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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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키나와현의 역사는 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2만 년 전의 미나토가와인 유골이 발견되었다. 12세기 후반부터 1429년까지 오키나와 섬은 난잔, 츄잔, 호쿠잔으로 나뉘어 산잔 시대를 겪었고, 1429년 츄잔의 쇼하시가 류큐 왕국을 세웠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통해 번성했으나,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으로 일본에 종속되었고, 이후 청나라와 일본에 이중 조공을 하는 시기를 거쳤다. 1879년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오키나와 전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후 미국은 류큐 열도를 점령하여 미군정을 실시하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했다. 현재 오키나와는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며, 주일미군 기지 문제와 자치권 보장 문제가 주요 정치적 이슈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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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의 역사 | |
---|---|
지도 | |
일반 정보 | |
원어 제목 | 루추누 이와리 |
선사 시대 | |
고류큐 | |
근세 | |
근대 | |
현대 |
2. 선사 및 고대
오키나와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발굴된 미나토가와인 港川人일본어은 약 2만 년 전 류큐 제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옛 인류의 유골이며, 남성 2명과 여성 2명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었다.[2]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와 비슷한 소바타식 토기 曾畑式土器일본어가 발견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채집한 조개 껍질이 쌓여서 이루어진 조개무지인 패총이 특징적이다. 고대 오키나와는 류큐 제도의 조개껍데기를 가공한 특산물을 중국, 일본, 한반도의 여러 옛 나라들과 교역하였다.[3]
2. 1. 류큐국의 건국 신화
류큐국 시대인 1605년에 편찬된 역사서 《중산세감》에는 하늘의 최고신 아마미쿄가 오키나와섬을 창조하고, 남녀 한 쌍의 신을 보내 살게 했다는 건국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신 부부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왕의 조상이 되어 왕족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미의 '천손(天孫)'이라 칭하게 되었고, 차남은 제후(按司)의 조상, 삼남은 농민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장녀는 고위 신녀(祝女)의 조상, 차녀는 일반 무녀(巫女)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이 신화는 한국의 단군신화나 일본의 건국 신화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며, 류큐국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된다.[4]
3. 산잔 시대
오키나와에 대한 상세한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후반 이후이다. 철기를 사용한 농업이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역 호족인 안지들이 자신들의 거점인 구스쿠를 쌓고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남송이 쇠퇴하고 원나라가 중국을 장악했으며, 고려에서는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일본은 헤이안 시대가 끝나고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는 격변기였다.[6]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중반까지 류큐 제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해역은 각국의 정세로 인해 관리가 느슨해져 왜구와 같은 해적이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전보다 무역량이 크게 증가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류큐나 제주도는 주변 국가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키나와 섬의 안지들은 서로 경쟁하며 힘을 확장했고, 대외 무역도 활발히 전개했다. 오키나와섬에서 발견된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은 아직 류큐국이 세워지기 이전인 산잔 시대에 고려에서 수입된 것으로, 당시의 무역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8]
오키나와섬 안지들의 세력은 점차 난잔(南山), 츄잔(中山), 호쿠잔(北山)의 세 세력으로 정리되었다. 이 시기를 산잔 시대(三山時代)라고 부르며, 1322년부터 1429년까지 약 1세기 동안 이어졌다. 산잔 시대에는 각 산의 안지가 스스로 왕을 칭했다. 1372년 츄잔이 가장 먼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 무역을 시작했으며, 이후 난잔과 호쿠잔 역시 경쟁적으로 명나라와 조공 무역 관계를 맺었다.[9]
3. 1. 조공 무역
산잔 시대 오키나와섬의 세력은 난잔(南山), 츄잔(中山), 호쿠잔(北山)의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1372년 츄잔이 가장 먼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 무역을 시작하자, 난잔과 호쿠잔 역시 경쟁적으로 조공 무역에 뛰어들었다. 이후 50년 동안 삼산이 보낸 조공선의 횟수는 70여 회에 달했다.[9]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 무역은 전통적으로 조공을 바치면 답례품을 주는 형식이었는데, 대개 답례품이 조공품보다 더 풍성했다. 시기에 따라 상인들의 개인적 거래인 호시(互市)가 열리기도 했지만, 명나라 이후 국제 무역에서 호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10] 산잔 시대 오키나와 각 왕조의 경제 활동은 대외 무역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조공선의 왕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9]4. 류큐 왕국
산잔 시대 후반, 츄잔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1429년 츄잔의 제2대 쇼하시왕(尚巴志王일본어)이 난잔과 호쿠잔을 멸망시키고 삼산통일(三山統一)을 이루어 류큐국을 건국했다.[11] 쇼하시는 수도인 슈리성 정전에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을 걸어 새 국가의 출범을 알렸다.[12][13]
쇼하시왕 이후 쇼엔왕 대부터 류큐는 일본, 조선, 명나라 등과 활발히 교역하며 성장했다. 특히 명나라의 해금 정책 시기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여 '대교역시대'를 맞이했으며,[11] 쇼신왕 때에는 주변 섬들을 복속시키며 전성기를 누렸다.[14]
그러나 16세기 들어 명나라 중심의 조공 무역 질서가 약화되고, 왜구 활동 증가 및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양 세력의 등장,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위협 등으로 류큐의 중계 무역 지위는 흔들렸다.[7] 결국 1609년 사쓰마번의 침공으로 아마미 제도를 빼앗기고 일본에 종속되기 시작했다.[14]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류큐국은 청과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치는 이중 조공 체제를 통해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16] 18세기 말부터 경제난을 겪고 19세기 서양 세력의 압력 속에 중계 무역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며 일본에 더욱 종속되었다.[9]
4. 1. 류큐 왕국의 발전과 쇠퇴
산잔 시대 후반, 츄잔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1429년 츄잔의 제2대 쇼하시왕(尚巴志王일본어)이 난잔과 호쿠잔을 멸하고 삼산통일(三山統一)을 이루어 류큐국을 세웠다.[11] 쇼하시는 수도인 슈리성 정전에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 세계로 나아가는 기틀이 되는 종[12])을 걸고 새 국가의 출범을 선포하였으나,[13] 소하시 당대에는 오키나와 전역에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류큐국이 실제 류큐 제도를 관장하는 국가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뒤를 이은 쇼엔왕 시기 부터이다. 이 시기 류큐는 일본, 조선, 명나라 등과 폭넓은 교역을 진행하면서 국력을 신장했다. 특히 이 시기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펴 자국의 상선들이 자유로이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동아시아 해역과 동남아시아 해역을 아우르는 해상 무역 통로를 지니고 있던 류큐는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이 시기를 대교역시대라고 부른다.[11] 쇼신왕 시기에는 주변 섬들을 모두 지배하에 두고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14]
국가 | 1368년 - 1402년 | 1403년 - 1435년 | 1436년 - 1464년 | 1465년 - 1509년 | 1510년 - 1539년 | 1540년 - 1566년 | 합계 |
---|---|---|---|---|---|---|---|
조선 | 60 | 158 | 87 + a | 135 + a | 90 + a | 81 + a | 611 + a |
류큐 | 47 | 105 | 63 | 37 | 20 | 16 | 288 |
일본 | 11 | 9 | 1 | 4 | 3 | 1 | 29 |
대월 (베트남) | 25 | 6 | 27 | 23 | 4 | 4 | 89 |
시암 | 39 | 26 | 11 | 10 | 1 | 4 | 91 |
참파 | 23 | 31 | 22 | 10 | 3 | 1 | 90 |
15세기 초까지 강하게 유지되었던 명나라 중심의 조공 무역 질서는 16세기에 들어 크게 약화되었다. 후기 왜구가 다시 해상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외교와 무역을 일원화하려는 명나라의 정책은 명나라 내부의 상인들도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화상들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 보다 적극적으로 밀무역을 개시하였다. 결국 1560년대 말 명나라는 남중국해에서 화상들의 무역을 묵인하여 해금을 완화하였다. 이즈음 동아시아 해역에서 영향력을 넓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은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에 거점을 마련하고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을 증가시켰다.[7] 이러한 국제 무역 질서 개편은 류큐의 경제와 영향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왜구 활동의 증가와 함께 전국시대가 끝난 일본의 위협도 류큐국의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일본도 동남아시아와 직접 무역을 시작하면서 류큐가 누리던 중계 무역의 잇점이 사라져버렸다. 1609년 사쓰마번이 침공해 오자 류큐국은 아마미 제도를 빼앗기고 일본에 조공을 시작하였고 이후 류큐는 일본에 점차 종속되었다.[14]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 선 뒤 류큐국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 양 쪽에 조공을 보내는 이중 조공을 하였다. 이로서 류큐국은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잠시나마 다시 중계무역을 통한 성장을 보였다.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식으로 외교노선을 설정,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16]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으며,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의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이 시기 류큐국은 사실상 일본의 막번체계에 종속되어 있었다.[9]
5. 일본의 병합과 폐번치현
일본은 1879년 3월 27일 경찰과 군인 약 600명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한다'는 폐번치현 명령을 일방적으로 전달했다. 이후 8일 뒤인 4월 4일에는 류큐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 이를 류큐 처분(琉球處分)이라고 한다.[16] 당시 류큐국의 쇼타이왕은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로 이주당했으며, 후작 작위를 받았다. 이 사건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대학교수 이정식은 일본의 류큐 병합이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16] 1879년 오키나와현의 초대 지사로는 나베시마 나오요시가 부임했다.[11]
갑작스러운 병합으로 인해 오키나와인들이 하루아침에 일본인으로 정체성을 바꾸기는 어려웠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적, 문화적 갈등이 발생했다. 일본 본토 정부는 지사와 함께 경찰 및 군대를 파견하여 오키나와를 위압적으로 통치했다. 이에 반발한 일부 류큐인들은 청나라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17]
6. 근대화
1940년대에 이르러 나하시와 옛 류큐국의 수도였던 수리시를 합병하고 근대적 도시계획에 따른 도시 정비를 추진하려 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키나와가 전시 상황에 돌입함에 따라 이러한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9]
6. 1. 구습온존기
오키나와현의 근대적 도시계획은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다. 일본 본토에서는 이미 1919년에 도시계획법이 시작되었지만, 오키나와현에서는 1933년이 되어서야 나하시에 대한 도시계획법이 시행되었다.[9] 1879년 폐번치현으로 류큐국이 폐지된 이후부터 1933년 나하시에 도시계획법이 시행되기까지의 시기를 "구습온존기"라고 부르기도 한다.[9] 이 시기에는 폐번치현 이후에도 옛 류큐국 시절의 지배층이 여전히 지역 사회의 유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9]7. 전쟁기
일본은 메이지 시대 초기인 1874년 타이완 침략을 시작으로 제국주의적 팽창 노선을 지속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 후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국을 세워 중국 동북 3성까지 점령했다. 이러한 팽창 정책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동남아시아 개입으로 이어져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쟁 시기 오키나와 역시 군국주의를 앞세운 일본 정부에 의해 전시 체제로 재편되었으나,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초까지는 직접적인 전쟁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4월 1일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는 오키나와섬을 비롯한 류큐 제도를 참혹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 전투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오키나와는 폐허로 변했다.[18] 민간인 희생의 상당수는 일본군과 행정 당국이 강요한 이른바 옥쇄(집단 자결)와 학살 때문이었다.[19] 일본군은 미군 상륙 전부터 주민들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며[20], 전투 막바지에는 직접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7. 1. 오키나와 전투

일본은 메이지 시대 초기인 1874년 타이완 침략을 시작으로 지속적인 제국주의 팽창 노선을 추구했다. 1895년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조선 역시 식민지로 만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중국 동북 3성까지 점령했다. 일본의 이러한 팽창 정책은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운 동남아시아 지역 개입으로 이어졌고,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전쟁 시기 오키나와 역시 군국주의를 내세운 일본 정부에 의해 전시 체제로 재편되었으나,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초까지는 직접적인 전쟁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4월 1일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가 오키나와섬을 비롯한 류큐 제도를 전쟁터로 만들면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고 오키나와는 참혹한 폐허로 변했다. 오키나와 전투의 사망자는 연합군, 일본군, 민간인을 모두 합쳐 24만 명이 넘으며[18], 이 중 민간인 희생자 수는 12만 명에 달한다.
민간인 희생의 상당수는 이른바 옥쇄를 강요한 일본군과 행정 당국에 의해 발생했다. 일본군은 민간인에게 수류탄을 나누어 주며 자살을 강요했고, 전투 막바지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직접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19] 일본군은 미군이 오키나와섬에 상륙하기도 전인 3월 말부터 민간인들에게 자결을 종용했다. 3월 28일 온나가와라에 주둔하던 일본군 대위는 "자, 이 시점에서 섬 주민은 모두 황국 만세와 일본의 필승을 기원하고 자결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20]
1972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평화기념관을 만들었지만, 일본 본토의 시각에서 일본군을 중심으로 시설을 구성했다는 비판이 있다.[21][22]
7. 2. 희생자 추모와 역사 인식 문제
오키나와 전투가 오키나와섬을 비롯한 류큐 제도를 전쟁터로 만들면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고 오키나와는 참혹한 폐허가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의 사망자는 연합군, 일본군, 민간인을 모두 합쳐 24만 명이 넘으며[18], 이 중 민간인 희생자 수는 12만 명에 달한다. 민간인 희생의 상당수는 이른바 옥쇄를 강요한 일본군과 행정 당국에 의해 발생했다.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누어 주며 자살을 강요했고, 전투 막바지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직접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하였다.[19] 일본군은 미군이 오키나와섬에 상륙하기도 전인 3월 말부터 민간인들에게 자결을 종용하였다.: 자, 이 시점에서 섬 주민은 모두 황국 만세와 일본의 필승을 기원하고 자결하라[20]
:: — 3월 28일 온나가와라 주둔 일본군 대위의 명령
1972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평화기념관을 건립했지만, 이는 일본 본토의 시각에서 일본군을 중심으로 한 시설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21][22]
8. 미군정과 일본 반환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국은 류큐 열도에 미군정을 실시했다. 일본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뒤에도 류큐 열도는 미국의 통치하에 남아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1972년에 이르러 류큐 열도는 일본에 반환되었다.[17]
8. 1. 주일미군 기지 문제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정식으로 연합군에 항복한 후, 미국은 류큐 열도를 점령하고 미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은 오키나와섬 전체를 미군의 군용지로 사용하면서 섬 주민 전체를 수용소에 가두기도 했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국제사회에 복귀하였지만, 류큐 열도는 여전히 미군의 점령지로 남았다. 미군은 류큐 열도를 아시아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했다. 류큐 열도는 1972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에 반환되었다.[17] 그러나 오키나와섬에는 여전히 미군의 군사기지가 유지되고 있어, 오키나와섬 주민들 사이에서는 미군 철수에 대한 요구가 높다. 특히 미군에 의한 성폭력과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경우, 미군 기지에 대한 반감이 크게 고조된다.[23]9. 현대
1972년 일본 복귀 이후에도 오키나와는 여전히 주일미군 기지 문제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일본 본토 미군 기지의 지속적인 이전으로 인해 오키나와는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었으며, 이는 경제와 정치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미군 관련 경제가 여전히 일정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기지 반환을 통한 새로운 경제 발전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한 관광 산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미군 기지 문제와 자치권 확보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며, 이에 대한 일본 중앙 정부의 대응 방식은 종종 오키나와 주민들의 의사와 배치되어 갈등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은 오키나와 특유의 정치적 성향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9. 1. 경제
오키나와에서 미군의 영향력은 여전히 높다. 일본은 본토 내에 있던 미군 기지를 지속적으로 오키나와로 이전해 왔고, 일본 전체 영토의 0.7%에 불과한 오키나와는 주일미군의 75%를 감당하고 있다. 미군은 정치나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1972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미군 관련 경제 비중은 15.5%에 달했으며, 2014년에도 5%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 다수는 미군 기지의 경제적 영향력이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군이 점유하고 있는 군용지를 다른 용도로 활용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 즉 기회 비용 문제를 고려하면 새로운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24]현대의 오키나와현은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2018년 오키나와를 방문한 관광객은 984만 2,400명이었으며, 외국인보다는 일본 국내 관광객이 더 많은 편이다.[25] 2019년 오키나와를 방문한 외국인은 195만 1,150명이었고, 국적별로는 타이완(40.00%), 한국(22.99%), 중국(18.38%), 홍콩(10.26%), 미국(3.51%) 순이었다.[26]
9. 2. 정치
오키나와는 일본의 다른 지역과 달리 자민당에 대한 반감이 강하고 무소속이나 야당 인사가 당선되는 경우가 많다. 주일미군의 철수 문제, 자치권의 보장 문제 등이 선거 때마다 주요 사안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여러 가지 약속을 하며 주민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해 왔지만 실제로는 주일미군의 이전이나 오키나와의 자치에 대해 주민의사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8년 오키나와현지사 선거에서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다마키 데니가 당선되었다. 다마키는 미군 아버지와 오키나와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로서 오키나와의 여러 문제를 당사자로서 직접 겪은 정치인이다.[1]참조
[1]
뉴스
특파원 스페셜 - 오키나와의 선택 “미군기지 OUT”
https://news.kbs.co.[...]
KBS
2018-10-27
[2]
웹인용
港川人、縄文人と似ず 顔立ち復元、独自の集団か
http://www.asahi.com[...]
朝日新聞社
2010-06-28
[3]
간행물
해양문물교류특별전 『한국-일본 오키나와의 조개제품을 통한 선사시대 문화의 재발견』
https://www.museum.g[...]
국립제주박물관
[4]
서적
天孫氏
沖縄大百科事典 中巻
1983
[5]
문서
s:zh:隋書/卷81
"https://s:zh:隋書/卷81[...]
[6]
뉴스
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 - 고중세에 존재했던 공존의 생활사
https://weekly.khan.[...]
주간경향
2020-11-09
[7]
서적
바다에서 본 역사
민음사
2018
[8]
뉴스
일본 오키나와 유구왕국을 아시나요
http://www.ijejutoda[...]
제주투데이
2007-07-14
[9]
웹사이트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 전쟁 전 오키나와 도시, 슈리와 나하, 나하와 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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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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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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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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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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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 Okinawa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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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国津梁(ばんこくしんりょう)の鐘(かね)と首里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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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里城公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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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류큐왕국'을 오랫동안 합병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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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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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역사체험과 ‘비무(非武)의 평화’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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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생생한 한국인 징용 기록 ‘뜻밖’… 군 위안소 지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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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201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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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민간인 학살…70년 전 4·3과 닮은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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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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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외피를 둘러싼 치열한 기억투쟁의 현장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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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외피를 둘러싼 치열한 기억투쟁의 현장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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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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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미군, 일 여성 집단 성폭행…반미여론 다시 ‘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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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가 들어서면 지역경제가 산다’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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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방문객 6년 연속 신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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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縄県のインバウンド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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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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