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양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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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위는 북위 출신으로, 후경의 난 당시 후경을 보좌하며 책략가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호경에게 발탁되었으며, 후경의 난 초기에는 소연과 협상하여 식량을 확보하는 등 활약했다. 후경이 황제가 된 후에는 상서좌복야를 지냈으나, 간문제 폐위 및 살해에 관여했다. 이후 왕승변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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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양나라) | |
---|---|
인물 정보 | |
이름 | 왕위 |
한자 표기 | 王偉 |
생몰년도 | 415년 ~ 453년 |
시대 | 남북조시대 |
국가 | 유송 (남조) |
출신지 | 태원 진양 (太原晉陽) |
관직 및 경력 | |
주요 관직 | 비서승 (秘書丞) 중서통사사인 (中書通事舍人) 저작랑 (著作郎) 태자세마 (太子洗馬) 남팽성태수 (南彭城太守) |
최종 관직 | 태자중서자 (太子中庶子) |
가문 | |
조부 | 왕준 (王遵) |
아버지 | 왕담수 (王澹之) |
형 | 왕탄 (王誕) |
아들 | 왕승건 (王僧虔) |
평가 및 특징 | |
성격 | 용모가 아름답고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예의범절에 밝았다고 전해짐. |
특징 | 유송의 황족인 유의강 (남조)의 측근으로 활동. 문학에 능하여 사령운과 비견되기도 함. 역사서 편찬에 참여. |
사망 원인 | 유의강 (남조)이 모반 혐의로 처형될 때 함께 처형됨. |
2. 초기 생애와 배경
왕위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다. 후경 아래에서 표(表), 서(書), 격(檄) 등 모든 문서를 작성했다. 태청 원년(547년), 후경이 남조 양에 항복한 후, 후경의 명에 따라 무제에게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4][5]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랐으며, 소연과 협상하여 식량을 확보하는 등 반란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5]
2. 1. 출신과 가문
왕위는 북위 허창 현령을 지낸 왕략의 아들로 태어났다.[5] 어려서부터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 후경이 발급하는 문서 제작을 총괄했다.[4]2. 2. 초기 활동
왕위는 북위 허창 현령 왕략의 아들로 태어났다.[5] 어려서부터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 후경 아래에서 표(表)와 서(書), 격(檄)은 모두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후경이 발급하는 문서의 제작을 총괄했으며,[4] 후경에게서 행대 좌승에 임명되었다. 동위의 고환의 병이 위중해지자, 고징이 고환의 신서를 위조하여 후경을 소환하려 했을 때, 왕위는 고징의 해로운 의도를 간파하고 후경에게 가지 말 것을 진언했다.[5]태청 원년(547년) 2월, 후경은 남조 양에 항복했다. 같은 해 8월부터 남조 양의 무제는 소연명을 도독으로 삼아 동위에 대한 북벌의 군사를 일으켰지만, 11월에 소연명은 패배하여 동위에게 사로잡혔다.[6] 12월, 왕위는 후경의 명에 따라 무제에게 사신으로 방문하여, 원씨의 자제들을 위주로 세워 후경의 북벌을 돕도록 요청했다. 무제는 이를 허락하고, 원정을 파견하여 위제를 칭하게 했다.[4][5]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왕위는 그를 따랐는데, 여기저기 약탈을 하면서 반란군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이에 왕위는 소연과 협상을 해 식량을 확보했다.
3. 후경의 난과 왕위
왕위는 어려서 재주와 학문이 있었으며, 후경 밑에서 일하며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작성했다.[5]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왕위는 그를 따랐고, 반란군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소연과 협상하여 식량을 확보하기도 했다.[4]
후경이 황제가 된 후, 왕위는 상서좌복야 지위에 올라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4][5] 그는 후경에게 칠묘(七廟)를 세울 것을 제안했으나, 후경은 자신의 조상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어 신하들의 웃음을 샀다.[4][5]
후경이 몰락한 후, 왕위는 강릉으로 압송되었다. 소역은 처음에는 그를 살려두려 했으나, 왕위가 소역을 비난하며 굴복하지 않자 팽형에 처했다. 백성들은 그의 살을 씹었고, 소역은 뒤늦게 후회하며 왕위의 묘를 세웠다.[5]
3. 1. 후경의 책사
왕위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으며, 후경 휘하에서 표(表), 서(書), 격(檄) 등 문서를 도맡아 처리했다.[5]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반란군의 책사 역할을 수행했다. 반란군이 세력을 확장하자, 왕위는 소연과 협상하여 식량을 확보하는 책략을 내놓았다.[4]후경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선포한 후, 왕위는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어 황제 곁에서 업무를 처리했다.[4][5] 왕위는 후경에게 칠묘(七廟)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칠묘에 대해 묻는 후경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지만 후경은 자신의 조상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에 신하들은 후경을 한심하게 여겨 웃음을 참지 못했고, 왕위는 어쩔 수 없이 나머지 6개의 위패에 아무 이름이나 새겨 넣었다.[4][5]
이후 후경이 몰락하고 왕위는 수도 강릉(江陵)으로 압송되었다. 소역은 처음에는 그를 살려두려 했으나, 왕위가 소역을 욕하며 굴복하지 않자 분노하여 팽형에 처했다. 백성들은 그의 살을 씹어 먹었고, 소역은 나중에 이를 후회하며 왕위의 묘를 세우게 했다.[5]
3. 2. 양나라와의 관계
왕위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으며, 후경이 일으킨 난에 가담하여 그의 주요 책략가이자 선동가 역할을 했다.[4][5] 후경이 동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위는 후경을 위해 선언문을 작성했는데, 고징은 이 선언문을 읽고 왕위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그를 등용했어야 했다고 말했다.[5]후경이 양나라에 항복한 후, 548년 왕위는 후경에게 양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5] 그는 후경에게 반란을 일으키든 아니든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지적하며, 후경이 건강을 직접 공격하도록 조언했다. 후경은 왕위의 조언에 따라 건강을 점령하고 궁궐을 포위했다.[5]
549년, 왕위는 후경과 무제, 소강 사이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후경에게 무제와 소강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추가 식량을 확보하도록 조언했고, 후경은 이를 따랐다.[5] 궁궐이 함락된 후, 왕위는 후경과 무제, 소강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다. 무제가 사망했을 때, 왕위는 후경의 명령에 따라 소강을 궁궐로 호송하여 황제(간문제)로 즉위시켰다.[4]
간문제의 통치 기간 동안, 후경이 실권을 장악하고 양나라 지방 총독들이 후경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자, 왕위는 후경이 지방 총독들을 공격하러 떠났을 때 건강에 남아 수도를 방어했다.[5] 550년, 남강군 소회리가 왕위를 살해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왕위는 이를 발견하고 소회리와 공모자들을 사형에 처했다.[5]
왕위는 후경에게 간문제를 제거하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간문제의 딸인 려양공주와의 갈등 때문이었다.[5] 551년, 왕위는 후경에게 간문제를 폐위하고 소동을 옹립하도록 권했으며, 같은 해 간문제를 독살했다.[4][5][7]
후경이 황제에 즉위한 후, 왕위는 후경에게 칠묘(七廟)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경은 자신의 조상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냈고, 왕위는 어쩔 수 없이 나머지 6개의 위패에 아무 이름이나 새겨 넣었다.[4][5]
552년, 왕승변이 건강을 공격했을 때, 왕위는 후경에게 건강을 포기하지 말라고 간언했지만, 후경은 듣지 않고 도주했다. 왕위는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강릉으로 압송되었다.[4][5] 소역은 왕위를 살려두려 했으나, 왕위가 소역을 욕하는 글을 쓴 것이 밝혀져 처형되었다.[5]
3. 3. 건강 점령
태청 3년(549년) 3월, 건강이 함락되자 왕위는 후경의 명을 받아 무덕전을 지켰다. 왕위가 입조하여 무제를 알현하자, 무제에게 후경을 부르라고 요청했다. 이로써 무제와 후경의 대면이 실현되었다.[4][5]호경의 난 당시, 후경은 왕위의 계책에 따라 임약을 성 북쪽에 파견하여 강화 교섭을 하게 했다. 무제가 강화 조약을 받아들여 왕위가 건강에 입성하여 맹약을 맺었으나,[4][5] 후경은 건강의 포위를 계속했고, 강화 조약은 파기되었다.
왕위는 후경에게 남조 양의 수도 건강으로 즉시 진군할 것을 진언했고, 후경은 왕위가 세운 전략을 따랐다.[5] 또한 주이나 서린과 같은 간신들을 제거하는 것을 대의 명분으로 삼도록 권했다.[5]
4. 후경 정권에서의 활동
왕위는 후경 정권에서 문서를 담당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소연과 협상하여 식량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후경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한 후, 왕위는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어[4][5] 황제 곁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왕위는 후경에게 유교 전통에 따라 조상 숭배를 위한 사당인 칠묘(七廟)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경은 자신의 조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왕위는 임의로 6개의 위패에 이름을 새겨 넣어야 했다.[4][5] 이 과정에서 후경의 무지함이 드러나 신하들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후 후경이 몰락하고 왕위는 수도 강릉(江陵)으로 압송되었는데, 소역은 처음에는 그를 살려두려 했으나, 왕위가 소역을 욕하며 굴복하지 않자 그를 팽형(烹刑)에 처했다. 백성들은 왕위의 살을 씹어 먹었고, 소역은 나중에 이를 후회하여 왕위의 묘를 세우게 했다.
4. 1. 권력 장악
왕위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으며, 후경이 일으킨 난에 가담하여 반란군의 주요 전략가 역할을 수행했다. 후경 휘하에서 표(表), 서(書), 격(檄) 등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도맡았으며, 후경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는 그의 책사로서 활약했다.[4][5]태청 2년(548년), 후경이 남조 양에 대한 반란(후경의 난)을 일으키자, 왕위는 후경에게 수도 건강으로 즉시 진군할 것을 제안했고, 후경은 이를 따랐다.[5] 또한 주이나 서린과 같은 간신들을 제거하는 것을 반란의 명분으로 삼도록 했다.[5]
태청 3년(549년) 3월, 건강이 함락된 후, 왕위는 후경의 명을 받아 무덕전을 지켰다.[4][5] 이후 후경이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자, 왕위는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어 황제 곁에서 업무를 처리했다.[4][5]
왕위는 후경에게 유교 전통에 따라 조상 숭배를 위한 사당인 칠묘(七廟)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경은 자신의 조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왕위는 임의로 6개의 위패에 이름을 새겨 넣어야 했다.[4][5]
대보 2년 (551년) 8월, 왕위는 후경에게 간문제를 폐위하고 예장왕 소동을 옹립할 것을 권했다.[4][5] 같은 해 10월, 왕위는 간문제에게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뒤, 흙을 채운 주머니(토낭)를 쌓아 압사시켰다.[7]
후경이 몰락한 후, 왕위는 수도 강릉(江陵)으로 압송되었다. 소역은 처음에는 그를 살려두려 했으나, 왕위가 소역을 욕하며 굴복하지 않자, 소역은 분노하여 그를 팽형(烹刑)에 처했다. 백성들은 왕위의 살을 씹어 먹었고, 소역은 나중에 이를 후회하여 왕위의 묘를 세우게 했다.
4. 2. 고위 관직 역임
왕위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뛰어났으며, 후경 휘하에서 표(表), 서(書), 격(檄) 등 문서를 만드는 일을 도맡았다.[4] 후경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종군했다. 반란군이 늘어나자 소연과 협상하여 식량을 확보하기도 했다.후경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자, 왕위는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어[4][5] 황제 곁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왕위는 후경에게 칠묘(七廟)를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경이 칠묘에 대해 묻자, 왕위는 천자가 제사 지내는 칠대 조상의 사당이라고 설명하며 칠대 선조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후경은 할아버지 이전 조상들은 이름도 모르고, 삭주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후표(候票)가 어떻게 건강까지 와서 제사를 받겠냐며 어이없어했다. 신하들은 후경의 무식함에 웃음을 참지 못했고, 왕위는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여섯 위패에 아무 이름이나 새겨 넣었다.[4][5]
551년, 후경은 간문제를 폐위하고 소동을 옹립했다가, 얼마 후 왕위의 권고로 소동에게 선양받아 한나라를 건국했다. 왕위는 재상이 되었고, 후경에게 조상 숭배를 위한 사당을 짓도록 했다. 후경은 할아버지 이후 조상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왕위가 그들의 이름을 지어내야 했다.[4][5]
왕위는 후경의 경솔한 행동을 억제하려 했지만, 이로 인해 후경은 우울해졌다.
4. 3. 간문제 제거
후경은 왕위의 계책에 따라 간문제를 폐위시키고 소동을 옹립했다.[4][5] 551년 10월, 왕위는 간문제에게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뒤, 흙을 가득 담은 자루를 그의 몸 위에 많이 쌓아 압사시켰다.[7]5. 몰락과 최후
후경이 몰락한 후 왕위는 강릉으로 압송되었는데, 소역은 그를 살려두려 했다.[5] 그러나 왕위는 소역에게 굴복하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분노한 소역은 왕위를 팽형에 처하고 백성들이 그의 살을 씹어 먹게 했다.[2] 소역은 나중에 이를 후회하고 왕위의 묘를 세우게 했다.
왕위는 강릉으로 연행되어 옥중에서 소역에게 시를 보냈는데, 소역은 그의 재능을 아까워했다.[5] 그러나 조정 신하들은 왕위를 미워하여 소역에게 왕위가 쓴 반란 격문에 훌륭한 구절이 있다고 귀띔했다. 소역이 그 글에서 "상동일목"(상동왕은 눈이 하나밖에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이라는 구절을 보고 격노하여[5] 5월에 왕위를 강릉 시장에서 참수했다. 왕위의 혀는 기둥에 못 박혔고, 창자는 끌려 나왔지만, 그는 평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위는 산 채로 몸이 찢겨 뼈가 될 때까지 형이 집행되었다.[5]
5. 1. 후경의 패배
552년 봄, 소역의 장수 왕승변과 진패선이 건강에 도달하여 후경을 격파했다. 왕위는 후경에게 궁성을 방어하라고 조언했지만, 후경은 건강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주했다.[2] 후경이 도주한 후, 왕위는 장수 후자감(侯子鑒)과 진경(陳慶)과 함께 광릉(지금의 양저우, 장쑤)으로 가려다 따로 도주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왕위는 길을 잃고 후자감과 헤어졌다.[2] 그는 군 지휘관 황공희(黃公喜)에게 체포되어 건강으로 압송되었다.[2]왕승변은 왕위가 도망한 것을 꾸짖었고, 왕위는 "성공과 실패는 이미 하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만약 후경이 당신을 붙잡아두라는 제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 성공을 거두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왕승변은 왕위의 대답에 담긴 강인함에 감명을 받아 그를 투옥하고 소역의 지시를 기다렸다.[2]
왕위는 소역의 측근들과 소역에게 시를 써서 자신의 재능으로 그들을 감동시켜 목숨을 건질 수 있기를 바랐다. 소역은 처음에는 그를 살려두려 했지만, 왕위의 적들은 소역에게 왕위가 후경을 위해 썼던 선전물을 읽어보라고 했다. 한쪽 눈이 멀었던 소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었다.[2]
> 항우는 한 눈에 두 개의 동공이 있었지만, 결국 오강에서 패배했다. 상동왕자는 이미 한쪽 눈이 멀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그를 따르겠는가?
모욕감을 느낀 소역은 왕위를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 처형당할 때 왕위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2]
왕위는 강릉으로 연행되어 옥중에서 소역에게 시를 보냈다. 소역은 왕위의 재능을 아까워했다. 조정의 많은 신하들이 왕위를 미워했기 때문에, 왕위의 반란 격문에 훌륭한 구절이 있다고 소역에게 귀띔했다. 소역이 그 글을 보았더니, "상동일목"(상동왕은 눈이 하나밖에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한쪽 눈이 불편했던 소역은 격노하여[5] 5월에 왕위를 강릉의 시장에서 참수했다. 왕위의 혀는 기둥에 못 박혔고, 그 창자는 끌려 나왔지만, 왕위는 평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위는 산 채로 몸이 찢겨 뼈가 될 때까지 형이 집행되었다.[5]
5. 2. 체포와 처형
왕위는 후경이 몰락한 후 수도 강릉으로 압송되었는데, 본래 소역은 그를 살려두려 했다. 그러나 왕위는 소역을 욕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분노한 소역은 왕위를 팽형에 처했고 백성들이 그의 살을 씹어 먹었다.[2] 소역은 후에 이를 후회하면서 왕위의 묘를 세우게 했다.552년 봄, 소역의 장수 왕승변과 진패선이 건강에 도달하여 후경을 격파한 후, 왕위는 후경에게 잠재적인 포위에 대비하여 궁성을 방어하라고 조언했지만, 후경은 건강을 버리고 동쪽으로 도주했다. 후경이 도주한 후, 왕위는 장수 후자감(侯子鑒)과 진경(陳慶)과 함께 광릉(지금의 양저우, 장쑤)으로 가서 다른 장군인 곽원건(郭元建)과 합류하려다 따로 도주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왕위는 길을 잃고 후자감과 헤어졌다. 그는 대신 군 지휘관 황공희(黃公喜)에게 체포되어 건강으로 압송되었다. 왕승변은 그가 도망가고 황제를 위해 죽지 않은 것을 꾸짖었고, 왕위는 후경이 왕승변을 도망가도록 허락한 사건을 언급하며 "성공과 실패는 이미 하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만약 후경이 당신을 붙잡아두라는 제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 성공을 거두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왕승변은 웃으며 왕위의 대답에 담긴 강인함에 감명을 받아 그를 투옥하고 소역의 지시를 기다렸다.[2]
투옥된 동안 왕위는 소역의 측근들과 소역 자신에게 시를 써서 자신의 재능으로 그들을 감동시켜 목숨을 건질 수 있기를 바랐다. 소역은 처음에는 그를 살려두려 했지만, 왕위의 적들은 소역에게 왕위가 후경을 위해 썼던 선전물을 읽어보라고 했다. 한쪽 눈이 멀고 자신의 눈에 대해 민감했던 소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었다.
모욕감을 느낀 소역은 왕위를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처형당할 때 왕위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2] 왕위는 강릉의 시장에서 참수되었으며, 그의 혀는 기둥에 못 박혔고, 창자는 끌려 나왔지만 평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위는 산 채로 몸이 찢겨 뼈가 될 때까지 형이 집행되었다.[5]
5. 3. 처형 방식
소역은 왕위를 모욕적인 글로 인해 잔인하게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 왕위는 강릉으로 연행되어 옥중에서 상동왕 소역에게 시를 보냈으나, 소역은 왕위가 반란 격문에 쓴 "상동일목"(상동왕은 눈이 하나밖에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이라는 구절 때문에 격노했다.[5]결국 5월에 왕위는 강릉의 시장에서 처형당했는데, 이때 왕위의 혀는 기둥에 못 박혔고, 창자는 끌려 나왔지만 평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왕위는 산 채로 몸이 찢겨 뼈가 될 때까지 형이 집행되었다.[5]
참조
[1]
간행물
Zizhi Tongjian
unknown
[2]
서적
Book of Liang
[3]
서적
梁書
unknown
[4]
서적
梁書
[5]
서적
南史
[6]
서적
梁書
[7]
서적
梁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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