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목상효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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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목상 효수 사건은 1863년 2월 교토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낭인들이 아시카가 쇼군 3인의 목상을 탈취하여 가모가와 강변에 효수한 사건이다. 존왕양이 사상이 고조된 상황에서 일어났으며, 히라타 국학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다수 관여했다. 사건 이후 에도 막부는 범인 체포 및 처형을 명령했고,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강경책으로 전환하여 존왕양이파를 탄압했다. 이 사건은 존왕양이 운동이 무력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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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목상효수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아시카가 목상 효수 사건 |
발생 시기 | 분세이 8년 (1825년) 3월 |
발생 장소 | 교토 |
주동자 | 오사카의 요시타 상인 |
관련 인물 |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카즈 아시카가 요시마사 미우라 고로 다키야마 |
사건 배경 | |
사회적 배경 | 에도 시대 후기 사회 불안 및 천황 중심의 국학 사상 대두 |
경제적 배경 | 요시타 상인의 경제적 어려움 및 불만 |
사건 전개 | |
목상 효수 | 아시카가 쇼군 3대의 목상을 교토에서 효수 |
주동자 체포 | 오사카 정봉행에 의해 주동자 체포 |
처벌 | 주동자는 참수, 목상은 강가에 버려짐 |
사건 영향 | |
정치적 영향 | 에도 막부의 권위 실추 및 사회 불안 심화 |
사상적 영향 | 존왕양이 운동의 촉진 및 메이지 유신의 간접적 영향 |
역사적 평가 | 에도 시대 사회상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평가 |
추가 정보 | |
관련 사건 | 소세이시 사건 등 유사한 사회 비판 사건 |
2. 사건의 배경
오하라 시게노리와 산조 사네토미 두 칙사가 시마즈 히사미쓰가 주도한 분큐의 개혁을 통해 봉칙양이(奉勅攘夷) 방향으로 크게 기울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상경을 결정하고, 쇼군 후견직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분큐 2년(1862년) 12월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향했다.[4] 데와국구보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도 분큐 3년(1863년) 1월 상경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구보타 번의 에도 정부사로 있으면서 기후샤를 주재하며 전국 히라타파를 거느리던 히라타 가네타네(히라타 아쓰타네의 양자)도 분큐 2년 11월 27일 에도 가로(家老) 우쓰노미야 노리쓰나를 수행하는 형태로 상경을 명받았다.[4] 가네타네의 측근 스다 다다유키, 노시로 세이다유, 고바야시 요이치로가 동행했다.[4] 아버지에 이어 가네타네의 장남 히라타 노부타네, 차남 미키 데쓰야도 상경했다. 히라타 부자의 상경과 국사 알선을 기회로 무사시국이루마군의 곤다 나오스케를 비롯한 히라타 국학파들이 잇따라 교토에 집결하여 봉칙양이 운동을 더욱 촉진하려 했다.[4] 당시 교토는 히라타 문인들이 총집결하는 양상을 띠었다.[4] 이 사건은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했으며,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4]
분큐 3년 (1863년4월 9일) 심야에, 교토의 도지인 영광전에 안치되어 있던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타카우지, 2대 요시아키라, 3대 요시미츠의 목상 머리와 위패가 옮겨졌다. 머리는 가모가와의 산조가와라에 내걸렸고, "정당한 황통인 남조에 대한 역적"이라는 죄상이 게시되었다.[3]
이토 요시미치, 우메무라 신이치로(시마바라 번), 이시카와 하지메(돗토리 토칸신덴 번), 센고쿠 사타오(돗토리 번), 오카 모토타로, 노로 큐자에몬(오카야마 번), 나카지마 시키인(도쿠시마 번), 키타무라 요시사다(히메지 번), 스다 타다유키(이와무라다 번 출신 신직), 미와다 모토츠나(이요국 출신 신직), 모로오카 마사타네, 아오야기 타카토모, 나가오 이쿠사부로, 타케베 켄이치로, 오미국의 호상 국학자 니시카와 키스키, 타카마츠 헤이쥬로(홋신잇토류 호도관 사범), 미야와다 유타로 (검객 미야와다 또자에몬의 아들), 고무로 리키조 등 히라타 파 국학의 문인이었다. 아이즈 번사 오바 쿄헤이나 나가사와 사네토도 관여했다.
에도 막부는 이 사건을 단순한 문화재 훼손이 아닌, 막부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특히 아시카가 쇼군의 목상을 효수한 것은 암암리에 "도막"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어 경계심을 높였다.[4] 이 사건이 에도에서 공모된 낭사조의 상락 직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도발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히라타 아쓰타네: 존왕양이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국학자였다.[4]
[1]
웹사이트
コトバンク「足利氏木像梟首事件」
https://kotobank.jp/[...]
3. 사건의 경위
범인은 부상(富商), 농민, 의사, 낭사 등 10여 명으로, 히라타 파 국학의 문인이었으며, 아이즈 번사 오바 쿄헤이나 나가사와 사네토도 관여했다. 범인들의 구체적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이름 출신 및 신분 이토 요시미치 우메무라 신이치로 시마바라 번 이시카와 하지메 돗토리 토칸신덴 번 센고쿠 사타오 돗토리 번 오카 모토타로 노로 큐자에몬 오카야마 번 나카지마 시키인 도쿠시마 번 키타무라 요시사다 히메지 번 스다 타다유키 이와무라다 번 출신 신직 미와다 모토츠나 이요국 출신 신직 모로오카 마사타네 아오야기 타카토모 나가오 이쿠사부로 타케베 켄이치로 오미국의 호상 국학자 니시카와 키스키 건어물 도매상 니시카와야를 운영하는 상인, 국학을 배워 존황파의 사숙 귀정관을 열었다. 타카마츠 헤이쥬로 홋신잇토류 호도관 사범 미야와다 유타로 검객 미야와다 또자에몬의 아들 고무로 리키조
오하라 시게노리와 산조 사네토미 양 칙사의 하향과 시마즈 히사미쓰가 주도하는 분큐의 개혁을 거쳐 시류는 봉칙양이의 방향으로 크게 기울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상락 결정과 함께 그에 앞서 쇼군 후견직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에도를 출발하여 교토로 향했다.[4]
데와국구보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도 상락하게 되어, 구보타 번에 있으면서 기후샤를 주재하며 전국의 히라타파를 거느리는 입장이었던 히라타 가네타네(히라타 아쓰타네 양자)도 상락을 명받았다.[4] 가네타네의 측근이었던 스다 타다유키 등이 동행했다.[4] 히라타 가네타네의 장남, 차남, 곤다 나오스케를 비롯한 히라타 국학 무리들이 잇따라 교토에 집결하여 봉칙양이 운동을 펼쳤다.[4] 당시 교토는 히라타 문인 총결집의 양상을 띠었고, 이 사건은 이러한 찰나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상황을 고려하면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4]
히라타 가네타네 자신은 번의 명을 받아 상경한 것이고, 이 사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문도들의 행위가 옳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4. 사건 가담자
5. 사건의 영향 및 결과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 사건에 격노하여 범인 체포를 명했다. 낭사들의 봉기 우려도 있었으나, 범인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건 이후 낭사 단속은 강화되었다.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이전까지 도막파와도 협력하는 유화 정책을 취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전환하여 미부 로시(후의 신센구미)를 활용하여 존왕양이파를 탄압했다.
그러나 범인 전원이 체포된 것은 아니었다. 고무로 리키조와 나카지마 에이키치는 도피하여 도쿠시마 번에 수감되었고, 스다 다다유키는 이나 계곡에 잠복했다. 모로오카 마사타네와 오바 교헤이는 체포되었지만, 사쓰마 번·조슈 번 양 번주 및 공경들의 배려로 시나노국 우에다 번에서 유폐되었다. 다른 가담자들도 여러 번에 의해 보호받았다. 니시카와 깃스케는 친척에게 맡겨졌지만, 교토의 정세를 에도의 히라타 가네타네에게 보고했다.[4]
메이지 유신 이후, 고무로 리키조, 나카지마 에이키치, 모로오카 마사타네, 스다 다다유키 등 살아남은 가담자들은 신정부에 참여했다.
여성 존왕양이파 지사인 마쓰오 타세코는 나카센도 나카츠가와주쿠에서 교토까지 모리오카 마사타네 등과 함께 행동했다.[6] 마쓰오 타세코는 체포를 피하여 조슈 번 교토 저택에 숨었다.[6] 이후, 마쓰오 타세코는 각지를 경유하여 귀향, '여장부'로 칭송받으며 도막파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어 막부에 쫓기는 인물들을 숨겼다.[6]
이 사건은 존왕양이 운동이 단순한 사상 운동을 넘어 무력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6. 관련 인물
히라타 가네타네: 히라타 아쓰타네의 양자로, 사건 당시 그의 문인들이 교토에 집결해 있었다.[4] 가네타네는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문도들의 행위를 옳다고 여겼다.[4]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교토 수호직으로, 사건 이후 강경책으로 전환하여 존왕양이파를 탄압했다.[4]
마쓰오 타세코: 여성 존왕양이 지사로, 이 사건과 연루되어 활동했다.[6] 나카센도 나카츠가와주쿠에서 교토까지, 모로오카 마사타네, 미와다 모토츠나, 미야와다 유타로 등과 함께 행동했다.[6]
참조
[2]
서적
維新のこころ:孝明天皇と志士たちの歌
明成社
2018-11
[3]
논문
別子銅山煙害対策を巡る住友総理事伊庭貞剛の経営思想
https://doi.org/10.1[...]
法政大学人間環境学会
2016-01
[4]
문서
宮地(1994)pp.246-247
[5]
문서
宮地(1994)p.246
[6]
문서
宮地(2012)p.98
[7]
문서
宮地(2012)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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