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다르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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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다르투아는 1820년 튀르리 궁전에서 태어났으며, 베리 공작의 아들로 보르도 공 작위를 받았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한 후, 앙리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삼색기 거부를 이유로 왕정 복고에 실패했다. 1883년 사망으로 부르봉 왕가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으며, 그의 사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합법주의자와 오를레아니스트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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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다르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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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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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앙리 샤를 페르디낭 마리 디외도네 다르투아 |
작위 | 보르도 공작 샹보르 백작 |
프랑스어 이름 | Henri Charles Ferdinand Marie Dieudonné d'Artois |
기타 칭호 | Fils de France (프랑스의 아들) |
왕위 주장 정보 | |
왕위 주장자 | 정통주의 프랑스 왕위 주장자 (앙리 5세) |
왕위 주장 기간 | 1844년 6월 3일 – 1883년 8월 24일 |
이전 왕위 주장자 | 루이 19세 |
다음 왕위 주장자 | 필리프 7세 (오를레앙파) 후안 3세 (정통주의)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820년 9월 29일 |
출생지 | 튈르리 궁전, 파리,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
사망일 | 1883년 8월 24일 |
사망지 | 프로스도르프 성, 프로스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매장지 | 코스타녜비차 수도원 |
가문 | |
가문 | 부르봉 왕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 |
어머니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 |
배우자 |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사 대공녀 (1846년 결혼)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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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앙리 다르투아는 1820년 9월 29일 파리의 튀일리 궁전 내 마르쌍 파빌리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샤를 10세의 차남 베리 공 샤를 페르디낭이며, 어머니는 양시칠리아 왕녀 마리 카롤린 드 부르봉시실리이다. 앙리는 아버지 베리 공이 암살된 지 7개월 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적의 아이'로 불렸다.[2] 탄생 당시 '''보르도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할아버지 샤를 10세의 잠정적 후계자였다. 루이 18세는 앙리의 탄생을 기념하여 35개의 왕실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앙리는 자식이 없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특별히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 압력을 받게 되자, 앙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피신해야 했다.
1836년 샤를 10세, 1844년 앙굴렘 공이 사망하면서 앙리는 부르봉 왕조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앙리는 샹보르 성에서 이름을 딴 '샹보르 백작'이라는 의례 칭호를 사용하며 왕정 복고를 주장했다.
1846년에는 오스트리아-에스테 가의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앙리 부부는 베네치아의 카발리 궁전을 구입하여 사교계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1871년 프랑스 총선에서 왕당파가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앙리에게 왕정 복고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앙리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시대적 흐름을 부정하며 삼색기를 폐지하려 했고, 결국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1883년 앙리는 망명지인 오스트리아 프뢰스도르프에서 사망했다. 그는 고리치아에 매장되었으며, 현재 그곳은 슬로베니아의 노바고리차이다. 앙리의 사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직계는 단절되었다.
2. 1. 7월 혁명과 망명 (1830년)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 압력을 받자, 샤를 10세는 5세였던 손자 앙리에게 양위하고 루이 필리프를 섭정공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는 스스로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고, 앙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피신해야 했다.[4]1830년 8월 2일, 샤를 10세는 7월 혁명의 여파로 퇴위했고, 20분 후 그의 장남 루이 앙투안도 앙리에게 양위했다. 샤를 10세는 루이 필리프에게 앙리를 '앙리 5세'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으나, 루이 필리프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의회는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선포했고, 앙리와 그의 가족은 1830년 8월 16일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5]
1832년 앙리의 어머니 마리 카롤린은 프랑스 서부에서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이후 앙리는 고모 마리 테레즈에게 양육되었다. 앙리는 마리 테레즈에게 깊이 의지했으며, 마리 테레즈 역시 앙리를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1836년 할아버지 샤를 10세, 1844년 삼촌 앙굴렘 공이 사망하면서 앙리는 부르봉 왕가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오를레앙파와 구별하기 위해 '레지티미스트'라고 불렸다.
2. 2. 결혼과 왕위 계승 주장 (1846년-1870년)
1846년 11월, 샹보르 백작 앙리는 오스트리아-에스테 가의 마리아 테레사 대공녀와 결혼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의 딸이었다.[3] 앙리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4]결혼 후, 앙리 부부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국제적인 감각을 익혔고, 각지의 사교계에서 환영받았다. 이들은 베네치아의 카발리 궁전을 구입하여 많은 귀족들을 접대하기도 했다.
앙리는 '샹보르 백작'이라는 의례 칭호를 사용하며,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 제2공화국,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거치면서도 지속적으로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오를레앙파와 구분하기 위해 레지티미스트라고 불렸다.
2. 3. 왕정 복고 시도와 실패 (1870년-1873년)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자 앙리는 다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였다. 1871년 프랑스 총선에서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한 왕당파 의원들은 입헌군주제를 조건으로 왕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앙리는 삼색기를 폐지하고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백기를 국기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왕당파 세력은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점차 약화되었다.[6]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제2제정이 붕괴되자, 왕당파는 국민의회에서 다수파가 되었다. 오를레앙파는 앙리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는 앙리가 아들이 없어 사망하면 오를레앙 가문의 파리 백작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앙리는 합법주의자들과 오를레앙파 양쪽의 지지를 받아 왕정 복고의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앙리는 프랑스가 삼색기를 버리고 '''플뢰르 드 리스트''' 깃발[7]을 사용해야만 왕관을 받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플뢰르 드 리스트가 새 왕의 개인 깃발이 되고 삼색기가 국기로 남는 타협안도 거부했다. 교황 비오 9세는 앙리의 결정을 듣고 "그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이 단지 손수건 때문에!"라고 말했다.[8]
1873년, 왕정 복고를 위한 또 다른 시도가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앙리는 파리로 가서 정부와 협상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11월 20일 국민의회는 원수 마그젠타 공작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을 향후 7년간 프랑스 국가 원수로 확정했다.[9]
2. 4. 사망과 유산 (1883년)
Henri프랑스어는 1883년 8월 24일 오스트리아 프로스도르프(Frohsdorf)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루이 15세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고리치아(Gorizia)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코스타녜비차 수도원(Kostanjevica Monastery) 교회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샤를 10세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샹보르 성(Château de Chambord)을 포함한 그의 개인 재산은 그의 사망한 누이의 아들인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에게 상속되었다.[10]그의 사망으로 레지티미스트(합법주의) 계승 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많은 레지티미스트들은 오를레앙가의 수장인 파리 백작 필리프를 프랑스 왕가의 수장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앙리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우트레히트 조약을 무시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자였던 몬티손 백작 후안 카를로스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지지했다. 이들은 나중에 에스파냐 백색당(Blancs d'Espagn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0] 몽티손 백작은 "프랑스 국왕 장 3세"로 불리기도 했다.
반면, 오를레아니스트들은 파리 백작을 "프랑스 국왕 필립 7세"로 지지했고, 일부 레지티미스트들도 이에 합류하여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3. 정치적 유산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한 후, 앙리 다르투아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1871년 프랑스 총선에서 왕당파 의원들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입헌군주제를 조건으로 왕위를 제안했지만, 앙리는 삼색기 폐지 등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시대적 흐름을 극도로 부정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6] 왕당파 세력은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점차 약해졌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제2제정이 붕괴되자, 왕당파는 국민의회에서 다수파가 되었다. 오를레앙파는 샹보르 백작(앙리)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기로 합의했고, 그가 아들이 없어 사망하면 파리 백작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앙리는 합법주의자들과 오를레앙파 양쪽의 지지를 받아 왕정 복고의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가 삼색기를 버리고 '''플뢰르 드 리스트''' 깃발[7]을 사용할 것을 조건으로 왕관을 받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플뢰르 드 리스트가 새 왕의 개인 깃발이 되고 삼색기가 국기로 남는 타협안을 거부했다.[8] 교황 비오 9세는 앙리의 결정을 듣고 "그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이 단지 손수건 때문에!"라고 말했다.
1873년 왕정 복고 시도가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앙리는 파리로 가서 정부와 협상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11월 20일 국민의회는 원수 마그젠타 공작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을 향후 7년간 프랑스 국가 원수로 확정했다.[9]
프랑스 제3공화국은 앙리의 사망과 그의 사촌인 파리 백작 필리프 왕자의 계승을 기다리기 위해 수립된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883년 앙리가 사망할 무렵, 여론은 공화국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앙리는 공화주의자들에게 "프랑스의 조지 워싱턴"—공화국이 수립되지 못하게 한 유일한 인물—으로 조롱받았다.
앙리의 사망으로 합법주의 계승 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앙리 자신은 프랑스 왕가의 수장이 오를레앙가의 수장인 파리 백작 필리프 왕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앙리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그의 진술과 조약을 무시하고, 스페인 계열의 몬티손 백작 후안을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지지했다.[10]
4. 가계도
양시칠리아 국왕
앙굴렘 공
베리 공
오를레앙 공
샹보르 백작
파르마 공
파리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