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무라번은 헤이안 시대부터 규슈 히젠국에 기반을 둔 무가 가문인 오무라 씨가 다스린 번이다. 1562년 일본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 가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가사키를 남만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여 영지를 유지했고, 메이지 유신까지 영토 이전 없이 존속했다. 바쿠마츠 시대에는 막부 지지 세력과 천황 지지 세력으로 분열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오무라 씨는 자작, 백작으로 봉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무라씨 - 오무라 요시아키
오무라 요시아키는 1569년에 태어나 기독교 신자에서 닛렌 종으로 개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한 일본의 다이묘이다. - 오무라씨 - 아베 마사카타
아베 마사카타는 에도 시대 후기 빗추 아시다가와 번의 7대 번주로, 오무라 스미마사의 아들이자 아베 마사아키라의 양자로, 주자반을 역임했으며 아베 스케미쓰 등의 자녀를 두었다. - 히젠국의 번 - 사가번
사가번은 히젠국을 지배하며 사가성을 번청으로 둔 번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실권을 장악한 후 성립되었고, 에도 시대 나가사키 경비 부담 대신 산킨코타이 단축 특혜를 받았으며, 막말에는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주도로 근대화를 추진, 메이지 유신에는 삿초토히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 히젠국의 번 - 가라쓰번
가라쓰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임진왜란의 공으로 히젠국 마쓰우라군 일대를 받아 시작되었으나, 시마바라의 난 이후 데라자와 가문의 단절과 함께 여러 가문이 번갈아 통치하며 나가사키항 경호 역할인 나가사키 순찰역을 맡아 번주의 승진에 제약이 있었다.
오무라번 | |
---|---|
지도 | |
![]()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오무라 번 |
원래 이름 | 오무라 번 |
로마자 표기 | Ōmura-han |
국가 | 일본 |
행정 구역 | 번 |
역사 | |
시작 연도 | 1587년 |
종료 연도 | 1871년 |
통치 | |
정치 체제 | 다이묘 |
수도 | 구시마 성 |
위치 좌표 | 32°53′49.58″N, 129°57′28.38″E |
현재 위치 | |
현재 위치 | 나가사키현 |
문장 | |
![]() | |
통계 | |
기타 정보 | |
참고 자료 | 나카야마 요시아키, 에도 300번 다이젠 젠번 번주 헨센표 즈케, 2015년, 고사이도 출판, ISBN 978-4331802946 니기 겐이치, 번과 조카마치의 사전 - 국가별, 2004년, 도쿄도 인쇄, ISBN 978-4490106510 파피노, 일본 역사 및 지리 사전, 1910년, Tuttle (재판) 1972 |
2. 번의 역사
오무라 가문은 헤이안 시대 또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히젠국 지역을 다스린 영주였다. 12대 당주[15]이자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인 오무라 스미타다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장남 요시마에를 종군시켜 영지를 인정받았다. 요시마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하여 에도 막부 개부 후에도 본령을 안도받아 초대 번주가 되었다. 오무라 번은 전봉 없이 옛 영지를 그대로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한 드문 번이다. 에도 시대에도 석고에 비해 가신 수가 많았고, 막말까지도 가신의 약 2/3는 오무라가 아닌 각 향촌에 거주했다.
스미타다는 1561년에 요코세우라(나가사키현 사이카이시)와 1570년에 나가사키를 포르투갈인에게 제공하여 나가사키는 남만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580년에는 나가사키 항 주변을 예수회에 교회령으로 기증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를 중앙 정권 직할령으로 하여 무역 이윤을 상실하게 되었다.
1599년의 검지에서는 번의 석고는 2만 1427석 4두였지만, 번주 직할령은 4454석에 불과했다. 제2대 번주 오무라 스미요리는 1607년 재원 확보와 번주 권력 강화를 위해 일문의 영지를 몰수하여 번 석고의 36%인 6684석을 수납했다. 1612년 검지에서는 2만 7973석 8두 7되 7홉으로 6500석 가까이 획득했다. 1664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27900석여의 주인장을 받았다.
스미요리는 1619년 28세로 급사하여 후계자를 정하지 못해 번 존망의 위기에 빠졌다. 가로 오무라 스미카쓰는 스미요리의 아들 마쓰치요를 살리고, 1620년 마쓰치요(스미노부)의 가독 상속을 성사시켰다. 1631년 검지에서는 4만 2730석, 번주 직할령은 2만 3322석이었다. 그러나 나가사키 어용역과 에도 지출로 번 재정은 어려웠다.
스미노부의 뒤를 이은 제4대 번주 스미나가 때인 1657년, '군 붕괴'라 불리는 은둔 기리시탄 발각 사건이 발생했지만, 즉시 막부에 보고하여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 기리시탄에 대한 철저한 예방과 탐색을 실시하고, 번교 '슈기칸'을 개교했다.
1695년 검지에서는 5만 37석 9두 1되 1작이 되었고, 신전 개발은 한계에 달했다. 포경업자 후카자와 가문이 번 재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7대 번주 스미쓰네는 가신의 지행을 창미 지행으로 바꾸고 막대한 빚을 정리하여 후카자와 가문은 쇠퇴했다. 8대 스미토미는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논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 많은 오무라 번은 사쓰마 번과 함께 고구마를 도입하여 교호 대기근 피해를 줄였다. 1721년 6만 5천 명 정도였던 인구는 1856년 11만 7300명으로 1.8배 증가했다. 막말기 검지에서는 5만 9060석 7두 6되 5홉 3작 4재였다.
마지막 번주 스미히로 시대는 막말이었고, 번론은 사쿠막과 존황으로 갈라졌다. 1862년 스미히로가 나가사키 총봉행이 되자 사쿠막파가 대두했고, 존황파는 개혁파 동맹(오무라 37사)을 결성했다. 1864년 스미히로 사임으로 존황파가 대두했다. 1867년 '고지 소동'을 계기로 번론이 존황 토막으로 통일되어 토막군이 결성되었다. 이후 사쓰마 번, 조슈 번과 함께 토막의 중추 번 중 하나로서 활약했다. 도바-후시미 전투 직전, 오미국 오쓰에 가장 먼저 파견된 오무라 번의 소수 병력이 막부 측 원군의 교토 침공을 막았다. 오무라 스미히로는 유신 후 3만 석을 수급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오무라 현이 되었고, 이후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었다. 오무라 가문은 1884년 자작, 1891년 백작이 되었다.
2. 1. 초기 역사와 기독교
오무라 가문은 헤이안 시대 말기 또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히젠국 지역을 다스렸던 가문으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941년 사망)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4] 1562년, 오무라 가문은 일본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 가문이 되었다.[5][6]오무라 스미타다는 1561년에 요코세우라(현재의 사이카이시)를 포르투갈인에게, 1570년에는 나가사키를 제공하였고, 나가사키는 남만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580년, 스미타다는 나가사키 항 주변 지역을 예수회에 종교 영토로 기증하여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했다.[15]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를 중앙 정권 직할령으로 삼아, 오무라 가문은 무역 이윤을 상실하게 되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스미타다의 장남 요시아키가 참전하여 영지를 인정받았다. 요시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영지를 재확인받았다.
오무라 요시아키의 아들 스미요리는 1619년에 급사하였으나, 가신 오무라 스미카쓰의 노력으로 스미요리의 서자 마쓰치요(후의 스미노부)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1657년, 오무라 번 북부 3개 마을에서 다수의 가쿠레 기리시탄이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이를 '군 붕괴'라고 부르며, 기독교금교령 이후 45년 만에 발생한 사건으로 번의 존립을 위협했다. 그러나 번은 즉시 막부에 보고하여 처벌을 면했다. 이후 기독교에 대한 철저한 예방과 탐색을 실시하고, 영민에게 불교와 신도 신앙을 강화했다. 또한 번교 슈기칸을 개교했는데, 이는 규슈에서 가장 먼저, 전국에서는 7번째로 설립된 번교였다.
2. 2.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 막부
오무라 스미타다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아들 오무라 요시아키를 파견하여 지원했다.[4] 도요토미 정권은 오무라 가문에 북부 규슈 대부분의 영토를 인정했지만, 나가사키 항을 직접 통제하게 되면서 무역 이익을 잃게 되었다.[4] 요시아키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 편에 서서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영지를 재확인받았다.[4]오무라 스미타다는 1561년에 요코세우라, 1570년에 나가사키를 포르투갈인에게 제공했고, 이후 나가사키는 남만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580년에는 나가사키 항 주변을 예수회에 교회령으로 기증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를 중앙 정권 직할령으로 삼아, 오무라 가문은 무역 이윤을 상실하게 되었다.
1599년 검지에서 번의 석고는 2만 1427석 4두였지만, 번주 직할령은 4454석에 불과했다. 반면 오무라 서가 일문 15가의 영지 합계는 8000여 석에 달했다. 제2대 번주 오무라 스미요리는 1607년, 재원 확보와 번주 권력 강화를 위해 '어일문납'이라 불리는 일문의 영지 몰수를 강행하여 번 석고의 36%에 해당하는 6684석을 수납했다. 1612년 검지에서는 2만 7973석 8두 7되 7홉으로 6500석 가까이 획득했다. 이 검지에 기초하여 1664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지행지의 표고를 27900석여로 하는 주인장을 받았다.
스미요리는 1619년에 28세로 급사했고, 후계자가 없어 번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스미요리는 생전에 아이를 낙태하라고 명령했지만, 가로 오무라 스미카쓰는 몰래 아이를 출산시켜 마쓰치요를 살렸다. 오무라 가문은 스미요리가 마쓰치요를 말기 양자로 맞이한 것처럼 꾸며 1620년 5월에 마쓰치요(스미노부)의 가독 상속을 얻어냈다. 1631년 검지에서는 4만 2730석을 기록했고, 번주 직할령도 2만 3322석에 달했다. 그러나 나가사키 주둔 비용과 에도에서의 지출로 인해 번 재정은 어려움을 겪었다.
스미노부도 병약하여 이타미 가쓰나가의 넷째 아들 곤키치를 양자로 맞이하려 했으나, 스미노부 사망 시점까지 양자 피로연은 끝나지 않았다. 곤키치는 스미노부의 말기 양자로 맞이해졌고, 이타미 가쓰나가의 노력으로 후계자 상속이 인정되어 제4대 번주 스미나가가 되었다. 1657년, '군 붕괴'라 불리는 은둔 기리시탄 발각 사건이 발생했지만, 번주의 생부 이타미 가쓰나가를 통해 막부에 즉시 보고하고 항복하여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 기리시탄에 대한 철저한 예방과 탐색을 실시하고, 영민에게 불교와 신도 신앙을 강화했다. 또한 번교인 '슈기칸'을 개교했는데, 이는 규슈 지방에서 가장 먼저, 전국에서도 7번째였다. 이타미 가쓰나가와의 인연으로 후다이 다이묘에 가까운 대우를 받게 되었다.
1695년 검지에서는 5만 37석 9두 1되 1작이 되었고, 신전 개발은 한계에 다다랐다. 번내의 포경업자 후카자와 가문은 여러 번 오무라 번에 빚을 졌고, 번사 대우를 받으며 한때 번주의 의향을 넘어선 권세를 보였다. 7대 번주 스미쓰네는 가신의 지행을 창미 지행으로 하고 막대한 빚을 정리했다. 후카자와 가문은 쇠퇴했고, 오히려 번의 비호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8대 스미토미는 아버지의 의향을 이어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논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 많은 오무라 번은 사쓰마 번과 함께 18세기 전반에 고구마를 일상 식재료로 도입하여 교호 대기근의 피해를 비교적 가볍게 넘겼다. 고구마의 주식화로 오무라 번의 식량 사정이 좋아져, 1721년에 6만 5천 명 정도였던 인구는 1856년에 11만 7300명으로 1.8배 증가했다. 막말기의 검지에서는 5만 9060석 7두 6되 5홉 3작 4재였다.
마지막 번주인 제12대 번주 스미히로 시대는 막말이었고, 번론은 사쿠막과 존왕으로 크게 갈라졌다. 1862년, 스미히로가 나가사키 총봉행이 되자 사쿠막파가 대두했고, 존황파는 개혁파 동맹(오무라 37사)을 결성했다. 1864년, 스미히로의 나가사키 총봉행 사임으로 존황파가 대두했다. 1867년, '고지 소동'이라 불린 투쟁을 계기로 번론이 존황 토막으로 통일되었고, 토막군이 결성되었다. 이후 사쓰마 번, 조슈 번과 함께 토막의 중추 번 중 하나로서 활약했다. 특히 도바-후시미 전투 직전, 오미국 오쓰를 지키기 위해 오무라 번이 50명으로 소수이지만 가장 먼저 오쓰에 병사를 파견하여 막부 측 원군의 교토 침공을 막았다. 오무라 스미히로는 유신 후 3만 석을 수급했는데, 이는 사쓰마 번, 조슈 번의 10만 석, 도사 번의 4만 석에 이어 두 번째였다.
2. 3. 번정 개혁과 경제 발전
오무라 스미타다는 1561년 요코세우라(현재의 사이카이시)와 1570년 나가사키를 포르투갈인에게 제공하여, 나가사키는 남만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580년에는 나가사키 항 주변을 예수회에 기증했다.[5][6]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이후 나가사키 항은 도요토미 정권 직할령이 되어 오무라 번은 무역 이익을 상실했다.[4]1631년 토지 조사에서 실제 고쿠다카(생산량)는 42,730석이었지만, 번의 직접적인 고쿠다카는 23,322석이었다. 번은 나가사키 주둔 비용과 에도 비용으로 재정 압박을 받았다.
1657년 번 북부 3개 마을에서 가쿠레 기리시탄이 다수 체포되었다. 이는 기독교 금지령 후 45년 만의 일로 번 존립을 위협하는 사건이었으나, 번이 즉시 막부에 보고하여 처벌은 피했다.
논 경작 부적합 지형이 많은 오무라 번은 18세기 전반 사쓰마 번과 함께 고구마를 도입, 교호 대기근 피해를 줄였다. 1721년 오무라 번 인구는 약 65,000명이었으나, 1856년 117,300명으로 1.8배 증가했다.[16]
2. 4. 막말과 메이지 유신
바쿠마츠 시대 오무라번은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크게 분열되었다.[7] 1862년, 마지막 다이묘 오무라 스미히로가 나가사키 부교가 되자, 친막부파가 권력을 잡았고, 친천황파는 "개혁 동맹"을 결성했다.[7] 1864년, 스미히로는 나가사키 부교직에서 사임했고, 친천황파가 대신 권력을 잡았다.[7] 1867년, 개혁 동맹의 지도자인 마쓰바야시 이이야마가 암살당하고, 하리오 쿠자에몬이 중상을 입었다.[7] 이 사건은 번의 여론을 친천황파와 반막부파로 통일시켰고, 반막부 군대가 결성되었다.[7]이후 사쓰마번, 조슈번과 함께 오무라는 막부 전복의 중심적인 씨족 중 하나로서 활발한 역할을 했다.[7] 특히 도바-후시미 전투 직전, 오무라 번은 오미국 오쓰시에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비록 50명에 불과한 소규모 부대였지만, 이 부대는 막부의 증원군이 교토를 침공하는 것을 막았다.[7] 메이지 유신 이후, 오무라 스미히로는 30,000 코쿠의 증가를 받았는데, 이는 사쓰마, 조슈 번의 100,000 ''코쿠''와 도사번의 40,000 ''코쿠''에 이어 두 번째였다.[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번치현으로 오무라는 "오무라 현"이 되었고, 나중에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다. 오무라 씨는 1884년 화족 제도를 통해 자작이 되었다. 나중에 막부 전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891년에 백작으로 승진했다.[7][8]
마지막 번주인 제12대 번주・스미히로가 번주가 된 시대는 막말이었고, 번론은 사쿠막과 와타나베 노보루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존황으로 크게 갈라졌다. 분큐 2년(1862년), 스미히로가 나가사키 총봉행이 되자 사쿠막파가 대두했고, 존황파는 이에 대해 개혁파 동맹(오무라 37사)을 결성했다. 겐지 원년(1864년), 스미히로의 나가사키 총봉행 사임으로 인해 반대로 존황파가 대두했다.[17] 게이오 3년(1867년), 개혁파 동맹의 맹주인 마쓰바야시 한잔이 암살되고, 하리오 구자에몬도 중상을 입었다. 이 「고지 소동」을 계기로 번론이 일시에 존황 토막으로 통일되었고, 재향 가신단을 포함한 토막군이 결성되었다. 이후, 사쓰마 번・조슈 번 등과 함께 토막의 중추 번 중 하나로서 활약했다. 특히 도바・후시미 전투 직전, 오미국 오쓰를 지키기 위해 오무라 번이 50명으로 소수이면서 가장 먼저 오쓰에 병사를 파견한 것이 막부 측의 원군의 교토 침공을 막게 되었다.[18] 오무라 스미히로는 유신 후의 상전록으로서 3만 석을 수급했지만, 이는 사쓰마 번・조슈 번의 10만 석, 도사 번의 4만 석에 이은 것으로, 사가 번의 2만 석을 상회하고 있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오무라 현이 되었다. 이후,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다. 오무라 가문은 메이지 17년(1884년)에는 자작이 되었고, 화족에 열했다. 그 후, 토막의 공이 인정되어, 메이지 24년(1891년)에는 백작으로 승작한다.
3. 역대 번주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비고 | |
---|---|---|---|---|
1 | 오무라 요시아키(ja) | 1587년 ~ 1616년 | 종5위하 탄고노카미(丹後守) | |
2 | 오무라 스미요리(ja) | 1616년 ~ 1619년 | 종5위하 민부다이스케(民部大輔) | |
3 | 오무라 스미노부(ja) | 1620년 ~ 1651년 | 종5위하 탄고노카미(丹後守) | |
4 | 오무라 스미나가(ja) | 1651년 ~ 1706년 | 종5위하 이나바노카미(因幡守) | |
5 | 오무라 스미마사(ja) | 1706년 ~ 1712년 | 종5위하 지쿠고노카미(筑後守) | |
6 | 오무라 스미쓰네(ja) | 1712년 ~ 1727년 | 종5위하 이세노카미(伊勢守) | |
7 | 오무라 스미히사(ja) | 1727년 ~ 1748년 | 종5위하 가와치노카미(河内守) | |
8 | 오무라 스미모리(ja) | 1748년 ~ 1761년 | 종5위하 단조쇼스케(弾正少弼) | |
9 | 오무라 스미야스(ja) | 1761년 ~ 1803년 | 종5위하 시나노노카미(信濃守) | |
10 | 오무라 스미요시(ja) | 1803년 ~ 1836년 | 종5위하 탄고노카미(丹後守) | |
11 | 오무라 스미아키(ja) | 1835년 ~ 1847년 | 종5위하 탄고노카미(丹後守) | |
12 | 오무라 스미히로(ja) | 1847년 ~ 1871년 | 종5위하 탄고노카미(丹後守) | 유신 이후 종3위, 사후 종2위 추증[11] |
4. 주요 인물
- 구스모토 마사타카
- 와타나베 기요시
- 와타나베 노보루
- 나가요 센사이
5. 오무라 번을 소재로 한 작품
- 마쓰나가 고이치의 『천정의 무지개』 (파라오 기획, 1991년) ISBN 4894091062
- 무라키 아란의 『마르가리타』 (분게이슌주, 2010년), 제17회 마쓰모토 세이초 상 수상작
6. 오무라 번의 영지
오무라번은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 농업 수확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여러 개의 단절된 영토로 구성되었다.[9][10]
오무라 번의 영지는 다음과 같다.
7. 오무라 가문의 묘소
오무라시 후루마치 지역, 오무라 만으로 흘러드는 다이조고 강 오른편에 있는 닛렌종 사찰인 혼쿄지(本経寺)는 오무라 가문의 보디지이다. 이곳은 구시마 성 아래 마을 북쪽의 나가사키 가이도 도로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오무라 스미타다의 지휘 아래, 오무라 가문은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가문 중 하나였으며, 그의 아들 오무라 요시아키와 함께 영지 내의 불교 사찰과 신사를 파괴했다. 그는 또한 1582년 덴쇼 소년사절단을 유럽으로 보내는 것을 후원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기독교를 금지하고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가혹한 처벌을 내리자, 오무라 요시아키는 신앙을 버렸고 1605년에 이 사찰의 건설을 명했다. 사찰은 1608년에 완공되었다. 1615년 사망 후, 그는 본당 남서쪽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이 묘지는 11대 오무라 스미아키까지 오무라 번의 모든 다이묘와 그들의 부인, 첩, 자녀들의 묘, 그리고 영지의 가로로 봉사했던 마쓰라 씨 가문의 많은 구성원들의 묘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오무라 요시아키와 오무라 스미요리의 묘는 묘지 북동쪽에서 남동쪽을 향하도록 지어졌으며, 3대에서 6대 다이묘의 묘는 중앙의 열린 광장을 가로질러 이 두 묘를 향하도록 건설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더는 공간이 없어, 열린 광장은 9대, 10대, 11대 다이묘의 묘로 채워졌다.
이 묘지는 갓토바, 고린토 등 다양한 양식의 묘비가 많기로 유명하다. 2004년에는 大村藩主大村家墓所|오무라 번주 오무라 씨 묘소일본어라는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JR 큐슈 오무라 선의 스와역에서 차로 약 5분 거리에 있다.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al dictionary of Japan
https://archive.org/[...]
New York; F. Ungar Pub. Co.
[5]
뉴스
Monk inserts Buddhist deity into Madonna and Child work
https://www.asahi.co[...]
2023-12-09
[6]
웹사이트
The Arrival and Flourishing of Christianity
https://oratio.jp/mo[...]
World Heritage Division, Nagasaki Prefectural Government
[7]
서적
戦国武将名言録
PHP Institute
[8]
서적
江戸三百藩 藩主総覧 歴代藩主でたどる藩政史
Bessatsu History Reader 24 Edo 300 Domains
[9]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0]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1]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13-06-02
[12]
서적
A Companion to the Early Modern Catholic Global Missions
https://books.google[...]
BRILL
[13]
웹사이트
大村藩主大村家墓所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3-12-20
[14]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15]
문서
楠戸 P425
[16]
서적
近世庶民の日常食:百姓は米を食べられなかったか
海青社
[17]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18]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八木書店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