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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양부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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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양부대부인은 조선 시대 인물로, 전계대원군 이광의 본부인이다. 1804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전주 최씨 가문 출신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간호하며 효성을 다했고, 은언군의 서자 이광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은언군 사건 등에 연루되어 내명부 직첩을 받지 못했다. 1830년 남편과 함께 도성에 들어와 살았으며, 아들 회평군은 민진용의 옥사로 사망했다. 1840년 사망 후 남편과 합장되었고, 아들 영평군을 양자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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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양부대부인
기본 정보
완양부대부인 홍씨의 적의본
완양부대부인 홍씨의 적의본
본관남양 홍씨
생몰년1756년 ~ 1834년
배우자조선 제22대 왕 정조
자녀없음
가계
아버지홍낙춘(洪樂春)
어머니문화 유씨(文化柳氏)
남편정조
시아버지사도세자
시어머니혜경궁 홍씨
작위
추증부대부인(府大夫人)
시호효목(孝穆)

2. 생애

1844년 (헌종 10) 9월 민진용의 옥사로 아들 회평군(이원경)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남편의 첩 이씨의 아들인 서자 영평군 이욱을 양자로 들여 전계대원군 가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친정 오라비 최영희(崔英熙)도 처벌받았다. 1840년 (헌종 6) 2월 19일 한성부 경행방 전계대원군 사저에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1804년(순조 4) 2월 19일 한성부 동부 연지동(蓮池洞)에서 학생 최수창과 그의 부인 가선대부 이봉의의 딸 광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최씨이며, 고려시대에 상장군을 지낸 최순작(崔純爵)의 후손으로,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개국원종공신 좌참찬을 지낸 평도공(平度公) 죽정 최유경(竹亭 崔有慶)이 그녀의 직계 조상이었다. 그러나 집안은 몰락해서 벼슬이 없었고, 친정아버지 최수창의 증 의정부영의정 직책은 사후 남편 이광의 서자 원범이 즉위한 뒤에 추증된 벼슬이었다. 친정어머니 광주이씨는 가선대부를 지낸 이봉의(李鳳儀)의 딸이다.

김좌근이 쓴 묘비명에 의하면, 유년 시절 친정부모가 병이 들자 음식도 마다하고 손수 친정부모의 병수발을 들었다 하며, 은언군의 서자 이광과 결혼하였지만 집안은 가난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늘 평안히 여겼다고 한다.

전계대원군 이광의 본부인으로, 남편이 죽은 뒤 이씨, 염씨와 재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일 두 첩실과 같이 생활한 것이 알려졌다. 남편의 첩 이씨와 염씨는 그의 생전에 들어왔으며, 후일 철종실록의 철종 행장에 완양, 용성 두 부인을 모두 섬겼다는 내용이 1970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남편 이광은 은언군 사건과 상계군 추대 사건, 상산군부인 송씨와 상계군부인 신씨의 사건에 연좌된데다가 은언군의 서자라서 작위와 품계를 받지 못했고, 최씨 역시 내명부 직첩을 받지 못했다. 1830년 순조의 특명으로 은언군 가문의 사람들을 석방할 때 남편 이광과 함께 도성에 들어와 살 수 있게 되었다.

2. 2. 결혼 생활

김좌근이 쓴 묘비명에 의하면, 완양부대부인은 유년 시절 친정부모가 병이 들자 음식을 마다하고 손수 병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은언군의 서자 이광과 결혼했지만 집안은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늘 평안히 여겼다고 한다.

전계대원군 이광의 본부인이었으나, 남편은 두 명의 첩(이씨, 염씨)을 더 두었다. 이들은 완양부대부인의 생전에 들어왔으며, 1970년대에 철종실록의 철종 행장에 완양, 용성 두 부인을 모두 섬겼다는 내용이 밝혀지면서 이 사실이 알려졌다. 남편 이광은 은언군 사건과 상계군 추대 사건, 상산군부인 송씨와 상계군부인 신씨의 사건에 연좌된데다가 은언군의 서자라서 작위와 품계를 받지 못했고, 완양부대부인 역시 내명부 직첩을 받지 못했다. 1830년 순조의 특명으로 은언군 가문의 사람들을 석방할 때 남편 이광과 함께 도성에 들어와 살 수 있게 되었다.

완양부대부인은 아들 회평군(이원경)을 낳았으나, 1844년(헌종 10) 9월 민진용(閔晉鏞), 이원덕 등이 회평군을 추대하려던 민진용의 옥사로 아들이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남편의 첩 이씨의 아들인 서자 영평군 이욱을 양자로 들여 전계대원군 가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친정 오라비 최영희(崔英熙)도 처벌받았다. 완양부대부인은 1840년(헌종 6) 2월 19일 한성부 경행방 전계대원군 사저에서 사망하였다.

2. 3. 사후

처음 경기도 양주군 하도면 중흥동(重興洞) 병좌(丙坐)에 안장되었고, 후에 전계대원군 묘를 여러 번 이장했다가, 1856년(철종 7년) 3월 26일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현 포천시 선단동 선단4통)로 이장할 때, 그녀의 묘소도 이장되어 전계대원군의 묘소 오른쪽에 합장되었다. 묘비문은 1851년(철종 2) 당시 공조판서 겸 규장각 제학 김좌근(金左根)이 지었으나 후에 실전되었다. 남편 전계대원군과 합장된 뒤 전계대원군의 비석 왼쪽에 완양부대부인 부우라고 기록되었다.

그녀와 전계대원군이 합장된 선단동 산11-13번지 해룡산 임좌 동쪽 100m 지점에 그녀의 아들 이원경의 묘소가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친정아버지최수창(崔秀昌)
친정어머니광주 이씨(廣州李氏)가선대부 이봉의(李鳳儀)의 딸
친정오라비최영희(崔英熙)1844년 9월 사망
남편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㼅)1785년 4월 29일(음력 3월 21일) ~ 1841년 12월 14일(음력 11월 2일)
아들회평군 명(懷平君 明)다른 이름은 원경(元慶), 1827년 9월 11일 - 1844년 9월 6일)
며느리이름 미상실전
아들 (양자)영평군 경응(永平君 景應)1828년 7월 20일 ~ 1902년 2월 1일/1901년 음력 12월 23일, 남편 이광의 서자로 승적
외할아버지이봉의(李鳳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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