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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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유경은 명나라의 외교관으로, 임진왜란 시기 강화 교섭을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과의 강화 교섭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 거짓 보고를 하였고, 이로 인해 정유재란이 발발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후 명나라로 돌아가 처형되었으며, 그의 기만적인 외교는 조선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유경은 명나라 가흥부 평호현(지금의 평호시)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언변이 뛰어났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의주에서 오억령에게 자신이 왜적을 의리로 꾸짖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평의지, 평수길과도 안면이 있다고 하였다.[1]
2. 생애
2. 1. 임진왜란 시기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명을 받아 조선에 파견되었다.[2] 그는 명나라 유격장군을 자칭하며 조선에 왔으나, 실제로는 일본과의 강화 교섭을 위한 밀명을 띠고 있었다.[1]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왜적의 내부로 들어가 의리로써 그들을 꾸짖"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
8월 17일, 심유경은 선조를 만나 명나라가 70만 명의 군사를 파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3]
그는 평양성에 있던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 등과 강화 교섭을 진행했다.[4]
2. 2. 일본과의 강화 교섭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의 기세가 드세지자,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비밀리에 심유경을 파견하였다. 그는 명나라의 유격장군을 가칭하고,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파견되었다.[2] 8월 17일 심유경은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명나라 70만 명을 파병 준비를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3] 당시 평양성에 있던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 등과 강화 교섭을 체결하는 데 중심을 이뤘지만, 거짓된 외교로 삼국(三國)[4]을 크게 혼란에 빠뜨렸다.
1593년, 명나라 사신 자격으로 일본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는데, 도요토미는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5]
요구 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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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
감합무역을 재개할 것 |
조선 4도를 할양할 것 |
조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
심유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명나라에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일본 천황으로 책봉을 원한다"는 내용으로 거짓 보고를 했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짜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거짓 내용을 읽어주려 했으나, 사이쇼 조타이가 사실대로 읽으면서 거짓이 탄로났다.
2. 3. 최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과 강화 교섭을 진행했으나, 거짓 외교로 조선, 명, 일본 삼국(三國)[4]을 혼란에 빠뜨렸다. 1593년 명나라 사신으로 일본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5]#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 감합인(勘合印)[6]을 복구할 것
#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심유경은 명나라가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 '''일본 천황으로 책봉을 원한다'''는 내용으로 거짓 보고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쇼 조타이 등과 짜고 문맹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거짓 봉공안을 읽어주려 했으나, 사이쇼 조타이가 솔직하게 읽어주는 바람에 탄로나게 되었다. 이는 1597년 정유재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려다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었다.[4] 심유경 사후, 4년간의 강화 협상은 결렬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3. 평가
심유경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이중적인 외교를 펼친 인물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심유경은 뛰어난 언변과 협상 능력을 바탕으로 어려운 시기에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비밀 지시를 받고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과의 강화 교섭을 추진했다.[2]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과 교섭을 진행했으며,[1]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거짓 외교를 펼쳤다는 주장이 있다.[5]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심유경은 기만적인 외교로 조선, 명나라, 일본 모두에게 불신을 초래하고 동아시아 정세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는다.[4] 1593년 일본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를 숨기고 거짓 보고를 하여 정유재란을 유발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5] 결국 거짓이 발각되어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
한국에서는 심유경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장기화시키고 조선에 큰 피해를 입힌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기만 외교는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전란을 장기화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비판받는다.[4] 조선왕조실록에는 심유경이 선조에게 명나라의 대규모 파병을 거짓으로 보고하는 등[3] 그의 기만적인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1]
3. 1. 긍정적 평가
심유경은 뛰어난 언변과 협상 능력을 바탕으로 어려운 시기에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비밀 지시를 받고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과의 강화 교섭을 추진했다.[2] 그는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과 교섭을 진행했다. 沈惟敬|심유경중국어은 언변이 뛰어나고 평의지, 평수길과도 서로 안다고 하였다.[1]심유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 명나라 황제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분노하게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5] 일부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거짓 외교를 펼쳤다는 주장도 있다.
3. 2. 부정적 평가
심유경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비밀 지시로 파견된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 유격장군을 사칭하며 적정을 탐지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왔으나, 실제로는 일본과의 강화 교섭을 위한 것이었다.[2] 그는 평양성에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과 강화 교섭을 주도했지만, 기만적인 외교로 조선, 명나라, 일본 모두에게 불신을 초래하고 동아시아 정세를 혼란에 빠뜨렸다.[4]1593년 명나라 사신으로 일본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 도요토미는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고, 감합무역을 재개하며, 조선 4도를 할양하고,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내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를 했다.[5] 심유경은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 '''일본 천황으로 책봉을 원한다'''는 내용으로 거짓 보고했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쇼 조타이 등과 함께 문맹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거짓 봉공안을 읽어주려 했으나, 사이쇼 조타이가 사실대로 읽으면서 거짓이 탄로나게 되었다. 이는 결국 1597년 정유재란을 유발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심유경은 거짓이 발각된 것을 알고 일본으로 망명하려다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었다. 그의 기만적인 외교 행태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선조 27권, 25년(1592년) 6월 29일 기사에 따르면 그는 "말은 잘하는 변사(辯士)"였지만, 실제로는 거짓 보고와 협상으로 일관했다.[1] 8월 17일 심유경은 선조에게 명나라가 70만 명의 파병 준비를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기도 했다.[3]
3. 3. 한국의 시각
심유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장기화시키고 조선에 큰 피해를 입힌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기만 외교는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전란을 장기화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비판받는다.[4]조선왕조실록에는 심유경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비밀 지시를 받고 조선에 파견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명나라 유격장군을 사칭하며 적정을 탐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과의 강화 교섭을 위한 목적이었다.[2] 심유경은 의주에서 오억령에게 자신이 일본군을 의리로 꾸짖고, 듣지 않으면 명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섬멸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1] 8월 17일에는 선조에게 명나라 70만 대군 파병을 준비한다고 거짓 보고를 하기도 했다.[3]
심유경은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과 강화 교섭을 진행했지만, 거짓된 외교로 조선, 명나라, 일본 3국을 혼란에 빠뜨렸다.[4] 1593년 명나라 사신으로 일본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고, 감합무역을 재개하며, 조선 4도를 할양하고,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요구하는 등의 무리한 요구를 했다.[5] 심유경은 명나라가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 일본 천황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으로 거짓 보고를 했다. 그러나 사이쇼 조타이가 진실을 폭로하면서 기만 외교가 드러났고, 이는 결국 정유재란의 원인이 되었다.
4. 도요토미 히데요시 독살설
조선에서 간행된 다양한 야사(사선역사서)를 집대성하여 18세기에 편찬된 『연려실기술』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심유경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대의 앞뒤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매우 낮다. 실제로 심유경이 일본 방문·출국한 것은 경장 원년(1596년)이며,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은 그 2년 후(1598년)이다.[1]
5. 관련 작품
심유경과 관련된 작품으로는 드라마가 있다.
5. 1. 드라마
참조
[1]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2018-02-01
[2]
웹사이트
왜적의 기세가 강해지자 중국은 심유경을 파견하여 강화를 꾀하다
http://sillok.histor[...]
선조실록
1592-06-29
[3]
웹사이트
심 유격이 황제가 하사한 은냥을 가지고 오다
http://sillok.histor[...]
선조실록
1592-08-17
[4]
문서
조선, 명, 일본
[5]
백과사전
임진왜란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
[6]
문서
무역증인(貿易證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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