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하 (18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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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재하는 1883년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 임학과를 졸업하고, 이왕직 촉탁으로 근무했으며, 봉천,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 부영사를 역임했다. 이후 군수와 도 참여관을 지내며 친일 행위를 했다. 1938년 고등관 2등에 올랐고, 선만척식주식회사 등에서 감사로 활동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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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하 (188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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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양재하 |
한자 표기 | 楊在河 |
출생일 | 1883년 6월 20일 |
사망일 | 1946년 11월 21일 |
국적 | 조선(1883년~1897년) 대한제국(1897년~1910년) 일본 제국(1910년~1945년) |
학력 | 부산 개성학교 초등과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임학과 |
직업 | 관료, 기업가 |
부모 | 양중계(楊重癸) |
자녀 | 5남 |
장남 | 양일갑(楊一甲) |
기타 자녀 | 양경갑 |
훈장 | |
훈6등 서보장 | 일본제국, 1934년 |
종군기장 | 일본제국, 1934년 |
만주제국황제방문기념장 | 만주국, 1935년 |
훈5등 서보장 | 일본제국, 1938년 |
훈6등 경운장 | 만주국, 1941년 |
2. 생애
양재하는 1883년(고종 20년)에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임학과를 졸업했다. 1921년부터 일본 제국의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3·1 운동 이후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임명된 첫 사례였다. 기업인, 외교관, 관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슬하에 5남을 두었으며, 장남은 양일갑(楊一甲)이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3년(고종 20년) 6월 20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이며, 아버지는 양중계(楊重癸)이다.1899년 부산 개성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1904년 10월 시종원 분시어(侍從院分侍御)에 임명되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 태극학회에서,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흥학회에서 활동했으며, 1913년 도쿄제국대학 임학과를 졸업했다.
2. 2. 관료 및 기업인 활동
1904년 10월 시종원 분시어(侍從院分侍御)에 임명되었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 임학과를 졸업한 후, 이왕직의 촉탁으로 위촉되었고, 계림농림주식회사와 주식회사 대동사 지배인을 지냈다.1921년 봉천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부영사로 임명되면서 고위 외교관이자 관료로 근무했다. 양재하와 김우영이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 된 것은 3·1 운동 이후 펼쳐진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첫 사례였기 때문에 크게 선전되었다.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일본 외무성 소속의 조선인 부영사는 양재하를 포함해 총 6명이 배출되었다.
이후 한국인 교포가 많은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주재 부영사로 발령받았다. 이는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인사였고, 하와이를 기지로 한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도 있었기에 현지 교포들은 "조선사람으로서 일본영사관에 부영사로 와있는 것은 우리의 수치"라며 축출 운동을 벌였다. 양재하의 운전 기사가 시비에 휘말려 상해를 입은 일도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는 군수와 도 참여관을 지냈다. 충북 참여관으로 재임 중이던 1937년과 1938년에 《매일신보》에 시국 관련 글을 기고하는 등 시정연설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일본의 식민통치로 조선인이 일등국민이 되었다고 선전하거나, 중일 전쟁 발발로 어수선한 시국 속에 조선인도 일본인에 뒤지지 않도록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38년, 처음 부영사로 임명되어 관직에 들어선 지 17년 만에 고등관 2등으로 고속 승진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과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여러 차례 받았다. 1936년 일본이 추진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와 관련된 기업인 선만척식주식회사의 창립준비위원을 맡았고, 이후 이 회사와 만선척식주식회사의 감사를 역임하며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2. 3. 친일 행적
양재하는 1921년 봉천 주재 일본 총영사관의 부영사로 임명되면서 고위 외교관 및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양재하와 김우영이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 된 것은 3·1 운동 이후 펼쳐진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첫 사례였기 때문에 크게 선전되었다. 광복 시점까지 일본 외무성 소속의 조선인 부영사는 양재하를 포함해 총 6명이 배출되었다.다음 임지는 한국인 교포가 많은 미국 하와이주의 호놀룰루 주재 부영사였다. 이는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인사였고, 하와이를 기지로 한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이라 하여, 현지 교포들이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 영사관에 부영사로 와 있는 것은 우리의 수치"라며 축출 운동을 벌였다. 양재하의 운전기사가 시비에 휘말려 상해를 입은 일도 있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군수와 도 참여관을 지냈다. 충북 참여관으로 재임 중이던 1937년과 1938년에 《매일신보》에 시국 관련 글을 기고하는 등 시정연설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로 조선인이 일등국민이 되었다고 선전하거나, 중일 전쟁 발발로 어수선한 시국 속에 조선인도 일본인에 뒤지지 않도록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양재하는 처음 부영사로 임명된 지 17년 만인 1938년에 고등관 2등에 오르면서 고속 승진을 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과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여러 차례 수여받았다. 1936년에 일본이 추진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와 관련된 기업인 선만척식주식회사의 창립준비위원을 맡았고, 이후 이 회사와 만선척식주식회사의 감사를 역임하며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3. 약력
연도 | 내용 |
---|---|
1913년 |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임학과 졸업, 이왕직 산림사무 촉탁 |
1921년 | 봉천 주재 일본총영사관 부영사 |
1925년 |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관 부영사 |
1929년 | 경상남도 양산군 군수 |
1930년 | 조선총독부 사무관 (고등관 5등) |
1936년 | 선만척식주식회사 창립준비위원, 충청북도 참여관 |
1938년 | 고등관 2등, 선만척식주식회사·만선척식주식회사 감사 |
1939년 | 종4위 서위 |
1941년 | 조선인광주식회사 감사 |
4. 훈포장 서훈 내역
5. 사후
연도 | 내용 |
---|---|
2002년 |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2개 부문에 수록 |
2007년 |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관료 부문에 수록 |
2008년 |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해외 부문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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