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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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폰소 6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인 페르난도 1세의 아들로,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고 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처했으며, 통치 기간 동안 영토를 확장했다. 톨레도 정복 후 알모라비드 왕조와의 전쟁을 겪었고, 십자군을 조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여러 차례 결혼했으며, 후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알폰소 6세는 문화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증진하고 클뤼니 개혁을 추진했으며, 로마 전례를 도입했다. 그는 1109년 톨레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레온의 제국적 이상과 유럽의 영향에 대한 개방성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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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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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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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레온의 왕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의 왕 카스티야의 왕 전 스페인의 황제 톨레도의 왕 |
출생 | 기원전 1040년/1041년경 |
출생지 | 레온 왕국,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사망 | 1109년 7월 1일 |
사망지 | 톨레도 왕국, 톨레도 |
매장지 | 레온, 사아군, 산 만시오 예배당, 산토스 파쿤도 이 프리미티보 왕립 수도원 |
왕가 | 히메네스 왕조 |
통치 | |
레온 왕 (첫 번째 통치) | 1065년–1072년 |
레온 왕 (두 번째 통치) | 1072년–1109년 |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왕 (첫 번째 통치) | 1071년–1072년 (산초 2세와 공동 통치) |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왕 (두 번째 통치) | 1072년–1109년 |
카스티야 왕 | 1072년–1109년 |
전 스페인의 황제 | 1077년–1109년 |
톨레도 왕 | 1085년–1109년 |
가족 | |
아버지 | 페르난도 1세 |
어머니 | 산차 데 레온 |
배우자 | 아키텐의 아녜스 부르고뉴의 콘스탄스 베르타 자이다 (또는 이사벨, 첩이었을 가능성 있음) 베아트리스 |
자녀 | 툴루즈 백작 부인 엘비라 포르투갈 백작 부인 테레사 레온의 우라카 여왕 산초 알폰세스 시칠리아 여왕 엘비라 |
2. 생애
페르난도 1세 사후 왕국은 산초 2세(카스티야), 알폰소 6세(레온 왕국), 가르시아 2세(갈리시아)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산초 2세는 왕국 통일을 위해 갈리시아와 레온 왕국을 점령했으나, 1072년 10월 암살당하면서 알폰소 6세가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위를 계승했다.[18]
2. 1. 어린 시절
알폰소 6세는 카스티야 왕국 및 레온 왕국의 왕인 페르난도 1세와 레온 왕국의 여왕 산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었다. 그의 형제로는 카스티야-레온 왕 산초 2세와 갈리시아 왕 가르시아 2세 (gl)가 있었고, 누나로는 우라카 (en)와 엘비라가 있었다.[18]알폰소의 부계 조부모는 팜플로나의 산초 가르세스 3세와 그의 아내 카스티야의 무니아도나였고, 모계 조부모는 레온의 알폰소 5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엘비라 메넨데스였다. 알폰소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사아군 익명의 연대기''에 따르면 44년간 통치한 후 62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1047년 하반기 또는 1048년 상반기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렌세 역사에 따르면, 알폰소는 자유 교양을 배웠으며, 무술, "스페인식 말 타기 기술", 사냥 훈련도 받았다. 성직자 라이문도가 알폰소의 초기 교육을 담당했으며, 왕이 된 후 알폰소는 그를 팔렌시아 주교로 임명했다. 알폰소는 티에라 데 캄포스에서 페드로 안수레즈와 함께 전쟁 기술과 기사도를 배웠다.
1065년 아버지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하면서 왕국은 분할 상속되었다. 알폰소 6세는 레온과 톨레도 왕국으로부터의 공납금(파리아)을 상속받았다. 1068년, 알폰소 6세는 형 산초 2세와 교전했지만, 1071년에는 협력하여 동생 가르시아 2세를 세비야로 추방했다. 1072년 1월, 알폰소 6세는 형에게 붙잡혀 부르고스에 유폐되었으나, 누나 우라카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톨레도로 망명했다. 그해 10월, 산초 2세가 암살당하면서 알폰소 6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을 계승하게 되었다.[3][5] 1073년, 알폰소 6세는 복귀하려던 가르시아 2세를 붙잡아 1090년에 죽을 때까지 감금하여 갈리시아 왕위도 계승, 카스티야-레온 왕국을 다시 통합했다.[6]
2. 2. 왕위 계승 분쟁과 통합
카스티야 왕국 및 레온 왕국의 왕인 페르난도 1세와 레온 왕국의 여왕인 산차 사이에서 태어난 알폰소 6세는 아버지 페르난도 1세가 죽은 뒤 왕국이 산초 2세에게 카스티야, 알폰소 6세에게 레온 왕국, 가르시아 2세에게 갈리시아로 분할 상속되는 과정에서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다.[18]1063년 말, 페르난도 1세는 레온에서 ''쿠리아 레지아''를 소집하여 자신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분배하는 유언을 발표했다. 이 분할은 군주의 사망까지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알폰소는 레온 왕국을 상속받았는데, 여기에는 아스투리아스, 레온, 아스토르가, 엘 비에르소, 사모라와 티에라 데 캄포스와 더불어 톨레도 타이파의 ''파리아스''(공물)가 포함되었다.

- 가르시아 2세의 영토 (갈리시아)
- 바다호스, 가르시아에게 조공을 바침
- 세비야, 가르시아에게 조공을 바침
- 알폰소 6세의 영토 (레온)
- 톨레도, 알폰소에게 조공을 바침
- 산초 2세의 영토 (카스티야)
- 사라고사, 산초에게 조공을 바침
그의 형인 산초는 카스티야 왕국과 사라고사 타이파의 ''파리아스''를 받았다. 동생인 가르시아는 갈리시아 왕국과 바다호스 타이파 및 세비야 타이파의 ''파리아스''를 받았다. 여동생인 우라카와 엘비라는 ''인판타즈고''를 받아, 미혼 상태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왕실 재산에 속한 모든 수도원의 후원과 수입을 받았다.
1068년에 알폰소 6세는 형 산초 2세와 교전했지만, 1071년에 협력하여 가르시아 2세를 세비야로 추방했다. 그러나 1072년 1월, 알폰소 6세는 형에게 붙잡혀 부르고스에 유폐되었고, 레온은 형에게 정복당했다. 알폰소 6세는 누나 우라카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톨레도로 망명했고, 우라카는 사모라에 농성하며 산초 2세에게 저항했다. 산초 2세는 같은 해 10월에 암살당했고, 알폰소 6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을 계승했다.[3][5] 1073년에는 가르시아 2세를 감금하여 1090년에 죽을 때까지 가두었다.[6] 이로써 알폰소 6세는 갈리시아 왕위도 계승하여 카스티야-레온 왕국을 다시 통합했다.
3. 통치
1066년 1월 레온에서 대관식을 치른 알폰소 6세는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왕국 전체를 상속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형 산초 2세의 팽창주의적 야망에 맞서야 했다.[2] 형제간의 갈등은 1067년 어머니 산차 여왕이 사망한 후 7년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첫 충돌은 란타다 전투였는데, 여기서 신판에 따라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1069년 5월 알폰소가 산초 2세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 둘의 관계는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1071년, 알폰소 6세의 공모 하에 산초 2세는 갈리시아 왕국을 침공하여 동생 가르시아 2세를 세비야 타이파로 추방했다. 형제를 제거한 후 알폰소 6세와 산초 2세는 스스로 갈리시아의 왕이라 칭하며 휴전을 맺었다.[2]
1072년 1월 골페헤라 전투에서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를 처벌하지 않고 사아군 수도원으로 보냈다. 누이 우라카의 중재로 알폰소 6세는 톨레도 타이파로 피신할 수 있었다.[2]
알폰소 6세는 톨레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레온 귀족과 누이 우라카의 지지를 얻었다. 산초 2세는 우라카가 지배하던 사모라를 포위 공격했지만, 벨리도 돌포스라는 귀족에게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알폰소 6세는 왕위를 되찾고 카스티야와 갈리시아를 차지했다.[2]
엘 시드인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는 산초 2세의 기수였지만, 사모라 포위 공격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알폰소 6세가 형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증거는 부족하다. 훗날 엘 시드에 관한 전설에서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에게 형의 죽음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맹세를 강요받았고, 이로 인해 둘 사이에 불신이 생겼다고 전해진다.[2]
산초 2세의 죽음으로 가르시아 2세는 갈리시아 왕위를 되찾았지만, 1073년 알폰소 6세는 가르시아 2세를 투옥했다. 가르시아 2세는 17년 후 사망했다. 두 형제를 제거한 알폰소 6세는 영토 내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했다.[2]
알폰소 6세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로 유럽으로부터 이민과 이교도 토벌을 향하는 기사 등이 진출하게 되었다. 알폰소 6세는 클뤼니 수도원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교황과는 선을 그었다.[7] 무슬림에게는 관대하게 행동했다.
알폰소 6세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 왕국 귀족과 관계를 맺고, 로마 전례를 도입하여 모사라베 전례에서 변경, 교황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주교좌를 설치하여 성지의 지위를 향상시켰다.[7] 1077년 그레고리우스 7세가 전 스페인 군주에 대한 신종과 지대를 요구하자 알폰소 6세는 거부했다.[8]
1080년 클뤼니 회원 베르나르를 측근으로 삼고, 1086년 톨레도 대주교로 임명하여 교황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삼았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 총독에 모사라베를 등용하는 등 융화책에 힘썼다. 무슬림과는 파리아를 통한 타이파와 카스티야의 관계, 기독교도 귀족이 타이파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등 가까운 존재로서 인적 교류가 활발하여 이단으로 배제할 생각은 없었다.[10]
타이파에 대해서는 레콩키스타를 통해 영토를 정복하려 하지 않고 파리아를 강요하고, 제국 간의 다툼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1085년 관대한 조건으로 톨레도의 항복을 받아냈다.[11] 그러나 세비야를 지배하려 하자, 타이파 제국은 알모라비드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12][13]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을 패배시켰고, 알폰소 6세는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12][14]
3. 1. 톨레도 정복
1074년, 알폰소 6세는 톨레도 타이파의 왕 알-마문과 동맹을 맺고 그라나다 타이파에 공세를 펼쳐 알칼라 라 레알을 점령했다. 알-마문이 독살되고 그의 손자 알-카디르가 톨레도 타이파를 계승하자, 알-카디르는 레온에 도움을 요청했다. 알폰소 6세는 이 요청을 이용하여 1085년 5월 25일 톨레도를 함락시켰다.톨레도 점령 이후 알폰소 6세는 ''알-임브라투르 디-l-밀라타인'' ("양교의 황제")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 그는 무슬림 주민들에게 재산 존중과 주요 모스크 사용 권리를 약속하는 등 관용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톨레도 대주교 세디락의 베르나르와 콘스탄스 여왕은 이 결정을 번복했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 점령을 통해 탈라베라와 알레도 성 등 요새들을 점령하고, 1085년 마드리드(현재 마드리드)를 점령했다.[1] Sistema Central과 타호 강 사이 영토를 합병하여 레온 왕국의 작전 기지로 활용, 코르도바, 세비야, 바다호스, 그라나다를 공격했다.[1]
알폰소 6세는 1081년부터 톨레도를 포위, 1085년에 무슬림에게 관대한 조건을 약속하며 항복을 받아냈다.[11] 기독교국의 지배지는 타호 강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알폰소 6세가 세비야를 지배하려 하자, 타이파들은 알모라비드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슈핀(en)에게 구원을 요청했다.[12][13] 유수프는 1086년10월 23일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을 패배시켰고, 알폰소 6세는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12][14]
3. 2. 알모라비드 왕조와의 전쟁
알모라비 군대는 1086년 7월 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세비야에서 알모라비 군대는 타파 왕국의 군대와 합류하여 에스트레마두라로 진군했다.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야스 전투에서 알폰소 6세의 군대와 마주했다. 알바르 파녜스가 국왕의 군대에 합류했다. 전투는 기독교 군대의 패배로 끝났고, 그들은 톨레도로 돌아가 방어에 임했다. 아미르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프리카로 급히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승리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 패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약 30년 동안 지속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 기간 동안 군사적 주도권은 알모라비에게 넘어갔고 알폰소 6세는 방어적인 입장을 취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모라비의 공격의 주요 목표였던 톨레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알폰소 6세는 십자군을 조직하도록 유럽의 기독교 왕국에 요청했다. 톨레도는 예외였고, 그곳에서 국왕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는 엘 시드와 화해했다. 심각한 패배의 결과로 안달루시아 타파는 ''파리아스'' 지불을 중단했다.

1090년 6월, 알모라비는 세 번째 공격을 시작하여 그라나다의 왕을 폐위시키고 코르도바의 총독을 패배시켰으며, 알모도바르 델 리오 전투 이후 세비야로 진입하여 알-무타미드 왕을 추방했다. 그 해 하반기에 모든 남부 타파는 알모라비에게 정복되었고 알폰소는 세비야의 왕을 돕겠다는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다.
1097년에는 네 번째 알모라비 침략이 있었다. 알모라비의 목표는 다시 톨레도였고, 8월 15일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기독교 군대를 패배시켜 알폰소 6세의 통치의 쇠퇴를 확인했다.
1099년, 알모라비는 톨레도와 주변 지역을 방어하는 많은 성을 정복했고, 이듬해에는 도시를 점령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102년, 알폰소 6세는 알모라비의 위협에 대항하여 발렌시아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전투는 쿠예라에서 벌어졌고 뚜렷한 승자 없이 끝났지만, 발렌시아는 알폰소가 방어하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알모라비의 손에 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3월과 4월에 발렌시아의 철수를 감독했고, 떠나기 전에 불을 질렀다. 5월에 알모라비는 그 잔해를 차지했다.
1108년, 알모라비 타밈의 군대는 기독교 영토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선택된 도시가 톨레도가 아닌 우클레스였다. 알바르 파녜스가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국왕의 유일한 아들인 산초 알폰세스와 함께했다. 군대는 1108년 5월 29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격돌했고, 기독교 군대는 또 다른 패배를 겪었다. 왕위 계승자인 젊은 산초 알폰세스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레콩키스타''는 30년 동안 정체되었고, 포르투갈 백국은 결국 독립 왕국이 되었다.
3. 3. 엘 시드와의 관계
알폰소 6세는 영웅 서사시 『엘 시드의 노래』에서 중세 시인이 위대한 왕에게 부여한 역할, 즉 압제자이자 용감하고 제멋대로인 귀족들의 희생양이 되는 역할을 보여준다. 트루바두르가 이상으로 여기는 유형의 지배자이다.[4]형에게 사아군 수도원에 갇혔지만 탈출하여 기사도적인 우정을 맺은 "무어인의 기사" 톨레도의 알마문(알마운)에게 보호를 받았고, 누이 우라카와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등의 전설은 그를 영웅화한 시인의 창작일 것이다. 또한 알폰소 6세는 형을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아 부르고스에서 엘 시드를 대표로 하는 귀족들에게 암살을 부정하는 선서를 요구받았고, 이를 원망하여 엘 시드를 추방했다고 전해진다.[4]
4. 종교 정책
알폰소 6세는 클뤼니 수도원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교황과는 거리를 두면서 무슬림에게는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프랑스 왕국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 교황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모사라베 전례에서 로마 전례로 변경했다.[7]
1077년, 그레고리우스 7세가 스페인 군주들에게 신종과 지대를 요구하자, 알폰소 6세는 이를 거부하고 서고트 왕국의 후계자로서 히스파니아 황제를 칭하며 교황을 견제했다. 그는 주교구와 교구 정비 등 교회 행정 정비에 힘쓰고, 클뤼니 수도원에 막대한 금전과 수도원을 기증하여 교황의 스페인 개입에 대항했다. 여기에는 교황에게 신종한 아라곤 왕국의 왕 산초 1세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8]
1080년에는 클뤼니 회원 베르나르를 측근으로 삼고, 1086년 톨레도 해방 후에는 그를 대주교로 임명하여 교황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클뤼니 수도원에 대한 지나친 편애는 카스티야인들의 분노를 샀고, 세금 인상과 수도원 및 마을을 빼앗긴 성직자와 서민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9] 알폰소 6세는 모사라베(이슬람 국가에 살던 기독교도)의 반감을 달래기 위해 모사라베 전례를 계속 허용하고, 톨레도 총독에 모사라베를 등용하는 등 융화책을 폈다. 무슬림과는 파리아를 통한 타이파와 카스티야의 관계, 기독교도 귀족이 타이파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등 인적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프랑스인 등 외국인과 달리 이단으로 배제하지 않았다.[10]
5. 후계 문제와 죽음
알폰소 6세는 1109년 7월 1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11] 국왕은 임박한 알모라비드 군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12] 그의 시신은 사아군으로 옮겨져, 국왕의 유언에 따라 산 베니토 왕립 수도원에 안장되었다.[11] 국왕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었고, 산 베니토 왕립 수도원 교회 발치에 놓였다. 그러다가 카스티야의 산초 4세 통치 시대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조상이 성전 발치에 묻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여겨 무덤을 교회 안으로 옮겼다.[13]
현재는 사라진 국왕의 유해를 담고 있던 석관은 설화석고 사자상 위에 올려져 있었으며, 길이 약 2.44m, 너비와 높이가 각각 약 1.22m인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궤로, 매끄러운 검은색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이 무덤은 보통 플랑드르에서 짠 왕관을 쓰고 무장한 국왕의 모습, 측면에 카스티야와 레온의 문장이 그려져 있으며, 무덤 머리 부분에는 십자가가 있는 실크 태피스트리로 덮여 있었다.[13]
알폰소 6세의 유해가 안치된 무덤은 1810년 산 베니토 왕립 수도원 화재로 파괴되었다. 국왕과 여러 부인의 유해는 수집되어 1821년 수도원 회의실에 보존되었다. 1835년 1월, 유해는 다시 수집되어 또 다른 상자에 담겨 국왕의 부인 유해가 보관되어 있던 기록 보관소로 옮겨졌다. 그 목적은 당시 건설 중이던 새로운 성소에 모든 왕족의 유해를 안치하는 것이었다.[13] 그러나 1835년 산 베니토 왕립 수도원이 해체되면서, 수도사들은 왕족 유해가 담긴 두 개의 상자를 그들 중 한 사람의 친척에게 넘겼고, 그는 1902년까지 숨겨두었다.[13]
알폰소 6세의 유해는 현재 사아군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안치되어 있다.[11]
오비에도의 주교 펠라기우스는 알폰소 6세와 동시대 인물로, 그의 저서인 "레온 왕 연대기"(Chronicon regum Legionensium)에 따르면, 알폰소 6세는 다섯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을 두었다고 한다. 주교에 따르면 아내는 아그네스, 콘스탄스, 베르타, 이사벨, 베아트리스였으며, 첩은 히메나 무뇨스 와 자이다였다.[14] 피레네 산맥 북쪽의 일부 연대기 저술가들은 알폰소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 1세의 딸 아가타와 더 일찍 약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알폰소 6세는 타이파 제국들을 약탈하며, 때때로 그들의 요청으로 나타나는 무라비트 왕조에게 계속해서 패배하여, 1097년, 1108년에 대패했지만, 타이파와 유수프의 잠재적인 대립이 적의 기세를 꺾어 결정적인 손실을 피할 수 있었기에 톨레도는 지켜냈다. 이 시기에 무라비트 왕조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북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영웅 엘 시드의 군대뿐이었다.[12]
패배로 잃은 군사력 보충을 위해, 두 딸 우라카와 테레사를 각각 프랑스 귀족 레이몽과 앙리에게 시집보내고, 그들에게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의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을 주었다. 그러나 무라비트 왕조에 대한 열세는 변함없었고, 후계자로 지명한 아들 산초가 1108년 무라비트 왕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16], 알폰소 6세는 같은 해 우라카를 후계자로 변경하고, 더불어 미망인이 된 우라카를 아라곤 왕 알폰소 1세와 재혼시키는 것을 결정했다가 이듬해인 1109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결혼에 귀족들의 반대가 거셌고, 두 사람의 성격이 맞지 않았으며, 우라카와 전 남편의 아들 알폰소 (후의 알폰소 7세)를 옹립하려는 일파가 나타나는 등 많은 장애가 겹쳐 내란이 발생했고, 무라비트 왕조가 그 틈을 타 톨레도를 공격하여, 카스티야는 존망의 위기에 놓였다.[17]
6. 유산 및 평가
문화 분야에서 알폰소 6세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안전을 증진하고 갈리시아, 레온, 카스티야의 수도원에서 클뤼니 개혁을 추진했다.[1] 1073년 봄, 그는 레온의 수도원을 클뤼니 수도회에 최초로 양도했다.[1]
그는 모사라베 또는 톨레도 전례를 로마 전례로 대체했다. 이와 관련하여 알폰소 6세가 모사라베와 로마 예식서를 가져다가 불에 던졌다는 전설이 있다. 로마 예식서만 타자 왕은 모사라베 예식서를 불에 던져 로마 전례를 강요했다.
톨레도 정복자이자 위대한 유럽화 군주인 알폰소 6세는 통치 말년에 알모라비드 침공과 내부적 약점으로 인해 그가 이룩한 위대한 정치적 업적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알폰소 6세는 레온의 제국적 이상을 완전히 받아들였으며, 유럽의 영향에 대한 그의 개방성은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 봉건적 정치 관행을 인식하게 했다.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스는 이 두 요소의 결합에서 갈리시아 백작령과 포르투갈 백작령을 두 부르군디 출신 사위인 레이몽과 앙리에게 ''iure hereditario''(유일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상속하는 대신 두 딸과 아들에게 왕국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나바라-아라곤 전통에서 더 일반적임)로 부여한 이유를 설명한다. 몇 년 후, 이 결정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인판테''가 레온의 알폰소 7세가 되면서 결국 실현되지 못한 알폰소 라이문데스 치하의 독립 갈리시아의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알폰소 6세는 영웅 서사시 『엘 시드의 노래』에서 중세 시인이 위대한 왕에게 부여한 역할을 연기한다. 압제자가 되기도 하고, 용감하고 제멋대로인 귀족들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트루바두르가 이상으로 여기는 유형의 지배자이다.
형에 의해 사아군 수도원에 갇혔지만 탈출하여, 기사도적인 우정을 맺은 "무어인의 기사" 톨레도의 알마문(알마운)에게 보호를 받았고, 누이 우라카와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등의 이러한 전설은 그를 영웅화한 시인에 의한 것일 것이다. 또한 알폰소 6세는 형을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아 부르고스에서 엘 시드를 대표로 하는 귀족들에게 암살을 부정하는 선서를 요구받았고, 이를 원망하여 엘 시드를 추방했다고 전해진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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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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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두산백과 - 알폰소 6세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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