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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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드의 노래"는 스페인의 중세 시대 무훈시로, 음유 시인들에 의해 구전되다 기록된 작품이다. 12세기 말 또는 13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스페인 국립 도서관에 보존된 사본이 존재한다. 작품은 추방당한 영웅 엘 시드의 활약상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묘사한다. 카스티야에서 추방된 시드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무어인과 싸우고, 발렌시아를 정복하며, 사위들의 배신에 복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엘 시드의 영웅적인 면모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며, 중세 영웅 서사시의 전형으로 한국에서도 번역,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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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의 노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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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 |
제목 | 나의 시드의 노래 |
다른 제목 | 나의 시드 이야기 |
저자 | 미상 |
기여 | 불명 |
편찬자 | 미상 |
삽화가 | 미상 |
후원자 | 미상 |
헌정 | 미상 |
대상 독자 | 미상 |
언어 | 고대 스페인어 |
창작 시기 | 1140년에서 1207년 사이 |
발행일 | 미상 |
출처 | 미상 |
존재 여부 | 미상 |
진위 여부 | 미상 |
시리즈 | 미상 |
사본 | 스페인 국립 도서관, Vitr.7–17 |
운율 형식 | 부정형 음절, 자음운 |
길이 | 3730행 |
삽화 | 미상 |
장르 | 무훈시 |
주제 | 미상 |
배경 | 미상 |
시대적 배경 | 미상 |
등장인물 | 미상 |
등장인물 (전체 목록) | 미상 |
출처 | 미상 |
최초 인쇄본 | 미상 |
외부 링크 |
2. 역사적 배경 및 기원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의 실제 영웅인 엘 시드(본명: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의 무훈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로, 스페인 최초의 문학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중세 스페인의 영웅 엘 시드의 무용담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주로 '떠돌이 가수'들에 의해 공연되었던 구전문학의 형태를 띤다. 작품은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명예와 부를 쌓는 엘 시드의 일대기를 운문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당대 실존 인물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하되 극적 재미를 위해 창작이 가미된 부분도 있지만,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매우 근접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야기는 엘 시드가 왕으로부터 미움을 사 성 밖으로 쫓겨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4세기 코덱스의 일부로, 스페인 마드리드의 스페인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제목인 El Cantar de mio Cid|엘 칸타르 데 미오 시드es는 19세기 중세학자 라몬 메넨데스 피달이 제안한 것이다. 'Cantar'는 고대 스페인어로 '노래' 또는 '시'를 의미하며, 'Mio Cid'는 '나의 시드'라는 뜻으로, 이야기의 화자나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애칭이다.[4] 'Cid'라는 칭호는 아랍어의 존칭인 'sîdi' 또는 'sayyid'(سيد)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주군' 또는 '주인'을 의미한다.[12] 마드리드의 왕립 역사 아카데미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관련 문서 중 하나에는 Hic incipiunt gesta Roderici Campi Docti|히크 인키피운트 게스타 로데리키 캄피 독티la("여기 로드리고 캄피 도치의 행적이 시작된다")라는 구절만 제시되어 있다.[7]
2. 1. 구전 전통과 떠돌이 가수
중세 서사시는 주로 '떠돌이 가수'라고 불리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해졌다. 이들의 활동은 '떠돌이 가수들의 일'이라는 문학 장르로 분류되며, 이는 수도원 승려들의 문학 작업인 '승려들의 일'과 함께 중세 문학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흐름으로 여겨진다. 당시 지식의 중심이었던 수도원의 승려들의 작업과 비교될 정도로 '떠돌이 가수들의 일'이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이들이 유럽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떠돌이 가수들은 오늘날의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이들은 글이 아닌 입으로 문학을 전파하는 가수이자 연극 배우, 앵커, 아나운서였다. 때로는 음악을 반주로 사용하거나, 목소리를 바꾸어 여러 등장인물의 역할을 혼자 소화하기도 했으며, 간단한 분장을 통해 청중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전달했다. 이러한 탁월한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는 중세 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스페인 중세학자 라몬 메넨데스 피달은 "시드의 노래"를 그가 "메스터 데 후글라리아"라고 부른 대중적 구전 전통의 일부로 보았다. '메스터 데 후글라리아'는 중세 시대에 대중적인 시가 여러 세대에 걸쳐 구전되면서 내용이 변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시들은 음유 시인(후글라레스)들이 대중 앞에서 공연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각 음유시인은 공연 상황에 맞게 전통적인 내용을 각색하여 공연했다. 때로는 이야기에 자신만의 내용을 덧붙이거나 필요에 따라 내용을 줄이기도 했다.
"시드의 노래"가 구전으로 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다. 예를 들어,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낭송자가 청중에게 와인을 요청하는 구절 Es leido, dadnos del vino|에스 레이도, 다드노스 델 비노es("다 읽었으니, 우리에게 와인을 달라")가 나타난다.
반면, '개별주의자'로 불리는 일부 비평가들은 "시드의 노래"가 텍스트의 발문에 저자로 언급된 '페르 아바드'(Per Abad)[4]라는 단 한 명의 인물에 의해 창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시가 고대 스페인어로 쓰였으며, 수도원 등 학문 중심지에서 발전한 학문적인 시의 한 예라고 본다.
그러나 페르 아바드의 이름 뒤에는 1207년이라는 연도가 적혀 있는데, 최근 연구에서는 그가 원작자가 아니라 현재는 사라진 이전 필사본을 단순히 옮겨 적은 필경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현재 남아있는 "시드의 노래" 필사본은 14세기 코덱스의 일부로, 스페인 마드리드의 스페인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첫 페이지와 중간의 두 페이지가 없어 완전한 형태는 아니다. 보존을 위해 일반적으로는 전시되지 않는다.
작성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역사적 인물인 엘 시드가 1099년에 사망했으므로 시가 그 직후에 쓰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5] 시드의 이야기가 전설적인 지위를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이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1100년 이후 카롤링거 전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5] "시드의 노래"가 프랑스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서 사용된 이야기 구조를 일부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6] 이 시기가 작품 성립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2. 작품의 저자와 저작 시기
스페인의 중세학자 라몬 메넨데스 피달은 "시드의 노래"를 대중적인 시가 구전되며 변화하는 메스터 데 후글라리아 전통의 일부로 보았다. 이 전통에 따라, 시는 음유 시인(후글라레스)들이 대중 앞에서 공연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각 공연자는 상황에 맞게 내용을 각색하거나 추가, 축약하기도 했다. 작품 마지막에 시를 낭송한 이에게 와인을 요청하는 구절("Es leido, dadnos del vino")은 이러한 구두 전승의 흔적으로 여겨진다.반면, 일부 비평가들은 작품의 발문에 이름이 적힌 '페르 아바드'(Per Abbat)라는 단일 인물이 저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4] 이들은 고대 스페인어로 쓰인 이 작품을 수도원 등 학문 중심지에서 발전한 학술적 시의 예로 보았다. 그러나 페르 아바드가 자신의 이름 뒤에 1207년이라고 표기한 점과 현대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그가 직접 창작했다기보다는 현재는 사라진 이전 필사본을 단순히 옮겨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4세기 코덱스의 일부로, 스페인 마드리드의 스페인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본은 첫 페이지와 중간 두 페이지가 누락된 불완전한 상태이며, 보존을 위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작품의 저작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역사 속 시드가 1099년에 사망했으므로 그 직후에 쓰였을 것이라 주장하지만,[5] 시드의 이야기가 전설적인 지위를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1100년 이후 등장한 카롤링거 전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5] 예를 들어, "시드의 노래"는 프랑스 서사시 "롤랑의 노래"와 유사한 플롯 구조를 보인다.[6]
라몬 메넨데스 피달은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 원본 텍스트가 1140년경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9] 그러나 현재는 보존된 텍스트에 나타난 법률 지식(12세기 말~13세기 초 시행)과 부르고스 및 접경 지역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근거로, 해당 지역 사정에 밝은 학식 있는 인물이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사이에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처럼 저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9]
3. 구성 및 줄거리
≪엘 시드의 노래≫는 스페인 국토회복운동 시기의 영웅 엘 시드의 무훈과 가족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로, 1140년경에 노래된 스페인 최초의 문학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본래 '떠돌이 가수'들에 의해 구전되던 것을 12세기 중반 이후 지식인들이 다듬고, 1207년경 페르 아바트가 필사한 것이 현재 전해진다. 작품은 실존 인물인 엘 시드(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극적 재미를 위해 일부 창작이 가미되었다.
이 작품은 총 3,700행 이상의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행은 보통 14~16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운율은 유사운을 사용한다. 다른 유럽 중세 서사시와 달리 마법적 요소가 거의 없고 현실적인 분위기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8]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는 장면도 꿈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엘 시드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딸들의 이름(엘비라, 솔)이나 그들이 여왕이 되었다는 설정은 허구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엘 시드가 알폰소 6세 왕의 미움을 사 부당하게 추방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그의 정적들이 왕에게 그가 조공 일부를 횡령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카스티야 왕국을 떠나게 된 엘 시드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생계를 유지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무어인들과 싸워 영토를 정복해 나간다. 그는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의 일부를 꾸준히 알폰소 6세에게 보내며 충성심을 보인다.
이러한 무훈을 통해 엘 시드는 마침내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왕의 신임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한다. 왕과 화해한 후, 왕의 주선으로 엘 시드의 두 딸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인판테(왕자)들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결혼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 카리온의 인판테들은 비겁함으로 인해 엘 시드의 부하들에게 조롱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엘 시드의 딸들을 잔인하게 폭행하고 버린다.
엘 시드는 딸들이 당한 모욕에 대한 정의를 왕에게 호소하고, 톨레도에서 열린 재판과 결투를 통해 카리온 인판테들의 죄를 묻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한다. 인판테들은 지참금을 돌려주고 결투에서 패배하여 모든 명예를 잃는다. 이후 엘 시드의 딸들은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세자들과 재혼하게 되면서, 엘 시드의 명예는 이전보다 더욱 높아지고 그의 가문은 스페인 왕가와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1913년 라몬 메넨데스 피달의 연구 이후, 작품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분석된다.
3. 1. 제1가: 추방과 전투
엘 시드는 알폰소 6세의 미움을 사 카스티야 왕국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8] 추방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엘 시드의 정적들은 그가 왕에게 바쳐야 할 세비야 왕국의 조공 일부를 횡령했다고 거짓으로 참소했다.[49][50] 둘째, 알폰소 6세는 과거 자신의 형이자 선왕이었던 산초 2세의 신하였던 엘 시드에게 개인적인 앙금을 품고 있었다.[51][52][53] 특히 산초 2세 사후 알폰소 6세가 왕위를 계승할 때, 엘 시드가 산타 가데아 데 라 후라에서 왕에게 암살 연루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선서를 집요하게 요구했던 일이 왕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다는 설이 있다.[52][53] 셋째, 엘 시드가 왕명을 받들어 세비야 왕국에서 조공을 징수하던 중, 그라나다 왕국과 결탁하여 세비야를 침공한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을 카브라에서 격파하고 잠시 포로로 삼았던 사건 역시, 왕의 측근인 백작 세력의 원한을 사 참언의 빌미가 되었다.[49][50]결국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왕국에서 추방한다. 엘 시드는 아내 도냐 히메나와 두 딸 도냐 엘비라, 도냐 솔을 카르데냐 수도원에 맡긴 채,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카스티야를 떠나야 했다. 추방된 엘 시드는 생계를 유지하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빵을 얻기 위해(먹고살기 위해)" 무어인들과의 전투에 나선다. 그는 무어인들의 영토를 차례로 정복하며 전리품을 획득했고, 자신을 내쫓은 왕에게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이고자 전리품의 일부를 꾸준히 알폰소 6세에게 헌상했다. 이 과정에서 엘 시드와 그의 부하들은 점차 부와 명성을 쌓아간다.
3. 2. 제2가: 발렌시아 정복과 결혼
엘 시드는 계속해서 무어인의 영토를 정복하여 마침내 발렌시아 공략을 완수한다. 이로써 알폰소 6세 왕과 엘 시드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엘 시드의 아내와 딸들은 그의 영지가 된 발렌시아로 와서 함께 살게 된다.이후 알폰소 6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시드를 추방하게 만들었던 카리온의 인판테스(왕자) 페르난도와 디에고를 엘 시드의 두 딸과 결혼시키려 한다. 인판테들은 엘 시드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을 계획했으며, 왕은 이들을 옹호하며 엘 시드에게 결혼을 권유하고 그를 사면한다. 엘 시드는 이 결혼으로 인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을 예감하지만, 왕의 요청에 따라 결국 결혼을 허락한다.
3. 3. 제3가: 수난, 복수, 재혼
제3가는 제2가에서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엘 시드의 사위가 된 카리온의 인판테들은 엘 시드가 기르던 사자가 우리에서 탈출하자 겁을 먹고 도망치는 등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8] 무어인과의 전투에서도 비겁함을 보여 엘 시드의 부하들에게 조롱을 받자, 이에 수치심과 복수심을 느낀 인판테들은 엘 시드의 딸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한다.그들은 아내들(엘 시드의 딸들)과 딸들의 사촌인 펠릭스 무뇨스와 함께 카리온으로 떠난다. 여정 중 코르페스 길가의 숲에서 펠릭스 무뇨스를 먼저 보낸 뒤, 아내들의 값진 지참금(보검 포함)을 빼앗고 그들을 심하게 구타한 후 나무에 묶어 거의 죽게 된 상태로 버려둔다. 이상한 낌새를 챈 펠릭스 무뇨스가 돌아와 딸들을 발견하고 구조한다.
이 소식을 들은 엘 시드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알폰소 6세에게 정의를 호소하며 톨레도에서 법정을 열 것을 요구한다. 법정에서 인판테들은 빼앗았던 지참금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받는다. 또한, 엘 시드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인판테들과 엘 시드의 부하들 간의 결투가 열린다. 결투에서 인판테들은 패배하여 모든 명예를 잃게 된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자들이 사절을 보내 엘 시드의 딸들과 자신들의 아들(왕세자)들을 결혼시키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인판테들이 결투에서 패배한 후, 엘 시드의 딸들은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세자들과 재혼하게 된다. 이 결혼을 통해 엘 시드의 명예는 이전보다 더욱 높아졌으며, 그의 가문은 스페인 왕가와 연결되어 "스페인의 왕들은 모두 친척"이 되는 기반을 마련한다.
4. 주요 등장인물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 엘 시드 일문 및 아군
- '''엘 시드'''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Rodrigo Díaz de Vivares): 작품의 주인공. 카스티야 북쪽 비바르의 영주이자 뛰어난 기사이다.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이며, '엘 시드'는 아랍어로 "주군"을 뜻하는 '사이드'에서 유래한 별명이다.[12] 알폰소 6세 왕과의 오해로 추방당하지만,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예를 회복하고 발렌시아를 정복한다. 왕에 대한 충성심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인물로 그려진다.
- * '''도냐 히메나''' (Doña Jimenaes): 엘 시드의 아내이자 알폰소 6세의 사촌. 남편이 추방된 후 산 페드로 데 카르데냐 수도원에서 딸들과 함께 지내다가 발렌시아에서 재회한다.[17]
- * '''엘비라'''와 '''솔''' (Elvira y Soles): 엘 시드의 두 딸. 실제 역사 속 딸들의 이름과는 다르다.[13] 아버지의 명예 회복 과정에서 카리온의 인판테들과 정략결혼하지만 비극을 겪고, 이후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자들과 재혼한다.
- * '''바비에카''' (Babiecaes): 엘 시드가 세비야의 왕에게서 빼앗은 명마.[43][44]
- * '''콜라다'''와 '''티손''' (Colada y Tizónes): 엘 시드가 전투에서 얻은 명검. 콜라다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에게서,[39][40] 티손은 모로코의 부카르 장군에게서 얻었다.[47]
- '''미나야 알바르 파녜스''' (Minaya Álvar Fáñezes): 엘 시드의 오른팔이자 가장 중요한 부하. 소리타의 영주이며[26], 엘 시드를 대신해 여러 차례 왕에게 사절로 파견된다.[25][26]
- '''페드로 베르무데스''' (Pedro Bermúdezes): 엘 시드의 조카이자 군기를 드는 역할을 맡았다. 과묵하여 "무뚝뚝한 페드로"라고도 불린다. 명검 티손을 하사받는다.[20]
- '''마르틴 안톨리네스''' (Martín Antolínezes): 부르고스에서 엘 시드 일행에 합류한 중요한 가신. 명검 콜라다를 하사받는다.[23]
- 무뇨 구스티오스 (Muño Gustiozes): 엘 시드의 심복 가신. 카리온 공자들의 형인 안수르 곤살레스와 결투를 벌인다.[27]
- 산초 수도원장 (Abad Sanchoes): 부르고스 근교의 산 페드로 데 카르데냐 수도원 원장. 엘 시드의 아내 히메나와 두 딸을 보호한다.[17]
- 헤로니모 주교 (Obispo Jerónimoes): 프랑스 페리고르 출신의 주교. 엘 시드에 의해 발렌시아의 주교로 임명되며, 전투에도 직접 참여하는 용맹한 성직자이다.[21]
- 알바르 알바레스 (Álvar Álvarezes): 엘 시드의 가신 중 한 명으로, 시에서는 조카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15]
- 펠레스 무뇨스 (Félez Muñozes): 엘 시드의 조카 중 한 명. 카리온 공자들에게 버려진 엘비라와 솔을 숲에서 발견하여 구출한다.[19]
- 디에고 테예스 (Diego Téllezes): 알바르 파녜스의 가신. 펠레스 무뇨스가 구출한 엘비라와 솔 자매를 보호한다.[18]
- 마르틴 무뇨스 (Martín Muñozes): 몬테모르 벨로의 영주. "상서로운 별의 시각에 태어났다"고 묘사된다.[24]
- 가르시 가르시아 (Garci Garcíaes): "아라곤의 용장"으로 불리는 인물.[16]
- 마르 안다 (Mal Andaes): 궁정 회의 재판에서 엘 시드를 변호하는 "법의 정통자".[22]
- 아벤갈본 (Abengalbónes): 무어인이지만 엘 시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모리나의 성주.[14]
; 알폰소 6세
- '''알폰소 6세''' (Alfonso VIes):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 간신들의 참언을 듣고 엘 시드를 부당하게 추방하지만, 엘 시드의 계속된 충성과 무훈을 보고 결국 화해한다. 엘 시드의 딸들과 카리온 공자들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한다.
; 바니고메스 가문 (카리온 공자 측)
- '''카리온의 인판테들''' (Infantes de Carriónes): 레온 왕국의 귀족인 카리온 백작의 아들들.
- * '''디에고 곤살레스'''와 '''페르난도 곤살레스''' (Diego y Fernando Gonzálezes): 알폰소 6세의 주선으로 엘 시드의 딸들과 결혼하지만, 비겁하고 잔인한 인물들이다. 발렌시아에서 '사자 사건' 등으로 망신을 당하자 앙심을 품고, 귀향길에 아내들을 구타하고 숲에 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29] 이후 톨레도 궁정 재판과 결투를 통해 명예를 잃는다.
- * 안수르 곤살레스 (Asur Gonzálezes): 카리온 공자들의 형. 수다스러운 성격이지만 "역량이 뛰어난 강자"로도 묘사된다.[30][31]
- * 곤살로 안수레스 (Gonzalo Ansúrezes): 카리온 공자들의 아버지. 작중에서 백작으로 불린다.[32]
-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García Ordóñezes): 알폰소 6세의 측근이자 엘 시드를 모함하는 대표적인 간신.[33] 과거 카브라 전투에서 엘 시드에게 패배하고 수염을 뽑히는 모욕을 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다.[34] 라리오하 그라뇬의 영주이며 "그라뇬의 곱슬머리"라고도 불린다.[35][36]
- 고메스 페라에스 (Gómez Peláezes): 카리온 공자 형제의 외사촌.[37]
; 이슬람 세력 인물
- 라몬 베렝게르 (Ramón Berengueres): 바르셀로나 백작. 기독교인이지만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무어인 지역에서 엘 시드가 활동하자 분노하여 싸움을 걸었다가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명검 콜라다를 빼앗긴다.[39][40]
- 타민 (Tamínes): 발렌시아 왕의 가공의 이름.[41]
- 파리스와 갈베 (Fáriz y Galvees): 발렌시아 왕의 명을 받아 알코세르를 점령한 엘 시드를 포위하는 장군들.[42]
- 세비야의 왕 (Rey de Sevillaes): 발렌시아 함락 소식을 듣고 3만 군대를 이끌고 탈환을 시도하지만 엘 시드에게 패배하고 명마 바비에카를 빼앗긴다.[43][44]
- 유수프 (Yúcefes): 모로코의 무라비트 왕조 군주 유수프 이븐 타슈핀을 모델로 한 인물. 5만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에 상륙한다.[45][46]
- 부카르 (Búcares): 모로코 군대 5만 명을 이끄는 장군. 발렌시아를 탈환하려다 엘 시드에게 죽임을 당하고 명검 티손을 빼앗긴다.[47]
5. 문학적 특징 및 의의
스페인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는 《El Cantar de Mío Cid|엘 칸타르 데 미오 시드es》는 국토회복운동 시기의 실존 영웅 엘 시드 (본명 Rodrigo Díaz de Vivar|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es)의 무훈과 가족사를 다룬 서사시이다.[7] 1140년경 노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 스페인의 '떠돌이 가수' (juglar|후글라르es)들에 의해 구전되어 공연된 대표적인 구전문학 작품이다. 작품은 엘 시드가 알폰소 6세 왕에게 미움을 받아 추방당하는 역경 속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전투를 통해 명예와 부를 되찾고 발렌시아를 정복하기까지의 과정을 운문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실존 인물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하기에 역사적 사실과 매우 가깝지만, 극적 재미를 위해 창작된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유럽 중세 서사시들과 비교할 때, 《엘 시드의 노래》는 마법이나 환상적인 요소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현실적인 톤이 두드러진 특징이다.[8]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는 장면조차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작품이 초자연적인 힘보다는 인간의 용기, 지략, 고뇌 등 현실적인 감정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품 내용이 실제 역사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의 내용과 달리 엘 시드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며, 딸들의 이름은 엘비라와 솔이 아니었고 나바라나 아라곤의 왕비가 되지도 않았다.
작품의 중심 주제는 명예의 회복이다. 부당하게 추방당한 엘 시드는 "빵을 얻기 위해(먹고살기 위해)" 무어인 및 기독교인들과 싸우며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마침내 발렌시아 정복을 통해 최고의 영광을 얻는다. 군사적 명예 회복과 왕과의 화해 이후에는 가족, 특히 딸들이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왕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명예가 실추되는 시련을 겪는다. 작가는 이를 통해 군주에 대한 충성심과 군인으로서의 용맹함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엘 시드의 깊은 애정을 강조한다. 엘 시드는 톨레도에서 열린 왕실 회의와 결투를 통해 딸들의 명예를 되찾고, 딸들을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자들과 재혼시켜 이전보다 더 높은 명예를 성취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스페인 왕가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묘사된다.
작품의 제목 《엘 칸타르 데 미오 시드》는 원래 제목이 전해지지 않아 19세기 역사가 라몬 메넨데스 피달이 제안한 것이다. '칸타르'(Cantar|칸타르es)는 '노래' 또는 '시'를 의미하며, '미오 시드'(Mio Cid|미오 시드es)는 고대 스페인어로 '나의 주군'이라는 뜻의 애칭이다.[4] '시드'(Cid|시드es)는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널리 쓰이던 아랍어 단어 '사이이드'(sayyid|사이이드|سيدar) 또는 '시디'(sîdi|시디ar)에서 유래한 존칭으로, '주군' 또는 '주인'을 의미한다. 현대 스페인어로는 El Poema de mi Señor|엘 포에마 데 미 세뇨르es(나의 주군의 시)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총 3,700행이 넘는 구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행은 보통 14~16개의 음절로 구성되고 중간에 휴지(caesura)를 가진다. 운율은 주로 유사운(assonance)을 사용한다. 1913년 라몬 메넨데스 피달의 연구 이후, 작품 전체는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엘 시드의 노래》는 중세 스페인의 사회상과 가치관(명예, 충성, 신앙, 가족애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학 작품이며, 엘 시드를 스페인 민족의 영웅으로 각인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현실주의적인 묘사와 영웅 서사의 조화는 후대 스페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스페인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6. 한국어 번역 및 수용
스페인의 중세 영웅 서사시인 《시드의 노래》는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국토회복 전쟁 시기의 실존 영웅 엘 시드의 무훈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며, 1140년경에 노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스페인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본래 '떠돌이 가수'들에 의해 구전되던 문학으로, 역경을 딛고 명예와 부를 쌓는 엘 시드의 일대기를 운문 형식으로 노래한다. 비록 극적인 재미를 위해 창작된 부분도 있지만, 실존 인물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하여 역사적 사실과 상당히 가깝다는 특징을 지닌다.
한국에서는 엘 시드의 영웅적인 면모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며, 중세 영웅 서사시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는 그의 용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정의로운 모습이 높이 평가된다.
주요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 정동섭 옮김, 《미오 시드의 노래》, 문학과 지성사, 2008년
- 안영옥 옮김, 《엘시드의 노래》, 지식을만드는지식, 2020년
7. 현대적 해석
'엘 시드의 노래'는 단순한 중세 영웅 서사시를 넘어, 오늘날에도 유효한 여러 사회적,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엘 시드가 알폰소 6세 왕의 오해와 적들의 모함으로 부당하게 망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8], 이는 개인의 명예와 권리가 권력에 의해 어떻게 침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드가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발렌시아를 정복하며 스스로 명예를 회복하는 과정은, 역경 속에서도 개인의 능력과 의지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시드의 딸들이 겪는 수난과 복수 과정이다. 왕의 주선으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왕자(인판테)들과 결혼하지만, 남편들은 자신들이 모욕당했다는 이유로 아내들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버린다. 이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겁함과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억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시드가 왕에게 정의를 호소하고, 결국 결투를 통해 왕자들이 처벌받고 명예를 잃게 만드는 것은 부당한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여성의 존엄성 회복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여성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로 읽힐 수 있다.
또한, 작품은 마법적 요소를 배제하고 현실적인 톤을 유지하며[8], 심지어 대천사 가브리엘의 등장조차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영웅담을 넘어 당대의 사회상과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보다 사실적으로 접근하게 하여, 권력 관계, 명예, 정의, 배신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아들의 부재나 딸들의 실제 이름 및 결혼과 다른 역사적 각색이 존재하지만[8], 이는 서사적 효과를 통해 작품의 핵심 주제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될 수 있다. 딸들이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들과 재혼하는 결말은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결과적으로 스페인 통일의 역사적 과정과 연결되는 상징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이처럼 '엘 시드의 노래'는 중세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개인의 투쟁, 사회적 정의, 젠더 문제 등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와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어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넘어선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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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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