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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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잔은 1961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갈색 말로, 일본 경마 역사상 최고의 경주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본 삼관 경주를 모두 우승한 두 번째 말이자, 일본의 5대 주요 경주에서 모두 우승한 최초의 말이다. 1964년에는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으며,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천황상(가을)에서 우승하며 타이틀을 방어했다. 신잔은 씨수말로서도 성공하여, 미호 신잔을 포함한 여러 중상 우승마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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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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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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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종 | 서러브레드 |
성별 | 수말 |
털색 | 녹모 |
출생 | 1961년 4월 2일 |
사망 | 1996년 7월 13일 (35세 몰, 구 36세) |
국적 | (홋카이도 우라카와정) |
혈통 | |
아비 | 힌도스탄 |
외조부 | 하야타케 |
어미 | 하야노보리 |
경력 | |
마주 | 하시모토 고키치 |
조교사 | 다케다 분고 (교토) |
마방 | 나카오 겐타로 |
생산자 | 마쓰하시 요시마쓰 |
성적 | |
총 전적 | 19전 15승 |
총 상금 | 5438만 엔 |
수상 | |
주요 수상 | 게이슈사상 연도 대표마 (1964년, 1965년) 최우수 4세 수말 (1964년) 최우수 5세 이상 수말 (1965년) 현창마 (1984년 선출) |
주요 우승 | |
클래식 삼관 | 고월상 (1964년) 도쿄 우준 (1964년) 국화상 (1964년) |
기타 우승 | 스프링 스테익스 (1964년) 다카라즈카 기념 (1965년) 메구로 기념 (가을) (1965년) 천황상 (가을) (1965년) 아리마 기념 (1965년) |
기념 | |
기타 | 교토 경마장 신잔 기념 동상 교토 경마장 내 위치 |
2. 생애
신잔은 요시마츠 마츠하시가 생산한 갈색 말로, 아일랜드 더비 우승마 힌두스탄의 자손이었다.[1] 1961년 4월 2일 홋카이도 우라카와정의 마쓰하시 요시마쓰 목장에서 태어났으며,[6] 혈통명은 "마쓰카제"였다.[7] 어미 하야노보리는 1930년대에 일본으로 수입된 아일랜드 암말 뷰티풀 드리머의 증손녀로, 그녀의 다른 후손으로는 일본 클래식 우승마인 카즈요시, 지츠 호마레, 하쿠료, 메이지 히카리가 있었다.[1]
생후 2개월 때 조교사 다케다 분고가 마쓰카제(신잔)를 보고 풍부한 골량과[8] 외조부인 투르누솔의 특징을 지녔다고 판단하여 즉시 구매를 결정했다.[7] 마쓰하시 목장은 350만 엔을 제시했지만, 협상 끝에 320만 엔에 거래되었다.[7] 이후 나고야에서 운송 회사를 경영하던 하시모토 코키치가 마쓰카제를 소유하게 되었고,[7] 다케다는 손자 구리타 신이치[10]의 이름을 따서 "신잔"으로 명명했다.[134]
다케다는 마쓰카제가 소규모 목장에서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아[11] 1961년 가을에 오기후시 목장으로 이동시켜 육성했다.[7] 신잔은 집단 운동에서 항상 뒤를 따라다녔지만 결코 지치지 않는 특징을 보였고, 육성 기간 동안 컨디션이 나빠지는 일도 없었다.[13] 1962년 11월, 교토 경마장의 다케다 마방에 입사했다.[7]
조교사 나이토 시게하루에 따르면, 하시모토 코키치가 자금 문제로 힌두스탄의 산구 2마리 중 1마리를 팔고 싶어했고, 그중 하나가 신잔이었다. 나이토는 신잔의 외모가 더 낫다고 판단하여 구매를 희망했지만, 다케다 분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신잔은 일반적으로 전후 최고의 일본 경주마로 여겨졌으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 되었다.
그는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고, 1964년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8]
1963년 11월 3일에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신마전에 평판이 좋았던 관동마 우메노치카라가 출주하기 때문에 데뷔를 1주일 늦췄다.[7] 11월 10일, 교토 경마장에서 열린 신마전(잔디 1200미터)에서 데뷔하여, 3코너에서 선두로 나서 그대로 2착에 4마신 차를 벌리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8] 그 후에도 연승을 거듭하여, 당시 간사이 3세 선수권 경주인 한신 3세 스테이크스에 출전이 가능했지만, 다케다 마방에서는 프리마돈나와 온워드 세컨드가 출주하였고, 신잔은 출전을 포기하게 되어[14] 3세 중거리 특별 경주에 출전하여 3연승을 달성했다.[7]
신잔은 일반적으로 전후 최고의 일본 경주마로 여겨졌으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 되었다.[8]
그는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고, 1964년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
1월에 오픈을 따내며 4연승을 달성했다.[8] 하지만, 지금까지의 로테이션은 일류마와의 대전을 피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츠키상 전에 신잔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도쿄 경마장에서 열리는 스프링 스테이크스[15]에 출주했다. 경주 전 조교의 움직임이 좋지 않았던 신잔은 14두 중 6번 인기였으며, 다케다도 도쿄 경마장에 가지 않았다.[16] 경주에서는 과거 다케다가 대전을 피했던 우메노치카라나, 야요이상에서 우승한 토키노 퍼레이드 등을 물리치고 우승했다.[8]
스프링 스테이크스 후, 하시모토는 신잔을 우에다 세이지로에게 매각하려 했지만, 다케다가 "팔 거면 나를 죽이고 나서 해라"라며 거절했다.[16]
신잔은 일본 경마 역사상 최고의 경주마 중 하나로 꼽히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다.
1964년에 세인트 라이트 이후 23년 만에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으며, 그 해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30]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
사츠키상에서는 단승 1번 인기를 얻어 선행 작전을 펼치며, 직선 입구에서 선두로 나서 맹추격하는 아스카를 4분의 3마신 차이로 따돌리고 6연승으로 첫 관문을 통과했다.[17]
클래식 두 번째 관문인 도쿄 유슌(일본 더비)을 앞두고 출전한 오픈 경주에서는 야마닌 시로에게 머리 차이로 패하며 첫 패배를 기록했다.[18]
도쿄 유슌에서는 1번 인기를 얻었고,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바깥쪽으로 치고 나가, 안쪽에서 따라붙던 우메노치카라에게 잠시 역전을 허용했지만, 채찍을 휘두르자 다시 따라잡아 우승했다. 우승 타임 2분 28초 8은 당시 경주 사상 2위의 기록이었다.[20]
국화상을 앞두고 여름 더위로 컨디션 난조를 겪었으나, 타케다의 노력으로 컨디션을 회복했다. 10월 오픈 경주와 교토 신문배에서 연이어 2착에 머물렀지만, 11월에 들어 컨디션이 좋아졌다.[26] 국화상에서는 2번 인기였으나,[27] 코사카 이와오가 "신잔, 어쩌다 삼관은 이제 안 되는 건가"라고 말할 정도로[28][29] 추격 타이밍을 늦추고, 직선에서 일시에 스퍼트하여 우메노치카라를 제치고 우승, 삼관을 달성했다.[30]
이 국화상 레이스는 유료 입장객 수 40660명, 매출 3억 9402만 4200엔으로, 교토 경마장의 이전 기록을 크게 갱신했다.
삼관 달성 후, 피로가 풀리지 않아 아리마 기념 출전을 회피했다.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31][32]
당초 진영은 산케이 오사카배를 거쳐 천황상 (봄)에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발굽 염증으로 인한 식욕 저하와 요통으로 인해 천황상 (봄) 출전을 회피했다. 다케다는 계획을 재검토하여 오픈 경주를 거쳐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하고, 가을까지 휴양하기로 결정했다.
신잔은 오픈 경주에 두 번 출전(모두 우승)한 뒤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 팬 투표 1위를 차지했다. 불량 마장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레이스에서 시종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며 바리모스니세이를 물리치고 승리했다.[33]
여름은 교토 경마장에서 보냈으며, 이른 단계부터 얼음 기둥으로 마방을 차갑게 하는 등 충분한 대책을 실시하여 여름 더위를 먹지 않았다.[34][35]
가을에는 한신 경마장 오픈 경주에서 우승 직후, 말 인플루엔자 만연으로 경주마 이동 금지령이 내려져 메구로 기념에 출전, 63킬로그램의 짐량에도 불구, 우승했다.[36][37]
천황상(가을)에서는 미하르카스가 대도주를 펼쳤지만, 신잔은 직선에서 제치고 우승했다. 쿠리타는 첫 천황상 우승에 눈물을 보였다.[38] 신잔의 단승 지지율은 78.3퍼센트였고[39], 단승 배당은 100엔 원금 반환이었다. JRA의 GI급 경주에서 단승 100엔 원금 반환은 이 외에 5례밖에 없다.[40]
이후 평지 오픈 경주를 1전 치르고, 아리마 기념에 출전, 단승 오즈 1.1배의 압도적인 1번 인기였다.[41] 전년 3위였던 인기 투표도 1위, 득표수 26,853표는 이전 기록을 40% 이상 갱신, 1978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신잔은 제4코너에서 미하르카스에 따라붙었지만, 미하르카스는 신잔에게 마장 상태가 좋지 않은 안쪽 코스를 달리게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그러나, 신잔은 더 바깥쪽으로 돌아 미하르카스를 제치고 우승했다. 이때 텔레비전 카메라의 시야에서 신잔이 사라져 "신잔이 사라졌다!"라고 실황되었다.[42] (제10회 아리마 기념 참조)
마츠모토 요시노리는 "신잔이 바깥으로 돌라고 말했다"라고 언급했다.[43] 마츠모토는 3, 4코너 중간 지점에서 앞선 말들이 지쳐 가가 다케미의 말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해, 4코너 입구에서 바깥으로 밀려났지만, 강하다고 믿었기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44] 하인이었던 다케다는 신잔의 5관 달성에 "승리하여 돌아오는 고삐에 5관의 해를 아쉬워한다"라는 구절을 읊었다.[45]
신잔은 일본에서 성공적인 씨수말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자손은 미호 신잔(ミホシンザン)으로, 일본 2,000 기니, 일본 세인트 레저, 그리고 천황상 (봄)을 우승했다.[55]
1961년 2월 25일, 야마자키역에서 화물 열차를 타고 홋카이도 히다카 호로베츠역에 도착하여 다니가와 코이치로가 대표를 맡고 있는 다니가와 목장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우라카와정에서는 마을을 대표하여 환영회가 열렸고, 중심가에서는 타케다, 쿠리타가 참가하는 퍼레이드가 진행되었다.[49]
당시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씨수말의 인기가 높았고, 국산 씨수말은 경시되고 있었으며, 다니가와가 신잔의 신디케이트 결성을 시도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50][51] 첫해에는 씨수료가 20만 엔으로 설정되었다. 다니가와는 수태가 확인된 후 지불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39마리의 암말을 모았다.[51] 3년차까지는 다니가와 목장이 있는 우라카와 지역의 목장, 다니가와의 지인이나 친척 목장의 암말이 중심이었다. 일류라고 할 수 있는 암말은 1965년 국화상 우승마 다이코우터의 어미, 다이안케이 뿐이었다.[51] 1967년 2월 27일, 다니가와 목장에서 첫 신잔산 자마가 탄생했다.[51][52]
2년차의 자마 싱군이 1972년 킨샤치상, 아사히 챌린지컵을 제패하며 자마 첫 번째 중상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3년차에는 스가노호마레, 신잔미사키, 4년차에는 실버랜드, 부루스이쇼 등 여러 중상 우승 자마가 나타났다.[53] 1971년까지는 수입 씨수말이 씨수말 리딩 20위를 독점했지만, 이듬해인 1972년에는 17위에 올랐다. 이후 1978년에는 5위까지 도달했고, 1983년까지 20위 이내를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1972년부터 1980년에 아로우 익스프레스에게 추월당할 때까지 국산 씨수말의 으뜸 자리를 지켰다.[53] 라이터 야마가와 타쿠야는 신잔의 활약으로 국산 씨수말이 재평가되어 아로우 익스프레스나 토쇼 보이의 활약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54]
1981년에 미나가와만나가 국화상에서 우승했다. 이 시점에서 신잔은 고령이었기에 미나가와만나는 "신잔 마지막의 거물"이라고 불렸지만, 그 후 대표적인 자마인 2관마 미호신잔이 등장했다.
1987년에 수태 능력 저하로 씨수말에서 은퇴했다. 최종적으로 자마의 중상 승리 수는 49승에 달했다.[55] 또한, 1969년 - 1992년에는 자마 24년 연속 승리 기록을 세웠다. 이것은 나중에 노던 테이스트가 갱신할 때까지 일본 최장 기록이었다. 은퇴 후에는 타니카와 스터드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996년 7월 13일 늙어 죽었다. 그는 일본에서 기록된 가장 오래 산 순종 경주마이다. 사후에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신잔의 무덤은 홋카이도 우라카와군 우라카와초의 타니카와 스터드에 있으며, 이 스터드에는 신잔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잔은 일본에서 성공적인 씨수말이었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자손은 미호 신잔(ミホシンザン)으로, 일본 2,000 기니, 일본 세인트 레저, 그리고 덴노상(봄)을 우승했다.
1987년에 종마에서 은퇴한 후 타니카와 스터드에서 여생을 보냈다. 만년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이빨도 모두 잃었다. 1994년 2월 이후 신체적 쇠약이 두드러졌고, 1996년 7월 13일 오전 2시경 늙어 죽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3개월 11일로,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오래 산 순종 경주마였다.
사후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홋카이도 우라카와군 우라카와초의 타니카와 스터드에 묻혔으며, 이 스터드에는 신잔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잔은 1995년 11월 19일에 카네케야키가 기록한 서러브레드의 일본 최고령 기록을 경신했고, 1996년 5월 3일에는 타마츠바키가 가지고 있던 경주마의 일본 최고령 기록도 경신했다.
경주마로서의 기록은 2011년 6월 28일에 앵글로아랍 마리조이(경주마명: 스인후아니)에 의해 깨졌고, 서러브레드로서의 기록은 2014년 8월 26일에 샬롯(경주마명: 아로하마키요)에게 깨졌다. 중앙 경마 중상 우승마로서의 최고령 기록은 2019년 8월 15일에 마이넬 다비테에게 깨졌지만, 신잔은 여전히 GI급 경주 우승마 중 최고령이다.
2. 1. 유년 시절
신잔은 요시마츠 마츠하시가 생산한 갈색 말로, 아일랜드 더비 우승마 힌두스탄의 자손이었다.[1] 1961년 4월 2일 홋카이도 우라카와정의 마쓰하시 요시마쓰 목장에서 태어났으며,[6] 혈통명은 "마쓰카제"였다.[7] 어미 하야노보리는 1930년대에 일본으로 수입된 아일랜드 암말 뷰티풀 드리머의 증손녀로, 그녀의 다른 후손으로는 일본 클래식 우승마인 카즈요시, 지츠 호마레, 하쿠료, 메이지 히카리가 있었다.[1]생후 2개월 때 조교사 다케다 분고가 마쓰카제(신잔)를 보고 풍부한 골량과[8] 외조부인 투르누솔의 특징을 지녔다고 판단하여 즉시 구매를 결정했다.[7] 마쓰하시 목장은 350만 엔을 제시했지만, 협상 끝에 320만 엔에 거래되었다.[7] 이후 나고야에서 운송 회사를 경영하던 하시모토 코키치가 마쓰카제를 소유하게 되었고,[7] 다케다는 손자 구리타 신이치[10]의 이름을 따서 "신잔"으로 명명했다.[134]
다케다는 마쓰카제가 소규모 목장에서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아[11] 1961년 가을에 오기후시 목장으로 이동시켜 육성했다.[7] 신잔은 집단 운동에서 항상 뒤를 따라다녔지만 결코 지치지 않는 특징을 보였고, 육성 기간 동안 컨디션이 나빠지는 일도 없었다.[13] 1962년 11월, 교토 경마장의 다케다 마방에 입사했다.[7]
조교사 나이토 시게하루에 따르면, 하시모토 코키치가 자금 문제로 힌두스탄의 산구 2마리 중 1마리를 팔고 싶어했고, 그중 하나가 신잔이었다. 나이토는 신잔의 외모가 더 낫다고 판단하여 구매를 희망했지만, 다케다 분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 2. 경주마 시절
신잔은 일반적으로 전후 최고의 일본 경주마로 여겨졌으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 되었다.그는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고, 1964년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8]
1963년 11월 3일에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신마전에 평판이 좋았던 관동마 우메노치카라가 출주하기 때문에 데뷔를 1주일 늦췄다.[7] 11월 10일, 교토 경마장에서 열린 신마전(잔디 1200미터)에서 데뷔하여, 3코너에서 선두로 나서 그대로 2착에 4마신 차를 벌리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8] 그 후에도 연승을 거듭하여, 당시 간사이 3세 선수권 경주인 한신 3세 스테이크스에 출전이 가능했지만, 다케다 마방에서는 프리마돈나와 온워드 세컨드가 출주하였고, 신잔은 출전을 포기하게 되어[14] 3세 중거리 특별 경주에 출전하여 3연승을 달성했다.[7]
1월에 오픈을 따내며 4연승을 달성했다.[8] 하지만, 지금까지의 로테이션은 일류마와의 대전을 피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츠키상 전에 신잔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도쿄 경마장에서 열리는 스프링 스테이크스[15]에 출주했다. 경주 전 조교의 움직임이 좋지 않았던 신잔은 14두 중 6번 인기였으며, 다케다도 도쿄 경마장에 가지 않았다.[16] 경주에서는 과거 다케다가 대전을 피했던 우메노치카라나, 야요이상에서 우승한 토키노 퍼레이드 등을 물리치고 우승했다.[8]
스프링 스테이크스 후, 하시모토는 신잔을 우에다 세이지로에게 매각하려 했지만, 다케다가 "팔 거면 나를 죽이고 나서 해라"라며 거절했다.[16]
신잔은 일본 경마 역사상 최고의 경주마 중 하나로 꼽히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다.
1964년에 세인트 라이트 이후 23년 만에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으며, 그 해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30]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
사츠키상에서는 단승 1번 인기를 얻어 선행 작전을 펼치며, 직선 입구에서 선두로 나서 맹추격하는 아스카를 4분의 3마신 차이로 따돌리고 6연승으로 첫 관문을 통과했다.[17]
클래식 두 번째 관문인 도쿄 유슌(일본 더비)을 앞두고 출전한 오픈 경주에서는 야마닌 시로에게 머리 차이로 패하며 첫 패배를 기록했다.[18]
도쿄 유슌에서는 1번 인기를 얻었고,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바깥쪽으로 치고 나가, 안쪽에서 따라붙던 우메노치카라에게 잠시 역전을 허용했지만, 채찍을 휘두르자 다시 따라잡아 우승했다. 우승 타임 2분 28초 8은 당시 경주 사상 2위의 기록이었다.[20]
국화상을 앞두고 여름 더위로 컨디션 난조를 겪었으나, 타케다의 노력으로 컨디션을 회복했다. 10월 오픈 경주와 교토 신문배에서 연이어 2착에 머물렀지만, 11월에 들어 컨디션이 좋아졌다.[26] 국화상에서는 2번 인기였으나,[27] 코사카 이와오가 "신잔, 어쩌다 삼관은 이제 안 되는 건가"라고 말할 정도로[28][29] 추격 타이밍을 늦추고, 직선에서 일시에 스퍼트하여 우메노치카라를 제치고 우승, 삼관을 달성했다.[30]
이 국화상 레이스는 유료 입장객 수 40660명, 매출 3억 9402만 4200엔으로, 교토 경마장의 이전 기록을 크게 갱신했다.
삼관 달성 후, 피로가 풀리지 않아 아리마 기념 출전을 회피했다.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31][32]
당초 진영은 산케이 오사카배를 거쳐 천황상 (봄)에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발굽 염증으로 인한 식욕 저하와 요통으로 인해 천황상 (봄) 출전을 회피했다. 다케다는 계획을 재검토하여 오픈 경주를 거쳐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하고, 가을까지 휴양하기로 결정했다.
신잔은 오픈 경주에 두 번 출전(모두 우승)한 뒤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 팬 투표 1위를 차지했다. 불량 마장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레이스에서 시종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며 바리모스니세이를 물리치고 승리했다.[33]
여름은 교토 경마장에서 보냈으며, 이른 단계부터 얼음 기둥으로 마방을 차갑게 하는 등 충분한 대책을 실시하여 여름 더위를 먹지 않았다.[34][35]
가을에는 한신 경마장 오픈 경주에서 우승 직후, 말 인플루엔자 만연으로 경주마 이동 금지령이 내려져 메구로 기념에 출전, 63킬로그램의 짐량에도 불구, 우승했다.[36][37]
천황상(가을)에서는 미하르카스가 대도주를 펼쳤지만, 신잔은 직선에서 제치고 우승했다. 쿠리타는 첫 천황상 우승에 눈물을 보였다.[38] 신잔의 단승 지지율은 78.3퍼센트였고[39], 단승 배당은 100엔 원금 반환이었다. JRA의 GI급 경주에서 단승 100엔 원금 반환은 이 외에 5례밖에 없다.[40]
이후 평지 오픈 경주를 1전 치르고, 아리마 기념에 출전, 단승 오즈 1.1배의 압도적인 1번 인기였다.[41] 전년 3위였던 인기 투표도 1위, 득표수 26,853표는 이전 기록을 40% 이상 갱신, 1978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신잔은 제4코너에서 미하르카스에 따라붙었지만, 미하르카스는 신잔에게 마장 상태가 좋지 않은 안쪽 코스를 달리게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그러나, 신잔은 더 바깥쪽으로 돌아 미하르카스를 제치고 우승했다. 이때 텔레비전 카메라의 시야에서 신잔이 사라져 "신잔이 사라졌다!"라고 실황되었다.[42] (제10회 아리마 기념 참조)
마츠모토 요시노리는 "신잔이 바깥으로 돌라고 말했다"라고 언급했다.[43] 마츠모토는 3, 4코너 중간 지점에서 앞선 말들이 지쳐 가가 다케미의 말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해, 4코너 입구에서 바깥으로 밀려났지만, 강하다고 믿었기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44] 하인이었던 다케다는 신잔의 5관 달성에 "승리하여 돌아오는 고삐에 5관의 해를 아쉬워한다"라는 구절을 읊었다.[45]
2. 2. 1. 3세 (1963년)
신잔은 일반적으로 전후 최고의 일본 경주마로 여겨졌으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 되었다.그는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고, 1964년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
1963년 11월 3일에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신마전에 평판이 좋았던 관동마 우메노치카라가 출주하기 때문에 데뷔를 1주일 늦췄다.[7] 11월 10일, 교토 경마장에서 열린 신마전(잔디 1200미터)에서 데뷔하여, 3코너에서 선두로 나서 그대로 2착에 4마신 차를 벌리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8] 그 후에도 연승을 거듭하여, 당시 간사이 3세 선수권 경주인 한신 3세 스테이크스에 출전이 가능했지만, 다케다 마방에서는 프리마돈나와 온워드 세컨드가 출주하였고, 신잔은 출전을 포기하게 되어[14] 3세 중거리 특별 경주에 출전하여 3연승을 달성했다.[7]
2. 2. 2. 4세 (1964년)
신잔은 일반적으로 전후 최고의 일본 경주마로 여겨졌으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 되었다.[8]그는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고, 1964년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
1월에 오픈을 따내며 4연승을 달성했다.[8] 하지만, 지금까지의 로테이션은 일류마와의 대전을 피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츠키상 전에 신잔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도쿄 경마장에서 열리는 스프링 스테이크스[15]에 출주했다. 경주 전 조교의 움직임이 좋지 않았던 신잔은 14두 중 6번 인기였으며, 다케다도 도쿄 경마장에 가지 않았다.[16] 경주에서는 과거 다케다가 대전을 피했던 우메노치카라나, 야요이상에서 우승한 토키노 퍼레이드 등을 물리치고 우승했다.[8]
스프링 스테이크스 후, 하시모토는 신잔을 우에다 세이지로에게 매각하려 했지만, 다케다가 "팔 거면 나를 죽이고 나서 해라"라며 거절했다.[16]
2. 2. 3. 삼관 달성
신잔은 일본 경마 역사상 최고의 경주마 중 하나로 꼽히며, 일본 삼관을 포함한 일본의 5대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 최초의 말이다.1964년에 세인트 라이트 이후 23년 만에 일본 삼관을 달성한 두 번째 말이 되었으며, 그 해 일본 올해의 말로 선정되었다.[30]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
사츠키상에서는 단승 1번 인기를 얻어 선행 작전을 펼치며, 직선 입구에서 선두로 나서 맹추격하는 아스카를 4분의 3마신 차이로 따돌리고 6연승으로 첫 관문을 통과했다.[17]
클래식 두 번째 관문인 도쿄 유슌(일본 더비)을 앞두고 출전한 오픈 경주에서는 야마닌 시로에게 머리 차이로 패하며 첫 패배를 기록했다.[18]
도쿄 유슌에서는 1번 인기를 얻었고, 마지막 직선 코스에서 바깥쪽으로 치고 나가, 안쪽에서 따라붙던 우메노치카라에게 잠시 역전을 허용했지만, 채찍을 휘두르자 다시 따라잡아 우승했다. 우승 타임 2분 28초 8은 당시 경주 사상 2위의 기록이었다.[20]
국화상을 앞두고 여름 더위로 컨디션 난조를 겪었으나, 타케다의 노력으로 컨디션을 회복했다. 10월 오픈 경주와 교토 신문배에서 연이어 2착에 머물렀지만, 11월에 들어 컨디션이 좋아졌다.[26] 국화상에서는 2번 인기였으나,[27] 코사카 이와오가 "신잔, 어쩌다 삼관은 이제 안 되는 건가"라고 말할 정도로[28][29] 추격 타이밍을 늦추고, 직선에서 일시에 스퍼트하여 우메노치카라를 제치고 우승, 삼관을 달성했다.[30]
이 국화상 레이스는 유료 입장객 수 40660명, 매출 3억 9402만 4200엔으로, 교토 경마장의 이전 기록을 크게 갱신했다.
삼관 달성 후, 피로가 풀리지 않아 아리마 기념 출전을 회피했다.
2. 2. 4. 5세 (1965년)
신잔은 4세 때 아리마 기념, 다카라즈카 기념 그리고 천황상 (가을)에서 우승하며 올해의 말 타이틀을 방어했다.[31][32]당초 진영은 산케이 오사카배를 거쳐 천황상 (봄)에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발굽 염증으로 인한 식욕 저하와 요통으로 인해 천황상 (봄) 출전을 회피했다. 다케다는 계획을 재검토하여 오픈 경주를 거쳐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하고, 가을까지 휴양하기로 결정했다.
신잔은 오픈 경주에 두 번 출전(모두 우승)한 뒤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 팬 투표 1위를 차지했다. 불량 마장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레이스에서 시종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며 바리모스니세이를 물리치고 승리했다.[33]
여름은 교토 경마장에서 보냈으며, 이른 단계부터 얼음 기둥으로 마방을 차갑게 하는 등 충분한 대책을 실시하여 여름 더위를 먹지 않았다.[34][35]
가을에는 한신 경마장 오픈 경주에서 우승 직후, 말 인플루엔자 만연으로 경주마 이동 금지령이 내려져 메구로 기념에 출전, 63킬로그램의 짐량에도 불구, 우승했다.[36][37]
천황상(가을)에서는 미하르카스가 대도주를 펼쳤지만, 신잔은 직선에서 제치고 우승했다. 쿠리타는 첫 천황상 우승에 눈물을 보였다.[38] 신잔의 단승 지지율은 78.3퍼센트였고[39], 단승 배당은 100엔 원금 반환이었다. JRA의 GI급 경주에서 단승 100엔 원금 반환은 이 외에 5례밖에 없다.[40]
이후 평지 오픈 경주를 1전 치르고, 아리마 기념에 출전, 단승 오즈 1.1배의 압도적인 1번 인기였다.[41] 전년 3위였던 인기 투표도 1위, 득표수 26,853표는 이전 기록을 40% 이상 갱신, 1978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신잔은 제4코너에서 미하르카스에 따라붙었지만, 미하르카스는 신잔에게 마장 상태가 좋지 않은 안쪽 코스를 달리게 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그러나, 신잔은 더 바깥쪽으로 돌아 미하르카스를 제치고 우승했다. 이때 텔레비전 카메라의 시야에서 신잔이 사라져 "신잔이 사라졌다!"라고 실황되었다.[42] (제10회 아리마 기념 참조)
마츠모토 요시노리는 "신잔이 바깥으로 돌라고 말했다"라고 언급했다.[43] 마츠모토는 3, 4코너 중간 지점에서 앞선 말들이 지쳐 가가 다케미의 말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해, 4코너 입구에서 바깥으로 밀려났지만, 강하다고 믿었기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44] 하인이었던 다케다는 신잔의 5관 달성에 "승리하여 돌아오는 고삐에 5관의 해를 아쉬워한다"라는 구절을 읊었다.[45]
2. 3. 종마 시절
신잔은 일본에서 성공적인 씨수말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자손은 미호 신잔(ミホシンザン)으로, 일본 2,000 기니, 일본 세인트 레저, 그리고 천황상 (봄)을 우승했다.[55]1961년 2월 25일, 야마자키역에서 화물 열차를 타고 홋카이도 히다카 호로베츠역에 도착하여 다니가와 코이치로가 대표를 맡고 있는 다니가와 목장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우라카와정에서는 마을을 대표하여 환영회가 열렸고, 중심가에서는 타케다, 쿠리타가 참가하는 퍼레이드가 진행되었다.[49]
당시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씨수말의 인기가 높았고, 국산 씨수말은 경시되고 있었으며, 다니가와가 신잔의 신디케이트 결성을 시도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50][51] 첫해에는 씨수료가 20만 엔으로 설정되었다. 다니가와는 수태가 확인된 후 지불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39마리의 암말을 모았다.[51] 3년차까지는 다니가와 목장이 있는 우라카와 지역의 목장, 다니가와의 지인이나 친척 목장의 암말이 중심이었다. 일류라고 할 수 있는 암말은 1965년 국화상 우승마 다이코우터의 어미, 다이안케이 뿐이었다.[51] 1967년 2월 27일, 다니가와 목장에서 첫 신잔산 자마가 탄생했다.[51][52]
2년차의 자마 싱군이 1972년 킨샤치상, 아사히 챌린지컵을 제패하며 자마 첫 번째 중상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3년차에는 스가노호마레, 신잔미사키, 4년차에는 실버랜드, 부루스이쇼 등 여러 중상 우승 자마가 나타났다.[53] 1971년까지는 수입 씨수말이 씨수말 리딩 20위를 독점했지만, 이듬해인 1972년에는 17위에 올랐다. 이후 1978년에는 5위까지 도달했고, 1983년까지 20위 이내를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1972년부터 1980년에 아로우 익스프레스에게 추월당할 때까지 국산 씨수말의 으뜸 자리를 지켰다.[53] 라이터 야마가와 타쿠야는 신잔의 활약으로 국산 씨수말이 재평가되어 아로우 익스프레스나 토쇼 보이의 활약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54]
1981년에 미나가와만나가 국화상에서 우승했다. 이 시점에서 신잔은 고령이었기에 미나가와만나는 "신잔 마지막의 거물"이라고 불렸지만, 그 후 대표적인 자마인 2관마 미호신잔이 등장했다.
1987년에 수태 능력 저하로 씨수말에서 은퇴했다. 최종적으로 자마의 중상 승리 수는 49승에 달했다.[55] 또한, 1969년 - 1992년에는 자마 24년 연속 승리 기록을 세웠다. 이것은 나중에 노던 테이스트가 갱신할 때까지 일본 최장 기록이었다. 은퇴 후에는 타니카와 스터드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996년 7월 13일 늙어 죽었다. 그는 일본에서 기록된 가장 오래 산 순종 경주마이다. 사후에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신잔의 무덤은 홋카이도 우라카와군 우라카와초의 타니카와 스터드에 있으며, 이 스터드에는 신잔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2. 4. 종마 은퇴 후
신잔은 일본에서 성공적인 씨수말이었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자손은 미호 신잔(ミホシンザン)으로, 일본 2,000 기니, 일본 세인트 레저, 그리고 덴노상(봄)을 우승했다.1987년에 종마에서 은퇴한 후 타니카와 스터드에서 여생을 보냈다. 만년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이빨도 모두 잃었다. 1994년 2월 이후 신체적 쇠약이 두드러졌고, 1996년 7월 13일 오전 2시경 늙어 죽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3개월 11일로, 당시 일본에서 가장 오래 산 순종 경주마였다.
사후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홋카이도 우라카와군 우라카와초의 타니카와 스터드에 묻혔으며, 이 스터드에는 신잔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잔은 1995년 11월 19일에 카네케야키가 기록한 서러브레드의 일본 최고령 기록을 경신했고, 1996년 5월 3일에는 타마츠바키가 가지고 있던 경주마의 일본 최고령 기록도 경신했다.
경주마로서의 기록은 2011년 6월 28일에 앵글로아랍 마리조이(경주마명: 스인후아니)에 의해 깨졌고, 서러브레드로서의 기록은 2014년 8월 26일에 샬롯(경주마명: 아로하마키요)에게 깨졌다. 중앙 경마 중상 우승마로서의 최고령 기록은 2019년 8월 15일에 마이넬 다비테에게 깨졌지만, 신잔은 여전히 GI급 경주 우승마 중 최고령이다.
3. 경주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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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장소 | 이름 | 거리 (마장) | 두수 | 화번 | 마번 | 배당 (인기) | 착순 | 시간 | 착차 | 기수 | 근량 [kg] | 1착마 (2착마) |
---|---|---|---|---|---|---|---|---|---|---|---|---|---|
1963년 11월 10일 | 교토 | 3세 신마 | 1200m (양) | 14 | 3 | 3 | 1.9 (1인) | 1:13.9 | 4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1 | (호시츠키) | |
1963년 11월 30일 | 한신 | 오픈 | 1400m (초) | 5 | 1 | 1 | 3.0 (2인) | 1:25.7 | 2 1/2 | 쿠리타 마사루 | 51 | (에이블 맨) | |
1963년 12월 14일 | 한신 | 3세 중거리 특별 | 1600m (초) | 8 | 7 | 7 | 2.5 (1인) | 1:40.0 | 4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5 | (오쿠라야마) | |
1964년 1월 4일 | 교토 | 오픈 | 1600m (양) | 5 | 5 | 5 | 1.3 (1인) | 1:42.3 | 2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3 | (하나비시) | |
1964년 3월 29일 | 도쿄 | 스프링 스테익스 | 1800m (양) | 14 | 3 | 3 | 14.1 (6인) | 1:51.3 | 1/2신 | 쿠리타 마사루 | 55 | (야마닌 수퍼) | |
1964년 4월 19일 | 도쿄 | 고월상 | 2000m (양) | 25 | 2 | 6 | 3.6 (1인) | 2:04.1 | 3/4신 | 쿠리타 마사루 | 57 | (아스카) | |
1964년 5월 16일 | 도쿄 | 오픈 | 1800m (양) | 12 | 3 | 3 | 1.7 (1인) | 1:50.8 | 0.1초 | 쿠리타 마사루 | 57 | 야마닌 시로 | |
1964년 5월 31일 | 도쿄 | 도쿄 우준 | 2400m (양) | 27 | 4 | 10 | 2.7 (1인) | 2:28.8 | 1 1/4 | 쿠리타 마사루 | 57 | (우메노 치카라) | |
1964년 10월 10일 | 한신 | 오픈 | 1800m (양) | 12 | 6 | 8 | 1.5 (1인) | 1:51.6 | 0.1초 | 쿠리타 마사루 | 60 | 이치미카도 | |
1964년 11월 1일 | 교토 | 교토배 | 1800m (양) | 6 | 3 | 3 | 2.3 (1인) | 1:52.1 | 0.2초 | 쿠리타 마사루 | 60 | 밸리모스 니세이 | |
1964년 11월 15일 | 교토 | 국화상 | 3000m (초) | 12 | 2 | 2 | 3.2 (2인) | 3:13.8 | 2 1/2 | 쿠리타 마사루 | 57 | (우메노 치카라) | |
1965년 5월 29일 | 한신 | 오픈 | 1600m (초) | 7 | 1 | 1 | 2.5 (1인) | 1:37.7 | 4마신 | 타케다 히로시 | 59 | (야마히로) | |
1965년 6월 13일 | 한신 | 오픈 | 1850m (양) | 6 | 2 | 2 | 1.3 (1인) | 1:53.7 | 1 1/2 | 타케다 히로시 | 59 | (야마히로) | |
1965년 6월 27일 | 한신 | 타카라즈카 기념 | 2000m (불) | 6 | 5 | 5 | 1.7 (1인) | 2:06.3 | 1/2신 | 쿠리타 마사루 | 59 | (밸리모스 니세이) | |
1965년 10월 2일 | 한신 | 오픈 | 1850m (양) | 10 | 8 | 10 | 2.3 (2인) | 1:54.0 | 머리 | 타케다 히로시 | 57 | (히카루 폴라) | |
1965년 11월 3일 | 도쿄 | 메구로 기념 (가을) | 2500m (초) | 11 | 6 | 6 | 3.2 (1인) | 2:42.2 | 1/2신 | 쿠리타 마사루 | 63 | (불 타카치호) | |
1965년 11월 23일 | 도쿄 | 천황상 (가을) | 3200m (양) | 12 | 7 | 9 | 1.3 (1인) | 3:22.7 | 2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8 | (하쿠즈이코) | |
1965년 12월 18일 | 나카야마 | 오픈 | 2000m (양) | 5 | 3 | 3 | 1.5 (1인) | 2:05.5 | 0.2초 | 타케다 히로시 | 60 | 쿠리데이 | |
1965년 12월 26일 | 나카야마 | 아리마 기념 | 2600m (초) | 8 | 4 | 4 | 1.4 (1인) | 2:47.2 | 1 3/4 | 마츠모토 요시토 | 56 | (미하루카스) |
위의 표는 netkeiba.com의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170] 경주명의 '''굵은 글씨'''는 팔대 경주를 나타낸다.
1964년 후지 TV 상 스프링 스테이크스(도쿄 잔디 1800m), 사쓰키상 (일본 2,000 기니, 도쿄 잔디 2000m), 도쿄 유슌 (일본 더비, 도쿄 잔디 2400m), 키쿠카상 (일본 세인트 레저, 교토 잔디 3000m), 1965년 다카라즈카 기념(한신 잔디 2000m), 메구로 기념 (가을, 도쿄 잔디 2500m), 텐노상 (가을, 도쿄 잔디 3200m), 아리마 기념 (그랑프리, 나카야마 잔디 2600m)에서 우승했다.
사쓰키상, 도쿄 유슌, 키쿠카상, 텐노상(가을), 아리마 기념은 1984년 등급제가 도입되기 전 일본의 8대 주요 경주 중 5개였다(나머지 3개는 오카상, 유슌 빈바, 텐노상(봄)). 1984년 모든 경주가 GI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1981년 이전에는 경주마는 텐노상을 평생 한 번만 우승할 수 있었다.
3. 1. 상세 성적
날짜 | 장소 | 이름 | 거리 (마장) | 두수 | 화번 | 마번 | 배당 (인기) | 착순 | 시간 | 착차 | 기수 | 근량 [kg] | 1착마 (2착마) |
---|---|---|---|---|---|---|---|---|---|---|---|---|---|
1963년 11월 10일 | 교토 | 3세 신마 | 1200m (양) | 14 | 3 | 3 | 1.9 (1인) | 1:13.9 | 4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1 | (호시츠키) | |
1963년 11월 30일 | 한신 | 오픈 | 1400m (초) | 5 | 1 | 1 | 3.0 (2인) | 1:25.7 | 2 1/2 | 쿠리타 마사루 | 51 | (에이블 맨) | |
1963년 12월 14일 | 한신 | 3세 중거리 특별 | 1600m (초) | 8 | 7 | 7 | 2.5 (1인) | 1:40.0 | 4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5 | (오쿠라야마) | |
1964년 1월 4일 | 교토 | 오픈 | 1600m (양) | 5 | 5 | 5 | 1.3 (1인) | 1:42.3 | 2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3 | (하나비시) | |
1964년 3월 29일 | 도쿄 | 스프링 스테익스 | 1800m (양) | 14 | 3 | 3 | 14.1 (6인) | 1:51.3 | 1/2신 | 쿠리타 마사루 | 55 | (야마닌 수퍼) | |
1964년 4월 19일 | 도쿄 | 고월상 | 2000m (양) | 25 | 2 | 6 | 3.6 (1인) | 2:04.1 | 3/4신 | 쿠리타 마사루 | 57 | (아스카) | |
1964년 5월 16일 | 도쿄 | 오픈 | 1800m (양) | 12 | 3 | 3 | 1.7 (1인) | 1:50.8 | 0.1초 | 쿠리타 마사루 | 57 | 야마닌 시로 | |
1964년 5월 31일 | 도쿄 | 도쿄 우준 | 2400m (양) | 27 | 4 | 10 | 2.7 (1인) | 2:28.8 | 1 1/4 | 쿠리타 마사루 | 57 | (우메노 치카라) | |
1964년 10월 10일 | 한신 | 오픈 | 1800m (양) | 12 | 6 | 8 | 1.5 (1인) | 1:51.6 | 0.1초 | 쿠리타 마사루 | 60 | 이치미카도 | |
1964년 11월 1일 | 교토 | 교토배 | 1800m (양) | 6 | 3 | 3 | 2.3 (1인) | 1:52.1 | 0.2초 | 쿠리타 마사루 | 60 | 밸리모스 니세이 | |
1964년 11월 15일 | 교토 | 국화상 | 3000m (초) | 12 | 2 | 2 | 3.2 (2인) | 3:13.8 | 2 1/2 | 쿠리타 마사루 | 57 | (우메노 치카라) | |
1965년 5월 29일 | 한신 | 오픈 | 1600m (초) | 7 | 1 | 1 | 2.5 (1인) | 1:37.7 | 4마신 | 타케다 히로시 | 59 | (야마히로) | |
1965년 6월 13일 | 한신 | 오픈 | 1850m (양) | 6 | 2 | 2 | 1.3 (1인) | 1:53.7 | 1 1/2 | 타케다 히로시 | 59 | (야마히로) | |
1965년 6월 27일 | 한신 | 타카라즈카 기념 | 2000m (불) | 6 | 5 | 5 | 1.7 (1인) | 2:06.3 | 1/2신 | 쿠리타 마사루 | 59 | (밸리모스 니세이) | |
1965년 10월 2일 | 한신 | 오픈 | 1850m (양) | 10 | 8 | 10 | 2.3 (2인) | 1:54.0 | 머리 | 타케다 히로시 | 57 | (히카루 폴라) | |
1965년 11월 3일 | 도쿄 | 메구로 기념 (가을) | 2500m (초) | 11 | 6 | 6 | 3.2 (1인) | 2:42.2 | 1/2신 | 쿠리타 마사루 | 63 | (불 타카치호) | |
1965년 11월 23일 | 도쿄 | 천황상 (가을) | 3200m (양) | 12 | 7 | 9 | 1.3 (1인) | 3:22.7 | 2마신 | 쿠리타 마사루 | 58 | (하쿠즈이코) | |
1965년 12월 18일 | 나카야마 | 오픈 | 2000m (양) | 5 | 3 | 3 | 1.5 (1인) | 2:05.5 | 0.2초 | 타케다 히로시 | 60 | 쿠리데이 | |
1965년 12월 26일 | 나카야마 | 아리마 기념 | 2600m (초) | 8 | 4 | 4 | 1.4 (1인) | 2:47.2 | 1 3/4 | 마츠모토 요시토 | 56 | (미하루카스) |
위의 표는 netkeiba.com의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170] 경주명의 '''굵은 글씨'''는 팔대 경주를 나타낸다.
1964년 후지 TV 상 스프링 스테이크스(도쿄 잔디 1800m), 사쓰키상 (일본 2,000 기니, 도쿄 잔디 2000m), 도쿄 유슌 (일본 더비, 도쿄 잔디 2400m), 키쿠카상 (일본 세인트 레저, 교토 잔디 3000m), 1965년 다카라즈카 기념(한신 잔디 2000m), 메구로 기념 (가을, 도쿄 잔디 2500m), 텐노상 (가을, 도쿄 잔디 3200m), 아리마 기념 (그랑프리, 나카야마 잔디 2600m)에서 우승했다.
사쓰키상, 도쿄 유슌, 키쿠카상, 텐노상(가을), 아리마 기념은 1984년 등급제가 도입되기 전 일본의 8대 주요 경주 중 5개였다(나머지 3개는 오카상, 유슌 빈바, 텐노상(봄)). 1984년 모든 경주가 GI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1981년 이전에는 경주마는 텐노상을 평생 한 번만 우승할 수 있었다.
4. 수상
신잔은 1964년과 1965년에 케이슈사상 연도 대표마로 선정되었다. 1964년에는 최우수 4세 수말로, 1965년에는 최우수 5세 이상 수말로 선정되었다. 1984년에는 JR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주요 산구
신잔은 많은 자마를 배출하여 경주마로 활약하게 했다. 중앙 경마에서만 625승, 중상 경주 49승(20두), GI급 경주 4승(2두)을 기록했다.[171][172]
연도 | 출주 두수 | 출주 횟수 | 승리 | 순위 (국산) | AEI | 획득 상금 | |
---|---|---|---|---|---|---|---|
1969년 | 21 | 5 | 5 | - | - | 1356만 엔 | - |
1970년 | 30 | 11 | 19 | - | - | 7484만 엔 | - |
1971년 | 42 | 14 | 23 | - | - | 1억 4396만 엔 | - |
1972년 | 41 | 26 | 49 | 17(1) | - | 2억 755만 엔 | - |
1973년 | 49 | 29 | 47 | 6(1) | - | 3억 7431.8만 엔 | - |
1974년 | 40 | 22 | 39 | 10(1) | 1.49 | 3억 5605.8만 엔 | 9 |
1975년 | 41 | 19 | 35 | 20(1) | 1.24 | 3억 760.78만 엔 | 18 |
1976년 | 54 | 18 | 37 | 10(1) | 1.24 | 4억 3015.74만 엔 | 11 |
1977년 | 66 | 26 | 39 | 12(1) | 0.94 | 3억 9808.3만 엔 | 12 |
1978년 | 53 | 22 | 52 | 5(1) | 1.87 | 6억 4440.22만 엔 | 3 |
1979년 | 47 | 20 | 33 | 7(1) | 1.78 | 5억 213.18만 엔 | 3 |
1980년 | 47 | 19 | 27 | 14(3) | 1.30 | 4억 343.08만 엔 | 10 |
1981년 | 40 | 16 | 32 | 9(3) | 1.75 | 4억 7929.06만 엔 | 9 |
1982년 | 45 | 18 | 28 | 8(2) | 1.32 | 4억 2036.7만 엔 | 22 |
1983년 | 49 | 22 | 32 | 14(6) | 1.21 | 4억 0573.8만 엔 | 23 |
1984년 | 44 | 17 | 23 | 40(8) | 0.93 | 2억 8007.8만 엔 | 50 |
1985년 | 45 | 20 | 32 | 15(5) | 1.60 | 5억 273.0만 엔 | 18 |
1986년 | 35 | 11 | 17 | 44(9) | 1.04 | 2억 5845.1만 엔 | 57 |
1987년 | 30 | 10 | 14 | 33(9) | 1.70 | 3억 4292만 엔 | 45 |
1988년 | 27 | 7 | 9 | 115(35) | 0.61 | 1억 852.8만 엔 | 128 |
1989년 | 28 | 11 | 18 | 60(19) | 1.38 | 2억 3405.1만 엔 | 86 |
1990년 | 17 | 7 | 10 | 84(31) | 1.29 | 1억 8299.4만 엔 | 112 |
1991년 | 7 | 2 | 3 | 171(60) | 1.09 | 6732.7만 엔 | 238 |
1992년 | 1 | 1 | 1 | 345 | 2.11 | 1934.3만 엔 | 414 |
1993년 | 1 | 0 | 0 | 445 | 0.98 | 886.6만 엔 | 571 |
1994년 | 1 | 1 | 1 | 344 | 2.70 | 2390.7만 엔 | 462 |
1995년 | - | - | - | - | - | - | 881 |
주요 산구로는 미호 신잔(5관마), 미나가와 만나(국화상, 아르헨티나 공화국배 연패), 신잔미사키(아이치배, 나루오 기념), 하시코토부키(아사히 챌린지컵, 아이치배, 교토 기념(가을)), 스가노호마레(일본 단파상, 게이오배 오텀 핸디캡, CBC 상, 도쿄 신문배), 그레이트 타이탄(교토 기념 (가을) 2연패, 한신 대상전, 금배(서), 아이치배), 실버랜드(마일러즈 컵, 아이치배 2회, CBC 상, 게이한배), 로열 신잔 (야스다 기념), 캡틴 남라(한신 대상전, 나루오 기념), 후지 마돈나(카부토야마 기념, 후쿠시마 기념, 주니치 신문배), 싱군 (킨코 상, 아사히 챌린지컵), 우라카와 체리 (기타큐슈 기념, 한신 암말 특별), 골든 보트 (게이오배 스프링 핸디캡), 아사히 다이오 (카부토야마 기념), 아사히 테이오 (닛케이상), 불스 이쇼 (카부토야마 기념, 구모하타 기념), 히요시 시카이나미 (아이치배), 후지 린덴 (기타큐슈 기념), 쿄와 신잔 (고쿠라 3세 스테이크스), 그레이트 에코(교토 대상(가을), 한신 장애 스테이크스(가을)) 등이 있다.[69][70][71][72][73][74][75][76][77][78][79][80][81][82][83][84][85][86][87][88][89][90][91][92][93][94][95][96][97][98][99][100][101][102]
이 외에도 하시 스톰은 평지 장애에서 총 12승을[103][104], 하시 피고라스는 승마 경기마로 활약했다.[105][106] 슈퍼 신잔은 신잔의 마지막 산구이다.[107][108] 스피드 신잔은 유슌 빈마(오크스) 2착을 기록했다.[109]
6. 혈통
신잔의 혈통 내에는 게인즈버러 4×4, Sun Worship 4×5, Gallorette・Pretty Polly 5×5 등의 근친 교배가 이루어졌다.[1][2]
어머니 하야노보리는 경주마로 5승을 올렸다. 어머니의 반매로는 우준 빈마 우승마 지츠호마레, 조카에 고월상 우승마 카즈요시가 있다. 암계 (패밀리 라인)는 1907년에 영국에서 코이와이 농장이 고액으로 수입한 뷰티풀 드리머계에 속한다. 뷰티풀 드리머계는 그 밖에 티엠 오션, 메이지 히카리 등 다수의 명마를 배출하고 있다.[1]
신잔의 꼬리의 지근에는 백색의 털이 섞여 있었지만, 이것은 어머니의 아버지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세프트의 유전이라고 한다. 또 조교사 다케다는 처음으로 신잔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인 토우르누솔의 특징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고 느꼈다.[173][174][165][166][167] 신잔은 1961년 4월 2일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신잔은 요시마츠 마츠하시가 생산한 갈색 말이었다. 그는 아일랜드 더비 우승마 힌두스탄의 자손이었다.
형으로 린든(5승. 교토 4세 특별, 주쿄 4세 특별, 4세 추첨마 특별), 온워드 스탄(9승. 나카야마 기념, 아메리카 조키 클럽 컵, 천황상 3착, 닛케이상 3착), 켄스타츠(3승) 등이 있다.[2] 형에 비해 동생과 여동생은 별로 뛰지 못했으며, 남관동 지방 경마에서 2승을 거둔 치요노키쿠(암말 계통의 자손이 현존)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4마리는 미승리에 그쳤다.[2]
6. 1. 혈통표
신잔의 혈통 내에는 Gainsborough 4×4, Sun Worship 4×5, Gallorette・Pretty Polly 5×5 등의 근친 교배가 이루어졌다.[1][2]
6. 2. 혈통 배경
어머니 하야노보리는 경주마로 5승을 올렸다. 어머니의 반매로는 우준 빈마 우승마 지츠호마레, 조카에 고월상 우승마 카즈요시가 있다. 암계 (패밀리 라인)는 1907년에 영국에서 코이와이 농장이 고액으로 수입한 뷰티풀 드리머계에 속한다. 뷰티풀 드리머계는 그 밖에 티엠 오션, 메이지 히카리 등 다수의 명마를 배출하고 있다.[1]신잔의 꼬리의 지근에는 백색의 털이 섞여 있었지만, 이것은 어머니의 아버지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세프트의 유전이라고 한다. 또 조교사 다케다는 처음으로 신잔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인 토우르누솔의 특징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고 느꼈다.[173][174][165][166][167] 신잔은 1961년 4월 2일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신잔은 요시마츠 마츠하시가 생산한 갈색 말이었다. 그는 아일랜드 더비 우승마 힌두스탄의 자손이었다.
6. 3. 형제
형으로 린든(5승. 교토 4세 특별, 주쿄 4세 특별, 4세 추첨마 특별), 온워드 스탄(9승. 나카야마 기념, 아메리카 조키 클럽 컵, 천황상 3착, 닛케이상 3착), 켄스타츠(3승) 등이 있다.[2] 형에 비해 동생과 여동생은 별로 뛰지 못했으며, 남관동 지방 경마에서 2승을 거둔 치요노키쿠(암말 계통의 자손이 현존)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4마리는 미승리에 그쳤다.[2]7. 특징 및 평가
현역 시절 출주 체중은 456kg에서 472kg 사이였다. 체격은 뚱뚱하고 둔했는데, 마쓰하시 목장 관계자나 마부인 나카오 모두 "평범하다"는 첫인상을 받았다고 한다.[117][118] 다케다 역시 활약하기 전까지는 소질을 알아채지 못했고, 마사 안에서도 그다지 기대를 받지 못했다.
성격은 매우 차분하여, 다케다 마사에 입사하기 위해 화물차로 이송 중에도 난폭하게 굴지 않았고, 수행원의 실수로 밤새도록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켜져 있는 상황에서도 잠을 방해받지 않았다.[119] 데뷔 전 육성 조교 중에는 마쓰하시 목장으로부터 "사람에게 부딪혀도 작은 돌멩이에 맞은 정도의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으며,[8] 데뷔 후 처음으로 간토 지방으로 원정을 갔을 때에도 전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120]
5세 봄에 견습 기수를 태운 채 뒷다리만으로 일어서서 그대로 약 50m를 걸어간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서러브레드는 뒷다리 두 개로 일어서도 견디지 못하고 바로 내려오기 때문에, 신잔의 허리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되었다.[121]
조교에서는 달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케다는 종종 "신잔은 돈이 걸려 있지 않으면 달리지 않는다"고 언급했다.[122] 또한 오카와 게이지로는 이 때문에 조교의 시계는 실전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123] 오가타 도키치는 신잔이 레이스 전에 목을 길게 뻗어 목과 등의 라인이 지면과 평행이 되는 모습을 "서러브레드의 모범"이라고 평했다.[124]
신잔은 경주에서 출발이 매우 빨랐으며, 많은 경주에서 도주마를 뒤에서 보면서 선행했고, 결승선 앞에서 추월하는 방식으로 경주를 운영했다.[125] 착차를 크게 벌려 이긴 적은 적었고, 레코드 승리도 한 번도 없었다. 오오카와 게이지로는 이를 두고 "착차는 결코 말의 능력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126] 나카오는 "코 차이로 이겨도 승리는 승리"라고 생각하는 쿠리타의 기승 스타일이 신잔의 경주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159]
결승선을 지나면 바로 멈추는 버릇이 있었는데, 타케다는 이를 "영리한 말이라 헛되이 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127] 신잔이 기록한 4번의 패배 중 3번은 평지 오픈 경주였는데, 이는 타케다가 "조교 대신"으로 경주를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오오카와 게이지로는 말했다.[128]
타케다는 사츠키상의 경주 모습을 보고, 자신이 관리한 클래식 2관마 코다마와 비교하여 "코다마는 면도칼, 신잔은 칼의 날카로움. 다만 신잔의 칼은 수염도 깎을 수 있는 칼이다"라고 평했다. 이 말은 타케다의 신잔에 관한 발언 중 가장 유명하다.[129] 쿠리타 마사루는 신잔을 "이쪽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심전심, 전기처럼 전해진다. 이렇게 타기 쉬운 말은 없다"라고 평가했다.[159]
오오카와 게이지로는 스프링 스테이크스 전의 조교에서 신잔의 체형과 로테이션을 보고 낮게 평가했지만, 신잔은 그의 예상을 깨고 클래식 삼관을 달성했다. 오오카와는 "신잔에게는 그 체형을 능가하는 큰 것이 내재해 있었다. 틀린 것은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쪽"이라고 말했다.[130] 신잔의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미이 타카요시는 신잔의 "좋은 점은 첫째로 눈이 좋은 것"이라며, "눈을 보고 압도당했다"라고 평가했다.[131]
2000년 일본중앙경마회가 경마 팬을 대상으로 실시한 '20세기 명마 대투표'에서 17,159표를 획득하여 7위에 선정되었다.[132] 1위 나리타 브라이언과는 2만 표가량 차이가 났지만, 50세와 60세 이상 세대에서는 각각 1위의 지지를 얻었다.[133] 잡지 『Number』가 경마 관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호스맨이 뽑은 20세기 최강마'에서는 1위로 선정되었다.
7. 1. 신체적 특징
현역 시절 출주 체중은 456 - 472kg이었다. 체격은 뚱뚱하고 둔했는데, 마쓰하시 목장의 관계자나 마부인 나카오 모두 "평범하다"는 첫인상을 가졌다고 한다.[117][118] 다케다 역시 활약하기 전까지는 소질을 알아채지 못했고, 마사 안에서도 그다지 기대를 받지 못했다.성격은 타고나길 매우 차분하여, 다케다 마사에 입사하기 위해 화물차로 이송 중에도 난폭하게 굴지 않았고, 수행원의 실수로 밤새도록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켜져 있는 상황에서도 잠을 방해받지 않았다.[119] 또 데뷔 전 육성 조교 중에 다케다는 마쓰하시 목장으로부터 "사람에게 부딪혀도 작은 돌멩이에 맞은 정도의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으며,[8] 데뷔 후 처음으로 간토 지방으로 원정을 갔을 때에도 전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120]
5세 봄에 견습 기수를 태운 채 뒷다리만으로 일어서서 그대로 약 50m를 걸어간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서러브레드는 뒷다리 두 개로 일어서도 견디지 못하고 바로 내려오기 때문에, 신잔의 허리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되었다.[121]
조교에서는 달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케다는 종종 "신잔은 돈이 걸려 있지 않으면 달리지 않는다"고 언급했다.[122] 또한 오카와 게이지로는 이 때문에 조교의 시계는 실전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123] 오가타 도키치는 신잔이 레이스 전에 목을 길게 뻗어 목과 등의 라인이 지면과 평행이 되는 모습을 "서러브레드의 모범"이라고 평했다.[124]
7. 2. 주행 스타일
신잔은 경주에서 출발이 매우 빨랐으며, 많은 경주에서 도주마를 뒤에서 보면서 선행했고, 결승선 앞에서 추월하는 방식으로 경주를 운영했다.[125] 착차를 크게 벌려 이긴 적은 적었고, 레코드 승리도 한 번도 없었다. 오오카와 게이지로는 이를 두고 "착차는 결코 말의 능력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126] 나카오(中尾)는 "코 차이로 이겨도 승리는 승리"라고 생각하는 쿠리타(栗田)의 기승 스타일이 신잔의 경주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159]결승선을 지나면 바로 멈추는 버릇이 있었는데, 타케다는 이를 "영리한 말이라 헛되이 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127] 신잔이 기록한 4번의 패배 중 3번은 평지 오픈 경주였는데, 이는 타케다가 "조교 대신"으로 경주를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오오카와 게이지로는 말했다.[128]
타케다는 사츠키상(皐月賞)의 경주 모습을 보고, 자신이 관리한 클래식 2관마 코다마(コダマ)와 비교하여 "코다마는 면도칼, 신잔은 칼의 날카로움. 다만 신잔의 칼은 수염도 깎을 수 있는 칼이다"라고 평했다. 이 말은 타케다의 신잔에 관한 발언 중 가장 유명하다.[129] 쿠리타 마사루(栗田勝)는 신잔을 "이쪽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심전심, 전기처럼 전해진다. 이렇게 타기 쉬운 말은 없다"라고 평가했다.[159]
오오카와 게이지로는 스프링 스테이크스(スプリングステークス) 전의 조교에서 신잔의 체형과 로테이션을 보고 낮게 평가했지만, 신잔은 그의 예상을 깨고 클래식 삼관을 달성했다. 오오카와는 "신잔에게는 그 체형을 능가하는 큰 것이 내재해 있었다. 틀린 것은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쪽"이라고 말했다.[130] 신잔의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미이 타카요시(三井高義)는 신잔의 "좋은 점은 첫째로 눈이 좋은 것"이라며, "눈을 보고 압도당했다"라고 평가했다.[131]
7. 3. 평가
2000년 일본중앙경마회가 경마 팬을 대상으로 실시한 '20세기 명마 대투표'에서 17,159표를 획득하여 7위에 선정되었다.[132] 1위 나리타 브라이언과는 2만 표가량 차이가 났지만, 50세와 60세 이상 세대에서는 각각 1위의 지지를 얻었다.[133] 잡지 『Number』가 경마 관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호스맨이 뽑은 20세기 최강마'에서는 1위로 선정되었다.8. 일화
1961년생으로 타케다 마구간에 입사한 경주마 중에는 암말 클래식 2관마 미스 온워드의 자마 온워드 세컨드, 소로나 웨이산구의 소로나 류, 지참마의 온워드 체스 등이 있었지만, 신잔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136] 또한 조교에서도 담당 마부인 나카오 겐타로가 동료들로부터 놀림을 받을 정도로 달리지 않았다.
나카오는 처음에는 "별 볼일 없는 말"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점차 신잔에게 위엄과 풍격을 느꼈고, 타케다가 관리했던 명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137][138] 주전 기수 구리타도 "코다마[139]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고 느껴 신잔에 기승하기를 원했다.[140]
하지만 타케다는 신잔이 4연승을 한 후에도 온워드 세컨드가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스프링 스테이크스를 앞두고 구리타가 "온워드 세컨드와는 급이 다르다. 코다마보다 강하다"고 주장하며 사츠키상에서의 신잔 기승을 희망하자,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했다.[141] 신잔이 스프링 스테이크스에서 우승하자 타케다도 "나는 눈이 안 보였다. 네가 이렇게 대단한 말인 줄 몰랐다"며 신잔에게 사과했다.[142]
신잔 은퇴 후, 일본 경마 관계자들에게 신잔을 뛰어넘는 경주마 생산 및 육성은 지상 과제가 되었으며, 심볼리 루돌프가 등장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신잔을 넘어라'''"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159] 일본중앙경마회의 홍보 포스터에도 이 슬로건이 들어간, 겨울 목장에서 두 발로 굳건히 일어선 신잔의 사진이 사용되었다.
심볼리 루돌프가 무패로 클래식 삼관을 달성했을 때, 타케다는 "드디어 신잔을 뛰어넘는 말이 나왔다"라고 말했다.[159] 하지만 나카오는 2003년 인터뷰에서 "심볼리 루돌프나 나리타 브라이언과 비교해도 '넘을 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159] 기수 시절 신잔과 대결했던 카가는 2000년 JRA 캠페인 'JRA DREAM HORSES 2000' 투표 결과를 기재한 잡지에서[160] "그 후 미스터 시비, 심볼리 루돌프, 나리타 브라이언과 모든 삼관마를 봤지만, 신잔을 넘어선 말은 없다"라고 말했다.[160]
5세(현 4세)에 출전한 오픈 경주에서는 부담 중량을 줄이기 위해[161] 견습 기수 (조련사 다케다의 아들 다케다 히로시)가 기승했다.
1970년에는 LP 레코드 『아아 신잔』(품번: SJX-2002)이 일본 빅터(현: JVC 켄우드 빅터 엔터테인먼트)에서 발매되어 10일 만에 1만 장을 완판했다.[162] 이 LP는 일본 크라운에서 발매되어 역시 10일 만에 1만 장을 완판한[162] 『다큐멘트 일본 더비』 (GW-7008)와 함께 일본 경마 관련 LP 초기 작품으로 여겨진다.[162][163]
1989년 제100회 천황상 경주 기념 우표 도안으로 신잔의 모습이 채택되었다. 천황상 사진이 마땅치 않아, 메구로 기념 우승 당시 사진을 모델로 하여 등번호, 기수 복장, 모자 등을 천황상에 맞게 수정했다.[164]
==== 신잔 철 ====
1월, 마부 나카오가 신잔의 오른쪽 뒷다리 발굽에서 출혈을 발견했다. 뒷다리 힘이 강해져 디딤이 깊어지면서 뒷다리가 앞다리 편자에 부딪히는 것이 원인이었다. 타케다는 대책을 고심했다.[143]
처음에는 뒷다리에 고무 테이프나 가죽을 감았지만, 전자는 마장을 걷는 것만으로 떨어졌고, 후자는 습기에 약했다. 시행착오 끝에 장제사 후쿠다 타다히로와 함께 뒷다리 편자에 통기 구멍을 뚫은 슬리퍼 형태의 커버를 붙여 뒷발굽을 보호하고, 앞다리 편자에는 전기 용접으로 T자형 브리지를 댄 「'''신잔 철'''」을 고안했다.[144][145]
일반 편자는 3주 정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신잔 철은 1, 2주 만에 용접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146] 신잔이 타케다 마사에 있을 때는 수시로 교체했지만,[147] 원정 시에는 나카오가 미리 제작한 신잔 철을 휴대했다.[148]
신잔 철은 일반 편자보다 2배 이상 무거워 다리에 부담을 주고 고장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지만, 신잔은 이를 극복했다. 이 특수 편자 무게 때문에 신잔이 조교에서 달리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146][149]
==== 로테이션을 둘러싼 갈등 ====
아리마 기념을 앞두고, 타케다 분고는 나카야마 경마장 경주 경험이 없는 신잔의 스크루링과, 덴노상(가을) 이후 경주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픈 경주에 출주한 뒤 연투로 아리마 기념에 출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쿠리타 이사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150] 타케다 히로시가 기승한 오픈에서 신잔은 쿠리데이에게 패했고,[151] 쿠리타는 이 결과에 충격을 받아 과음으로 병원에 실려갔다.[152][153][154]
이 사건으로 타케다는 "내 신뢰할 수 없는 남자를, 신잔에게 태울 수는 없다"며 격노하여,[41] 아리마 기념에서 쿠리타 대신 마츠모토 요시지를 기승시키기로 결정했다.[156] 타케다의 의향과 관계없이, 쿠리타가 완치 1개월 진단을 받았거나 기승 정지 처분을 받아 기승이 불가능했다는 설도 있다.[155] 신잔 은퇴식에서도 쿠리타가 아닌 마츠모토와 타케다 히로시가 기승했다.[157]
신잔의 로테이션을 둘러싼 양측의 대립은 전년 도쿄 유슌 전에도 있었다. 당시 타케다는 조교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오픈 출주를 결정했지만, 쿠리타는 신잔의 능력을 고려해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출주 결정 후에는 경주 직전 조교에서 타케다의 지시보다 늦게 달리게 했다.[158]
8. 1. 신잔 철
1월에 마부 나카오가 신잔의 오른쪽 뒷다리 발굽에 출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원인은 뒷다리의 다리 힘이 증가한 결과 디딤이 깊어져 뒷다리가 앞다리의 편자에 부딪히는 것이었다. 이에 타케다는 대책을 생각했다.[143]대책으로 처음에는 뒷다리에 고무 테이프나 가죽을 감았지만, 전자는 마장을 걷는 것만으로 떨어져 버렸고, 후자는 수분을 포함한 마장에 약했다.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장제사 후쿠다 타다히로와 함께, 뒷다리의 편자에 통기 구멍이 뚫린 슬리퍼와 같은 커버를 붙여 뒷다리의 발굽을 보호하고, 게다가 커버가 부딪히는 충격으로부터 앞다리의 편자를 보호하기 위해, 앞다리의 편자에 전기 용접으로 T자형 브리지를 댄 「'''신잔 철'''」이라고 불리는 편자를 고안했다.[144][145]
일반적인 편자의 내구 기간은 3주 정도였던 반면, 신잔 철은 1, 2주 정도면 용접 부분이 떨어져 나가 사용이 불가능해지는 특징이 있었다.[146] 신잔 철의 교체는, 신잔이 타케다 마사에 있을 때에는 그때마다 이루어졌지만,[147] 신잔이 마사를 떠나 원정할 때에는, 미리 제작한 복수의 신잔 철을 나카오가 휴대했다.[148]
이 신잔 철은 일반적인 편자에 비해 2배 이상의 무게가 있었기 때문에, 다리 부분에 부담이 걸려 고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지만, 신잔은 리스크를 극복했다. 또한, 이 특수한 편자의 무게 때문에 신잔은 조교에서 달리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146][149]
8. 2. 로테이션을 둘러싼 갈등
아리마 기념을 앞두고, 타케다 분고는 나카야마 경마장 경주에 출주한 적이 없었던 신잔의 스크루링과, 덴노상(가을)으로부터의 경주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픈에 출주한 뒤 연투로 아리마 기념에 출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쿠리타 이사오는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150] 타케다 히로시가 기승한 오픈에서 신잔은 쿠리데이에게 패했고,[151] 쿠리타는 이 결과에 충격을 받아 과음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사건을 일으켰다.[152][153][154]이 사건으로 타케다는 "내 신뢰할 수 없는 남자를, 신잔에게 태울 수는 없다"라며 격노하여,[41] 아리마 기념에서 쿠리타 대신 마츠모토 요시지를 기승시키기로 결정했다.[156] 타케다의 의향과 관계없이, 쿠리타가 완치 1개월 진단을 받았거나 기승 정지 처분을 받아 기승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155] 신잔의 은퇴식에서도 쿠리타가 아닌 마츠모토와 타케다 히로시가 기승했다.[157]
신잔의 로테이션을 둘러싼 양자의 대립은 전년의 도쿄 유슌 전에도 있었다. 당시 타케다는 조교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며 오픈 출주를 결정했지만, 쿠리타는 신잔의 능력을 고려해 출주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출주 결정 후에는 경주 직전 조교에서 타케다의 지시보다 늦게 달리게 했다.[158]
9. 참고 문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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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点は[[ビワハヤヒデ]]の15連続連対。連対率100パーセントに限ると[[ダイワスカーレット]]の12連続連対が次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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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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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서
母の母の母。
[10]
문서
[[栗田勝]]の息子で、後に[[日本中央競馬会]]の[[騎手]]、[[調教助手]]。武田は母方の祖父にあたる。
[11]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p.28
[12]
문서
人為的に仔馬を母馬から引き離すこと。
[13]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pp.35-39
[14]
서적
『シンザン物語』pp.63-65
[15]
문서
スプリングステークスは本来[[中山競馬場]]で行われるが、この年は中山競馬場の改修工事が行われていたため東京競馬場で行われた。後述の皐月賞も同様。
[16]
서적
『優駿』1992年7月号 p.63
[17]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p.114
[18]
서적
『優駿』1992年7月号 p.64
[19]
서적
『史上最強馬シンボリルドルフ』 p.61
[20]
서적
『優駿』2004年10月号、p.58
[21]
문서
武田の決定の根拠は、[[京都]]の夏の気温に対応した状態にあるシンザンを[[北海道]]へ送り、さらに涼しくなった北海道に対応した状態で残暑の厳しい京都へ戻すことによるリスクを回避することにあった。
[22]
문서
具体的な症状としては体温が普段よりも5〜6分上昇し、汗をまったくかかなくなった。
[23]
서적
『シンザン物語』p.100-111
[24]
문서
厩舎が使った氷は一日60[[貫]]で、ひと夏に20万円の費用を要した。
[25]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p.147
[26]
문서
調教でよく走るオンワードセカンドを相手に、相手よりも長い距離を走ったにもかかわらず先にゴールした。
[27]
문서
菊花賞に出走した二冠馬で1番人気に推されなかったのは史上初のことであった。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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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金の馬シンザン』p.162-16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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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ンザン物語』p.125-12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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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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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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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シンザン物語』p.149
[35]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p.187
[36]
문서
目黒記念は距離が2500メートルと長いうえに、負担重量を減らす手段がないハンデキャップ競走であったため、当初武田はローテーションの候補から除外していた。
[37]
간행물
優駿
2004-10
[38]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
[39]
문서
JRAのGI級競走における単勝支持率としてはハクチカラ(1957年天皇賞〈秋〉、85.9パーセント)とディープインパクト (競走馬)|ディープインパクトの菊花賞(79.03パーセント)に次ぐ記録。
[40]
문서
5例の内訳は、1951年皐月賞(勝ち馬トキノミノル)、1957年桜花賞(ミスオンワード)、1957年天皇賞・秋(ハクチカラ)、1957年有馬記念(ハクチカラ)、2005年菊花賞(ディープインパクト)。
[41]
간행물
優駿
2004-10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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競馬名勝負列伝
[43]
간행물
サラブ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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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優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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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競馬ブ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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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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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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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優駿
199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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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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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優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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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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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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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競馬のみの記録。当時の地方競馬では記録に不備があり残っていない。
[56]
서적
シンザン物語
[57]
문서
そのうちのいくつかはマスコミによってシンザンが危篤状態に陥ったと報道された。
[58]
서적
シンザン物語
[59]
문서
満年齢。旧年齢表記で36歳。
[60]
문서
昭和50年代以降、日本で土葬された競走馬は、シンザンのほかにテンポイント、サクラスターオー、マルゼンスキー、ナリタブライアン、パシフィカスの計6頭が確認されている。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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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ネケヤキは1961年3月12日に生まれ、1995年10月28日に死亡した。なお、同馬はシンザン三冠達成の菊花賞にも出走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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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イネルダビテ35歳4カ月 三冠シンザンの長寿記録抜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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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歳馬に癒やされて 重賞馬の最長寿マイネルダビテ 新ひだか・岡田スタッ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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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皇賞春3着、高松宮杯2着。愛知杯ではスガノホマレを破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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レコード勝ち5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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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2000[[メートル]]2分の壁を初めて破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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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ヤプテンナム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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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花賞2着、[[日経新春杯]]2着、[[毎日王冠]]2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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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戦して10勝、堅実に走り着外はわずか6回、最終的に2億円以上を稼ぎ出して当時の賞金女王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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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山牝馬ステークス]](オープン特別)連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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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ンザン記念2着、日経新春杯2着。中京記念2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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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ンザン産駒初の重賞優勝馬、シンザン記念でも好走。その後供用2年目で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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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ラカワチエ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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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函館記念]]2着、[[函館3歳ステークス]]2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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ゴールデンボ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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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サヒテイ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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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天皇賞(秋)3着。アサヒテイオーの全兄、[[アサヒエンペラー]]の半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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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アサヒダイオーの全弟。
[95]
웹사이트
ブルスイシヨ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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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メリカジョッキークラブカップ2着、[[オールカマー]]2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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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ヒヨシシカイナ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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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フジリンデ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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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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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キヨウワシンザ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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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6
[100]
문서
最後の重賞優勝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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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グレートエコ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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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6
[102]
문서
唯一の障害重賞勝ち馬。
[103]
웹사이트
ハシスト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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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6
[104]
문서
日経新春杯2着、[[中京記念]]2着。ウラカワチェリーの兄。種牡馬として、産駒にエントリーストーム。
[105]
웹사이트
ハシピゴラ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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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シストームの弟。競走馬としては中央競馬[[日本の競馬の競走体系#%E4%B8%AD%E5%A4%AE%E7%AB%B6%E9%A6%AC|準オープ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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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スーパーシンザ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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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島テレビ杯、ストークステークス。1994年引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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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桜花賞]]2着、エリザベス女王杯2着。[[フローラステークス|サンケイスポーツ杯4歳牝馬特別]]2着。[[高松宮記念 (競馬)|高松宮杯]]3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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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元競走馬が障害飛越競技で五輪日本代表になったのは、2010年現在この馬のみである。[[総合馬術]]の代表経験馬は1932年[[ベルリンオリンピック|ベルリン五輪]]に出場した[[アスコツト|アスコット]]([[帝室御賞典]]など17勝)、1976年[[モントリオールオリンピック|モントリオール五輪]]に出場した[[インターニホン]](8勝)が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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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シンザン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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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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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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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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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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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川慶次郎回想録 まっすぐ競馬道 杉綾の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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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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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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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シンザン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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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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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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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優駿
2000-10
[134]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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ホッカイドウ競馬の競走名である「五冠神讃特別」は同名の[[日本酒]]の銘柄に由来するが、その日本酒もシンザンから命名している([http://www.hidaka.pref.hokkaido.lg.jp/ss/srk/hkd/turakawa/gokanshinzan.htm 大本命五冠神讃] 北海道日高振興局)。
[136]
문서
当時の『優駿』誌の有力厩舎の新馬紹介では「仕上がりは早く、秋の一番馬の期待は持てる」との評価を与えているが、武田厩舎の馬の紹介順では、オンワードセカンドらのあとであった。
[137]
서적
シンザン物語
[138]
서적
黄金の馬シンザン
[139]
문서
武田が管理したクラシック二冠馬。
[140]
서적
シンザン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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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シンザン物語
[142]
서적
大川慶次郎回想録 まっすぐ競馬道 杉綾の人生
[143]
서적
シンザン物語
[144]
서적
シンザン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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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シンザン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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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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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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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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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紀の名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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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朝日
197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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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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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競馬新聞“郵俊” YUSHUN 嗚呼!! 忘れ得ぬ三冠馬シンザン あの雄姿はいまも切手に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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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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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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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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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ンザン|JBISサーチ(JBIS-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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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ホシンザン|JBISサーチ(JBIS-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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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金の馬シンザ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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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ンザン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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