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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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미국은 713년 일본 휴가국에서 분리되어 성립된 옛 행정 구역이다. 현재의 가고시마현 동부, 야쿠시마, 타네가시마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8세기 초 하야토족의 저항이 있었고, 헤이안 시대에는 남쪽 부족의 침략과 다자이후 관리들과의 분쟁을 겪었다. 에도 시대에는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았으며, 메이지 시대에 아마미 제도가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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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국은 현재의 도쿄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에 걸쳐 있던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게노국과 통합되어 성립되었으며, 중세에는 무사 집단이 등장했고 근세에는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3개 현으로 나뉘었다. - 율령국 - 사도국
사도국은 7세기 후반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설치된 행정 구역으로, 여러 군으로 구성되어 에치고국에 병합되기도 하고 독립하기도 하였으며, 막부 시대에는 수호가 파견되는 등 다양한 시설과 관직이 존재했다.
오스미국 | |
---|---|
지도 | |
![]() | |
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Ōsumi no Kuni |
소속 | 서해도 |
영역 | 가고시마현 동부, 오스미 제도 |
국력 | 중국 |
거리 | 원국 |
군 | 8군 37향 |
국부 | 가고시마현 기리시마시 |
국분사 | 가고시마현 기리시마시 (오스미 국분사 유적) |
국분니사 | (미상) |
이치노미야 | 가고시마 신궁 (가고시마현 기리시마시) |
한국어 이름 | 오스미국 |
일본어 가나 표기 | おおすみ の くに |
로마자 가나 표기 | Ōsumi no Kuni |
역사 | |
설치 년도 | 713년 |
폐지 년도 | 1871년 |
현재 | 가고시마현 |
주요 도시 | |
수도 | 고쿠부, 가고시마 |
2. 역사
7세기 중기 이후 율령제의 성립과 함께 현재의 가고시마현 본토 부분과 미야자키현을 포함한 광역에 히무카국이 성립했다.[12] 다이호 2년(702년) 8월 1일에 일어난 사쓰마·타네의 반란을 계기로[13], 같은 해 히무카국을 나누어 쇼코쿠·타네국이 분립했다. 그 흐름 속에서 와도 6년(713년) 4월 3일, 히무카국의 키바스군, 오오군, 오스미군, 아이라군의 4군, 현재 가고시마현 본토의 동부가 오스미국으로 분립한 것이 오스미국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수년 내에, 오오군을 나누어 쿠와하라군(아이라군 유스이정 주변)이, 덴표쇼호 7년(755년)에 다시 오오군을 나누어 히시카리군이 설치되어 6군이 된다.
덴쵸 원년(824년) 10월 1일에 현재의 야쿠시마와 타네가시마에 해당하는 타네국을 합쳤다. 이때, 4군이었던 타네국의 군은 2군으로 통합되어 결과적으로 오스미국은 8군이 된다.
헤이안 시대에는 쇼엔의 발전으로 아이라군(현재의 카노야시 주변. 현재의 아이라군은 별개)이 그 실질적인 기능을 잃고 키바스군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12년(1879년), 아마미 군도(오시마군)를 편입했다.[14] 메이지 30년(1897년)에는 현재의 미시마촌, 토시마촌 지역이 사쓰마국가와베군에서 오시마군으로 편입되었다.[15] 단, 현재의 미시마촌·토시마촌 지역은 쇼와 48년(1973년)에 가고시마군으로 이관되어, 구국의 명칭이 폐지된 지 오래되었지만, 사쓰마국으로 돌아가 있다.
『고사기』의 국가 탄생 신화에서는 쓰쿠시섬(규슈)의 4면에 쓰쿠시국, 부국, 히국, 구마소국이 보인다.[10]
고대 남규슈는 『고사기』, 『일본서기』의 “히무카 신화”라고 불리는 신화의 무대가 되었다.[11] 이 중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가 다카치호에 강림하고( 천손강림), 그의 아들 호오리가 형 호데리를 벌했다는 내용과 함께 형의 자손인 하야토가 지금도 천황을 섬기는 유래를 밝히고( 산노코히코와 우미노코히코), 호오리의 아들 우가야후키아에즈는 초대 천황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신무천황)의 아버지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후에 신무천황은 히무카에서 동정에 나선다(신무동정).
현재, 이러한 히무카 신화는 역사적 사실 그대로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특히 『고사기』, 『일본서기』가 성립할 때까지, 즉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의 남규슈에서의 하야토에 대한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지적된다.[11] 하야토가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덴무 천황 시대부터이며, 7세기 말부터 8세기 전기에 4번의 반란을 일으켰다.[11] 그리고 천황가에 의한 남규슈에서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하야토가 복속해야 하는 이유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2. 1. 고대
701년 율령(律令)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 오스미(大隅)는 구마소(熊襲)족의 거점이었다. 구마소족은 오스트로네시아계 부족으로, 전설적인 장군 야마토 타케루(大和武邇)에 의해 정복되었다(『고사기(古事記)』과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름). 이들의 땅은 소쿠니(襲国) 또는 소노쿠니(曾国)라고 불렸다.[2] 그러나 이 지역은 국경 지대였으며, 휴가국의 일부로 통치되었다.[2]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와 초기 나라 시대(奈良時代) 동안에는 하야토(隼人)족의 야마토 지배에 대한 저항이 지속되었고, 많은 하야토족이 부젠과 휴가 북부에서 쫓겨나 오스미로 이주하였다.[2]오스미는 713년 휴가국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국으로 되었다.[2] 720년 하야토족은 하야토의 난(隼人の乱)을 일으켜 저항했지만, 721년 오토모노 타비토(大伴旅人)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2] 800년 그들의 땅에 반전수주 제도가 시행되었다.[2] 8세기 초 가고시마현(鹿児島県)의 야마토 이민자 수는 약 9,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7분의 1로 추산된다.[3] 이 추산에 따르면 당시 하야토 인구는 약 54,000명으로 계산된다.[3] 많은 하야토인이 키나이(畿内)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궁궐 경비, 예술, 스모(相撲), 대나무 공예 등에 종사하였다.[2] 824년에는 다네(多禰)국이 폐지되어 오스미국에 편입되었다.[2]
오스미국의 국부(国府)는 현재 가고시마시(鹿児島市) 고쿠부 지역에 설치되었지만, 유적은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았다.[2] 그러나 인근에 있었던 오스미 고쿠분지(大隅国分寺) 유적은 알려져 있다.[2] 오스미국의 일궁(一宮)은 가고시마 신사(鹿児島神社), 즉 오스미 쇼 하치만구(大隅小八幡宮)이다.[2]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남쪽의 부족(류큐 열도(琉球列島)나 타이완(台湾)일 가능성이 있음)의 침략을 종종 받았다. 또한 다자이후의 중앙 정부 관리들과의 분쟁에도 휘말렸다.[2] 1007년 국사(國司) 간노 시게타다(菅野重忠)가 다자이후 관리에 의해 살해되었고, 1029년 다자이후의 관리이자 시마즈 쇼엔의 지배자였던 다이라 키모토(平基元)가 오스미 국부를 불태웠다.[2] 시마즈 쇼엔은 이러한 분쟁을 이용하여 남쪽 섬과의 무역을 장악하고 오스미 내의 영토를 병합하였다.[2] 그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 쇼 하치만구의 반대에 부딪혔고, 세속적 문제와 종교적 문제 모두에 대해 우사 하치만구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2] 따라서 헤이안 후기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까지 오스미국은 시마즈 씨(島津氏)와 쇼 하치만구와 관련된 소규모 영주들의 지배 하에 분열되었다.[2]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시마즈 씨는 점차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였다.[2]
2. 2. 중세
701년 율령(律令)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 오스미(大隅)는 구마소(熊襲)족의 거점이었으며, 이들은 야마토 타케루(大和武邇)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소쿠니(襲国) 또는 소노쿠니(曾国)라고 불렸으나, 국경 지대로서 휴가(日向)국의 일부로 통치되었다.[2]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와 초기 나라 시대(奈良時代) 동안 하야토(隼人)족의 저항이 지속되었고, 많은 하야토족이 오스미로 이주하였다. 713년 오스미는 휴가국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국이 되었으며,[2] 720년 하야토의 난(隼人の乱)이 일어났지만 721년 진압되었다. 800년에는 반전수주 제도가 시행되었다.[3] 8세기 초 야마토 이민자 수는 약 9,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7분의 1로 추산되며,[3] 하야토 인구는 약 54,000명으로 계산된다. 많은 하야토인이 키나이(畿内) 지역으로 이주하여 궁궐 경비, 예술, 스모(相撲), 대나무 공예 등에 종사하였다. 824년에는 다네(多禰)국이 오스미국에 편입되었다.오스미국의 국부(国府)는 현재 가고시마시(鹿児島市) 고쿠부 지역에 설치되었고, 오스미 고쿠분지(大隅国分寺) 유적이 알려져 있다. 일궁(一宮)은 가고시마 신사(鹿児島神社)(오스미 쇼 하치만구)이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남쪽 부족의 침략과 다자이후 관리들과의 분쟁을 겪었다. 1007년 국사(國司) 간노 시게타다(菅野重忠)가 살해되었고, 1029년 다이라 키모토(平基元)가 오스미 국부를 불태웠다. 시마즈 쇼엔은 이러한 분쟁을 이용하여 남쪽 섬과의 무역을 장악하고 영토를 병합하였으나, 우사 하치만구와 갈등을 빚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까지 오스미국은 시마즈 씨(島津氏)와 소규모 영주들의 지배 하에 분열되었으며,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시마즈 씨가 점차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였다.
2. 3. 근세
오스미는 에도 시대 내내 사쓰마 번의 시마즈 씨의 지배를 받았다.[4] 1871년 8월 29일 판적봉환으로 가고시마 현의 일부가 되었다.[4] 1879년에는 아마미 제도가 가고시마현 오시마군에 편입되어 옛 오스미 국의 일부로 간주되었다.[4]초기 메이지 시대의 ''규다카큐료토리시라베초/旧高旧領取調帳일본어''(구고구령취조장)에 따르면, 오스미 국은 총 262,168 곡고를 가진 248개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군 | 곡고 | 마을 수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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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ang|ja|아이라군|姶良郡|} | } || 41,705 곡(koku) || 38개 마을 || 1896년 3월 29일 쿠와바라 군과 니시소 군을 병합
이름 | 씨족 | 유형 | 곡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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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 외번 | 262,168 곡(koku) | |
1891년 4월 1일에는 옛 휴가 국의 히가시히쓰기 군과 미나모리 군이 옛 사쓰마 국의 일부였던 토카라 제도와 함께 옛 오스미 국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미시마 마을과 도시마 마을 지역은 1973년에 가고시마 군으로 이관되어 옛 사쓰마 국으로 돌아갔다.[4]
2. 4. 근대
오스미는 에도 시대 내내 사쓰마 번의 시마즈 씨의 지배를 받았다.[4] 바쿠마쓰 시대에 사쓰마 번은 외번으로 262,168 곡고를 가지고 있었다.이름 | 씨족 | 유형 | 곡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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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 시마즈 | 외번 | 262,168 곡(koku) |
메이지 시대 초기의 旧高旧領取調帳, Kyudaka kyuryo Torishirabe-chō일본어에 따르면, 오스미 국은 총 262,168 곡을 가진 248개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군 | 곡고 | 마을 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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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ang|ja|아이라군|姶良郡 | } | } || 41,705 곡 || 38개 마을 || 1896년 3월 29일 쿠와바라 군과 니시소 군을 병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