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히사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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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히사야스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장남으로, 시마즈 요시히사와 요시히로에게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규슈 정벌 이후 도요토미 씨의 인질이 되었으며, 오다와라 정벌과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1593년 조선 거제도에서 21세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그의 동생 시마즈 다다쓰네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히사야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백부 시마즈 요시히사는 와카를 지었고, 히사야스가 아꼈던 고양이 '야스'에 대한 일화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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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3년 출생 - 도이 도시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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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미쓰는 사쓰마 번 다이묘의 아들로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쓰마 번의 실권을 장악하고 공무합체를 추진하며 중앙 정계에 개입, 보신전쟁을 지지했으나 메이지 유신 후 신정부의 개혁 정책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 오슈 시마즈씨 -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규슈 통일과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등 굵직한 사건들에 참여했으며 뛰어난 무용과 지략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임진왜란 침략에 대한 책임 논란도 있는 인물이다. - 1593년 사망 - 김성일 (15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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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야스 | |
---|---|
기본 정보 | |
씨명 | 시마즈 씨 |
이름 | 시마즈 히사야스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출생 | 덴쇼 원년 (1573년) |
사망 | 분로쿠 2년 9월 8일 (1593년10월 2일) |
개명 | 만주마루, 히사야스 |
이명 | 또이치로 |
시호 | 없음 |
신호 | 신순엄무웅명 |
계명 | 일유서참대선정문, 황덕사전 |
묘소 | 후쿠쇼 사 |
관위 | 없음 |
막부 | 없음 |
주군 | 없음 |
번 | 없음 |
씨족 | 시마즈 씨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시마즈 요시히로 어머니: 소노다 사네아키라의 딸, 실창부인 (광세부인) |
형제자매 | 쓰루주마루, 히사야스, 다다쓰네, 만치요마루, 다다키요, 딸: 오야지, 딸: 오시타 (이주인 다다자네의 부인) |
배우자 | 기주 (시마즈 요시히사의 3녀) |
자녀 | 없음 |
특기 사항 | |
없음 | 없음 |
2. 생애
히사야스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장남으로, 백부 시마즈 요시히사와 부친 요시히로에게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규슈 정벌 이후 도요토미 씨의 인질이 되었고 휴가에 영지가 주어졌다. 오다와라 정벌과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나, 1593년 조선 거제도에서 병사했다. 향년 21세였으며 3명의 측근이 순사했다. 이후 가독은 그의 동생인 다다쓰네가 상속받았다.[3]
백부 요시히사는 히사야스를 조문하기 위해 "나무아미타불"을 붙인 와카를 읊었다.[3] 호리노우치 히사노리와 히라야마 타다쓰구는 히사야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산복이 되어 육십여 주를 순회하며 법화경을 납입했다.
2. 1. 규슈 정벌과 인질 생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히사야스는 휴가 모로카타군에 영지를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도요토미 씨의 인질이 되었다.[3] 일찍부터 백부인 요시히사, 부친 요시히로로부터 후계자로 주목받아 오다와라 정벌과 임진왜란(문록의 역)에 참전했다.[3]2. 2. 오다와라 정벌과 임진왜란 참전
히사야스는 규슈 정벌 후 일시적으로 도요토미 씨의 인질이 되었고 휴가 영지가 주어졌다. 일찍부터 백부인 시마즈 요시히사, 부친 요시히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어 오다와라 정벌과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1593년 조선 거제도에서 병사했으며, 향년 21세였으며 3명의 측근이 순사했다. 이후 가독은 그의 동생인 다다쓰네가 상속받았다.2. 3. 조선에서의 죽음
1593년 10월 2일(음력 9월 8일) 조선 거제도(당도)에서 2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3] 그의 죽음으로 3명의 가신이 순사했다. 백부 시마즈 요시히사는 히사야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나무아미타불"을 붙인 와카를 읊었다.[3] 호리노우치 히사노리와 히라야마 타다쓰구는 히사야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산복이 되어 육십여 주를 순회하며 법화경을 납입했다.3. 애묘(愛猫) 야스
히사야스는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시마즈 요시히로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데려간 7마리의 고양이 중 한 마리를 귀여워하며 '야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야스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물결 무늬가 있었다. 이소 정원 내 묘신 신사에는 이 7마리의 고양이가 모셔져 있다. 에마에는 흰색과 노란색 고양이가 그려져 있으며, 야스의 무늬를 나타내고 있다.
4. 시마즈 요시히사의 애도 와카
시마즈 요시히사는 백부로서 히사야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나무아미타불" 각 글자를 머리에 붙인 와카 6수를 읊었다. 이 와카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히사야스에 대한 슬픔과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다.[4]
4. 1. 와카 내용
- '''남''': 울지 않는 벌레의 울음소리는 서리를 기다리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말라가는 풀밭이여.
- '''무''': 자줏빛 구름 속에 숨은 달 그림자는 서쪽에서나 맑게 갤까, 그 행방을 알 수 없네.
- '''아''': 비는 다만 하늘에 알려지지 않는 습관이려나, 근심스러운 때마다 소매에 걸리네.
- '''미''': 본 꿈의 흔적은 덧없는 잠결이로구나, 베갯머리에 종소리만이 들릴 뿐이네.
- '''타''': 찾아가서 들어갈 것을, 산사의 영원한 가르침의 깊은 마음을.
- '''불''': 붓을 오른쪽에, 활을 왼쪽에 가지고 노는 사람의 마음, 이름에 남으리라.
참조
[1]
서적
戦国史料叢書6 島津史料集
[2]
서적
戦国史料叢書6 島津史料集
[3]
서적
島津中興記
青潮社
1979
[4]
서적
猫は犬より働いた
柏書房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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