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네덜란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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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해상 및 무역 분쟁을 통칭한다. 종교 개혁과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두 나라는 식민지 쟁탈전과 상업적 경쟁을 벌였고, 네 차례의 주요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1차 전쟁은 잉글랜드의 항해법 제정으로 시작되었고, 2차, 3차 전쟁은 프랑스와의 연합 및 동맹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4차 전쟁은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한 네덜란드에 대한 영국의 공격으로 발발했다. 이 전쟁들은 네덜란드의 쇠퇴와 영국의 해상 강국으로의 부상을 가져왔으며, 세계 무역과 식민 지배 구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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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네덜란드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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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 영국-네덜란드 전쟁 |
날짜 | 1652–1654: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665–1667: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672–1674: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780–1784: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
장소 | 북해, 영국해협, 노르웨이, 이탈리아, 네덜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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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네덜란드어 명칭 | Engels-Nederlandse Oorlogen Engelse Zeeoorlogen |
영어 명칭 | Anglo-Dutch Wars |
2. 배경
16세기 유럽의 종교 분쟁, 즉 신교 개혁 시기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국가들 간의 갈등에 모두 참여했다. 이와 동시에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양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신대륙에서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을 대체하며 주요 유럽 상인으로 부상했고, 특히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는 플류트 범선의 발달로 가능해진 네덜란드 상선의 성장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럽 최대의 상선 함대를 보유하며 유럽 무역과 장거리 무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1]
청교도 혁명 전쟁으로 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 지위가 약화되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잉글랜드의 무역과 어업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는 네덜란드 선박을 배제하려는 목적이었고, 1652년부터 1654년까지 잉글랜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잦은 분쟁을 야기했다.[1] 잉글랜드 함대는 동인도 제도 등에서 아시아의 특산물을 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 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했다.[1]
2. 1. 네덜란드 공화국
1600년대 초, 네덜란드는 가톨릭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80년 전쟁을 계속하면서 장거리 해상 탐험을 시작했다. 주식회사의 주식 거래에 대한 네덜란드의 혁신은 네덜란드 연합주와 런던에서 판매된 주식을 통해 탐험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북아메리카, 인도 및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또한 사략선 운용에서도 계속 성공을 거두었는데, 1628년 피트 하인 제독은 스페인의 대규모 보물 함대를 성공적으로 나포한 유일한 지휘관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많은 장거리 항해를 통해, 그들의 사회는 이후 동인도 회사에 의해 복제된 관료 계급과 제도적 지식을 구축했다.[1]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을 대체하는 주요 유럽 상인이 되었다. 특히, 동인도에서 포르투갈의 무역소 대부분을 인수하여 네덜란드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향신료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이것은 플류트 범선 형식의 저비용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네덜란드 상선의 엄청난 성장과 동시에 일어났다. 곧 네덜란드인들은 다른 모든 나라들 보다 더 많은 상선을 보유한 유럽 최대의 상선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럽(특히 발트해) 무역과 장거리 무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1]

1648년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 뮌스터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권력 분열로 인해, 육군과 해군은 스타트허우더의 권력의 주요 기반이었지만, 할당된 예산은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평화가 도래하자 의회는 대부분의 네덜란드 군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주요 네덜란드 도시와 새로운 스타트허우더, 오라녜 공 빌럼 2세 사이의 충돌로 이어졌고, 공화국은 내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650년 스타트허우더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정치적 긴장감을 더했다.[1]
2. 2. 잉글랜드
합스부르크 왕조와 개신교 국가들 간의 종교 전쟁 동안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모두 이 갈등에 외교적으로 관여했다. 동시에 양국은 장거리 탐사 항해에 착수했다. 대항해시대에 네덜란드와 영국은 중상주의와 수 세기간 어업, 섬유, 발트해 무역으로 교류하며 신세계에서 이익을 추구했다.청교도 혁명 전쟁으로 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 지위가 상실되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무역과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 선박을 배제하려는 목적이었다. 1652년부터 1654년까지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잦은 분쟁이 벌어졌다.[1] 잉글랜드 함대는 동인도 제도 등에서 아시아의 특산물을 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 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했다.[1]
당시 네덜란드의 조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대형 함선을 보유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했다. 소형함 중심의 네덜란드 함대는 대형함 중심의 스페인 함대에 항상 승리했고, 항로 보호를 위해 다수의 소형함을 가지는 것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대형 군함 건조를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해안은 수심이 얕아 대형함을 운용하기 어려웠다.
반면 잉글랜드는 장비를 잘 갖춘 대형 군함을 투입하여, 단종진 전술을 펼치는 네덜란드 해군과 충돌했다. 요한 드 위트 등 일부 정치인과 해군 장교들은 대형함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대응은 늦었다. 1652년에서 1653년까지 네덜란드의 마르턴 트롬프 제독은 로버트 블레이크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에 분전했지만 장비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잉글랜드는 굿윈샌즈 해전, 플리머스 해전, 켄티쉬 노크 해전에서 승리했다. 네덜란드는 1652년 12월 던지네스 해전에서 대승했지만, 포틀랜드 해전에서 패했다. 조지 뭉크는 갇바드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에 승리했다. 스헤베닝언 해전에서는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고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스코틀랜드 북쪽을 크게 우회하여 귀국해야 했다.
잉글랜드 해군은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봉쇄했고, 무역 입국인 네덜란드는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큰 손해를 입지 않았다. 호국경 크롬웰은 이상적인 개신교 국가인 영란의 대등한 합방론을 주장했지만, 1654년 4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는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가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가 되었다.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사략선들을 임명하여 스페인 제국을 공격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5년 논수치 조약을 체결하여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
2. 2. 1. 스튜어트 왕조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가와의 80년 전쟁을 계속하면서 장거리 탐사를 시작했다. 주식회사의 주식 거래를 통해 네덜란드는 탐사 자금을 지원했고, 북미, 인도,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8년 피트 하인 제독은 스페인의 보물 함대를 나포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경험은 동인도 회사에 영향을 주었다.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을 대체하는 주요 유럽 상인이 되었고, 향신료 무역을 장악했다. 플류트 범선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유럽 최대의 상선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유럽 무역과 장거리 무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648년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 뮌스터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권력 분열로 인해 스타트허우더가 육군과 해군의 주요 기반이었지만, 예산은 네덜란드 의회에서 결정되었다. 평화 후 의회는 군대 해체를 결정했고, 이는 오라녜 공 빌럼 2세와의 충돌을 야기했다. 1650년 빌럼 2세의 죽음은 정치적 긴장을 더했다.
네덜란드는 재정을 정비하고 해군을 확장하여 무역을 진흥시켰다. 잉글랜드는 1660년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 뉴네덜란드를 침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개칭했다.
1665년 잉글랜드의 선전포고로 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패배했지만,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에 참전했다. 1665년 흑사병과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잉글랜드가 밀렸고, 1667년 미힐 더 라위터르 제독이 템스강을 봉쇄했다. 1667년 브레다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브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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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영토는 현 상태 유지 |
잉글랜드는 뉴암스테르담(오늘의 뉴욕) 획득, 네덜란드는 수리남 확보 |
항해 조례 수정, 1662년 통상조약 재확인 |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아카디아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서인도 제도 영토를 얻었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 타파를 위해 네덜란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1670년 잉글랜드와 도버 밀약을 맺고, 1672년 에스파냐, 독일 제후들과 결탁했다. 1672년 프랑스군은 라인강을 건너 네덜란드를 침입했다. 요한 더 빗이 암살되고 오라녜 공 빌럼이 총독이 되어 홍수 전술로 항전했다.
1673년과 1674년 네덜란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레오폴트 1세,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도 화해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전투는 네덜란드, 알사스, 지중해에서 장기간 진행되었으며, 1678년 네이메헌 화약으로 종결되었다.
네이메헌 화약은 프랑스-네덜란드(1678년 8월 10일), 프랑스-에스파냐(1678년 9월 17일), 독일 황제-프랑스-스웨덴(1679년 2월 6일), 네덜란드-스웨덴(1679년 10월 12일), 프랑스-덴마크 간(1679년 9월 2일), 덴마크-스웨덴(1679년 9월 26일) 사이에 체결된 여러 조약의 총칭이다.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영토를 회복하고 중립을 약속했으며, 에스파냐는 프랑슈콩테 등을 프랑스에 양보했고,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에 일부 영토를 양보했다.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사략선들을 임명하여 스페인 제국을 공격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5년 논수치 조약을 체결하여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
제임스 1세 치세에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사략 행위가 종식되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영국 해군이 방치되었다.
찰스 1세는 스페인과 비밀 협정을 맺고 해군 재건 계획을 시작하여 함선세를 부과, 건조 자금을 조달했다. 그러나 오라녜 공 프레드릭 헨리크와의 관계를 우려하여 스페인 지원을 제한했다. 1639년 다운스에서 스페인 수송 함대를 보호하지 않아 다운스 해전이 발생, 스페인의 해상력과 찰스의 명성이 훼손되었다.
아메리카에서는 네덜란드 신네덜란드 식민지와 영국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가 북동부 해안을 놓고 다투었다.
2. 2. 2. 크롬웰
청교도 혁명 전쟁으로 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 지위가 상실되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무역과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인과 그 선박을 배제하려는 목적이었다. 1652년부터 1654년까지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잦은 분쟁이 벌어졌다.[1] 잉글랜드 함대는 동인도 제도 등에서 아시아의 특산물을 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 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이 초점이 되었다.[1]1642년부터 1651년까지 이어진 잉글랜드 내전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해군력은 약화되었다. 해군 내부는 분열되었지만, 장교들은 대체로 의회파를 지지했다. 1649년 찰스 1세 국왕이 처형된 후, 올리버 크롬웰(1599-1658, 재임 1653-1658)은 잉글랜드 연방을 공화국으로 통합했다. 그는 함선 수를 늘리고, 가문 배경이 아닌 능력에 따라 장교를 승진시키며, 횡령을 단속하여 잉글랜드 해군을 개혁했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의 상업적 지배에 대한 세계적인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1]
크롬웰은 국내의 오랑주의당 계파와 공화국으로 망명한 영국 왕당파의 영향력을 우려했다. 총독들은 스튜어트 군주들을 지지했는데(오라녜 공 빌헬름 2세는 1641년 찰스 1세의 딸과 결혼했다), 그들은 찰스 1세의 재판과 처형을 혐오했다.[1]
1651년 초 크롬웰은 네덜란드 공화국이 연방에 가입하고 잉글랜드가 스페인령 아메리카 대부분을 정복하는 것을 돕자는 제안을 담은 사절단을 헤이그로 파견하여 긴장을 완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를 잉글랜드와의 불균형적인 동맹으로 끌어들이려는 이 시도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네덜란드 총주의 지배 세력은 이 제안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고, 스튜어트 지지 오랑주의당은 폭도들을 선동하여 크롬웰의 사절들을 괴롭혔다. 사절단이 귀국하자 잉글랜드 의회는 대결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1]
3. 제1차 전쟁 (1652-1654)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80년 전쟁을 치르면서 주식회사 제도를 활용해 장거리 해상 탐험에 나섰다. 북아메리카, 인도, 인도네시아 등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사략선 활동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628년 피트 하인 제독은 스페인의 보물 함대를 나포하는 유일한 지휘관이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장기간 항해 경험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플류트 범선 건조 기술 발달에 힘입어 유럽 최대 상선대를 보유하며 발트해 무역을 장악했다. 1648년 뮌스터 평화 조약 체결 후, 네덜란드 내 권력 분립과 군대 해체 결정은 오라녜 공 빌럼 2세와의 갈등을 야기했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치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잉글랜드 내전(1642-1651)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해군력이 약화된 사이,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 해군을 개혁하여 네덜란드의 상업적 지배에 도전할 기반을 마련했다.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에 대한 불만을 쌓아갔고, 삼십년 전쟁 이후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었다. 크롬웰은 오랑주의당과 망명 왕당파를 우려하여 1651년 네덜란드에 연방 가입을 제안했으나, 이는 오히려 전쟁으로 이어졌다.
1651년 10월, 영국 의회는 항해법을 통과시켜 네덜란드 중개상을 배제하려 했다. 1652년 조지 에이스큐가 네덜란드 상선 27척을 나포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네덜란드는 무장 상선을 해군에 편입했다. 1652년 5월, 마르턴 트롬프가 영국 함대에 기함을 내리기를 거부하면서 도버 해전이 발발했고, 7월 10일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했다.
이후 영국은 켄티쉬 노크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던지네스 해전과 리보르노 해전에서 패배하며 지중해와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다. 로버트 블레이크와 조지 몽크는 해군 전술을 재검토하여 포틀랜드 해전과 가버드 해전에서 승리했다.
잉글랜드 해군은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계속 봉쇄했고, 무역 국가인 네덜란드는 큰 타격을 받았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큰 손해를 입지 않았다. 호국경 크롬웰은 이상주의적인 개신교 국가인 영국-네덜란드의 동등한 합병론을 주장했지만, 1654년 4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3. 1. 해전의 전개
청교도 혁명 전쟁 중에 상실한 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 지위를 회복하고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무역과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인과 그 선박을 배제하려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1652년부터 1654년에 걸쳐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서 잦은 분쟁이 벌어졌다. 잉글랜드 함대는 동인도 제도 등에서 아시아의 특산물을 가득 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 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이 초점이 되었다.당시 네덜란드의 조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네덜란드에서 만든 대형 군함은 이미 수출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대함대를 보유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했다. 소형함 중심의 네덜란드 함대가 대형함 중심의 스페인 함대에 항상 승리했고, 항로 보호를 위해 다수의 소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편리하다는 등의 이유로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대형 군함 건조를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해안은 수심이 얕기 때문에 흘수가 깊은 대형함을 운용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다.
이에 반해 잉글랜드 측은 장비를 잘 갖춘 대형 군함을 투입하여, 단종진이라는 전술을 펼치는 네덜란드 해군과 충돌했다. 요한 드 위트 등 일부 진보적 정치인과 현장의 해군 장교들은 대형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응은 늦었다. 1652년에서 1653년까지 네덜란드의 마르턴 트롬프 제독은 로버트 블레이크가 이끄는 우세한 잉글랜드 해군에 분전했지만 장비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는 굿윈샌즈 해전, 플리머스 해전, 켄티쉬 노크 해전에서 승리했다. 네덜란드는 1652년 12월에 던지네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포틀랜드 해전에서 패했다. 중상을 입은 블레이크와 교체된 조지 뭉크는 갇바드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에 승리했다. 헤이그 근해의 스헤베닝언 해전에서는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고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스코틀랜드 북쪽을 크게 우회하여 네덜란드 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3. 2. 전쟁의 결과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 체결로 전쟁은 끝났지만, 상업적 경쟁은 계속되었다. 이 조약에는 오라녜 공 윌리엄 3세(훗날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홀란트 주의 총독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비밀 부록(폐쇄령)이 있어, 훗날 불만의 씨앗이 되었다.[5] 1653년 네덜란드는 영국 해군과의 질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60척의 대형 선박 건조를 시작했다. 크롬웰은 1654년 네덜란드의 도움 없이 스페인과 영국-스페인 전쟁을 시작했고, 재임 기간 동안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스웨덴 동맹국을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동맹인 네덜란드와의 새로운 갈등을 피했다.4. 제2차 전쟁 (1665-1667)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665년부터 1667년까지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660년 영국 왕정복고 이후 즉위한 찰스 2세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조카인 오라녜 공 빌헬름 3세를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으로 임명하려 했다. 동시에 찰스 2세는 네덜란드의 상업적 지배에 맞서기 위한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영국-네덜란드 관계를 악화시켰다.
영국에서는 반네덜란드 감정이 고조되었고, 당시 사무엘 페피스의 말처럼 영국은 "전쟁 광풍"에 휩싸였다. 동인도 회사, 왕립 아프리카 모험 무역 회사, 레반트 회사 등 영국의 상인들과 해외 무역 회사들은 해전과 사략선 작전을 통해 네덜란드를 제압하고 유리한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2]
1665년, 많은 네덜란드 상선들이 나포되었고, 네덜란드의 무역과 산업은 타격을 입었다. 영국은 네덜란드 식민지인 뉴네덜란드와 항구 도시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점령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666년 6월 4일 해전에서 영국 왕립 해군의 기함이 나포되는 등 네덜란드의 승리도 있었다. 1666년 네덜란드 해상 무역은 회복되었지만,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과 경제는 런던 대역병[2]과 런던 대화재로 인해 침체되었다.
1667년 6월 메드웨이 해전은 영국 함대의 본거지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네덜란드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C. R. 박서는 이를 "영국 군대가 당한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3] 미헬 데 레이터가 이끄는 함대는 템스강과 템스강 어귀를 과감하게 진격하여 채텀 항을 방어하는 방어선을 돌파하고, 그곳에 정박해 있던 여러 영국 군함에 불을 지르고, 영국 왕립 해군의 기함 등을 끌고 갔다.
메드웨이 습격은 영국에서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를 야기했다. 전쟁 비용 증가와 찰스 2세의 사치스러운 궁정 지출은 런던에 반란 분위기를 조성했다. 찰스 2세는 내전을 우려하여 브레다에 있는 영국 사절들에게 네덜란드와 신속하게 평화 조약을 체결하라고 명령했다.
4. 1. 해전의 전개
1660년 영국 왕정복고 후 찰스 2세는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네덜란드를 침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고쳤다.[2]1665년 3월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 전쟁이 개시되었다. 잉글랜드는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을 들어 참전했고 잉글랜드의 동맹국 뮌스터 공국도 참전했으나 프랑스에게 패배했다.
1665년 흑사병과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잉글랜드가 밀려 1667년 6월에 메드웨이 해전에서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 제독이 템스강에 침입하여 하구를 봉쇄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3] 1667년 7월에 〈브레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1665년부터 1667년까지 찰스 2세가 통치하던 왕정복고 이후의 잉글랜드 왕국과 드 위트가 이끄는 네덜란드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잉글랜드군이 북아메리카에 있는 네덜란드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전 전쟁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함대는 네덜란드 상선을 나포하고 네덜란드 여러 항구를 봉쇄하려 했지만, 재정난으로 실패했다.
잉글랜드 해군은 찰스 2세의 동생이자 해군 제독인 요크 공 제임스 2세, 요크 공의 사촌인 컴벌랜드 공 루퍼트, 그리고 공화정 시대 잉글랜드 해군 제독이었던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가 지휘했다. 네덜란드는 육군 출신으로 정치적 인사로 임명된 오브담 제독이 사령관으로 해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해군과 싸우게 되었다.
1665년, 요크 공이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은 로우스트프트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오브담 제독이 전사하고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미힐 드 로이테르가 네덜란드 함대 사령관이 되면서 전황은 좋지 않게 되었다. 요크 공은 찰스 2세의 후계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만일의 위험을 우려한 찰스 2세의 명령으로 후방으로 이동했고, 샌드위치는 부정 의혹으로 강등되자,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활약했던 먼크가 복귀하여 루퍼트와 함께 싸웠다.
1666년,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선전포고한 것을 알게 된 잉글랜드는 루퍼트 함대를 프랑스 함대에 보냈지만, 전력을 분산한 채 네덜란드 해군과 조우하여 먼크는 네덜란드 해군보다 적은 함대로 교전하게 되었다( 6월 11일부터 14일(구력으로는 6월 1일부터 4일)). 4일째에는 루퍼트의 함대가 합류하여 잉글랜드 측이 전력적으로 우세해졌지만, 그럼에도 잉글랜드 해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 네덜란드 해군의 피해는 적었지만, 먼크는 전과를 과장해서 보고했다.
7월에 일어난 에서는 잉글랜드 해군이 이전의 반성을 바탕으로 먼크와 루퍼트가 공동 전선을 펴서 네덜란드 해군과 대결하여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다시 먼크는 전과를 과장해서 보고했지만, 실제 피해는 영국 1척, 네덜란드 2척으로 양측 모두 매우 적었다. 여세를 몰아 8월에 있었던 네덜란드 연안 공격(홈즈의 봉화)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다음 달에는 네덜란드 함대가 다시 해협으로 진출하여 잉글랜드의 우세는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네덜란드 측은 제이랜드 해군 사령부의 명장 요한 에베르트센을 비롯한 5명의 장교가 전사하는 타격을 입었고, 명령 불복종으로 규탄받은 코르넬리스 트롬프(마르텐 트롬프의 아들)가 해임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측은 잉글랜드의 동맹국인 독일의 소제후국으로부터의 육군 침입과 함대 사령관 드 로이테르의 질병 요양 등으로 인해 해상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6]
이 전쟁이 시작되자 잉글랜드에서는 페스트가 유행하거나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여 재정난에 빠지고 혐전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듬해 1667년, 평화를 생각하고 있던 드 위트는 로이테르와 형 코르넬리스 드 위트를 태운 네덜란드 함대를 템스강에 침입시켜 채텀 주변에 정박 중인 군함을 불태우고 잉글랜드 함대 기함 로열 찰스를 포함한 여러 척을 나포했다(메드웨이 강 습격).

4. 2. 브레다 조약
1667년 7월,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으로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양국은 대체로 현재 상태의 영토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잉글랜드는 뉴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을 획득했고, 네덜란드는 수리남을 확보했다. 또한 항해 조례가 수정되고 1662년 통상 조약이 재확인되었다.[2]이와 동시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도 조약이 체결되어, 잉글랜드는 아카디아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서인도 제도의 영토를 얻었다.[2]
브레다 조약은 1667년 6월 메드웨이 해전에서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 제독이 템스강에 침입하여 하구를 봉쇄하는 등 잉글랜드가 밀리는 상황에서 체결되었다. 이 해전은 빌렘 셸링크스의 작품인 1667년 메드웨이 습격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1665년 흑사병과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인해 잉글랜드의 전쟁 수행 능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5. 제3차 전쟁 (1672-1674)
1672년에서 1674년까지 벌어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의 일부로,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루이 14세와의 도버 밀약에 따라 네덜란드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드 위트는 1668년에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간의 삼국 동맹을 맺었으나, 프랑스는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이용해 찰스 2세를 매수하고 도버 밀약을 체결했다. 1672년에는 프랑스-스웨덴 동맹이 체결되면서 삼국 동맹은 붕괴되었다.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국토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네덜란드는 제방을 파괴하여 치수 방어선을 구축, 암스테르담 점령을 막았다. 국내에서는 오라니예-나사우가의 총독직 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빌헬름 3세가 군 최고 사령관과 총독에 취임했다. 이후 발생한 폭동으로 드 위트 형제는 민중에게 살해되었다. 빌헬름 3세는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포위하여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
영국 내에서는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넘어가면 잉글랜드가 경제적으로 굴복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의회는 찰스 2세에게 친프랑스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찰스 2세는 167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와 화해하고, 1677년에는 조카딸 메리를 빌헬름 3세와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다.
5. 1. 해전의 전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루이 14세는 도버 밀약을 통해 잉글랜드의 찰스 2세를 끌어들여 네덜란드를 공격했다. 1672년 프랑스군이 라인강을 건너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네덜란드에서는 요한 더 빗이 암살되고 오렌지공 윌리엄(빌헬름 3세)이 총독이 되어 수문을 열고 홍수전술로 맞섰다.[8]찰스 2세는 1672년부터 1674년까지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공에 협력하는 형태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일으켰다. 1672년, 잉글랜드는 요크 공작과 샌드위치가 지휘하는 함대를 프랑스와 연합하여 네덜란드 상륙 작전을 준비했으나, 솔베이 해전에서 드 레이터에게 기습당해 큰 피해를 입고 샌드위치가 전사했다. 요크 공작은 사임하고 루퍼트가 함대 지휘를 이어받았다.[8]
1673년, 루퍼트는 스호네벨트 해전과 텍셀 섬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에 도전했지만, 모두 드 레이터 함대에 패배하여 네덜란드 침공은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프랑스 함대는 네덜란드 공화국 침공에 실패하고, 영국 의회는 찰스 2세에게 강화를 맺도록 강요했다.[8]
한편, 잉글랜드 의회는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넘어가면 잉글랜드가 경제적으로 굴복할 것을 우려하여 찰스 2세에게 친프랑스 정책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1674년 찰스 2세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네덜란드와 화해하고, 1677년에는 조카딸 메리(후의 메리 2세)를 빌헬름 3세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8]
5. 2. 전쟁의 결과
찰스 2세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루이 14세를 지원하기 위해 도버 조약을 체결했지만, 영국 여론은 새로운 전쟁에 부정적이었다.[8] 프랑스 왕립 육군이 홀란드 수계 방어선에 저지되자, 해상을 통한 네덜란드 침공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드 라위터르는 영국-프랑스 함대에 전략적 승리를 거두며 침공을 막았다. 영국 의회는 찰스 2세에게 강화를 강요했다.찰스 2세는 1672년-1674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 협력하며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일으켰다. 1672년, 요크 공작·샌드위치는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상륙을 준비했지만, 정박 중 드 라위터르의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고 상륙 작전은 실패했다(솔베이 해전). 샌드위치는 전사하고, 요크 공작은 사임, 루퍼트가 함대 지휘를 이어받았다. 1673년, 루퍼트는 스호네벨트 해전, 텍셀 섬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에 도전했지만, 모두 드 라위터르에게 패배하여 네덜란드 침공과 프랑스와의 연계는 불가능해졌다.
한편,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넘어가면 잉글랜드가 프랑스 중상주의에 굴복할 것을 우려하여 찰스 2세에게 친프랑스 노선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1674년 찰스 2세는 웨스트민스터 조약 (1674년)으로 네덜란드와 화해하고, 1677년에는 조카 메리(후의 메리 2세)를 빌헬름 3세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8]
6. 제4차 전쟁 (1780-1784)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780년부터 1784년까지 벌어졌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경제력이 네덜란드를 앞지르면서 양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1780년경 영국의 총생산량이 네덜란드를 추월했고, 네덜란드가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당시 네덜란드 해군은 20척 정도의 함선만을 보유하여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케이프 식민지, 실론, 말라카 등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주요 무역 거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6. 1. 해전의 전개
1688년, 네덜란드는 영국이 다가오는 아홉 해 전쟁에서 프랑스와 연합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1672년의 위기를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오라녜 공 빌헬름은 영향력 있고 불만을 품은 7명의 영국인들로부터 받은 빌헬름 초청을 이용하여 네덜란드 침공군을 이끌고 데번주의 토르베이에 상륙했다. 거기서 그는 런던으로 진군하여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를 성공적으로 폐위시켰다. 빌헬름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런던을 점령하는 동안 아내인 잉글랜드의 메리 2세와 함께 영국 왕위에 올랐고, 더 이상의 영국-네덜란드 분쟁을 종식시켰다.[1] 동맹 관계를 유지했지만, 영국(그리고 1707년 이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네덜란드를 빠르게 능가했다. 1720년경부터 네덜란드 경제 성장은 상당한 침체를 겪었고, 1780년에는 영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이 네덜란드를 넘어섰다.외교 혁명 이후 7년 전쟁 동안 네덜란드는 중립을 지켰다. 1776년 영국의 북미 식민지가 영국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네덜란드는 반군에게 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여 영국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영국은 1780년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했다. 이 시점에서 네덜란드 해군은 심각하게 약화되어, 20척의 1등함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주로 영국이 네덜란드 식민지 이익에 대해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지만, 1781년 8월 5일 도거뱅 해전에서 한 차례의 함대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이 전쟁은 영국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의 약점을 드러내 불안정과 혁명을 초래했다.
1688년 명예혁명은 윌리엄 3세를 메리 2세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세움으로써 양국의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대상인들은 런던을 새로운 무역 거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의 경제 성장은 둔화되었다. 또한 윌리엄 3세가 어떤 영국-네덜란드 함대도 모두 영국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고, 네덜란드 해군을 영국 해군의 60%로 제한했기 때문에, 1720년경부터 네덜란드 경제는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1780년경에는 영국 왕국의 총생산량이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생산량을 넘어섰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상업적 성공은 영국의 경쟁을 부추겼지만, 18세기 후반 영국의 성장은 네덜란드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네덜란드가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했고, 영국과의 동맹 상실은 프랑스의 침공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정권 교체를 의미했다.
네덜란드 해군은 이전과 달리 20척 정도의 배만 보유하고 있었고, 함대는 없었다. 영국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압력을 이유로 공화국을 영국의 보호국화하려고 노력했고, 네덜란드가 소유한 식민지까지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는 케이프 식민지, 실론 및 말라카와 같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상의 중요 거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네덜란드는 18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95척의 전함을 건조했지만, 영국은 그 두 배에 달하는 함대를 보유하고 있어 수적 우세를 유지했다.
6. 2. 전쟁의 결과
1780년 12월 20일 영국이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1781년에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한 뒤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를 점령하여 영국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1781년 8월, 네덜란드는 도거뱅크 해전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했지만, 그 후 함대를 조직하지 못해 1784년 5월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이 네 차례의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위신은 떨어지고 세계 강대국 지위를 상실했으며,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다.[1]1688년 명예 혁명으로 빌헬름 3세가 메리 2세와 함께 공동 통치자로 즉위하면서 양국 간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런던을 새로운 무역 거점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네덜란드의 경제 성장은 둔화되었다. 게다가 빌헬름 3세는 모든 영국-네덜란드 함대가 영국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네덜란드 해군을 영국 해군의 60% 수준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1720년경부터 네덜란드 경제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1780년경에는 영국의 총생산량이 네덜란드의 총생산량을 넘어섰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상업적 성공은 영국의 경쟁심을 자극했지만, 18세기 후반 영국의 성장은 네덜란드의 분노를 일으켰다. 네덜란드가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했고, 영국과의 동맹 상실은 프랑스의 침공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여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당시 네덜란드 해군은 20척 정도의 배만 보유하고 있어 함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영국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압력을 빌미로 네덜란드를 영국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네덜란드가 소유한 식민지까지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케이프 식민지, 실론, 말라카와 같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상의 중요 거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네덜란드는 18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95척의 전함을 건조했지만, 영국은 그 두 배에 달하는 함대를 보유하여 수적 우위를 점했다.
7. 이후의 전쟁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1810년에는 네덜란드를 합병했다. 1797년 캄퍼다운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는 영국에 패배했다. 1799년 영국-러시아 연합의 네덜란드 침공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 함대와 대규모 조선 능력을 중요한 자산으로 여겼다. 네덜란드 해군은 영국 침공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바타비아 공화국은 많은 수의 평저선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건조했고, 이는 해상으로 불로뉴까지 수송되어야 했다. 이것은 성공적이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강력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와의 대결 시도를 포기했다.
영국은 여러 네덜란드 식민지를 침략했다. 1803년 아메리카 대륙에서 에세키보가 점령되었고, 이듬해 수리남이 함락되었다.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 후 영국은 다른 네덜란드 식민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806년 1월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가 함락되었다. 1807년까지 퀴라소를 포함한 카리브해의 네덜란드 영토가 모두 함락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만 남은 상황에서, 영국 해군은 1806년-1807년 자바 원정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함대를 물리치고 지역 지배력을 확보했다.
1810년 네덜란드가 프랑스 제국에 편입된 후, 영국은 6개월간의 원정으로 향신료 제도를 점령했다. 1년 후 한 달간의 원정으로 자바 전역을 장악하면서 네덜란드 동인도 정복이 완료되었다. 181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 체결과 함께 영국은 케이프, 실론, 네덜란드령 기아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를 네덜란드 왕국에 반환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나폴레옹 시대 동안 영국과 바타비아 공화국 및 네덜란드 왕국 사이의 전쟁을 제5차 및 제6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간주한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 연합 왕국(1815년 - 1839년)이 설치되었다. 182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 체결 당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령 기아나(현 수리남. 서쪽에 영국령 기아나가 생겨 규모가 축소됨)와 상관인 일본의 데지마만 남았다. 한편, 영국이 해협 식민지(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형성하면서 네덜란드를 능가하는 해군력으로 동아시아의 군사 균형이 무너지고,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로 진출하여 삼각 무역을 시작했다. 이는 유럽 열강의 동방 문제와 그레이트 게임이 아시아를 휘말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8. 영향 및 교훈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4차례에 걸쳐 벌어진 해상 및 무역 전쟁으로, 이 전쟁의 결과는 양국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4차례의 전쟁 결과, 네덜란드는 점차 해상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쇠퇴한 반면, 영국은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다. 특히 4차 전쟁에서 영국은 1780년 12월 20일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1781년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한 뒤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를 점령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1781년 8월 도거뱅크 해전에서 네덜란드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후 함대를 조직하지 못하고 1784년 5월 항복하면서 네덜란드는 세계 강대국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1]
8. 1. 국제적 영향
가톨릭 합스부르크 왕조와 개신교 국가들 사이의 종교 전쟁 동안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모두 유럽의 광범위한 갈등에 외교적으로 직접 관여했다. 동시에 양국은 장거리 탐사 항해에 착수했다. 대항해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네덜란드와 영국은 중상주의와 수 세기간 어업, 섬유 및 발트해 무역으로 이어진 교류에 영향을 받았으며, 신세계에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았다.[1]1600년대 초, 네덜란드는 가톨릭 합스부르크와의 80년 전쟁을 계속하면서 장거리 해상 탐사를 시작했다. 주식회사의 주식 거래에서 네덜란드의 혁신은 네덜란드 연합주와 런던에서 판매된 주식 재원으로 탐사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했다. 이들은 북미, 인도 및 인도네시아(말루쿠 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또한 사략선 운용에서도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 1628년 피트 하인 제독은 스페인의 대규모 보물 함대를 성공적으로 나포한 유일한 지휘관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많은 장기간 항해로, 이들의 사회는 이후 동인도 회사에 의해 관료 계급과 제도적 지식이 구축되었으며, 영국은 이를 모방했다.[1]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을 대체하는 주요 유럽 상인이 되었다. 특히, 동인도에서 포르투갈의 무역소 대부분을 인수하여 네덜란드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향신료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이는 플류트 범선 형식의 저비용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네덜란드 상선의 엄청난 성장과 동시에 일어났다. 곧 네덜란드인들은 다른 모든 나라보다 더 많은 상선을 보유한 유럽 최대의 상선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유럽(특히 발트해) 무역과 장거리 무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1]
1648년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 뮌스터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권력 분열로 인해 육군과 해군은 스타트허우더 권력의 주요 기반이었지만, 할당된 예산은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평화가 도래하자 의회는 대부분의 네덜란드 군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주요 네덜란드 도시와 새로운 스타트허우더인 오라녜 공 빌럼 2세 사이의 충돌로 이어졌고, 공화국은 내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650년 스타트허우더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정치적 긴장감을 더했다.[1]
청교도 혁명 전쟁 중 상실한 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 지위를 회복하고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무역과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 네덜란드인과 그 선박을 배제하려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었다. 이로 인해 1652년부터 1654년까지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서 잦은 분쟁이 벌어졌다. 잉글랜드 함대는 동인도 제도 등에서 아시아의 특산물을 가득 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 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이 초점이 되었다.[1]
당시 네덜란드의 조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네덜란드에서 만든 대형 군함은 이미 수출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대함대를 보유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했다. 소형함 중심의 네덜란드 함대가 대형함 중심의 스페인 함대에 항상 승리했고, 항로 보호를 위해 다수의 소형함을 보유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등의 이유로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대형 군함 건조를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해안은 수심이 얕아 흘수가 깊은 대형함을 운용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다.[1]
반면 잉글랜드 측은 장비를 잘 갖춘 대형 군함을 투입하여 단종진 전술을 펼치는 네덜란드 해군과 충돌했다. 요한 더 빗 등 일부 진보적 정치인과 현장 해군 장교들은 대형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응은 늦었다. 1652년에서 1653년까지 네덜란드의 마르턴 트롬프 제독은 로버트 블레이크가 이끄는 우세한 잉글랜드 해군에 분전했지만 장비 차이는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는 굿윈샌즈 해전, 플리머스 해전, 켄티쉬 노크 해전에서 승리했다. 네덜란드는 1652년 12월 던지네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포틀랜드 해전에서 패했다. 중상을 입은 블레이크와 교체된 조지 뭉크는 갇바드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에 승리했다. 헤이그 근해 스헤베닝언 해전에서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고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스코틀랜드 북쪽을 크게 우회하여 네덜란드 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1]
잉글랜드 해군은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계속 봉쇄했고, 무역 입국인 네덜란드는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큰 손해를 입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호국경이었던 크롬웰은 이상주의적인 개신교 국가인 영란의 대등한 합방론을 주장했지만, 1654년 4월 화의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다.[1]
이는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가 곧이어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가 되었다.[1] 네덜란드는 재정을 정비하고 해군을 확장하여 무역을 진흥시켰으나, 잉글랜드는 1660년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네덜란드를 침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고쳤다.[1]
1665년 3월,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을 들어 참전했고 잉글랜드의 동맹국 뮌스터 공국도 참전했으나 프랑스에 패배했다.[1]
이번 전쟁에서는 1665년 흑사병과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잉글랜드가 밀려 1667년 6월 메드웨이 해전에서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 제독이 템스강에 침입하여 하구를 봉쇄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1667년 7월 브레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1]
브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양국 영토는 대략 현 상태를 유지한다.[1]
# 잉글랜드는 뉴암스테르담(오늘의 뉴욕)을 얻고, 네덜란드는 수리남을 확보한다.[1]
# 항해 조례를 수정하고 1662년 통상조약을 재확인한다.[1]
동시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도 조약이 체결되어, 잉글랜드는 아카디아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서인도 제도의 영토를 얻었다.[1]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 타파를 목적으로 침략 전쟁을 벌였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네덜란드가 프랑스 망명자를 비호한 데 있었다. 전쟁 준비를 위해 루이 14세는 이전의 3국 동맹(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웨덴)을 타파하고자 1670년 잉글랜드와 도버 밀약을 맺고, 1672년에는 에스파냐 및 독일 제후들과 결탁하였다. 1672년 프랑스군은 라인강을 건너 네덜란드에 침입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요한 더 빗이 암살되고 오라녜 공 윌리엄이 총독이 되어 수문을 열고 홍수 전술로 항전하였다.[1]
1673년과 1674년 네덜란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제 레오폴트 1세,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와도 화해함으로써 프랑스에 대해 외교 전술로 대항하였다. 전투는 네덜란드, 알자스, 지중해에서 장기간 진행되었으며, 1678년 네이메헌 화약으로 종결되었다.[1]
네이메헌 화약은 프랑스-네덜란드(1678년 8월 10일), 프랑스-에스파냐(1678년 9월 17일), 독일 황제-프랑스-스웨덴(1679년 2월 6일), 네덜란드-스웨덴(1679년 10월 12일), 프랑스-덴마크 간(1679년 9월 2일), 덴마크-스웨덴(1679년 9월 26일) 사이에 체결된 여러 조약의 총칭이다.[1]
이 조약에 의해 네덜란드는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중립을 약속하였으며, 에스파냐는 프랑스에 프랑슈콩테와 그 밖의 동북 국경의 몇 개 도시를 양보하고,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에 일부 영토를 양보하였다.[1]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영국이 1780년 12월 20일에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1781년에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한 뒤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를 점령해 영국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1781년 8월에 네덜란드는 마지막으로 도거뱅크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그 후 함대를 조직하지 못해 1784년 5월에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이 4차례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위신은 떨어지고 세계 강대국 지위를 상실했으며,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다.[1]
참조
[1]
서적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Clarendon Press
[2]
논문
Prizes and Profits: Dutch Maritime Trade during the Second Anglo-Dutch War
[3]
서적
The Anglo-Dutch Wars of the 17th Century
Her Majesty's Stationery Office
[4]
문서
튜립 버블 (1637년)
[5]
문서
友清、P22 - P24、小林、P174 - P187
[6]
서적
오란다 명해장열전: 일본어역: The Great Dutch Admirals
Kindle판
2024-08-30
[7]
문서
友清、P55 - P80、小林、P199 - P210
[8]
문서
友清、P158 - P177、小林、P211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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