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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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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은언군은 조선의 왕족으로,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서자이다. 1764년 은언군에 봉해졌으며, 정조의 후계자 문제, 부인 송씨와 며느리의 천주교 신앙, 홍국영의 상계군 추대 음모 등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유배를 겪었다. 순조 즉위 후 신유박해로 부인이 사형당하고, 본인도 1801년 사사되었다. 이후 철종 즉위 후 복권되었으며, 1871년 충정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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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명은언군
한글 이름은언군
한자 이름恩彦君
한글 이름 (본명)이인
한자 이름 (본명)李䄄
로마자 이름 (본명)I In
명흥
시호충정
출생 및 사망
출생일1754년 3월 29일
사망일1801년 7월 30일
사망 장소조선 경기도 강화
가족 관계
아버지사도세자 (장조)
어머니숙빈 임씨
배우자상산군부인 송씨
씨명 불상 (氏名不詳)
전산군부인 이씨
자녀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
이성득
이철득
풍계군
전계대원군
기타 정보
묻힌 곳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78-1번지
신분왕자
종친 계급현록대부

2. 생애

1754년 사도세자(장조)와 후궁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복형으로는 정조가 있었으며, 1764년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졌다.

정조 즉위 후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1778년홍국영효의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왕위 계승자로 삼으려던 계획에 연루되었다. 이 상계군 추대 사건으로 인해 상계군은 1786년 사망하였고, 은언군 역시 작위를 박탈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10] 당시 사도세자에게 적대적이었던 노론 벽파 세력은 은언군의 사형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형으로 감형하며 동생을 보호하려 애썼다.[10]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순교하였고,[11] 은언군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12]

은언군 사후 그의 아들 전계대원군과 다른 손자들도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13] 훗날 헌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범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25대 국왕 철종으로 즉위하게 된다.[13]

서울특별시 은평구 북한산 인근에 묘소가 있었으나,[14] 한국 전쟁 중에 실전되어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14]

2. 1. 불우한 소년기

(내용 없음)

2. 1. 1. 생애 초기와 가족사항

1754년(영조 30년) 장조(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의 서장남으로 태어났다.[7] 할아버지는 영조이며, 이복 형으로는 의소세자, 정조가 있었고, 친동생으로는 은신군, 이복동생으로는 은전군이 있었다.

1757년(영조 33) 1월 2일, 영조는 왕손들의 나이가 6세가 되기 전이었음에도 특별히 왕손교부에 홍계능을 임명하여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는 관례보다 이른 조치였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왕손교부를 맡아 두 형제를 가르쳤다.

'''은언군 형제의 왕손교부'''
이름재임 기간
홍계능1757년 1월 2일 ~ ?
윤상후(尹象厚)1757년 1월 27일 ~ 1759년 9월 25일
윤득관(尹得觀)1759년 11월 24일 ~ 1760년 12월 15일
홍낙인(洪樂仁)1760년 12월 22일 ~ 1761년 3월 11일
김이안(金履安)1761년 5월 12일 ~ 1762년 12월 21일
김재구(金載久)1763년 6월 20일 ~ 1763년 9월 7일
한용화(韓用和)1763년 12월 20일 ~ 1764년



이들 중 홍낙인은 이복 형 정조의 외삼촌이었고, 김이안은 김상헌의 후손이자 김창협의 증손자로 학행으로 천거되어 1년간 교육을 담당했다. 김재구 역시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재물을 탐했다는 의혹으로 파직되었다.

1763년 도정에 봉해졌고, 1764년(영조 40) 10세의 나이로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졌다.[7] 이듬해인 1765년(영조 41) 7월 11일에는 11세의 나이로 참봉 송낙휴(宋樂休)의 딸 진천 송씨와 혼인하여 관례를 행하였다. 부인 송씨는 훗날 상산군부인(常山郡夫人)으로 불린다.

'''은언군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생몰년비고
할아버지영조1694년 ~ 1776년조선 제21대 국왕
할머니영빈 이씨1696년 ~ 1764년영조의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
아버지장조(사도세자)1735년 ~ 1762년추존왕
어머니숙빈 임씨? ~ 1773년장조의 후궁
외할아버지임지번
외할머니김해 김씨 김씨 부인
본인은언군 이인1754년 ~ 1801년
배우자상산군부인 진천 송씨1753년 10월 15일 ~ 1801년 4월 4일송낙휴의 딸, 세례명 마리아, 신유박해 순교
자녀 (적자)상계군 이담1769년 1월 21일 ~ 1786년 11월 20일
자녀 (적자)이창순
자녀 (적자)이창덕
자녀 (적자)풍계군 이당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은전군에게 양자로 감
자녀 (적녀)전주 이씨 부인1796년 8월 4일 ~ 1872년 4월 4일
배우자이름 미상 (첩)? ~ 1821년 12월 6일
자녀 (서자)이성득1775년 ~ 1817년 11월 27일
자녀 (서자)이철득1780년 ~ ?
배우자전산군부인 전주 이씨 (첩)1764년 12월 19일 ~ 1819년 6월 4일이덕희의 딸
자녀 (서자)요절
자녀 (서자)전계대원군 이광1785년 3월 21일 ~ 1841년 11월 2일본명 쾌득, 철종의 아버지
친동생은신군 이진1755년 1월 11일 ~ 1771년 3월 29일
이복형의소세자1750년 ~ 1752년
이복형정조1752년 ~ 1800년조선 제22대 국왕
이복동생은전군 이찬1759년 ~ 1778년


2. 2. 정치 활동

(내용 없음)

2. 2. 1. 복권과 관료생활

이후 한성부로 돌아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가 2품으로 품계가 올랐다. 1776년(영조 52) 4월 할아버지 영조가 별세하자 원릉 수릉관(元陵守陵官)에 임명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하자 그해 5월 8일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겸 종부시제조(宗簿侍提調)에 제수되고 가덕대부(嘉德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같은 해 8월 산릉 수릉관(山陵守陵官)에 임명되었고, 8월 24일에는 수덕대부(綏德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1777년(정조 1) 3월 5일 흥록대부(興祿大夫)로, 같은 해 8월 28일에는 현록대부(顯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현록대부로 승격된 날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매년 6월 혜경궁 홍씨의 생일을 전후하여 혜경궁의 탄신일을 각별히 챙기고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78년(정조 2) 12월에는 은언군 집에서 를 몰래 잡아 팔았다는 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양사, 홍문관, 의금부 등 여러 기관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정조가 나서서 무마시켜 주었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묘관(守墓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28일 다시 종부제조(宗簿提調)를 거쳐 7월 23일에는 다시 종친부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해 12월에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2. 2. 2. 상계군 추대 사건

1778년(정조 2) 홍국영정조의 왕비 효의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자신의 누이동생 원빈 홍씨를 후궁으로 들여 왕세자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원빈 홍씨가 1779년(정조 3)에 세상을 떠나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맏아들인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왕위 계승자로 만들려 하였다. 이를 위해 원빈의 장례 때 담을 대존관(代尊官)으로 내세웠다. 은언군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홍국영의 거듭된 요청에 결국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들이는 것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인 1779년 가을, 은언군은 유학 이덕희(李德喜)의 딸을 소실로 맞이했다. 이 첩 이씨는 훗날 손자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전산군부인으로 추증되었다.

홍국영은 은언군의 아들 담을 완풍군(完豊君)이라 칭하고(후에 상계군으로 개칭됨), 그를 임시 동궁인 가동궁(假東宮)으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홍국영이 실각하고 병사한 후에도 그의 추종 세력들은 계속해서 역모를 꾸몄다. 결국 상계군 담은 자신이 사건에 연루되자 1786년 음력 11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계군의 장인이자 외조부인 송낙휴는 사위의 불평불만을 조정에 고변하며 상계군이 역심을 품었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상계군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동시에 상계군의 생부인 은언군 역시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연일 제기되었다.

1786년 11월 상계군이 사망한 후, 은언군은 금성위 박명원, 창성위 황인점, 참봉 조관진, 도사 조응진, 돈녕부 영사 홍낙성, 전 승지 홍낙신·홍낙임, 유학 홍낙륜, 전 주부 홍수영, 유학 홍최영, 보덕 김치묵, 전 목사 김지묵, 사복시 첨정 홍의영 등과 함께 종척 집사로서 상계군의 빈전에 참석했다. 그러나 사건 조사 과정에서 은언군 역시 연루되어 사형 위기에 처했다. 정조는 대신들의 거센 요구를 물리치고 유배형으로 감형시키려 노력했다. 결국 그 해 은언군은 군의 작위와 현록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직위를 박탈당하고 처자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정순왕후는 대신들을 통해 은언군을 사형시킬 것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정조는 증거가 불충분하고 유일한 혈육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1786년 11월 이후 은언군에 대한 탄핵 상소는 매일같이 올라왔다. 상소가 계속되자 정조는 단식에 들어갔고, 이에 정순왕후 역시 단식으로 맞섰다. 한편, 송낙휴의 고변으로 훈련대장 구선복 등이 홍국영과 모의한 사실이 김종수에게 발각되면서 역모의 증거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삼사의금부에서는 은언군의 사형을 계속 요구했다.

구선복과 그의 조카인 병마절도사 구명겸, 구이겸 등이 처형된 후 은언군 사형에 대한 주장은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다시 거세졌다. 정조는 하나뿐인 동생임을 강조하며 선처를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인 세력 역시 은언군 처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도성 밖으로 나가거나 단식하는 방식으로 끈질기게 맞섰고, 결국 노론 대신들과 남인은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하여 유배형으로 결정하는 데 동의했다. 처음 유배지는 제주도로 정해졌으나 정조가 반발하자 전라도 진도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진도 역시 너무 멀다고 주장하며 유배지를 강화도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여러 차례의 조율 끝에 은언군의 유배지는 최종적으로 강화도로 결정되었다.

이처럼 효의왕후의 불임과 홍국영의 정치적 야심이 결부된 상계군 추대 사건은 결국 상계군의 비극적인 죽음과 은언군의 강화도 유배로 이어졌다. 은언군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세자에게 적대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그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2. 2. 3. 강화도 유배생활

1786년 상계군 사건에 연루되어 은언군은 군(君)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현록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직에서도 파면된 뒤 처자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순왕후노론 벽파 세력은 은언군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남인 세력 역시 은언군 처형을 상소했다. 정조는 증거 불충분과 유일한 혈육이라는 점을 들어 사형 요구를 거부하고 단식으로 맞섰으며, 결국 사형을 면하고 유배형으로 결정되었다. 유배지는 처음 제주도로 정해졌으나 정조의 반대로 전라도 진도로 변경되었고, 이마저도 너무 멀다는 정조의 지시에 따라 여러 번의 조율 끝에 최종적으로 강화도로 결정되었다.

강화도 유배 중에도 은언군에 대한 탄핵과 처벌 요구는 계속되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의금부 등에서는 그가 홍국영 등과 한패거리이며 상계군 추대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번갈아 가며 처벌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은언군이 홍국영과 적극적으로 모의했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며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조는 유배된 동생 은언군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1789년(정조 13) 9월 26일, 정조는 비밀리에 변복하고 궁을 빠져나가 강화도 입구에서 은언군을 만나 한성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이 사실이 곧 노론 벽파 대신들에게 알려지면서, 정순왕후의 명을 받은 의정부영의정 김익(金熤)은 은언군을 체포하여 배소로 다시 압송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조는 직접 강화도로 가서 은언군의 유배지 근처에 머물며 항의성 시위를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시위는 그 해 9월 28일 벽파 대신들과 남인 신료들이 정조의 체면을 고려하여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789년 10월 은언군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이나 사도세자의 생일 및 기일, 정순왕후 김씨의 생일 등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에만 일시적으로 방면되어 왕궁에 초대되었고, 행사가 끝나면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다. 은언군에 대한 감시는 엄격했으며, 당시 강화부사였던 윤승렬(尹承烈)은 감시를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기도 했다.

은언군과 그 가족의 강화도 유배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관련 기록 상당수가 철종 즉위 이후 대량으로 세초(洗草)되었기 때문이다. 고종 재위 기간에도 일부 기록이 남아 있었으나, 고종 대에 와서 먹줄로 긋거나 해당 기사를 잘라내는 방식으로 대부분 말소되었다.

2. 2. 4. 최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적대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상계군 추대 사건과 관련하여 은언군의 사형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강화도 유배로 감형하는 등 은언군을 보호하였다.[10] 그러나 1800년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자였던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순교하였다.[11] 이 사건에 연루되어 은언군 또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12] 가족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점과 과거 상계군 추대 사건 등이 다시 거론되며 탄핵의 이유가 되었다.

은언군 사후 그의 아들 전계대원군은 다른 두 아들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13] 전계대원군의 장남은 일찍 사망했으나, 차남 이원범은 훗날 헌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으로 추대되어 조선의 제25대 국왕 철종으로 즉위하였다.[13]

은언군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78-1번지 북한산 인근 지산리 묘역에 매장되었으나,[14] 한국 전쟁 중에 묘소 위치가 실전되어 현재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14]

2. 3. 사후

1789년(정조 13)부터 은언군이 국법을 어기고 강화도를 무단으로 벗어났다는 탄핵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왕대비(정순왕후)의 말만 듣고 대신들이 포도대장의금부 당상을 시켜 은언군을 강화도로 돌려보낸 것이라며 탄핵을 물리쳤다. 한편, 신기현(申驥顯)이 포도대장의금부 당상들이 임의로 은언군을 강화도로 돌려보냈다며 탄핵하자, 의정부우의정 김종수와 형조판서 심이지는 정조에게 신기현의 상소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10월, 노론 계열의 태학 유생들과 사부학당 유생들은 연명 상소를 올려 은언군을 역적의 우두머리(賊魁)로 지목하며 처벌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수원성 축조를 담당했던 남인 중추부판사 채제공(蔡濟恭) 등도 은언군을 역적으로 칭하며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유배지에서 고통받는 은언군을 염려하며 동생을 잃을까 걱정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내비쳤고, 그의 석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삼사, 의금부, 승정원 등 여러 관청에서 반대하며 은언군을 탄핵했고, 관학사부학당의 유생들까지 들고 일어나 강력히 반발하여 은언군의 석방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1790년(정조 14) 11월 13일, 정조는 사람을 강화도로 보내 은언군을 불렀다. 하지만 정순왕후의 방해로 만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정조는 직접 용산(龍山) 별영(別營)에 나가 하룻밤을 머물며 은언군을 기다렸다. 은언군은 강화부 유수의 묵인 하에 비밀리에 강화도를 빠져나왔으나, 한성부 용산 근처에서 발각되어 다시 강화도로 압송되었다. 1790년 12월 13일, 강화부 유수 홍수보(洪秀輔)는 이임하면서 후임자를 뽑아 은언군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1794년(정조 18) 4월 10일, 정조는 강화부 유수 이홍재(李洪載)와 경기도관찰사 서용보(徐龍輔)를 파직하고, 다시 은언군을 한성부로 불러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즉시 모든 신하에게 한글 전교(언문교서)를 내려 역적을 성토하라고 촉구했고, 대신들은 정조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조는 은언군을 숨긴 채 대신들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정조의 허락 없이 합문(閤門)을 밀치고 들어왔다. 이어서 사헌부 지평 강극성(姜克成)은 도끼를 들고 와 합문 밖에 엎드려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직접 혈서(血書)를 써서 올리며, 역적 은언군 이인의 목을 베어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라고 상소했다. 결국 정조는 4월 19일 은언군을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2. 3. 1. 묘소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78-1번지, 북한산 이말산(지산리 묘역)에 유좌(酉坐) 방향으로 안장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 묘소 위치가 실전되었다. 묘비는 1989년 절두산 순교 성지로 옮겨졌다.

2. 3. 2. 명예 회복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고 그해 6월 8일 그의 서손자 원범(元範)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다. 같은 해 9월 12일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따라 은언군 가문의 역모 관련 기록(문적, 文蹟)들이 모두 세초(洗草)되었다.

1851년(철종 2)에는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이 신유사옥 당시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을 작성하여 올렸다. 신도비문은 운석 윤정현(尹定鉉)이 지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은언군 가문에 대한 문적들이 상당수 세초되거나 없어져, 그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 장조(莊祖, 사도세자, 1735년 2월 13일 ~ 1762년 7월 12일)
  • * '''할아버지''' : 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 * '''할머니''' : 소유영빈 이씨(昭裕英嬪 李氏, 1696년 8월 15일 ~ 1764년 8월 23일)
  • '''어머니''' : 숙빈 임씨(肅嬪 林氏, ? ~ 1773년)
  • * '''외할아버지''' : 임지번(林枝蕃)
  • * '''외할머니'''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형제'''
  • * '''친동생''' : 이진 은신군(恩信君 李禛, 1755년 1월 11일 ~ 1771년 3월 29일)
  • * '''이복 동생''' : 이찬 은전군(恩全君 李禶, 1759년 ~ 1778년)

  • '''배우자 및 자녀'''
  • * '''정실''' :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년 10월 15일 ~ 1801년 4월 4일) - 송낙휴(宋樂休)의 딸. 세례명은 마리아.
  • ** '''장남''' :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년 1월 21일 ~ 1786년 11월 20일)
  • ** '''차남''' : 이창순(李昌順) - 어려서 사망.
  • ** '''삼남''' : 이창덕(李昌德) - 어려서 사망.
  • ** '''사남''' : 풍계군 이당(豐溪君 李瑭, 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 - 은전군에게 출계.
  • ** '''장녀''' : 이씨(李氏, 1796년 8월 4일 ~ 1872년 4월 4일) - 김기두(金基斗)에게 출가.

  • * '''첩''' : 이름 미상 (? ~ 1821년 12월 6일)
  • ** '''서자''' : 이성득(李成得, 1775년 ~ 1817년 11월 27일)
  • ** '''서자''' : 이철득(李鐵得, 1780년 ~ ?)

  • * '''첩''' :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全山郡夫人 李氏, 1764년 12월 19일 ~ 1819년 6월 4일) - 이덕희(李德喜)의 딸.
  • ** '''서자''' : 요절
  • ** '''서자''' : 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㼅, 1785년 4월 29일(음력 3월 21일) ~ 1841년 12월 14일(음력 11월 2일)) - 본명은 이쾌득(李快得). 철종의 아버지.

4. 평가 및 기타

정조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노론 벽파 세력의 계속된 공격 속에서 결국 유배되고 사사된 비운의 왕족으로 평가된다. 1786년 상계군 추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아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이는 정조가 정순왕후를 비롯한 노론의 사사 요구를 거부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의금부 등에서는 지속적으로 은언군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정조는 하나뿐인 동생이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인 세력 역시 은언군 처형을 주장하며 정조를 압박했다.

강화도 유배 이후에도 혜경궁 홍씨나 사도세자, 정순왕후 등의 생일이나 기일에 일시적으로 궁궐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행사가 끝나면 다시 강화도로 돌아가야 했다. 1789년에는 정조가 비밀리에 은언군을 한성으로 데려오려 시도했으나, 노론 벽파 대신들과 정순왕후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세례명 마리아)와 며느리 신씨(세례명 마리아)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하자, 은언군 역시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부인과 며느리가 처형된 직후, 서자 이철득만을 데리고 강화도를 탈출하려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은언군과 관련된 기록, 특히 상계군 추대 사건이나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내용은 철종과 고종 대에 걸쳐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대량으로 세초(洗草)되거나 먹줄로 지워지는 등 의도적으로 인멸되었다. 이는 철종이 은언군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그의 생애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철종이 하사한 은언군 표석은 서울 북한산 입구의 한 음식점에서 의자로 사용되다가 2005년 시민단체에 의해 발견되어 수습되었다. 또한 은언군 관련 석물 일부는 흥창사 내에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첩 중 한 명인 전산군부인 이씨조선 중기 이후 금지되었던 동성동본임에도 불구하고 전주 이씨였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한 정실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정조영의정을 지낸 서용보와 내외종사촌 관계였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78-1번지 북한산에 조성되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실전되어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5. 미디어

연도매체작품명배우
1991년KBS 드라마왕도?
2001년MBC 드라마홍국영?
2007년~2008년MBC 드라마이산이다윗
2007년뮤지컬정조대왕박종한


참조

[1] 서적 Koreana - Autumn 2014 (English) https://books.google[...] 한국국제교류재단 2014-11-19
[2] 서적 King Chongjo, an enlightened despot in early modern Korea 2019
[3] 문서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 of King Sunjo, Vol 2
[4] 웹사이트 Kyujanggak Institute of Korean Studies http://kyujanggak.sn[...]
[5] 문서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 of King Sunjo, Vol.20
[6] 문서 大典会通
[7] 문서 장조의 아들로는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8] 문서 순회세자에게 주어진 집으로 순회세자 사후 왕비 소유였던 집
[9] 문서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5월 15일에 이미 숭헌대부의 직책에 있었는데 심상운이 은언군, 은전군의 직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0] 문서 순조실록 3권, 1801년(순조 1년, 청 가경 6년) 5월 28일 계묘 4번째기사, "황승원이 은원군과 그 아들 철득이 달아나다 잡힌 일을 장계하다"
[11] 문서 당시 조선의 국교는 유교 성리학이었다.
[12] 웹사이트 남응중역모사건 nul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3] 문서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 12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
[14] 웹사이트 민진용의옥 null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5] 뉴스 墳墓堀移의 紛擾 매일신보 1914-04-01
[16] 문서 풍계군의 서자였으나 상계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7] 문서 상계군 이담의 첩, 궁인 출신
[18] 문서 은언군 생전에 태어난 손자였으나 일찍 요절했다.
[19] 문서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년 - 1778년)에게 출계.
[20] 문서 풍계군의 서자로 상계군의 사후 양자로 입양.
[21] 문서 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 청 가경(嘉慶) 22년) 11월 27일(병인) 1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강화 죄인 성득이 물고되었으니, 금부 도사를 보내 검험하라고 하다
[22] 문서 1801년 5월, 초 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 도주하려다 실패했다.
[23] 문서 전계대원군 광의 본처
[24] 문서 전계대원군 광의 첩
[25] 문서 전계대원군 광의 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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