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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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요토미 씨는 농민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창시한 씨족으로, 일본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는 간파쿠 취임 후 후지와라 씨에서 도요토미 씨로 성을 바꾸었고, 자신의 가신들에게도 이 성을 하사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관위 서임은 히데요시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도요토미 씨는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씨는 쇠퇴했지만, 그의 정실 부인과 그 자손들은 도요토미 씨를 유지하며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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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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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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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도요토미 |
로마자 표기 | Toyotomi |
본거지 | 여러 지역 |
작위 | 간파쿠 태정대신 |
창시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마지막 통치자 | 도요토미 히데요리 |
설립 연도 | 1585년 |
해체 연도 | 1615년, 오사카 전투 |
씨족 정보 | |
씨족명 | 도요토미 씨 |
씨성 | 도요토미 아손 |
출자 | (자칭) 후지와라 씨 |
씨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인물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나가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요토미 히데요리 |
후예 | 하시바 씨(무가・공가) 기노시타 씨(무가 → 화족) |
2. 도요토미 씨의 기원과 성립
히데요시는 1585년 간파쿠에 취임하면서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 씨를 사용했다. 이듬해인 1586년에는 새로운 성(氏)인 '도요토미'를 만들었다.[2] 히데요시는 자신의 서기관인 오무라 유코에게 『임관지사』(『관백임관기』)를 집필하게 했는데, 여기서 "옛 성을 잇는 것은 사슴과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다"며 전례 답습을 거부하고, "나는 천하를 보전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 새 성을 정하고 濫觴(람상: 시초)이 되리라"고 하며, 자신이 겐, 평, 후지, 귤에 필적하는 다섯 번째 새로운 씨를 창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
도요토미로 성을 바꾼 정확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오시코지 가 문서에는 1585년 9월 9일 자로 개성을 허가하는 선지가 있지만, 『공경보임』에는 1586년에 후지와라 성에서 도요토미 성으로 고쳤다는 주석이 있고, 1587년부터 "도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기록되어 있다. 히데요시가 날짜를 조작하는 문서를 위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구게(공가)들도 천황에게 날짜를 거슬러 문서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오시코지 가 문서』의 선지도 이와 유사한 성질의 것으로 보인다. 통설로는 1586년 12월 19일 태정대신 임관을 계기로 도요토미 씨로 개성한 것으로 본다.[2]
2.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신과 초기 이력
히데요시는 씨(氏)는커녕 성(姓)도 가지지 못할 정도로 하층 계급 출신이었지만, 입신양명하여 가계를 칭할 필요가 생기자 평씨를 칭했다. 이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공경보임』 덴쇼 11년(1583년) 조항에 "종4위하 참의"로 처음 기재된 이후, 간파쿠가 되기 직전인 덴쇼 13년(1585년) "정2위 내대신"까지, 그 씨는 일관되게 "'''평''' 히데요시"로 기록되어 있다.[12]덴쇼 13년(1585년) 7월, 간파쿠 서임 때 전 간파쿠 고노에 사키히사의 유자가 되어 씨를 평에서 '''후지와라'''로 고쳤다.
다음 해 덴쇼 14년, 히데요시는 씨를 "도요토미"로 고친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우필인 오무라 요시코에게 집필시킨 『임관지사』(별명 『관백임관기』)에서는 "옛 성을 잇는 것은 사슴과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다"며 전례 답습을 거부하고, "나는 천하를 보전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 새 성을 정하고 濫觴(람상: 시초)이 되리라"고 하며, 자신이 겐평후지귤에 필적하는 다섯 번째 새로운 씨를 창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국무오시코지 가에 전해진 『오시코지 가 문서』에는 "후지와라 성을 도요토미 성으로 고치기를 청한다"는 히데요시의 상소문과, 덴쇼 13년(1585년) 9월 9일자 개성을 허가하는 선지가 있다. 『공경보임』 덴쇼 14년(1586년) 조항에는 히데요시에 대해 "후지 히데요시"(후지와라 히데요시)라고 기재한 뒤 "후지와라 성을 고쳐 도요토미 성이 되었다고 한다"고 주석을 달았다. "——"는 "월일 불명"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개성은 덴쇼 14년(1586년)에 이루어진 셈이다. 『공경보임』에서 히데요시가 "도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것은 덴쇼 15년(1587년)부터이다. 히데요시의 관위 서임에 대해서는 덴쇼 10년(1582년) 10월 3일 임 좌근위 소장, 덴쇼 11년(1583년) 5월 22일 임 참의 등, 이를 나타내는 문서는 남아 있지만, 후일 날짜를 가공하여 위작했다고 여겨지는 것이 적지 않다. 당시 히데요시에게 날짜 조작 문서를 위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공가들도 천황에게 날짜를 거슬러 문서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오시코지 가 문서』의 상소문과 선지도 이와 유사한 성질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후지와라 씨에서 도요토미 씨로 개성한 것은 덴쇼 14년(1586년) 12월 19일 태정대신임관을 계기로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2]
2. 2. 도요토미 씨 성 하사
히데요시는 씨(氏)는커녕 성(姓)도 가지지 못할 정도로 하층 계급 출신이었지만, 입신양명하여 가계를 칭할 필요가 생기자 평씨를 칭했다. 이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모방한 것으로 여겨지며, 『공경보임』의 덴쇼 11년(1583년) 조항에 "종4위하 참의"로 처음 기재된 이후, 간파쿠(관백)가 되기 직전인 덴쇼 13년(1585년)의 "정2위 내대신"까지, 그 씨는 일관되게 "'''평''' 히데요시"로 기록되어 있다.[12]덴쇼 13년(1585년) 7월, 히데요시는 간파쿠(관백) 서임에 즈음하여 전 관백 고노에 사키히사의 유자(양자)가 되어 씨를 평에서 '''후지와라'''로 고쳤다.
이듬해 덴쇼 14년(1586년), 히데요시는 씨를 "도요토미"로 고친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우필(서기관)인 오무라 유코에게 집필시킨 『임관지사』(별명 『관백임관기』)에서는 "옛 성을 잇는 것은 사슴과 소의 발자국을 밟는 것과 같다"고 단순한 전례 답습을 거부하며 "나는 천하를 보전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 다만 새롭게 다른 성을 정하고 濫觴(람상: 시초)이 되리라"고 하며, 히데요시는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므로 겐평후지귤에 필적하는 다섯 번째 새로운 씨를 창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성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오시코지 가에 전해진 『오시코지 가 문서』에는 "후지와라 성을 도요토미 성으로 고치기를 청한다"는 히데요시의 상소문과, 이에 대한 덴쇼 13년(1585년) 9월 9일자 개성을 허가하는 선지가 남아 있다. 한편, 『공경보임』에서는 덴쇼 14년(1586년) 조항에 히데요시에 대해 "후지 히데요시"(후지와라 히데요시)라고 기재한 뒤 "후지와라 성을 고쳐 도요토미 성이 되었다고 한다"고 주석을 달았다. "——"는 "월일 불명"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따르면 개성은 덴쇼 14년(1586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셈이 된다. 『공경보임』에서 히데요시가 "도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것은 덴쇼 15년(1587년)부터이다. 히데요시의 관위 서임에 대해서는 덴쇼 10년(1582년) 10월 3일 임 좌근위 소장, 덴쇼 11년(1583년) 5월 22일 임 참의 등, 이를 나타내는 문서는 남아 있지만, 나중에 날짜를 가공하여 위작했다고 여겨지는 것이 적지 않다. 당시 히데요시에게는 날짜를 조작하여 문서를 위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구게(공가)들에게도 천황에게 날짜를 거슬러 문서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반쯤 일상적인 일이었다. 『오시코지 가 문서』의 상소문과 선지도 이와 유사한 성질의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후지와라 씨에서 도요토미 씨로 개성한 것은 덴쇼 14년(1586년) 12월 19일 태정대신임관을 계기로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2]
3. 도요토미 정권과 특권적 지위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권력을 장악하여, 1585년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새로운 성씨를 하사받았다. 사실상 일본 대부분을 통치하게 된 히데요시는 1590년 일본 통일을 달성했다.[1] 이후 간파쿠(관백), 태정대신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확립했다.
후지와라씨(藤原氏)를 대신하는 새로운 섭관 가문(摂関家)의 씨(氏)로서 창시된 도요토미 성(豊臣姓)은, 도요토미 정권에서의 관위 서임(官位叙任)에서 확실히 특권적으로 취급되었다. 히데요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신뿐만 아니라 배신(陪臣)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도요토미 씨를 주었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의 관위 서임은 히데요시의 의지가 전부였다. 히데요시로부터 구두로 관위 서임을 고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그 관위를 정식으로 칭할 수도 있었다. 히데요시가 전쟁 때문에 교토를 떠나 있는 시기에 그러한 예가 자주 보였다. 조정은 단지 그것을 추인하고 사후에 선지(宣旨)・구선안(口宣案) 등의 관위 서임 문서를 작성했을 뿐이었지만, 그 문서에는 본인의 본성이 겐지(源氏)이든 후지와라 씨이든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모두 "도요토미 아손(豊臣朝臣) 모(某)"라는 이름이 기재되게 되어 있었다.[1]
3. 1. 도요토미 정권의 성립과 통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권력을 장악하여, 1585년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새로운 성씨를 하사받았다. 사실상 일본 대부분을 통치하게 된 히데요시는 1590년 일본 통일을 달성했다.[1] 이후 간파쿠(관백), 태정대신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확립했다.3. 2. 도요토미 씨의 특권과 확대
후지와라씨(藤原氏)를 대신하는 새로운 섭관 가문(摂関家)의 씨(氏)로서 창시된 도요토미 성(豊臣姓)은, 도요토미 정권에서의 관위 서임(官位叙任)에서 확실히 특권적으로 취급되었다. 히데요시(秀吉)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신뿐만 아니라 배신(陪臣)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도요토미 씨를 주었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의 관위 서임은 히데요시의 의지가 전부였다. 히데요시로부터 구두로 관위 서임을 고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그 관위를 정식으로 칭할 수도 있었다. 히데요시가 전쟁 때문에 교토를 떠나 있는 시기에 그러한 예가 자주 보였다. 조정은 단지 그것을 추인하고 사후에 선지(宣旨)・구선안(口宣案) 등의 관위 서임 문서를 작성했을 뿐이었지만, 그 문서에는 본인의 본성이 겐지(源氏)이든 후지와라 씨이든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모두 "도요토미 아손(豊臣朝臣) 모(某)"라는 이름이 기재되게 되어 있었다. 도요토미 씨는 이렇게 해서 방대한 수의 구성원을 획득하게 되었다.[1]4. 도요토미 씨와 하시바 씨의 관계
히데요시는 '하시바(羽柴)'라는 묘지(名字)에서 '도요토미'라는 우지(氏)로 바꾼 것이 아니라, '후지와라' 씨에서 '도요토미' 씨로 바꾼 것이다. '하시바'는 묘지이고 '도요토미'는 우지이므로, 이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3]
- 묘지(名字, 苗字): 가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현대의 성(姓)과 유사하다.
- 우지(氏):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대 일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면서 '하시바'라는 묘지를 사용했다. 이후 간파쿠(関白)에 취임하면서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 씨를 받았다. 후지와라 씨가 아니면 간파쿠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히데요시는 조정에 요청하여 '도요토미'라는 새로운 우지를 하사받았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하시바'라는 묘지를 가진 채로 '후지와라' 씨에서 '도요토미' 씨로 우지를 바꾼 것이다. 즉, 히데요시의 정식 이름은 '간파쿠 하시바 내대신 도요토미 아손 히데요시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된다.
에도 시대에 도요토미 씨의 자손들은 도요토미 씨와 함께 하시바의 구 묘지인 '기노시타'를 계속 사용했다. 이는 히데요시의 혈연자들이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씨를 꺼려 히데요시의 옛 묘지인 기노시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5.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히데요리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1]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생전에 개인적인 권력으로 관위 서임권을 독점하고, 관위 서임 문서의 내용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었던 것에 기반했던 도요토미 씨의 확대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정지되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도 히데요시처럼 관위 서임권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여러 다이묘가 하시바 묘지나 도요토미 우지를 사용할지는 기본적으로 다이묘 본인의 판단에 맡겨졌다. 예를 들어, 1603년 이케다 데루마사는 '豊臣朝臣輝政|도요토미노 아손 데루마사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우콘노에곤노쇼조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야마우치 가즈토요도 '豊臣朝臣一豊|도요토미노 아손 가즈토요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종4위하 사도노카미에 임명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히고노카미로 옮기면서 '豊臣朝臣清正|도요토미노 아손 기요마사일본어'로 개명했다.
이후에도 이케다 데루마사의 장남, 가토 기요마사의 차남,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차남 등 도요토미 씨를 사용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에도 막부를 거친 관위 서임에도 막부는 다이묘들의 도요토미 씨 사용을 막지 않았다. 이는 히데요리가 건재했고, 히데요시가 이미 기정사실화한 것이 훗날의 에도 막부에까지 영향을 남겼기 때문이다.
5. 1.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 투쟁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히데요리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1]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5명의 섭정이 임명되었지만, 그들 사이의 갈등은 곧 시작되었다. 1600년,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히데요리를 폐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1]도요토미 씨의 확대는 히데요시가 개인적인 권력으로 관위 서임권을 독점하고 동시에 관위 서임 문서의 내용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었던 것에 기반했으며, 게이초 3년(1598년)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당연히 그 확대는 정지되고 오히려 축소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일문이 "하시바"라는 묘지(名字)와 "도요토미"라는 우지(氏)를 쓰는 것을 그만두고, 게이초 8년(1603년)에는 이에야스가 "닛타", "도쿠가와" 등의 묘지를 칭하며 "미나모토노 아손 이에야스"로서 세이이타이쇼군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단계에서는 아직 생전의 히데요시처럼 관위 서임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하지는 않았다. 히데요시의 후계자이자 하시바 종가의 당주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 머물면서 자신의 직속 가신에 대한 관위 서임을 변함없이 독자적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또한, 여러 다이묘가 하시바 묘지나 도요토미 우지를 사용할지 말지는 기본적으로는 다이묘 본인의 판단에 맡겨졌다.
예를 들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에야스의 쇼군 임명과 함께 게이초 8년(1603년)에 이케다 데루마사가 우콘노에곤노쇼조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도요토미노 아손 데루마사"라는 이름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같은 해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종4위하 관위를 받고 사도노카미(土佐守)로 임명되었을 때도 "도요토미노 아손 가즈토요"라는 이름으로 임명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히고 전역을 영유하게 되어 가즈에노카미(主計頭)에서 히고노카미(肥後守)로 옮겼을 뿐 아니라 그 전까지 사용하던 "다이라노 아손 기요마사"에서 "도요토미노 아손 기요마사"로 고치고 있다. 이른바 “도요토미 은고(豊臣恩顧)”, 즉 히데요시 생전 히데요시로부터 중용되었던 다이묘의 대표격인 기요마사와는 달리 데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사위였고 가즈토요는 "오야마 평정"의 일화에서 보이듯 유명한 친도쿠가와파였는데, 이런 점에서 이에야스의 눈치를 본 듯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케다 데루마사의 장남 데루나오(훗날의 도시타카), 가토 기요마사의 차남 기요타카,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차남 다다키요 등, 도요토미 씨의 재생산은 이어졌다. 후쿠시마 다다카쓰의 경우 이름은 쇼군 히데타다에게서 한 글자를 받았고 에도 막부를 거친 관위 서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다이묘들의 도요토미 씨 사용을 막지 않았다. 히데요리가 건재했다는 점을 전제하고서라도 히데요시가 이미 기정사실화한 것은 훗날의 에도 막부에까지 그 영향을 남겼던 것이다.
5. 2.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성년이 될 때까지 5명의 섭정이 임명되었으나, 그들 사이의 갈등이 곧 시작되었다.[1]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히데요리를 폐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1614년부터 1615년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를 벌여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갈등을 빚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 요도도노는 오사카 성의 불길 속에서 할복했다. 그들의 죽음 이후 도요토미 씨족은 해체되었고, 도쿠가와 씨족은 일본의 지배력을 굳건히 다지게 되었다.[1] 도요토미 씨족의 마지막 구성원은 天秀尼|덴슈니일본어 (1609–1645)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들 도요토미 구니마쓰가 처형을 면했다는 소문과 히데요리가 아마쿠사 시로라는 사생아 아들을 두었다는 소문이 있었다.[1]
5. 3. 도요토미 씨의 쇠퇴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도요토미 씨의 확대는 정지되었다. 많은 다이묘(大名)들이 도요토미 씨 사용을 중단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히데요시와 달리 관위 서임권을 독점하지 않았고, 다이묘들의 도요토미 씨 사용은 자율에 맡겨졌다.예를 들어, 1603년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는 '豊臣朝臣輝政|도요토미노 아손 데루마사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우콘노에노곤노쇼조(右近衛権少将)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도 '豊臣朝臣一豊|도요토미노 아손 가즈토요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종4위하 사도노카미(土佐守)에 임명되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히고노카미(肥後守)로 옮기면서 '豊臣朝臣清正|도요토미노 아손 기요마사일본어'로 개명했다.
이후에도 이케다 데루마사의 장남, 가토 기요마사의 차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차남 등 도요토미 씨를 사용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거친 관위 서임에도 막부는 다이묘들의 도요토미 씨 사용을 막지 않았다.
6. 에도 시대의 도요토미 씨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오사카 성의 하시바 종가(도요토미 가문)가 멸망했지만,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의 친족들은 기노시타로 묘지(苗字)를 바꾸고 도요토미 씨를 유지했다.[4] 일부 지하 관인 가문에서도 도요토미 씨를 칭했다.[5] 메이지 시대에 "씨"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도요토미 씨에 기원을 둔 새로운 우지(氏)는 나타나지 않았다.
7. 도요토미 씨족의 주요 인물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의 삼걸" 중 한 명으로, 1585년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새로운 성씨를 하사받았고, 1590년 일본 통일을 달성했다.[1]
-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1598년 히데요시 사망 당시 다섯 살이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1614년부터 1615년까지 이어진 오사카 전투의 결과로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할복했다.
- 天秀尼|덴슈니일본어 (1609–1645): 도요토미 씨족의 마지막 구성원.
- 도요토미 구니마쓰: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아마쿠사 시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사생아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 오만도코로
- 도요토미 히데쓰구
- 도요토미 히데나가
- 요도도노
- 네네
- 하시바 히데카쓰
- 도요토미 사다코
- 토모 (도요토미)
8. 도요토미 씨의 조직
도요토미 씨는 씨 장자(氏長者)를 두었으며, 이는 '호 씨 장자(ほうしのちょうじゃ)'라고 불렸다. 덴쇼 19년(1591년) 12월, 히데요시가 양자 히데쓰구에게 관백직을 물려줄 때, 히데쓰구를 호 씨 장자에 임명하는 내용을 담은 선지가 작성되었다. 히데요시 역시 호 씨 장자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 씨 장자는 후지와라 씨 장자의 지위와 권한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관백 취임 당시 고노에 가문에 노부타다에게 관백직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어기고 후지와라 씨 장자까지 빼앗았다. 덴쇼 16년(1588년) 1월, 히데요시는 후지와라 씨의 씨신(氏神)인 가스가 신사 최고 책임자인 정예직 임명권을 행사했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후지와라 씨의 시조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를 모시는 다무미네 절을 히데나가의 거성이 있는 고리야마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이때 사용된 명령 문서는 본래 후지와라 씨의 대학별조인 권학원의 별당이 씨 장자의 명을 받아 발급하는 장자 선(후지 씨 장자 선)이었다. 히데쓰구가 관백에 취임할 때, 호 씨 장자 임명 선지 외에 후지 씨 장자를 의미하는 '씨 장자' 임명 선지가 별도로 작성되었다.
9. 도요토미 씨를 칭했던 인물 목록 (일부)
하사 년도 | 하사받은 인물 |
---|---|
1586년 | 도요토미 히데나가, 도요토미 히데쓰구, 미야베 나가히로, 사자키 시게마사, 미조구치 히데카쓰,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다카치카 기요나가, 오쿠보 타다치카 |
1587년 |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타다마사 |
1588년 | 하시바 히데카쓰, 기노시타 가쓰토시, 유키 히데야스, 이나바 사다미치, 이케다 테루마사, 오다 나가마스, 오다 노부히데, 가모 우지사토, 교고쿠 다카쓰구, 쓰쓰이 사다쓰구, 니와 나가시게, 하세가와 히데카즈, 하치야 요리타카, 호소카와 타다오키, 호리 히데마사, 마에다 토시이에, 마에다 토시나가, 모리 히데토시, 하타 친, 오토모 요시무네, 모가미 요시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다치바나 무네시게, 류조지 마사이에, 깃카와 히로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리 테루모토, 아와야 모토사다, 가타타 모토요시, 구치바 하루나가, 구니시 모토조, 시마즈 요시히로, 하야시 나가가, 후쿠하라 모토토시, 호타 모토키요, 미우라 모토타다, 와타나베 나가시, 나오에 가네쓰구, 아카가와 모토후사, 이시키 나가마사, 하기타 나가시게 |
1589년 | 나베시마 나오시게, 나이토 마사나가, 오토모 요시노부, 다이호지 요시카쓰,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아와야 모토요시, 고다마 모토쓰구, 데와 모토조, 히라사 모토사다, 나베시마 가쓰시게, 스다 미쓰치카 |
1590년 | 도미타 도모노부, 구치키 모토쓰나, 호리 히데하루, 지코, 타다나가 |
1591년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도요토미 히데야스, 고마이 시게카쓰, 호리 치카요시, 히가시 요시히사, 노부타케, 요시카쓰 |
1592년 | 아사노 나가마사, 후쿠치 마사나오, 시바타 가쓰마사, 마쓰노 시게모토, 모리 히데모토, 사노 노부요시, 나리나오 |
1593년 | 이시다 마사쓰구, 마에다 도시마사, 야마나카 나가토시, 야나기사와 모토마사 |
1594년 | 나가쓰카 나오요시, 이마에다 시게나오, 도다 시게하루, 쓰다 시게히사, 가토 사다야스, 나카가와 히데나리, 이코마 나오카쓰, 우에다 시게야스,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사나다 노부시게, 마사하루, 나오마사, 미쓰이치 |
1595년 | 오가사와라 히데마사, 오쿠다이라 이에마사, 나이토 기요나리, 마쓰이 야스시게, 미우라 시게나리, 니노미야 유키타쓰, 모리 모토야스, 시시도 모토쓰구 |
1596년 | 고이데 히데마사, 미야기 사다카쓰, 타마루 나오마사, 도미타 가게마사, 야마타카 친시게, 나가이 나오카쓰, 다테 히데무네, 아베 마사카쓰, 모리 모토마사, 히라가 모토아이, 에노모토 모토요시, 구마가이 모토나오, 마스다 모토요시, 세키 가즈마사, 무네노부, 토사노카미 마사나가 |
1597년 | 후쿠하라 나가나리, 요시다 타다후미, 사쿠마 마사자네, 데라니시 고레나리, 분베 미쓰요시, 미즈노 타다시게, 도쿠가와 히데타다, 고시마 겐가, 우키타 히데타카, 이시카와 미쓰나가, 이가노카미 마사나가, 나가하루, 겐추, 무네야스, 모리요시, 나가노리 |
1598년 | 히라노 나가야스, 타케요시(무라카미 타케요시?) |
1599년 | 이토 스케이에, 오무라 요시사키, 사가라 요리후사, 오스카 타다마사, 모리 히데나리, 모토쓰구, 시게나리 |
1600년 | 아리마 요시우지, 타다요시 |
1602년 | 후쿠시마 마사노리, 요시다 야스조 |
1603년 | 가토 기요마사, 하치스카 요시시게, 이코마 가즈마사, 야마우치 가즈토요 |
1604년 | 호리오 요시하루 |
1605년 | 가타기리 갓세이, 쓰다 마사카쓰, 사사 마사시게, 이케다 도시타카, 요시모토 |
1606년 | 가토 기요타카 |
1612년 | 데라자와 타다하루, 마쓰라 타카노부 |
1614년 | 가타기리 다카토시, 하야미 노리모리, 오노 요리나오, 도바시 가게아키 |
연대 불명 | 아오야마 무네카쓰, 이코마 도시토요, 이나바 노리미치, 오쿠무라 나가토미, 가타기리 가쓰모토, 기노시타 이에사다, 구루시마 미치후사, 마에다 히데노리 |
10. 도요토미 본가 계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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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Berry 1982
https://books.google[...]
[2]
서적
国史大辞典
2017-07
[3]
서적
源氏と日本国王
[4]
논문
名古屋市秀吉清正記念館蔵《高台院(おね)画像》に関する考察ノート
https://web.archive.[...]
[5]
서적
寛政重脩諸家譜 第2輯
https://dl.ndl.go.jp[...]
国民図書
[6]
논문
日本近世武家政権論
日本図書刊行会
[7]
논문
天正・文禄・慶長期、武家叙任と豊臣姓下賜
[8]
문서
명칭은 장조라고도 한다
[9]
문서
국길의 아버지는 아사이 시게마사 또는 타카시마 타카야스라고도 한다
[10]
문서
남동생 요시타카와 동일인물이라고도 한다
[11]
문서
후쿠시마 마사히데의 자식이라고도 한다
[12]
문서
그런데 히데요시가 덴쇼 11년에 산기가 되었다는 기재 등은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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