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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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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덕왕후는 조선 문종의 후궁으로, 단종의 어머니이다. 1431년 세자 향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세자빈 김씨와 봉씨가 폐위된 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441년 단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사망하여 현덕빈으로 시호를 받았다. 사후 오라버니와 어머니가 역모로 처형되고, 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나, 중종 때 왕비로 복위되었으며, 문종과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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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
기본 정보
이름현덕왕후 권씨
한자 표기顯德王后 權氏
별칭권승휘, 권양원
작호현덕빈(顯德嬪)
시호인효순혜(仁孝順惠)
왕비 정보
왕비 칭호조선 왕비 (추존)
재위 기간1437년 2월 28일 ~ 1441년 7월 24일 (음력)
배우자문종
자녀경혜공주
단종
가문안동 권씨
출생 및 사망
출생일1417년 4월 17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홍주군 합덕현 사저
사망일1441년 8월 10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가계
아버지권전
어머니해령부부인 최아지
능묘
능묘현릉(顯陵)
위치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왕세자빈 정보
왕세자빈 칭호조선 왕세자빈
재위 기간1437년 2월 28일 ~ 1441년 7월 24일 (음력)
전임 세자빈폐세자빈 봉씨
후임 세자빈세자빈 한씨 (소혜왕후)
칭호
추존 시호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
빈호현덕빈(顯德嬪)

2. 생애

현덕왕후는 1431년 왕세자 향(훗날 문종)의 후궁인 승휘(承徽)로 궁에 들어왔다.[1] 당시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순빈 봉씨가 여러 비행으로 폐위되자, 왕실에서는 후궁들 중 새로운 세자빈을 책봉해야 했다. 세종은 이미 두 딸을 낳아 양원(良媛)으로 품계가 올라가 있던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고자 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홍 승휘를 세자빈으로 올리고 싶어했으나, 세종은 딸이 있고 다른 후궁들보다 품계가 높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3]

1437년 말, 권씨는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3] 1441년, 권씨는 이홍위(훗날 단종)를 낳았다. 이는 문종의 외아들이었기에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4] 그러나 권씨는 출산 후유증으로 다음 날 사망하였다.[4] 현덕빈(顯德嬪)의 시호를 받았고[4] 경기도 안산의 소릉(昭陵)에 묻혔다.[5] 그녀의 죽음은 남편과 시아버지뿐 아니라 궁궐에 거주하거나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1417년 4월 17일, 권씨는 안동 권씨 권전과 그의 후처인 해주 최씨 최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니 두 명, 여동생 두 명,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1434년 딸을 낳았으나, 딸은 1438년 4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2] 1435년에는 임신을 하였는데, 이는 자녀가 없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두려워하던 봉씨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3] 1436년에는 경혜공주를 낳았다.

2. 1. 세자 후궁과 세자빈

현덕왕후는 1431년 왕세자 향(훗날 문종)의 후궁인 승휘(承徽)로 궁에 들어왔다.[1] 휘빈 김씨순빈 봉씨가 폐위된 후, 이미 두 딸을 낳아 양원(良媛)으로 품계가 올라가 있던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홍 승휘를 세자빈으로 올리고 싶어했으나, 딸이 있고 다른 후궁들보다 품계가 높은 권씨를 의리상 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3]

1433년경 양원(良媛)이 되었고, 1435년에 경혜공주를 낳았다.[3] 1437년 세 번째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3] 1441년 단종을 낳았으나, 3일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4] 시호는 현덕빈(顯德嬪)이며,[4]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2. 2. 왕비와 죽음



현덕왕후는 1431년 왕세자 향(훗날 문종)의 후궁인 승휘(承徽)로 궁에 들어갔다.[1] 당시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순빈 봉씨가 여러 비행으로 폐위되자, 왕실에서는 후궁들 중 새로운 세자빈을 책봉해야 했다. 세종은 이미 두 딸을 낳아 양원(良媛)으로 품계가 올라가 있던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고자 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홍 승휘를 세자빈으로 올리고 싶어했으나, 세종은 딸이 있고 다른 후궁들보다 품계가 높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3]

1437년 말, 권씨는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3] 1441년, 권씨는 이홍위(훗날 단종)를 낳았다. 이는 문종의 외아들이었기에 크게 기뻐할 일이었다.[4] 그러나 권씨는 출산 후유증으로 다음 날 사망하였다.[4] 현덕빈(顯德嬪)의 시호를 받았고[4] 경기도 안산의 소릉(昭陵)에 묻혔다.[5] 그녀의 죽음은 남편과 시아버지뿐 아니라 궁궐에 거주하거나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1417년 4월 17일, 권씨는 안동 권씨 권전과 그의 후처인 해주 최씨 최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니 두 명, 여동생 두 명,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1434년 딸을 낳았으나, 딸은 1438년 4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2] 1435년에는 임신을 하였는데, 이는 자녀가 없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두려워하던 봉씨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3] 1436년에는 경혜공주를 낳았다.

3. 사후

세조가 그의 조카인 문종 (조선)의 아들을 폐위시킨 지 몇 년 후인 1456년, 현덕왕후의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현덕왕후와 그의 아버지는 사후에 천민으로 강등되었다.[8]

문종 (조선)이 즉위했을 때, 그는 그의 부인에게 현덕왕후의 작위를 내렸다.[6] 그의 아들은 나중에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현덕왕후에게 능호를 올렸다.[7]

그녀의 지위는 후에 중종의 재위 기간 동안 회복되었고, 그녀의 유해는 문종 (조선)과 함께 묻히기 위해 동구릉현릉으로 옮겨졌다.[9]

원령이 되어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에게 빙의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여겨진다. 세조는 1453년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좌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1455년에는 단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의경세자가 사망한 것은 1457년 9월 2일인데 반해, 현덕왕후의 아들인 단종이 사망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반 후인 10월 24일이다.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현덕왕후의 저주로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3. 1. 폐위와 복권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阿只)[11]와 왕후의 동생 권자신이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었다. 이에 권자신과 아지는 1456년에 처형되고,[8] 단종은 1457년 7월 12일(음력 6월 21일)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11]

이미 사망한 현덕왕후와 그 아버지 권전은 아지와 권자신의 죄로 인해 연좌되었고, 권전은 1456년 8월 7일(음력 7월 7일)[11], 현덕왕후는 1457년 7월 17일(음력 6월 26일)에 각각 서인으로 격하되었다.[11] 1476년(성종 7년) 5월 8일(음력 4월 15일)에는 그 여파로 현덕왕후의 신위가 불사르게 되었다.[11]

왕비로서의 복위는 현덕왕후의 연좌제 적용이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올라온 이후 합의를 거쳐 1513년(중종 8년) 4월 17일(음력 3월 12일) 때 최종 결정되었으며,[11] 왕후의 아버지인 권전1699년(숙종 25년) 8월 10일(음력 7월 15일) 신원되었다.[11]

현덕왕후의 능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에 위치한 소릉(昭陵)이었다가, 1513년(중종 8년)에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현릉으로 옮겨 남편 문종과 합장되었다.[9]

3. 2. 현덕왕후의 저주?

야사에서는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 현덕왕후의 혼령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했고, 이로 인해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죽었다고 전한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안산에 있던 현덕왕후의 소릉(문종과 합장되기 전의 능)을 파헤치고 관은 강에다 버렸으며 그후 관속에 시신을 끄내어 토막내어 소각한 다음 강에가 뿌렸다. 현덕왕후의 신주는 종묘에서 내쳐졌고, 중종 때에 다시 왕후로 추존된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도원군이 사망한 것은 1457년 9월 20일(음력 9월 2일)이고, 단종이 사망한 것은 1457년 11월 7일(음력 10월 21일)로 오히려 도원군이 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현덕왕후의 저주가 도원군을 죽게 했다는 식의 야사의 해석은 옳지 않다. 세조는 1453년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좌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1455년에는 단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4. 가족 관계

현덕왕후의 아버지는 화산부원군 권전(1371년-1441년)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1456년)이다. 남편은 조선 제5대 국왕 문종이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1433년에 사망하였고, 차녀는 경혜공주(1435년-1473년), 장남은 단종(1441년-1457년)이다. 경혜공주의 남편은 정종이며, 그의 아들은 정미수이다. 단종의 왕비는 정순왕후이다.

colspan="2" |본관생몰년부모비고
화산부원군 권전안동1371년 - 1441년권백종
권씨
해령부부인 최씨해주?   - 1456년최용
충주 지씨
세조 2년(1456년) 처형됨



작호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12]rowspan="2" |1433년 - 1433년조졸
장녀경혜공주1435년 - 1473년영양위 정종
장남단종대왕홍위1441년 - 1457년정순왕후 송씨제6대 국왕


5. 기타

2008년 한국방송공사(KBS) 드라마 세종대왕에서 강혜인이 연기하였다. KBS 대왕세종(2008년, 배우: 강해인)과 TV조선 대군-사랑을 그리다(2018년, 배우 : 오승아)에 등장한다. 윤이수의 소설 《해시의 신루》(글공방, 2015)는 네이버 웹소설로 완결되었다.

5. 1. 대중 매체

2008년 한국방송공사(KBS) 드라마 세종대왕에서 강혜인이 연기하였다. KBS 대왕세종(2008년, 배우: 강해인)과 TV조선 대군-사랑을 그리다(2018년, 배우 : 오승아)에 등장한다. 윤이수의 소설 《해시의 신루》(글공방, 2015)는 네이버 웹소설로 완결되었다.

참조

[1] 서적 Veritable Records of Sejong, volume 51
[2] 서적 Veritable Records of Sejong, volume 59
[3] 서적 Veritable Records of Sejong, volume 75
[4] 서적 Veritable Records of Sejong, volume 93
[5] 서적 Veritable Records of Danjong, volume 3
[6] 서적 Veritable Records of Munjong, volume 2
[7] 서적 Veritable Records of Danjong, volume 11
[8] 서적 Veritable Records of Sejo, volume 8
[9] 서적 Veritable Records of Seongjong, volume 122
[10] 서적 Veritable Records of Sejong, volume 94
[11] 문서 아지(阿只)는 “아기”라는 뜻으로, 이는 곧 어머니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12] 서적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3월 3일 (병진) 동궁의 딸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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