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군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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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풍군 이瑔은 조선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유배된 왕족이다. 1441년 영풍군에 봉해졌으며,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혜빈 양씨, 한남군,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에 가담했다. 사육신의 난 실패 후 유배되었고, 1458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712년 관작과 봉호가 회복되었으며, 고종 대에 양녕대군의 손자 이빈이 양자로 입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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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종영 - 안평대군
안평대군은 조선 전기의 왕자로서 학문과 예술에 능했으며 안견, 박팽년 등과 교류하며 몽유도원도와 같은 서화 작품을 남겼으나, 계유정난으로 유배 후 사사되었고 후에 복권되었다. - 육종영 - 화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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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은 무예에 능했으며, 총통과 화차 제작에 참여했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 왕실의 수장격 인물이다. - 조선 세종의 자녀 - 안평대군
안평대군은 조선 전기의 왕자로서 학문과 예술에 능했으며 안견, 박팽년 등과 교류하며 몽유도원도와 같은 서화 작품을 남겼으나, 계유정난으로 유배 후 사사되었고 후에 복권되었다.
영풍군 (왕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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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영풍군 |
한자 표기 | 永豊君 |
작위 | 조선 세종의 왕자 |
휘 | 이전 또는 이천(李瑔) |
출생일 | 1434년 9월 28일 |
사망일 | 1456년 7월 31일 (향년 22세) |
사망지 | 조선 충청도 청풍군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군부인 순천 박씨 |
자녀 | 이갓박(딸), 취성군 이빈(양자) |
부친 | 세종 |
모친 | 혜빈 양씨 |
2. 생애
처 군부인 박씨는 본관은 순천으로 박팽년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1월 11일 영풍군(永豊君)에 봉해졌다[2]. 세종 사후 어머니 혜빈 양씨는 세종의 명으로 현덕왕후를 여읜 어린 단종의 유모가 되어 그를 길렀고, 형 한남군은 수양대군의 정변에 반대하였으며 사육신 박팽년은 그의 장인이었다. 1456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자리를 찬탈하자 영풍군은 어머니 혜빈 양씨, 형 한남군, 이복형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다. 사육신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 혜빈 양씨는 청풍(淸風)으로,[3]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 된 후[3]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4]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가시 등으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통제하던 형벌)되었다. 청풍에서의 방금(防禁)조건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5]
- 난장(欄墻) 밖에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한다.
- 외문(外門)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담 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自給)하게 하고 외인(外人)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한다.
- 외인이 왕래하여 교통(交通)하거나 물품을 주는 자는 불충(不忠)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한다.
- 수령(守令)이 불시에 점검하고, 문을 지키는 자가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하여 죄를 과단(科斷)한다.
그 뒤 세조는 1456년(세조 2) 6월 3일에는 청풍 목사(牧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서 이전(李瑔)의 배소(配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방(禁防)하되, 힘써 안정(安靜)을 기하여 놀라지 말게 하라."는 유시를 하기도 하였고,[6] 1457년(세조 3) 6월 28일에는 청풍 부사(府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도내 임실(任實)에 안치(安置)된 이전(李瑔)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7] 하였다.
사망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끊임없이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을 처형할 것을 청하는데, 세조는 금성대군은 사사하였지만 한남군과 영풍군은 위리안치 하였다. 한남군은 1459년 병사하였지만, 영풍군의 사망 기록은 없다. 다만 1458년 영풍군의 아내의 가족을 내보내고 노비를 몰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2. 1. 가계와 출생
세종과 혜빈 양씨의 아들이다. 형제로는 한남군 이어, 수춘군 이현이 있다. 부인은 박팽년의 딸인 군부인 순천 박씨이다. 성주 이씨 이양손에게 출가한 장녀 이갓박과, 영해군의 차남 길안도정 이의, 양녕대군의 손자 취성군 이빈을 양자로 두었다.[10][11]2. 2. 봉군과 혼인
영풍군은 참판(參判) 증판서(贈判書) 박팽년(朴彭年)의 딸인 군부인 순천 박씨(郡夫人 順天 朴氏)와 혼인하였다.[10][11] 성주 이씨 만호(萬戶) 이양손(李陽孫)에게 장녀 이갓박(李㖙朴)을 출가시켜 이세적(李世勣)과 이세광(李世光)을 손자로 보았다.[10][11] 영해군의 차남 길안도정(吉安都正) 이의(李義)와 양녕대군의 손자 취성군 이빈을 양자로 들였다.[10][11]2. 3. 단종 복위 운동과 유배
1456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자리를 찬탈하자 영풍군은 어머니 혜빈 양씨, 형 한남군, 이복형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다.[3] 사육신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 혜빈 양씨는 청풍(淸風)으로,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 된 후[3]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4]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가시 등으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통제하던 형벌) 되었다.[5]청풍에서의 방금(防禁)조건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5]
{{인용문|금방 조건(禁防條件)
1. 난장(欄墻) 밖에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소서.
1. 외문(外門)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또 담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自給)하게 하고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소서.
1. 외인이 왕래하여 교통(交通)하거나 혹 물품을 주는 자가 있으면, 불충(不忠)한 자에 견주어 논단하게 하소서.
1. 수령(守令)이 불시에 점검하고, 문을 지키는 자가 혹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하여 죄를 과단(科斷)하게 하소서.
}}
그 뒤 세조는 1456년(세조 2) 6월 3일에는 청풍 목사(牧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서 이전(李瑔)의 배소(配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방(禁防)하되, 힘써 안정(安靜)을 기하여 놀라지 말게 하라."는 유시를 하기도 하였고,[6] 1457년(세조 3) 6월 28일에는 청풍 부사(府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도내 임실(任實)에 안치(安置)된 이전(李瑔)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7] 하였다.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끊임없이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을 처형할 것을 청하는데, 세조는 금성대군은 사사하였지만 한남군과 영풍군은 위리안치 하였다. 한남군은 1459년 병사하였지만, 영풍군의 사망 기록은 없다. 다만 1458년 영풍군의 아내의 가족을 내보내고 노비를 몰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2. 4. 위리안치와 감시
영풍군은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다.[3] 사육신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되었다가[3] 임실(任實)로 이배되었고,[4] 다시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5]청풍에서의 방금(防禁)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5]
- 난장(欄墻) 밖에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한다.
- 외문(外門)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담 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自給)하게 하고 외인(外人)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한다.
- 외인이 왕래하여 교통(交通)하거나 물품을 주는 자는 불충(不忠)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한다.
- 수령(守令)이 불시에 점검하고, 문을 지키는 자가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하여 죄를 과단(科斷)한다.
세조는 청풍 목사(牧使)에게 영풍군의 배소(配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지하며, 안정(安靜)을 기하라는 유시를 내렸다.[6] 또한 청풍 부사(府使)에게는 영풍군의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과 감사(監司) 모두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고 유시하였다.[7]
2. 5. 죽음
1456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영풍군은 어머니 혜빈 양씨, 형 한남군, 이복형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다.[3] 사육신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 혜빈 양씨는 청풍(淸風)으로,[3]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된 후[3]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되었다가[4]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가시 등으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통제하던 형벌)되었다.[5]그 뒤 세조는 1456년(세조 2) 6월 3일에는 청풍 목사(牧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서 이전(李瑔)의 배소(配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방(禁防)하되, 힘써 안정(安靜)을 기하여 놀라지 말게 하라."는 유시를 하기도 하였고,[6] 1457년(세조 3) 6월 28일에는 청풍 부사(府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도내 임실(任實)에 안치(安置)된 이전(李瑔)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7] 하였다.
사망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끊임없이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을 처형할 것을 청하였고,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였지만 한남군과 영풍군은 위리안치 하였다. 한남군은 1459년 병사하였지만, 영풍군의 사망 기록은 없다. 다만 1458년 영풍군의 아내의 가족을 내보내고 노비를 몰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3. 사후
1712년(숙종 38) 4월 28일 관작(官爵)과 봉호(封號)를 회복하여 신원(伸冤) 되었다.[8] 군부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고 아들이 없었던 영풍군은 1872년(고종 9년) 12월 4일 고종대에 이르러 종친들의 건의로 양녕대군의 손자 취성군(鷲城君) 이빈(李頻)이 양자가 되어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9]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3. 1. 신원 회복
1712년(숙종 38) 4월 28일 관작(官爵)과 봉호(封號)를 회복하여 신원(伸冤) 되었다.[8] 군부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고 아들이 없었던 영풍군은 1872년(고종 9) 12월 4일 고종대에 이르러 종친들의 건의로 양녕대군의 손자 취성군(鷲城君) 이빈(李頻)이 양자가 되어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9]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3. 2. 후사
1712년(숙종 38) 4월 28일 관작(官爵)과 봉호(封號)를 회복하여 신원(伸冤) 되었다.[8] 군부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고 아들이 없었던 영풍군은 1872년(고종 9) 12월 4일 고종대에 이르러 종친들의 건의로 양녕대군의 손자 취성군(鷲城君) 이빈(李頻)이 양자가 되어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9]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3. 3. 육종영
4. 가족 관계
부왕은 4대 세종(1397 ~ 1450)이며, 모친은 혜빈 양씨(? ~ 1455)이다. 형제로는 한남군 이어(1429 ~ 1459)와 수춘군 이현(1431 ~ 1455)이 있다. 부인은 참판(參判) 증판서(贈判書) 박팽년의 딸인 군부인 순천 박씨이다. 장녀는 이갓박이며, 사위는 성주 이씨 만호(萬戶) 이양손이다. 슬하에 손자 이세적과 이세광이 있다. 영해군의 차남 길안도정 이의와[10] 양녕대군의 손자 취성군 이빈을[11] 양자로 들였다.
5. 관련 작품
5. 1. 드라마
6. 둘러보기
참조
[1]
사료
세종실록 65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8월 17일(신유)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2]
사료
세종실록 92권, 23년(1441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1월 11일(기유)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3]
사료
세조실록 1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윤6월 11일(을묘)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4]
사료
세조실록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7일(을축)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5]
사료
세조실록 10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1월 18일(무인)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6]
사료
세조실록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3일(신축)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7]
사료
세조실록 8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6월 28일(경신)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8]
사료
숙종실록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4월 28일(경진)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9]
사료
승정원일기
http://db.itkc.or.kr[...]
한국고전종합DB
2014-07-14
[10]
사료
만가보(萬家譜)
http://kostma.aks.ac[...]
한국학중앙연구원
[11]
문서
영풍군 이천 사후 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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