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크리스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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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크리스토프는 영국령 그레나다에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아이티 혁명 당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투생 루베르튀르 휘하에서 활동하며 장군의 지위에 올랐고, 장자크 드살린 암살 이후 북아이티를 지배하며 1807년 아이티 육해군 대원수가 되었다. 1811년에는 아이티 왕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6개의 성채와 8개의 궁전을 건설하고 강제 노역 제도를 시행했다. 그의 통치는 전제적이었으며, 말년에는 강제 노역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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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페티옹은 아이티 혁명의 주요 인물로서 아이티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토지 개혁, 시몬 볼리바르 지원, 교육 활동 등 아이티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앙리 크리스토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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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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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앙리 크리스토프 |
출생일 | 1767년 10월 6일 |
출생지 | 영국령 그레나다 |
사망일 | 1820년 10월 8일 |
사망지 | 아이티 왕국, 카프앙리 |
매장지 | 시타델 라페리에르, 아이티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배우자 | 마리루이즈 코이다비드 |
자녀 | 프랑수아 페르디낭 크리스토프 프랑수아즈 아메티스트 공주 안 아테나이르 공주 자크 빅토르 앙리, 왕세자 토마 드 벨리아르 남작 (사생아) |
통치 | |
왕위 계승 | 아이티 왕 |
통치 기간 | 1811년 3월 28일 – 1820년 10월 8일 |
대관식 | 1811년 6월 2일 |
선임자 | "그 자신" (아이티 대통령으로서) |
후임자 | 앙리 2세 (미선언) |
아이티 대통령 재임 기간 | 1807년 2월 17일 – 1811년 3월 28일 |
대통령 재임 형태 | 재임 |
대통령 선임자 | 자크 1세 (아이티 황제로서) |
대통령 후임자 | "그 자신" (아이티 왕으로서)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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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
프랑스어 | ɑ̃ʁi kʁistɔf |
2. 초기 생애
앙리 크리스토프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그레나다 출신으로, 프랑스인이 소유한 농장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인트 키츠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5] 부모와 함께 노예 신분으로 생도맹그로 오게 된 그는, 식당에서 일한 후 자유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1779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크리스토프는 프랑스군 생도맹그 의용 추격군(Chasseurs - Volontaires de Saint-Domingue)에 북치는 병사로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대는 사바나 포위전에 참전했으며, 사바나에는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6] 크리스토프가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주장도 있다.[7]
성인이 된 후, 크리스토프는 석공, 선원, 마구간 일꾼, 웨이터, 당구장 관리인 등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그의 수입 대부분은 주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캡프랑세의 호텔 레스토랑 "라 쿠르온느(La Couronne)"에서 일하며 경영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호텔 매출 기록은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는 1791년 노예 봉기 이전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그는 여동생 마리를 아이티로 데려왔고, 그녀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호텔리어로 일하며 배운 정치적 기술은 훗날 그가 군 장교 및 국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유용하게 쓰였다.
1791년 노예 봉기부터 아이티 혁명에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크리스토프는 투생 루베르튀르와 함께 북부에서 수년간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빠르게 대령으로 승진했다. 1802년 루베르튀르는 그를 장군으로 승진시켰고, 캡프랑세의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2. 1. 출생 및 배경
앙리 크리스토프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그레나다에 있는 프랑스인 소유 농장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인트 키츠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5] 크리스토프는 노예로 생도맹그에 부모와 함께 오게 된다. 그는 식당에서 일한 후 자유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79년 미국 독립 전쟁 시에 그는 아마도 프랑스군의 생도맹그 의용 추격군(Chasseurs - Volontaires de Saint-Domingue, 사바나 포위전에서 유색 인종, 즉 프랑스령의 흑인계에서 편성된 연대)에 북치는 병사로 동행했다.[6] 사바나에는 이 부대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크리스토프가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주장도 있다.[7]성인이 된 후, 크리스토프는 석공, 선원, 마구간 일꾼, 웨이터 또는 당구장 관리인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그의 대부분의 임금은 그의 주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15] 한 가지 유명한 이야기는 그가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의 최초 수도이자 주요 식민 도시인 캡프랑세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 "라 쿠르온느(La Couronne)"에서 일하고 경영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부유한 백인 프랑스 농장주들을 일컫는 "그랑 블랑(grand blancs)"들을 상대하는 데 능숙해졌다. 그러나 호텔의 매출 기록 중 어느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는 1791년 노예 봉기 이전에 젊은 시절 노예에서 해방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아이티에 정착한 후 언젠가 그는 그의 여동생 마리(Marie)를 아이티로 데려왔고, 그녀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그가 호텔리어로서 배운 정치적 기술은 그가 나중에 군 장교이자 국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2. 2. 노예 시절 및 프랑스군 복무
그레나다의 프랑스인 소유 농장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세인트키츠 출생설도 있다.)[5] 앙리 크리스토프는 노예 신분으로 부모와 함께 생도맹그로 오게 되었다. 그는 식당에서 일한 후 자유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79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그는 아마도 프랑스군 생도맹그 의용 추격군(Chasseurs - Volontaires de Saint-Domingue)에 북치는 병사로 동행했을 것이다. 이 부대는 사바나 포위전에 참전했으며, 사바나에는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6][7]성인이 된 후, 크리스토프는 석공, 선원, 마구간 일꾼, 웨이터 또는 당구장 관리인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그의 수입 대부분은 주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15] 그는 캡프랑세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 "라 쿠르온느(La Couronne)"에서 일하며 경영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호텔 매출 기록은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는 1791년 노예 봉기 이전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그는 여동생 마리를 아이티로 데려왔고, 그녀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그가 호텔리어로 일하며 배운 정치적 기술은 훗날 군 장교 및 국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유용하게 쓰였다.
1791년 노예 봉기부터 시작하여, 크리스토프는 아이티 혁명에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혁명 기간 동안 대령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북부에서 투생 루베르튀르와 수년간 함께 싸우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결국 캡프랑세의 총사령관에 올랐다. 1802년까지 루베르튀르는 그를 장군으로 승진시켰다.
3. 아이티 혁명
1791년 아이티 혁명이 발발하자, 크리스토프는 이 혁명에 참여하여 1802년에는 장군 직위까지 올랐다.
프랑스는 투생 루베르튀르를 프랑스로 추방하고 식민지를 다시 장악하고 노예제를 재건하기 위해 로샹보 휘하 2만 명이 넘는 새로운 군대를 투입했다. 장 자크 데살린은 프랑스군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을 이끌었고, 프랑스는 1803년 말 7,000명의 생존 군대를 철수시켰다. 데살린은 지도자로서 1804년 생도맹크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가 이름을 아이티로 바꾸었다.[8]
이후 크리스토프는 북부 지역을 담당했는데, 특히 라페리에르 요새 건설의 초기 단계를 감독했다.
3. 1. 투생 루베르튀르 휘하에서의 활약
앙리 크리스토프는 1791년 아이티 혁명으로 유명해졌으며, 1802년에는 장군 계급까지 승진했다.[1] 1806년에는 황제가 된 장자크 데살린에 대한 쿠데타에 참여하여 아이티 북부를 지배하게 되었다.[1] 주요 라이벌은 쿠데타 주모자인 알렉상드르 페숑이었으며, 페숑은 공화제를 지지하며 국토 남부를 지배했다.[1]3. 2. 데살린 암살 가담
1806년 앙리 크리스토프는 황제가 된 장자크 드살린에 대한 쿠데타에 참여하여 북아이티를 지배하였다. 주요 라이벌은 쿠데타 주모자인 알렉산드르 페숑이었는데, 페숑은 공화제를 옹호하며 국가의 남부를 지배했다.[30]1805년 남부 사령관인 니콜라스 제프라르 장군은 아이티의 자칭 황제 데살린을 죽이려는 음모를 크리스토프에게 제안했지만, 크리스토프는 데살린에게 경고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의 북부 지역에서의 영향력과 권력은 매우 강력하여, 최고 권력층에서 자신에 대한 반대가 암약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데살린조차도 그 장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9] 이 음모에는 데살린의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인 에티엔 엘리 제랭, 서부 제2사단 사령관인 알렉상드르 페티옹 장군, 니콜라스 제프라르 장군 등 그의 수많은 고위 장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1806년 10월 16일, 그들은 "압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에 서명하여 데살린 정부를 전복해야 할 필요성을 선포하고 크리스토프를 아이티 임시 정부 수장으로 선포했다.[10] 데살린은 1806년 10월 17일에 암살당했다.
4. 권력 투쟁과 분열
프랑스는 투생 루베르튀르를 프랑스로 추방하고, 식민지를 다시 장악하고 노예제를 재건하기 위해 로샹보 휘하 2만 명이 넘는 새로운 군대를 투입했다. 장 자크 데살린은 프랑스군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을 이끌었다. 프랑스는 1803년 말 7,000명의 생존 군대를 철수했다. 데살린은 지도자로서 1804년 생도맹크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가 이름을 아이티로 바꾸었다.[8]
크리스토프는 북부 지역을 담당했는데, 특히 라페리에르 요새 건설의 초기 단계를 감독했다. 1805년, 남부 사령관인 니콜라스 제프라르 장군은 아이티의 자칭 황제인 데살린을 죽이려는 음모를 크리스토프에게 알렸지만, 크리스토프는 데살린에게 경고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의 북부 지역에서의 영향력과 권력은 매우 강력하여, 최고 권력층에서 자신에 대한 반대가 암약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데살린조차도 그 장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9] 이 음모에는 데살린의 육군장관 겸 해군장관인 에티엔 엘리 제랭, 서부 제2사단 사령관인 알렉상드르 페티옹 장군, 니콜라스 제프라르 장군 등 그의 수많은 고위 장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1806년 10월 16일, 그들은 "압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에 서명하여 데살린 정부를 전복해야 할 필요성을 선포하고 크리스토프를 아이티 임시 정부 수장으로 선포했다.[10] 데살린은 1806년 10월 17일에 암살당했다.
1805년 산토도밍고 포위전과 관련된 내용은 #1805년 산토도밍고 침공과 학살 논란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데살린 사후, 크리스토프는 남부의 알렉상드르 페티옹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후 크리스토프는 추종자들과 함께 아이티 북부 플랭 드 노르(Plaine-du-Nord)로 후퇴하여 그곳에 별도의 정부를 수립했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남부에서 암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의심했다. 1807년, 그는 자신을 "''président et généralissime des forces de terre et de mer de l'État d'Haïti''" (아이티국의 육해군 최고사령관 겸 대통령)으로 선포했다.[13] 페티옹은 남부의 "아이티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남부군을 장악한 장 피에르 보이에 장군의 지지를 받았다.
1811년, 크리스토프는 아이티 북부 지역을 아이티 왕국으로 선포하고, 밀로의 대주교 장-바티스트-조제프 브렐(Jean-Baptiste-Joseph Brelle)에 의해 스스로 왕관을 썼다.
4. 1. 1805년 산토도밍고 침공과 학살 논란
장 자크 데살린은 1805년 프랑스군이 여전히 주둔하고 있던 섬의 동쪽(주로 산토도밍고)을 침공하는 구실로, 프랑스 장교 마리-루이 페랑이 14세 미만의 흑인 아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도록 명령했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데살랭의 군대는 아수아와 모카 등 여러 도시를 약탈하며 산토도밍고 시를 포위했다.[11]앙리 크리스토프(스페인어 자료에서는 '''엔리케 크리스토발'''로 언급됨)는 데살랭 휘하에서 모카와 산티아고 시를 공격했다. 변호사 가스파르 데 아레돈도 이 피차르도는 "모카의 교회에서 40명의 어린이들이 목이 잘렸고, 시체들은 교회 제단을 둘러싼 공간인 사제관에서 발견되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11] 이는 데살랭의 명령에 따라 크리스토프 장군이 자행한 여러 만행 기록 중 하나였다. 이들은 실패한 침략 시도 후 섬의 스페인어 사용 지역에서 후퇴했다.
1805년 4월 6일, 크리스토프 장군은 모든 군대를 집결시킨 후 모든 남성 포로들을 현지 묘지로 데려가 그들의 목을 찢었다. 희생자 중에는 바스케스 사제와 20명이 넘는 다른 사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그는 전 도시와 5개의 교회에 불을 질렀다. 그는 떠나면서 249명의 여성, 430명의 소녀, 318명의 소년을 가축처럼 몰고 갔는데, 당시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고려할 때 엄청난 수치이다. 알레한드로 예나스는 크리스토프가 산티아고에서만 997명을 데려갔다고 썼으며, "몬테 플라타, 산 페드로 및 코투이는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들은 목이 잘리거나 수천 명이 농장 동물처럼 묶여서 아이티로 가는 길에 구타를 당했습니다."라고 썼다.[11]
데살랭은 산토도밍고를 떠나기 전에 "정복된 지역에 주둔한 사령관들에게 모든 주민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아이티 쪽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노새와 다른 짐승들에게 짓밟히도록 명령했습니다."라고 했다.[12]
5. 아이티국과 아이티 왕국
1791년 아이티 혁명이 발발하자, 크리스토프는 뛰어난 활약을 펼쳐 1802년에는 장군으로 승진했다. 1806년 장자크 드살린 암살에 가담하여 아이티 북부를 장악했다. 주요 라이벌은 쿠데타 주모자이자 공화제를 지지하며 남부를 통치한 알렉상드르 페숑이었다.
1807년 앙리는 "아이티 육해군 대원수"(président et généralissime des forces de terre et de mer de l' État d' Haïti)[30]가 되었고, 페숑은 남부 "아이티" 대통령이 되었다. 1811년 앙리는 북부 아이티를 아이티 왕국으로 선포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4월 1일 칙령으로 완전한 황제 칭호를 얻었다.
아이티는 값비싼 전쟁에서 회복하기 위해 농업 생산량 증대에 힘썼다. 앙리 왕은 세금 대신 ''강제 노역'' 농장 노동을 시행했고,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부 아이티는 전제 정치였으나, 사탕수수 경제는 정부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앙리는 영국과 아이티가 카리브해 식민지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맺었고, 영국 해군은 프랑스군 공격을 경고하기로 했다. 1807년 영국 의회는 1807년 노예 무역 금지법을 통과시켜 영국 제국 내 노예 수입을 금지했다. 영국과의 무역 증가는 크리스토프 정부에 막대한 영국 파운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반면 페숑의 남부 아이티는 토지 분배 제도로 농업 생산성이 감소하고 수출이 줄어 가난해졌다.[17]
1814년 4월 나폴레옹 퇴위 후, 루이 18세는 생도맹그를 되찾으려 했다.[18] 1814년 파리 조약은 산토도밍고를 스페인에 반환하고, 노예제 폐지 손실 보상을 위해 5년간 추가 노예 무역을 허용했다. 1814년 10월, 앙리 1세 장관들은 프랑스 공작원들의 편지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지 회복 음모 증거를 공개했다.[19] 아이티는 프랑스 침공에 대비해 동원령을 내리고 국제 홍보 캠페인을 시작했다. 11월부터 아이티 팜플렛, 신문, 공개 서한이 대서양 전역에 실렸다.[20] 퐁페 발랑탱 바스테의 『식민 시스템 폭로』(Le Système colonial dévoilé) 등 인종, 식민주의 비판 글도 포함되었다.[21] 앙리는 윌리엄 윌버포스 등 영국 폐지론자들과 소통했다. 1815년 1월 5일, 그의 편지는 영국과 아이티 왕국 간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20]
5. 1. 아이티국 대통령 (1807-1811)
장 자크 데살린이 암살된 후, 크리스토프는 아이티 임시 정부 수장으로 선포되었다.[10] 알렉상드르 페티옹은 크리스토프의 주요 라이벌로, 공화제를 지지하며 국토 남부를 지배했다.1807년 앙리는 "아이티 국가 육해군 대원수 대통령"(président et généralissime des forces de terre et de mer de l'État d'Haïti)이 되었고, 동시에 페숑은 남부에서 아이티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5. 2. 아이티 왕국 국왕 (1811-1820)
1807년 앙리는 "아이티 육해군 대원수"(président et généralissime des forces de terre et de mer de l' État d' Haïti)가 되었다.[30] 1811년 앙리는 북아이티를 아이티 왕국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했으며, 4월 1일의 칙령으로 완전한 황제의 칭호를 얻었다.1811년 4월 1일의 칙령에는 그의 완전한 칭호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앙리(Henry), 신의 은총과 하이티 왕국 헌법에 따라, 토르튀가, 고나브 및 기타 인접 섬의 군주, 폭정의 파괴자, 하이티 국민의 재생자이자 후원자, 도덕적, 정치적, 군사적 제도의 창시자, 신세계 최초의 군주, 신앙의 수호자, 성 앙리(Saint-Henry) 왕실 및 군사 훈장의 창설자
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자크 빅토르 앙리는 아이티 황태자의 칭호와 함께 후계자가 되었다. 앙리는 영어가 모국어였다고 하며, 프랑스어로 된 문서에서 국왕의 이름은 영어식으로 '헨리'로 쓰여졌다. 앙리 1세는 프랑스의 재침공을 우려하여 라페리에르 요새를 포함하여 6개의 성과 8개의 궁전을 건설했다.
왕으로서 그가 한 첫 번째 활동 중 하나는 아이티 귀족(4명의 왕자, 7명의 공작, 22명의 백작, 40명의 남작과 14명의 "기사")을 임명한 것이었다. 그는 문장을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 문장원을 설립했고, 9년 후 그의 군주국 말까지 당초 87명의 귀족은 134명까지 증가했다.[16]

국왕으로서 크리스토프는 정교한 아이티 귀족 작위를 창설했는데, 처음에는 4명의 공작, 8명의 공작, 22명의 백작, 40명의 남작, 그리고 14명의 기사("chevaliers")로 구성되었다. 크리스토프는 새롭게 귀족이 된 사람들에게 문장을 제공하기 위해 문장원을 설립했다. 자신의 문장으로 크리스토프는 불꽃에서 일어나는 왕관을 쓴 불사조를 선택했고, 모토는 'Je renais de mes cendres'('나는 내 재에서 다시 일어난다')였는데, 이는 아마도 1802년 프랑스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해 그가 불태운 앙리 곶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814년 4월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 루이 18세 국왕은 생도맹그를 되찾으려 했다.[18] 5월 30일에 비준된 파리 조약(1814)은 이웃 국가인 산토도밍고를 스페인에 반환하고, 노예제 폐지로 인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5년간의 추가 노예 무역을 허용했다. 1814년 10월, 앙리 1세의 장관들은 섬에서 체포된 프랑스 공작원들이 소지하고 있던 편지 형태로 프랑스가 이전 식민지를 회복하려는 음모의 증거를 공개했다.[19] 이로 인한 격렬한 반발 속에, 아이티는 예상되는 프랑스 침공에 대비해 동원령을 내리고 국제적인 홍보 캠페인을 시작했다. 11월부터 아이티의 팜플렛, 신문, 공개 서한의 재판본이 대서양 세계 전역의 인쇄 매체에 실렸다.[20] 이러한 대중 선전과 편집 개입에는 퐁페 발랑탱 바스테의 『식민 시스템 폭로』(Le Système colonial dévoilé)와 같이 인종과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적 글들도 포함되었다.[21] 동시에 앙리는 가장 저명한 영국 폐지론자들과 소통을 시작했다.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1815년 1월 5일에 도착했고, 영국과 아이티 왕국 간의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시작했다.[20]
5. 3. 통치 정책 및 업적
1807년 앙리는 "아이티 육해군 대원수"[30]가 되었다. 1811년 앙리는 북아이티를 아이티 왕국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했으며, 4월 1일의 칙령으로 완전한 황제의 칭호를 얻었다.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자크 빅토르 앙리는 아이티 황태자의 칭호와 함께 후계자가 되었다. 앙리는 영어가 모국어였다고 하며, 프랑스어로 된 문서에서 국왕의 이름은 영어식으로 '헨리'로 쓰여졌다. 앙리 1세는 프랑스의 재침공을 두려워하여 6개의 성과 8개의 궁전을 건설했는데, 이 중 최대 규모는 라페리에르 요새였다.
앙리 1세는 아이티 귀족(4명의 왕자, 7명의 공작, 22명의 백작, 40명의 남작과 14명의 "기사")을 임명했다. 그는 문장을 고귀하게 만들기 위해 문장원을 설립했고, 9년 후 그의 군주제가 끝날 무렵에는 당초 87명의 귀족이 134명으로 늘어났다.
앙리 1세는 교육을 장려하고 '앙리 법전'이라는 법 제도를 도입하려 노력했다.[22] 그러나 독재적인 군주였기에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남부의 알렉산드르 페숑 정부와 끊임없는 분쟁을 겪었다. 앙리 1세의 통치 말년에는 국가 개발을 위해 사용하려 했던 강제 노역이라는 봉건적인 정책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23]
5. 4. 몰락과 죽음
질병으로 허약해진 앙리 크리스토프는 쿠데타를 두려워하여 53세에 은색 총알을 넣은 총으로 자살했다.[15] 그의 시신은 라페리에르 요새에 묻혔다.[24]
그의 손자 피에르 노르 알렉시는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아이티 대통령을 지냈다.[25]


6. 유산
앙리 크리스토프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그레나다에 있는 프랑스인 소유 농장에서 흑인 노예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세인트키츠 출생설도 있다. 그는 노예로서 생돔앵으로 끌려왔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한 후 자유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앙리 크리스토프는 하이티 혁명으로 유명해졌으며, 이후 스스로 왕위에 올라 하이티 왕국을 통치했다.
앙리 1세는 프랑스의 재침략을 우려하여 자신을 위해 6개의 성과 8개의 궁전을 건설했으며(가장 큰 것이 시타델 라페리에르다), 또 하나를 더 건설할 계획이었다. 교육을 진흥하고 법 제도(앙리 법전)를 도입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앙리 국왕은 독재적인 군주로서 미움을 받았고, 남부와의 끊임없는 분쟁에도 시달렸다. 그의 통치 말기에는 시민들이 봉건적인 정책과 국가 개발 정책에 강하게 반대했다. 53세의 나이에 병약해진 앙리 국왕은 쿠데타를 두려워하여, 은으로 된 총알로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시타델 라페리에르 내에 안장되었다.
피에르 노르 알렉시(1902년-1908년 아이티 대통령)는 그의 손자이다. 앙리 1세는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이승의 왕국(El reino de este mundo)』의 모델이 되었고, 마르티니크의 작가 에메 세제르의 1963년 희곡 『크리스토프 왕의 비극(La tragédie du roi Christophe)』의 주제가 되었다. 카파이시앙의 끊임없는 도움의 성모 대학교가 조직한 보이스카우트의 앙리 크리스토프 대(隊)는 그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7. 후손
피에르 노르 알렉시(Pierre Nord Alexis)는 앙리 크리스토프의 손자로,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아이티 대통령을 지냈다.[25] 미셸 베네(Michèle Bennett)는 앙리 크리스토프의 5대손으로, 장-클로드 뒤발리에(Jean-Claude Duvalier)와 결혼하여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아이티의 영부인이었다.[26][27]
참조
[1]
웹사이트
Almanach Royal d'Hay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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