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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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여송은 명나라의 장군으로, 이성량의 장남이다.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으로, 철령시 정부는 그를 조선족 또는 조선족 후손으로, 일본 연구자들은 조선계 중국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는 만력 연간에 요동총병을 역임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에 원군으로 파견되어 평양을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다가 철수했다. 1597년 요동총병관으로 재임명되었으나, 1598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사후에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조선에서 제독검 검술을 알게 되어 무예신보와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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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서 이씨 - 이백
이백은 당나라 시인으로, 방랑 생활을 하다가 현종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두보와 교류하며 여행하다가 반란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스케일이 크고 자유로운 시풍으로 중국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명나라의 무관 - 공유덕
공유덕은 명나라 말기 모문룡의 부하에서 청나라에 투항하여 공순왕에 봉해졌으며, 오교병변과 등주성 함락을 일으키고 청나라의 정복 전쟁에 참여했으나, 남명군과의 전투 중 자결한 인물이다. - 명나라의 무관 - 양원 (명나라)
양원은 명나라 무장으로, 임진왜란 때 이여송 휘하에서 평양성 전투에 공을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 패전 후 처형되었고, 사후 조선에서 평양 탈환 공을 기려 무열묘에 영정이 봉안되었지만 남원성 전투 당시 적군과 내통했다는 의혹도 있다. - 명나라의 총병관 - 유정 (1558년)
유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명나라 장수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만력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무장으로, '유대도'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 명나라의 총병관 - 마귀 (명나라)
마귀는 회회국 왕족 출신으로 닝샤의 난을 진압하고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되어 울산성 전투에 참여했으며, 요동 총병관을 역임했고, 그의 후손은 한국 상곡 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여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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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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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표기 | 李如松 |
자 | 자무(子茂) |
시호 | 충렬(忠烈) |
출생일 | 1549년 |
출생지 | 명나라 요동 |
사망일 | 1598년 |
사망 원인 | 전사 |
국적 | 명나라 |
최종 계급 | 요동총병관 |
작위 | 영원백(寧遠伯) |
군사 경력 | |
소속 군대 | 명군 |
주요 참전 | 보바이의 난 임진왜란 |
임진왜란 직책 | 명군 방해어왜총병관 (1592년 ~ 1593년) |
요동총병관 임기 | 1597년 ~ 1598년 |
2. 생애
이성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철령시 정부는 조선족 또는 조선족 후손이라는 공식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3] 일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조선계 중국인이라고도 불린다.[4]
만력 2년(1574년)에 아버지로부터 철령위 도지휘 동지(鐵嶺衛都指揮同知)를 세습했고, 만력 8년(1580년)에는 닝위안보(寧遠伯)를 세습했다. 이후 역임한 관직은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1592년) 압해의 난 진압에서 공을 세웠고, 같은 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다. 만력 21년(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소서행장의 군대를 기습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벽제관 전투에서 소하가와 다카카게·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의 군세에 패하여 평양으로 후퇴한 뒤에는 적극적인 공세 대신 화의를 통한 사태 수습을 모색했다. 같은 해 9월, 조선군무경략 송응창과 함께 귀국했다.[6]
만력 25년(1597년) 요동총병(遼東總兵)으로 부임하여 태자태보를 겸임했다. 만력 26년(1598년) 4월, 성 밖에서 매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이여송은 “유창하고 정확하다(娓娓精当)”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만력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만력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소보(少保)·닝위안보(寧遠伯)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사당을 세우고 가장(加葬) 영장(營葬)을 명하고 자식들을 등용했다.[5]
2. 1. 가계
이성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철령시 정부는 조선족 또는 조선족 후손이라는 공식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3] 일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조선계 중국인이라고도 불린다.[4]2. 2. 임진왜란 이전
이여송은 명나라로 귀화한 조선인 출신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이장경-이천년-이승경-이영으로 이어지는데, 이영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한 이승경의 아들로 원나라에 정착하여 살았다.[3] 이성량의 장남으로, 철령시 정부는 조선족 또는 조선족 후손이라는 공식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일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조선계 중국인이라고도 불린다.[4]이여송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이장경-이천년-이승경-이영-이문빈-이춘미-이경-이성량-이여송
이여송은 1592년 초 닝샤(寧夏)에서 발배(틋拜)의 난을 평정하여 장수로서의 명성을 얻었다.[6] 명나라 군대는 6개월 동안 반군을 제압하지 못했지만, 이여송이 도착한 후 3개월 만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는 황하(黃河)의 물길을 도시로 돌리는 방법으로 도시를 함락시켰다.
또한 부하 장수 이유승이 군법을 어기고 기생과 연애를 하고 있었음에도 용서해주고, 이후 이유승이 그 기생과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한 덕장이었다.
만력 2년(1574년)에 아버지로부터 철령위 도지휘 동지(鐵嶺衛都指揮同知)를 세습받았다.[5]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가 거친 관직은 다음과 같다.
2. 3.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여송은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서 명나라의 제2차 원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6] 천만리(千萬里), 이여백(李如柏), 추수경(秋水鏡) 등과 함께 4만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조선의 보급 문제로 군마를 잃은 이여송은 일본군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조선이 원군을 제대로 돕지 못한다며 횡포를 부렸다. 이에 류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등이 이여송에게 트집을 잡아 제대로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1593년 1월, 이여송은 류성룡 등이 이끈 조선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대파하고 평양을 탈환하였다(제4차 평양성 전투).[6] 평양 탈환 후 남진하여 한양으로 향하던 중 벽제관(碧蹄館)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병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 패하였다. 이후 기세가 꺾여 더 이상의 진격을 중지하고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 교섭 위주의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에 철군하였다.[6] 조선 측에서 재차 공격을 요청했으나 이여송은 무시하였다.
닝샤(寧夏)에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조선 출병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여송은, 1592년 말 3만 6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진격했다. 명의 관리 송응창(宋應昌)과 함께 대체로 성공적인 전과를 올렸다. 1593년 1월 8일 평양을 탈환하고, 몇 주 후 개성을 탈환했다. 1월 후반 서울(漢陽)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벽제관 전투를 벌였으나, 명나라 군대는 잠시 후퇴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중국군과 조선군에게 모든 일본군을 죽이지 말고 후퇴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고 명령했다.
만력 21년(1593년, 문록 2년) 1월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소서행장의 군세를 기습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아넣고, 포위를 일부 해제하여 자주적인 철수를 권고하며 평양을 회복했다.[6] 이후 이여송은 철수하는 소서군을 추격했으나,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벽제관 전투에서 소하가와 다카카게·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의 군세에 패하여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후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지는 않고, 화의를 통한 사태 수습을 모색했다. 9월에는 조선군무경략 송응창과 함께 이여송도 귀국했다.[6]
조선 시대 지배층은 이여송에게 송덕비를 세우고 생사당까지 지으려 했으며, 평양에 무렬사를 만들어 초상화를 걸고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7] 1599년에는 선조가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현판을 걸고 망한 나라를 다시 살린 은인으로 숭앙했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를 구국의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7]
한명기는 "재조지은"을 강조함으로써 권위가 추락했던 선조와 신하들이 "간신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공로의 대부분은 명군의 것이며, 명군을 참전시킨 것은 자신들임을 강조함으로써, 전쟁 초기의 연이은 패배로 추락한 권위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는 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7]
이여송을 구국의 은인으로 미화하는 것은 관찬 기록에 국한되며, 대중 설화에서는 악행이 부각된다. 이여송 설화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 조선의 사신이 명나라에 가서 굴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여송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 이여송이 조선에서 많은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는 것을 질투하여, 좋은 풍수의 흐름을 끊었다.
# 이름 없는 소녀가 이여송의 악행을 막고 조선에서 쫓아냈다.
# 좋은 풍수의 흐름을 함부로 끊었기 때문에, 자신의 조부의 땅의 좋은 풍수의 흐름까지 끊어 버리고, 결국 자신도 멸망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지휘한 명군의 전과로 기록된 일본군의 잘린 머리 중 절반은 조선 백성이었고, 이여송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조선 백성의 머리를 베어낸 후, 앞머리를 깎아 일본군 머리로 위장하여 전과를 속인 것이 명군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8] 명군 내에서도 문제시되어 산동도어사 주위한은 조사관을 보내, 그물 모양의 띠 형태 두건 자국이 있는 조선인의 머리와 앞머리를 깎은 일본군의 머리를 구별하는 작업을 실시하여 책임을 추궁했다.[8] 그 외에 이여송의 평양성 공격으로 화재로 사망·익사한 조선인이 1만 명 정도 있었다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나와 있으며, 노근리 사건을 능가하는 학살을 이여송이 자행했다.[8]
대중 설화에서는 이여송이 이름 없는 소녀, 젊은이, 노인, 산신령 등에 의해 조선에서 쫓겨났다고 한다.[9] 이여송의 죽음에 조정이 일색으로 애도했던 것과는 달리, 설화에서는 “이여송은 스스로 목을 조른 데다, 그의 자손까지 몰락시켰다”며 비웃고 있으며, 이는 “대국과 소국 간의 종속 관계나 혈연 관계, 혈맹 관계 등에서는 상호 호혜 평등의 원칙에 기반한 선린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9]
2. 4. 임진왜란 이후
1597년 요동총병관이 되었으며 1598년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토만(土蠻)이 이끄는 타타르와의 전투에 임했지만 전투 도중 붙잡혀 처형되었다.[5] 그는 사후에 충렬(忠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5]한편, 이여송은 조선에 주둔 중일 때 한 무명(無名)의 조선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거제시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사후 무속의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원한을 품은 조선인들은 그가 조선인 장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지중추부사 구선복이 상소하여 이여송과 정운의 후손을 등용할 것을 청했다 한다. 李如松중국어이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재건할 수 있도록 평양을 탈환한 공을 세웠으나, 명나라가 망하자 제독의 자손들이 조선으로 왔다는 것이다. 구선복은 이여송과 정운의 후손 중에서 쓸 만한 이를 뽑아 등용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1598년 4월, 이여송은 산림 지대를 정찰하던 중, 북쪽에서 몽골군이 명나라 요동(遼東)성을 침략했을 때 수천 명의 몽골 기병에게 포위되어 탈출하지 못하고 사로잡혀 살해당했다.[5] 만력제는 그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도했고, 사후에 소보(少保)·닝위안보(寧遠伯)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우고, 가장(加葬) 영장(營葬)을 명하고, 그의 자식들을 등용하여 후대했다.[5]
3. 검술
이여송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제독검 검술을 알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 검술을 무예신보(1759)와 무예도보통지(1791) 등의 무술 교본에 수록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冬十月壬寅,李如松提督蓟、辽、保定、山东军务,充防海御倭总兵官,救朝鲜。-《明史》
http://www.tianyaboo[...]
tianyabook.com
[2]
웹사이트
成梁英毅骁健,有大将才。家贫,不能袭职,年四十犹为诸生。巡按御史器之,资入京,乃得袭。积功为辽东险山参将。隆庆元年,士蛮大入永平。成梁赴援有功,进副总兵,仍守险山。寻协守辽阳。三年四月,张摆失等屯塞下,成梁迎击斩之,歼其卒百六十有奇。-《明史》
http://www.read126.c[...]
read126.cn
[3]
웹사이트
李成梁の故郷感情
https://megalodon.jp[...]
[4]
서적
朝鮮の歴史―先史から現代
昭和堂
2008
[5]
간행물
李成梁一族の軍事的台頭
1986
[6]
서적
秀吉の朝鮮侵略と民衆
岩波新書
2012
[7]
논문
2003
[8]
논문
2003
[9]
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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