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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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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당(일본사)은 일본 중세 시대에 장원이나 공령의 지배 체제를 침범하거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12세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장원 영주와 지토, 고케닌 간의 분쟁 속에서 등장했으며, 13세기 후반에는 몽골의 일본 원정,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으며 활동이 격화되었다. 악당은 혼쇼와 대립하는 쇼칸, 재지 영주, 고케닌, 유통 경제를 담당하는 유덕인 등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났으며, 가마쿠라 막부는 악당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더욱 활발해졌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수호 다이묘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악당은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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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일본사)
악당 (일본사)
정의일본사에서 무력을 배경으로 사회 질서에 저항하거나 기존 권력에 대항한 무리 또는 개인
시대적 배경가마쿠라 시대 말기
무로마치 시대
특징
활동 기반무사
농민
상인
승려
활동 내용영주에 대한 반항
막부에 대한 저항
사찰에 대한 공격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습격
유통 경로 장악
관세 징수
목적경제적 이익 추구
정치적 권력 쟁취
사회적 불만 해소
역사
발생 배경가마쿠라 막부의 통제력 약화
겐코의 난 이후 사회 혼란
쇼엔 체제의 붕괴
농민의 경제적 궁핍
주요 활동 시기남북조 시대 (일본)
무로마치 시대 전기
대표적인 악당구스노키 마사시게
아쿠마로
도키 요리토
평가
긍정적 평가기존 권력에 대한 비판 의식
사회 변혁의 촉진
민중의 저항 정신 대변
부정적 평가사회 질서 파괴
약탈 및 폭력 행위
혼란 야기
현대적 의미
이미지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반체제적 인물
예시아웃로, 의적

2. 용어의 기원과 의미

악당이라는 용어는 원래 고대 장원제가 무너져 가는 과정에서, 장원을 침식해 가는 무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원제에서 장원 영주(본가 및 령가)로부터 현지 관리를 맡았던 장관들이 가마쿠라 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무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때로는 현지 농민과 힘을 합쳐 장원 영주에게 반항하고, 막부(로쿠하라 탄다이)의 개입을 막으며 자신들의 토지 지배권을 굳혀 나갔다.[23]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길어지고 커지면서, 무공을 세워 은상을 받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무사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의 무력을 믿고 싸우고, 때로는 약탈을 일삼으며, 화려한 차림새(바사라)를 즐겼다. 이러한 행동은 기존의 가치관과 대비되어 고대 율령제 이후의 질서 붕괴, 사회의 무질서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고, "악"으로 불리게 되었다.[23]

이러한 의미에서 "악"은 "명령이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 평가를 나타낸다.[23] 악인이나 불량배라는 뜻은 아니며, 사회 상류층도 악당에 포함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히라노 쇼겐 뇨도는 공경 사이온지 킨무네의 가인이었고, 코노에 쇼겐 (종6위상 상당)의 관위를 가진 귀족(종5위하 이상)에 가까운 조정의 관인이었음에도 악당으로 불렸다.

2. 1. 초기 용례

일본 사료에서 '악당'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속일본기레이키 2년(716년) 5월 21일 칙령에 보이는 '주전악당(鋳銭悪党)'이다.[23] 그러나 이 용례는 본 문서에서 다루는 악당과는 다른 의미로 보인다. '악당'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12세기 후반의 '우라베 야스미쓰 문서분실장안(占部安光文書紛失状案)' (에이만 원년(1165년) 3월 21일)이며, 이후 일본 사료에 빈번하게 사용된다.[23]

12세기는 일본 중세 사회경제체제인 장원공령제가 확립된 시기였다. 12세기 후반에 나타난 악당의 용례는 모두 장원이나 공령의 지배체제 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외부에서 침범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23] 예를 들어 안겐 원년(1175년)에 동대사 소유 장원인 구로다 장(이가국 나바리 군)에 난입한 나바리군지 미나모토노 도시카타와 흥복사 승려들은 (당시 사회 기득권층인 겐지이자 승려임에도) 동대사의 문서에서 악당으로 기록되었다.[23]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장원영주쇼칸이 유지하던 지배 체계에 대해 외부에서 침입하거나 흔들어 놓으려는 자들이 관념적으로 ‘악당’으로 간주되었다.[23]

가마쿠라 시대가 시작된 이후에도 13세기 후반분에이 연간까지 혼쇼(장원영주) 입장에서 그들의 영지를 침범하는 '침략자'를 '악당'이라 부르는 경향이 이어졌다. 그러한 '악당' 분쟁의 실태는 혼쇼 일원지들끼리, 또는 혼쇼 일원지와 지토층과의 영지 소유를 둘러싼 분쟁이었으며, 혼쇼의 입장에서 본 악당은 그들의 분쟁 상대가 된 같은 혼쇼 일원지의 영주였다.[23]

12세기부터 혼쇼는 악당들의 소란에 시달려 왔지만, 혼쇼가 토벌을 시도해도 악당들은 다른 영지로 달아나 버리는 등, 혼쇼측의 추포로부터 교묘하게 빠져나가곤 했다. 혼쇼는 종종 가마쿠라 막부에 악당 추포를 요청했지만, 혼쇼끼리의 분쟁은 본래 조정의 관할이었기에 막부는 악당 추포에는 소극적이었다. 고세이바이시키모쿠 제32조에서 도적 · 악당 영지에 숨겨 주는 것은 죄과라고 정하고 있었음에도 막부는 적극적으로 악당을 진압하려는 자세를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24] 재지영주층끼리의(그리고 재지 영주와 장원 영주 사이의) 분쟁 해결 기관으로서 막부가 존재했지만, 그 막부의 관할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 악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쇼카 연간에 기근이 심각해짐에 따라 악당 활동이 격화되자, 막부는 악당을 야토 · 강도 · 산적 · 해적과 동등시하기로 결정하고(쇼카 2년 가마쿠라 막부 추가법 320조[24]), 그 진압에 나서게 된다.

2. 2. 의미 변화

초기에는 장원(荘園)이나 공령(公領)의 지배 체제를 외부에서 침범하는 자들을 가리켰다.[23] 안겐 원년(1175년)에 도다이지 소유의 장원인 구로다 장(이가국 나바리 군)에 난입한 미나모토노 도시카타와 고후쿠지 승려들이 도다이지의 문서에서 악당으로 기록된 사례가 있다. 이처럼 장원영주장관이 유지하던 지배 체계에 대해 외부에서 침입하거나 흔들어 놓으려는 자들이 관념적으로 ‘악당’으로 간주되었다.[23]

가마쿠라 시대가 시작된 이후에도, 13세기 후반분에이(文永) 연간까지 혼쇼(장원영주) 입장에서 그들의 영지를 침범하는 '침략자'를 '악당'이라 부르는 경향이 이어졌다.[23] 그러나 쇼카 연간에 기근이 심각해지자, 막부는 악당을 야토, 강도, 산적, 해적과 동등시하고[24] 그 진압에 나서게 된다.

장원제가 무사들의 침식에 의해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침식해 가는 무사들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장원 영주(본가 및 령가)로부터 현지 관리를 하청받던 장관 직에 있던 자들이 가마쿠라 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때로는 현지 농민과 연대하며 장원 영주에게 반항하고, 막부(로쿠하라 탄다이)의 개입을 배제하여 자신의 토지 지배권을 기정사실화해 갔다.

남북조 시대의 동란이 장기화, 대규모화되자, 무공에 따른 은상을 노리고 전국을 전전하는 무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의 무력을 믿고 싸움을 벌이고, 때로는 약탈을 자행하며, 더욱 화려한 차림새(바사라)를 즐겨했다. 이러한 행동 원리가 구래의 가치관과 대비되어, 고대 율령제 이래의 질서 붕괴, 사회의 무질서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지게 되면서 "악"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3. 악당의 발생 배경

13세기 중반부터 일본 중세 사회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12세기 말 이후, 무사 계층을 기반으로 하던 가마쿠라 막부는 여러 차례의 전란을 통해 영지를 재분배하고 고케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그러나 호지 원년(1247년)의 호지 합전을 계기로 도쿠소 전제가 확립되어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영지 재분배의 기회가 될 전란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고케닌들은 총령에게만 영지를 잇게 하는 단독 상속으로 이행해 갔다.[1]

단독 상속을 계기로 총령들은 영지를 집약하고 재지에서의 영지 경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고케닌 계층이 몰락하고, 본소와 재지영주와의 영지 소유 분쟁이 두드러졌다. 장원 지배 내부를 보면, 재지 영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본소는 장원 지배를 강화했지만, 재지에서 장원 지배의 실무를 담당하던 쇼칸들은 자신의 영지 경영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본소와 쇼칸 사이의 대립이 발생했고, 당시 급속히 진행되던 화폐 경제 · 유통 경제의 사회 침투가 이러한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1]

이러한 고케닌 계층 내부 또는 장원 지배 내부의 여러 모순은 일본 중세 사회를 유동적으로 만들었고, 13세기 후반부터 악당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경이 되었다.

3. 1. 사회경제적 변화

13세기 중반, 가마쿠라 막부의 도쿠소 전제(得宗専制) 확립으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고케닌(御家人) 간의 영지 재분배 기회가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고케닌들은 총령(惣領)에게만 영지를 상속하는 단독 상속으로 이행해 갔다.

단독 상속은 총령들이 영지를 집약하고 재지에서의 영지 경영을 진행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서자(庶子)를 중심으로 한 고케닌 계층이 몰락하고, 동시에 본소(本所)와 재지 영주 간의 영지 소유 분쟁이 심화되었다.

장원 지배 내부에서는 재지 영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본소가 장원 지배를 강화하려 했지만, 장원 지배의 실무를 담당하던 쇼칸(荘官)들은 자신의 영지 경영권을 확립하려 했다. 이로 인해 본소와 쇼칸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당시 급속히 진행되던 화폐 경제와 유통 경제의 사회 침투는 이러한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 개념이 확산되면서, 각 토지로부터의 납입 용도가 "절에 대한 공물"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주(예소)(預所)의 수입"과 같은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가시화되었다. 이는 장민(荘民)들의 본소에 대한 정신적 일체감을 약화시키고, 본소의 종교적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러한 고케닌 계층 내부 또는 장원 지배 내부의 여러 모순은 일본 중세 사회의 유동화로 이어져 13세기 후반부터 악당의 활발화를 가져왔다. 게다가 같은 시기의 몽골의 일본 원정 역시 이러한 모순을 더욱 증대시켜 악당들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부추겼다.[1]

3. 2. 몽골의 일본 원정

몽골의 일본 원정은 일본 중세 사회의 모순을 더욱 증대시켜 악당의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었다.[1] 이 시기 가마쿠라 막부호지 원년(1247년)의 호지 합전을 계기로 도쿠소 전제가 확립되어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으나, 이는 전란의 감소로 이어져 고케닌들이 영지를 재분배 받을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1] 그 결과 고케닌들은 총령에게만 영지를 상속하는 단독 상속으로 이행하였고, 이는 서자들을 중심으로 한 고케닌 계층의 몰락을 야기했다.[1]

또한, 장원 지배 내부에서는 혼쇼와 쇼칸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화폐 경제의 침투는 이러한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1]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유동화는 악당의 활성화를 가져왔으며, 몽골의 침입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1]

4. 악당의 전개 양상

외부에서 장원 지배에 침입하는 악당 외에 북방의 에조, 바다에서 해적적인 활동을 하는 아마비토(海民)들도 '악당'으로 불렸다. 이는 지배 체계 외부의 사람들을 '악'으로 간주하는 관념에 근거한다. 여러 구니를 떠도는 예능민(芸能民, 광대패)과 유행승 등이 악당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미노 요시히코는 이러한 '악당'이 13세기 중반부터 일본에서 급속한 성장을 보인 유통 경제 · 자본 경제의 담당자이며, 일본 중세 사회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주체의 하나라고 평가했다.[25]

고안 연간(1278년 ~ 1288년)에 '고안의 역'이라 불리는 몽골의 제2차 일본 원정이 벌어지기도 했던 이 시기 일본에서는 장원 지배 내부의 대립 관계가 표면에 드러났다. 막부는 혼쇼에 대한 쇼칸(재지 영주)층의 저항 활동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고, 혼쇼와 대립한 쇼칸 · 재지영주층은 혼쇼로부터 '악당'이라 불리기 시작하며 혼쇼와의 영지 소유 분쟁을 전개해 갔다. 지토는 혼쇼와 대립하며 장원 침략을 진행해 나가고, 지두청소나 하지중분의 계약을 실시하고 있었다. 즉 가마쿠라 막부라는 배경을 가지지 않고 장원 침략을 진행해 온 재지영주층이 악당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고케닌 계층을 보더라도 단독 상속 등으로 소유할 영지를 잃은 무족(無足) 고케닌이 옛 영지에 잔류하며 신임 지토의 지배를 방해하다 악당으로 불리게 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었다. 히고케닌 뿐만 아니라 고케닌마저도 '악당'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혼쇼와 대립한 쇼칸층에는 ‘떠돌이’ 성격을 지닌 악당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는 각지를 왕래하면서 교역을 접하고 유통 경제의 담당자로서 자본을 축적해 유덕인(有徳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도 있었다. 재지 쇼칸과 대립한 혼쇼는 쇼칸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연공 물자를 운반하는 유통 경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는데, 여기서 연공물자 유통을 담당한 것이 ‘떠돌이’ 악당들이었다.

남북조 내란기에도 악당은 활동했지만, 내란이 끝난 14세기 후반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임명된 슈고들은 각기 지행국내의 재지영주층, 고쿠진들을 피관화하고 슈고 다이묘로서 지배를 강화했다. 악당이라 불리던 무사들에게도 슈고 관직이 주어지고 영지 안도를 받으며 그들은 무력 저항보다는 협조를 통해 당초 자신들이 주장하던 당지행을 확보해 나가는 길을 택했고 차츰 막부의 지배체제 아래 편입되었다.[28] 장원 침략도 슈고 다이묘의 주도로 행해지게 되었고, 악당들에 의해 지배 체제가 약화되어가고 있던 혼쇼는 이에 대항할 힘을 잃었다. '혼쇼의 지배를 침범하는 악당'이라는 실태는 점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의 저명한 악당은 12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도다이지(東大寺) 소유의 영지 구로다 장원(黒田荘, 이가 국 소재)에서 활약한 「구로다 악당(黒田悪党)」 오에 씨(大江氏)이다. 오에 씨는 로쿠하라 단다이에 의해 진압됐지만, 봉어인이라고 칭하며 도다이지를 제치고 조정과 직접 교섭하고자 하거나, 이가 국 슈고 등과 결탁하여 구로다 장원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오에 씨는 다시 진압되기는 했지만, 이 사례는 경제적인 성장을 꾀하는 재지영주가 장원영주의 억압을 받았을 때 악당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밖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의 중심에 있었던 고다이고 천황 편에 섰던 구스노키 마사시게(가와치), 아카마쓰 노리무라(하리마), 나와 나가히데(호키), 세토 내해의 가이조쿠츄(海賊衆) 등은 막부로부터 악당이라 불린 이들이었다.

고전적인 설로서, 무로마치 막부 집사 고노 모로나오(高師直)는 혁신적인 정책을 내세움으로써, 본인이 악당은 아니었지만 악당들로부터 지지를 얻어 대세력이 되었다고 한다.[27]

4. 1. 다양한 악당의 유형

장원 지배 체제 외부에서 활동하던 에조(蝦夷), 해적, 예능민(芸能民), 유행(遊行)승 등도 악당으로 불렸다.[25] 이들은 모두 일본에서 장원공령제적인 지배 체계 바깥에서 떠돌며 살아가는 ‘떠돌이’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었다.[25]

장원 지배 체제 내에서 장원 영주와 대립하는 장관, 재지 영주, 고케닌 등도 악당으로 불렸다. 고안 연간(1278년 ~ 1288년)에 장원 지배 내부의 대립 관계가 표면에 드러나면서, 혼쇼(장원 영주)와 대립한 쇼칸(荘官) · 재지영주층은 혼쇼로부터 '악당'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각지를 왕래하면서 교역에 종사하고 유통 경제를 담당하며 자본을 축적해 유덕인(有徳人)이라고 불리는 자도 있었다.[25]

4. 2. 악당의 활동과 막부의 대응

13세기 후반 이후 악당은 기나이, 도호쿠, 규슈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고세이바이시키모쿠에서 금지했던 악당과 지토의 결합도 나타났다. 악당의 활동은 지배 체계의 유동화를 초래하였으며 막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3세기 말부터 악당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26]

원래 혼쇼 일원의 경찰권·사법권은 혼쇼의 소관으로 조정이 이를 재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악당이 횡행하면서 혼쇼는 조정이 아닌 무력을 가진 막부가 이들을 진압해 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막부로서도 히고케닌이 독자적으로 장원을 침략하거나, 막부의 고케닌이면서 막부 지배를 방해하는 존재는 간과할 수 없었다. 1290년대 전반, 악당 진압 절차가 확립되었다.[26] 우선 혼쇼가 조정에 호소하고, 조정의 소환에 악당이 응하지 않으면 위칙(違勅), 즉 어명을 거역하는 행위로 간주하여 조정이 막부에 검단(検断)을 명했다. 이때 막부가 받는 명령을 위칙윤지(違勅綸旨) 또는 위칙원선(違勅院宣)이라 한다. 윤지나 원선을 받은 막부는 고케닌 2명을 사절(양사, 両使)로 임명했다. 양사는 임무 수행을 위해 ‘슈고 출입금지 구역’이던 혼쇼 일원지에 들어갈 수 있었고, 혼쇼 측에 하지준행(下地遵行)을 지시할 권한도 부여받았다.[26] 이 절차는 조정에 제기된 지샤 권문간의 잡소 사태(영지 소유 소송)에도 채용되었고, 무로마치 시대 사절준행권(使節遵行権)의 근원이 되었다.

하지만 위칙윤지나 위칙원선이 나오면, 조정과 협력하여 치안 유지에 나선다는 당시 막부 방침상, 피고인이 고케닌이고 정당한 주장을 했더라도 '악당'으로 찍히면 막부가 그 고케닌을 보호하기 어려웠다. 막부는 검단을 미루고 고케닌을 달래 조정 처분에 따르게 하여 윤지·원선 내용을 실현시키는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고케닌들의 막부에 대한 신뢰를 흔들리게 했다.[26]

5. 남북조 시대와 악당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조 시대에 돌입하면서, 남북 양군의 유력 무장에게 이끌리는 형태로 고케닌층이었던 무사들이 과거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 전전(轉戰)을 벌였다. 이는 고케닌층의 기반이었던 장원제가 악당화된 고케닌의 횡행으로 붕괴되어 그들의 지위가 불안정해졌기 때문이었다. 고케닌들은 종군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소령을 은상으로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이러한 군대에 참가했다.[28]

그러나 고케닌의 무질서하고 대규모적인 종군으로 인해 군대 수뇌진의 인원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장으로 향하는 행군만으로도 끊임없는 병량 부족에 시달렸고, 내란 초기에는 병량미 공출로 군충을 평가받았지만, 내란이 장기화되자 그러한 은상은 나오지 않아 행군 중 약탈이 상시화되었다. 그럼에도 충당할 수 없는 규모의 인원이 쇄도한 군대는 도중에 붕괴, 탈락한 사무라이들이 도적으로 변해 사회의 무질서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또한, 고케닌 계층과 출세하여 슈고가 되어가는 자들 중에는 구체제를 뚫고 힘을 과시하며 그 힘의 표현으로서 방탕하고 무궤도하며 호사를 다투는 놀이 취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적 측면을 "바사라"라고 불렀다.

6. 악당의 종언

1392년 명덕의 화약으로 남북조 시대의 혼란이 끝나자, 무로마치 막부가 임명한 슈고(守護)는 지행국(知行国) 내의 재지 영주층인 국인을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어 수호 다이묘로서 지배력을 강화했다. 악당이라 불리던 무사들도 슈고의 가신이 되어 안도를 받음으로써 스스로 주장하는 당지행을 확보하는 길을 택했고, 슈고의 지배 체제에 편입되었다.[5] 장원 침략 역시 슈고 다이묘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전까지 악당 때문에 지배 체제가 약화되었던 본소(本所)는 이에 대항할 힘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본소의 지배를 침해하는 악당"이라는 모습은 점차 사라져 갔다.

7. 주요 악당 인물

다음은 악당으로 여겨졌던 주요 인물들의 목록이다. 자세한 내용은 각 인물별 항목을 참고하라.[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

7. 1. 주요 인물 목록

이름출생사망비고
이세 요시모리12세기1186년[31]
미나모토노 다메토키13세기[32]
다루미 시게마사13세기[33]
사와무라 무네쓰나13세기[34]
아사하라 다메요리13세기1290년아사하라 사건 [35]
곤피라 요시카타13세기14세기[36]
벤보 쇼요13세기14세기[37]
효에지로 뉴도 쇼세이13세기14세기[38]
오에 기요사다13세기14세기[39]
구스노키 마사시게13세기1336년[40]
안도 렌세이1239년1329년
아카마쓰 노리무라1277년1350년[30]
데라다 호넨14세기[41]
나와 나가토시14세기1336년
곤노 모리토시14세기[42]
가미무라 모토무네14세기[43]
와카사 스에카네14세기[44]
핫토리 지호14세기[45]
히라노 쇼겐 뉴도14세기
마키 세이칸14세기


8. 연구사

일본사에서 악당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 나카무라 나오카쓰(中村直勝)가 『장원 연구』 (荘園の研究|쇼엔노켄큐일본어, 1939년)에서 처음 개념을 제기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시모다 쇼(石母田正)가 『중세적 사회의 형성』 (中世的社会の形成|츄세테키샤카이노케세일본어, 1946년)에서 그 모습을 구체화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9]

전후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악당을 봉건영주제의 틀 안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와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등이 농업 외에 수공업, 예능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중세 사상을 제시하면서 악당 연구에도 새로운 관점이 도입되었다. 20세기 말에는 가이즈 이치로(海津一朗) 등이 몽골의 침략과 도쿠세이레이(徳政令) 등 사회 변동과 악당의 관계를 조명하려는 시도를 했다.[29]

한편, 이러한 연구 경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기존 연구가 계급 투쟁이라는 틀에 갇혀 악당을 투쟁의 주체로만 간주하고, 실제로는 분쟁 상대방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된 측면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29]

8. 1. 초기 연구

악당 개념은 1930년대에 나카무라 나오카츠에 의해 제기되었고(《장원 연구》 荘園の研究|쇼엔노켄큐일본어 1939년), 전후에는 이시모다 쇼(《중세적 사회의 형성》 中世的社会の形成|츄세테키샤카이노케세일본어 1946년) 등에 의해 그 모습이 드러났다.[29]

8. 2. 새로운 관점

1930년대에 나카무라 나오카쓰(中村直勝)가 악당의 개념을 제기했고(『장원 연구』 1939년), 패전 후에는 이시모다 쇼(石母田正) (『중세적 사회의 형성』 1946년) 등이 그 모습을 밝혀 나갔다.[29]

전후 일본 역사학에서 악당은 봉건영주제 속에 자리매김했지만,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등이 농업 외에 수공업민이나 예능민 등에 주목한 중세 사상을 제시하면서, 악당의 존재도 그들과 관련지어 논의하게 되었다. 20세기 말부터는 가이즈 이치로(海津一朗) 등이 몽골의 침략이나 도쿠세이레이(徳政令) 등 사회 변동에 있어서 악당의 위치를 설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29]

한편, 위의 논설들은 "우선적으로 계급 투쟁이 그 본질이며, 그 담당자로서 악당이라는 자들이 있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소송 등 분쟁 상대에게 낙인을 찍는 말로서 "악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문제 제기도 있다.[29]

8. 3. 비판적 시각

일부 연구자들은 악당 개념이 계급 투쟁론에 치우쳐 있으며, 실제로는 분쟁 상대에 대한 낙인찍기였을 뿐이라고 비판한다.[29]

9. 관련 항목

9. 1. 관련 개념


  • 피카레스크 소설 - 일본 문학에서 '악당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 악한 소설 - '악당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 악당 (영화) - 1965년에 도호에서 배급한 신도 가네토 감독의 영화이다.
  • 밴디트 - 위전 태평기 - - 악당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태평기』 만화이다.

9. 2. 관련 작품


  • 피카레스크 소설 - 일본 문학에서 피카레스크 장르의 소설은 '악당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 악당 (영화) - 1965년 도호에서 배급한 신도 가네토 감독의 영화이다.
  • 밴디트 - 위전 태평기 - - 스스로 악당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주역이 되는 '태평기' 만화이다.
  • 악한 소설 - "악당 소설"이라고도 한다.

참조

[1] 서적 2007
[2] 서적
[3] 간행물 勅命施行にみる鎌倉後期の六波羅探題 清文堂 2016
[4] 확인날짜 2012-08-22
[5] 간행물 悪党のゆくえ 高志書院 2016
[6] 서적 戦争の日本中世史 「下克上」は本当にあったのか 2014
[7] 확인날짜 2012-08-22
[8] 확인날짜 2012-08-22
[9] 확인날짜 2012-08-22
[10] 확인날짜 2012-08-22
[11] 확인날짜 2012-08-22
[12] 확인날짜 2012-08-22
[13] 확인날짜 2012-08-22
[14] 확인날짜 2012-08-22
[15] 확인날짜 2012-08-22
[16] 확인날짜 2012-08-22
[17] 확인날짜 2012-08-22
[18] 확인날짜 2012-08-22
[19] 확인날짜 2012-08-22
[20] 확인날짜 2012-08-22
[21] 확인날짜 2012-08-22
[22] 확인날짜 2012-08-22
[23] 논문 2007
[24] 문서 鎌倉遺文 8281号
[25] 서적
[26] 간행물 勅命施行にみる鎌倉後期の六波羅探題 清文堂 2016
[27] 확인날짜 2012-08-22
[28] 간행물 悪党のゆくえ 高志書院 2016
[29] 서적 戦争の日本中世史 「下克上」は本当にあったのか 2014
[30] 확인날짜 2012-08-22
[31] 확인날짜 2012-08-22
[32] 확인날짜 2012-08-22
[33] 확인날짜 2012-08-22
[34] 확인날짜 2012-08-22
[35] 확인날짜 2012-08-22
[36] 기타 2012-08-22
[37] 기타 2012-08-22
[38] 기타 2012-08-22
[39] 기타 2012-08-22
[40] 기타 2012-08-22
[41] 기타 2012-08-22
[42] 기타 2012-08-22
[43] 기타 2012-08-22
[44] 기타 2012-08-22
[45] 기타 201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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