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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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는 1508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탐험가이자 아우구스티누스회 소속의 수도사이다. 그는 로아이사 원정대에 참여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경험했으며,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활동하다가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했다. 1559년 필리핀 원정에 참여하여 귀환 항로를 개척했으며, 이 항로는 '우르다네타 항로'로 불리며 마닐라 갤리온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필리핀 최초의 교회인 세부 대성당을 세우는 등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1568년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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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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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 |
로마자 표기 | Andrés de Urdaneta |
출생일 | 1508년 |
출생지 | 스페인 제국 기푸스코아 오르디시아 |
사망일 | 1568년 6월 3일 |
사망지 | 스페인 제국령 누에바에스파냐 멕시코시티 |
국적 | 카스티야 왕관 |
직업 | 탐험가, 수사 |
주요 업적 | 세계 일주 |
업적 | |
탐험 | 1525년: 가르시아 호프레 데 로아이사의 탐험에 참가. 1536년: 아시아 탐험 종료 후, 누에바에스파냐로 귀환. 1559년: 필리핀 탐험. 1565년: 태평양 항로를 발견.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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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교육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는 1508년, 당시 비야프랑카로 알려졌던 바스크 지방의 도시 오르디시아(Ordizia) 근처, 카스티야 왕관(Crown of Castil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후안 오초아 데 우르다네타는 비야프랑카의 시장을 지냈고, 어머니 그라시아 데 세레인은 그 지역에서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우르다네타는 오르디시아에서 교육을 받았다.[5][6]
17세 때,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는 로아이사 원정대에 참여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완수한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의 시종으로 일하게 되었다. 카를 5세 황제는 향신료 제도로 돌아가 수익성이 높은 향신료 무역에서 스페인의 발판을 확보하기 위한 두 번째 원정대를 파견했고, 가르시아 호프레 데 로아이사가 원정대 사령관으로, 엘카노는 함대의 수장이자 두 번째로 큰 배의 선장으로 임명되었다.[5][7]
발라돌리드에 머무는 동안 우르다네타는 유명한 정복자이자 당시 과테말라 총독이었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를 만났다. 알바라도는 새로운 무역과 정복의 기회를 찾아 태평양을 횡단하는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누에바에스파냐(뉴 스페인) 태평양 연안에 함대를 조직하고 우르다네타를 수석 항해사로 초청했다. 우르다네타는 곧 제안을 받아들여 1538년 10월 16일 신세계로 향해 출항했다. 이동 중 그는 히스파니올라섬에 들러 역사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에게 로아이사 원정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5][7]
1558년, 루이스 데 벨라스코 총독은 펠리페 2세에게 서쪽 섬들(필리핀)로 원정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벨라스코는 우르다네타가 항해, 지리, 원주민 언어에 대한 지식 때문에 이 계획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펠리페 2세는 이 제안에 동의하여 1559년 벨라스코에게 함대를 조직하고 우르다네타의 협력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우르다네타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그의 자격을 요약하고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그 배에 승선하여 총독이 우리 주님을 섬기는 데 필요로 하는 일을 하도록 명령하고 위임합니다"라는 지시로 편지를 마무리했다.[5]
그는 라틴어와 철학을 공부했으나 고아가 되어 군대에 입대했다. 이탈리아 전쟁 중 대위로 진급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에는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는데, 이를 계기로 바다에서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3. 로아이사 원정대 (1525-1536)
1525년 7월 24일, 7척의 함대가 라코루냐 항구를 출발했다. 항해는 길고 어려웠는데, 두 척의 배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탈주했고, 네 척의 배는 태평양에서 만난 끔찍한 폭풍으로 인해 침몰했다. 항해 1년 만에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고통받았고 로아이사와 엘카노는 사망했다. 1526년 10월, 유일하게 남은 배인 ''산타 마리아 데 라 빅토리아''호가 향신료 제도에 도착했을 때, 원래 450명의 선원 중 105명만 남았다.[8]
원정대는 포르투갈이 이미 테르나테에 진출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섬과 수익성 있는 향신료 무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르다네타는 다양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포르투갈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 위해 지역 지도자들에게 사절로 활동했고, 지역의 지리, 무역 및 항해 경로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정찰 임무를 수행했으며, 포르투갈에 대한 수많은 공격을 이끌었다. 한 번의 전투 중 화약통이 폭발하여 우르다네타가 심하게 화상을 입고 영구적인 흉터를 남겼다.[5]
우르다네타와 원정대의 쇠퇴하는 잔존자들은 8년 이상 향신료 제도에 남아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대항하는 패배의 싸움을 벌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1529년 카를 5세는 사라고사 조약에 서명하여 향신료 제도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배권을 효과적으로 인정했다. 1530년 말, 우르다네타는 새로운 포르투갈 사령관 곤살로 데 페레이라로부터 처음으로 조약을 알게 되었지만, 믿기를 거부했다.[5]
점차 스페인 사람들은 그들의 대의가 왕에 의해 버려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추가적인 위협과 협상 끝에 포르투갈은 1534년 로아이사 원정대의 생존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합의했다. 1535년 2월 15일, 우르다네타는 자바행 중국 정크선을 타고 향신료 제도를 떠났다. 자바에서 그는 말라카를 거쳐 코친으로 여행한 후 포르투갈 향신료선 ''상 루크''호에 승선하여 유럽으로 돌아왔다.
1536년 6월 26일, 우르다네타는 리스본에 도착했고, 그의 모든 지도와 일지는 포르투갈 당국에 압수되었다. 스페인 대사는 그에게 포르투갈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했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도망쳤다. 서류 외에도 우르다네타는 향신료 제도에서 인도 여성과 낳은 사생녀를 남겨두었다.[5]
발라돌리드에 도착했을 때, 우르다네타는 인도위원회의 면접을 받았고, 원정의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지역 지리, 무역, 역사 및 인류학에 관한 정보를 추가하는 광범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위원회는 1537년 2월에 완성된 그의 보고서에 만족했고, 그의 서술의 상세함과 명료함에 감명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년간의 봉사에 대해 왕관으로부터 단 60USD만 받았다는 것은 실망스러웠을 것이다.[5][6]
4. 누에바 에스파냐에서의 활동 (1538-1552)
1540년 6월, 알바라도 원정대는 아시아로 항해할 준비를 마쳤는데, 크리스토발 데 오냐테로부터 뉴갈리시아(Nueva Galicia)에서 발생한 심각한 원주민 반란이 스페인의 지역 통제를 위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알바라도는 병사들과 함께 상륙하여 오냐테를 지원하기 위해 진군했다. 우르다네타는 150명의 보병과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알바라도는 전투 중 사망했다.[5]
알바라도가 사망한 후, 총독 안토니오 데 멘도사는 함선을 두 개의 함대로 나누어 하나는 루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 지휘하에 필리핀으로, 다른 하나는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 지휘하에 북아메리카 해안을 탐험하도록 명령했다.[9] 우르다네타는 두 원정 모두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뉴 스페인에 남아 총독을 위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1543년 그는 미초아칸 지역의 코레히도르(Corregidor, 행정관)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우르다네타는 비시타도르(Visitador, 감찰관)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총독에게 직접 보고하고 공무원의 부패, 원주민 학대 또는 기타 비행을 조사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우르다네타는 태평양의 해양 활동에도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543년 카브리요 원정대의 생존자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돌아왔을 때, 우르다네타는 그들에게 항해에 대해 인터뷰하고 항해에 대한 유일하게 남아있는 필사본 기록을 작성했다.[9] 1547년 우르다네타는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페루에서 곤살로 피사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가 600명의 병력과 함께 출항할 준비를 마쳤을 때, 1548년 4월 18일에 피사로가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5]
5. 아우구스티누스회 입회 (1552-1558)
6. 레가스피 원정대와 '우르다네타 항로' 발견 (1559-1565)
종교 상사의 허락을 받은 후, 우르다네타는 원정에 동행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지휘하는 것은 거절했다. 우르다네타의 권고에 따라 총독은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우르다네타는 고문으로 참여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 소규모 그룹을 이끌고 가톨릭 교회를 설립하고 태평양 섬 주민들을 복음화할 예정이었다.[5]
대부분의 초기 태평양 횡단 항해처럼, 이 항해 또한 길고 고된 것이었다. 부패한 음식과 식수 부족 외에도, 괴혈병이 선원들을 괴롭혔다. 우르다네타의 전문 지식과 경험은 그들을 항로에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1565년 1월 23일 그들이 괌에 정박했을 때, 우르다네타는 이전 방문 때 보았던 원주민 선박의 라틴 돛을 알아보고 그들이 괌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레가스피에게 괌에 영구 정착지를 설립할 것을 촉구했지만, 레가스피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9]
원정대는 1565년 2월 3일 괌을 떠나 2월 13일 사마르에서 필리핀에 도착했다. 섬에서 얼마 동안 머문 레가스피는 섬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레가스피는 뉴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항로 개척과 필리핀 식민지에 대한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 우르다네타를 귀국시키기로 했다.
우르다네타는 귀환 보고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보고 후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다시 필리핀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친구들이 만류했다. 그는 자신의 항해에 관한 수기를 두 개 썼다. 그중 하나는 로아이사 원정 이야기가 출판되었고, 다른 하나는 귀환 이야기를 쓴 것으로 원고가 인디아스 고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 17세기까지 마닐라 갤리온이라 불리는 스페인 배가 "우르다네타의 항로"를 이용했다.
6. 1. 원정대 준비
1559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루이스 데 벨라스코 총독에게 필리핀 원정을 명령했다.[5] 벨라스코 총독은 우르다네타를 원정대 지휘관으로 추천했으나, 우르다네타는 지휘관직을 거절하고 고문 역할로 참여하기로 했다.[5] 우르다네타의 추천으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원정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5]
1564년 11월 21일, 레가스피와 우르다네타는 4척의 함선(산 파블로 호, 산 페드로 호, 산 후안 호, 산 루카스 호)과 350명의 선원 및 병사를 이끌고 멕시코 나비다드 항을 출발했다.[9]
6. 2. 필리핀 도착 및 정착
1565년 2월 3일, 원정대는 괌을 떠나 2월 13일에 사마르에서 필리핀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영유권 선포 후, 섬들을 탐험했다. 이전 포르투갈 노예 습격의 결과로, 상륙하는 곳마다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다. 마침내 레가스피는 식량이 풍부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위한 상업 중심지가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세부에 요새화된 정착지를 건설했다. 우르다네타는 뉴 스페인으로의 귀환 항해에 적합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5]
우르다네타는 필리핀 최초의 교회인 세부 대성당과 산토 니뇨 성당을 세웠고, 세부 교구의 초대 수좌주교로 봉직했다.
6. 3. 귀환 항로 개척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필리핀에 남아 식민지 건설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에게는 신에스파냐(Nueva España)로 돌아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필리핀 식민지에 대한 증원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겼다.[5]
1565년 6월 1일, 우르다네타는 펠리페 데 살세도를 함장으로 하는 산 페드로 호를 이끌고 세부 섬을 출발했다. 이 배에는 200명의 선원과 최대 9개월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식량과 물, 그리고 필리핀에서 수집한 소량의 향신료가 실려 있었다. 남서 계절풍을 타기에 이상적인 시기였지만, 계절 후기에 발생하는 태풍을 피해야 했다.[9]
우르다네타는 편서풍을 이용하기 위해 북위 38도까지 북상하는 항로를 택했다. 항해는 느렸지만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었으며, 북아메리카 해안과의 위치에 대한 논쟁 끝에 1565년 9월 18일 카탈리나 섬을 발견했다. 해안을 따라 항해한 끝에 1565년 10월 8일, 4개월 8일(130일)간 20000km의 항해 끝에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고통받았고, 18명만이 항해할 수 있을 만큼 건강했으며, 닻을 내릴 힘이 남은 사람은 레가스피의 조카인 펠리페 데 살세도와 우르다네타뿐이었다.[5]
도착 후, 우르다네타는 탐험대의 알론소 데 아레야노(Alonso de Arellano)가 지휘하는 다른 배가 이미 신에스파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레야노는 같은 해 8월 할리스코(Jalisco)의 나비다드 강어귀(Barra de Navidad)에 도착했지만, 반란과 탈영 혐의를 받았고 그의 항해 기록은 모호하고 부정확했다. 반면 우르다네타는 상세한 기록과 항해사로서의 명성 덕분에 귀환 항로의 개척자로 인정받았다.[5]
이후 17세기까지 '마닐라 갤리온'이라 불리는 스페인 배들이 '우르다네타 항로'를 이용했다.
7. 말년 (1565-1568)
우르다네타의 필리핀 항해 성공은 뉴 스페인에서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고 널리 축하받았다. 그는 멕시코시티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힘든 여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회복할 수 있었다. 1566년 1월, 우르다네타는 베라크루스에서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는 아바나에 들러 페드로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에게 항해에 대한 보고를 한 후, 1566년 4월 스페인에 도착했다.[5][9] 세비야에서 계약청(Casa de Contratación)에 보고서를 제출한 후 마드리드로 가서 왕궁에서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의 경험과 관찰 결과를 보고했다.[5][9]
1567년, 우르다네타는 뉴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때문에 상급자는 필리핀으로 돌아가 선교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우르다네타는 1568년 6월 3일 멕시코시티의 수도원에서 사망했다.[5]
8. 유산
우르다네타는 두 개의 항해 기록을 남겼다. 하나는 로아이사 원정에 대한 기록으로 출판되었고, 다른 하나는 귀환 항해에 대한 기록으로 서인도위원회(Consejo de Indias) 기록 보관소에 원고로 보존되어 있다.[10]
200년 이상 스페인 선박들, 특히 매년 운항하는 마닐라-아카풀코 무역 갤리온선이 "우르다네타 항로"를 이용했다.
필리핀 팡가시난주(Pangasinan)의 우르다네타 시는 1858년에 설립되었지만,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참조
[1]
서적
[2]
서적
The Philippine Islands, 1493-1803, vol. 2
The Arthur H. Clark Company
[3]
서적
Description of the Filipinas Islands
https://quod.lib.umi[...]
The Arthur H. Clark Company
[4]
서적
https://archive.org/[...]
[5]
서적
[6]
서적
Diccionario Biográfico Español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웹사이트
History of Urdaneta
http://urdaneta-city[...]
City Government of Urdaneta
2012-11-26
[11]
서적
The Basque History of the World
Walker & Company
[12]
웹사이트 # 추정.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엘카노는 마젤란 사후 항해 책임자가 되어 세계 일주를 완수했고, 마젤란 함대는 총 18명이 세계 일주를 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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