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조지 다카노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류조지 다카노부는 1529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한 무장으로, 류조지 씨 가문의 영토를 확장하여 히젠 국을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쇼니 씨를 몰아내고 히젠을 장악했으며, 지쿠젠, 부젠 등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시마즈 군에게 패배하여 사망하면서 류조지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냉혹한 성격으로 "히젠의 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사후 류조지 가문의 실권은 가신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넘어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라나카 류조지씨 - 류조지 마사이에
류조지 마사이에(1556년 ~ 1607년)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류조지 다카노부의 아들이며, 가독을 이었으나 실권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넘어가고, 히젠 7군을 영지로 받았으나 불만을 품었으며, 병약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양자로 삼아 류조지 본가가 단절되었다. - 무라나카 류조지씨 - 류조지 다카후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인 류조지 다카후사는 어린 나이에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나베시마 씨에게 실권이 넘어가 불우한 삶을 살다 아내를 살해하고 자결을 시도하여 22세에 생을 마감, 류조지 가문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 미즈가에 류조지씨 - 류조지 마사이에
류조지 마사이에(1556년 ~ 1607년)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류조지 다카노부의 아들이며, 가독을 이었으나 실권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넘어가고, 히젠 7군을 영지로 받았으나 불만을 품었으며, 병약하여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양자로 삼아 류조지 본가가 단절되었다. - 미즈가에 류조지씨 - 류조지 이에카네
류조지 이에카네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센고쿠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류조지 씨 일족의 분가를 일으켜 본가를 보좌하며 쇼니 가문의 중신으로 활약했고, 다테나와테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주군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으며, 말년에는 가마치 가문의 도움으로 류조지 가문 재흥에 성공하여 손자 류조지 다카노부 시대에 가문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 1529년 출생 - 야마가타 마사카게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센고쿠 시대 다케다 신겐의 측근이자 다케다 사천왕 중 한 명으로, 붉은 갑옷을 입은 정예 부대 아카조나에를 이끌고 용맹을 떨쳤으나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했다. - 1529년 출생 - 우키타 나오이에
우키타 나오에는 센고쿠 시대 비젠국의 호족으로, 뛰어난 지략과 모략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주군을 배신하며 강대 세력 사이에서 이익을 추구한 인물로, 에도 시대에는 악인으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그의 행적을 다룬 창작 작품이 있다.
류조지 다카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류조지 다카노부 (龍造寺隆信) |
이명 | 조호시마루 (長法師丸, 어린 시절 이름) 엔게쓰 (円月, 법명) 류조지 다네노부 (龍造寺胤信) 류조지 다카타네 (隆胤) 류조지 다카노부 (隆信) |
별칭 | 야마시로노카미 (山城守) 주나곤 (中納言) 주쇼 (中将, 통칭) 엔게쓰보 (円月坊, 호) 히젠의 곰 (肥前の熊, 渾名) |
사망일 | 1584년 5월 4일 |
사망 장소 | 오키타나와테 전투 |
묘소 | 사가현 사가시의 고덴지 |
가문 정보 | |
씨족 | 류조지 씨 |
아버지 | 류조지 지카이에 |
어머니 | 게이긴니 (류조지 다네카즈의 딸) |
형제 | 야에 무네테루 (八戸宗暘)의 아내 류조지 노부치카 류조지 나가노부 |
의형제 | 나베시마 나오시게 |
배우자 | 류조지 이에카도의 딸 |
자녀 | 류조지 마사이에 류조지 류헤이 에가미 이에타네 고토 이에노부 다마쓰루히메 (玉鶴姫) 오야스 (於安) 구라마치 노부토시 (倉町信俊)의 아내 |
관직 및 직위 | |
소속 | 류조지 씨 |
주군 | 쇼니 씨 류조지 이에카네 다네미쓰 오우치 요시타카 요시나가 오토모 요시시게 모리 모토나리 오토모 요시시게 독립 다이묘 |
주요 성 | 스코 성 |
군사 정보 | |
주요 전투 | 사가 성 공방전 (1554년) 이마야마 전투 (1570년) 스코 성 공방전 (1574년) 히젠 전투 (1578년) 오키타나와테 전투 (1584년) |
2. 생애
1545년(덴분 14년), 쇼니 씨(少弐氏)의 중신 바바 요리치카(馬場頼周)가 류조지 이에즈미(龍造寺家純)와 류조지 지카이에(龍造寺親家) 부자를 주살하자,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는 증조부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와 함께 지쿠고로 피신했다. 1546년(덴분 15년) 이에카네는 가마치 아키모리(蒲池鑑盛)의 원조를 받아 거병, 바바 요리치카를 제거하고 류조지 가문을 재건했지만 곧 병사했다. 이에카네는 죽기 전, 다카노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환속하여 가문을 이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12]
1547년(덴분 16년), 다카노부는 환속하여 다네노부(胤信) 라 칭하고 미즈가에 류조지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13] 얼마 후, 다카노부는 쇼니 가문을 공격하여 세후쿠지 성(勢福寺城)에서 쇼니 후유히사(少弐冬尚)를 몰아냈다. 1548년(덴분 17년), 본가 당주인 류조지 다네나가(龍造寺胤栄)가 사망하자, 다카노부는 그의 미망인과 혼인하여 본가(무라나카 류조지)의 가독 또한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가독 승계에 불만을 품은 가신들도 있어, 다카노부는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와 손을 잡고 1550년(덴분 19년) 그의 지원을 받아 가신들의 불만을 억눌렀다. 이때 요시타카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아 다카타네(隆胤)로 개명했다가, 다시 다카노부(隆信) 로 개명했다.[14]
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의 배신으로 사망하자, 다카노부는 히젠에서 쫓겨나 지쿠고의 야나가와 성(柳川城)으로 피신했다. 1553년 가마치 가문의 원조를 받아 히젠 탈환에 성공한 후, 1559년에는 한때 주군이었던 쇼니 가문을 공격하여 쇼니 후유히사를 자결하게 하고 쇼니 가문을 멸망시켰다. 이후 에가미 씨(江上氏), 이누즈카 씨(犬塚氏) 등 히젠의 여러 호족들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1562년까지 히가시히젠(東肥前)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563년 아리마 씨(有馬氏)와 오무라 씨(大村氏) 연합군이 히가시히젠을 침공하자, 지바 씨(千葉氏)와 동맹을 맺어 이를 격퇴했다. 1569년에는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히젠을 침공했으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부젠 침공으로 오토모 군은 퇴각했다. 1570년 오토모 소린은 동생 오토모 지카사다(大友親貞)를 총대장으로 하는 군대를 다시 히젠으로 보냈으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기습으로 이를 격퇴했다. (이마야마 전투) 이후 다카노부는 오토모 가문과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으나, 미미가와 전투 이전까지는 오토모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1573년부터 1578년까지 다카노부는 히젠의 대부분 지역을 평정하고 통일하였다. 1578년 적장자 류조지 마사이에(龍造寺政家)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정치와 군사의 실권은 여전히 다카노부가 쥐고 있었다.
1578년 오토모 소린이 미미가와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에게 대패하자, 다카노부는 오토모 가문의 혼란을 틈타 지쿠젠, 지쿠고, 히고, 부젠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가마치 시게나미(蒲池鎮並)를 모살하고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統家)의 아들을 죽이는 등 냉혹한 행위로 가신들의 신망을 잃었다.
1581년 시마즈 씨(島津氏)가 북상하자, 1583년 다카노부는 류조지 마사이에(龍造寺政家)를 히고에 파견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배신하자, 다카노부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반도로 출진했다. 그러나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의 군대에 대패하고, 다카노부 자신도 가와카미 다다카타(川上忠堅)에게 죽임을 당했다.[23] 이 전투는 류조지 가문의 몰락을 가져왔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1529년(교로쿠 2년) 음력 2월 15일, 류조지 지카이에(미즈가에 성주)의 장남으로 히젠국 미즈가에 성에서 태어났다.[11] 어린 시절에는 호린인(보림원)이라는 사찰에서 양육되었고, 1536년(덴분 5년) 7살에 출가해 법명을 엔게쓰(円月)라 했다.[11]1545년(덴분 14년), 할아버지 류조지 이에스미와 아버지 지카이에가 주군인 쇼니씨(少弐氏)에 대한 모반 혐의로 바바 요리치카에게 주살되었다. 다카노부는 증조부 이에카네의 도움으로 지쿠고로 탈출하였다. 1546년(덴분 15년) 이에카네는 가마치 아키모리의 원조를 받아 거병하여 바바 요리치카를 치고 류조지 씨를 재흥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령과 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이에카네는 다카노부의 기량을 간파하여 환속해 미즈가에 류조지가를 잇게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12]
1547년(덴분 16년), 다카노부는 환속해 다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쓰고 미즈가에 류조지 가문의 상속자가 되었다.[13] 그리고 본가의 명을 따라, 주군인 쇼니 후유히사(少弐冬尚)를 공격하여 세후쿠지 성에서 추방했다. 1548년(덴분 17년) 본가의 당주 류조지 다네미쓰가 죽자, 다카노부는 다네미쓰의 아내(류조지 이에카도의 딸로 다카노부의 당고모)와 혼인하여 본가(무라나카 류조지)를 상속했다.
그러나 다카노부의 가독 찬탈에 불만을 품은 아야베 시게유키 등의 가신들도 적지 않아, 다카노부는 이를 억제하기 위해 당시 주고쿠 지방(中國地方)의 센고쿠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와 손을 잡았다. 1550년(덴분 19년) 오우치 요시타카에게서 야마시로노카미(山城守)를 수여받았고, 요시타카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7월 1일에 다카타네(隆胤)로 개명했다가 7월 19일에 다카노부(隆信)로 개명했다.[14] 다카노부는 오우치 씨의 힘을 배경으로 가신들의 불만을 억눌렀다.
2. 2. 히젠 통일
덴분 20년(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의 모반으로 사망하자, 후원자를 잃은 다카노부는 히젠에서 쫓겨나 지쿠고 야나가와 성으로 피신했다. 덴분 22년(1553년) 가마치 가문의 지원을 받아 히젠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세력 확대에 힘쓴 다카노부는 에이로쿠 2년(1559년)에는 한때 주군 가문이었던 쇼니 씨를 공격해 쇼니 후유히사를 할복시키고 쇼니 씨를 다이묘 가문으로써 완전히 멸했다.그 후 에가미 씨 등을 제압하고 에이로쿠 5년(1562년)까지 동 히젠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러한 급속한 세력 확대는 근접한 아리마 씨나 오무라 씨 등의 불안을 사 에이로쿠 6년(1563년)에 양 가문은 연합하여 동 히젠에 침공했지만, 다카노부는 지바 씨와 동맹을 맺어 이 연합군을 물리쳤다. 이로 인해 남 히젠에도 위세가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은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다카노부를 경계하여, 에이로쿠 12년(1569년)에는 소린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히젠을 침공했지만, 모리 모토나리가 부젠에 침공해 왔기 때문에 소린은 히젠에서 철퇴했다. 이후 소린은 겐키 원년(1570년)에 남동생 오토모 지카사다를 총대장으로 하는 6만 대군을 히젠으로 보냈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의한 기습책으로 격퇴하여(이마야마 전투) 오토모 씨와 유리한 강화를 맺는 데 성공했다.
다카노부는 이마야마에서 오토모 가문과 싸워 이겼지만, 그 후에도 오토모 씨에게 종속하고 있었지만 결국 영토를 인정받아 미미가와 전투 전까지 영토를 확실히 인정받아 힘을 기르고 있었다. 덴쇼 원년(1573년) 서 히젠을 평정, 덴쇼 3년(1575년)에는 북 히젠을 평정한다. 덴쇼 4년(1576년)에는 남 히젠에 침공해, 덴쇼 5년(1577년)까지 오무라 스미타다를 굴복시키고, 덴쇼 6년(1578년)에는 아리마 시게즈미를 굴복시켜 히젠 통일을 완성했다. 이때 적장자 류조지 마사이에에게 가독을 양보하고 은거하였지만, 그러나 정치·군사적 실권은 여전히 다카노부가 잡고 있었다.
2. 3. 세력 확대와 몰락
1578년 오토모 소린이 미미가와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대패하자, 다카노부는 오토모 가문의 혼란을 틈타 지쿠젠, 지쿠고, 히고, 부젠 등을 세력하에 두었다.[19] 그러나 가마치 시게나미를 모살하고 아카호시 무네이에의 아들을 죽이는 등 냉혹한 행위로 가신들의 신뢰를 잃었다.[20]1581년 시마즈씨가 북상하자, 다카노부는 1583년 마사이에를 히고에 침공시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1] 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가 배반하자, 다카노부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반도로 향했다.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대에 대패하여, 다카노부는 가와카미 다다카타에게 죽임을 당했다.[23] 이 전투는 류조지 가문의 몰락을 결정지었다.
3. 평가와 논란
선교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히젠의 다이묘는 시저를 닮은 것 같다고 전해진다. 젊은 시절부터 히젠에서 여러 번 쫓겨난 경험 때문에 모든 것에 의심을 품는 냉혹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소 가신들에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가마를 메는 것이 짜증 난 측근들이 가마를 버리고 도망쳐 다카노부가 늦게 도망쳐 죽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다카노부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냉혹하고 비정하며 교활했기 때문에 히젠의 호족에 불과했던 류조지 가문이 다카노부 대에 큐슈 3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26]
지쿠고의 가마치 아키모리는 류조지씨에게 다카노부의 아버지 시절부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아들 가마치 시게나미는 다카노부의 딸과 혼인하여 지쿠고 침공에도 협력했다. 그러나 다카노부는 규슈 정벌을 위해 구실을 만들어 1581년에 시게나미를 히젠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남은 야나가와의 가마치 씨 일족도 몰살했다 (야나가와 전투). 이 사건은 류조지 사천왕 중 한 명인 햐쿠타케 도모카네와 같은 심복의 충성심을 크게 약화시켰다. 햐쿠타케 도모카네는 야나가와 성 출진 소식을 듣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다 끝내 출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카노부의 첨병이었던 다지리 아키타네도 후에 다카노부를 배반하였다. 이 가마치 시게나미 모살과 일족 살육은, 구로키 이에나가, 다지리 아키타네 등 지쿠고의 국인과 연잇는 배반이나 잇키를 불러, 결과적으로 다카노부는 지쿠고 경영을 질질 끌게 되어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24]
젊었을 때나 히젠 통일까지는 영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은거한 뒤엔 주색에 빠져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정무를 맡기고 횡포를 부리는 등 행실이 나빠졌다고 한다. 또한 비만으로 말을 탈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이견이 있다). 이 때문에 오키타나와테에서도 도주할 때에 가마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지며, 그 때문에 적에게 발각당했다고 여겨진다. 오키타나와테 전투의 패배 요인은 다카노부가 무모한 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군졸들이 자포자기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다카노부는 스루가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공통점이 많다. 「한 번은 불가에 입문했지만 환속하고 상속하였다」, 「비만 체구로 말을 타지 못하고, 전장에서는 가마를 타고 있었다」, 「대군을 인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병력에 참패해 전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마즈 군이 획득한 다카노부의 수급은 후에 류조지가에 반환하였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반환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시마즈 측에 돌아온 목은 다카노부에 인연이 있던 아카호시 친가의 미망인에게 인도해지고 놀림감으로 되었다고도 하고, 시마즈 이에히사에 의해 매장해졌다고도 하며, 시마바라반도의 강에 흘러갔다고도 한다.
3. 1. 긍정적 평가
다카노부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류조지 가문을 규슈 3강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26] 히젠 통일을 넘어 주변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류조지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다카노부의 군사적 재능을 카이사르 이상이라고 평가했다.[27] 다른 기록에는 히젠의 다이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닮은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다카노부가 남긴 "분별도 오래 하면 썩는다"라는 말은, 숙고도 지나치면 오히려 시기를 놓치거나 좋지 않은 결과가 될 수 있으므로 신속한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다카노부는 이 생각을 실천하여 류조지 가문의 판도를 크게 넓혔다.
3. 2. 부정적 평가
류조지 다카노부는 모든 것에 의심을 품는 냉혹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26] 평소 가신에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다카노부의 가마를 메는 것이 짜증이 난 측근들은 가마를 던지고 도망쳤고, 결국 다카노부는 도주가 늦어져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가마치 시게나미 모살 사건은 다카노부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카노부는 자신의 사위이자 지쿠고 지역의 유력 가신이었던 시게나미를 연회에 초대하여 살해하고, 가마치 일족을 몰살시켰다.[24] 이 사건은 햐쿠타케 도모카네와 같은 심복들의 충성심을 약화시켰고, 구로키 이에나가, 다지리 아키타네 등 지쿠고 지역 국인들의 배반과 잇키를 불러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다카노부는 비만으로 인해 말을 타지 못하고 가마를 이용해야 했다.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가마를 타고 도주하다가 적에게 발각되어 죽었다는 일화는 그의 지나친 비만이 초래한 부정적인 결과로 회자된다.
3. 3. 종합적 평가
류조지 다카노부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냉혹한 정치적 판단으로 류조지 가문을 크게 성장시켰지만, 지나치게 냉혹하고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결국 몰락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6]- 히젠의 곰: 젊은 시절부터 히젠에서 여러 번 쫓겨난 경험 때문에 의심이 많고 냉혹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히젠의 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6]
- 냉혹함과 교활함: 이러한 성격은 히젠의 일개 영주였던 류조지 가문을 규슈 삼강의 반열에 올려놓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26]
- 가신들의 배신: 평소 가신들에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가마를 메던 측근들이 가마를 버리고 도망쳤고, 결국 다카노부는 늦게 도망치다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 가마치 시게나미 모살: 지쿠고의 유력 가문인 가마치 시게나미를 속임수로 살해하고 일족을 몰살한 사건은 구로키 이에나가, 다지리 아키타네 등 지쿠고 국인들의 잇따른 배반과 잇키를 불러일으켜 결국 다카노부의 지쿠고 경영을 어렵게 만들고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말년의 행적: 젊은 시절에는 영명한 인물이었으나, 은거 후에는 주색에 빠져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정무를 맡기고 횡포를 부리는 등 행실이 나빠졌다고 한다.
- 비만 체질: 비만 체질 때문에 말을 타지 못하고 가마를 이용했으며,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도주가 늦어진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공통점: 스루가국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비슷한 점이 많다. 출가했다가 환속하여 가독을 이은 점, 비만 체질로 말을 타지 못하고 가마를 이용한 점, 대군을 이끌었음에도 소수의 적에게 패배하여 전사한 점 등이 유사하다.
- 카이사르와의 비교: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다카노부의 군사적 준비를 카이사르 이상이라고 평가했지만, 카이사르가 적대 세력에게 관대했던 것과는 달리 다카노부는 냉혹하고 잔인한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27]
- "분별도 오래 하면 썩는다": 다카노부가 남긴 말로, 지나치게 신중하면 오히려 시기를 놓치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때로는 신속한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류조지 가문의 급격한 성장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의심스러운 인물을 잇달아 처단하는 등 인망을 잃는 행위를 초래하여 다카노부의 인생을 좌우하는 결과를 낳았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류조지 지카이에 | 1504년 ~ 1545년 |
어머니 | 게이긴니 | 1509년 ~ 1600년, 류조지 다네카즈의 딸 |
정실 | 류조지 이에카도의 딸 | 류조지 다네미쓰의 아내였다가 다카노부에게 재가 |
장남 | 류조지 마사이에 | 1556년 ~ 1607년 |
삼남 | 에가미 이에타네 | ? ~ 1593년 |
아들 | 고토 이에노부 | 1563년 ~ 1622년, 생모 불명 |
아들 | 류조지 다카히라(龍造寺隆平) | 생모 불명 |
딸 | 다마쓰루히메 | 가마치 시게나미의 아내, 생모 불명 |
양자 | 류조지 이에타다(龍造寺家均) | 고토 다카아키의 아들 하루아키(晴明) |
양녀 | 오야스(於安) | 야스코히메(安子姫), 히데노마에(秀の前), 묘안니(妙安尼)라고도 함. 류조지 다네미쓰와 류조지 이에카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오다 시게미쓰의 아내, 후에 하타 지카시의 후처 |
5. 가신
- 참모
- 나베시마 나오시게(후에 노부자네→노부마사→노부아리→나오시게 순으로 개명):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류조지 다카노부의 참모이자 류조지 가문 최고의 명장이었다. 후에 다카노부의 아들 류조지 마사이에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 류조지 가문을 대신하여 히젠 국을 다스렸다.[1]
- 이시이 당
참조
[1]
문서
Papinot, Jacques Edmond Joseph
http://www.unterstei[...]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1906
[2]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龍造寺隆信」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5
[3]
웹사이트
Ryūzōji Takanobu
https://www.town.shi[...]
Shiraishi town official
2021-10-31
[4]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5]
문서
Ryūzōji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005
[6]
웹사이트
Nabeshima Naoshige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25
[7]
문서
2006
[8]
문서
2006
[9]
문서
北肥戦誌』の記述
[10]
문서
肥陽軍記』の記述
[11]
문서
1926
[12]
문서
1967
[13]
문서
2006
[14]
문서
系図纂要』
[15]
문서
龍造寺隆信公と網漁業(立切網・はじさし網)
http://www.saga-otak[...]
[16]
문서
2006
[17]
서적
水江臣記
文献出版
[18]
간행물
龍造寺氏の戦国大名化と大友氏肥前支配の消長
[19]
서적
島津義弘の軍功記
島津顕彰会
[20]
서적
肥後相良一族
新人物往来社
[21]
문서
北肥戦誌』
[22]
문서
大日本古記録 上井覚兼日記 上
岩波書店
[23]
문서
2006
[24]
문서
龍造寺隆信の母―慶誾尼―
河出書房新社
[25]
문서
肥前国における戦国期の印章使用
岩田書院
[26]
문서
中世の九州
教育社
[27]
문서
完訳 フロイス日本史 10
中公文庫
[28]
문서
龍造寺隆信公と網漁業(立切網・はじさし網)
http://www.saga-otak[...]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