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폰 하르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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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돌프 폰 하르나크는 1851년 리보니아의 도르파트에서 태어난 독일의 신학자이다. 라이프치히, 기센, 마르부르크,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교회사, 교의사, 신약성서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을 견지하며, 성서 비평과 예수의 복음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기독교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독교의 본질》은 널리 읽히며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작이 되었다. 하르나크는 또한 카이저 빌헬름 협회 초대 총재를 역임하며 학문 발전에 기여했으며, 1914년 빌헬름 2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는 1930년 사망했지만, 그의 신학적 방법론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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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폰 하르나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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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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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카를 구스타프 아돌프 하르나크 |
출생 | 1851년 5월 7일 (율리우스력 4월 25일) |
출생지 | 도르파트, 도르파트현, 리보니아 관구, 러시아 제국(현재의 타르투, 타르투현, 에스토니아) |
사망 | 1930년 6월 10일 |
사망지 | 하이델베르크, 바이마르 공화국 |
직업 | 신학자, 교회 역사가 |
배우자 | 아말리에 티에르슈 (1858–1937) |
자녀 | 아그네스 폰 잔-하르나크, 에른스트 폰 하르나크 포함 7명 |
부모 | 테오도시우스 하르나크 (아버지) |
친척 | 악셀 (형제), 아르비트 하르나크 (조카) |
학력 | 도르파트 대학교 에를랑겐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
소속 기관 | 라이프치히 대학교 (1874—1879) 기센 대학교 (1879—1886) 마르부르크 대학교 (1886—1888) 베를린 대학교 (1888—1921) |
주요 저서 |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교의사》 《고대 기독교 문헌사》 《최초 3세기 동안의 기독교 선교와 확장》 |
영향을 준 학파 | 튀빙겐 학파 |
사상 | |
분야 | 신학, 교회사 |
사상적 경향 | 자유주의 신학, 리츨 학파 |
주요 제자 | 카를 바르트 빌헬름 부세트 윌리엄 애덤스 브라운 아돌프 켈러 루돌프 한트만 에마누엘 히르슈 윌리엄 밀러 맥밀런 아서 쿠시먼 맥기퍼트 프리드리히 루프스 빌헬름 파우크 프리드리히 리텔마이어 카를 슈미트 나타니엘 슈미트 엘리자베트 슈미츠 하인리히 숄츠 헨리 넬슨 위먼 |
2. 생애
1851년 리보니아의 도르파트(Dorpatde, 현재 에스토니아의 타르투)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교(1876년), 기센 대학교(1879년), 마르부르크 대학교(1886년)를 거쳐 베를린 대학교(1888년-1921년)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14년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아 '폰 하르나크'(von Harnack)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879년 기센 대학교 교회사 정교수로 초빙되었으며, 1886년 마르부르크 대학교를 거쳐 1888년 보수적인 교회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890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으며, 베를린에서는 사도신경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서품 후보자에게 적합한 더 간결한 신앙 선언을 선호했다.[2]
주요 저서로는 1899년부터 1890년까지 베를린 대학교 학생 600여 명에게 강의한 내용을 출간한 《기독교의 본질》(Wesen des Christentumsde)[11]과 《교리사》[12] 등이 있다. 1885년 출판된 《교리사 교본》(''Lehrbuch der Dogmengeschichte'')에서 하르나크는 교회의 교리가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혼합으로 인해 비기독교적인 믿음과 관행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개신교가 교의를 거부하고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2]
1893년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까지의 초기 기독교 문헌 역사를 출판했으며, 1900년에는 ''Das Wesen des Christentums''(《기독교의 본질》)을 출간했다. 이후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1902년) 등 역사 저작과 ''Beitrage zur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1906년 이후) 등 신약 연구서를 출간했다.[2]
2. 1. 초기 생애
1851년 리보니아의 도르파트(Dorpatde, 현재 에스토니아의 타르투)에서 독일인 신학 교수 테오도시우스 하르나크(Theodosius Harnack)의 아들로 태어났다.[2]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타르투(독일명 돌파트)에서 태어난 그는 1868년 돌파트 대학교(교원과 학생 중 독일 이민자가 많았고, 수업도 상당수가 독일어로 진행되어 일반적으로 독일식 발음인 돌파트 대학교로 불림)에 입학했다. 1872년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옮겨 같은 해 박사 논문 『그노시스주의의 역사에 대한 자료 비판에 관하여 (Zur Quellenkritik der Geschichte des Gnostizismus)』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874년 대학 교수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187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외원 교수가 되었다. 1877년 당시 독일을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명이었던 알브레히트 리칠과 알게 되었고, 이후 리칠 학파의 일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1879년 12월 27일에 아말리에 티어슈와 결혼했다. 그들의 딸 아그네스 폰 잔-하르나크는 여성 운동의 활동가가 되었다.
2. 2. 학문 활동
1876년 에밀 슈러 등과 함께 서평지 《신학 서평》(Theologische Literaturzeitung)을 창간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882년에는 게프하르트와 공동으로 《고대 기독교 문헌의 역사: 본문과 교주》(Texte und Untersuchungen zur Geschichte der altchristlichen Literatur) 시리즈 간행을 시작하여 2019년 현재 187권 이상 출간되었다. 1886년/1887년에는 신학 평론지 《기독교 세계》(Die Christliche Welt)를 창간했으나, 1941년 폐간되었다.[2]1890년 프로이센 학술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초기 300년간의 그리스 교부'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교회 교부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50권 이상이 간행되었다. 1900년에는 《프로이센 학술 아카데미사》 간행 책임을 맡았으며, 후에 동 아카데미 총재직에 취임했다.
1890년 독일 복음주의 사회 협의회(Evangelisch-Sozialer Kongress) 창설에 참여하여 후에 의장(1902년-1912년)을 역임했다.
딜타이, 델브뤼크 등과 함께 여성 교육 진전을 지원하여 독일 대학에 여성의 입학 및 박사 학위 취득에 기여했다. 1925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미우라 안나(Anna Stange, 후에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미우라 테루와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와, 릿쿄 대학 교수가 됨)는 하르나크의 제자이다.[2]
2. 3. 주요 활동
하르나크는 1876년 에밀 슐러 등과 함께 서평지 《신학 서평》(Theologische Literaturzeitung)을 창간했는데, 이 서평지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2] 1882년에는 게프하르트와 공동으로 《고대 기독교 문헌의 역사: 본문과 교주》(Texte und Untersuchungen zur Geschichte der altchristlichen Literatur) 시리즈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2019년 현재 187권 이상 출간되었다.[2] 1886/7년에는 신학 평론지 《기독교 세계》(Die Christliche Welt)를 창간했으나 1941년에 폐간되었다.1890년에는 프로이센 학술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초기 300년간의 그리스 교부'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교회 교부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50권 이상이 간행되었다. 또한 1900년에는 《프로이센 학술 아카데미사》 간행의 책임을 맡았으며, 후에 동 아카데미 총재직에 취임했다.
같은 해, 독일 복음주의 사회 협의회(Evangelisch-Sozialer Kongress)를 공동 창설했고, 1902년부터 1912년까지 의장을 역임했다.
또한 빌헬름 딜타이, 델브뤼크 등과 함께 여성 교육 진전에 힘써 독일 대학에 여성의 입학 및 박사 학위 취득에 기여했다. 1925년 여성 최초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미우라 안나(Anna Stange, 훗날 교토 제국 대학 교수인 미우라 테루와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 대학 교수가 됨)는 하르나크의 제자이다.
2. 4. 여성 교육 지원
하르나크는 딜타이, 델브뤼크 등과 함께 여성 교육 진전에 기여하여, 독일 대학에 여성의 입학 및 박사 학위 취득을 가능하게 했다.[2] 1925년 베를린 대학교에서 여성 최초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미우라 안나(교토제국대학 교수 미우라 테루와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 대학 교수가 됨)는 하르나크의 제자이다.[2]2. 5. 말년

1905년부터 1921년까지 하르나크는 베를린 왕립 도서관(1918년부터 프로이센 국립 도서관으로 불림)의 총 책임자였다.
독일의 많은 자유주의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하르나크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을 환영했고, 독일의 전쟁 목표를 지지하는 공개 성명 (93인의 선언)에 서명했다. 카를 바르트는 스승인 하르나크의 서명이 담긴 이 성명을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는 주요 원동력으로 인용했다.[2]
하르나크는 1911년에 카이저 빌헬름 학회(KWG)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초대 회장이 되었다. 학회의 활동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하르나크는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해 느껴진 독일 학자들의 고립을 극복하는 주요 수단으로 이 학회를 이끌었다. 1929년에 문을 연 베를린의 학회 대표 회의 센터인 하르나크 하우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미국 육군의 관리 하에 있다가, 현재는 KWG의 후계 기관인 막스 플랑크 학회의 관리 하에 독일 수도의 국제적인 지적 생활의 중심지로서 하르나크가 구상한 역할을 재개했다.
1926년에는 학술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국가 독수리 방패 훈장 (Adlerschild des Deutschen Reiches)을 수상했다. 1930년 막스 플랑크 의학 연구소의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했다.
3. 신학 사상
하르나크는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알브레히트 리츨의 사상을 계승하고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가장 순수한 기독교의 모습으로 보았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교회 중심적인 구원사관과 교회의 권위를 비판했으며, 고대 기독교의 교의사가 '복음의 헬레니즘화' 과정, 즉 예수의 복음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변질된 역사라고 주장했다.
하르나크의 신학 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복음의 헬레니즘화 비판: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헬라화되면서, 예수의 가르침이 사도 바울로에 의해 예수에 대한 종교로, 더 나아가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신격화하는 성육신 교리로 변형되었다고 보았다.[13]
- 종교 개혁의 의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헬레니즘화된 기독교에서 벗어나 예수 복음의 본질을 회복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교회 권위에 대한 비판: 동시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권위적인 모습에 비판적이었으며, 사도신경을 비판하는 목사가 교회 당국에 의해 처벌받는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 기독교의 본질: 저서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1900년)에서 교파, 교리, 교회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이고 내면적으로 예수의 복음과 결합하는 것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그는 복음이 '예수가 말한 복음'과 '예수에 대해 말해진 복음'의 이중 구조를 가진다고 주장하여 전통적인 신학계로부터 비판받았다.
- 마르키온 연구: 마르키온에 관한 연구서 『마르키온(Marcion)』(1924년)에서 구약 성경을 배제하고 일부 신약 성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한 마르키온을 프로테스탄트의 선구자로 평가하여 반유대주의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현재는 하르나크의 저작에서 반유대주의적 경향을 찾기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8]
3. 1. 자유주의 신학
하르나크는 1873년부터 1912년까지 많은 종교 논문을 썼으며, 사회적인 복음을 주창했다. 19세기 독일 교회에는 더욱 고도화된 성서비평학이 왕성했으며, 성서(성경)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방법이 표준화되었다. 이는 모두 하르나크의 업적을 따르는 것이다. 하르나크는 초대 기독교 문서들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밝혀냈으며, 초대 교회의 교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요한 복음서를 배척하고 공관 복음서를 중시했다.[13]하르나크는 예수의 가르침을 하느님 나라와 도래, 성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더욱 숭고한 정의와 사랑의 계명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보았다.[13]
하르나크 연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교회 역사와 신약 성서 연구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했다. (즉,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없는 연구 금지 구역은 없었다.)
- 사변적인 신학(정통주의 또는 자유주의)에 대한 불신을 가졌다.
- 종교적 삶으로서의 실천적인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
- 신학 체계가 아니었다.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연설 중 일부는 "사회 복음에 관한 에세이"(1907년)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하르나크는 네 복음서 모두 "역사적 자료로서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단순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여겼다.[3]
하르나크는 성서의 기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
"자연의 질서는 침해될 수 없지만, 우리는 아직 자연 안에서 작용하고 다른 힘과 상호 작용하는 모든 힘을 알지 못합니다. 물질에 내재된 힘과 그 작용 영역에 대한 우리의 지식조차 불완전하며, 정신적 힘에 대해서는 훨씬 더 적게 알고 있습니다. 강한 의지와 굳건한 믿음이 신체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 경이로운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지금까지 누가 가능한 것과 실제적인 것의 경계를 확실하게 정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영혼이 영혼에, 영혼이 몸에 미치는 영향이 어디까지인지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현상도 완전히 오류와 망상에 근거한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지만, 경이롭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많습니다. 현재 우리의 지식 상태에서 우리는 고대에서 전해져 내려온 기적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더욱 신중하고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지구의 궤도가 멈췄고, 암컷 당나귀가 말을 했으며, 폭풍이 한 마디로 잠잠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으며, 다시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 걷고, 눈먼 사람이 보고, 귀먹은 사람이 들었다는 것은 환상으로 그렇게 쉽게 간주될 수 없을 것입니다."[4]
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서서 리츨의 사상을 계승한 하르나크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가장 순수한 기독교로의 회귀로 간주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견해로 여겨지는 교회 중심의 구원사관이나, 그것과 일체적으로 이야기되는 구원에 관한 교회의 권위를 배척했다. 주저 『교의사 교본(Lehrbuch der Dogmengeschichte)』(전 3권, 제4판, 1909년-1910년)에 따르면, 특히 고대 기독교의 교의사는 '복음의 헬레니즘화', 즉 예수의 복음이라는 '핵'을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철학)라는 '껍질'이 덮고 있던 역사이며, 비대해진 '껍질'을 제거하고 '핵'을 재발견한 것이 종교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의 복음에 대한 원초적 회귀를 프로테스탄티즘의 본질로 삼는 입장에서, 동시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권위적인 행동에 비판적이었고, 사도신경을 비판하는 목사가 교회 당국에 처분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 당국을 비판하는 논조를 펼쳤다. 이 때문에 교회 당국으로부터 냉대받아, 베를린 대학교 전근 시 인사상의 방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신학자이면서도 교회의 요직이나 영예와는 오랫동안 인연이 없었다. 교회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이행함과 동시에 교회가 국가의 한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그 모습을 크게 변화시킬 수밖에 없게 된 이후이다.
예수의 복음에 대한 집중은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초판, 1900년)에서 더욱 강조되었으며, 교파 특유의 교리나 교회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이고 내재적으로 예수의 복음과 결합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관은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 책은 독일에서 1950년까지 성경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팔린 종교서의 지위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최소 14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하르나크는 이 책에서, 복음이란 '예수가 말한 복음'과 '예수에 대해 말해진 복음'의 이중 구조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신학적 이해 측면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 외에도, 마르키온에 관한 연구서 『마르키온(Marcion)』(제2판, 1924년)에서, 구약 성경을 모두 배제하고, 스스로 개변한 루카 복음서 및 목회 서신과 히브리서를 제외한 10개의 바울 서신만을 정경으로 한 마르키온을 프로테스탄트의 선구자로 시사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부버 등에 의해 반유대주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다만 하르나크는 1930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나치스의 정권 획득을 알 수도 없었다). 현재는 하르나크나 그의 저서에서 반유대주의적 경향을 발견하는 시각은 거의 없다.[8]
3. 2. 교의사 연구: 복음의 헬레니즘화
하르나크는 《교리사》(1886년~1889년)를 저술할 정도로 뛰어난 교리사학자였으며,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주교 등 초대교회 교부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헬라화되면서, 예수의 가르침이 사도 바울로에 의해 예수에 대한 종교로, 더 나아가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신격화하는 성육신 교리로 변형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복음은 각 시대마다 역사 형식은 달랐지만,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13]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따르며 알브레히트 리츨의 사상을 계승한 하르나크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가장 순수한 기독교로의 회귀로 여겼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교회 중심의 구원사관과 구원에 관한 교회의 권위를 배척했다. 하르나크는 저서 『교의사 교본』(전 3권, 제4판, 1909년~1910년)에서 초기 기독교의 교의사를 '복음의 헬레니즘화', 즉 예수의 복음이라는 '핵'을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철학)라는 '껍질'이 덮고 있던 역사로 보았다. 그는 종교 개혁이 비대해진 '껍질'을 제거하고 '핵'을 재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르나크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원초적 회귀를 프로테스탄티즘의 본질로 보았으며, 동시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권위적인 행동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사도신경을 비판하는 목사가 교회 당국에 처분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 당국을 비판하는 논조를 펼쳤다.
3. 3. 기독교의 본질
하르나크는 예수의 가르침을 하느님 나라와 도래, 성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더욱 숭고한 정의와 사랑의 계명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보았다.[13]하르나크는 성서의 기적에 대해 미묘한 견해를 가졌으며, 특정 유형을 구분했다. 그는 "자연의 질서는 침해될 수 없지만, 우리는 아직 자연 안에서 작용하고 상호 작용하는 모든 힘을 알지 못한다. 물질에 내재된 힘과 그 작용 영역에 대한 우리의 지식조차 불완전하며, 정신적 힘에 대해서는 훨씬 더 적게 알고 있다. 강한 의지와 굳건한 믿음이 신체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 경이로운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지금까지 가능한 것과 실제적인 것의 경계를 확실하게 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혼이 영혼에, 영혼이 몸에 미치는 영향이 어디까지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이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현상도 완전히 오류와 망상에 근거한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기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지만, 경이롭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많다. 현재 우리의 지식 상태에서 우리는 고대에서 전해져 내려온 기적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더욱 신중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지구의 궤도가 멈췄고, 암컷 당나귀가 말을 했으며, 폭풍이 한 마디로 잠잠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으며,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 걷고, 눈먼 사람이 보고, 귀먹은 사람이 들었다는 것은 환상으로 그렇게 쉽게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4]
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서서 리츨의 사상을 계승한 하르나크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가장 순수한 기독교로의 회귀로 간주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견해로 여겨지는 교회 중심의 구원사관이나, 그것과 일체적으로 이야기되는 구원에 관한 교회의 권위를 배척했다. 주저 『교의사 교본(Lehrbuch der Dogmengeschichte)』(전 3권, 제4판, 1909년-1910년)에 따르면, 특히 고대 기독교의 교의사는 '복음의 헬레니즘화', 즉 예수의 복음이라는 '핵'을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철학)라는 '껍질'이 덮고 있던 역사이며, 비대해진 '껍질'을 제거하고 '핵'을 재발견한 것이 종교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의 복음에 대한 집중은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초판, 1900년)에서 더욱 강조되었으며, 교파 특유의 교리나 교회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이고 내재적으로 예수의 복음과 결합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관은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 책은 독일에서 1950년까지 성경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팔린 종교서였으며, 최소 14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하르나크는 이 책에서 복음이란 '예수가 말한 복음'과 '예수에 대해 말해진 복음'의 이중 구조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신학적 이해 측면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3. 4. 성서 비평
1873년부터 1912년까지 많은 종교 논문을 썼으며, 사회적인 복음을 주창했다. 19세기 독일 교회에는 더욱 고도화된 성서비평학이 왕성했으며, 성서(성경)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방법이 표준화되었다. 이는 모두 하르나크의 업적을 따르는 것이다. 하르나크는 초대 기독교 문서들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밝혀내고, 초대 교회의 교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요한 복음서를 배척하고 공관 복음서를 중시했다.[3]하르나크는 교회 역사와 신약 성서 연구에 있어 어떠한 제한도 없는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했으며, 사변적인 신학(정통주의 또는 자유주의)을 불신하고, 종교적 삶으로서의 실천적인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신학은 체계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연설 중 일부는 "사회 복음에 관한 에세이"(1907년)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하르나크는 네 복음서 모두 "역사적 자료로서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단순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여겼다.[3]
하르나크는 성서의 기적에 대해 미묘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음과 같이 특정 유형을 구분했다.
"자연의 질서는 침해될 수 없지만, 우리는 아직 자연 안에서 작용하고 다른 힘과 상호 작용하는 모든 힘을 알지 못합니다. 물질에 내재된 힘과 그 작용 영역에 대한 우리의 지식조차 불완전하며, 정신적 힘에 대해서는 훨씬 더 적게 알고 있습니다. 강한 의지와 굳건한 믿음이 신체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에게 경이로운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가능한 것과 실제적인 것의 경계를 누가 확실하게 정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영혼이 영혼에, 영혼이 몸에 미치는 영향이 어디까지인지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현상도 완전히 오류와 망상에 근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지만, 경이롭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많습니다. 현재 우리의 지식 상태에서 우리는 고대에서 전해져 내려온 기적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더욱 신중하고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지구의 궤도가 멈췄고, 암컷 당나귀가 말을 했으며, 폭풍이 한 마디로 잠잠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으며, 다시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 걷고, 눈먼 사람이 보고, 귀먹은 사람이 들었다는 것은 환상으로 그렇게 쉽게 간주될 수 없을 것입니다."[4]
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서서 리츨의 사상을 계승한 하르나크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가장 순수한 기독교로의 회귀로 간주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견해로 여겨지는 교회 중심의 구원사관이나, 구원에 관한 교회의 권위를 배척했다. 그의 주저 『교의사 교본(Lehrbuch der Dogmengeschichte)』(전 3권, 제4판, 1909년-1910년)에 따르면, 고대 기독교의 교의사는 '복음의 헬레니즘화', 즉 예수의 복음이라는 '핵'을 그리스(헬레니즘) 문화(철학)라는 '껍질'이 덮고 있던 역사이며, 종교 개혁은 비대해진 '껍질'을 제거하고 '핵'을 재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수의 복음에 대한 원초적 회귀를 프로테스탄티즘의 본질로 삼는 하르나크는, 동시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권위적인 행동에 비판적이었다. 사도신경을 비판하는 목사가 교회 당국에 처분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 당국을 비판하는 논조를 펼쳤다.
예수의 복음에 대한 집중은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초판, 1900년)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교파 특유의 교리나 교회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이고 내재적으로 예수의 복음과 결합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기독교관은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 책은 독일에서 1950년까지 성경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팔린 종교서였으며, 최소 14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하르나크는 이 책에서 복음이란 '예수가 말한 복음'과 '예수에 대해 말해진 복음'의 이중 구조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신학적 이해 측면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마르키온에 관한 연구서 『마르키온(Marcion)』(제2판, 1924년)에서, 하르나크는 구약 성경을 모두 배제하고, 스스로 개변한 루카 복음서 및 목회 서신과 히브리서를 제외한 10개의 바울 서신만을 정경으로 한 마르키온을 프로테스탄트의 선구자로 시사했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부버 등에게 반유대주의 혐의를 받게 되었으나(하르나크는 1930년에 사망하여 나치스의 정권 획득을 알 수 없었다), 현재는 하르나크나 그의 저서에서 반유대주의적 경향을 발견하는 시각은 거의 없다.[8]
3. 5. 사도신조 논쟁
근대 유럽교회에서는 사도신경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도신경이 정말 사도로부터 계승(사도적 전승)되었는지,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설명하는지, 신화적 표현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수용해야 할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14] 종교개혁의 정신을 강조하는 개신교 정통주의 기독교인들도 사도신경의 교리적 불충분성을 지적했다.[14] 1871년 세례 집전 시 어느 목사가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아 성직에서 해임될 정도로, 사도신경 수용 논쟁은 독일 개신교회 내에서 치열해졌고, 아돌프 폰 하르나크는 이 문제에 개입해야 했다.[14] 그는 사도신경을 대신할 신조(Creed)를 가져도 된다고 보았으며,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일부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14] 하지만 그는 사도신경 수용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14] 단지 사도신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만 믿음 좋은 신자이거나 성숙한 신학을 가진 것은 아니며, 사도신경의 기본적인 내용에 동의한다면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보았다.[14] 즉, 폰 하르나크는 사도신경 수용 강요에 대해 반대한 것이지, 사도신경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14]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서서 리츨의 사상을 계승한 하르나크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가장 순수한 기독교로의 회귀로 간주했다. 그는 동시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권위적인 행동에 비판적이었고, 사도신경을 비판하는 목사가 교회 당국에 처분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 당국을 비판하는 논조를 펼쳤다.
4. 주요 저작
하르나크의 저서는 생전에 간행된 것만 49권에 달하며, 그 외 논문, 평론, 잡지에 기고한 단문 등을 포함하면 1,600편이 넘는다고 한다.
다음은 주요 저서 목록이다.
- 『교의사 교본』 전 3권 (미번역)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1. Aufl. 1886, 4. Aufl. 1909/1910. 가장 유명한 하르나크의 학술서이다. 성서 시대부터 종교 개혁 시기까지의 기독교 교의 역사를 다룬다. 현재 입수 가능한 2015년판(Neuausgabe 2015)에는 베를린 대학교 교수 크리스토프 마크시스의 서문이 붙어 있지만, 본문 텍스트는 1909/10년판의 리프린트이다.
5. 평가 및 영향
카를 바르트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하여, 20세기 후반기에는 고려되는 일이 적었지만, 하르나크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차세대 신학자인 바르트, 불트만, 슈바이처 등은 베를린 대학교 재학 중에 하르나크에게 직접 배웠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반 나치 기독교인에 의해 조직된 고백교회에서 활동한 오토 디베리우스, 본회퍼 등은 하르나크의 세미나생이었다.[9]
5. 1. 긍정적 평가
파울 틸리히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 사상사』에서 하르나크를 "리츨 학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틸리히는 하르나크의 업적 중 복음의 헬레니즘화, 영지주의의 영향과 거부, 이중 복음 설의 지적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복음의 헬레니즘화를 제시한 것은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촉진했고, 영지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또한 예수의 복음을 바울로의 메시지와 분리하여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3복음서를 중심으로 찾아내려는 것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9]。이러한 하르나크의 신학적 방법론은 다음 세대 신학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5. 2. 비판적 평가
카를 바르트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하여, 20세기 후반기에는 고려되는 일이 적었던 하르나크이지만,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다. 차세대 신학자인 바르트, 불트만, 슈바이처 등은 베를린 대학교 재학 중에 하르나크에게 직접 배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반 나치 기독교인에 의해 조직된 고백교회에서 활동한 오토 디베리우스, 본회퍼 등은 하르나크의 세미나생이었다.파울 틸리히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하르나크를 "리츨 학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라고 평하며, 복음의 헬레니즘화, 영지주의의 영향과 거부, 이중 복음 설의 지적을 하르나크의 업적 중에서 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복음의 헬레니즘화를 제시한 것은,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촉진하고, 영지주의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였으며, 예수의 복음을 바울로의 사신과 분리하여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3복음서를 중심으로 찾아내려는 것에 기여했다고 한다[9]。이러한 신학적 방법론은 차세대 신학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5. 3. 후대에 미친 영향
카를 바르트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하여, 20세기 후반기에는 고려되는 일이 적었던 하르나크이지만,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다. 차세대 신학자인 바르트, 불트만, 슈바이처 등은 베를린 대학교 재학 중에 하르나크에게 직접 배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반 나치 기독교인에 의해 조직된 고백교회에서 활동한 오토 디베리우스, 본회퍼 등은 하르나크의 세미나생이었다.파울 틸리히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하르나크를 "리츨 학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라고 평하며, 복음의 헬레니즘화, 영지주의의 영향과 거부, 이중 복음 설의 지적을 하르나크의 업적 중에서 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복음의 헬레니즘화를 제시한 것은,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촉진하고, 영지주의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였으며, 예수의 복음을 바울로의 사신과 분리하여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3복음서를 중심으로 찾아내려는 것에 기여했다고 한다[9]。이러한 신학적 방법론은 차세대 신학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5. 4. 한국에 미친 영향
카를 바르트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하여, 20세기 후반기에는 고려되는 일이 적었던 하르나크이지만,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다. 차세대 신학자인 바르트, 불트만, 슈바이처 등은 베를린 대학교 재학 중에 하르나크에게 직접 배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반 나치 기독교인에 의해 조직된 고백교회에서 활동한 오토 디베리우스, 본회퍼 등은 하르나크의 세미나생이었다.[9]파울 틸리히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하르나크를 "리츨 학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라고 평하며, 복음의 헬레니즘화, 영지주의의 영향과 거부, 이중 복음 설의 지적을 하르나크의 업적 중에서 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복음의 헬레니즘화를 제시한 것은,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촉진하고, 영지주의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였으며, 예수의 복음을 바울로의 사신과 분리하여 마태오, 마르코, 루카의 3복음서를 중심으로 찾아내려는 것에 기여했다고 한다.[9] 이러한 신학적 방법론은 차세대 신학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쳤다.
베를린 대학교에 유학한 일본인 중, 아베 이소오, 하라다 스케, 하타노 세이이치, 구로사키 코키치 등은 하르나크의 강의를 직접 청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가 된 Arthur Cushman McGiffert|A・C・매기퍼트영어는 독일 유학 중에 하르나크에게 지도를 받았다.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매기퍼트에게 지도를 받은 일본인 신학자 아리가 테츠타로, 히노 마스미, 우오키 츄이치 등은 하르나크의 손자 제자라고 할 수 있다.
6. 정치 참여
1886년, 프로이센 문부성 관료로서 대학 행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프리드리히 알트호프와 친분을 맺었다. 알트호프의 지원으로 프로이센 영방 교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대학교에 부임하게 되었고, 이후 정치에도 참여하게 되었다.[1]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재상 베트만 홀베크의 신임을 받아 여러 차례 조언을 했다.[1]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에는 독일 황제의 개전 연설을 초안했다. 더 나아가 전쟁을 지지하는 93인의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 선언"에도 서명했지만, 이듬해에는 델브뤼크 등과 함께 온건한 조기 종전을 요구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1]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후, 바이마르 국민 의회의 요청에 따라 국립 대학교 신학부의 의의에 대해 제언을 하고, 독일 국립 대학교의 신학부 존속에 기여했다. 또한, 바이마르 정부로부터 주미 독일 대사 취임을 요청받았지만 거절했다.[1]
참조
[1]
문서
German language
[2]
간행물
Harnack, Adolf
EB1911
[3]
서적
What Is Christianity?
https://archive.org/[...]
Williams and Norgate, London
1901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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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Williams and Norgate, London
1901
[5]
웹사이트
ハルナック
https://kotobank.jp/[...]
ブリタニカ・ジャパン
2024-01-01
[6]
웹사이트
ハルナック
https://kotobank.jp/[...]
平凡社
2024-01-01
[7]
서적
オックスフォードキリスト教辞典
教文館
2017
[8]
서적
アドルフ・フォン・ハルナックにおける「信条」と「教義」
教文館
[9]
서적
ティリッヒ著作集 別巻3:キリスト教思想史II
白水社
[10]
웹사이트
マルキオン : 異邦の神の福音
https://iss.ndl.go.j[...]
2023-12-29
[11]
웹사이트
한국어판《기독교의 본질》(오흥명 옮김,한들출판사 刊)설명
http://book.naver.co[...]
[12]
서적
기독교인물사상사전
홍성사
[13]
서적
기독교 인물사상사전
홍성사
[14]
서적
이야기교회사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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