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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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카야마번은 오카야마성을 중심으로, 우키타 히데이에가 축성한 후 여러 다이묘 가문을 거쳐 메이지 시대까지 존속한 번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영지를 받았으나, 후손 없이 사망하여 이케다씨가 오카야마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케다 테루마사의 차남인 이케다 타다쓰구가 입봉하여 38만 석 규모로 성장했으나, 타다쓰구 사후 돗토리번으로 이봉되었고, 사촌인 이케다 미쓰마사가 오카야마번을 다스리며 번교 설립, 코라쿠엔 조성 등 치적을 남겼다. 막부 말기에는 존왕양이 사상을 따랐으나, 보신 전쟁에서 막부 타도를 지지하며 이케다 아키마사가 번주가 되었다. 폐번치현으로 오카야마현이 되었고, 이케다가는 후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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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야마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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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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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오카야마 번 |
로마자 표기 | Okayama-han |
소속 국가 | 일본 |
하위 행정 구역 | 번 |
위치 | 비젠국, 빗추국 일부 |
현재 위치 | 오카야마현 |
존속 기간 | 1600년 ~ 1871년 |
시대 | 에도 시대 |
수도 | 오카야마 성 |
주요 가문 | 이케다 씨 |
문장 | 이케다 씨의 문장 |
역사 | |
시작 | 1600년 |
종말 | 폐번치현 |
폐지 사건 | 판적봉환 |
참고 자료 | |
참고 도서 | 나카야마 요시아키, 『에도 300번 다이젠 전번 번주 변천표부』, 2015 니기 켄이치, 『번과 성시의 사전 - 국가별』, 2004 파피노, E. 『일본 역사 및 지리 사전』, 1910 |
기타 | |
관련 항목 | 가모가타 번 이쿠사카 번 |
다른 이름 | 비젠 번 |
일본어 표기 | 오카야마 번 |
2. 번의 역사
오카야마번은 센고쿠 시대 우키타 히데이에의 지배를 거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1603년부터 히메지번주 이케다 테루마사의 아들들이 차례로 번주가 되며 이케다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번주 교체와 고쿠다카 조정이 있었으나, 1632년 돗토리번에서 이케다 미츠마사가 입봉한 이후 그의 가계가 메이지 유신까지 안정적으로 오카야마번을 다스렸다. 이케다 가문 통치 하에 오카야마번은 번교 설립, 고라쿠엔 조성 등 학문과 문화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막말의 정치적 격변기를 거쳐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고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다.
2. 1. 에도 시대 이전
센고쿠 시대 동안 오카야마는 우키타 히데이에가 지배했다. 우키타씨는 오카야마성을 거점으로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오대로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1600년(게이초 5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주력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다(개역).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을 배신하여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우키타의 옛 영지인 비젠과 미마사쿠 51만 석을 주어 오카야마번에 봉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1602년(게이초 7년) 10월 18일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코바야카와 가문은 단절되었다.
1603년(게이초 8년), 히메지번주 이케다 테루마사의 차남 이케다 타다츠구가 28만 석으로 오카야마에 입봉하면서 에도 시대 오카야마번 이케다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1613년(게이초 18년)에는 약 10만 석이 추가되어 38만 석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615년(겐나 원년) 타다츠구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자 아와지국 유라성주였던 이케다 타다오가 31만 5천 석으로 뒤를 이었다.
1632년(간에이 9년) 타다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이케다 미츠나카가 번주가 되었으나, 도쿠가와 막부는 미츠나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산요도의 중요한 거점인 오카야마를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돗토리번으로 전봉시켰다. 대신 미츠나카의 사촌이자 이전 돗토리 번주였던 이케다 미츠마사가 31만 5천 석으로 오카야마에 입봉하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미츠마사의 가계가 오카야마번을 다스리게 된다.
이처럼 이케다 가문, 특히 타다츠구와 타다오 형제가 막부로부터 우대를 받은 배경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 토쿠히메가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시집가서 타다츠구와 타다오가 이에야스의 외손자가 되었던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2. 2. 이케다 가문 통치 시기
센고쿠 시대의 우키타 히데이에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몰수당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오카야마를 다스렸으나, 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1603년 히메지번주 이케다 테루마사의 차남 이케다 타다츠구가 28만 석으로 오카야마에 봉해지면서 이케다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1613년에는 약 10만 석이 가증되어 38만 석이 되었으나, 타다츠구는 1615년 후사 없이 사망했다. 그의 동생인 아와지국(아와지섬) 유라성주 이케다 타다오가 31만 5천 석으로 뒤를 이었다.1632년 타다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케다 미츠나카가 상속했지만, 도쿠가와 쇼군가는 미츠나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산요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오카야마를 맡기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돗토리번으로 이봉시켰다. 대신 이전 돗토리 번주였던 미츠나카의 사촌 이케다 미츠마사가 31만 5천 석으로 오카야마에 입봉했고,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미츠마사의 가계가 오카야마번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케다 가문이 막부로부터 우대를 받은 배경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 토쿠히메가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시집가 타다츠구와 타다오가 이에야스의 외손자였던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츠마사는 1644년 도쿠가와씨의 직할령 외 지역에서는 최초로 도쇼구(타마이구 도쇼궁) 건설 허가를 받았다. 그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미츠쿠니, 아이즈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와 더불어 에도 시대 초기의 3대 명군으로 꼽힌다. 미츠마사는 요메이가쿠 학자 쿠마자와 반잔을 등용하여 1669년 일본 최초의 번교인 오카야마 학교를 설립했고, 1670년에는 서민을 위한 학교인 시즈타니 학교 (강당은 현재 국보)를 열었다. 또한 쓰다 에이츄를 등용하여 간척 사업과 아사히가와의 방수로인 햐쿠켄가와 개착 등 치수 사업에도 힘썼다.
미츠마사의 아들인 다음 번주 이케다 츠나마사는 1700년 가이라쿠엔, 겐로쿠엔과 함께 일본 3대 정원으로 불리는 다이묘 정원인 고라쿠엔을 완성시켰다.
막말 시기에는 9대 번주 이케다 시게마사가 번을 다스렸다. 그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홉 번째 아들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그는 고부갓타이 정책을 지지하며 쇼군가와 조정의 통합을 추구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시게마사는 은퇴하였고, 대신 지번인 가모가타 번주 이케다 마사아키(오카야마 번주가 되어 아키마사로 개명)가 번주가 되어 막부 타도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시기 오카야마번은 고베 사건에 휘말려 막 출범한 메이지 정부의 초기 외교적 난제 해결에 관여하게 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오카야마번은 오카야마현의 일부가 되었고, 번지사 이케다 아키마사는 면관되었다. 이후 이케다 가문은 1884년 화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받았다.
3. 역대 번주
池田忠継|이케다 다다쓰구일본어

池田忠雄|이케다 다다카쓰일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