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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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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훈시는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의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11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제작된 서사시이다. 종글뢰르의 구두 공연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샤를마뉴와 그의 후손, 그리고 무어인 및 사라센과의 갈등을 다룬다. 프랑스 이야기, 즉 프랑스 무훈시는 브리튼 이야기, 로마 이야기와 구분되며, 공동체와 봉건 관계를 핵심 주제로 한다. 10음절 또는 12음절 행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술성을 특징으로 한다. 롤랑의 노래, 기욤의 노래 등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하며,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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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훈시
개요
유형서사시
시대중세
언어고대 프랑스어
내용영웅적 행위, 역사적 사건
역사적 맥락
기원프랑스 북부, 11세기
발전음유시인에 의해 구전되다가 필사본으로 기록됨
특징
운율연으로 구성된 각운
주제기독교적 가치, 충성심, 용기, 무훈
등장인물영웅적인 기사
배신자
이교도
주요 작품
롤랑의 노래프랑스 무훈시의 대표작
기욤의 노래기욤 당주빌의 무훈
라 시드스페인 무훈시
영향
문학중세 문학, 로망스
역사역사적 사건의 기록 및 해석
관련 개념
음유시인무훈시를 구전하는 역할
로망스무훈시의 영향을 받은 장르

2. 기원과 발전

무훈시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19세기부터 무훈시의 기원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특히 무훈시가 작곡된 시기와 실제 역사적 사건 사이의 시간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주된 논점이었다.[6] 무훈시가 다루는 역사적 사건은 주로 8세기에서 10세기에 발생했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훈시는 11세기 말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무훈시의 기원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이 이론들은 모두 무훈시가 쓰이기 전 2~3세기 동안 서정시, 서사시, 산문 등 서사적 자료가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으로 존재했다고 보았다.[12]


  • 클로드 샤를 파우리엘, 프랑수아 레노아르, 야코프 그림독일 낭만주의 비평가들은 역사적 전투가 벌어질 당시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서정시를 창작했고, 이것들이 나중에 합쳐져 서사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13]
  • 가스통 파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칸틸레나' 이론을 제시했는데, 서사시를 만든 것은 대중이 아닌 단일 작가라고 주장했다.[14]
  • 로베르 포티에와 레옹 고티에도 칸틸레나 이론을 지지했다. 다만 고티에는 칸틸레나가 게르만어로 작곡되었다고 생각했다.[14]
  • 19세기 말 피오 라냐는 무훈시와 고대 게르만 및 메로빙거 왕조 이야기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프랑스 시의 게르만 기원설을 주장했다.[14]
  • 폴 마이어는 무훈시가 원래 사건에 대한 고대 산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했다.[12][15]


이후 조제프 베디에는 초기 무훈시가 1000년 이후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교회 성직자들과 협력한 가수들이 '성자들의 생애' 노래를 모방하여, 위대한 순례 경로에 있는 영웅들의 성지와 무덤을 중심으로 서사적 이야기를 창조하여 순례자들을 교회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오늘날에는 거의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16][17]

이후의 비평은 '전통주의자'(무훈시가 대중적 전통의 일부로 창작되었다는 입장)와 '개인주의자'(무훈시가 개별 작가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입장) 사이를 오가며 전개되었다.[15] 최근의 역사 연구는 문학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 기원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비평가들은 전설적인 영웅들에 대한 필사본, 텍스트 및 기타 흔적을 발견하고,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의 학문과 같이 라틴 문학 전통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음을 더 깊이 탐구하고 있다.[18] 또한 장 리치너의 음유시인 예술 연구,[16] 밀먼 페리와 앨버트 베이츠 로드의 유고슬라비아 구전 전통 시, 호메로스 시, 구술-공식적 작법 연구는 무훈시의 '구술' 작곡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텍스트 보존과 정교한 시 작곡에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의 반박을 받기도 한다.[19]

2. 1. 초기 이론

19세기부터 무훈시의 기원에 대한 많은 비평적 논쟁이 있었으며, 특히 무훈시가 작곡된 시기와 그것이 언급하는 실제 역사적 사건 사이의 시간 차이를 설명하는 데 집중되었다.[6] 무훈시가 암시하는 역사적 사건은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발생했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훈시는 아마도 11세기 말에 작곡되었을 것이다. 1150년 이전에 확실하게 작곡된 무훈시는 기욤의 노래, 롤랑의 노래, 고르몽과 이셈바르 단 세 편뿐이다.[6] 기욤의 노래 전반부는 11세기 초에 쓰여졌을 수도 있으며,[7][8] 고르몽과 이셈바르는 한 전문가에 따르면 1068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9] 롤랑의 노래는 아마도 1086년 이후에서 1100년경에 작곡되었을 것이다.[6][11]

무훈시의 기원에 대한 초기 세 가지 이론은 이 2~3세기 동안 서사적 자료 (서정시, 서사시 또는 산문적 서술)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고 보았다.[12] 클로드 샤를 파우리엘, 프랑수아 레노아르, 야코프 그림과 같은 독일 낭만주의 비평가들은 역사적 전투가 벌어질 당시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서정시를 창작했고, 이것들이 나중에 합쳐져 서사시를 이루었다고 주장했다.[13] 이는 가스통 파리가 발전시킨 서사시 기원의 "칸틸레나" 이론의 기초가 되었지만, 그는 노래의 책임은 다수가 아닌 단일 작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14]

이 이론은 로베르 포티에와 레옹 고티에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고티에는 "칸틸레나"가 게르만어로 작곡되었다고 생각했다).[14] 19세기 말, 피오 라냐는 무훈시와 고대 게르만/메로빙거 이야기 사이의 유사점을 보고, 프랑스 시의 게르만 기원을 주장했다.[14] 폴 마이어가 제시한 또 다른 이론은, 시가 원래 사건의 고대 산문적 서술에 기초했다는 것이었다.[12][15]

조제프 베디에가 개발한 또 다른 이론은, 초기 무훈시가 1000년 이후의 비교적 최근의 창작물이며, 교회를 마주보고 불려진 "성자들의 생애" 노래를 모방한 가수들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교회 성직자들과 협력하여[16]), 위대한 순례 경로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영웅들의 성지와 무덤을 기반으로 하여, 순례자들을 이 교회로 유인하는 방식으로 서사적 이야기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17] 비평가들은 또한 고대 라틴어 서사시에 대한 성직자들의 지식이 그들의 작곡에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15][17]

2. 2. 베디에의 이론

19세기부터, 많은 비평적 논쟁은 무훈시의 기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무훈시의 작곡 시기와 그들이 언급하는 실제 역사적 사건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설명하는 데 집중되었다.[6] 무훈시가 암시하는 역사적 사건은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발생했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훈시는 아마도 11세기 말에 작곡되었을 것이다.[6]

조제프 베디에(Joseph Bédier)는 초기 무훈시가 1000년 이후의 비교적 최근의 창작물이며, 교회를 마주보고 불려진 "성자들의 생애" 노래를 모방한 가수들에 의해 개발되었고, 위대한 순례 경로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영웅들의 성지와 무덤을 기반으로 하여, 순례자들을 이 교회로 유인하는 방식으로 서사적 이야기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교회 성직자들과 협력)[16][17] 비평가들은 또한 고대 라틴어 서사시에 대한 성직자들의 지식이 그들의 작곡에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15][17]

베디에는 더 나아가, 몇몇 스토리를 처음 만든 것은 수도사들이며, 성인뿐만 아니라 전승의 전설적인 영웅도 연결함으로써 순례의 땅을 알리기 위해 무훈시를 사용했다고 시사했다.

2. 3. 후기 비판과 현대적 연구

19세기부터 많은 비평가들은 무훈시의 기원, 특히 무훈시가 쓰여진 시기와 그 내용이 다루는 실제 역사적 사건 사이의 시간 차이에 주목했다.[6] 무훈시 속 역사적 사건은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발생했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훈시는 11세기 말에 작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50년 이전에 확실하게 작곡된 무훈시는 기욤의 노래, 롤랑의 노래, 고르몽과 이셈바르 단 세 편뿐이다.[6] 기욤의 노래 전반부는 11세기 초,[7][8] 고르몽과 이셈바르는 1068년,[9] 롤랑의 노래는 1086년에서 1100년경에 작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11]

무훈시의 기원에 대한 초기 이론들은 2~3세기의 시간 간극 동안 서사 자료(서정시, 서사시, 산문)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고 보았다.[12] 클로드 샤를 파우리엘, 프랑수아 레노아르, 야코프 그림 같은 독일 낭만주의 비평가들은 역사적 전투가 벌어질 당시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서정시를 창작했고, 이것들이 나중에 합쳐져 서사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13] 가스통 파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서사시 기원의 "칸틸레나" 이론을 주장했는데, 노래를 만든 것은 다수가 아닌 단일 작가라고 보았다.[14]

로베르 포티에와 레옹 고티에 역시 이 이론을 지지했다. (고티에는 "칸틸레나"가 게르만어로 작곡되었다고 생각했다.)[14] 19세기 말, 피오 라냐는 무훈시와 고대 게르만/메로빙거 이야기 사이의 유사점을 보고 프랑스 시의 게르만 기원을 주장했다.[14] 폴 마이어는 시가 원래 사건에 대한 고대 산문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12][15]

조제프 베디에는 초기 무훈시가 1000년 이후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으며, 교회 성직자들과 협력한 가수들이 "성자들의 생애" 노래를 모방하여 위대한 순례 경로에 있는 영웅들의 성지와 무덤을 중심으로 서사적 이야기를 창조하여 순례자들을 교회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오늘날 대부분 신뢰를 잃었다.)[16][17] 비평가들은 고대 라틴어 서사시에 대한 성직자들의 지식이 작곡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도 제안했다.[15][17]

이후 비판은 "전통주의자"(대중적 전통의 일부로 창작)와 "개인주의자"(개별 작가에 의해 창작) 사이를 오갔지만,[15] 최근 역사 연구는 문학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 기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비평가들은 전설적인 영웅들의 필사본, 텍스트, 기타 흔적을 발견했고,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의 학문처럼 라틴 문학 전통의 지속적인 존재를 더 깊이 탐구했다.[18] 장 리치너의 음유시인 예술 연구,[16] 밀먼 페리와 앨버트 베이츠 로드의 유고슬라비아 구전 전통 시, 호메로스 시, 구술-공식적 작법 연구는 무훈시의 "구술" 작곡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텍스트 보존과 정교한 시 작곡에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의 반박을 받기도 한다.[19]

가스통 파리는 무훈시가 구전 서사시 전통을 계승하며, 칸틸레나(Cantilena)라고 불리는 이야기 노래와 같다고 보았다. 중요한 사건에 대한 노래는 때로는 사건 직후에 불렸다. 예를 들어,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벌어진 매복 공격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사건 60년 후에도 모두 알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원래의 작은 사건이 전설(롤랑의 노래로 알려진)로 커졌음을 보여준다. 기욤 드 티르의 『Historia Transmarina』와 노장의 기베르의 『Gesta Dei per Francos』에는 제1차 십자군을 주제로 한 당시 노래가 언급되어 있다. 현존하는 『안티오키아의 노래』 작가 Graindor de Brie(활동: 1170년경)는 jongleur이자 원정 참가자인 Richard le Pèlerin의 작품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스페인 문학의 『시드 이야기』는 당시 스페인에도 비슷한 이야기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스통 파리는 초기 무훈시 가수가 스칸디나비아의 스칼드 시인이나 켈트족의 바드처럼 왕이나 군사 지도자의 궁정에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조제프 베디에는 무훈시가 시인들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생각했다. 베디에는 몇몇 이야기가 수도사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며, 성인뿐 아니라 전승의 전설적인 영웅도 연결하여 순례지를 알리기 위해 무훈시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야기 속에는 마법의 성유물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 의견은 구전 이론 발전 이후 지지자가 적다. 수도사는 jongleur의 문학에 손대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많다.

3. 주제와 구성

고대 프랑스어로 작곡되었으며, 종글뢰르의 구두 공연을 위해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무훈시"는 8, 9, 10세기의 프랑스 역사에서 전설적인 사건(때로는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함)을 서술하며, 샤를 마르텔, 샤를마뉴, 경건왕 루이의 시대를 다루며, 무어인사라센과의 갈등, 그리고 왕과 봉신 간의 분쟁에 중점을 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훈시에는 초기에는 없던 현실적인 요소(돈, 도시 장면), 새로운 궁정 문화의 요소(여성 캐릭터, 사랑의 역할), 로망스에서 파생된 판타지와 모험 요소, 십자군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방 모험의 요소, 백년 전쟁시기에는 민족주의적(또는 선전적[22]) 열정 등이 나타났다. 또한 등장인물에는 용감한 영웅, 용감한 배신자, 사라센 거인, 아름다운 사라센 공주 등의 유형이 나타났으며, 보르도의 위옹에서 처음 등장하는 요정 오베론과 몽토방의 르노에서 처음 등장하는 마법의 바야르와 같이 시인들이 고안한 등장인물도 나타났다. 곧 자기 패러디의 요소가 나타났으며, 심지어 존경받는 샤를마뉴조차도 샤를마뉴의 순례에서 가벼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chanson de gestefro서사 구조는 헨리 비트만에 의해 니벨룽겐의 노래와 크리올어 전설의 서사 구조와 비교되었는데, 이는 유진 도프만[25]과 장피에르 튀소[26]의 연구에서 처음 개발된 공통 서술소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24]

3. 1. 프랑스 이야기

"무훈시"의 전통적인 주제는 프랑스 이야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아서 왕과 그의 기사들을 다루는 브리튼 이야기, 즉 로망스와 트로이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카이사르의 생애와 그의 일부 제국 후계자들을 다루는 소위 로마 이야기와 구별된다.[20] 후자들은 기사도의 전형으로 중세적인 변형을 거쳤다.

무훈시는 고대 프랑스어로 쓰여졌으며, 종글뢰르가 읽고 상연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소재는 8세기 또는 9세기 프랑스사의 전설적인 사건(일부는 실제 사건)이다. 이는 무어인이나 사라센인과의 싸움으로 점철된 샤를 마르텔과 샤를마뉴, 루이 1세 시대였다.

3. 2. 핵심 주제

"무훈시"의 핵심 주제는 로망스와 구별되는데, 로망스가 "개인"의 역할을 탐구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과 달리, 공동체/집단(그들의 서사 영웅은 국가와 기독교의 운명에서 중요한 인물로 묘사됨)에 대한 비판과 찬양, 그리고 봉건제 관계와 봉사에 대한 복잡성을 표현하는 것이다.[21]

"무훈시"의 주제는 대중의 취향에 따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했다. 초기 "무훈시"의 위대한 전투와 역사적 용맹의 장면과 함께 다른 주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요소(돈, 도시 장면)와 새로운 궁정 문화의 요소(여성 캐릭터, 사랑의 역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3] 로망스에서 파생된 판타지와 모험 요소가 점차 추가되었다.[3] 거인, 마법, 괴물무슬림과 함께 적들 사이에 점점 더 자주 등장했다. 또한 십자군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방 모험의 요소가 증가했으며, 일련의 "무훈시"는 제1차 십자군의 사건과 예루살렘 왕국 초기의 사건을 재현한다.

이 시들은 다양한 등장인물 유형을 포함한다. 용감한 영웅, 용감한 배신자, 교활하거나 비겁한 배신자, 사라센 거인, 아름다운 사라센 공주 등의 레퍼토리가 있다. 장르가 성숙해지면서 판타지 요소가 도입되었다. 이 장르의 시인들이 고안한 등장인물 중에는 ''보르도의 위옹''에서 문학적으로 데뷔한 요정 오베론과 ''몽토방의 르노''에 처음 등장하는 마법의 바야르가 있다.

3. 3. 주제의 변화

"무훈시"의 주제는 대중의 취향에 따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 "무훈시"의 위대한 전투와 역사적 용맹의 장면과 함께 다른 주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요소(돈, 도시 장면)와 새로운 궁정 문화의 요소(여성 캐릭터, 사랑의 역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3] 로망스에서 파생된 판타지와 모험 요소가 점차 추가되었다.[3] 거인, 마법, 괴물무슬림과 함께 적들 사이에 점점 더 자주 등장했다.

십자군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방 모험의 요소가 증가했으며, 일련의 "무훈시"는 제1차 십자군의 사건과 예루살렘 왕국 초기의 사건을 재현했다. 14세기(백년 전쟁)의 갈등은 일부 "무훈시"(예: ''위그 카페의 노래'')에 새로운 서사적 정신과 민족주의적(또는 선전적[22]) 열정을 불어넣었다.[23]

이 시들은 다양한 등장인물 유형을 포함한다. 용감한 영웅, 용감한 배신자, 교활하거나 비겁한 배신자, 사라센 거인, 아름다운 사라센 공주 등의 레퍼토리가 있다. 장르가 성숙해지면서 판타지 요소가 도입되었다. 이 장르의 시인들이 고안한 등장인물 중에는 ''보르도의 위옹''에서 문학적으로 데뷔한 요정 오베론과 ''몽토방의 르노''에 처음 등장하는 마법의 바야르가 있다. 곧 자기 패러디의 요소가 나타났다. 심지어 존경받는 샤를마뉴조차도 ''샤를마뉴의 순례''에서 가벼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3. 4. 등장인물 유형

이 시들은 다양한 등장인물 유형을 포함한다. 용감한 영웅, 용감한 배신자, 교활하거나 비겁한 배신자, 사라센 거인, 아름다운 사라센 공주 등의 레퍼토리가 있다. 장르가 성숙해지면서 판타지 요소가 도입되었다. 이 장르의 시인들이 고안한 등장인물 중에는 ''보르도의 위옹''에서 문학적으로 데뷔한 요정 오베론과 ''몽토방의 르노''에 처음 등장하는 마법의 바야르가 있다. 곧 자기 패러디의 요소가 나타난다. 심지어 존경받는 샤를마뉴조차도 ''샤를마뉴의 순례''에서 가벼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23]

무훈시에 등장하는 캐릭터에는 극히 제한된 유형밖에 없다. 손을 바꾸고 품을 바꿔 등장하는 영웅, 두려움을 모르는 반역자, 교활하거나 겁이 많은 배신자, 사라센 거인, 아름다운 사라센 공주 등은 작품마다 소모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장르로서의 세련됨이 진행되면서, 판타지적인 요소가 도입되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시인들이 창작한 캐릭터 중에는 『유옹 드 보르도』에 처음 등장하는 요정오베론,『르노 드 몽토방』에 처음 등장하는 마법의 말 바야르 등이 포함된다. 셀프 패러디 요소도 곧 나타났다. 『샤를마뉴의 순례』에서는 위엄 있는 샤를마뉴조차 거리낌없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4. 형식

초기 무훈시는 10음절체의 시구에 유사운이 사용된 스탠자(레스)로 구성되었으며, 레스의 길이는 다양했다. 후기 무훈시는 단일운 스탠자로 만들어졌고, 각 행은 마지막 음절에서 동일한 운율을 가졌다. 또한, 시구의 길이가 10음절에서 프랑스 알렉산드린(12음절)로 바뀌었다.

4. 1. 운율

초기 ''무훈시''는 일반적으로 10음절로 된 행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같은 자음 연(''laisse''라고 함)으로 묶였다. 이 연들은 길이가 가변적이다.[1] 같은 자음은 마지막 강세 모음이 연 전체에서 동일하지만 마지막 자음은 행마다 다름을 의미한다.[1]

''롤랑의 노래''는 10음절 같은 자음 형태의 기법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 연의 같은 자음은 '''e'''이다.[1]

:소나무 아래, 장미 덤불 옆'''에'''

:금으로 만들어진 왕좌가 있'''네''':

:달콤한 프랑스를 다스리는 왕이 그곳에 앉'''아 있네'''.

:수염은 희고, 머리카락은 풍성'''하네'''.

:그는 훌륭한 태도와 긍지'''를 가졌네'''.

:누가 왕을 찾고 있다면, 그를 지적할 필요가 없'''네'''.

후기 ''무훈시''는 각 행의 마지막 음절이 연 전체에서 완전히 같은 운율을 이루는 단운율 연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10음절 대신 프랑스 알렉산드린 (12음절) 행을 사용하여 작곡되는 경향이 있었다.[1] (''비엔의 기라르''와 같은 일부 초기 ''무훈시''는 12음절 버전으로도 개작되었다).[1]

12음절 운율 형태의 예시는 십자군 연작의 ''레 체티프''의 시작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운율은 '''ie'''이다.[1]

:이제 코르바란은 시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도망'''간다''',

:그는 두 명의 왕만 데리고 '''간다'''.

:그는 페르시아 술탄의 아들 브로하다스'''를''' 데려간다.

:그는 용감한 마음을 가진 훌륭한 공작 고드프리에 의해 전투에서 깨끗한 칼'''로''' 죽임을 당했다.

:안티오크 앞에서, 초원'''에서'''.

이러한 형태의 운율은 고대 프랑스어 로맨스 (영웅 문학) (''로망'')에서 발견되는 형태와 실질적으로 달랐으며, 8음절 운율 짝구로 작성되었다.[1]

4. 2. 구술성과 공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무훈시를 접한 대중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다.[27] 귀족 가문도 예외는 아니어서, 12세기 말까지 대법원 구성원과 남부의 소규모 귀족 가문을 제외하고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28] 따라서 무훈시는 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술 매체였다.

초기 무훈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먼저 기록된 후 필사본으로 읽혔는지, 아니면 공연을 위해 암기되었는지,[30] 내용 일부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는지,[29] 아니면 완전히 즉흥적인 구술 공식 작문의 결과로 나중에 기록되었는지 등 다양한 추측이 존재한다. 양피지가 상당히 비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29]

학자들은 시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문해력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이들이 교양 있는 성직자였는지, 아니면 구술 전통 안에서 활동하는 문맹 광대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초기 무훈시에서 나타나는 행과 연의 두드러진 구술 시적 특성은 시인이 공연 중에 시를 구성하고 청중이 새로운 주제를 쉽게 이해하도록 도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무훈시의 암송 방식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시인, 음유시인, 또는 광대가 노래를 불렀다고 여겨진다.[30] 이들은 때때로 비엘이라는 활로 연주되는 중세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일부 필사본에는 광대가 주의를 요구하고, 노래를 멈추겠다고 위협하거나, 다음 날 계속하겠다고 약속하며, 돈이나 선물을 요구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29] 13세기 중반 무렵에는 노래가 암송으로 대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암송자는 시간당 약 1,000 구절을 부를 수 있었고,[31] 한 번의 공연은 1,000~1,300 구절로 제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7] 따라서 작품 전체를 공연하는 데 며칠이 걸렸을 수도 있다.[31] 12세기 후반부터 많은 무훈시가 10,000 구절 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예를 들어 ''아스프레몽''은 11,376 구절, ''콰트르 피스 아이몽''은 18,489 구절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가장 긴 작품을 모든 관객이 전부 들었을 가능성은 낮다.[32]

''롤랑의 노래''와 같은 시는 때때로 광장에서 불려 대중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지만,[33] 일부 비평가들은 무훈시를 대중 문학으로만 특징짓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34] 일부 무훈시는 귀족, 특권층, 전사 계급 등 특정 계층의 청중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35]

5. 주요 작품 목록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300여 개의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100편 이상의 무훈시가 존재한다.[5] 몇몇 인기 있는 무훈시는 여러 형태로 여러 번 기록되었다. 가장 초기의 무훈시는 모두 (다소) 익명으로 쓰였으며, 이후 많은 작품에는 작가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5]

1215년경, 베르트랑 드 바르쉬르오브는 그의 작품 《비엔의 기라르》의 서두에서 무훈시의 일반적인 주제 영역인 프랑스 소재를 세 개의 주기로 세분했는데, 이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36]

아래 목록은 베르트랑 드 바르쉬르오브의 주기에 따라 배열되었으며, 두 개의 추가 그룹과 어떤 주기에도 속하지 않는 마지막 무훈시 목록으로 확장되었다. 개별 무훈시의 범주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 ''고르몽 에 이젘바르''[56]
  • ''아미 에 아밀'' (속편: ''조르댕 드 블레'')
  • ''뵈브 드 앙스톤'' 관련 시:
  • ''도렐 에 베통'' (추정되는 고대 프랑스어 버전은 유실, 1200년경의 옥시탄어 버전을 통해 알려짐)
  • ''에가르 에 모랭''
  • ''에메르 르 세티프'' (유실된 ''샹송'')[57]
  • ''아이올'' (13세기)[58]
  • ''테세 드 쾰른'' (아마도 로맨스)
  • ''앙티오크 포위''

5. 1. 왕의 무훈시 (Geste du roi)

베르트랑 드 바르쉬르오브가 분류한 세 가지 주기 중 하나인 왕의 무훈시는 샤를마뉴 또는 그의 직계 후손들을 주요 등장인물로 삼는다.[67] 이 주기의 주된 주제는 기독교의 옹호자로서 왕의 역할이며,[67] 최초로 기록된 무훈시인 롤랑의 노래를 포함한다.[67]

  • 롤랑의 노래 (옥스퍼드 텍스트 기준, c. 1100년, 가장 오래된 기록본)[67]: 오크어의 ''Ronsasvals[39]'', 중고 독일어의 ''Ruolandes liet'', 라틴어의 ''Carmen de Prodicione Guenonis'' 등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 샤를마뉴의 순례 (''샤를마뉴의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 여행''): 샤를마뉴와 그의 기사들의 허구적인 원정을 다룬다. (c. 1140; 15세기의 두 번의 재작업)[67]
  • 피에라브라스 (c. 1170)[40][41]
  • 아스프레몽 (c. 1190): 후기 버전은 안드레아 다 바르베리노의 ''아스프라몬테''의 기반을 형성했다.[67]
  • 안세이스 드 카르타주 (c. 1200)[67]
  • 장 보델의 ''샹송 드 센'' 또는 "작센인의 노래" (c. 1200)[67]
  • ''위옹 드 보르도'': 원래 c. 1215–1240, 약간 더 후대의 필사본에서 알려졌다.[67] "전편"과 4개의 속편이 나중에 추가되었다.[67]
  • 오베론[67]
  • ''샹송 데클라르몽드''[67]
  • ''클라리스 에 플로랑''[67]
  • ''이드 에 올리브''[67]
  • ''고댕''[67]
  • ''개동'' (c. 1230)[42]
  • 장 드 랑송 (1239년 이전)[43]
  • 아데네 르 루아의 ''베르트 오 그랑 피에'' (c. 1275) 및 후기 프랑코-이탈리아 재작업[67]
  • 아데네 르 루아의 ''레장팡스 오지에'' (c. 1275): 오지에 르 다누아에 관한 내용이다.[67]
  • ''앙트레 다스파뉴'' (c. 1320)[44]
  • ''위그 카페'' (c. 1360)[67]
  • 단일 필사본으로 알려진 ''갈리앙 리 레스토레'' (1490년경)[45]
  • ''아이캥'' 또는 ''아캥''[46]
  • ''오튀엘'' 또는 ''오티넬''[67]
  • ''마네''[67]
  • ''바쟁''[67]
  • 레임베르 드 파리의 ''오지에 르 다누아''[47]
  • ''기 드 부르고뉴''[48]
  • ''마카르'' 또는 ''라 샹송 드 라 렌느 세빌''[67]
  • ''위옹 도베르뉴'': 1341년부터 1441년까지의 이탈리아에서 나온 4개의 버전으로 존재하는 ''샹송'' ([http://Huondauvergne.org Huondauvergne.org]). 프랑스어 버전이 있었는지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다.[49] 영웅은 기라우트 드 카브레라의 ''앙세냐멘''에 서사시 영웅으로 언급되며, ''마네''에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5. 2. 가린 드 몽글란의 무훈시 (Geste de Garin de Monglane)

오렌지의 기욤을 중심으로 하는 이 ''샹송''은 전형적으로 상속자가 아닌, 무슬림과의 전투를 통해 토지와 영광을 추구하는 젊은 기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5]

  • ''기욤의 노래'' (1100년경)
  • ''루이의 대관'' (1130년경)
  • ''님므의 마차'' (1140년경)
  • ''오렌지 공략'' (1150년경), 1122년 이전에 유실된 판을 재작업
  • ''알리스캉'' (1180년경), 여러 후기 버전 존재
  • 브리의 그랑도르의 ''로키퍼 전투'' (1170년경)
  • 브리의 그랑도르의 ''르 모니아주 레누아르'' (1170년경)
  • 허버트 르 듀크 오브 담마르탱의 ''풀크 드 캉디'' (1170년경)
  • ''풀리아의 시몽'' 또는 "아풀리아의 시몽", 허구의 동방 모험담[50]
  • 바르쉬르오브의 베르트랑의 ''나르본의 아이메리'' (12세기 후반/13세기 초)
  • 바르쉬르오브의 베르트랑의 ''비엔의 기라르'' (12세기 후반/13세기 초); 후기에 ''에르노 드 볼랑드''와 ''레니에르 드 젠느''와 함께 더 짧은 버전으로도 발견됨[51]
  • ''가린 드 몽글란느의 유년기'' (15세기)
  • ''가린 드 몽글란느'' (13세기)
  • ''에르노 드 볼랑드''; 14세기의 단편과 후기 버전[51]
  • ''레니에르 드 젠느''[51]
  • ''기욤의 유년기'' (1250년 이전)
  • ''나르보네'' (1205년경), ''아이메리 자녀들의 분과'', ''나르본 공성전'' 2부
  • ''비비앙의 유년기'' (1205년경)[52]
  • ''비비앙의 서약'' 또는 ''라 슈발러리 비비앙''
  • ''바르바스트르 공성전'' (1180년경)
  • 아데네 르 루아의 ''코마르키스의 보봉'' (1275년경), ''바르바스트르 공성전''의 재작업
  • ''기베르 드 안드레나'' (13세기)
  • ''코르드 공략'' (13세기)
  • ''나르본의 아이메리의 죽음'' (1180년경)
  • ''레니에르의 유년기''
  • ''르 모니아주 기욤'' (1160–1180)[53]

5. 3. 돈 드 마이앙스의 무훈시 (Geste de Doon de Mayence)

돈 드 마이앙스의 제스트(Geste de Doon de Mayence프랑스어)는 왕권에 대한 대역과 모반을 다루고 있다. 어떤 작품도 반역자의 패배로 반란은 종결되고, 반역자는 후회한다.[5]

  • 지라르 드 루시용 (1160년 - 1170년) - 주인공 지라르는 지라르 드 비엔에도 등장하며, 그 안에서는 가랭 드 몽글랑의 아들로 묘사된다. 속편이 있다.
  • * 오베리 르 부르갱
  • 르노 드 몽토방 또는 아몽의 네 아들 (12세기 말)
  • 라울 드 캉브레 - 돈 드 마이앙스 무훈시군에서 가장 유명한 무훈시. 아마도 베르톨레라는 랭의 트루베르가 시작했을 것이다. 12세기 말의 버전이 현존한다.
  • 돈 드 마이앙스 (13세기 중반)
  • 고프리
  • 돈 드 낭테유 (12세기 후반. 현재 알려진 것은 13세기의 버전에서 파생된 단편뿐.[54]) 몇몇 속편이 있다.
  • * 아예 다비뇽 (1195년에서 1205년경의 작품) - 이 가공의 여주인공은 돈 드 마이앙스의 손자, 돈 드 낭테유의 아들인 가르니에 드 낭테유의 첫 번째 아내이다. 가르니에가 죽은 후, 사라센인 가노르와 재혼한다.
  • * 기 드 낭테유 (1207년경) - 인기가 많아, 랭보 드 바케라스가 이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이 가공의 영웅은 아예 다비뇽의 아들이며, 속편의 형태를 취한다.
  • * 트리스탕 드 낭테유 - 이 가공의 영웅은 기 드 낭테유의 아들이다.
  • * 파리즈 라 뒤세스 - 이 가공의 여주인공은 아예 다비뇽의 딸이다. 프랑스 추방 후, 후에 헝가리의 왕이 되는 아들 위그를 낳는다.[55]
  • 모지 드 에그레몽
  • 비비앙 라마슈르 드 몽브랑

5. 4. 로렌 주기 (Lorraine cycle)

로렌 지방의 전통적인 역사적 서사시적 사건을 다루는 지방 주기이다. 현재 알려진 것은 후기 형식이며, 분명히 『위옹 드 보르도』나 『데인인 오지에』에서 세부 사항을 차용했다.[67]

  • Garin le Lorrain|로렌인 가랭프랑스어
  • Hervis de Metz|에르비스 드 메스프랑스어
  • Gerbert de Metz|게르베르 드 메스프랑스어
  • Anseïs fils de Girbert|질베르의 아들 안세이스프랑스어

5. 5. 십자군 연대기 (Crusade Cycle)


  • 앙티오크의 노래(Chanson d'Antioche): 리샤르 르 펠랭이 1100년경에 시작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는 그랑도르 드 두에가 1180년경에 작성했다. 14세기에 확장판이 만들어졌다.[5]
  • 레 셰티프(Les Chétifs): 은자 피에르가 이끈 가난한 십자군 참가자들의 모험담(대부분 허구)을 다룬다. 주인공은 아르팡 드 부르주이다. 이 에피소드는 1180년경 그랑도르 드 두에가 《앙티오크의 노래》를 개정하면서 삽입되었다.
  • 마타브룬(Matabrune): 마타브룬과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증조부 이야기를 다룬다.
  • 백조의 기사(Le Chevalier au Cigne):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조부 엘리아스 이야기다. 원본은 1192년경에 만들어졌으며, 이후 확장되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 레 장팡스 고드프루아(Les Enfances Godefroi) 또는 "고드프루아의 유년기 업적":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그의 세 형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다룬다.
  • 예루살렘의 노래(Chanson de Jérusalem)
  •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죽음(La Mort de Godefroi de Bouillon):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고드프루아를 독살했다는 비역사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 보두앵 드 세부르(Baudouin de Sebourg) (14세기 중반)
  • 바타르 드 부용(Le Bâtard de Bouillon) (14세기 초)

6. 영향과 유산

무훈시는 프랑스에서 더 이상 제작되지 않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일련의 신화를 창조했다.[61] 19세기까지 롤랑과 샤를마뉴의 노래는 아서 왕과 성배 이야기처럼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테마에 기초한 이탈리아 서사시는 주요 문학 작품으로 여겨졌다. "프랑스물"이 "브르타뉴물(아서 왕 이야기)"에 의해 그 빛을 잃은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6. 1. 각색 및 번역

프랑스 ''샹송''은 고대 스페인의 ''칸타르 데 헤스타'' 전통을 낳았다. ''무훈시''는 남부 (오크어 사용) 프랑스에서도 각색되었다. ''샹송'' 지라르 드 루시용 (12세기)의 세 개의 현존하는 필사본 중 하나는 오크어로 되어 있으며,[61] 샤를마뉴와 롤랑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두 작품, ''롤랑 아 사라고사''[62]와 ''론사스발스''(12세기 초)도 마찬가지이다.[63]

중세 독일에서 ''무훈시''는 로맨스와 달리 독일 궁정 청중의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롤랑의 노래''는 프랑스 서사시 중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된 작품 중 하나였지만 (콘라트 데어 프파페가 ''롤란트리트''로 번역, c.1170), 독일 시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는 13세기 서사시 ''빌레할름''(78개의 필사본으로 구성됨)을 오렌지 공 윌리엄의 이야기인 ''알리상''을 바탕으로 했다. 13세기에 샤를마뉴의 순환에서 번역된 다른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무훈시''는 독일어로 각색되지 않았으며, 이는 서사시가 로맨스가 전문적으로 묘사하는 이상적인 기사도, 사랑, 궁정 사회의 장면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64]

13세기 후반, 특정 프랑스 ''무훈시''는 고대 노르드 ''칼라마그누스 사가''로 각색되었다.

이탈리아에는 샤를마뉴의 스페인에서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14세기 텍스트가 몇 개 있는데, 여기에는 프랑코-베네치아어로 된 ''무훈시''인 ''에트레 데스파냐''(c.1320)[65], 그리고 비슷한 이탈리아 서사시인 ''라 스파냐''(1350–1360)가 오타바 리마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프랑스의 소재"는 이탈리아 로맨틱 서사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루이지 풀치의 ''모르간테''(c.1483),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의 ''올란도 인나모라토''(1495),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1516), 토르콰토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1581)은 모두 프랑스 서사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이탈리아 서사시의 사건과 플롯 장치는 나중에 에드먼드 스펜서의 ''요정 여왕''과 같은 영문학 작품의 중심이 되었다. 스펜서는 기독교가 이슬람을 이기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형식을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교를 이기는 이야기를 전달하도록 적용하려 했다.

웨일스의 시인, 화가, 군인, 조각가인 데이비드 존스의 모더니즘 시 "괄호 안에서"는 동시대 평론가 허버트 리드에 의해 "옛 무훈시와 연관시키는 영웅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6. 2. 현대 문학과의 연관성

무훈시는 프랑스에서 더 이상 제작되지 않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일련의 신화를 창조했다.[61] 19세기까지 롤랑과 샤를마뉴의 노래는 아서 왕과 성배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테마에 기초한 이탈리아 서사시는 주요 문학 작품으로 여겨졌다. "프랑스물"이 "브르타뉴물(아서 왕 이야기)"에 의해 그 빛을 잃은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토르콰토 타소이탈리아어 서사시 『리날도』(1562년), 보이아르도의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1495년),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1516년)와 같은 작품은 처음에 무훈시에 등장한 샤를마뉴의 12용사 전설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거기에 묘사된 사건이나 줄거리는 에드먼드 스펜서의 『요정 여왕』과 같은 영국 문학 작품의 핵이 되었다. 스펜서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승리 대신 이슬람교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이야기하기 위해 창안된 형식을 적용하려 시도했다.

한편, 독일의 시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는 기욤 드 제론의 생애를 미완의 서사시로 78권의 사본으로 구성된 『빌헬름』(13세기)의 기초로 삼았다. 또한 무훈시는 아이슬란드사가 『Karlamagnús』에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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