(河南左參政)에서 산동안찰사(山東按察使)로 승진[12] |
1586년 | 산동안찰사(山東按察使)에서 강서포정사(江西布政司) 우포정사(右布政使)로 승진[13] |
1589년 | 강서포정사(江西布政司) 우포정사(右布政使)에서 복건포정사(福建布政司) 좌포정사(左布政使)로 승진[14] |
1589년 | 복건포정사(福建布政司) 좌포정사(左布政使)에서 도찰원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 산동순무(山東巡撫)로 승진[15] |
1592년 | 산동순무(山東巡撫)에서 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승진,[16] 이후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을 거쳐[17]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으로 승진[18] |
산동순무(山東巡撫), 주건영위순사(籌建營衛巡司) 등을 역임하면서 행정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 3. 임진왜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으로서, 만력제 20년(1592년) 8월에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에 임명되었다.[18] 제독 이여송과 함께 48,000명 병력의 2차 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보급 등의 군무를 총괄했다.송응창은 1592년 9월부터 12월까지 중국 전역에서 군대를 모으고 보급품과 장비를 확보하는 등 광범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1592년 12월 25일(음력) 요동성을 출발하여 2주 만에 평양성 전투에서 평양을 탈환하였고, 이후 몇 주 후 개성을, 1593년 3월에는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는 명나라 군대가 일본군보다 훨씬 적은 병력으로 단기간에 조선의 3대 도시를 탈환한 놀라운 성공이었다.[4]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일본군과의 강화를 모색하며 교전을 자제시키는 한편, 조선 조정을 정치적으로 견제하다 만력제 21년(1593년) 11월에 소환되었다. 서울 탈환 후, 일본군은 명나라와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는데, 송응창은 협상에 대해 대체로 반대 입장에 섰다. 평화 회담의 주창자인 상관 병부상서(兵部尚書) 석성과의 여러 분쟁과 전쟁 중 명나라 군대의 여러 논란 때문에 송응창은 직책에서 물러나 공직에서 은퇴하였다.[5]
이듬해, 평양 수복전의 공적이 참작되어 도찰원우도어사(都察院右都御史)로 승진되기도 했지만, 고향 항저우로 낙향해 서호(西湖) 근방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중앙 정계엔 복귀하지 않았다.
2. 4. 은퇴와 죽음
만력(萬曆) 21년(1593년) 11월,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대패한 이후 일본군과의 강화를 모색하며 교전을 자제시키고 조선 조정을 정치적으로 견제하다 소환되었다.[19] 이듬해 평양성 전투의 공이 참작되어 도찰원우도어사(都察院右都御史)로 승진했지만, 고향 항주로 낙향해 서호(西湖) 근방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중앙 정계에 복귀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34년(1606년) 2월, 향년 70세로 병사했다.[19] 저서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은 명나라의 조선 파병 관련 문서들을 수록한 1급 사료로, 임진왜란 관련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19]3. 평가 및 영향
송응창은 1592년부터 1593년까지 작성한 많은 편지를 경략복국요편이라는 저서로 편찬하였다. 이 책은 명나라 관점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최고의 1차 자료 중 하나이다. 이 편지에는 다양한 군수품 관련 작업과 일부 전투 계획, 당시 조선과 일본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5] 송응창은 사각형 얼굴과 짙은 청색 수염을 가진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4. 저서
經略復國要編|경략복국요편중국어
송응창은 1592년부터 1593년까지 작성한 많은 편지를 임진왜란에 대한 명나라의 관점을 담은 "經略復國要編|경략복국요편중국어"이라는 저서로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조선과 일본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군수품 관련 작업과 일부 전투 계획을 포함하고 있어,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다.[4]
5. 등장 매체
참조
[1]
문서
宋应昌 tiểu sử
[2]
문서
宋应昌 경력
[3]
문서
임진왜란 참전
[4]
웹사이트
明史 卷238
http://zh.wikisource[...]
[5]
웹사이트
明史 卷320
http://zh.wikisource[...]
[6]
서적
大明穆宗莊皇帝實錄 卷52
대명
1570-12-09
[7]
서적
大明穆宗莊皇帝實錄 卷57
대명
1571-05-29
[8]
서적
大明穆宗莊皇帝實錄 卷66
대명
1572-02-21
[9]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35
대명
1575-02-20
[10]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96
대명
1580-02-17
[11]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133
대명
1583-02-02
[12]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07
대명
1584-07-15
[13]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170
대명
1586-01-26
[14]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07
대명
1589-01-23
[15]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12
대명
1589-06-10
[16]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47
대명
1592-04-21
[17]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49
대명
1592-06-24
[18]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51
대명
1592-08-13
[19]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51
대명
159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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