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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양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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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갑양군감은 다케다 신겐과 다케다 가쓰요리 시대를 다룬 일본의 군학서이다. 고사카 마사노부의 구술을 바탕으로 1575년부터 1586년 사이에 집필되었으며, 다케다 가문의 몰락 과정을 담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의 영향으로 사료적 가치가 부정되기도 했으나, 1990년대 사카이 겐지의 연구를 통해 재평가되었다. 특히 무사도와 윤리 사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현재까지 다양한 판본과 연구 자료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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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양군감
개요
유형군사 기록
저자오바타 카게노리
창작 연도1616년
언어일본어

2. 성립 경위와 사료적 평가

《고요군칸》(이후 《군칸》으로 약칭)의 성립은 《군칸》 본문에 따르면 덴쇼 3년(1575년) 5월부터 5년(1577년)으로, 덴쇼 14년(1586년) 5월자로 끝났다고 했다. 《군칸》에 따르면 다케다 신겐다케다 가쓰요리 시기의 다케다 가신이었던 고사카 마사노부(高坂弾正昌信, 가스가 도라쓰나春日虎綱, 이후 「도라쓰나」로 약칭)가 다케다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여 도라쓰나의 조카이기도 했던 가스가 소지로(春日惣次郎) ・ 가스가의 가신인 오쿠로 히코주로(大蔵彦十郎) 등이 도라쓰나의 구술을 받아 적어 내려간다는 체제로 되어 있으며, 다케다 가쓰요리나 아토베 가쓰스케(跡部勝資) ・ 나가사카 미쓰사카(長坂光堅) 등 가쓰요리 측근에 대한 「간언서」로써 바쳐진 서적이었다고 하고 있다.

도라쓰나는 덴쇼 6년에 사망하였는데, 가스가 소지로는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뒤 덴쇼 13년에 망명지 사도 섬(佐渡島)에서 사망할 때까지 집필을 이어나갔다. 이듬해 덴쇼 14년에는 원본을 도라쓰나의 부하였던 「오바타 시모쓰케노카미」(小幡下野守)가 입수하여 보완하고 책의 이름을 붙였는데 이 「오바타 시모쓰케노카미」라는 인물은 다케다 씨가 멸망한 뒤에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에 출사한 오바타 미쓰모리(小幡光盛) 또는 그 친아들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 오바타 가문에 전래된 원본이 근세에 들어 간행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1]

오바타 가게노리(小幡景憲)가 입수하고 거듭 가필을 더해서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며, 《군칸》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지만 겐나(元和) 7년의 오바타 가게노리가 필사한 사본이 현존하는 군칸의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써 남아 있다. 가게노리는 《군칸》을 교전(教典)으로 하는 고슈류 군학을 창시하였고 막부를 비롯한 여러 다이묘들에게 이를 전수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혼아미 고에쓰(本阿弥光悦) 등 같은 시대의 사람들도 《군칸》을 접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군칸》은 근세에는 무가뿐 아니라 서민들 사이에도 유포되는 한편, 에도 시대부터 합전에 대한 기술의 오류 등이 지적되었다. 히젠 히라도 번(肥前平戸藩)의 번주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의 저서로 겐로쿠(元禄) 9년(1696년)무렵에 성립된 《무공잡기》(武功雑記)[22]에 따르면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介)의 자식들이 학문을 익힌 승려로써 아버지의 사적을 도라쓰나의 저작으로 꾸며서 《고요군칸》이라는 이름을 붙여 창작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의 《조잔기담(常山紀談)》에서도 「《고요군칸》은 허망함이 많다」(《甲陽軍鑑》虚妄多き事)라고 기술하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일본 사학계의 주류가 되어, 실증성이 중시되는 근대 역사학에서 《다이헤이키(太平記)》, 《다이코키(太閤記)》 등의 편찬물과 함께 기초적 사실이나 연대의 오기로 역사연구의 사료로써의 가치가 부정되었고, 가게노리가 도라쓰나의 이름을 빌려서 지은 위작이라고까지 보는 견해도 나오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논문은 1891년(메이지 24년)에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가 발표한 「고요군칸코」(甲陽軍鑑考)(《史学会雑誌》, 14호、史学雑誌)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문서나 기록 자료와의 비교에서 큰 오류가 여럿 보이고 있는 것이 지적되고, 군칸은 고사카 단죠(가스가 도라쓰나)의 저작이 아니라 에도 시대 초기에 오바타 가게노리가 다케다 가문의 옛 신하들의 취재를 토대로 기록한 기록 이야기집이라고 하였다.[23]패전 뒤의 실증적 다케다 씨 연구에서도 고문서나 《고하쿠사이키(高白斎記, 고요 일기甲陽日記)》, 《가쓰야마기(勝山記)》 등의 다른 기록 자료와의 대조에서도 오류가 여럿 보인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고요군칸 속에서 '무사의 도'를 언급한 부분.


한편으로 《일본국어대사전(日本国語大辞典)》 등 국어사전류나 무가고실(武家故実)의 기본적 참고서가 된 《무가명목초(武家名目抄)》에서는 《군감》의 어휘 ・ 어구(語句)가 다수 채용되어 있다. 또한 일본의 윤리 사상사에서는 「무사도(武士道)」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료로써도 알려져서, 센고쿠 시대에 형성된 무사(武士)의 사상을 에도 시대 초기에 집대성한 것으로 무사의 마음가짐을 알기 위해서 빠뜨릴 수 없는 문헌이라고 평가하고, 일본 사학에서의 취급과는 결을 달리 하고 있다.

일본의 국어학자 사카이 겐지(酒井憲二)는 1990년대부터 《군칸》에 관한 국어학적, 문헌학적, 서지학적 검토를 행했고, 《군칸》의 연구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카이는 《군칸》의 여러 가지 판본과 사본들을 문헌학적 ・ 서지학적으로 밝혀서 제각기 계통적으로 정리하고, 텍스트의 저본이 될 만한 사본을 확정지었다. 사카이의 군칸 연구는 《고요군칸 대성 제4권 연구편》(甲陽軍鑑大成 第四巻 研究編, 汲古書院、1995년 1월, ISBN 4-7629-3329-5)에 정리되어 있다. 이어 사카이는 《고요군칸 대성 본문편 상・하》(甲陽軍鑑大成 本文編上・下)를 간행하였다.

사카이의 연구의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24][25]

  • 《군칸》은 본래 전23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군칸》의 원본은 주로 도라쓰나의 구술 ・ 구전을 사루가쿠모노(猿楽者)・오쿠라 히코주로(大倉彦十郎)가 기록한 것으로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도라쓰나 사후에는 조카인 가스가 소지로에 의해 집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케다 집안이 멸망한 뒤, 소지로는 이곳저곳을 떠도는 곤경에 처했고, 원본은 손상을 입었다. 이 손상된 원본을 아마도 아버지 오바타 미쓰모리로부터 입수했을 오바타 가게노리는 그 손상된 원본의 서사에 주력해 겐나 7년(1621년) 무렵에 사본을 만들어 냈다(이 사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가게노리의 서사 태도는 손상되어 필사가 곤란한 부분에서는 「(이 부분은) 끊어져서 보이지 않는다」(切れて見えず)라는 주석을 190여 개 부분에서 붙이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원본에 충실하였으며, 가필이나 윤색 등이 있었더라도 최소한의 부분에 머무를 것으로 판단된다.
  • 《군칸》 본래의 본문은 호흡이 긴 한 줄 형식의 문장이나 유어(類語)를 거듭 사용하는 중층 표현, 신흥어(新興語), 노인어(老人語, 고어), 속어, 가이 ・ 시나노(信濃)의 사투리나 서민들이 사용하던 「게레쓰코토바」(げれつことば) 등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구어적 요소를 농후하게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은 문장을 오바타 가게노리의 세대가 그럴 듯하게 베껴 써 낼 수는 없다. 가게노리의 역할은 충실한 필사자(謹直な写し手), 즉 사본의 제작자이지 통설처럼 《군칸》의 편찬자나 저자는 아니다.
  • 무수한 합전을 신겐과 함께 했던 도라쓰나라면 범할 수 없는 오류가 적지 않다고 하지만, 「알고 있는 대로 써내려갔으며, 연호가 완전히 같지 않고 전후로 뒤바뀌기도 했다」(存じ出だし次第書するにつき、年号、よろづ不同にして、前後みだりに候とも, 권1 말미에서), 「사람의 잡담을 적어 베꼈으니, 정히 서로 다른 점이 많음도 분명하리라」(人の雑談にて書き写し候へば、定めて相違なる事ばかり多きは必定ばれ共, 권5) 등의 스스로 단언한 것처럼 사료로써의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구술 필기라는 사료의 성격상, 연월에 기억의 착오가 있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누구라도 10년, 20년 전에 있었던 일의 날짜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 오류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는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며, 오류가 있다고 한들 그것이 《군칸》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은 아니다.
  • 군칸은, 「가쓰요리 공의 치세에 본받아야 할」(勝頼公御代のたくらべになるべき) 일을 바라고, 신겐의 옛 신하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주군(新君)이 된 다케다 가쓰요리와 그 측근 아토베 가쓰스케 ・ 나가사카 미쓰사카에 대한 진언서로써 집필되었던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카이의 국어학적 관계를 효시로, 일본에서는 히라야마 마사루(平山優)、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구로다 히데오(黒田日出男) 등이 실증적 연구의 입장에서 《군칸》을 재평가하게 된다. 《군칸》을 엄중 평가한 사사모토 쇼지(笹本正治)도 무가고실이나 센고쿠 시대 사람들의 습속 등의 기술에 대해서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26]

또한 근대 이후의 《군칸》의 가치를 결정지은 다나카의 논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검토가 더해졌다. 다나카의 논문은 서지학적 ・ 문헌학적 연구 절차가 충분하지 못하였고, 현대의 학문적 수준으로 보면 설득력 있는 고증 ・ 논증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애초에 이 논문은 다나카가 30세라는 젊은 시절에 쓴 5페이지 분량의 소론(小論)에 지나지 않는다.[24] 다나카가 지적한 오류도 훗날의 연구에서 극복되고 있다. 다나카가 지적한 오류의 한 가지 사례로 「죠칸사이」(長閑斎, ちょうかんさい) 문제가 있다. 이는 덴쇼 3년(1575년) 5월 21일 나가시노 전투 전날자에 보낸 것으로 비정되는, 「죠칸사이」라는 인물이 다케다 가쓰요리 앞으로 보낸 서장(「간다 다카히라 씨 옛 소장 문서」神田孝平氏旧蔵文書라 불린다)에서, 다케다 령국 가운데 어느 한 곳의 성의 수비를 맡고 있었던 「죠칸사이」라는 인물이 가쓰요리에게 히캬쿠(飛脚, 파발꾼)을 파견하였다는 내용이다. 종래 이 「죠칸사이」는 가쓰요리의 측근으로 나가시노 합전에 있어 주전론을 주장했던 나가사카 미쓰사카(長坂光堅, 釣閑斎)로 비정되었고, 1960년에는 다카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寿) 저 《나가시마 전투》(長篠之役)에서 《군칸》의 오류를 보여주는 실례로써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 2009년 히라야마 마사루가 「죠칸사이 고」(長閑斎考, 《戦国史研究》58号에서 군칸의 「죠칸사이」는 스루가(駿河) 구노 성(久能城)의 성주인 이마후쿠 조칸사이(今福長閑斎, 《군칸》에는 浄閑斎로 표기되어 있다)로 비정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27] 다른 군칸 수록 문서도 대부분은 《전국유문 다케다 편》(戦国遺文 武田氏編) 등에 원본이나 양질의 필사가 확인된다. 그 이외의 문서도 몇 가지 검토를 요하는 문장이 포함되어 날짜나 사람의 관위 등에 오류나 개변이 더해져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사료 비판을 거쳐서 활용할 일이지[28][29] 군칸의 사료적 가치가 저하될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2. 1. 사료적 가치 논쟁

메이지 시대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의 영향으로 《고요군칸》의 사료적 가치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23]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는 《고요군칸》에 문서나 기록 자료와의 비교에서 큰 오류가 여럿 보인다고 지적하며, 에도 시대 초기에 오바타 가게노리(小幡景憲)가 다케다 가문의 옛 신하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23]

히젠 히라도 번(肥前平戸藩)의 번주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의 저서 《무공잡기》(武功雑記)에 따르면,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介)의 자식들이 학식이 있는 승려가 되어 아버지의 사적을 도라쓰나의 저작으로 꾸며서 《고요군칸》이라는 이름을 붙여 창작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22]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의 《상산기담》(常山紀談)에서도 《고요군칸》은 허망함이 많다고 기술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사카이 겐지(酒井憲二)는 《군칸》에 관한 국어학적, 문헌학적, 서지학적 검토를 행했고, 《군칸》의 연구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4][25] 사카이 겐지의 연구에 따르면, 《군칸》 본래의 본문은 호흡이 긴 한 줄 형식의 문장이나 유어(類語)를 거듭 사용하는 중층 표현, 신흥어(新興語), 노인어(老人語, 고어), 속어, 가이 ・ 시나노(信濃)의 사투리나 서민들이 사용하던 「게레쓰코토바」(げれつことば) 등 무로마치(室町) 말기의 구어적 요소를 농후하게 남기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장을 오바타 가게노리의 세대가 그럴 듯하게 베껴 낼 수는 없으며 가게노리의 역할은 충실한 필사자(謹直な写し手)이지 통설처럼 《군칸》의 편찬자나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고요군칸》에는 여러 전투에서 신겐과 함께 했던 도라쓰나라면 범할 수 없는 오류가 적지 않다고 하지만, 저자 스스로 "생각나는 대로 적었기 때문에 연호, 모든 것이 다르며, 전후가 뒤섞여 있습니다"(권1 말미), "사람들의 잡담으로 베껴 썼기 때문에, 틀림없이 다른 일투성이인 것은 필연적입니다"(권5) 등과 같이 단언한 것처럼 사료로서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구술 필기라는 사료의 성격상, 연월에 기억의 착오가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24][25]

이러한 사카이의 국어학적 관계를 효시로, 일본에서는 히라야마 마사루(平山優)、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구로타 히데오(黒田日出男) 등이 실증적 연구의 입장에서 《군칸》을 재평가하게 된다. 《군칸》을 엄중 평가한 사사모토 쇼지(笹本正治)도 무가고실이나 센고쿠 시대 사람들의 습속 등의 기술에 대해서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26]

또한, 근대 이후의 《군칸》의 가치를 결정지은 다나카의 논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검토가 더해졌다. 다나카의 논문은 서지학적 ・ 문헌학적 연구 절차가 충분하지 못하였고, 현대의 학문적 수준으로 보면 설득력 있는 고증 ・ 논증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애초에 이 논문은 다나카가 30세라는 젊은 시절에 쓴 5페이지 분량의 소론(小論)에 지나지 않는다.[24]

2. 2. 사카이 겐지의 연구와 재평가

1990년대부터 일본의 국어학자 사카이 겐지(酒井憲二)는 《고요군칸(이하 군칸)》에 대한 국어학적, 문헌학적, 서지학적 검토를 진행하여, 《군칸》 연구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24][25] 사카이는 《군칸》의 다양한 판본과 사본을 비교 분석하여 텍스트의 저본(底本)이 될 만한 사본을 확정하고, 각 판본을 계통적으로 정리했다. 사카이의 연구는 《고요군칸 대성 제4권 연구편》(汲古書院, 1995년 1월, ISBN 4-7629-3329-5)에 집대성되어 있으며, 이후 《고요군칸 대성 본문편 상・하》를 간행하였다.

사카이 겐지의 연구에 따르면, 《군칸》은 본래 전23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고사카 마사노부(도라쓰나)의 구술과 구전을 오쿠라 히코주로(大倉彦十郎)가 기록하여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케다 가쓰요리 시대에 아토베 가쓰스케, 나가사카 미쓰카타 등에게 바치는 진언서(進言書)의 성격을 띠고 있다.[24][25] 《군칸》 본래의 본문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구어체 요소를 많이 담고 있어, 당시의 언어 사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사카이 겐지의 연구 이후, 히라야마 마사루(平山優), 오와다 데쓰오(小和田哲男), 구로다 히데오(黒田日出男) 등 여러 연구자들이 실증적 연구를 통해 《군칸》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군칸》에 기록된 무가고실(武家故実)이나 센고쿠 시대 사람들의 습속 등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한다.[26] 또한, 《군칸》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다나카 요시나리의 논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다나카의 논문은 서지학적, 문헌학적 연구 절차가 충분하지 못하며, 그가 지적한 오류들도 후속 연구를 통해 극복되고 있다.[24] 예를 들어, 다나카가 지적한 '조칸사이'(長閑斎) 문제는 2009년 히라야마 마사루의 연구를 통해 스루가 구노 성(久能城)의 성주 이마후쿠 조칸사이(今福長閑斎)로 비정되었다.[27] 다른 군칸 수록 문서도 대부분은 《전국유문 다케다 씨 편》 등에서 원본이나 양질의 사본을 확인할 수 있다.[28][29]

3. 주요 내용

3. 1. 다케다 신겐과 가쓰요리

신겐 사후, 그의 아들 가쓰요리 시대의 몰락 과정을 다루며, 가쓰요리와 그의 측근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고요군칸》에 따르면, 가쓰요리 치세의 다케다 가문은 아토베 가쓰스케 ・ 나가사카 미쓰사카 등 가쓰요리 측근이 전횡을 휘둘렀다고 한다. 덴쇼 3년의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이들이 합전에 반대하는 후다이 가신들에 맞서 주전론을 주장하여 결국 대패를 불러왔다는 것이다.[30]

그러나 아토베 가쓰스케와 나가사카 미쓰사카는 다케다 가문 멸망 시 가쓰요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고요군칸》의 기술과 달리, 《신쵸코키》, 《고란키》 등 다른 기록 자료에는 그들이 가쓰요리를 따라 자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0]

신겐 사후 그의 죽음을 3년 동안 비밀로 숨겼다는 이야기나, 가쓰요리의 적남인 노부카쓰의 원복 때에 가쓰요리가 은거하였을 가능성 등은 문서상으로도 인정된다.[30] 신겐 치세 후기부터 가쓰요리 치세 시기에는 다케다 령국의 확대에 따라 후다이 가로는 성주 대리로써 령국 각지에 부임하였고, 당주 측근에는 아토베 가쓰스케 등 측근층이 상주하였으며, 그들은 주인장의 봉자(중개)역을 독점적으로 맡고 있었다.[30] 구체적인 일화의 신빙성에 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만, 《고요군칸》에 기록된 신흥 측근층과 후다이 가로층의 대립 구도 등은 다케다 집안의 실태를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30]

3. 2. 무사도와 윤리 사상

4. 현대적 의의

5. 판본 및 연구 자료

고요군칸은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며, 그 종류와 내용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야마다 히로미치(山田弘道)가 교정 및 편집한 『갑양총서 제1편』 및 『갑양총서 제2편』, 고사카 단조(高坂弾正) 등의 『갑양군감』, 지쿠마 서방(지쿠마 학예 문고)에서 출판된 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 등의 『갑양군감』, 후루카와 데쓰시(이와나미 문고)의 『갑양군감 제1』, 요시다 유타카(吉田豊)의 『갑양군감』, 코시하라 테츠로(腰原哲朗)의 『갑양군감』, 벤세이샤(고전 자료 류종)의 『갑양군감』, 도바시 하루시게(矢立出版)의 『갑양군감』 등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이러한 판본들에 대한 연구 자료로는, 가이 시료 간행회(甲斐志料刊行会)의 『갑양군감・곤권, 갑양군감 말서』 및 『갑양군감(본편 20권)』, 진물왕래사(人物往来社)의 『전국사료총서 제3』, 『전국사료총서 제4』, 『전국사료총서 제5』, 가이총서 간행회(甲斐叢書刊行会)의 『가이총서 제4권』, 『가이총서 제5권』, 『가이총서 제9권』 등이 있다. 특히, 사카이 겐지(酒井憲二)의 『갑양군칸 대성』은 본문편, 연구편, 색인편, 영인편 등으로 구성된 방대한 연구 자료로, 갑양군칸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참조

[1]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2]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3] 서적 The Japanese Political Thought of Uchimura Kanzō (1861–1930): Synthesizing Bushidō, Christianity, Nationalism, and Liberalism https://books.google[...] Edwin Mellen Press
[4] 서적 武士道 第一章 武士道という語の登場 https://books.google[...] NTT publishing
[5] 문서 巻二〇までだが、巻九~巻十一が上下2冊で構成されているため。
[6] 문서 品第五九までだが、品第四〇が上下2品に分かれているため。
[7] 문서 酒井憲二『甲陽軍鑑大成 研究編』1995年、18頁
[8] 간행물 倉員正江「北条五代記における関東戦国時代評をめぐって」『人間科学研究』第17号、2020年、109-110頁、注23
[9] 문서 平山優 「春日虎綱」「小幡光盛」(柴辻俊六編 『新編 武田信玄のすべて』新人物往来社 、2008年6月、ISBN 978-4-4040-3514-1)
[10] 문서 『武功雑記』は『国史大辞典』に信憑性の高い書物と評価されている。
[11] 문서 なお、田中は『軍鑑』において記述の多い山本勘助に関しては、臨済僧となった勘助子孫の覚書が底本に含まれているためと推定し、勘助の実態は山県昌景の一兵卒に過ぎないと記している。なお、戦後には1954年刊行の奥野高廣『武田信玄』においてこの考え方をさらに徹底し、勘助は架空の人物であるとしている。山本勘助の実在性については山本勘助を参照。
[12] 문서 本論文では『軍鑑』をめぐる研究史が、黒田の立場から網羅的かつ要所をピックアップしてまとめられている。
[13] 문서 笹本正治『武田氏三代と信濃―信仰と統治の狭間で―』郷土出版社、1988年。
[14] 문서 平山優『検証長篠合戦』( 吉川弘文館、2014年8月)pp.36-38、ISBN 978-4-642-05782-0。黒田(2015)pp.90-91の補注2。
[15] 간행물 黒田日出男「『甲陽軍鑑』の古文書学─『甲陽軍鑑』の史料論(4)─」(『武田氏研究』38号、2008年3月)。黒田(2015)pp.175-219に収録
[16] 간행물 柴辻俊六「「甲陽軍鑑」収録文書の再検討」(『武田氏研究』49号、2013年11月)pp.16-27
[17] 문서 丸島和洋「武田氏の領域支配と取次-奉書式朱印状の奉者をめぐって-」(平山優・丸島編『戦国大名武田氏の権力と支配』岩田書院、2008年)
[18] 웹사이트 歴史秘話ヒストリア 2018/08/29(水)22:25 の放送内容 ページ 1 {{!}} TVでた蔵 https://datazoo.jp/t[...] 株式会社ワイヤーアクション 2023-05-03
[19] 문서 권20까지이지만 권9부터 11까지가 상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20] 문서 품제59까지이지만 품제4가 상하 2품으로 나뉘어 있다.
[21] 문서 平山優 「春日虎綱」「小幡光盛」(柴辻俊六編 《新編 武田信玄のすべて》新人物往来社 、2008年6月、ISBN 978-4-4040-3514-1)
[22] 문서 《무공잡기》(武功雑記)는 《국사대사전》(国史大辞典)에서 신빙성 높은 서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3] 문서 한편 다나카는 《군칸》에 기술된 부분이 많은 야마모토 간스케라는 인물에 관해서도 임제종 승려였던 간스케의 자손들의 각서(覚書)가 군칸의 저본으로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간스케의 실태는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의 일개 병졸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패전 이후에는 1954년에 간행된 오쿠노 다카히로(奥野高廣)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에서도 이러한 생각에 더욱 철저하여, 간스케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야마모토 간스케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야마모토 간스케]] 항목 참조.
[24] 간행물 黒田日出男 「《甲陽軍鑑》をめぐる研究史 ─《甲陽軍鑑》の史料論(1)─」(《立正大学 文学部論叢》第124号、2006年9月、pp.5-74(PDF、後に同《甲陽軍鑑》の史料論―武田信玄の国家構想》(校倉書房、2015年2月28日に収録)에서.
[25] 문서 해당 구로타의 논문은 《군칸》을 둘러싼 연구사가, 구로타의 입장에서 망라된 요소를 픽업하여 소개하고 있다.
[26] 문서 笹本正治《武田氏三代と信濃―信仰と統治の狭間で―》郷土出版社、1988年。
[27] 문서 平山優《検証長篠合戦》( 吉川弘文館、2014年8月)pp.36-38、ISBN 978-4-642-05782-0。黒田(2015)pp.90-91の補注2。
[28] 간행물 黒田日出男「《甲陽軍鑑》の古文書学─《甲陽軍鑑》の史料論(4)─」(《武田氏研究》38号、2008年3月)。黒田(2015)pp.175-219에 수록.
[29] 간행물 柴辻俊六「「甲陽軍鑑」収録文書の再検討」(《武田氏研究》49号、2013年11月)pp.16-27
[30] 문서 丸島和洋「武田氏の領域支配と取次-奉書式朱印状の奉者をめぐって-」(平山優・丸島編《戦国大名武田氏の権力と支配》岩田書院、200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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