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슈 치카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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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슈 치카노부는 에치고국 다카다번의 가신으로, 막부 붕괴 후 쇼기타이에 들어가 우에노 전쟁에 참전했다. 하코다테 전쟁에도 참전하여 용맹함을 떨쳤으며, 다카다번으로 송환된 후 화가로 전향했다. 그는 니시키에를 제작하며, 가노파와 우키요에 화풍을 익혔으며,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미인화의 대가로 알려졌으며,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의 전환기를 묘사한 작품을 남겼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전쟁화와 역사화, 궁중 문화 등을 묘사한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820점의 니시키에 작품을 남기고 191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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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슈 치카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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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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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 수 없음) |
출생일 | 1838년 |
출생지 | 조에쓰시, 니가타현, 일본 |
사망일 | 1912년 |
국적 | 일본 |
다른 이름 | 요슈 지카노부 |
활동 | |
분야 | 회화, 판화 |
작품 | |
가족 | |
기타 |
2. 생애
요슈 치카노부는 에치고국 다카다번의 가신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하시모토 나오요시였다.[1]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후, 쇼기타이에 합류하여 우에노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에 참전하여 용맹함을 떨쳤다.[1]
쇼기타이 항복 후, 1875년(메이지 8년)에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4] 『(Kaishin Shimbun)]』에서 화가로 일하며
2. 1. 어린 시절과 군 복무
에치고국 다카다번의 가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급 번사인 하시모토 야하치로 나오히로였다. 어릴 적 가노파를 배웠으나, 후에 우키요에로 전향하여 가와가미 고쿠호(歌川国芳) 등에게 그림을 배웠다. 1865년에는 막부의 제2차 장주정벌에 종군하기도 했다.1867년 가독을 상속받았고, 막말의 혼란기에 다카다번 에도 주재 번사들이 결성한 신목대에 소속되어 1868년 우에노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시나가와 앞바다에서 탈출하여 홋카이도로 건너가 하코다테 전쟁에 참전, 에노모토 다케아키 휘하에서 관군과 싸웠으나 미야코만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다.[33][1]
전쟁 후 항복하여 도쿄로 보내져 다카다번의 감시를 받았다. 병부성으로부터 금고 50일, 다카다번으로부터 가로쿠 삭감 또는 강등, 은거 처분을 받았다.[1]
2. 2. 화가로서의 활동
1875년(메이지 8년), 치카노부는 화가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로 결심하고 도쿄로 상경했다. 그는 『개신신문(Kaishin Shimbun)』에서 화가로 일하며 니시키에를 여러 편 제작했다.[34] 젊은 시절 가노파의 작품을 공부했지만, 실제로는 우키요에에 관심을 가졌다. 게사이 에이젠의 문하생에게서 판화를 배운 후,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화숙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스스로를 요시츠루라 불렀다. 구니요시가 사망한 후에는 구니사다에게서 배웠다. 이 무렵부터 요슈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33]다른 우키요에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치카노부는 매우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부터 그가 직접 경험한 전쟁터, 여성의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당시 많은 화가들처럼 가부키 배우들을 묘사했는데, 가부키 작품의 미에(미장센)를 잘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카노부는 미인화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는데,[33] 이는 전통 의상과 서양 의상을 포함한 여성 의복의 변화, 화장법의 변화를 잘 묘사하며 아름다운 여성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치카노부의 〈시대의 거울〉(1897)에서는 덴메이 시대와 게이오 시대의 머리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35][36] 그의 작품은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의 전환기에 시대가 겪는 예술적 혼란과 격변을 잘 보여준다.[37]
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화가였지만, 더 이른 시기의 사건도 그렸다.[38] 예를 들어,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 당시의 사건을 그린 그림도 남아있다.[39]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서양 세력에 대한 여러 견해가 충돌했고, 황실과 막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40] 이러한 견해 차이는 사무라이 세력 간의 충돌로 이어졌는데, 치카노부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세이난 전쟁 역시 묘사했다.[41] 그중에는 조선에서 1882년에 벌어진 임오군란을 묘사한 것도 있어, 치카노부의 주제가 일본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치카노부의 전쟁화 중 상당수는 삼중판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청일 전쟁을 기록한 것이 대표적인데, 예를 들어 "아산에서의 승리"는 1894년 7월 29일 전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출판되었다.[42]
치카노부는 자신의 작품에 楊洲周延|요슈 치카노부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이것은 그의 作品名|작품명|sakuhinmei일본어이었다. 화가의 本名|본명|honmyō일본어은 橋本直義|하시모토 나오요시일본어였으며, 그의 사망 기사에 실렸다.[1]
그의 초기 작품 중 상당수는 楊洲齋周延|요슈사이 치카노부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서명되었다. 초기 작품 중 소수는 단순히 楊洲|요슈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서명되었다. 메이지 12년(1879년)의 삼폭 병풍 중 적어도 하나는 楊洲直義|요슈 나오요시일본어라는 이름으로 서명되어 있다.
영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에는 應需楊洲周延筆|요청에 따라 요슈 치카노부가 그렸음|motome ni ōjite Yōshū Chikanobu hitsu일본어이라고 적혀 있다.[2] "토요하라 치카노부(Toyohara Chikanobu)" 또는 "하시모토 치카노부(Hashimoto Chikanobu)"라는 이름으로 서명된 작품은 발견되지 않았다.[3]
가와가미 고쿠호, 3대 가와가미 호쿠쿠, 토요하라 고쿠슈의 문하생이었다. 요슈(楊洲), 요슈사이(楊洲斎), 이치카쿠사이(一鶴斎)라는 호를 사용했다.
유년기에는 가노파를 배운 것 같지만, 그 후 우키요에로 전향하여 게사이 에이센의 문하생(누구인지는 불명)[24]이 되었고, 가에이 5년(1852년) 15세에 고쿠호에게 그림을 배우며 호쿠(芳鶴)(2대)를 칭했다.[24](서명 작품은 미확인) 분큐 원년(1861년) 고쿠호가 죽자 3대 호쿠쿠[24]에게 사사받았고, 2대 가와가미 호쿠(歌川芳鶴), 이치카쿠사이 호쿠(一鶴斎芳鶴)라고 칭하며[25] 우키요에사가 되었다. 더욱이 호쿠쿠가 겐지 원년(1864년) 12월에 죽자, 호쿠쿠 문하의 토요하라 고쿠슈에게 전향하여[26] 주엔(周延)이라고 칭했다.[24]
메이지 10년(1877년)부터 메이지 13년(1880년)에는 우에노 기타다이몬초에 거주했고, 이후로는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다. 처음에는 무사 그림이나 「정한론지도」, 「가고시마성 격전지도」 등과 같은 세이난 전쟁 그림을 그려 명성을 얻었다. 메이지 10년대부터는 궁정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말년에 걸쳐 대판 3폭 병풍의 「황후궁 환행궁어도해도」, 「황자어강탄지도」, 「금양진원의 유」 등을 남겼다. 메이지 15년(1882년)에는 하시모토 주엔(橋本周延)으로 제1회 내국회화공진회에 출품한 작품이 표창을 받았다. 또한, 메이지 17년(1884년)의 제2회 내국회화공진회에서는 「인물」, 「풍경」이 동장을 받았다.
메이지 28년(1895년)부터 메이지 30년(1897년)에 걸쳐, 에도 사람들도 모르는 에도 성의 「오모테」와 「대오」를 3폭 병풍의 호화판 니시키에로 발행하여, 에도 성 대오의 풍속화와 메이지 개화기의 여성 풍속화 등을 그려 에도 우키요에의 부활로 큰 인기를 얻었다. 대표작으로 「진미인」 대판 36도, 「시대거울」, 「오카와 나룻배」 등 외에 「치요다의 대오」 107매, 「치요다의 오모테」 115매(3폭 병풍, 5폭 병풍, 6폭 병풍도 있음), 「온고동지화」 등 에도 시대에는 그릴 수 없었던 도쿠가와 대오와 막부의 행사를 기록한 시리즈 작품은 귀중한 작품으로 꼽히며, 특히 「치요다의 대오」는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메이지 30년의 제1회 일본회화협회 공진회에 출품하여 3등 표창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 후, 화족 및 신정부 고관의 부인과 영애들은 「외국과 동등하게 사귀려면 여성도 양복을 입어야 한다」며 공공장소에서 화려한 롱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주엔은 여성들의 이목을 끈 이 새로운 패션을 소재로 하여 니시키에를 많이 그렸다. 예로 「차리네 대곡마어유람노도」나 「왜금춘노수」, 「여관양복재봉지도」 등 궁정 귀족의 그림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주엔은 메이지 시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인화 화가가 되었다.
미인화 외에도 아동 그림, 역사화, 국주의 계보를 잇는 역자 그림, 삽화 등의 작품이 있으며, 주엔의 니시키에 작품 수는 니시키에 820점, 판본 30종[32]에 달하며, 드문 뛰어난 메이지 우키요에 화가 중에서도 굴지의 존재였다.
주엔이 생애를 통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궁정 여관, 대오 풍속을 포함한 미인 풍속이며, 시대를 반영한 뛰어난 작품군이 있었다. 문하생으로는 양제연일, 길천영화, 과전옥영, 스즈키 노부유키 등이 있었다.
3. 작품 세계
요슈 치카노부는 젊은 시절 가노파의 작품을 공부했지만, 우키요에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게사이 에이젠의 문하생으로 판화를 배우기 시작하여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구니사다에게서 배웠다.[1] 1875년, 도쿄로 가서 카이신 신문사에서 일하며 니시키에를 제작했다.[4]
그의 작품은 일본 신화부터 전쟁터, 여성 의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33] 미인화와 가부키 배우 그림, 세이난 전쟁과 임오군란 같은 역사화 및 기록화,[41] 에도 성의 모습을 담은 "치요다의 대오" 시리즈[31]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치카노부의 판화는 대부분 오반(大判) 다테에(縱繪)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43] 오반 요코에(橫繪) 형식의 작품도 일부 존재한다.[44] 삼중판, 단일 주제, 연작 작품 외에도 이중판 작품과 삼중판 이상의 다중판 작품도 제작했다.[45][46]
3. 1. 다양한 주제
요슈 치카노부는 일본 신화부터 당대에 벌어진 전쟁, 여성 의복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33]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을 그렸으며, 가부키 작품의 미에(미장센)를 잘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인화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는데,[33] 전통 의상과 서양 의상을 포함한 여성 의복 및 화장법의 변화를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대의 거울〉(1897)에서는 덴메이 시대와 게이오 시대의 헤어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35][36] 그의 작품은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의 전환기에 겪는 예술적 혼란과 격변을 잘 드러낸다.[37]메이지 시대의 예술가이지만, 더 이른 시기의 사건도 그렸다.[38]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 때의 사건을 그린 그림도 남아있다.[39] 세이난 전쟁과 사이고 다카모리를 묘사하기도 했으며,[41] 조선에서 1882년에 벌어진 임오군란을 묘사한 작품도 있어 그의 주제가 일본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일 전쟁을 기록한 삼중판 형식의 전쟁 판화도 다수 제작했는데, 예를 들어 "아산에서의 승리"는 1894년 7월 29일 전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출판되었다.[42]
3. 2. 미인화
치카노부는 미인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33] 이는 그가 전통적인 옷과 서양 옷을 포함한 여성 의복의 변화, 화장의 변화를 잘 묘사하며 아름다운 여성들을 그려낸 것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치카노부의 〈시대의 거울〉(1897)에서 덴메이 시대의 머리 스타일과 치카노부가 살았던 게이오 시대의 헤어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35][36] 그의 작품들은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근대로의 전환기에서 시대가 겪는 예술적 혼란과 격변을 잘 드러낸다.[37]美人画|Bijin-ga|미인화일본어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3. 3. 역사화와 기록화
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예술가이지만, 더 이른 시기의 사건도 그렸다.[38] 예를 들어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 때의 사건을 그린 그림도 남아있다.[39]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서양 세력에 대한 여러 견해가 서로 충돌했고, 황실과 막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서로 충돌했다.[40] 이러한 견해 차이는 사무라이 세력 간의 충돌로 이어졌는데, 치카노부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세이난 전쟁 역시 묘사했다.[41] 또한 조선에서 1882년에 벌어진 임오군란을 묘사한 것도 있어, 그의 주제가 일본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치카노부의 전쟁 그림(센소에) 대부분은 삼중판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청일 전쟁을 기록한 것이 대표적인데, 예를 들어 "아산에서의 승리"는 1894년 7월 29일 전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출판되었다.[42]
치카노부의 역사화와 기록화 예시는 다음과 같다.
근현대사(메이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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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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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키아게(에도 성)에서 쇼군이 소송을 듣는 모습

메이지 10년(1877년)부터 메이지 13년(1880년)까지 우에노 기타다이몬초에 거주했고, 이후로는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다. 처음에는 무사 그림이나 「정한론지도」, 「가고시마성 격전지도」 등과 같은 세이난 전쟁 그림을 그려 명성을 얻었다.
3. 4. 궁중 문화
메이지 10년대부터 요슈 치카노부는 궁정 그림을 많이 그렸다. 말년에는 대판 3폭 병풍의 「황후궁 환행궁어도해도」, 「황자어강탄지도」, 「금양진원의 유」 등을 남겼다.[30] 메이지 15년(1882년)에는 하시모토 주엔(橋本周延)으로 제1회 내국회화공진회에 출품한 작품이 표창을 받았다. 메이지 17년(1884년)의 제2회 내국회화공진회에서는 「인물」, 「풍경」이 동장을 받았다.메이지 28년(1895년)부터 메이지 30년(1897년)에 걸쳐, 에도 사람들도 모르는 에도 성의 「오모테」와 「대오」를 3폭 병풍의 호화판 니시키에로 발행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대표작으로 「치요다의 대오」 107매, 「치요다의 오모테」 115매(3폭 병풍, 5폭 병풍, 6폭 병풍도 있음) 등이 있으며, 에도 시대에는 그릴 수 없었던 도쿠가와 대오와 막부의 행사를 기록한 시리즈 작품은 귀중한 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치요다의 대오」는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31] 「치요다의 대오」에는 원본이 존재하는데, 나가시마 이마시로·오타 요시오의 『아사야총서 치요다조 대오 상하』(아사노 신문사, 1892년)가 그것이며, 「치요다의 대오」의 개별 니시키에에 붙여진 그림 제목과 일치한다.
메이지 유신 후, 화족 및 신정부 고관 부인과 영애들은 서양식 복장을 입게 되었는데, 치카노부는 이러한 새로운 패션을 소재로 니시키에를 많이 그렸다. 「차리네 대곡마어유람노도」, 「왜금춘노수」, 「여관양복재봉지도」 등 궁정 귀족의 그림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미인화 화가가 되었다.
3. 5. 형식
다른 우키요에 예술가들처럼, 치카노부는 매우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부터 그가 평생 동안 다녔던 전쟁터, 그리고 여성의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시기의 많은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가부키 작품의 미에(미장센)에 대한 인상을 잘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카노부는 또한 미인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었는데,[33] 이는 그가 전통적인 옷과 서양 옷을 포함한 여성 의복의 변화, 화장의 변화를 잘 묘사하며 아름다운 여성들을 그려낸 것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치카노부의 〈시대의 거울〉(1897)에서 덴메이 시대의 머리 스타일과 지카노부가 살았던 게이오 시대의 헤어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35][36] 그의 작품들은 사무라이의 시대에서 메이지 근대로의 전환기에서 시대가 겪는 예술적 혼란과 격변을 잘 드러낸다.[37]동시대 대다수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치카노부의 판화 역시 오반(大判) 다테에(縱繪) 형식으로 제작된 것이 많다.[43] 그 외에도 오반 요코에(橫繪)로 그린 작품도 몇 점 있는데, 보통 판화첩으로 만들어 휴대하기 위해 가로로 접었다.[44]
삼중판, 단일 주제, 연작 작품들을 가장 많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중판 작품도 몇 개 알려져 있다. 또한 삼중판 이상의 다중판 작품도 최소한 3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있다.[45][46]
4. 주요 작품
요슈 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우키요에 화가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다음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 鳥追阿松海上新話|도리아오이 아야쓰 해상신화|일본어 (1878년)
- 五人殲苦魔物語|오인섬 고마 이야기|일본어 (1879년)
- 艷娘毒蛇淵|염낭독사연|일본어 (1880년)
- 白菖阿繁顛末|백창아번전말|일본어 (1880년)
- 沢村田之助曙草紙|택촌전지조서초지|일본어 (1880년)
- 浪枕江の島新語|낭침강도신어|일본어 (1880년)
- 坂東彥三倭一流|판동언삼왜일류|일본어 (1880년)
- 川上行義復讐新話|천상행의복수신화|일본어 (1881년)
- 真田三代記 : 絵本|진전삼대기 : 그림책|일본어 (1882년)
- 明良双葉艸|명량쌍엽초|일본어 (1888년)
- 千代田之大奥|지대타지대오|일본어 (1895년, 저자: 楊洲周延|양주주연일본어)
그는 세이난 전쟁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궁정 그림도 많이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황후궁 환행궁어도해도」, 「황자어강탄지도」, 「금양진원의 유」 등이 있다.[31] 1882년에는 제1회 내국회화공진회에서 작품이 표창을 받았고, 1884년 제2회 내국회화공진회에서는 「인물」, 「풍경」이 동장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및 신정부 고관 부인들의 양복 차림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를 많이 그려 인기를 얻었다. 「차리네 대곡마어유람노도」, 「왜금춘노수」, 「여관양복재봉지도」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아동 그림, 역사화, 역자 그림, 삽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니시키에 작품 수는 820점, 판본은 30종에 달한다.[32]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도쿄 양고쿠바시 진경」 (1875년)
- 「도쿄 명소의 내국 권업박람회」 (1877년)
-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 「가고시마 전기」 (와세다대학도서관 소장, 1877년)
- 「가고시마 정토」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1877년)
- 「정한론의 도」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1877년)
- 「개화온천의 도」 (1880년)
-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도」 (1881년)
- 「조선변보록」 (1882년)
- 「당세화의 모습」 (1882년)
- 「설월화의 내」 (1883년)
- 「회화공진회의 내 부인 재봉의 도」 (1885년)
- 「빈부속발도회」 (1885년)
- 「세계 제일 자전거 대곡마의 도」 (1886년)
- 「동금 주야경 탐조전」 (우키요에 오타 기념미술관 소장, 1886년)
- 「동금 주야경」 (야마구치현립하지미술관・우라카미기념관 소장, 1886년)
- 「만부속발도회」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87년)
- 「소학교가창의 약도」 (1887년)
- 「유럽관현악합주도」 (우키요에 오타 기념미술관 소장, 1889년)
- 「온고동의 꽃 제3편 구막부 어대례의 절 정인어능배견의 도」 (우키요에 오타 기념미술관 소장, 1889년경)
- 「에도풍속 십이개월의 내」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89년)
- 「동풍속」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90년)
- 「여례식」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90년)
- 「제국의회 어행의 도」 (박물관 메이지무라 소장, 1890년경)
- 「이십사효견립화합」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91년)
- 「왜풍속」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92년)
- -- (1893년, 대영도서관 소장)
- 「도쿠가와 시대 귀부인의 도」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94년)
- 「일본명녀독」 (야마구치현립하지미술관・우라카미기념관 소장, 1894년)
- 「시대거울 메이지 자선회」 (우키요에 오타 기념미술관 소장, 1897년)
- 「치요다의 어표」 (시즈오카현립중앙도서관 소장, 1897년)
- 「진미인」 (1897년)
- 「진미인 경대」 (야마구치현립하지미술관・우라카미기념관 소장, 1897년)
- 「오노에 키쿠고로 사화」 (1903년)
작품명 | 기법 | 형태・수량 | 크기 (세로x가로cm) | 소장처 | 제작 시기 | 서명・인장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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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정토행군도(長州征討行軍図) | 지본채색(紙本着色) | 6폭 | 개인(공익재단법인 구 고다번화친회 관리) | 니가타현 지정문화재 | |||
소목산의 진(小牧山の陣) | 금지채색(金地着色) | 에마 1면 | 139.0x196.5 | 사카키 신사(上越市) | 1876년(메이지 9년) | 서명 "양주 하시모토 나오요시 배사(楊洲橋本直義拝寫)" / "나오요시之印(直義之印)" 주문방인 | |
하시모토 야하치로상(橋本弥八郎像)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98.9x41.4 | 개인 | 1879년(메이지 12년) | 서명 "불효 직의 배사(不肖直義拝寫)" / "양주(楊洲)" 주문방인 | 나카네 한령 한시찬 "위리영공훈 일번치령예 우가 야하치로 천질직이서 반령중문근현(為吏榮功勲 一藩馳令譽 嗚呼彌八郎 天質直而恕 半嶺中聞謹顕)" |
-- | 1면 | 81.7x115.6 | 도쿄국립박물관 | ||||
--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153.9x86.6 | 도쿄국립박물관 | 1893년(메이지 20년)경 | 시카고 콜럼버스 박람회 출품 | |
--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101.7x49.0 | 도쿄국립박물관 | 1909년(메이지 42년) | 서명 "양주 주엔(楊洲周延)" / "주엔(周延)" 주문방인 | |
--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139.8x57.1 | 도쿄국립박물관 | 서명 "양주 주엔필(楊洲周延筆)" / 인장 "주엔(周延)" 백문원인 | ||
춘야왕래도(春夜往来図) | 지본채색(紙本着色) | 1폭 | 나라현립미술관 | ||||
월야왕래도(月夜往来図) | 지본채색(紙本着色) | 1폭 | 나라현립미술관 | ||||
지옥다이후(地獄太夫)도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105.0x41.0 | 죠에쓰시립역사박물관 | 서명 "양주(楊洲)" / "주엔(周延)" 주문방인 | ||
--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말림 1매) | 145.2x71.5 | 보스턴미술관 | 서명 "양주 주엔필(楊洲周延筆)" | ||
--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111.3x41.5 | 대영박물관 | 1890년대 | ||
--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114.9x44.2 | 대영박물관 | 1890년대 | ||
도쿠가와 시대 행군도(徳川時代行軍図) | 견본채색(絹本着色) | 1폭 | 105.0x41.0 | 죠에쓰시립역사박물관 | 1903년(메이지 36년) | 서명 "메이지 36년 세자 계묘(癸卯) 단오 양주(明治三十六年歳次癸卯端午楊洲)" / "직의之印(直義之印)" 백문방인・"주엔(周延)" 주문방인 | |
유가마(流鏑馬)도 | 금지채색(金地着色) | 이곡일척(二曲一隻) | 167.5x167.0 | 죠에쓰시립역사박물관 | 1910년(메이지 43년) | 서명 "칠십삼옹 양주(七十三翁楊洲)" / "직의之印(直義之印)" 주문방인 |
5. 평가 및 영향
요슈 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8] 그의 작품 소재는 이전 시대 역사에서 따온 경우도 있었다.[9] 그는 일본 신화부터 당대 전쟁터 묘사, 여성 유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다른 많은 우키요에 화가들처럼 가부키 배우들을 묘사했으며, 특히 가부키 공연의 미에(mise en scène)를 인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치카노부는 비징가(미인 그림)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며,[1] 전통 의상과 서양 의상을 포함한 여성 유행의 변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에 따른 헤어스타일과 화장법의 변화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시대의 거울(Mirror of Ages)』(1897)에서는 덴메이 시대(1781-1789)[5]와 게이오 시대(1865-1867)[6]의 헤어스타일을 구분하여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 근대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예술적 혼란을 잘 보여준다.[7]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의 자발적 고립을 끝내는 것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사무라이 세력 간의 충돌과 황실, 도쿠가와 막부 간의 관계 변화가 있었다.[10] 치카노부는 사쓰마의 난과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다양한 장면을 묘사했다.[11] 그의 판화 중 일부는 국내 불안 시대와 임오군란(1882)과 같은 시사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치카노부의 전쟁 그림(센소에)은 대부분 삼폭 병풍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들은 청일 전쟁(1894-1895)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산 전투 승리"[12]는 1894년 7월 29일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치카노부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요사이 노부카즈와 요도 교쿠에이가 있다.[1]
6. 갤러리
6. 1. 전쟁화
요슈 치카노부는 우키요에 예술가로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그중에는 전쟁화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과 같은 이른 시기의 사건뿐만 아니라, 세이난 전쟁과 같이 사무라이 세력 간의 충돌도 묘사했다.[39][41] 경응 원년(1865년)에는 막부의 제2차 장주정벌에 종군하여 행군하는 藩士(반시)들의 모습을 「장주정벌행군도」에 그리기도 했다.치카노부의 전쟁화 중 상당수는 삼중판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청일 전쟁을 기록한 작품들이 많은데, 예를 들어 "아산에서의 승리"는 1894년 7월 29일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42]
6. 1. 1. 보신 전쟁
치카노부는 에치고국 다카다번의 사카키바라씨의 가신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붕괴 이후, 쇼기타이에 들어가 우에노 전쟁에 참전했다.[33]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에 가담하여 하코다테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오토리 게이스케의 지휘하에 복무하였고,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33] 쇼기타이가 항복한 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다카다번으로 송환되었다.[33]막말의 혼란기에 다카다번 에도 주재 藩士(반시)들이 결성한 신목대에 소속되어 경응 4년 5월에는 우에노 장의대에 가담했다. 8월 아사히마루를 타고 시나가와 앞바다에서 탈출하여 곧바로 초경마루로 갈아타고 11월 홋카이도의 후쿠시마에 상륙, 육로로 하코다테를 향해 다음 해 1월 5일 카메타무라에 도착했다. 에노모토 타케아키 휘하 타키가와 구스이 지휘 제1대대 4번 소대에서 관군과 싸웠지만, 3월의 미야코만 해전에서 회천마루를 타고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6. 1. 2. 세이난 전쟁
요슈 치카노부는 세이난 전쟁 (1877년)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6. 1. 3. 임오군란
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예술가이지만, 더 이른 시기의 사건도 그렸다.[38] 그중에는 조선에서 1882년에 벌어진 임오군란을 묘사한 것도 있어 치카노부의 주제가 일본 국내에 한정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임오군란을 다룬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6. 1. 4. 청일 전쟁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진 청일 전쟁을 묘사한 전쟁화(戦争絵, sensō-e)를 제작했다.[33][1] 이 전쟁의 장면을 묘사한 예시는 다음과 같다.6. 1. 5. 러일 전쟁
요슈 치카노부는 러일 전쟁 (1904년 ~ 1905년)을 묘사한 전쟁화(戦争絵, 센소에)를 제작했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6. 2. 무사 그림
많은 우키요에 화가들처럼 치카노부는 다양한 소재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 신화부터 당대의 전쟁터 묘사, 여성 유행까지 다양했다. 당시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그 또한 가부키 배우들을 역할에 맞춰 묘사했으며, 가부키 공연의 미에(mise en scène)에 대한 인상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 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8] 그의 소재는 때때로 이전의 역사 시대에서 따온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작품은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 당시의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9] 초기 메이지 시대는 일본의 자발적 고립을 끝내는 것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서로 다투는 사무라이 세력 간의 충돌과 황실과 도쿠가와 막부 간의 변화하는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10] 그는 사쓰마의 난과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다양한 인상과 장면을 창조했다.[11] 이러한 판화 중 일부는 국내 불안 시대와 임오군란(1882년)과 같은 시사적인 주제를 묘사하고 있다.
치카노부의 전쟁 그림(sensō-e) 대부분은 삼폭 병풍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들은 1894년 청일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산 전투 승리"[12]는 1894년 7월 29일 전투의 당시 기록과 함께 출판되었다.
무사 그림(武者絵, Musha-e)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6. 3. 미인화
치카노부는 미인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33] 그는 전통적인 옷과 서양 옷을 포함한 여성 의복의 변화, 화장의 변화를 잘 묘사하며 아름다운 여성들을 그려냈다. 예를 들어, 치카노부의 〈시대의 거울〉(1897)에서 덴메이 시대의 머리 스타일과 치카노부가 살았던 게이오 시대의 헤어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35][36] 그의 작품들은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근대로의 전환기에서 시대가 겪는 예술적 혼란과 격변을 잘 드러낸다.[7]美人画|Bijin-ga|미인화일본어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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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 역사화
치카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예술가이지만, 더 이른 시기의 사건도 그렸다.[38] 대표적으로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 때의 사건을 그린 그림도 남아있다.[39]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서양 세력에 대해 여러 견해가 서로 충돌했고, 황실과 막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서로 충돌했다.[40] 이러한 견해 차이는 사무라이 세력의 충돌로 이어졌는데, 치카노부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세이난 전쟁 역시 묘사했다.[41] 조선에서 1882년에 벌어진 임오군란을 묘사한 것도 있어 치카노부의 주제가 일본 국내에 한정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치카노부의 전쟁 판화들 중 다수는 삼중판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청일 전쟁을 기록한 것이 대표적인데, 예를 들어 "아산에서의 승리"는 1894년 7월 29일 전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출판되었다.[42]
치카노부의 역사화 예시는 다음과 같다.
'''근현대사(메이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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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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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 명소 그림
많은 우키요에 화가들처럼 치카노부는 다양한 소재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 신화부터 당대의 전쟁터 묘사, 여성 유행까지 다양했다. 名所絵|메이쇼에일본어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6. 6. 초상화
肖像画|Shōzō-ga일본어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6. 7. 문명개화 그림
치카노부는 다양한 소재에 주목했는데, 그의 작품은 일본 신화부터 당대의 전쟁터 묘사, 여성 유행까지 다양했다. 당시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그 또한 가부키 배우들을 역할에 맞춰 묘사했으며, 가부키 공연의 미에(mise en scène프랑스어)에 대한 인상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치카노부는 비징가(美人画|비징가일본어)[1](미인 그림)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며, 전통 의상과 서양 의상을 포함한 여성 유행의 변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에 따른 헤어스타일과 화장법의 변화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치카노부의 『시대의 거울(Mirror of Ages)』(1897)에 있는 그림에서는 덴메이 시대(1781-1789)[5]의 헤어스타일이 게이오 시대(1865-1867)[6]의 헤어스타일과 구분된다. 그의 작품들은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로의 이행, "후루메카시이/이마메카시이(古めかしい/今めかしい|후루메카시이/이마메카시이일본어)" 개념을 보여주는 메이지 시대의 예술적 혼란을 포착한다.[7]enlightenment pictures|ja|文明開化絵|분메이 카이카에영어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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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 가부키 그림
다른 우키요에 예술가들처럼, 치카노부는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가부키 작품의 미에(미장센)에 대한 인상을 잘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役者絵|역자에일본어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6. 9. 추모 그림
死絵|시니에일본어의 예는 다음과 같다.- --
이와이 한시로 8세
6. 10. 여성 풍속
치카노부는 미인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33] 이는 그가 전통적인 옷과 서양 옷을 포함한 여성 의복의 변화, 화장의 변화를 잘 묘사하며 아름다운 여성들을 그려낸 것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치카노부의 〈시대의 거울〉(1897)에서 덴메이 시대의 머리 스타일과 지카노부가 살았던 게이오 시대의 헤어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35][36] 그의 작품들은 사무라이의 시대에서 메이지 근대로의 전환기에서 시대가 겪는 예술적 혼란과 격변을 잘 드러낸다.[37]女禮式|joreishiki일본어의 예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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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1. 메이지 천황 관련 그림
메이지 천황 및 그 가족을 니시키에로 그리는 것은 메이지 15년(1882년)에 금지되었다.[31] 메이지 10년대(1877년 ~ 1880년)부터 치카노부는 궁정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말년에는 대판 3폭 병풍의 「황후궁 환행궁어도해도」, 「황자어강탄지도」, 「금양진원의 유」 등을 남겼다.[31]다음은 메이지 천황의 휴식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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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 대비 그림
요슈 치카노부는 대조 인화(대조 그림)를 그리기도 했다.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제목 |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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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테 쥬니시 시리즈 소의 상징 | -- |
겐토우 사진 구라베 시리즈 간진초 | -- |
이마요 도쿄 핫케이 시리즈 아사쿠사 저녁 종 | -- |
니쥬시 코우 미타테 에 아와세 시리즈 사슴 젖짜는 사람 | -- |
사노의 눈, 사이묘지, 사노 겐자에몬과 그의 아내 시로타에 시리즈 세츠게카 눈, 달, 꽃 | -- |
6. 13. 게이샤 미화
요슈 치카노부는 비징가(미인 그림)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며,[1] 전통 의상과 서양 의상을 포함한 여성 유행의 변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에 따른 헤어스타일과 화장법의 변화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치카노부의 『시대의 거울(Mirror of Ages)』(1897)에 있는 그림에서는 덴메이 시대(1781-1789)[5]의 헤어스타일이 게이오 시대(1865-1867)[6]의 헤어스타일과 구분된다. 그의 작품들은 사무라이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의 근대화로의 이행, "후루메카시이/이마메카시이(furumekashii/imamekashii)" 개념을 보여주는 메이지 시대의 예술적 혼란을 포착한다.[7]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및 신정부 고관 부인과 영애들은 "외국과 동등하게 사귀려면 여성도 양복을 입어야 한다"며 공공장소에서 화려한 롱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주엔(치카노부)은 여성들의 이목을 끈 이 새로운 패션을 소재로 하여 니시키에를 많이 그렸다. 궁정 귀족의 그림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주엔은 메이지 시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인화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문명 개화의 새로운 시대에 우키요에에 그려진 여성들은 그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은 새로운 디자인이었지만, 그 용모는 여전히 에도 미인 그대로였다.
이 장르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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