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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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스트 2세는 1694년 작센 선제후가 되었으며, 1697년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폴란드 왕위를 얻었으나, 대북방 전쟁에서 패배하여 폐위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복위했지만, 폴란드는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우구스트 2세는 작센의 산업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드레스덴을 아름다운 도시로 만드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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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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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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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우구스투스 2세 |
다른 이름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
폴란드어 이름 | August II Mocny |
독일어 이름 | August der Starke |
리투아니아어 이름 | Augustas II |
설명 | 시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다음으로 번호가 매겨짐. 작센에서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로 알려짐. |
통치 기간 (작센 선제후) | 1694년 4월 27일 – 1733년 2월 1일 |
이전 통치자 | 요한 게오르크 4세 |
다음 통치자 | 아우구스트 3세 |
계승 | 작센 선제후 |
통치 기간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 1697년 9월 15일 – 1706년 10월 13일 |
대관식 | 1697년 9월 15일, 바벨 대성당 |
대관식 종류 | 대관식 |
이전 통치자 | 얀 3세 소비에스키 |
다음 통치자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
계승 |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
통치 기간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 1709년 10월 9일 – 1733년 2월 1일 |
이전 통치자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
다음 통치자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
배우자 |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1693년 1월 20일 결혼, 1727년 9월 4일 사망 |
자녀 | 아우구스트 3세 서자: 모리스 드 사크스 요한 게오르크, 슈발리에 드 사크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루토프스키 마리아 안나 카타리나 루토프스카 안나 카롤리나 오르젤스카 |
가문 | 베틴 가문 |
아버지 | 요한 게오르크 3세 |
어머니 | 덴마크의 안나 소피 |
출생일 | 1670년 5월 12일 |
출생지 | 드레스덴, 작센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733년 2월 1일 |
사망지 | 바르샤바, 폴란드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
매장지 | 드레스덴 대성당(심장), 바벨 대성당(몸) |
종교 | 로마 가톨릭교(1697년부터), 루터교(1697년까지) |
참고 |
2. 생애
드레스덴에서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와 덴마크의 안나 조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94년 형 요한 게오르크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
1696년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하자, 여러 후보 중 한 명으로 폴란드 왕위에 도전했다. 왕위를 얻기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루터교 국가였던 작센 주민들의 반발을 샀고, 호엔촐레른 왕가 출신의 부인과도 관계가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다.[20] 1697년 결국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어 대관식을 올렸다.
즉위 후, 자신이 참전했던 대투르크 전쟁을 마무리 짓고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포돌리아와 드네프르강 서부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되찾았다. 이후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던 옛 폴란드령 리보니아를 되찾기 위해 덴마크,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폴란드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00년 리보니아를 침공하여 대북방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웨덴의 칼 12세에게 연이어 패배했고, 1702년 클리슈프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1704년에는 작센으로 도피했다. 1706년 스웨덴군이 작센을 침공하자, 칼 12세에 의해 강제로 알트란슈테트 조약을 맺고 폴란드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1709년 러시아가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아우구스트 2세는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지원을 받아 알트란슈테트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폴란드 왕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폴란드 내정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러시아는 아우구스트 2세와 반대파 귀족들 사이의 분쟁에 개입했고, 1720년에는 리보니아를 합병했다.
아우구스트 2세는 자신의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훗날 아우구스트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베틴 왕가의 세습 왕조를 만들려 했으나, 폴란드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의 통치 말기 폴란드는 유럽 열강 사이에서 점차 러시아의 보호국 상태로 전락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낭비와 사치를 즐겼다는 평가도 받지만, 작센의 산업과 무역을 발전시키고 드레스덴을 아름다운 문화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크라쿠프에 안장되었으나, 심장은 드레스덴에 묻혔다.
2. 1. 작센 선제후 시절 (1670년 ~ 1697년)
아우구스트 2세는 1670년 5월 12일 드레스덴에서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와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3세 국왕의 딸인 안나 소피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차남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제후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낮았다. 그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젊은 시절 여러 해 동안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프랑스에 맞선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2]1693년 1월 20일, 아우구스트는 바이로이트에서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의 딸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와 결혼했다. 부부는 1696년에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낳았는데, 그는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가 된다.[3]
1694년, 아우구스트의 형인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4세는 베네치아 카니발에 머물던 중 그의 정부였던 마그달레나 지빌라 폰 나이취츠로부터 천연두에 감염되었다. 결국 요한 게오르크 4세는 1694년 4월 27일에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아우구스트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로서 작센 선제후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4]
선제후가 된 후, 아우구스트는 1696년 대투르크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 군대의 도나우강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이듬해인 1697년 프린츠 오이겐으로 교체되었다.[17]
같은 해인 169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트는 18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폴란드 왕위에 도전했다. 국왕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작센은 전통적으로 종교 개혁의 중심지이자 루터교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기 때문에, 선제후의 개종은 작센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부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20] 또한 호엔촐레른 왕가 출신이자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는 남편의 개종을 받아들이지 않고 별거하게 되었다.[20]
아우구스트의 개종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도 파장을 일으켰다. 작센 선제후는 전통적으로 제국 의회에서 신교도 제후들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으나, 아우구스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이 지위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는 작센 내에서는 종교적 현상 유지를 약속했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원칙에 따라 작센은 루터교 영지로 남았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여전히 완전한 종교적 자유나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왕위를 얻기 위해 작센의 국고에서 막대한 자금을 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뇌물로 제공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폴란드 투기"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2. 2. 가톨릭 개종과 폴란드 왕위 계승 (1697년 ~ 1700년)
1696년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트는 18명의 왕위 후보 중 한 명이 되었다. 폴란드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자여야 했기에, 그는 왕위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5] 작센은 전통적으로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고 선제후들은 '종교 개혁의 옹호자'로 불렸기에, 그의 개종은 루터교를 믿는 작센 주민들과 개신교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20] 아우구스트는 작센의 종교적 현상 유지를 보장했지만, 일부 신민들은 그를 떠나갔다. 그의 아내인 크리스티아네 에베르하르디네 역시 개종을 거부하고 루터교 신앙을 지켰으며, 남편의 폴란드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렸는데,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의 왕위 계승 시도를 "폴란드 모험" 또는 "폴란드 투기"라고 비판적으로 불렀다.
아우구스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유대인 은행가 이사카르 베렌트 레만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선거에 나섰다. 1697년 선거에서 그는 프랑스가 지지하던 콩티 공작 프랑수아 루이보다 적은 표를 얻었으나, 콩티 공작이 폴란드에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입국하여 대관식을 강행했다.[7] 이 때문에 그의 즉위는 정당성 논란을 낳았다. 폴란드 추기경 미하우 슈테판 라지에요프스키는 콩티를, 쿠야비 주교 스타니스와프 돔브스키는 아우구스트를 각각 왕으로 선포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 아우구스트의 대리인 야코프 하인리히 폰 플레밍은 아우구스트를 대신해 국왕 선출 협약인 ''파크타 콘벤타''에 서약했다.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2세로 즉위한 후, 그는 자신이 1695년과 1696년 제국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대투르크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의 폴란드 군대는 1698년 포드하이체 전투에서 타타르의 침입을 격퇴했다.[8] 이 승리는 오스만 제국이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고 포돌리아와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 그리고 드네프르강 서쪽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폴란드에 반환하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8]
왕위에 오른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왕위를 자신의 가문인 베틴 왕가가 세습하도록 만들고, 작센 선제후로서의 힘을 이용해 혼란스러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안정시키려는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국내 개혁보다는 영토 확장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는 과거 폴란드 영토였던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프레데리크 4세, 표트르 1세와 손잡고 북방 동맹을 결성했다. 폴란드 국회(세임)가 이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트는 1700년 리보니아를 침공하여 대북방 전쟁을 일으켰다.
2. 3. 대북방 전쟁과 첫 번째 폐위 (1700년 ~ 1709년)
아우구스트 2세는 폴란드의 옛 영토였으나 당시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리보니아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베틴 왕가 세력을 확장할 목적으로 덴마크, 러시아와 손잡고 반(反)스웨덴 동맹을 결성했다. 폴란드 국회(세임)는 전쟁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1700년 작센 군대를 동원하여 리보니아를 침공함으로써 대북방 전쟁을 일으켰다.[8]
그러나 스웨덴의 젊은 국왕 칼 12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1700년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덴마크를 전쟁에서 이탈시킨 후, 아우구스트 2세에게 집중 공격을 가했다. 1701년 7월, 칼 12세는 리가 근처 드비나 강 전투에서 아우구스트의 군대를 물리치고 폴란드-작센 연합군을 리보니아에서 몰아낸 뒤 폴란드를 침공했다. 스웨덴군은 연이어 승리하며 1702년 5월 바르샤바를 점령했고, 같은 해 7월 크라쿠프 북동쪽에서 벌어진 클리슈프 전투에서 폴란드-작센 군에게 다시 한번 큰 패배를 안기고 크라쿠프에 입성했다. 1703년 봄에는 푸워투스크 전투에서 아담 하인리히 폰 슈타이나우가 지휘하는 작센군을 격파하고 토룬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궁지에 몰린 아우구스트 2세는 강화를 원했지만, 칼 12세는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둘 수 있는 인물을 폴란드 왕위에 앉히려 했다. 결국 1704년 7월, 스웨덴의 지원을 받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아우구스트 2세는 왕위를 부정당했다. 이에 아우구스트 2세는 러시아의 표트르 1세와 나르바 조약을 맺고 스웨덴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했으나, 폴란드 내전과 그로드노 작전 (1705–1706)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06년 프라우슈타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후, 같은 해 9월 칼 12세는 작센 선제후국 본토를 침공했다. 결국 아우구스트 2세는 1706년 10월, 알트란슈테트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폴란드 왕위를 넘겨주어야 했다. 이로써 아우구스트 2세는 첫 번째 폐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1709년 러시아가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 승리는 스웨덴 제국의 몰락과 러시아 제국의 부상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아우구스트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알트란슈테트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표트르 1세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2. 4. 폴란드 왕정 복귀와 말년 (1709년 ~ 1733년)
1709년 러시아가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을 격파하자, 아우구스트 2세는 표트르 1세의 후원을 받아 토룬 조약을 통해 폴란드 왕위에 복귀했다. 그는 다시 한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절대 군주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폴란드 귀족 계급(슐라흐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타르노그루드 동맹은 그의 정책에 반발하며 분쟁을 일으켰다.[2] 작센인과 폴란드인 사이의 상호 불신도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이러한 내부 분쟁은 표트르 1세에게 개입할 빌미를 주었다. 러시아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며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고, 결국 1717년 아우구스트 2세와 귀족들은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는 협정을 침묵의 세임(Sejm Niemy)에서 강제로 체결해야 했다. 이 협정으로 폴란드 군대의 규모는 18,000명으로 제한되었고,[2] 약화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복위 이후에도 대북방 전쟁은 계속되었다. 아우구스트 2세는 1712년 작센 선제후로서 가데부쉬 전투에 참전했으나 스웨덴에 패배했다. 1720년 스톡홀름 조약과 1721년 니스타트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아우구스트 2세가 얻은 것은 실질적으로 왕위 확인뿐이었고(1660년 올리바 조약의 갱신), 영토 확장 등 다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폴란드는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의존하며 왕위를 유지해야 했다.
침묵의 세임 이후 아우구스트 2세는 영토 확장 야심을 접고 연방 내부 개혁을 시도했으나, 국내외의 반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719년에는 프로이센의 팽창과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오스트리아와 빈 조약을 체결했으나, 니스타트 조약 체결로 실효성을 잃었다. 1729년 드레스덴에 폴란드 장교 학교인 그랜드 머스킷티어 컴퍼니를 설립했고, 1730년에는 바르샤바로 이전했다.[9]

아우구스트 2세는 자신의 합법적인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훗날 아우구스트 3세)에게 왕위를 세습시키려 했으나, 폴란드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1733년 바르샤바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그의 시신은 크라쿠프에 안장되었으나, 심장은 드레스덴의 드레스덴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3. 유산
아우구스트 2세의 통치 말기, 러시아는 아우구스트와 반체제 폴란드 귀족들 사이의 국내 분쟁에 개입하고 1720년 리보니아를 합병하는 등 폴란드 내정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아우구스트 2세는 자신의 적자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세습 군주제를 확립하려 했으나, 강한 군주제를 세우려는 그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그의 통치 아래 폴란드는 점차 유럽 열강 사이에서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약화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아우구스트 2세는 낭비와 사치를 즐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센의 산업과 무역을 발전시키고 드레스덴을 아름다운 문화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의 시신은 폴란드 크라쿠프에 안치되었으나, 심장은 작센의 드레스덴에 따로 묻혔다.
3. 1. 문화 예술 후원
아우구스트 2세는 예술과 건축의 중요한 후원자로 기억되며, 그의 노력으로 드레스덴은 바로크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는 1687년부터 1689년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과 절대주의 연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절대 군주로서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주요 거처인 드레스덴 성을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데 많은 투자를 했다. 엄격한 건축 규정과 도시 개발 계획,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그는 드레스덴을 독일 최고의 미술 컬렉션을 갖춘 문화 중심지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1723년에는 그린 볼트와 같은 초기 공공 박물관을 열었고, 현재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에 소장된 체계적인 회화 컬렉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비록 도시의 유명한 랜드마크 대부분은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 3세 시대에 완성되었지만, 아우구스트 2세 시대에 시작된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츠빙거 궁전이 있다. 또한 여름 별장인 필니츠 성, 사냥 별장인 모리츠부르크 성과 후베르투스부르크 성도 유명하다. 그는 바르샤바의 작센 궁전과 인접한 작센 정원을 크게 확장했는데, 이 정원은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자 세계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된 공원 중 하나가 되었다. 대북방 전쟁으로 폐허가 된 바르샤바 왕궁을 복원하고 확장했으며, 빌라노프 궁전도 확장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며 호화로운 궁정 무도회, 베네치아 스타일의 마스크 무도회, 사치스러운 궁정 모임, 게임, 정원 축제를 자주 열었다. 그의 궁정은 사치스러움으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드레스덴에서는 647마리의 여우, 533마리의 토끼, 34마리의 오소리, 21마리의 살쾡이를 던져 죽이는 여우 던지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11] 아우구스트 자신도 이 대회에 참여하여, 슬링의 한쪽 끝을 손가락 하나로 잡고 다른 쪽 끝에는 궁정에서 가장 힘센 두 사람을 매달아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고 전해진다.[1] 1730년에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차이타인에서 대규모 야영 훈련을 실시했다. 이 행사에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왕족, 군 장교, 사절단이 참석했으며,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군사 시위이자 작센의 높은 예술과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크 축제이기도 했다.[12]
음악 분야에서는 1731년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에게 왕립-폴란드 및 선제후-작센 카펠마이스터 칭호를 수여했다.[10]

아우구스트 2세는 자기 제조 비법을 밝히려는 노력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백금"의 비밀을 찾고자 했던 그는 1701년,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에게 쫓기던 젊은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를 보호했다. 아우구스트는 뵈트거를 투옥하고 금 제조 비법을 알아내려 했으나, 뵈트거는 왕의 불가능한 요구를 피하기 위해 도자기 제조로 방향을 틀었다. 연금술사였던 뵈트거는 기존의 방식 대신, 유럽에서 시도된 적 없는 고온에서 점토를 굽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혁신적인 접근법은 흙의 성분을 녹여 새로운 물질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후 100년 동안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획기적인 발견이 되었다. 1709년, 왕의 칙령에 따라 마이센에 왕립-폴란드 및 선제후 작센 자기 제조소가 설립되었고, 이곳은 정교한 마이센 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13] 이는 드레스덴이 유럽 기술과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05년 11월, 아우구스트 2세는 티코친에서 폴란드 최초이자 최고 등급의 기사단 훈장인 백색 독수리 훈장을 창설했다. 1723년 드레스덴 근처 그로스제들리츠 영지를 매입하여 궁전과 정원을 확장한 후, 1727년 그곳에서 백색 독수리 훈장의 첫 번째 축제를 개최했다.[14]
한편, 아우구스트 2세는 폴란드 왕실의 보물을 드레스덴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다음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3. 2. 가족 관계
아우구스트 2세는 곰과 같은 그의 육체적 힘과 수많은 자녀들(그중 적자는 한 명뿐) 때문에 "강건왕"(der Starke)이라고 불렸다.[15][16] 그의 키는 1.76m로 당시 평균보다 컸지만, 뛰어난 신체적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덩치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당뇨병을 앓고 비만해져 사망 당시 몸무게가 약 110kg에 달했다.그의 아내인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는 호엔촐레른 왕가 출신으로, 남편이 폴란드 왕위를 얻기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이를 거부하고 개신교 신앙을 지켰다.[20] 그녀는 남편을 따라 폴란드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작센에 남아 엘베강 유역 프레츠슈의 저택에서 주로 생활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4] 아우구스트 2세는 호색가로 알려져 있으며,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수많은 정부(情婦)를 두었다.[15][16]
아우구스트 2세와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사이의 유일한 적자는 다음과 같다.
- 아우구스트 3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1696년–176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폴란드 국왕 및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
동시대의 일부 기록, 예를 들어 바이로이트의 빌헬미네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365명 혹은 382명의 자녀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확인하기 어렵다. 아우구스트 2세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생아는 8명이며, 이들의 어머니는 대부분 귀족 여성이었다.
그의 정부들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생아는 다음과 같다.
정부 | 기간 | 사생아 | 생몰년 |
---|---|---|---|
마리아 아우로라 폰 쾨니히스마르크 백작 부인 | 1694년–1696년 | 헤르만 모리스(Hermann Moritz), 작센 백작 | 1696년 10월 28일 – 1750년 11월 30일 |
안나 알로이시아 막시밀리아네 폰 람베르크 백작 부인 | 1696년–1699년 | 없음 | |
알텐보쿰의 우르술라 카타리나, 테셴 공국 공주 | 1698년–1704년 | 요한 게오르크(Johann Georg), 작센 기사 | 1704년 8월 21일 – 1774년 2월 25일 |
파티마(후에 마리아 아우로라 폰 슈피겔) | 1701년–1706년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Friedrich August), 루토프스키 백작 | 1702년 6월 19일 – 1764년 3월 16일 |
파티마(후에 마리아 아우로라 폰 슈피겔) | 1701년–1706년 | 마리아 안나 카타리나(Maria Anna Katharina), 루토프스카 백작부인 | 1706년 – 1746년 이후 |
안나 콘스탄티아 폰 브로크도르프, 코젤 백작 부인 | 1704년–1713년 | 아우구스타 안나 콘스탄치아(Augusta Anna Constantia), 코젤 백작부인 | 1708년 2월 24일 – 1728년 3월 3일 |
안나 콘스탄티아 폰 브로크도르프, 코젤 백작 부인 | 1704년–1713년 | 프리데리케 알렉산드리네(Friederike Alexandrine), 코젤 백작부인 | 1709년 10월 27일 – 1784년 12월 16일 |
안나 콘스탄티아 폰 브로크도르프, 코젤 백작 부인 | 1704년–1713년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코젤 백작 | 1712년 8월 27일 – 1770년 10월 15일 |
앙리에트 레나르 | 1706년–1707년 | 안나 카롤리나(Anna Karolina), 오르젤스카 백작부인 | 1707년 11월 26일 – 1769년 9월 27일 |
앙젤리크 드바르그, 프랑스 무용수 및 배우 | 1708년 | 없음 | |
마리아 막달레나 비엘린스키, 뢴호프 백작 부인 (류보미르스카 공주) | 1713년–1719년 | 없음 | |
에르트무테 조피 폰 디스카우, 로스 부인 | 1720년–1721년 | 없음 | |
오스터하우젠 남작령의 크리스티아네 남작 부인, 스타니스와프스키 부인 | 1721년–1722년 | 없음 |
사생아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모리스 드 사크스 백작이다. 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서 프랑스 왕국 군대에서 최고 계급인 프랑스 원수의 지위에 올랐으며, 프랑스 대원수 칭호를 받은 6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당시 그는 자신의 이복형제인 아우구스트 3세와 적대 관계였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사위, 루이 15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또한 모리스 드 사크스는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고조부이기도 하다 (모리스의 사생녀가 상드의 부계 쪽 할머니이다).
아우구스트 2세의 손녀인 마리아 요제파 폰 작센은 프랑스 왕세자(루이 페르디낭)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도팽 부인이 되었고, 훗날 프랑스 국왕이 되는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세 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4. 평가
아우구스트 2세는 곰과 같은 괴력과 수많은 자녀를 낳은 정력적인 면모 때문에 강건왕이라고 불렸다. 그의 서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프랑스 대원수까지 오른 모리스 드 사크스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작센의 산업과 무역을 발달시키고 드레스덴을 아름다운 도시로 변화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바르샤바에 작센 공원(Ogród Saski)을 건설하여 도시의 공공 장소를 넓힌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폴란드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스웨덴으로부터 리보니아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대북방 전쟁은 결국 폴란드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간섭을 불러왔다. 그는 폴란드에 세습군주제를 확립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으며, 그의 통치 말기 폴란드는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그의 사후에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여 폴란드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개인적으로는 키가 176cm로 당시로서는 큰 편이었으나, 만년에는 당뇨병으로 고생하며 체중이 110kg까지 늘어났다.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에 안치되었으나, 심장은 드레스덴의 가톨릭 궁정 교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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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개종은 이후에도 루터교 국가인 작센에서 군주와 그 가족들만은 로마 가톨릭을 믿는 특이한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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