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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마사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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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다케다 신겐을 섬긴 무장으로, '마사카게가 가는 곳은 적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용맹함을 떨쳤다. 그는 오부 겐시로라는 이름으로 다케다 신겐의 측근으로 시작하여, 시나노 침공에서 공을 세워 사무라이 대장으로 발탁되었다. 도라마사의 붉은 부대를 계승하고 야마가타라는 성을 받아 야마가타 마사카게로 개명했다. 미노와성 공략, 스루가 침공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했으며,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붉은 군대는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는 다케다 24장 중 한 명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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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마사카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본 사무라이, 야마가타 마사카게 그림 (1540년대 추정)
본명오부 마사카게
출생1524년
사망1575년 6월 29일
소속다케다 씨
주요 역할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서사 영화 가게무샤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
가문
씨족이이토미 씨 → 야마가타 씨
부모부: 이이토미 도에쓰?
형제이이토미 도라마사 (숙부 설), 마사카게
자녀마사미쓰
마사히사
마사시게
노부쓰구
딸 (사에구사 모리토모의 아내)
딸 (아이키 쓰네하야시의 아내)
딸 (요코타 다다마쓰의 아내)
양자: 사다마사
양자: 타로에몬
무사 정보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개명이이토미 겐시로, 야마가타 마사카게
별명사부로뵤에노죠
시호휴산 겐코 젠죠몬
묘소아이치현신시로시 다케히로 498, 야마나시현고슈시의 에린지
주군다케다 신겐가쓰요리
군사 경력
주요 전투오다와라성 포위 (1569)
미마세토게 전투 (1569)
미카타가하라 전투 (1573)
요시다성 포위 (1575)
나가시노 전투 (1575)

2. 생애

오부 마사토라가 할복하여 다케다 요시노부의 반역 실패를 덮은 후, 마사카게는 성을 야마가타로 바꿨다(처음에는 오부 마사카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7] 무타케다 가문의 가신인 이이토미 토라마사의 동생으로 여겨지지만, 조카라고도 한다.

전국 시대 이이토미 일족에서는 다케다 노부토라 가신인 이이토미 도에쓰의 아들로 보이는 "겐시로"가 1515년 10월 17일에 사이 군 국인 오이 노부타쓰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9] 이 "겐시로"는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가명과 일치하므로, "겐시로"는 토라마사・마사카게의 아버지라고 생각된다.[9]

『고요 군칸』에 따르면, 마사카게는 처음에는 다케다 신겐의 근신으로 섬기다가, 이어서 쓰카이반이 되었다. 『고요 군칸』에서는 세이신기 시나노 침공에서의 이나 공략에서 첫 출진을 하고, 가미노미네 성 공략에서 제일 먼저 공을 세웠으며, 1552년 시나노 공략의 공적으로 기마 150명을 거느리는 사무라이 다이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토라마사에 못지않은 무사다운 면모를 보여 "겐시로가 가는 곳에 적이 없다"라고까지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확실한 첫 등장 사료는 1556년 8월 2일로, 마사카게는 이이토미 겐시로로서 미즈시나 슈리료에게 주어진 시나노 젠코지와의 왕래에 관한 제역 면허 주인장 주자를 맡고 있다.[10]

1563년, 사부로베이노조를 칭했다. 그 후에도 순조롭게 전공을 세워 가신 가로에 올랐으며 300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1564년 7월에는 히다 국에 침입하여 에마 씨・미키 씨를 항복시켰다(『에마 가 후칸록』).

1565년 10월, 신겐의 적자 다케다 요시노부와 그의 후견인이었던 토라마사가 모반을 일으켰고, 10월 15일에 토라마사는 처벌되었다(요시노부 사건, 고야산 세이게이인 『가이 국 과거장』). 신겐은 "이이토미 토라마사가 우리 사이(신겐과 요시노부)를 갈라놓으려는 밀모가 발각되었다", "요시노부와의 부자 관계에 문제는 없다"라는 취지의 편지를 오바타 겐고로에게 보냈다.[11] 요시노부는 사건 2년 후 병사했다.[12][13] 『고요 군칸』에 따르면, 마사카게는 혈족인 토라마사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고도 이를 신겐에게 고발했다. 이 공으로 토라마사의 아카조나에 부대를 계승함과 동시에, 이이토미의 성에서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 대에 단절되었던 야마가타(야마가타) 씨의 이름을 받아 '''야마가타 마사카게'''로 개명했다고 하며, 1566년 8월 시점에서의 개명이 확인된다. 마사카게는 하라 마사타네와 함께 다케다 가문의 정치 직인 "료쇼쿠"를 맡았다고 하지만, 문서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니시 우에노 침공에서의 미노와 성 공략전, 스루가 이마가와 영지 침공(스루가 침공), 고쇼 동맹 파탄 후의 사가미 고호조 씨와의 전투 등에 참가했다고 하지만, 문서상으로는 주로 신겐 측근으로서 제역 면허나 참진 명령, 사찰 지배 등 다케다 씨의 주인장 주자로서의 활동이 확인되며, 미노 국의 도야마 씨, 미카와 국의 도쿠가와 씨 등 원방 국중이나 마쓰오 오가사와라 씨・무로가 씨・아카스 씨 등의 시나노 국중, 그리고 미에다 씨・요코타 씨 등 가이 다케다 가신과의 취급을 맡고 있다. 1568년 이후에는 아시나 씨와의 연락을 맡았다.[14] 1569년에는 스루가 에지리 성 대에 임명되었다.

1571년 다케다 씨는 대규모 토토미・미카와 침공을 감행하여, 마사카게는 야마가 삼방 중 등 오쿠미카와 국중을 복속시키고, 저항한 스게누마 사다토요에 대해서는 같은 해 4월 28일 거성인 오노다 성을 함락시키고 스게누마 사다토요를 퇴각시켰으며, 나아가 요시다 성을 포위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1571년 침공은 근거가 되는 문서군의 연대 비정이 1575년으로 내려가, 일련의 경위는 나가시노 전투의 전제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15][16]

『다이토키』에 따르면, 1572년 10월, 신겐이 "서상 작전"을 시작하자, 아키야마 토라시게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시나노에서 미카와로 침공했다.[17] 다케다 씨에게 종속된 스게누마 씨나 오쿠다이라 씨 등 오쿠미카와 국중은 야마가타의 지휘하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선도하여 미카와 동부 나가시노 성을 경유해 하마마쓰 방면으로 진군했다. 미카와 야나 군의 가키모토 성, 나아가 국경을 넘어 토토미의 이히라 성도 함락시키고 남진하여 하마마쓰 성을 압박하는 기반을 완료한 후 신겐 본대에 합류했다(붓소쿠 전투). 같은 해 12월 22일 다케다 세력과 미카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에 미카타가하라 전투가 발생하여, 『고요 군칸』에서는 야마가타 세력이 무너질 뻔한 곳을 다케다 가쓰요리가 도왔다는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17]

1573년 4월 12일, 신겐은 시나노 이나 군 고마바에서 사망한다. 『고요 군칸』에 따르면, 신겐은 "나의 죽음을 3년간 숨겨라. 그리고 가쓰요리를 보좌해 다오", "내일은 세타에 깃발을 세워라"라고 유언을 남겨,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중진 필두로서 신겐의 적자 다케다 가쓰요리를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쓰요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 소외되었다고 한다.

가쓰요리의 가독 상속 후, 1573년 8월 21일 미카와 나가시노 성(아이치현 신시로 시)으로의 후속 지원 지휘를 명받았다.[17]

『묘치 연보』에 따르면, 1574년 다케다 가쓰요리의 히가시미노 침공에서 묘치 성을 둘러싼 전투에서는 구원하러 온 오다 노부나가 본대 3만 명에 대해 야마가타는 6,000명의 별동대를 맡아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격퇴했다. 전투에서는 퇴각하는 노부나가 군을 추격하여 4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노부나가의 주변을 지키던 16기 중 9기가 격파되고 7기가 도망가는 등, 한때 노부나가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2. 1. 신겐 시절

오부 도라마사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카라고도 전해진다.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옛 이름은 오부 겐시로(飯富源四郎)이다. 처음에는 다케다 신겐을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이후 사번(使番)이 되었다. 시나노 침공 때 처음 출진했으며, 간노미네성(神之峰城) 공략에서 선봉으로 나서 전공을 세웠다. 덴분 21년 (1552년), 시나노 공격에서 세운 공으로 기마 150기를 거느리는 사무라이 다이쇼(侍大将)로 발탁되었다. 이후에도 오부 도라마사 못지않은 무용을 발휘하여 "마사카게가 가는 곳에는 적이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에이로쿠 6년(1563년)에는 사부로효우에노죠(三郎兵衛尉)를 자칭했다. 그 후에도 꾸준히 전공을 쌓아, 대대로 가로를 맡아온 집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300기의 대장이 되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신겐의 적남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와 그의 부역이었던 오부 도라마사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마사카게는 혈족인 도라마사와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겐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 공으로 도라마사의 아카조나에(赤備え部隊)를 계승하고,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 대에 끊어졌던 야마가타(山県)라는 성을 받아 야마가타 마사카게로 개명하였다. 이타가키 노부카타아마리 도라야스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전사한 후에는, 하라 마사타네(原昌胤)와 함께 다케다 가문의 최고 정치 기관인 "시키(職)"를 맡았다.

그 후에도 고즈케 미노와성(箕輪城) 공략전, 스루가 침공(駿河侵攻), 오다와라성 공격 등 신겐을 따라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마사카게는 무용뿐만 아니라 내정과 외교에도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겐키 3년(1572년) 10월, 신겐의 서상 작전이 시작되자, 마사카게는 신겐의 명에 따라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별동대로서 미카와 동부의 나가시노성을 거쳐 하마마쓰 방면으로 진군했다. 미카와 야와노코오리(八名郡)의 가키모토성(柿本城)을 함락시키고, 도토미의 이다이라성(井平城)을 함락시킨 후 남진하여 하마마쓰성을 압박하는 거점을 마련하고 신겐 본대와 합류하였다. 같은 해 12월 22일, 다케다 군이 압승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돌격하여 다케다 군의 배후를 노리던 이에야스 군을 격퇴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추격전을 벌여, 이에야스가 한때 자결을 각오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겐키 4년(1573년) 4월, 신겐이 병에 걸렸을 때, 마사카게는 "나의 죽음을 3년간 숨겨라, 그리고 다케다 가쓰요리를 보좌하라", "내일은 세타(瀬田)에 깃발을 세우자"라는 유언을 받았다.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중진의 필두로서 신겐의 적자 다케다 가쓰요리를 보좌하게 되었으나, 가쓰요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 소외당했다고 한다.

2. 2. 나가시노 전투와 최후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철퇴를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21일 시타라가하라 전투(設楽原決戦)에서 다케다 군 좌익을 담당하여 도쿠가와 진으로 돌격, 분전하여 적진을 돌파했으나 다케다 군은 대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쓰치야 마사쓰구(土屋昌次)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마에다 도시이에 부대의 총탄에 맞아 향년 47세로 전사했다.[3][4] 전사한 마사카게의 수급은 가신 시무라 미쓰이에(志村光家)가 적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져갔다.[18]

마사카게는 미마세토게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등 많은 전투에 참전한 맹장이었다.[5]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1572–73) 동안에는 도쿠가와 소유의 요시다 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전투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였으며, 이 때 가쓰요리에게 명예로운 철수를 건의하였다.[6]

도쿠가와 씨족의 이이 나오마사는 훗날 다케다 씨족의 가신들을 흡수하여 "마사카게의 붉은 군대"를 계승, 발전시켰다.

3. 군사적 유산

마사카게는 많은 전투에서 싸운 맹렬한 전사였으며 시나노에 영지를 받았다. 1569년 미마세토게 전투에 참전했으며, 1572년 ~ 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동안 도쿠가와 가문의 소유였던 요시다 성을 함락시켰다.[3][4]

이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마지막 작전은 1575년 나가시노 전투였으며, 가쓰요리에게 철수를 설득하려 했다.[5]

도쿠가와 가문의 이이 나오마사는 다케다 가문의 생존 가신들을 얻었고, 적에게 공포심을 주고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 붉은 갑옷을 입은 정예 사무라이 부대를 여럿 갖춘 "마사카게의 붉은 군대"의 아이디어를 구현했다.[6]

4. 인물

오부 도라마사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카라는 설도 있다.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옛 이름은 오부 겐시로(飯富源四郎)이다. 처음에는 다케다 신겐의 근습으로 일하다가 사번(使番)이 되었다. 시나노 침공 때 첫 출진하여 간노미네성(神之峰城) 공략에서 선봉으로 전공을 세웠다. 덴분 21년 (1552년) 시나노 공격 때의 공적으로 기마 150기를 거느리는 사무라이 다이쇼로 발탁되었다. 이후에도 도라마사 못지않은 무용을 발휘하여 "마사카게가 가는 곳에는 적이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에이로쿠 6년(1563년)에는 사부로효우에노죠(三郎兵衛尉)를 자칭하였다. 그 후에도 순조롭게 전공을 세워 300기를 거느리는 대장이 되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신겐의 적남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와 그의 부역이었던 도라마사가 모반을 일으켰는데, 마사카게는 혈족인 도라마사와 연관되어 있었음에도 이를 신겐에게 고발했다고 한다. 이 공으로 도라마사의 아카조나에 부대를 계승하고,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 대에 단절되었던 야마가타(山県)라는 성을 받아 야마가타 마사카게로 개명하였다. 이타가키 노부카타아마리 도라야스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전사한 후에는 하라 마사타네(原昌胤)와 함께 다케다 가문의 최고 정치 기관인 "시키(職)"를 맡았다.

고즈케 미노와성(箕輪城) 공략전, 스루가 침공(駿河侵攻), 오다와라성 공격 등 신겐을 따라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마사카게는 무용뿐만 아니라 내정과 외교에도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

겐키 3년(1572년) 10월, 신겐의 상경 작전이 시작되자, 마사카게는 5000명의 별동대를 이끌고 미카와 동부의 나가시노성을 경유하여 하마마쓰 방면으로 진군했다. 미카와 야와노코오리(八名郡) 가키모토성(柿本城)과 도토미 이다이라성(井平城)을 함락시키고 남진하여 하마마쓰성을 압박하는 거점을 마련한 후 신겐 본대와 합류하였다. 같은 해 12월 22일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진으로 돌격하여 다케다 군의 배후를 노리던 이에야스 군을 격파했다. 이후에도 추격전을 전개하여 이에야스가 한때 자결을 각오할 정도였다고 한다.

겐키 4년(1573년) 4월, 신겐이 병에 걸리자 "나의 죽음을 3년간 숨겨라, 그리고 다케다 가쓰요리를 보좌하라", "내일은 세타(瀬田)에 깃발을 세우자"라는 유언을 남겼다.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중진의 필두로서 가쓰요리를 보좌하게 되었으나, 가쓰요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 소외되었다고 한다.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가쓰요리에게 철퇴를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21일 시타라가하라 전투(設楽原決戦)에서 다케다 군 좌익을 담당하여 도쿠가와 진으로 돌격하였다. 전사를 각오하고 분전하여 적진을 돌파했으나, 결국 다케다 군은 대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마사카게와 쓰치야 마사쓰구(土屋昌次) 등이 전사하였다. 마사카게는 마에다 도시이에 부대의 총탄에 맞아 향년 47세로 전사하였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마사카게의 수급은 가신 시무라 미쓰이에(志村光家)가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가져갔다고 한다.


  • 노부나가 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나가시노 전투에서 죽은 자들 중 마사카게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만큼 적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 신겐의 측근 중에서도 신겐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 다케다 4천왕(武田四天王), 다케다 24장수(武田二十四将) 중 한 명이다.
  • 다케다 가문의 푸다이 가로인 이이토미 도라마사의 동생으로 여겨지지만, 조카라는 설도 있다.


전국 시대 이이토미 일족 중 다케다 노부토라의 가신 이이토미 도에쓰의 아들로 추정되는 "겐시로"가 에이쇼 12년(1515년) 10월 17일 오이 노부타쓰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9]。이 "겐시로"는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가명과 일치하므로, 마사카게의 아버지로 추정된다[9]

『고요 군칸』에 따르면, 처음에는 다케다 신겐의 근신으로 섬기다가 쓰카이반이 되었다. 시나노 침공 중 이나 공략에서 첫 출진하여 가미노미네 성 공략에서 가장 먼저 공을 세웠고, 덴분 21년(1552년) 시나노 공략의 공으로 기마 150명을 거느리는 사무라이 다이쇼로 발탁되었다. 이후 "겐시로가 가는 곳에는 적이 없다"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확실한 첫 등장은 고지 2년(1556년) 8월 2일, 이이토미 겐시로로서 미즈시나 슈리료에게 주어진 시나노 젠코지 왕래에 관한 제역 면허의 주인장 주자를 맡았다[10]

에이로쿠 6년(1563년), 사부로베이노조를 칭했다. 이후 푸다이 가로에 들어가 300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대장이 되었다.

에이로쿠 7년(1564년) 7월, 히다 국에 침입하여 에마 씨・미키 씨를 항복시켰다(『에마 가 후칸록』).

에이로쿠 8년(1565년) 10월, 신겐의 적자 다케다 요시노부와 그의 후견인 도라마사가 모반을 일으켜 10월 15일 도라마사가 처벌되었다(요시노부 사건). 신겐은 "이이토미 도라마사가 우리 사이(신겐과 요시노부)를 갈라놓으려 했으나 발각되었다", "요시노부와의 관계에는 문제가 없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오바타 겐고로에게 보냈다[11]。요시노부는 2년 후 병사했다[12][13]。『고요 군칸』에 따르면, 마사카게는 혈족인 도라마사의 모반을 알고 신겐에게 고발했다고 한다. 이 공으로 도라마사의 아카조나에 부대를 계승하고, 이이토미 씨에서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 대에 단절되었던 야마가타 씨의 이름을 받아 '''야마가타 마사카게'''로 개명했다. 에이로쿠 9년 8월 시점에 개명이 확인된다. 하라 마사타네와 함께 다케다 가문의 정치 직인 "료쇼쿠"를 맡았다고 하지만, 문서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니시 우에노 침공 중 미노와 성 공략전, 스루가 이마가와 영지 침공(스루가 침공), 고쇼 동맹 파탄 후 사가미 고호조 씨와의 전투 등에 참가했다고 하지만, 주로 신겐 측근으로서 제역 면허, 참진 명령, 사찰 지배 등 다케다 씨의 주인장 주자로 활동했다. 미노 국 도야마 씨, 미카와 국 도쿠가와 씨 등, 시나노 국중, 가이 다케다 가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에이로쿠 11년 이후에는 아시나 씨와의 외교를 맡았다[14]。에이로쿠 12년(1569년) 스루가 에지리 성 성주 대리로 임명되었다.

겐키 2년(1571년) 다케다 씨는 대규모 도토미・미카와 침공을 감행, 마사카게는 야마가 삼방 중 등 오쿠 미카와 국중을 복속시켰다. 스게누마 사다토요에 대해서는 같은 해 4월 28일 오노다 성을 함락시키고 퇴각시켰으며, 요시다 성을 포위했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겐키 2년의 침공 근거 문서군의 연대가 덴쇼 3년으로 내려가 나가시노 전투의 전초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15][16]

『다이토키』에 따르면, 겐키 3년(1572년) 10월 신겐의 "서상 작전" 때 아키야마 토라시게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시나노에서 미카와로 침공했다[17]。 스게누마 씨나 오쿠다이라 씨 등 오쿠 미카와 국중은 야마가타의 지휘하에 편입, 이들을 선두로 미카와 동부 나가시노 성을 경유하여 하마마쓰 방면으로 진군했다. 미카와 야나 군 가키모토 성과 토오토우미 이히라 성을 함락, 남진하여 하마마쓰 성을 압박하는 기반을 만든 후 신겐 본대와 합류했다(붓소쿠의 전투)。12월 22일 미카타가하라 전투가 벌어졌고, 『고요 군칸』에는 야마가타 세력이 무너질 뻔한 것을 다케다 가쓰요리가 도왔다는 일화가 있다[17]

겐키 4년(1573년) 4월 12일, 신겐은 시나노 이나 군 고마바에서 사망했다. 『고요 군칸』에 따르면, 신겐은 "나의 죽음을 3년간 숨겨라. 가쓰요리를 보좌하라", "내일은 세타에 깃발을 세워라"라고 유언을 남겼고,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중진 필두로서 가쓰요리를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쓰요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 소외되었다고 한다.

가쓰요리의 가독 상속 후, 덴쇼 원년(1573년) 8월 21일 미카와 나가시노 성(아이치현 신시로시) 후속 지원 지휘를 명받았다[17]

『묘치 연보』에 따르면, 덴쇼 2년(1574년) 다케다 가쓰요리의 히가시 미노 침공 때 묘치 성 전투에서, 구원 온 오다 노부나가 본대 3만 명에 대해 6000명의 별동대를 맡아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격퇴했다. 퇴각하는 노부나가 군을 추격하여 4리를 후퇴시켰고, 노부나가의 주변 16기 중 9기가 격파되고 7기가 도망가는 등 노부나가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웠다고 한다.

갑양군감』, 『당대기』에 따르면, 덴쇼 3년(1575년) 5월 나가시노 전투에서 야마가타, 나이토 마사히데, 바바 노부하루, 하라 마사타네 등은 철수를 진언했지만, 가쓰요리와 측근 나가사카 미쓰카타(조칸사이) · 아토베 가쓰스케가 결전을 주장하여 가쓰요리가 결전을 결정했다고 한다.

5월 21일 시타라가하라 결전에서, 『갑양군감』, 『나가시노 합전도 병풍』에 따르면 나이토 마사히데, 하라 마사타네 등과 함께 다케다 군 좌익 핵심을 담당했다[18]. 『갑양군감』에 따르면, 300기를 이끌고 스루가 아사히나 씨, 시나노 마쓰오 오가사와라 씨, 아이키 요다 씨, 오구마 씨, 미카와 타미네 스가누마 씨, 나가시노 스가누마 씨, 도토우미 미우라 씨, 하라미이시 씨 등 국중들을 거느렸다.

『오다 노부나가 공기』, 『마쓰다이라기』, 『오스카기』에 따르면 다케다 군의 공세는 9시에 시작, 좌익 야마가타 세력이 도쿠가와 군을 습격했다. 『오다 노부나가 공기』에 따르면 "제일 먼저" 공격을 시작했지만 패퇴했고, 미노코쿠(오후 2시경) 퇴각했으며, 야마가타, 사나다 노부쓰나 등은 추격전 중 전사했다. 향년 47세. 고야산 세이케이인 『가이국 공양장』에는 전사 시각을 "미노코쿠"로 기록하고 있다.

『나가시노 합전도 병풍』에는 전사한 마사카게의 수급을 가신 시무라 마타자에몬이 적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가져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 『오다 노부나가의 기록』 나가시노 전투 부분에서, 토벌한 머리 중 마사카게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만큼 적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다케다 가문 중신 중 으뜸이었다. 다케다 4천왕 · 다케다 24장수 중 한 명이다.
  • 야마가타 부대는 군장을 붉은색으로 통일했기 때문에 "'아카조나에'"로 불리며 두려움을 샀다. 아카조나에를 보기만 해도 용맹한 병사조차 몸서리쳤다고 한다. 야마가타 부대의 강력함은 아카조나에를 최강 부대의 대명사로 만들었고, 여러 다이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사카게 사후 이이 나오마사사나다 노부시게 등도 아카조나에를 채용했다.
  • 무용은 뛰어났지만, 풍채는 좋지 않았다. 신장 130~140cm, 마른 몸에 언청이였다고 한다. 『교합잡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이이토미 효부의 "동생"으로 알려졌지만, 나이 차가 커 "조카"라는 설도 있다. 모리 씨의 『하기번벌열록』 · 『하기번제계보』에 따르면, 마사카게의 아버지는 아키 다케다 씨에게 섬긴 미부 성 성주 야마가타 시게아키이며, 형은 야마가타 시게후사이다. 마사카게의 어머니는 이이토미 효부의 누이로, 11세 무렵 숙부를 의지해 가이 국으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야마가타 마사카게 관계 사료에서는 서국 출신이라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19]
  • 사위로는 아시가루 타이쇼 사에구사 마사사다가 있으며, 마사사다는 야마가타 성을 칭했다. '''야마가타 군단''' 아이비슈 담당 아이키 시헤이, 에도 막부 직참 하타모토 요코타 타다마츠도 사위이다.
  • 가와나카지마 전투 때, 우에스기 측 오니고지마 야타로와 일기토를 벌였다. 다케다 신겐의 적남 요시노부가 궁지에 몰리자, "주군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승부를 미루고 싶다"고 요청했고, 야타로는 쾌히 승낙했다. 마사카게는 야타로를 "꽃도 열매도 있는 용사"라고 칭찬했다 (고에쓰 신센로쿠).
  • 신겐의 이복 동생 이치조 노부타츠가 "야마가타 부대는 왜 강한가"라고 묻자, "훈련도 중요하지만, 전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항상 첫 출진처럼 신중하게 책략을 세우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때만 싸운다"라고 답했다 (오키나 이야기).
  • 히다 공격 때, 피로로 사기가 떨어진 군세를 이끌던 중 원숭이에게 이끌려 온천에 들어가 피로를 풀었다는 전설이 히라유 온천 개탕 유래가 되었다.
  • 현재 노부쓰구의 자손이 야마나시시에서 "야마가타관" 여관을 경영하고 있다.
  • 나가시노 전투에서 총탄에 양팔을 관통당하고도 지휘봉을 놓지 않으려 입에 물고 전사하는 순간까지 지휘했다.

5. 기타


  •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우에스기 측의 맹장 오니고지마 야타로와 일기토를 벌였다. 다케다 신겐의 아들 요시노부가 궁지에 몰리자, 마사카게는 야타로에게 "주군의 아드님을 구하기 위해 승부를 미루고 싶다"고 요청했고, 야타로는 이를 쾌히 승낙했다. 마사카게는 야타로를 "꽃과 열매를 겸비한 용사"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고에쓰 신센로쿠)[1]
  • 신겐의 이복동생 이치조 노부타츠는 마사카게에게 "야마가타 부대는 어째서 그리 강한가"라고 물었다. 마사카게는 "훈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다. 늘 첫 출진처럼 전투에 임하는 각오로 신중히 책략을 세우고,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오키나 이야기)[2]
  • 히다 공격 당시, 피로로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을 이끌던 중 나타난 원숭이를 따라 온천에 들어가 피로를 풀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것이 히라유 온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3]
  • 현재, 노부쓰구의 후손이 야마나시시에서 "야마가타관"이라는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4]
  • 나가시노 전투에서 총탄에 양팔을 관통당하고도 지휘봉을 놓지 않으려 입에 물고, 전사하는 순간까지 지휘를 계속했다고 한다.[5]

6. 가계

무타케다 가문의 푸다이 가로인 이이토미 토라마사의 동생으로 여겨지지만, 조카라고도 한다(자세한 내용은 후술).

전국 시대의 이이토미 일족에서는 다케다 노부토라 가신인 이이토미 도에쓰의 아들로 보이는 "겐시로"가 1515년 10월 17일에 사이군의 국인인 오이 노부타쓰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9]。이 "겐시로"는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가명과 일치하므로, "겐시로"는 토라마사・마사카게의 아버지라고 생각된다[9]

구 분내 용
형제
아들
양자


7. 대중문화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서사 영화 ''가게무샤''에서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다.[8]

'''영화・텔레비전 드라마'''

※ '연'은 연기한 배우 이름.

작품명방영 연도방송사/구분배우
태합기1965년NHK대하드라마에토 이사무
천지인1969년NHK 대하드라마카와라자키 켄조
풍림화산1969년영화사카이 사치오
그림자 무사1980년영화오오타키 히데지
도쿠가와 이에야스1983년NHK 대하드라마이노우에 쇼분
여풍림화산1986년TBS야마모토 키요시
다케다 신겐1988년NHK 대하드라마시노다 사부로
다케다 신겐1991년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노자키 카이타로
노부나가 KING OF ZIPANGU1992년NHK 대하드라마코야마 타케히로
오다 노부나가1994년TV 도쿄나카무라 타카오
풍림화산2007년NHK 대하드라마마에카와 야스유키
여성 성주 나오토라2017년NHK 대하드라마야마모토 류지
노부토라2021년영화카츠라야마 신고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2023년NHK 대하드라마하시모토 사토시



'''무대'''


  • DisGOONie presents vol.3 『Sin of Sleeping Snow』 (2016년 6월, Zepp Blue Theater 롯폰기, 연: 스즈키 히로키)


'''소설'''

  • 오가와 요시아키 『야마가타 마사카게 - 다케다 군단 최강의 "붉은 비대"를 이끈 맹장』 (PHP 문고)

참조

[1] 웹사이트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山県昌景」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3
[2] 웹사이트 Shingen Takeda (Character) from ''Kagemusha'' (1980) https://www.imdb.com[...] 2013-05-17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4]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1987
[5] 서적 The Samurai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7
[6]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井伊直政」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3
[7] 웹사이트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山県昌景」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3
[8] 웹사이트 Masakage Yamagata (Character) from Kagemusha (1980) https://www.imdb.com[...] 2013-05-17
[9] 문서 丸島, 2015, p=217
[10] 문서 『諸州古文書』 - 655
[11] 문서 「飯富兵部少輔所行を以て、信玄・義信の間相妨たぐべき陰謀露見候条、生害を加えられ候。父子間の事は、元来別条無く候。心易かるべく候」(『尊経閣古文書纂』 十月二十三日付)
[12] 뉴스 平山優氏「切腹だったのか、病死だったのか、これまで二説に分かれていましたが、このほど大河ドラマ『真田丸』でも時代考証を担当されていた黒田基樹氏により新史料が発掘されまして病死だという事が明らかになりました」 NHK大河ドラマ「どうする家康」コラム 大河と歴史の裏話『文化人としての 武田信玄・今川義元を描く』2023年6月25日
[13] 웹사이트 『「時代を駆け抜けた戦国武将たち~武田信玄の新研究・義信事件を考える」講師は、2016年NHK大河ドラマ「真田丸」の時代考証を担当された駿河台大学教授の黒田基樹先生。重要史料によれば、義信は病死であった。これにより事件の背景や事件への信玄の処置についての理解は、大きく考え直さなければならない。事件について新たな見解を提示し、真実に迫る。』武田信玄の新研究【NHKカルチャーオンデマンド講座】2022年4月22日 https://b2b-ch.infom[...]
[14] 서적 武田家臣団人名辞典 東京堂出版 2015
[15] 서적 武田信玄と勝頼 岩波新書 2007
[16] 간행물 戦国大名武田氏の遠江・三河侵攻再考 2007
[17] 문서 丸島, 2015, p=684
[18] 서적 長篠之戦 春秋社 1960
[19] 간행물 山本勘助・菅助研究の軌跡 戎光祥出版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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