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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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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계군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본명은 이준이며 사도세자의 서손자이자 은언군의 장남이다. 처음 완풍군에 봉해졌으나, 홍국영의 추천으로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양자가 되어 왕세자 대우를 받았다. 이후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상계군으로 작위가 변경되었지만, 1786년 독살 의혹 속에 사망했다. 이후 상계군과 관련된 사건들은 철종과 고종 때 기록이 대거 삭제되었으며, 그의 생모와 부인은 신유박해로 처형되었다. 철종 즉위 후 복작되었으며, 1858년 정1품 현록대부에 증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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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상계군
원래 이름이담
본명이담 (李湛)
출생일1770년 1월 21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786년 11월 20일 (만 16세)
사망지조선 한성부 수진계 전동
작위
별호아명: 이준 (李濬)
사후 이름: 이식 (李湜)
처음 작위: 완풍군 (完豊君)
배우자상계군부인 신씨
자녀(계) 익평군 이희
가계
아버지은언군(생부)
어머니원빈 홍씨(양모)
효의왕후 김씨(양적모)
상산군부인 송씨(생모)
친인척영조(증조부)
영빈 이씨(친증조모)
정빈 이씨(양증조모)
정성황후 서씨(적증조모)
정순왕후 김씨(계적증조모)
사도장헌세자(친조부)
숙빈 임씨(친조모)
혜경궁 헌경의황후 홍씨(적조모)
효장세자(양조부)
효순황후 조씨(양조모)
의소세손(큰아버지)
은신군(작은아버지)
은전군(작은아버지)
송낙휴(친외조부)
홍국영(양외숙부)
풍계군(이복 아우)이철득
이창순(동복 아우)조졸
이창덕(동복 아우)조졸
이성득(이복 동생)강화도에서 사망하여 작호 못받음
이철득(이복 동생)풍계군이고 강화도에 살았을 때 이름
전계대원군(이복 동생)이쾌득 강화도에 살았을 때 이름
철종(이복 조카)

2. 생애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본명은 이준(李濬)이다.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인이며, 어머니는 송낙휴의 딸인 상산군부인 송씨이다. 1769년 1월 21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였으나 후사가 없자, 당시 세도 정치가였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이자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양자로 상계군(당시 이름 이준)을 입적시켰다. 이준은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고, 왕세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4][5]

그러나 1779년 원빈 홍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홍국영이 정치적 공세 끝에 실각하면서 완풍군 역시 작위를 박탈당했다. 이후 정조우의정 이휘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상계군'''(上溪君)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내리고 이름도 이담(李湛)으로 개명하게 했다.

1784년 1월 21일, 상계군은 신오의 딸 평산 신씨와 혼인하였다.[1] 하지만 1786년 11월 20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2][11] 그의 장례는 양아버지인 정조가 직접 주관하였다.

상계군 사후 그의 가족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생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아내 평산 신씨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봉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었으며,[7][8] 아버지 은언군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849년 이복 조카인 철종이 즉위하면서 상계군 내외는 신원이 회복되고 복권되었다.

2. 1. 생애 초반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본명은 이준(李濬)이다.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인이며, 어머니는 송낙휴의 딸인 상산군부인 송씨이다. 증조부인 영조가 살아있던 1769년 1월 21일 한성부에서 은언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그의 생모가 상산군부인 송씨가 아니라 은언군과 어느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관련 기록들이 철종과 고종 대에 대량으로 세초(洗草, 기록 말소)되어 정확한 확인은 어렵다. 그의 유년기와 소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였으나 효의왕후와 여러 후궁들에게서 후사가 없자, 당시 세도 정치가였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이자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양자로 은언군의 아들 이준을 입적시키려 하였다. 이는 후사가 없는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준은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고, 왕세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가동궁(假東宮) 또는 가세자(假世子)로 불렸다.[4][5] 양자 결연 시점에 대해서는 원빈 홍씨 생전이라는 설과 사후라는 설이 있으나, 한국 사학계에서는 주로 사후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완풍군을 왕위 계승자로 지지하는 세력(구선복 등)도 있었으나, 정조가 아직 젊어 후사를 볼 가능성이 있었기에 김종수 등 홍국영의 정적들은 완풍군의 존재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의 제거를 주장했다.

1779년 5월 원빈 홍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홍국영과 완풍군에 대한 정치적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같은 해 9월 26일 홍국영은 권력 남용 등의 죄목으로 실각하여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는 홍국영에게 반감을 가진 노론 벽파 세력도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국영이 몰락하면서 완풍군 역시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정조우의정 이휘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상계군'''(上溪君)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내리고 이름도 이담(李湛)으로 개명하게 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상계군에 대한 정치적 견제는 계속되었다.

1784년 1월 21일, 상계군은 통덕랑을 지낸 신오의 딸 평산 신씨와 혼인하였다.[1]

2. 2. 입양과 파양

1779년 혹은 그 이전에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인 원빈 홍씨의 양자로 은언군의 아들 이담(당시 이름 이준)을 입양시키려 하였다. 당초 은언군은 이를 사양했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9] 홍국영이 왜 은언군의 아들을 선택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이준은 세자의 중손(衆孫) 예우에 따라 종2품 소의대부(昭義大夫)에 임명되고 완풍군(完豊君)에 봉작되었다. 완풍(完豊)이라는 이름은 왕실 본관인 완산(完山)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豊山)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홍국영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여러 기록에서 지적하고 있다.[4][5] 당시 완풍군은 왕세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가동궁(假東宮) 또는 가세자(假世子)로 불리기도 했다. 완풍군 봉작 당일 정조는 그를 원빈 홍씨의 빈전 수빈관(守殯官)에 임명했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완풍군 봉작 당일인 5월 7일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9] 당시 정조는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였고 다른 후궁에게서 충분히 자녀를 얻을 수 있었기에, 완풍군을 양자로 들인 일은 큰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 김종수 등 홍국영에게 비판적이던 노론 청류파는 이를 문제 삼아 홍국영과 완풍군 제거를 요구했다. 상계군 본인도 홍국영과 마음이 맞지 않아 갈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홍국영은 완풍군 입양 문제 등으로 정치적 공격을 받아 1779년 음력 9월 26일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흑두봉조하(黑頭奉朝賀)가 되었다.[10] 이후에도 노론 대신들은 완풍군을 반역자로 몰아 공격했으나 정조는 당장 받아들이지 않았다.

1780년(정조 4) 8월 15일, 의정부우의정 이휘지(李徽之) 등이 인조반정 공신 이서의 작호인 완풍군(完豊君)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작호 변경을 청하자, 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완풍군에서 상계군(常溪君)으로 작호를 고치고 이름도 준(埈)에서 담(潭)으로 개명하였다. 이는 사실상 완풍군 입양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을 매듭짓는 조치였으나, 이후에도 상계군에 대한 정치적 공격은 계속되었다.

2. 3. 의문의 죽음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의빈 성씨가 연달아 세상을 떠난 해, 상계군은 혼례를 올린 직후인 11월 20일 독약을 마시고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1] 그의 외할아버지 송낙휴에 따르면 사망 직전까지 건강했다고 전해져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망 원인으로는 자살설과 생부 은언군 이인에 의한 독살설 등이 있으며,[11] 일각에서는 홍국영이나 정조의 측근에 의한 독살을 의심하기도 했다.[2] 상계군의 최종 관직은 가덕대부였다.

상계군의 죽음은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혼례를 주관했던 김우진(金宇鎭)은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 후 유배되었고, 영조정조 대에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具善復[12])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예조판서 서유린은 상계군의 사망 보고를 꺼렸으나, 결국 소식은 궁궐에 알려졌다. 정조는 특명을 내려 그의 장례를 왕손의 예우에 맞춰 예장(禮葬)으로 치르도록 했다.[13]

한편, 외할아버지 송낙휴는 상복을 입고 상계군이 파양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다고 주장하며, 상계군이 죽기 직전 "김상철 정승이 살면 나도 살고, 김 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고변했다. 송낙휴는 전 영의정 김상철과 황해도병마절도사 구이겸 등을 의심했으며, 자신의 처당숙인 구선복이 상계군 추대에 가담했다고 지목했다. 이 고변으로 구선복과 그의 아들 구이겸, 충청도병마절도사 구명겸(구이겸에게 아들을 양자로 보냄) 등이 체포되어 국문 끝에 처형되었다.

사건 이후 노론, 남인, 소론 등 여러 정치 세력은 홍국영을 비판하며 상계군에게도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786년 12월, 상계군이 과거 홍국영에 의해 완풍군으로 봉해지고 왕위 계승 후보로 거론되었던 점을 들어, 그와 아버지 은언군에 대한 처벌 요구가 거세졌다. 결국 상계군의 작위는 박탈되어 '역적 담'으로 불리게 되었고,[14] 삼사의 거듭된 요청에 정조은언군 일가를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15] 이후 정조는 신하들에게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 줄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상계군은 현재의 신촌역연세대학교 인근 연희궁 터에 묻혔다.

2. 4. 사후

1786년 11월 20일, 상계군은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홍국영이나 생부 은언군을, 다른 이들은 정조의 측근 일부를 의심했다.[2] 그의 장례는 양아버지인 정조가 직접 주관했으며, 시신은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연희궁 근처(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신촌역 2,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부근)에 매장되었다. 후에 사사된 부인 평산 신씨도 그의 묘에 합장되었다.

상계군 사후 그의 가족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생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아내 평산 신씨는 천주교에 귀의하여[7] 청나라 출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들은 독실한 신자로 활동했으나, 1801년(순조 1) 2월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봉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8] 아버지 은언군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해 5월 29일 사사 명령을 받고 6월 30일 강화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17일 이복 조카인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철종 즉위를 주도한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상계군 내외는 신원이 회복(복작, 復爵)되었다. 같은 해 6월 23일 상계군은 가덕대부(嘉德大夫)로 관작이 회복되었고, 1858년(철종 9) 11월 9일에는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복권 과정에서 순원왕후의 명으로 과거 상계군 사건 관련 기록들이 대거 지워지거나 수정(세초, 각자, 말소)되었다. 이후 철종과 고종 대에도 상계군 일가 및 은언군 관련 기록 상당수가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되어 많이 유실되었다.

한편, 상계군의 묘는 1854년(철종 5) 2월 1일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이후 그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어 실전(失傳)되었다.

과거 1801년 5월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된 '철득(鐵得)'이라는 인물이 한때 상계군의 아명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 과정에서 이는 상계군 사후 15년 뒤에 발생한 별개의 사건이며, 철득은 은언군과 함께 탈출하려던 다른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3. 가족 관계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장조(莊祖)의 서손자이며 아버지는 은언군 인(䄄), 어머니는 송낙휴의 딸 상산군부인 송씨이다.[7][8] 증조부인 영조의 생전에 태어났다. 일설에는 그의 생모가 상산군부인 송씨가 아니라 은언군과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상계군 가계
구분관계이름생몰년 및 비고
조부모조부추존 장조1735년 ~ 1762년
조모숙빈 임씨? ~ 1773년
부모 및 형제자매아버지은언군 이인(李䄄)1754년 ~ 1801년
어머니 (생모)상산군부인 송씨1753년 ~ 1801년, 송낙휴의 딸, 천주교 세례명 마리아
동생이창순(李昌順)생물년 미상
동생이창덕(李昌德)생물년 미상
동생풍계군 이당(李瑭)1783년 ~ 1826년 (다른 첩 소생 설 존재)
여동생이씨(李氏)? ~ 1872년, 한각신에게 출가[주 1]
서모전산군부인 이씨1764년 ~ 1819년, 이덕희의 딸
이복동생전계대원군 이광(李壙)1785년 ~ 1841년, 철종의 생부
서모이름 미상? ~ 1821년 이전
이복동생이성득(李成得)1775년 ~ 1817년[16]
이복동생이철득(李鐵得)1780년 ~ 1826년 이후[주 2]
배우자 및 자녀부인군부인 평산 신씨1769년 ~ 1801년, 신오의 딸, 천주교 신자
양자익평군 이희(李曦)1824년 ~ 1863년, 생부는 동생 풍계군 이당
이름 미상궁인 출신
아들 (서자)이름 미상요절[주 3]
외가외조부송낙휴정조 대 정승 서용보의 외숙부
외조모능성 구씨구선원의 딸, 구선복의 사촌 여동생
양가양부정조1752년 ~ 1800년
양모원빈 홍씨1766년 ~ 1779년



'''표 주석'''


  • [주 1] 1779년 선원계보기략에 서녀 1명과 서자 1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1872년 사망 기록과 맞추면 나이와 결혼 시기가 맞지 않아 철종 등극 후 족보 정리 과정에서 추가된 인물로 추정된다.
  • [주 2] 선원속보 기록과 비변사 일기 기록 간 생년 차이가 있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1812년 비변사 기록 기준으로는 1780년생이다.
  • [주 3] 궁녀 소생으로 추정되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관련 기록이 철종, 고종 대에 세초되어 상세 불명.


상계군의 생모 상산군부인 송씨와 부인 군부인 신씨는 천주교를 받아들여[7] 청나라 출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이 사실이 밀고되어 두 사람 모두 사사되었고, 아버지 은언군 역시 이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8] 상계군 본인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사후 동생 풍계군의 서자 익평군 이희를 양자로 들였다. 한편 상계군에게 궁녀 출신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으며, 이와 관련된 기록들은 철종과 고종 시기에 상당수 세초(洗草, 기록 말소)되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상계군 일가는 시간이 흘러 1849년 이복 조카인 철종이 즉위하면서 복권되었다.

4. 상계군 추대 사건과 관련된 인물

상계군 추대 사건은 여러 인물이 복잡하게 얽혀 발생하고 전개된 사건이다. 사건의 중심에는 홍국영, 정조, 은언군 등이 있었으며, 상계군의 사후에는 송낙휴, 구선복 등이 연루되어 파장이 확대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1779년 혹은 그 이전에 은언군의 아들 이담(당시 이름 이준)을 원빈의 양자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은언군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요청으로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 이준은 세자의 중손 예우에 따라 종2품 소의대부에 임명되고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는데[4][5], 이는 왕실 본관인 완산(完山)과 홍국영 본관인 풍산(豊山)에서 따온 이름으로 홍국영의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9] 홍국영은 완풍군을 자신의 생질이라 칭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완풍군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779년 5월 7일 원빈 홍씨가 갑자기 사망하고, 정조가 여전히 젊어 다른 후궁에게서 후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홍국영의 이러한 행보는 노론 세력 등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특히 김종수 등 노론 청류파는 홍국영을 역적으로 규탄했고, 결국 홍국영은 1779년 음력 9월 26일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흑두봉조하(黑頭奉朝賀)가 되었다.[10] 이후 1780년 의정부우의정 이휘지 등의 건의에 따라, 인조반정 공신 이서의 작호와 중복된다는 이유로 완풍군이라는 작호는 상계군(常溪君)으로 변경되었고, 이름도 준에서 담으로 개명되었다.

1786년 문효세자의빈 성씨가 연이어 사망한 해, 상계군은 혼례 직후인 11월 20일 갑자기 독약을 마시고 사망했다.[11]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설과 생부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는 상계군이 파양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상계군이 죽기 전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철을 언급하며 "김 정승이 살면 나도 살고 김 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말을 했다고 고변했다. 또한 자신의 처당숙이자 전 훈련대장인 구선복이 상계군 추대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이 고변으로 구선복과 그의 아들 구이겸(황해도 병마절도사), 구명겸(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되었다.[12] 이들은 평소 정조에게 원한을 샀던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상계군의 혼례를 주관했던 김우진 역시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파직 후 유배되었으며, 예조판서 서유린은 상계군의 사망 소식을 궁궐에 보고하기를 꺼렸다고 한다.[13]

상계군의 죽음 이후, 노론, 남인, 소론 등 여러 정치 세력은 죽은 상계군과 그의 아버지 은언군에게 역모의 책임을 물어 처벌할 것을 정조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상계군은 '역적 담'으로 불리며 작위가 추탈되었고[14], 정조는 삼사의 거듭된 압박에 밀려 은언군 일가를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15] 정조는 이후 신하들에게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도록 당부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한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홍국영1786년11월 20일 한성부에서 취조를 받은 후 독약으로 처형되었다는 기록도 있다.[6]

5. 대중문화 속 상계군

6. 기타

상계군과 관련된 기록들은 철종 때와 고종 때 대부분 편집되거나 세초(洗草, 기록을 물에 씻어 없앰), 혹은 사라져 많이 남아있지 않다. 특히 홍국영 등이 상계군을 동궁(왕세자)으로 추대하려던 사건, 부인인 평산군부인 신씨와 어머니 상산군부인 송씨의 천주교 관련 사건, 형문 관련 자료 등은 후일 철종 즉위 후 순원왕후의 명으로 대부분 인멸되거나 세초되었다. 남아있던 기록마저도 고종 때에 가서 편집되거나 먹줄로 지워지고, 인위적으로 삭제되거나 인멸되었다. 일성록승정원일기의 기록 역시 대부분 철종, 고종 때 세초되거나 인멸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顯祿大夫益平君諡狀 http://yoksa.aks.ac.[...]
[2] 웹사이트 Prince Euneon http://people.aks.ac[...] 2018-03-08
[3] 뉴스 '이산' 홍국영이 키운 완풍군, 실록에는? http://star.mt.co.kr[...] starnews 2008-04-23
[4] 웹사이트 完豊君濬에게 관직을 제수함 http://sjw.history.g[...]
[5] 문서 完豊君の完は王室の故郷である完山から、豊は豊山洪氏として洪国栄と元嬪洪氏の故郷から取ったものである。
[6] 뉴스 정조의 꿈‥아름다운 화성(華城)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14-02-20
[7] 문서 二女人の[[カトリック教会]]洗礼名がマリア(Maria)である。
[8] 뉴스 요절한 동생 앞에 선 정조의 눈물 http://www.chosun.co[...] 朝鮮日報 2005-08-30
[9] 지식백과 상계군 [常溪君]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0] 서적 왕의 하루 김영사 2012
[11] 지식백과 상계군 [常溪君]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2] 문서 그에게는 외외재종증조부가 된다.
[13] 문서 예조에서는 그의 친왕손 장례를 반대하였으나 정조는 [[낙천군]](洛川君)의 전례를 들어 친왕손의 예로 장례를 치루도록 하였다.
[14] 문서 동시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인은 역적 인, 어머니 송씨는 송성(宋姓)으로 격하된다.
[15] 사료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2월 28일 정묘 2번째기사
[16] 사료 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 청 가경(嘉慶) 22년) 11월 27일(병인) 1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강화 죄인 성득이 물고되었으니, 금부 도사를 보내 검험하라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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